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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대감의 양공공파에 대한 내용은 양공공파 안순근 회장의 의뢰를 받아서 작성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양공공파
양공공(良恭公 祖同 1345~1388)은 추밀공파 팔세로 양공공파 시조이다.
양공공은 고려말 우왕(禑王) 때 봉의대부(奉議大夫) 예문관(藝文館) 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양공공(良恭公)이고, 초휘(初諱 첫 번째 이름)는 전해지지 않으며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처음 들여와서 성리학을 꽃피게 한 고조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자(安子 ; 安珦, 安裕)의 학문과 덕행, 인품이 똑같이 훌륭하다 하여 우왕이 조동(祖同)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양공공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을유년(1345년)에 출생하여 우왕(禑王) 병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주서(文下注書 종칠품), 사헌지평(司憲持平 종오품), 한림(翰林 정사품)을 지내고, 지부(知部 종삼품), 대언(代言 정삼품)에 올라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藝文館副提學 정삼품)에 이르렀다.
시호 양공공(良恭公)은 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을 의미하는 데, 온화하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절검하고 겸양한 분이라는 뜻이다. 양(良)은 온량호악(溫良好樂 따뜻하고 좋아서 기쁘고 즐거움) 중심경사(中心敬事 중심이 있고 공경스럽게 일함), 공(恭)은 경사공상(敬事供上 공경스럽게 일하고 임금을 받듬) 존현귀의(尊賢貴義 어진 사람을 존경하고 의리를 귀하게 여김)의 뜻이다.
공은 서원군부인(瑞原郡夫人) 염씨(廉氏) 사이에 고성군수(高城郡守) 금강(金剛), 수의교위우군사직(修義校尉右軍司直) 인강(仁剛), 예산현감(禮山縣監) 의강(義剛), 사정(司正) 종강(從剛) 4형제와 딸을 두었으나 딸은 족보에 수록되지 않았다. 장인은 보리공신 판개성부사 예문관대제학(종이품)을 지내고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진 염국보(廉國寶)이다.
1998년 통계에 의하면 양공공(良恭公)의 후손은 남자 기준 15,000명이다. 음력 10월 4일에는 후손들이 원모재에 모여서 종회를 하고, 10월 5일에 세향을 올린다.
1993년 3월 1권 1120쪽, 2권 1198쪽, 3권 1236쪽, 4권 360쪽의 4권 1질의 양공공 파보를 냈는데 편집은 치연(致衍), 총무는 승옥(承玉)이 맡아서 농경출판사에서 발행하였다.
원모재(遠慕齋)
원모재는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老山里) 장산(獐山 노산)에 있으며 1928년에 양공공(良恭公)의 재실로 지었다.
1990년에 증건하였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이다. 2칸 마루방 좌우에 2간방과 1간방을 배치하고 앞마루를 놓고 원모재(遠慕齋) 현판을 걸고 마당 앞으로 솟을 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음력 10월 4일 회의시 사용하며 10월 5일 세향 때 비가 오면 위패를 모시고 세향을 올린다.
원모재 정문은 성인문(成仁門) 현판이 걸려 있고 원모재 동쪽 장산 자좌에 양공공 묘와 군부인 서원염씨를 합폄(合窆 합장)한 신도비가 있고 묘역 아래에 순흥안씨천(順興安氏阡) 비석이 있다.
원모재
양공공 묘역
양공공산소
묘갈문은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휘조동지묘(奉議大夫藝文舘副提學公諱祖同之墓)로, 1905년 승지 안동 김영한(安東金甯漢)이 썼다.
양공공 신도비 (順興安氏良恭公神道碑)
양공공신도비는 양공공산소 서쪽 자락에 있으며 1990년 자유중국의 공자 77대손 공덕성(孔德成) 공이 썼다.
공덕성공(1920.2.22~2008.10.28)은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에서 출생하였는데 공자(孔子)의 덕을 이어가는 고귀한 혈통이란 의미로 연성공(衍聖公)에 봉해졌다. 1949년 국민당 정권이 대륙에서 쫓겨날 때 장개석 총통은 공덕성공을 옥새보다 소중한 국가의 보물이라 하며 대만으로 데리고 갔다. 연성공은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 공자 봉사관(奉祀官) 등을 73년 동안 역임하였다. 한국에서 강연을 하였는데 주자학을 들여온 문성공 선조만 훌륭하다고 하고 이율곡이니 이퇴계 등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없었다.
사직공산소
충남 천원군 목천면 갈전리에서 노산리 장산 양공공 산소 밑으로 이장하였는데 묘비는 수의교위행우군사직부군휘인강지묘(修義校尉行右軍司直府君諱仁剛之墓)라고 쓰여 있다. 임신년(壬申 1992) 계춘(季春) 원임성균관장 밀양후인박중훈(原任成均館長 密陽後人朴重勳) 이 짓고 후손 광호(珖鎬)가 썼다. 배위는 안동김씨이다.
사과공산소
충남 천원군 목천면 갈전리에서 노산리 장산 양공공 산소 밑으로 이장하였는데 묘비는 사과순흥안공휘우효지묘(司果順興安公右孝之墓)로 쓰여 있고 비문은 없다. 배위는 연안이씨이다.
사맹공산소
양공공 산소 아래에 있으며 비는 수의부위사맹순흥안공사맹철동지묘(修義副尉司猛順興安公哲童之墓)로 쓰여 있다. 배위는 초계정씨이며, 세현, 세문 세량의 삼형제를 두었다.
진천현감공산소
세현공은 사직공의 맏증손으로 비는 통훈대부행진천현감세현지묘(通訓大夫行鎭川縣監順興安公諱世賢之墓)라고 쓰여 있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 시동리에 있으며 단기 4310년(1977) 2월 그믐 15대손 승갑(承甲)이 글을 썼다. 배위는 단천허씨로 산소는 죽전리 삼성골에 있다.
세현공은 조선 중종조(中宗朝)에 현도면 죽전리에 자리를 잡고 후세를 가르칠 때 조정에서 진천현감(종6품, 군수)을 제수하였으나 마다하고 전원에 대나무를 심고 은둔생활을 하며 살았다 하여 살던 곳을 대밭, 즉 죽전리(竹田里)라고 하게 되었다. 세현공 후손은 현도면 죽전리 삼성골과 모약골, 충남연기군 동면 합강 등에서 번성하였다. 안희정 충청남도지사도 세현공의 죽전리 모약골파 후손이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 죽전(竹田) 3리 삼성골
왼쪽 끝 마을회관 뒤가 세현공이 살던 대밭 자리이다. 삼성골(三省洞)은 세현공 후손 집성촌으로 오른쪽 붉은 건물은 삼성골파 재실이다. 증자는 하루 3번 반성하라는 교훈(三省吾身)을 내렸는데 삼성골이라는 지명은 증자의 교훈을 본받으라는 의미이다. 조선 정조대왕(正祖大王)은 일일삼성(一日三省)을 실천하기 위하여 일성록(日省錄) 이라는 일지를 매일 썼다. 그래서 삼성골 안씨 선비들은 성재(省齋 安敎益), 우성(又省 安晟鎬), 재성(再省 安承學)과 같이 호에 성(省)자를 넣어 가르침을 따랐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 죽전(竹田) 3리 모약골
학이 날개를 펴고 춤추는 형국이라고 하여 한자로는 무학동(舞鶴洞) 이라고 한다. 무학골이 변하여 모약골로 되었으며, 모약골은 세현공 후손 모약골파 집성촌으로 충청남도 안희정 지사도 후손이다.
천문학습독공산소
세량공은 사직공의 손자 철동의 3남으로 산소는 충북 청원군 현도면 죽전 3리 삼성골에 있으며 비는 천문학습독순흥안공휘세량지묘(天文學習讀順興安公諱世良之墓)로 쓰여 있고 정유년 (1957)에 13대손 교창(敎昌)이 글을 썼다. 배위는 임천조씨이다.
세량공은 우록리에 자리를 잡았는데 고려가 망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연못을 파고, 매화나무를 심고, 정자를 짓고 사슴과 벗하며 노닐었다고 하여 살던 곳을 우록리(右鹿里)라고 하게 되었고 세현공이 만든 연못과 정자가 있던 곳은 지정말(池亭村), 매화나무를 심은 곳은 매차울(梅洞)이라고 하며 뒷산에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명당자리가 있다. 세량공의 후손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 우록 1리에 세거하여 번성하였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 우록 1리
세량공이 살던 곳으로 왼쪽 끝이 매차울, 왼쪽 마을이 큰말, 오른쪽 마을이 지정말이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 우록 3리 갈골(蘆洞).
안희정지사의 당숙, 6촌, 종손 덕기 등이 살고 있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 우록 3리 갈골 입구
가운데 전봇대 길 삼거리 산 10m 위에 안희정지사 조부 승규공(承圭公) 산소가 있다.
고려 무진사화와 양공공파의 낙향
(1) 고려 최고의 세도가였던 양공공 처갓집
양공공의 장인은 서원(瑞原 坡州) 염씨 염국보이고 염국보의 부친은 염제신이고, 염국보의 여동생은 고려 공민왕의 신비다. 즉, 양공공의 처고모부가 공민왕이다.
양공공 염씨할머니의 할아버지 염제신(廉悌臣 1304(충렬왕 30)~1382(우왕 8))은 고려사 열전의 한 장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며 공민왕 때 좌정승·서북면(西北面) 도원수를 지냈고, 우왕 때에 영삼사사, 영문하부사를 지냈다.
목은 이색이 지은 고려국 충성수의동덕논도 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부원군 증시충경공 염공신도비병서 (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曲城府院君贈諡忠敬公廉公神道碑 幷序)에 따르면 당시 양공공은 지평 벼슬로 장남 금강(金剛)은 권무(權務 임시직, 9품)이고 딸이 어리다고 쓰여 있다. 차남 인강이 태어나기 전이므로 금강과 인강 사이의 딸일 터인데 족보에는 없다. 요절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양공공 장인 염국보(廉國寶 ?~1388)는 자는 민망(民望), 호는 국파(菊坡)로 동생 흥방(興邦, 호 東亭)과 정수(廷秀, 호 淸江)가 있다. 염국보는 문경공 안보(安輔) 할아버지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목은 이색은 “내가 왜 벼슬하기를 싫어하느냐 하면, 나날이 그대 만나기 어려워서라네”라고 할 정도로 염국보를 좋아하였다. 염국보는 정몽주(鄭夢周), 이색, 이숭인(李崇仁)등과 어울렸다. 공민왕 4년(1355년) 급제하여 추충보절협찬공신으로 삼중대광, 서성군에 봉해지고 낭중, 안렴사, 중정대부, 전의령,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예문관대제학을 지냈다. 염국보는 원나라식 호복을 명나라식으로 고쳐서 우리나라의 의관제도 복식사(服飾史)에 큰 획을 그었다.
양공공 염씨 할머니의 이모는 충숙왕비 숙비이다. 이같이 양공공 처갓집이나 처외갓집 모두 고려의 세도가였다.
양공공 염씨할머니의 외할아버지 안동권씨 권렴(權廉 1302~1340)은 자 사렴(士廉), 호 송재(松齋),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준(準)의 아들이다. 충선왕 때 음보(蔭補)로 함경전녹사(含慶殿錄事)가 되고, 원나라에 가서 삼사부사(三司副使)·사복정(司僕正), 선무군장군합포진변만호부만호(宣武軍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응양군대호군(鷹揚軍大護軍)이 되었다. 1327년 선군별감(選軍別監)으로 수전(授田)을 잘 하여 인심을 얻었고, 귀국하여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딸이 수비(壽妃: 忠肅王의 妃)가 되자 현복군(玄福君)에 봉해지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중대광현복군권공묘지명병서(重大匡玄福君權公墓誌銘 幷序)를 썼다.
(2) 양공공 처삼촌 염흥방
양공공 처가는 고려에서 가장 강한 세도가 염씨 집안이었으나 무인인 최영과 이성계가 권력을 잡으려고 조반을 앞세워서 ‘염흥방(양공공 처삼촌) 가노사건’을 일으켜서 문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할 때 사화를 입었다. 이것을 무진사화(戊辰死禍 1388년)라고 한다.
최영과 이성계는 무진사화로 문신들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하였는데 결국 최영도 이성계에 의하여 죽고, 염씨 가문을 멸망시키는 데 일조한 우왕도 역시 이성계에 의하여 죽었다.
이성계는 간신들이 백성들을 착취하고, 우왕도 요승 신돈이 낳아서 정통성이 없으므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울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폈다. 그래서 천하에 다시 없는 간신을 만들 필요가 있었는데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염흥방이다. 역사는 이긴 자 편이라 이성계가 고쳐 쓴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은 염흥방을 천하에 다시 없이 나쁜 간신으로 만들어서 간신열전에 수록하고 있다. 정인지 등이 고려 역사서인 고려실록을 없애버리고 이성계 입맛에 맞도록 왜곡시켜서 고려말 부패상과 혼란상만 많이 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은 이색은 침류정기(枕流亭記)에서 염흥방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염동정(廉東亭 염흥방)이 귀양 가 있을 때 천녕현(川寧縣)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정자를 짓고 쉬면서 옛 사람 손자형(孫子荊)의 수석침류(漱石枕流)라는 말을 취해서 표하고 돌아오자 나에게 기를 써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동정(東亭 염흥방)은 선왕이 알아주어 젊은 나이에 재상으로 제수되었으므로 지금의 임금께 그 은혜를 보답하려 하는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혐의되는 말은 피하지 않았고, 어려운 일을 사양하지 않았으며, 어둡고 흐린 것을 받아 들였고, 울려 흔들리고 쳐서 공격하는 것을 진정시켜서 굳센 기개는 금석(金石)을 막고 충성된 마음은 귀신을 움직였으니, 가히 움직일 수 없이 튼튼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동정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살고 수양하여, 학식이 일세에 높아서 부귀에 처해서는 부귀를 행하고 환란에 처해서는 환란을 행하니 스스로 얻음이 깊도다.”
목은 이색은 또 어은기(漁隱記)에서 “동정(東亭 염흥방)은 옛것을 좋아하며 자신을 단속하고 마음을 보존하였다. 사람을 사랑하여 재물을 거두고 백성을 해치는 짓을 보면 개돼지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오직 고기와 자라도 다 덕화에 순응하게 되는 것으로써 자임(自任)하기에 힘썼다.”라고 하였다.
권근(權近 1352~1409)은 ‘동정(東亭) 염상국(廉相國) 흥방(興邦)이 전후의 문생(門生)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다’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젊을 때 세 번이나 시험 맡더니 妙年三掌試
오늘은 또 잔치를 열었네 今日又開筵
끼리끼리 연달은 잠리의 귀인 濟濟連簪履
넘실대는 관현의 풍악소릴세 洋洋奏管絃
한때의 글 모임 성대한지라 一時文會盛
천추에 아름다운 얘기 전하리 千載美談傳
용문의 손 된 것 다행이지만 幸忝龍門客
시가 볼품 없어 부끄럽구나 裁詩愧斐然
*잠리(簪履) : 비녀와 가죽신으로, 높은 벼슬아치들의 예복(禮服) 차림.
*용문(龍門)의 손 된 것: 훌륭한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
(3) 무진사화와 양공공 후손의 낙향
우왕 때 무인인 최영과 이성계 세력은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문인 이인임(李仁任), 염흥방(廉興邦 양공공 처삼촌), 임견미(林堅味) 등을 처치하고, 재산을 몰수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서 인심을 얻으려는 모략을 세우고, 이들을 부패세력으로 몰기 위하여 배천조씨(白川趙氏)인 조반(趙胖)을 앞세웠다.
조반은 염흥방의 땅관리 종이 자기 땅을 빼앗았다고 하여 기마와 함께 100여명을 동원하여 염흥방 종의 목을 쳐서 도발하였다. 그래서 염흥방은 조반을 잡아다가 반역으로 문초하였다. 조반은 이 일을 최영에게 고하고 최영은 각본 대로 1388년 무진년 1월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 등 문인 50여명을 권력형 부정 부패의 원흉이라고 하여 처형하였다. 이것이 무진사화이다.
염흥방의 개인 비리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조선조의 초라한 건국 이유이다.
조반은 무진사화에서 병풍사건의 바람잡이와 같은 역할을 한 자인데, 이성계가 그 공으로 개국공신이라고 하여 조선조에서 승승장구하였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은 무진사화와 연관된 비리 도당으로 몰아 정몽주 등 1,000여 가구 사람을 잡아 죽였다.
최영은 양공공 할아버지의 처삼촌인 염흥방, 염흥방 동생 염정수, 염흥방 형 염국보(양공공할아버지 장인), 염흥방 매제 홍징(양공공 처고모부), 조카 지밀직 염치중(양공공 처남), 염흥방의 사위 윤전(양공공 사촌동서), 최지(양공공 사촌동서) 등을 처형하였다. 고려사열전과 고려사절요에는 이 참변으로 수없는 사람들이 죽었고 자손들까지도 빠짐없이 잡아 죽였다고 쓰여 있다. 이같이 양공공 처가는 처삼촌인 염흥방 때문에 최영, 이성계, 조반 등에 의하여 사화를 입었다.
양공공 후손들은 무진사화를 피하기 위하여 폐허가 된 송도를 떠나 남쪽으로 피신하여 충남 천원군 목천면 갈밭에 살다가 금강(金剛), 의강(義剛), 종강(從剛) 후손들은 호남, 영남 기타 각지로 흩어지고 둘째인 인강(仁剛)의 후손들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 등에 자리 잡아 살면서 양공공 산소를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에 모시고 죽전리와 우록리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사화의 영향으로 돌보지 못하다가 묘소를 실전하였는데 조선 숙종(肅宗) 갑신년(1704년)에 인강 후손으로 문의현(현도면) 우록리에 사는 12세 세량(世良)공 후손 20세 취겸(就謙)이 사냥을 하다가 묘소를 찾아냈다. 묘소에 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남인 군수공 후손은 남원으로 이거하였는데 사화 때문에 묘를 돌보지 못하다가 묘가 실전된 것으로 보인다.
양공공 비석은 조선조가 끝난 1905년에 세웠다.
현도산 정기를 받는 양공공 산소
양공공 산소는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 장산(獐山 노루산=노산)에 있다.
양공공 산소는 대청댐에 접한 현도산(賢都山) 정기를 받고 있다. 현도산은 고남산(高嵐山, 傀南山) ·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하며, 머리쪽을 구룡산, 꼬리쪽을 고남산이라고 한다. 현도산은 백두대간의 소백산맥 줄기인 속리산 천왕봉에서 이어지는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줄기에서 뻗은 팔봉지맥(八峰枝脈)이다.
보성오씨 부위공 묘도기(副尉公墓圖記)에서는 현도산의 지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모(一牟, 문의현)의 진산(鎭山)은 저자산(작두산)인데 남쪽으로 뻗어나가 양성산이 되어 읍치(邑治 문의읍내)를 만들고 북쪽으로는 서쪽 청주 남쪽 경계로 뻗어나가 봉무산으로 솟았다. 봉무산 줄기가 구부러졌다 펴졌다 하면서 남으로 내려 가 문의읍 서쪽 20리에 이르러 치솟아 창천수성(漲天水星: 높은 산맥이 물이 흐르는 듯한 모양)의 형상을 이루었으니 그것이 괴남산(槐南山, 고남산)인데 크게 끊긴 열고개에서 동남으로 구부러지다가 동으로 갈라진 가지가 높이 솟아 부곤형(負袞形, 곤룡포를 입은 형상)을 이룬 것이 현도산인데 구룡(九龍)이 부처님을 뵙는 형이라고도 하며 산 이마에 암자(현암사)가 있다.”
현도산은 현도면의 동쪽 경계에서 머리를 남으로 하고 꼬리를 북쪽으로 하여 수천만년동안 한남금북정맥의 팔봉지맥을 통하여 백두대간의 정기를 이어 받으며 웅크리고 있다가 대청호라는 물을 만나 승천하려는 용의 기상으로 머리 부분에 양공공 산소가 있고 이어진 등줄기에 양공공 후손들이 살고 있다.
현도산
오른쪽 일직선 산은 대청댐과 접한 구룡산, 왼쪽은 북쪽으로 이어진 고남산.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 밑에 보이는 마을은 우록 3리로 안희정 충청남도지사 조부 승규공 산소가 있고, 당숙, 6촌, 종손 덕기 등이 살고 있다. 우록 3리 작은 줄기(작은 고남이) 넘어 오른쪽은 우록 1리, 다시 작은 줄기 너머는 죽전 3리 삼성골이다. 양공공 산소는 가장 오른쪽 구룡산 자락 앞에 있다.
구룡산은 약30km 거리를 격하여 속리산을 좌청룡, 계룡산을 우백호, 식장산을 남주작으로 한 지세이다. 한반도 상단전에는 백두산·묘향산, 중단전에는 금강산·설악산, 하단전에는 속리산·계룡산이 있다. 구룡산은 다시 속리산과 계룡산 한 가운데 있다. 하단전은 신장방광으로 오행상 수(水)에 속하는데 중심인 구룡이 대청호라는 물을 만났으니 구룡의 기운은 이를 데 없이 강하다.
현도산은 이런 정기를 양공공 산소에 내리고 있으므로 후손들은 세계를 빛낼 인재를 배출하고 용이 웅비하듯 세상을 울릴 것이다.
구룡산에서 내려다 보는 대청댐 하류
구부러진 끝(角湖) 오른쪽에 양공공 산소가 있다.
1958년도까지 현도면 사무소는 시목리 3구 구면소거리 현재의 농협 창고자리에 있었는데 면사무소가 낡아서 새로 지어야 했는데 양공공파(부제학공파) 승갑(承甲) 선생은 현재의 현도면 사무소 자리가 명당이라고 주장하여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여 신축하게 하였는데 현도면사무소는 구룡산과 4.7km 떨어져 있는데도 동서로 완전히 일직선이 되어 풍수지리상으로 절묘한 결과를 이루었다.
승갑선생이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데 신라 김유신(金庾信)이 백소(白素)라는 도술가를 시켜 백제 의자왕이 현도산(고남산) 에 쇠말뚝을 박도록 교사(巧詐)하여 백제는 정기를 잃고 신라에게 패망하였다고 한다. 현도면 우록리와 죽전리 세거 양공공 후손들은 모두 현도산(고남산) 서쪽 자락에 살고 있는데 의자왕과 일제가 현도산(고남산)의 맥을 끊어서 후손이 흥하지 못한다고 하여 1962년 임인년(壬寅年) 3월에 흙과 돌을 쌓아 끊은 자리를 메웠는데 직후인 1964년에 안희정 지사가 탄생하는 등 훌륭한 후손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앞으로도 훌륭한 후손들이 나올 것이다.
양공공 산소 진입로는 대청댐 보조댐에 길이 나서 나아지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교통이 불편하고 비포장길이지만 다행히 산도 동쪽 200m 지점을 지나는 청주-문의-신탄진으로 4차선 도로 공사를 하고 있다. 산소 서쪽 1km 서북쪽에 임대주택단지 7,800세대 50만평이 건설될 예정이나 LH공사의 부실 때문에 불투명하다.
노산리에서 보는 현도산(구룡산)
400년여년전 노봉서원(魯峯書院) 기록에 북창정렴(北窓鄭磏)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곳 장산(獐山)에 은거하다가 죽었다고 하였다.
문정왕후와 윤원형(尹元衡)의 앞잡이로 을사사화를 일으킨 정순붕(鄭順朋)의 아들이 정렴인데, 정순붕은 아들인 정렴의 처삼촌인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양공공 산소 밑 노산리 사람)을 무고하여 죽였다. 정렴은 울면서 아버지의 패악을 말렸는데 권력에 눈이 뒤집힌 정순붕은 아들 정렴도 죽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정렴은 처가 동네인 이곳 장산(노산)에 10여년간 은거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동네에 북창네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노산리는 진주류씨(晉州柳氏) 집성촌이다.
이곳 선비들은 정렴이 여기에 살았다고 하여 400년 전에 노봉서원을 세우고 정렴을 규암 송인수(圭菴 宋麟壽)와 함께 배향하고 효종에게 청액(請額)하여 사액(賜額) 받았다.
삼도(儒彿仙)에 도통한 정렴이 양공공 산소 밑에서 살다가 예언서와 풍수지리서, 정감록을 썼다는 것은 이곳이 범상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 국립묘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박정희 대통령은 두 번째 국립묘지를 세우려고 당시 유명한 지관 상지(相地) 지창룡(池昌龍)에게 헬기까지 내 주며 명당 자리를 찾으라고 하였다. 지창룡은 노산리와 대전 유성구 갑동(현재의 제2현충원)이 가장 좋다고 추천하였다.
이같이 노산리는 천하 명당 자리이므로 양공공 후손에게는 신비한 복록이 내릴 것으로 믿는다.
양공공파 인물 충청남도지사 희정(熙正)
충청남도 지사 희정(熙正)은 순흥안씨 추밀공 후손 양공공파로 인강(仁剛)-우효(友孝)-철동(哲童)-세현(世賢)-구(龜)-윤조(允祖)-탁(琸)-의정(義貞)-신립(信立)-대운(大雲 18세모약골파조)-수도(守道)-상현(尙賢)-익수(益壽)-응문(應文)-처중(處仲)-석기(錫基)-신용(頣容)-경호(敬鎬)-승규(承圭)-동근(東根)-희정(熙正)으로 이어지는 29세이다. 희정 조부 승규공 고향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 우록 3리 갈골로 승규공은 34살에 논산으로 가서 살았다. 현도면에는 우록파, 삼성골파, 모약골파 세 파가 있는데 안희정 지사는 모약골파로, 우록 3리에 안지사의 당숙, 6촌, 7촌 조카(종손 덕기)가 살고 있다.
희정은 1964년 10월 28일 충남 논산군 연무읍 마산리에서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나 77년 구자곡 초등학교를 80년 졸업하고 연무대 중학교 졸업, 81년 남대전 고등학교 중퇴, 81년 성남고 자퇴, 82년 대입 검정 고시 합격, 83년 고려대 철학과 입학, 92년복학, 95년 2월 졸업하였다.
경력은 87년 고려대 애국학생회 사건 관련 구속, 88년 반미청년회 사건 관련 구속, 89년 김덕룡 국회의원 비서관, 90년 민주당 사무총장실(이철 전의원) 비서, 94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사무국장, 98년 자치경영연구원 사무국 국장, 2000년 노무현 경선 캠프 행정지원팀장, 2002년 노무현대통령당선자 비서실 정무팀장, 2003년 새천년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2007년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 2008년 민주당 최고위원, 민주당 논산·금산·계룡 지역위원장, 2009년 민주당 행복도시 원안추진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자 한명숙 전총리, 이해찬 전총리, 유시민 전보건복지부 장관 등과 고노무현 전대통령의 상주직을 맡았다.
2010년 6월2일 지방선거에서 869,276표 중 367,288표를 얻어 자유선진당 박상돈 후보를 물리치고 충청남도지사에 당선되었다. 안지사는 ‘사람이 권력을 만든 이유는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정치는 통합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정치 철학을 갖고 있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 우록 3리 갈골 입구 마을자랑비 위 안희정 충청남도지사 조부 승규(承圭) 공 산소
2000년도에 논산에서 이장하였는데 명당자리라 도지사를 배출하였다고 하여 우리 안씨들은 물론이고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승규공 산소와 양공공 산소를 견학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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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독립운동가 안승갑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이 하루빨리 인정되어 명예가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교수님! 가풍과 가문이 명예가 회복 되시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