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레, 채우고 비운다는 뜻
-청암 정일상 시인.수필가 함양신문 논설위원 (2015/12/21)
계절이 정말 빠르다.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구요. 우리 우리설날은 오늘이래요.‘란 동요가 TV에서 흘러나와 설날의 분위기를 돋운다. 까치설날은 섣달 그믐날을 말한다. 여기서 설날이라 하면 ‘설다’ ‘낯설다’는 어원이 떠오르는데 처음 가보는 곳은 낯선 곳이고,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낯선 사람이다. 따라서 설은 새해란 정신적 문화적 낯설다는 의미로 생각돼 ‘설은 날‘ 로 바뀌어 ’설날‘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예부터 까치가 울면 새 손님이 온다고 했으며, 그 의미를 새겨볼 때 설이 오기 하루 전에 까치가 울고, 다음날 새해를 맞을 수 있다는 뜻에서 ’까치설날‘이 됐다. 새(鳥)에 얽힌 속설이 우리들 삶에 파고든 것이라 하겠다.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떠오른다. 양력설과 음력설이 얼마지 않다. 양력을 세는 집에서는 양력설에 차례를 지내고, 음력을 세는 가정에서는 음력설에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에게 세배를 올린다. 이 때 설 등 명절에 지내는 제사祭祀(차례)를 절사節祀라고도 한다. 전통을 이어오는 가문家門에서는 사당祠堂이 있고, 그 집안에서는 설날, 대보름날, 한식, 단오, 중양절, 동지 때 차례를 올린다. 그러나 지금은 차례라고 하면 설에 지내는 연시제年始祭와 추석에 성묘를 겸한 제사를 말한다. 원래 차례나 제사를 모시는 조상은 4대조까지이다. 이는 오랜 우리나라 전통이고 그 윗대조상은 시제로 모시게 돼 있다.
우리가 명절에 차례 올리는 차례는 어디서 시작됐고 말의 뿌리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저 막연히 차례라 말하는데 차례엔 상당한 뜻이 스며있다. 제사는 우리말로 ‘차례’ 또는 ‘차레’이다. 한자의 차례茶禮가 아니다. 차례란 말은 한자(漢字)식 음으로 읽혀 이 말이 변질된 것이다. 茶禮는 ‘다례’로 읽어야 한다.‘다茶’는 마시는 차를 말한다.
차례의 차는 ‘꽉 메우다’ ‘채우다’. 례는 ‘비우다’라는 뜻이다. 채움과 비움, 즉 채우고 비우고를 정산하는 예법절차다. 든 것과 난 것, 채운다는 것과 비운다는 건 일종의 거래이자 왕래다. 반년이나 1년에 한번 가족들이 모여서 하는 집안결산쯤 된다고 하겠다.
차례의 말 뿌리는 ‘마차례’에서 비롯된다. 우리말 원형이 남아있는 몽골이나 옛 만주에선 하늘에 올린 천제天祭를 마차례라 했다. 마지차례, 맞차례로도 발음된다. 하늘이 아닌 조금 더 작은 규모의 제사는 그냥 ‘차례’다. 몽고에선 지금도 마차례(Machare)라 하며, 만주에선 맞뜨리(Machure)라 한다. 중국인들의 제사란 발음 ‘츠러’도 차례란 발음이 한자발음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고 있다. 마차례와 차례를 올리지 않은 일본사람들은 대신으로 모든 차례를 한데 묶어 마차례로 받아들여 마쯔리(Machuri)라 부른다.
이와 같은 어원을 가진 차례는 차(茶-Tea)를 올리는 절차를 포함한 중국 전래의 제례다. 그러나 우리나라 차례에선 차를 올리는 절차가 거의 없다. 보통의 제사 때처럼 제사상차림으로 하고 술을 올리며 절하는 게 관례이다. 사실 차례는 단순히 차만 달여 올리는 그런 제사법을 옛 선조들이 일부 실천해 오기도 했다. 이는 중국 풍속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요 고유제례가 아니었다. 지금 일부에선 차례 때에 제사상을 차리고 함께 차를 올리는 습속도 일부 있기는 하다.
설, 추석 차례는 외지에 나갔던 가족, 친족들이 모이는 집안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옛날 남쪽지방에선 설, 추석을 중요한 명절로 여겨 차례를 올리는 게 관례화됐다. 반면 북쪽에선 한식차례를 성대하게 지내고 추석 차례는 유명무실했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모두 설과 추석을 대단한 명절로 챙기고 차례도 지낸다. 제례까지 바뀌었다.
차례는 아침에 지내며, 가까운 부계친족들끼리 모여 종가에서부터 순서대로 지낸다. 절차는 가문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하는데, 축문을 읽지 않고 술을 한 잔만 올린다는 ‘무축단헌無祝單獻’을 원칙으로 하는 게 보편적이다. 상을 차릴 때의 제수는 다른 제사 때와 거의 같지만 설엔 밥 대신 떡국을 올리고, 추석엔 햅쌀로 송편을 빚어 햇과일과 함께 올린다.
제사상을 차릴 때 지켜야 할 원칙 중 홍동백서紅東白西는 살고 있는 공간을 제상 위에 나타낸 선조들의 표현이다. 자기 고장에서 생산된 것으로 상을 차리며, 자기가 사는 땅에서 나오지 않는 건 제상에 오르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설명된다. 시간적 참회, 공간에 대한 반성이란 형태에서 동쪽은 붉은 것, 서쪽은 흰 것이란 선조들의 우주관, 세계관을 나타냄이다. 이런 습속도 중국으로부터 비롯됐는데 중국에선 붉은 것은 동쪽, 흰 것은 서쪽에서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비롯됐다고 한다. 이와 같은 습속이 후대에 올수록 조율이시棗栗梨柿니, 두동미서頭東尾西니 하면서 절차가 만들어져 이는 마치 제사지낼 때의 차림 상의 권위의 도구로 변질됐다고 본다. 아무튼 어떻게 하든 자손들이 조상을 향한 지극하고 정성을 다한 음식들을 만들어 제상에 음식을 올리면 되지 않을 까 싶다. 요는 정성과 조상을 향한 경건함을 유지함이 그 첫째란 덕목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례祭禮는 조상님들에 대한 효孝 정신의 연장인 동시에 조상숭배의 일환으로 받들어 왔고 부모가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것에 대한 보답이며 갚음이다. 따라서 조상을 섬기는 행위인 제례는 신앙信仰이 아니다. 사후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일원적一元的생사관을 갖는 사상의 일종이며, 제사조직은 바로 친족조직이며 제례사상은 인간들 제집단의 도덕이며 윤리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차례란 채움과 비움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잘못된 옛것은 비우고 새것을 채워 새로운 정신으로 결속한다는 것과 결산의 의미를 가진 차례, 가족이 한데모여 끈끈한 정을 나누는 명절에도 이런 상식을 음미하며 조상을 섬김도 의의 깊은 일이라 생각된다.
마차레
오늘은 한가위의 차레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가 있답니다. 한가위는 한(크다,하나,으뜸)과 가위(가운데)가 합쳐진 말이죠. 한편 8은 수비학적으로 우주의 법칙과 정의를 나타내며, 동시에 영원한 확장의 거푸집 역할을 합니다. 때문에 한가위는 그야말로 신성한 법칙과 무한한 확장을 상징하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날이고,
또한 보름달의 은빛이 우리 자신의 깊은 속을 환하게 비추어주는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매우 상서롭고 중요한 날에 우리의 태고의 선조들은 집집마다 신성한 리츄얼(儀式)을 행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한가위 차레의 시원이지요. 많은 분들은 차레를 茶禮로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고유어인 차레를 한자(茶禮)로 음차한 것이라네요. 그렇다면 차레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차는 '채우다(받아들임)'라는 의미랍니다. 가득 차다, 찰랑찰랑, 벅차다라는 파생어에서 그 본뜻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레는 '비우다(내보냄)'라는 의미랍니다. 쓰레받기, 수레, 걸레 등의 파생어에서 그 본뜻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본래 차레는 비움과 채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참으로 하늘(대우주)의 뜻에 맞게 살아 왔는지를 하나하나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 그것이 비움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안의 참된 '나(Ra)'는 한님(한알님,하늘님,대근원)으로부터 비롯된 신성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막상 몸을 입게 되고, 세상의 물결에 휩싸이면 여러 가지 회로애락과 괴로움을 겪게 되고, 참 자신을 잊어버리기 일쑤이지요! 비움이란 그러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금 비우고 깨끗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보름달이 뜨는 날은 인간이 잠재의식 깊은 곳이 수면위로 강하게 드러나는 날이며, 때문에 자신을 비우고 정화할 수 있는, 또 자신의 깊은 잠재능력을 깨울 수 있는 최적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움의 과정 뒤에는 '채움'이 일어납니다. 다시금 자신의 참된 나를 깨닫고, "나는 하늘의 뜻을 잊지 않고 살아가리라"라는 결의와 앞으로의 목표를 다지는 작업, 그것이 채움이라고 합니다.
들어오고 나가는 것, 채우고 비우는 것은 결산의 과정이며, 또 우주의 법칙이지요. 그것을 일 년에 한두 번, 특히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정월과 우주의 법칙을 상기하는 8월에 공동체 전체가 모여 함께 행했던 것, 이것이 우리 민족의 차레의 참된 기원이라 합니다.
한국학 연구소 "바나리"의 박현 선생님에 의하면 차레라는 말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갈 때 ‘마차레’라는 古語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고대 우리말의 원형이 남아있는 몽골이나 만주에서는 임금이 하늘에 올리는 제사(天祭)를 맞차레 혹은 마지차레라 불렀다고 하네요. 그리고 하늘에 대한 제사가 아닌, 조금 더 작은 규모의 제사, 즉 지방의 기관이나 일반 가정에서 지내는 것은 그냥 ‘차레’라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마’나 ‘맞’은 진정한, 진실한, 우두머리라는 뜻이며, '지’ ‘이’는 고대어의 ‘치(chi)’로 지도자, 위라는 한국의 古語라 합니다. 이 둘을 합성한 ‘마지’ ‘맞이’는 우리말에서는 제일 위라는 뜻으로 지금도 쓰이고 있습니다.(예=>맏아들) 지금도 몽골에서는 마차레(machare), 만주에서는 맞뜨리(machure), 마차레와 차레를 구분하지 않은 일본 사람들은 모든 차레를 마차레의 발음과 비슷한 마쯔리(machuri)라 부른다고 합니다. 한편 중국인들의 제사라는 발음, ‘츠러’도 한민족의 차레라는 발음이 한자 발음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차레' 혹은 ‘마차레’의 뜻은 ‘진정한, 단 한번의, 가장 중요한 비어냄(돌아봄)과 받아들임(다짐)을 하는 것’ 즉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준비한다’는 우리의 순수한 옛말이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것이 후대로 내려오며, 불교를 받아들이고는 육체를 벗은 선조에 대한 애착과 두려움으로 변해가고, 유교를 받아들이게 되면서는 예법이라는 형식에 얽매어 그 본래의 뜻, 자신을 비우고 반성하는 정신은 온데 간데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한님(한알님, 하느님, 대근원)을 이어받은 참나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비우며, 다시금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작업은 잊어버린 채, 육체를 벗은 조상들만을 기억하면서 제물을 올리는, 그리하여 조상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것만을 바라는 지금의 그야말로 [茶禮]가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의례(Ritual)인 강강수월래에는 우리들 마음속의 악을 이겨내고 물리쳐, 동그란 완성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 겨레의 염원과 하늘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강강수월래의 놀이처럼 보름달의 은빛으로 우리의 내면을 밝게 비추어 내면의 어둠을 스스로 다스리고 보름달처럼 동그랗고 원만하며, 크고 환한 마음을 얻어내는 것, 그리하여 너와 나, 모두가 동그랗게 하나로 어우러지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태고의 위대한 빛의 의식들이 소망한 커다란 빛의 나라, 한국입니다.) 이제 한민족은 태고의 진정한 얼과 정신을 부활시킬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한님의 자손으로서 자신의 참나를 자각하고, 앞서간 조상의 스피릿의 가호와 지원에 감사하면서, 주체적인 자신의 힘으로, 어제의 나를 되돌아보고 내일의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가위를 맞이하여 이러한 차레의 참된 의미가 겨레의 마음가운데에서 되살아나기를 기원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출처] 우리 겨레의 '차레'의 참된 의미 (불멸의 황금 생명나무) |작성자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