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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적, 계시적 관점으로 본 아브라함, 사라와
하갈
[창 16:7-16 주해]
Ⅰ. 서론
창세기 16장은 언약을 맺는 장면인 15장과 17장 사이에 끼인 “언약 백성이 아닌” 조상의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언약과 절대 무관(無關)하지 않다. 그저 하갈의 신앙이 좋았다, 하갈의 인내와 순종은 모범적이라는 것 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가 발생한 근본 이유는 아브람과 사래의 불신앙과 무지에서 비롯되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은 틈으로 인해 인간적인 꾀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가 없는 여종 하갈을 이용하여 "언약의 자손"을 얻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은 믿었을지 몰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믿지 못하였다.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은 그저 아브람의 씨면 되지 않는가?"하면서 자신들의 힘으로 언약을 성취하려는 죄를 지었다. 여러 주석가들은 이 부분의 주인공을 “고통 받는 하갈”이라고 보면서, 카메라 렌즈를 하갈에게서 떼지 못한다. 그러나 본인은 아브람의 죄로 인해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그와 맺은 언약을 오해하고 그 정확한 내용과 때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섣뿔리 행동했던 것으로 인해 생긴 이 문제를 해결코자 찾아오신 분, 그 중요한 실마리를 하갈이 쥐고 있었으므로 하갈을 돌려보내는 이 모든 일들을 섭리해 가시며 언약성취를 위해 사역하시는 하나님에게 초점을 두었다.
Ⅲ. 역사적 배경
우선 지리적 배경부터 살펴본다. 지금 하갈은 도망 중이었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그녀를 찾아서 만난 곳이 “술 길 샘 곁에서(7절)”였다. 고든 웬함이 연구한 결과 이 샘은 가나안의 남부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은 애굽으로 가는 길이였다. 술 길 샘 곁이라고 계시해 주신 주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이 길이 애굽으로 통하는 길중 하나라는 것이다[1]. 이것이 석의(釋義)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절에서 하갈은 애굽인으로 소개되었고, 도망 가는 방향도 애굽을 향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계시의 말씀이다.
또 하나는 “yaIro yh'l' raeB](브엘라해로이, 14절)”라는 곳에 관한 것인데, 하갈이 “브엘라해로이”라고 부른 곳은 그녀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곳으로 “가데스와 베렛사이”에 있는샘 (14) 이다. 가데스는 사해의 남단으로부터 남서부방향으로 약 100 km 지점에 위치해있고, “브엘라해로이”는 가데스에서 북서쪽으로 (지중해연안쪽으로) 약 50 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2]. 만약 이때에 아브람이 헤브론에 거주(창 13:18)하고 있었다면, 하갈이 상당히 먼 길을 (약 100 km) 가서 “브엘라해로이”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사건 발생 시기를 살펴본다. 그 목적은, 그 당시 문화적 배경을 좀 더 정확하게 짚어보고 싶어서이다. 우리는 레온 우드의 계산을 따르는데, 이유는 그가 오직 성경에 기록된 연대만을 근거로 아브라함의 역사적 시기를 계산 했기 때문이다. 그의 계산 결과BC 2166년이다[1].
올브라이트와 레온 우드 외 여러 유명한 학자들은 이 시기의 사회 풍습을 고고학적 증거로 제시해 주었다. 즉 그 시기에 고대근동 지역에는 본문 16장에 나오는 것과 거의 비슷한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불임하는 아내는 대리아내 (surrogate mother)를 남편에게 제공한다. 보통은 아내 자신의 여종을 제공한다 (창 16.1-2; 30.1-13). 또 자식이 없는 부모는 하인이나 다른 사람을 입양하여 그들을 돌보게 하고, 그들의 유산을 물려준다. 그러나 아들이 생기면, 아들이 양아들을 대치한다 (창 15:2-3).
Ⅳ. 본문의 전후 문맥
본장(16장)은 아브람 가족의 한 멤버인 여종 하갈에 관한 내용이므로, 아브람이 하나님께 선택되기 시작한 기사부터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장(章)이 바로 12장인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떠나라”는 명(命)과 함께 복(福)을 주신다. 아브람은 우선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복된 약속(언약축복)을 받았다. 13장과 14장에서 아브람은 롯 때문에 겪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은 본문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고 본다.
15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또 다시 아브람에게 (환상 중)임하여 언약을 갱신하는데, 12장에서는 자녀에 관한 약속을 크고 두리뭉실하게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지만, 여기서는 아브람이 자기 상속자를 종 엘리에셀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수정해 주시면서, 아주 구체적으로 “… 엘리에셀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 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더 추가하여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즉 한 아브라함의 씨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 수많은 자손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증시(證示)하며 살아가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아브람이 믿고 깨달은 것은 그저 가나안 땅과 같은 이 땅이 아니고, 그저 이 땅에서 살아갈 육신에 속한 자손들이 아니고, 천국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의 도성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 것을 소망하며 믿고 친척아비 집을 떠난 것이다(히11:10).
하나님께서 그 언약축복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주실 것인지를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시며 증거로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 쪼개진 제물들 사이를 지나가심으로, 아브라함을 대신하여 언약저주의 심판을 받기까지 오직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은혜로 언약의 모든 내용을 이루어주실 것을 계시해 주셨다. 원래 그 쪼개진 제물들 사이를 지나가며 피 흘려 죽기까지 순종하겠다는 맹세를 해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었는데,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언약대표가 되어 대신 그들의 자리에서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언약을 성취하시겠다는 맹세를 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예언적) 약속을 하셨는데, 바로 “(네 몸에서 날)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라는 약속이었다. 아브람은 이 특이한 예언의 말씀을 계속 심사(深思)하고, 마음 깊이 간직했을 만하다.
17장에서 하나님이 또 아브람에게 나타나신다(1절). 다름이 아니라 또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서이다. 더 구체적으로 아브람에게 계시하시기 위해서이다. 여러 가지로 많은 언약을 구체화하고 갱신하셨지만 본문과 관련되는 것만 알아보도록 한다.
17장1절에,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조금 책망의 뉘앙스(nuance)가 있는 말씀으로 계시를 시작하신다. 하나님 자신을 "yD'v' laE(엘샤다이)"로 계시하신다. 메리데스 클라인(Meredith Kline)은 그의 책에서 yD'v' laE를 해석하기를,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yD'v''가 산의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에덴의 성산(圣山) 위에 계셨던 분, 즉 세계 창조에 전능의 능력으로 참여하셨고 아브라함의 언약 비준(창15장)에 나타나신 그 영광의 하나님을 지칭할 것"이라고 했다[1].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언약하신 것을 절대로 변함이 없이 주권적으로 이뤄 나가신다는 의미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책망의 뉘앙스가 있는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다 이루어주실 것을 온전히 믿지 못했던 16장의 사건을 전제(前提)로 하는 것이다.아브람은 응당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행해야 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그의 길을 가야 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그런 신앙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16장에서 그렇게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고, 언약의 내용과 하갈의 육체만 믿었을 뿐, 언약을 친히 성취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아브람의 불신앙까지 고쳐주셔서 친히 모든 것을 이뤄 가실 것이다.
17:15절부터 더욱 선명하게 말씀으로 아브람의 잘못을 고쳐주시는 부분이다. 15장에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게 하겠다 하셨는데, 17:15부터는 더 구체적으로 “내가 (사라)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또 19절에 보면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고 하셨다. 아브람은 일전에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잘 못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이스마엘을 상속자(언약의 자손)로 알 고 있었는데[1](17:19),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언약을 더욱 구체화해서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17장에서 아브람이 잘 못 알고 있는 내용들과 오해들을 수정해 주신다.
이렇게 언약이 주어지는 15장과 17장 사이에 끼여있는 이야기가 바로 16장이다. 그 사이에 많은 세월이 흘렀고(10년),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 특별히 언약과 관계되는 사건으로서, 인간 아브람가족(특별히 사래로 인해)의 신국적(神国的) 계시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으로 인해 벌어진 아주 큰 비극적인 사건을 기록함과 동시에 본문부분인 그 비극적인 문제점을 하갈의 믿음을 통해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혜와 지혜와 능력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아브람의 자손들-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실 "아브람의 씨"-그리스도가 여호와의 사자로 현현(显现)하여 사역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후 고침을 받은 아브람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것을 미리 어렴풋이 보여주시는 부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 그 아브람의 씨-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도록 하시는 것이고, 아브람이 바라고 바라던 천성(天城)인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시는 것이다.
Ⅵ. 본문 구조에 따른 해석
뱃속에 아브람의 자식을 임신한 하갈은 술 길로 도망을 치고 있다. 하갈이 임신한지 몇 개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출산이 임박한 시기는 아닐 것이다. 왜냐면, 이 도망치는 길은 광야인데다가 그가 도착한 샘까지의 거리는 그가 살던 아브람의 집에서 적어도 50km-100km떨어진 거리 일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배경부분).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가려는가? 어디 갈지 모르고 방황을 하다가 샘에 도착했는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애굽 사람이고(16장1절), 고고학적 증거에 근거하여 술 길이 애굽으로 통하던 길이었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자기 고향 애굽으로 가고자 했을 것이다(웬함). 사래의 끝없어 보이는 학대 속에서 하갈은 결국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다(6절).
그런데, 아브람은 왜 하갈을 뒤쫓아 찾지 않았을까? 하갈은 아브람이 그토록 바라던 후손을 임신한 여인이 아닌가? 지금 하갈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손도 잃어버렸는데, 우리는 아브람이 그저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아브람은 왜 하갈을 뒤쫓아 찾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
6절에서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라고 말할 때, 아브람의 말은 지혜로웠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가정의 흩어진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했다. 비록 하갈이 귀하고 소중한 자식을 잉태했지만, 이 모든 기회를 제공하며 자신을 희생한 아내 사래를 원래 위치에 올려놓고 하갈은 자기의 원래 종의 위치로 돌려 놓는 것이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라고 옳게 판단하였다.
아브람은 하갈이 도망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도망간 다음에라도 뒤쫓아 찾아(ax;m;)나선다면 능히 찾을 수 있었다. 아브람에게는 그런 능력과 인력(人力)이 충분히 있었다. 그에게는 병사 318명이 있었고(창14: 14), 그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다 구비되었다. 그러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임신한 여인을 뒤쫓아 수색하여 찾아올 병사나 다른 종이 있었을 것인데, 아브람은 뒤쫓아 찾지 않았다. (롯을 구한 사건을 보라[1]). 그는 롯이 적군들에게 잡혀갔을 때, 롯을 찾아 나섰고, 롯을 되찾아 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니 한 임신한 여인이 50-100Km가는 동안 능히 찾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브람이 하갈을 (어떤 이유 때문에)찾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는다. 아브람 마음속의 어떤 부족하고 연약한 생각 때문에 아브람은 하갈을 찾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7절의 계시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여호와의 사자가 임신한 하갈을 찾아(ax;m;)가야만 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 사라, 하갈에게 찾아가셔서 그들 한 가족을 고쳐주셔야 했다.
여기서 ax;m;는 창세기 2:20절에서 나타나는 단어와 동일한 의미이다. 창2:20절에서, 아담은 많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면서 자신과 같은 배필을 찾아보았지만, 결국 자신의 배필은 (ax;m;)찾을 수가 없었다. 창16장에서 아브람은 하갈을 ax;m;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을 ax;m; 찾으셨다. 그러니까 이 단어의 뜻은 "결국 찾던 것을 발견하다"는 뜻이다[2].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표현을 하셨는가? (창3: 9),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이 어디 있는지 모르셔서 ax;m; 찾아 나섰는가? 그렇지 않고, 이런 표현은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의미 있는 행동을 하셨다는 표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하실 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아내 사라를 통해 태어난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말씀은 없었다. 그 말씀은 17장에 가서 나온다. 물론 17 장까지 참고해 보면, 하나님의 뜻은 당연히 아브람과 사래 두 사람(부부)을 통하여 태어난 자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아브람은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여기에는 그 당시 고대근동문화가 작용했을 수 있다. 즉 대리모는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비록 사래의 “육체(혹은 정욕)의 계획”(갈4: 23)이었지만, 아브람은 순순히 순종했다. 원어[m'v;는 사전을 보면 "말을 들어서 순종하다"는 뜻이다(2절). 아브람은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언약을 100% 믿음으로 의인으로 인정 받았음을 창세기 저자는 15장에 밝혔다. 그러니까언약을 믿는 믿음과 전혀 상관없이 땅의 기업을 이어 받을 후손이 필요하여 사라의 계획에 순순히 순종했을까?
그렇게 생각 할 수 없다. 아브람은 나이가 들도록 자녀가 생기지 않으니까 엘리에셀을 자기의 후사로 벌써 생각하고 있었다. 사라가 할 수 있는 생각을 아브람도 똑같이 할 수 있지만, 자신이 다른 후처(後妻)를 통하여 자녀를 가지는 것은 지금까지 고향 친척 아비 집을 함께 떠나 더 나은 본향을 바라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을 소망하며 함께 순례의 길을 떠난 사래에게 못할 노릇이라고 생각하여 차라리 자식을 포기하고 대신 엘리에셀을 후사로 세워놓으려고 계획 하였다(15:1-2).
그러나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은,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라는 말씀이었다. 아브람은 이 계시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창세기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횃불언약을 맺으시면서 하나님께서 쪼개진 제물들 사이를 지나가심으로, 아브라함을 대신하여 언약저주의 심판을 받기까지 오직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은혜로 언약의 모든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을 알려주셨다. 이것은 은혜언약이었다. 즉 아브람이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아브람의 지혜나 생각이나 인간적인 공로가 합쳐져서 얻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16장이 보여주는 것은 아브람이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자신의 인간적인 요소를 보태야 언약이 성취 되는 것으로 그릇되게 생각한 아브람 가족사(事)이다.
아브람은 15장까지에서 언약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 언약의 내용은 믿었지만, 그것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17:1). 자손을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자기의 노력도 보태야 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사래의 육신의 계획에 순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갈이 임신하게 되자 그 뱃속 아이가 자기 자손이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녀가 그런 방법으로 과연 생긴 줄로 오해했다(창17:18). 그 오해를 한층 더 “옳다”고 확신하게 만든 말씀이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창15:13)”라는 것일 텐데, 하갈이 애굽으로 도망가는지 알았지만 아브람은 하갈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하갈의 도주가 성공 하여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갈이 낳은 내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저 하갈의 도주를 방관(傍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아직 이 땅에 오시지 않은 예수님)은 방관하지 않으시고 그녀를 찾아가서 만나셨다ax;m; (7절).
&a;l]m' hwhy 여호와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곧 여호와의 사자가 바로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시기 전의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신 것을 우리는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여호와의 사자를 하갈은 하나님으로 깨닫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13절).
8절에서,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고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부른 것은 하갈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켜주시는 것이다. 하갈도 이 사실을 알지만, 문제는 무엇인가? 대가족(사회) 질서를 파괴하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갈은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는 질문에 하갈은 답할 수 없었다. 다만 "도망한다"는 답 밖에 할 수 없었다. 원어jr'B;는 칼 분사 형이 쓰였는데, 이것은 문맥에서 현재 진행형의 역할을 한다. 즉 도망치고 있는 중이라는 말인데, 다시 말해서 방황한다는 뜻이고 애굽으로 향했지만 어디로 갈 지는 모르고 그저 학대하는 사래를 피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뜻이다.
9절,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우선 질서를 바로 잡아준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방황하는 하갈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갈에게 질서회복을 시켜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서 복종할 것을 명령한다. 아마도 아브람에게서 평소에 들었던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믿음으로 하갈은 자기에게 명령하는 자(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여주인에게 불복종하고 배신하고 범죄한 여종의 상태지만, 자기에게 다정하면서도 엄위하게 다가온 상담자(여호와의 사자)에게는 아주 고분고분하고 정직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갈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해서 그녀를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하갈의 씨는 인간 왕국을 건설할 자로 복을 받은 것이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언약의 씨, 아브라함의 씨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10절에서 내려 주시는 복은 하갈도 아브람처럼 뱃속 아이를 언약의 자녀로 잘 못 생각한 것을 고쳐주시는 계시의 말씀이 된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가 그녀에게 약속하는 “복”은 그녀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복을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그녀가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도 고쳐주신다), 하나님의 백성인 아브람과 사래의 죄과(罪过)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유없는 여인을 이용한 대가로 원래는 아브람이 응당 갚을 것을 대신 갚아주는 보상(補償)의 차원이라 볼 수 있다. 나중에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언약 백성의 가정에서 쫓겨나는 불행을
다시 겪지만, 궁극적으로는 믿음 있는 하갈도 결국 아브라함의 씨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갈이 그 복을 직접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갈이 잉태한 자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는 게 아니다.
10절의 복은 다만, 하나님의 백성 아브람과 사래가 자유 없는 하갈을 이용 했으므로 피해와 고통을 당하는 하갈에게 아브람을 대신해서 보상해 주시는 차원에서 그녀에게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렇지만 이 약속도 하갈에게는 큰 상(賞)이고, 복이고, 위로이다.
그러나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은 그 하나님의 소왕국과도 같은 아브람의 가정에서 겸손하게 자기 위치에서 계속 믿음과 겸손으로 지내지 못하고, 교만과 시기와 불신앙으로 이스마엘은 참된 언약의 자녀 이삭을 희롱하다가 쫓겨나고 말았다. 결국 들나귀 같이 된다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결국 믿음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이스마엘이 언약의 자녀 이삭을 핍박했다고 증거한다. 즉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크게 희롱하고 핍박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갈4: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Campbell은, “la[em;v]yI: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 [m'v;”이라는 이름 속에 본문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말했다[1]. 이 말은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그저 “고통을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정의(신론)를 내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신 근본(根本)이유는 언약의 주인공인 아브람과 사래의 잘잘못을 고쳐주시고, 거기에 그 가족 일원이었던 하갈의 생각도 고쳐주시고 그를 다시 순종하는 위치로 돌려주시기 위해서였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 하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와 사랑을 이 본문에서 깨닫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도 그의 언약의 신실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살아온 자유 없는 여종 하갈을 (아브람과 사래) 특별히 사래처럼 이용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갈의 고통 속에서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녀를 살려주시면서, 그녀에게 복을 주시면서(보상), 그녀의 위치(질서)를회복시키시면서(이것도 그녀에게는 더 나은 길이 없는 유일한 해결책), 아브람과의 언약이 아브람의 부족한 믿음과 무지와 오해로 인해 위태롭게 된 것을 해결 하시는, 그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하갈, 아브람, 사래) 은혜를 베푸시는 지혜로우시고 긍휼하시고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것이다.혹자는,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언약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고 말한다. 물론 사래가 여자의 연약한 마음으로 자녀를 얻지 못한 수치를 견디지 못하여, 조금이라도 빨리 자녀를 갖고 싶어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계시를 직접 받는, 그래서 계시의 말씀의 능력이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람도 그렇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아브람의 실수는 언약의 하나님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는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는데 초점이 있고, 그 부족한 믿음으로 파고 든 것이 자기의 노력도 "거기에 보태야 되겠다"는 불신앙적인 생각이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확실히 믿었지만, 그는 그 당시의 시대적인 요소와 문화적인 차원을 능가하여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바라고 바라던 성(城)을 향해(히11:10)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나 아내와 함께 많은 가축과 종들과 병사를 거느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행진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렇게 어려운 결정을 믿음으로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법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이것인데, 하갈을 취하여 아이를 낳으면 과연 하나님께 아브람과 함께 떠나게 한 그 아내 사래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당시 법은 사래의 여종 하갈이 낳은 자식은 사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아브람의 자녀로 인정이 되는 것이니까 아브람은 사래가 제기한 방법을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
아브람은 응당 “하나님이 과연 언약의 자녀를 생산하기 위해서 아내 사래가 아닌 여종 하갈을 쓰실가?”를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여쭈었어야 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방법은 무엇이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부부는 누구와 누구인가를 계시의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알았어야 했다. 하갈을 통해서 얻는 자식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받는 것인가? 아니면 하갈의 건실한 몸(육체를 통한)을 의지하는 것인가? 하갈의 육체를 의지하여 받는 아들이 과연 믿음의 씨라고 일컬어 질 것인가? 하나님께 여쭈어보려고 나아갔어야 했다. 성경이 증거하듯이 하갈을 통한 것은 육신의 자녀이지 믿음의 자녀가 아니었다. 아브람의 불신앙과 무지함으로 인해 아브람은 믿음으로 행하려 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 자신의 꾀와 힘을 보태게 됨으로 결국 믿음에서 떨어져버렸다. 따라서 아브람의 노력이 들어간 불순한 믿음으로 얻은 자식은 "들나귀" 뿐이었다.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4: 23)
9-12절: 하갈이 받은 계시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를 가지신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정확히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녀에게 계시의 말씀을 내려 주신다. 9절에서는 하갈의 도망한 그 처지가 잘 못 되었음을 수정하여 주시면서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하신다. "복종하다"는 뜻의 hn:[;와 "고통"이라는 뜻의 ynI[?는 같은 어근이다. 고든 웬함은 말하기를, "이 두 단어가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면 더욱 매정한 명령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 하갈은 그녀의 여주인의 권위뿐만 아니라 그녀의 수하에서 당하는 고통에도 순응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명령을 내리는 그 이유는 이어지는 (자손번창) 약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1]"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광야 길에서 방황하는 불쌍한 하갈에게 긍휼히 풍성하신 여호와의 사자가 제시한 방법이 고통스러운 것이 될 수가 있는가? 여호와의 사자는 지금 광야에서 "고통ynI[?"받는 하갈을 돌려보내 "복종hn:[;"하게 함으로 그 고통을 들어주시고 없애주시고, 하갈과 아브람과 사래가 영원한 언약에 대해서, 언약의 씨에 대해서 잘 못 생각하는 것을 고쳐주시고자 한다. 성경에는 하갈이 다시 돌아간 다음 아이를 낳기까지 또 다시 학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없다. 결코 고든 웬함이 쓴 것처럼 하갈이 사래에게 돌아가면 고통이 또 있을 것이지만, 하갈의 씨를 번성하게 하는 "복"으로 그 고통을 갚아 주신다는 것은 아니다.
10절부터의 예언의 말씀은 하갈에게 복을 주심과 동시에 하갈이 생각하고 있는 언약의 씨에 대한 오해를 고쳐주시는 것이고, 간접적으로 아브람과 사래의 언약의 씨에 대한 오해도 고쳐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하갈은 뱃속 아이를 아브람이 받은 언약의 씨로 생각했을 것이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분명하게 "하갈의 씨"라고 알려주신다.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이
계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 5)"는 말씀과 아주 비슷하지만, 결코 아브람의 씨가 아닌 "하갈의 씨"에 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천국 백성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다만 이 땅에 번성할 하갈의 자손들에 대한 예언일 뿐이다. 천국 백성은 오로지 아브람의 씨-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중생하는 법으로 되는 것이다. 이 하갈의 자손들이 영원한 복을 받기 위해서는 아브람의 씨-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예수님께서 주실 부활의 몸을 입고서야 가능한 일이 된다.
그러나 자유없는 하갈의 씨는 육에 속하고 땅에 속한 자들로써 이 땅에서 어떻게 "자유롭게"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힘을 쓰고 폭력을 쓸 것인지에 대해서 계시를 받았을 뿐이다. 하갈의 씨 이스마엘은 하갈의 고통을 들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하갈이 임신한 몸으로 죽지 않고 결국 이스마엘을 낳게 될 것인데, 그는 "사람!d;a; 중에 들나귀ar<P, 같이 될" 자들의 조상이 된다는 것이다. 들나귀 ar<P,는 난폭하다는 부차적인 뜻도 있다.
13-14절: 하갈의 신앙고백
하나님은 아브람과 맺으신 언약을 염두에 두셨고, 또한 광야에서 위험에 처한 하갈을 살피셔서 다시 돌아가게 함으로 그의 목숨을 구원해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고백한 하갈의 신앙을 평가절하 해서는 안 된다. “yaIro yh'l' raeB]”는 나를 돌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샘”이란 뜻인데, 이 샘의 이름이 후세까지 계속 불려진 것을 보면, 하갈의 이야기는 길이길이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15-16절: 계시에 대한 순종 및 계시가 계시임을 증거.
(신18: 21)"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비록 하갈이 선지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받은 계시의 말씀을 전달한 전달자, 메신저 역할은 했다. 여호와의 사자(메신저)가 전해준 말씀을 다시 아브람과 사라에게 메신저로서 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은 참 하나님의 말씀이셨으므로 그대로 성취가 되었다. 15절에,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아브람이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는 명령을 순종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말씀도 전해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다음 그 아들이 들나귀 같이 된다는 것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손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이룰 언약의 씨가 아니라는 것을 아브람은 금새 깨달았을 것이다. 결국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뤄주실 언약의 씨를 더 기다려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창세기 저자는 3절에서 아브람의 나이를 간접적으로 85세로 알리면서 동시에 그가 언약 자손을 10년동안 기다렸다는 것을 말하였고, 다시 16절에서는 아브람의 나이가 86세인데 아직도 언약 자손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면 아직 아브람은 자기 꾀와 힘을 완전히 버리고 즉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완전히 죽이고 온전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믿음 있는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께 순종하여 다시 되돌아감으로 인해 아브람이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아니 계속해서 깨달아 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갈이 잉태한 이 뱃속의 아이가 “이방에서 객이 될” 언약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후로 계속 이 사실에 대해서 깨달아 갔다. 99세 때까지.
마침내 하나님께서 더욱 분명히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 16-19)라고 분명하게 아내 사라를 통해 언약의 자녀가 태어나게 됨을 두 번 말씀해 주셨다.
Ⅶ. 요약 및 결론
아브람이 자기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내용)을 믿었지만, 그 믿음에는 불순물이 섞여있었다. 그 언약의 내용은 믿었지만, (횃불언약의 계시에서 보여주듯이)그것을 하나님이 친히 이뤄주실 것이라고는 믿지 못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도 아무 변화가 없으니,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만이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성취 될 줄로 오해하였다. 결국 믿음에서 떨어져 행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 기회를 타고 들어온 사래의 육체의 꾀에 아무 선택의 자유가 없었던 하갈이 이용 당하였다. 그리고 아브람의 가족에는 평안이 깨지고 불화(不和)가 엄습했고, 언약의 자손 이삭은 태어날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긴장이 맴도는 16장이다. 아브람(하갈, 사래)은 하갈의 뱃속 아이를 약속의 자녀로 오해하고, 그 뱃속 아이가 태어나서 이방에서 객이 될 것이라는 계시의 말씀을 스스로의 생각에 꿰어 맞춤으로 도망 간 하갈을 찾지도 않고 방관하고 있을 때, 긍휼이 풍성하신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찾아가셨다. 아브람과 사래는 자식을 얻으려고 자유 없는 여종 하갈을 이용했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하갈을 이용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고통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하갈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면서 조상 아브람의 허물로 인해 고통 당하는 하갈에게 보상해 주시면서, 동시에 언약의 씨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세 사람(아브람, 사래, 하갈)에게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 가족의 질서를 회복시키시고, 더 나아가 아브람의 오해를 수정해 주시고, 아브람과 사래에게 언약 자녀에 대한 믿음을 주셨다(히11:11).
여기서 우리는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찾고, 자신과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본 하갈의 신앙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지만, 하갈이 잉태한 자녀는 하갈의 씨일 뿐이다. 하갈의 씨라 함은 땅에 속한 사람, 아담과 함께 율법의 저주 아래에 놓여질 사람일 뿐이라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4장22-23절,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갈의 씨를 포함한 모든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있는 자들에게, 유일한 길은 언약의 씨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율법을 대신 이뤄주실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하갈에게 찾아가셨던 여호와의 사자가 유일한 길이시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찾아가서 하갈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람과 사라를 포함하여 모든 아브람의 가족 성원들 가운데 믿음으로 그 언약의 씨를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모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구속자, 구원자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은 가깝게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마침내 영원한 언약을 이어갈 이삭의 출생에서 볼 수 있고, 멀리는 모든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고,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모든 죄값을 치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과 말씀으로 이 땅의 교회를 다스리고 계속해서 약속의 자손들을 그분의 몸 된 교회로 불러 모으신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16장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자기 꾀를 써서 언약을 성취해 보려는 실수를 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여호와의 사자 즉 예수님께서 친히 수정해 주시고, 다시 아브람과 사래의 사상과 생각들을 고쳐주시면서 믿음을 일으켜서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총적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홀로 (그렇지만 사람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 가시기 위해 우주만물, 좀 더 좁혀서 열방을, 좀 더 좁혀서 아브람 가족 모두를,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찬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