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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저의 제5강에서 춘천 근대의 모습들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면서 시간이 부족하여 일주 김진우의 대나무 그림을 잠깐 소개하였을 때, 정작 그 그림을 왜 보여주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 같아 여기 자료를 추가하며 다시 글을 올려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8/18일 수정)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1883-1950년)는 강릉김씨로 영월 태생이며 금강산인(金剛山人)이란 호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1920년대에 조선 서화계에 등장하여 창칼과 같은 대나무 그림을 그림으로써 당대를 풍미하며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그간 이를 두고 해강 김규진에게서 그림을 배웠을 것이라는 것 정도만 알려져 왔으나, 지난 1991년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에서 그를 다루는 전시를 열게 됨으로써 그의 그림이 지닌 연원과 내력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고, 일주의 제자였던 옥봉(玉峰) 스님이 일주의 숨은 이야기와 자료들을 밝힘으로써 드디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간송미술관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간송 전형필의 문화재 수집과 보존을 토대로 민족미술연구소를 세워 1970년대부터 우리 미술사를 처음으로 체계화시키는 전시를 열어왔다. 그간 '진경산수화'라는 개념을 필두로 조선으로부터 조선 말기, 일제 강점기까지의 미술사를 두루 소개하였다. 그 4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로서 "항일 광복지사로의 공로나 묵죽대가로의 명성으로 보아 마땅히 세상에서 영원히 기억해야 할 분"을 가지고 전시를 한다고 소개한 것이다.(이하 <간송문화> 40집 참조)
<간송문화>에 실린 김진우의 사진과 대나무 그림 도판
의암의 제자
전시 해설논문에서 최완수는 우선 일주 선생의 가문을 하여, 소론계의 맥을 이으면서도 삼연 김창흡의 학통을 이은 모계로 영월신씨의 내력을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다소 무리한 논리를 구사하는 가운데 화서학파의 소개와 그 속에서 의암 유인석의 활동과 일주 선생의 어린 시절을 소개하였다.
을미의병 때인 1896년 "이때 일주는 제천이나 단양의 진중에서 의암을 만나뵙고 시동으로 시종하기 시작하였던 듯하다. 의암이 53세이고 일주가 12세 때의 일이다. 아마 당년 41세로 거의에 동참하였던 부친 준경(駿卿:1854-1910년)을 수행하여 갔다가 부령(父令)으로 의암을 시중들게 되었을 것이다."
어린시절 의암의 호좌의진에서 의병의 대열을 함께 하였다는 말이다.
이후 일주는 1898년 16세로 청주한씨에게 장가들고 조모와 모친의 상을 치르는 등 집안 대사가 겹쳐 의암과의 관계가 분명하게 전하지는 않으나, 최완수는 아마 당시에도 의암의 의진을 따라 요동으로 가는 등 활동을 함께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해 놓았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아직 문헌기록 상으로는 정확한 증거는 찾아지지 않았다. 이때의 중요한 기록인 <소의신편>과 같은 책에서도 일주나 그의 부친 이름은 확인되지 않았다(당시 기록으로는 의암과 같이 처음 요동으로 들어갔다가 청국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여 20여 명이 남고 200여 명이 귀국했다고 하며, 재차 요동으로 가서 팔왕동에서 의를 함께 한 사람은 의암의 연보에 73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하지만 의암이 13도의군도총재가 되는 1909년이 되면 일주는 의병 출신의 27세 청년으로서 고향에 남아 있기는 불가능한 상태였고 틀림없이 의암을 시종하며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이 부분도 의암 연보를 확인해보면 62인의 이름이 밝혀져 있으나, 장차 더 정확하게 확인을 요하는 부분이다!).
1915년 일주는 의암의 타계를 겪는 동시에 만주로 데리고 갔던 동생 진형(振衡)의 요절(25세)이라는 사건이 겹쳤다(족보 자료). 이 당시를 최완수는 이렇게 서술하였다.
"그는 이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국(復國)운동에 적극 뛰어드는 한편 서화에 몰입하는 듯 하니, 중국 도처에 산재해 있는 동지들의 규합과 중국 지식층들과의 친교를 위해서인 듯 서화여행을 빙자하여 남북중국 전토의 명승고적을 여행하기 시작한다. 이 여행에서 혁명정부의 수뇌인 손문 총통을 비롯한 많은 중국지도층 인사들과 친교를 맺고 일단 광복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귀국하는 듯하다."
이 1917년 35세 때부터 김진우의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한씨부인의 침선 솜씨로 연명하며 서화가로 일가를 이룬 일주도 묵죽으로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하며 이미 상당한 성가를 얻고 있었다고 전한다.
상해 의정원의 강원도 도의원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후 그는 상해로 건너가 제6차회기에서 강원도 대표 의정원 의원이 된다. 또한 여기서 친교를 맺은 경기도 대표인 조완구, 여운형 등과 평생지기가 된다. 여기서 그는 임시정부요원으로 강원도 지원세력 확보를 위한 조사원으로 피촉되어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던 1920년말 집안을 돌보던 백씨(伯氏)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고 1921년 1월 의원직을 사퇴하고 국내의 일을 위해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이미 노출되어 여러 가지로 대비가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6월 9일 신의주에 잠입하여 경의선 기차를 탔다가 경찰의 검문에 체포되고 만다. 이 사건은 국내 조선일보 등에 기사로 났고, 연이어 공판기사도 신문에 보도되었다. 동아일보의 공판 기사(1921.7.25)
그는 평양복심법원에 상고까지 하였지만 8월 26일 기각당하고 3년 형을 확정받는다. 이때의 판결기록이 남아 있어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은 서화가로 서화연구와 명승탐방을 위해 중국 전토를 오랫 동안 여행하였을 뿐, 독립운동에는 가담치 않았다고 딴청을 피우다 고문과 증거 제시에 의해 의정원의원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지만, 그것도 문서상으로만 그렇게 된 것이라고 잡아뗐다. 중형을 내릴 증거가 안 되니 3년밖에 안 받은 것이다. 그는 황해도 서흥감옥에서 만3년의 옥살이를 하였고 1923년 5월 17일에 출옥한다.
일주 김진우의 칼끝 같은 대나무 그림
그는 서흥감옥에서 "자리밥을 뜯어내 만든 완필(莞筆)과 고필(藁筆)로 서화연마를 쉬지 않았으며 같은 감방에 수감된 젊은이들을 교육"하였다고 전한다. 이런 불굴의 투쟁활동과 지사적인 자세는 서흥 일대에 소문이 났고, 출옥하자 그 일대의 유지들이 환영연까지 베풀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제 대표적인 '불령선인'이 된 셈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었고 탈출도 불가능하였다. 서화가로 충실히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지만 결코 항일광복운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 최완수는
"서화에 일가를 이룬 대가라는 것이 그의 운신의 폭을 무한히 넓혀줄 수 있었다. 전국의 부호와 지식층 등 유지들과의 교유가 서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이의 전시 기증을 통해 자금을 명분있게 모금해 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고, 서울부자 단우 이용문, 개성부자 김정호 등이 그 대표적인 후원자였다고 전한다. 서울 정착에 뜻을 굳히게 되면서 1925년 동아일보는 아래와 같은 신년휘호를 실어주었고 이듬해는 조선일보도 이에 가세하였다.
동아일보의 신년 휘호들(1925.1.1/ 이때 해강 김규진, 이당 김은호 등도 있었다)
그러면서 일주는 김성수, 송진우, 만해 한용운, 도산 안창호, 심산 김창숙, 몽양 여운형, 벽초 홍명희 등과 친교를 맺었다. 해방전후 좌우 이념대립에서도 일주는 좌우 모두 탐탁치 않아 하였다고 한다. 그의 친교 범위를 보아도 이를 증거해볼 수 있다.
그는 39세 때 서화에 헌신한 지 10년이라는 말을 하였으나 그에게 예술을 전수해준 스승은 딱히 없었다고 한다. 그 자신 <개자원화보>를 보고 익혀 나가며 수련하였고, 간혹 중국의 판교 정섭이나 우리나라의 자하 신위, 운미 민영익을 말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신 묵죽법은 "서흥감옥에서 항일 독립정신을 키워가면서 자득해 낸 저항적 자기표현법"이었던 것이다. 일주의 묵죽 연원을 따지며 최완수는 판교나 자하의 일격(逸格)화법에 대해 비교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의 울분은 정판교 등 소위 양주팔괴라는 매화(賣畵)집단처럼 빈곤한 천재들의 반사회적 불만도 아니었고, 서청등 같이 반역의 실패에 따른 좌절과 공포에서 비롯된 광기도 아니었으며, 팔대산인이나 석도처럼 자포자기한 망국왕족의 비탄도 아니었고, 신자하처럼 저속한 사회 현실에 대한 비분강개도 아니었다. 오직 반만년 문화전통을 이어온 문화대국으로 유일하게 정화문화의 정통성을 지켜온 조국을 강점한 양이의 주구 일본을 이 강토에서 몰아내어 복국을 이루어냄으로써 존왕양이와 위정척사의 천리를 밝혀야만 한다는 항일 적개심에서 기인된 울분이었던 것이다."
동아일보의 김진우 신년 휘호(1926.1.3)
그의 묵죽은 이제 돌연 병장기로 변해간다. 대나무 줄기는 억센 마디와 질긴 살 껍질에서 강인성을 노출하여 죽창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하며 탄력있는 댓잎은 마치 유엽전(柳葉箭) 같은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김진우, <허심수덕(虛心樹德)>(간송미술관)
여기서 보이는 삼엄한 필법을 두고 최완수는 "서릿발 속에 칼꽃이 피어난 듯한 느낌"이라며 "대 마디 표현도 사각으로 엇물리게 하여 악마디지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그의 묵죽은 30년대가 되면서 예리하고 강인한 금속제의 도검과 창날, 도끼, 능침 같은 병장기 모습이라는 특징을 더하게 되었고, "검극 철침 같은 묵죽법은 이제 아주 일주법(一洲法)으로 정착"된다. 최완수는 말한다.
"쇠도리깨처럼 악마디지고 강인한 죽간이나 강철같은 죽지, 검극이나 도검같은 죽엽, 살기가 등등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묵죽법이다. 이 당시 우리 민족은 이런 꺽이지 않는 기상과 기백을 갈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주의 묵죽을 우리 민족 모두가 애호하였을 것이다."
묵죽명세(墨竹鳴世:묵죽으로 세상의 공명을 얻다)
이 당시 서울에서는 1921년부터 서화협회전이 시작되고 이듬해부터는 총독부에서도 조선미술전람회를 시작하였다. 일주의 신년휘호가 실리며 세상에 알려진 명성에 더하여 1926년이 되면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주변에서 김진우에게 총독부의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그들의 기를 꺽어놓으라고 권한 것이다. 이에 일주는 제5회 조선미전(선전)에 서, 화 두 부문에 출품한다. 서예작품으로는 서산대사 청허 휴정의 시를 청대의 비파서체인 예서체로 쓴 이 작품의 호방장쾌함을 두고 모두 떳떳하고 가슴이 트이는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일제의 소굴을 개미집에 비기고 군국영웅도 초파리 쯤으로 밖에 보지 않는 대사의 굳은 의지가 담긴 필법이었다고 전한다. 실제작품은 그러나 지금 찾아보기 힘들어 아쉬움이 남는다. 서화가 모두 압권이었으나 규정 때문에 묵죽화만 특선에 당선된다. 성당 김돈희, 해강 김규진이 사군자부 심사위원이었다고 한다.
제5회 선전 특선작 <추죽(秋竹)>(1926년/동아5.21일)
일주 특유의 묵죽법인 "철장 검극 능침식(鐵杖 劒戟 菱針式)"으로 일제 총독부의 심장에 검극을 들이댄 듯 통쾌무비한 작품이다. 평자들도 이제 "일주를 묵죽의 대가로 천하가 공인"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1928년 제7회 선전에는 <취우(翠雨)>라는 쌍폭 가리개 형태의 작품을 출품, 다시 특선을 받는다(일인과 함께 성당 김돈희, 석재 서병오가 심사위원).
사진과 함께 실은 <취우>(동아, 1928년 5월 17일)
그러자 이 작품에 극찬의 평론을 쓰며 나선 사람이 우리 근대 조각의 시조로 알려진 김복진이다. 그는 동아일보의 평론에서 "사군자는 조선사람의 독단장(獨壇場)의 감"이 없지 않다며 "한 사람의 일본인의 병견(竝肩)을 불허하고(...) 특선의 경지를 독점한 바 있어 만장의 기염을 토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제목인 '취우'의 화의(畵意)를 읽어, 메마른 조선 강토에 비가 내리어 생기가 돌게 되기를 염원하는 작자의 내심에 공감하며 '특제 청시(靑矢)'라는 말을 골라 쓰기도 하였다. 이미 득의의 경지에 오른 예술작품이 그 당대에 던져주는 감동, 감화의 효과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1929년이 되자 일주는 서화협회 간사가 되었으며 이미 6회부터 그의 묵죽을 추종한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등, 서화계에서 사군자의 대가로 군림하게 된다. 1931년에는 죽사 이응노 등의 일주 죽파(竹派)가 대거 입선하고 심지어 송은 이병직처럼 해강 죽법을 버리고 일주법을 따르는 작가도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자 일제는 1933년이 되자 사군자를 아예 선전에서 제외시켜 버리는 작태까지 보이고 만다.
1930년 4월 1일자 동아 창간10주년 축필(좌)과 1931년 1월 1일자의 동아일보 신년 휘호(우)
또한 1933년에는 서화협회전에 <용영봉상(龍影鳳翔)>이라는, 대소 죽이 총생한 모습의 작품을 출품하는데, 이 역시 철간검엽(鐵竿劒葉)이 삼엄한 기운을 노정하면서 일주 묵죽법의 특징을 모두 드러낸다고 평가되는 작품이다. <용영봉상>(1933년)
일제는 점차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1940년이 되자 창씨개명까지 강요하며 발광하였다. 그러자 일주는 동아 창간 20주년 축필 휘호(4월9일자)로 검기(劒氣) 삼엄한 묵죽을 내는 것으로 일체의 서화활동을 중단한다고 전한다.
해방과 말년의 김진우
1945년 김진우는 63세로 해방을 맞는다. 그전부터 일주는 여운형의 건국동맹 일을 했다고 전하며, 이런 가운데 1946년에는 몽양의 회갑에 그린 <괴석도>라는 작품도 전한다. 일주의 서명과 김진우라는 낙관이 보인다.
해방공간에 자행되던 테러를 목도하며 그는 전쟁이 나자 피난을 마다하고 남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부역의 누명을 쓰게 되었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옥중에서 추위에 얼어서 타계하였다고 전하니, 말년의 이런 모습에서는 그저 한없는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다. 그의 내력들이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아왔던 연유도 바로 그런 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점들이 널리 알려지고, 또 우리도 당연히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나라가 식민지로 떨어지기까지 전국을 호령했던 유인석 의병의 태생지이자 그 유적이 있는 춘천에서 그의 맥을 잇는 독립운동가이자 미술인인 일주 선생을 모른다는 것은 이제 말이 되지 않는다.
일주 김진우는 선비들의 아취 있는 여기에 지나지 않던 사군자, 그 가운데 대나무 그림을 통해 외세의 침탈에 일어섰던 의병 출신으로서 그 맥락을 이으며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시대에 그 강인한 기상과 당당한 정신을 담아 독창적인 자신의 시대적 양식을 창출하는 뛰어난 작품들을 내놓음으로써 서화활동을 하였던 것이고, 이를 통해 근현대 미술사에서도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비록 국내에서 작품활동을 하였지만 그의 그림은 해외의 어려운 조건 아래서 풍찬노숙하며 생명을 내걸고 독립운동을 하는 투사들의 백전불굴의 기백과 정신을 담아냄으로써, 유약한 일상에 젖은 식민지치하 식자들의 마음에 창칼을 들이대는 것과 같은 경각심을 깨워주었으며 전쟁으로 비화하던 일제파시스트들에게도 맞대놓고 붓으로 검수(劒手)를 휘두르는 듯한 경고를 보낸 것이다.
우리 춘천의 유인석 기념관에도 빛 바랜 뻔한 유물만이 아니라 이런 살아 있는 문화계의 작품들도 당연히 한 자리를 차지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의병 정신의 계승이란 차원에서도 이제는 그런 관심이 미쳐야 한다고 보인다.
강원의 미술사에서는 일주 김진우 말고 같은 을미의병 때 평창에서 유인석 의진의 의병모집을 도와 활약했던 평창의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1874-1949년)도 있었다. 차강은 그 고조부가 권돈인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쳤던 학자였기에 그 문인에게서 글씨를 배웠으며, 이미 16세 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는 스승의 인정을 받은 재사로서 강릉에 물러나 활동하였다고 전한다. 해강 김규진이 그의 사군자 그림을 보고 "죽은 내가 낫고 난은 자네가 낫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평생 올곧고 엄한 선비로서 나라를 잃은 지방의 선비로 일생을 마쳤으나, 그의 손자 화강(化江) 박영기(朴永麒:1922-?)와 원주의 청강(靑江, 혹은 좁쌀한알) 장일순(張壹淳:1928-1994년)이 맥을 이었다고 전한다.(<강원문화사>, 2006년)
마지막으로, 여기저기 전해오는 일주의 작품들도 마저 감상해보도록 하자.
첫댓글 많은 대나무그림을 보아 왔으나 이처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그림은 처음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눈이 호강합니다.
차강 박기정은 2006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강원대의<석우 박민일 박사 기증문화재 특별전>에서 글씨와 매화그림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1910년대의 도청 사진엽서나 소양정의 모습들도 비교적 선명한 사진으로 소개되어 주목을 받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