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에 종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을 추적하면서 시작한 독립운동가 발굴이 햇수로 17년째에 이르고 있다.
얼마전, 1937년 11월에 조직된 춘농의 ‘독서회’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전혀 몰랐던 새로운 독립운동가를 알게 되었으니, 바로 유한익 목사이다.
그의 출생지는 서울이며 1862년 10월 27일 생이니 고종황제가 등극하기 바로 1년전의 일이다.
경술국치 이전에 여러가지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벼슬은 경무청 경무국장이라 할 수 있다.
벼슬에서 물러난 유목사의 인생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은, 기독교를 믿게 됐다는 점이다.
활동지역은 주로 춘천인데, 1919년 8월2일에 춘천 안디옥 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된다.
유목사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3.1운동이후 철원에서 조직되어, 상해임정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철원애국단 ’ 사건에 유목사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판결문을 확인했다.
판결문을 보면 유목사의 이름도 여러차례 등장하며, 재판에 정식 회부되지는 않고 방면된것으로 보인다.
철원애국단 활동경력으로 볼 때 이후에 일어난 춘농의 독서회 학생들에게 설교를 통한 민족의식을 고양시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유목사의 춘천감리교회(현재 춘천중앙교회)시무에 대하여 논한다면 1933년부터 1933년까지 담임목사로 시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유목사가 서거한 것이 1940년인데, 1940년 12월10일에 독서회 사건이 발각되었으니, 추정하건대, 유목사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서거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춘농 학생들을 지도한 해인 1937년 76세가 되는데, 고령에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준 그 열정에 실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보훈처 확인한 결과 유목사가 아직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추서가 안 된 사실도 확인했다.
조선왕조 후기에 태어나 구한말에 고위관리를 지낸 신분으로서 기독교에 귀의하여 일제시대에 목회자로서 항일운동을 하였던 80평생의 파란만장한 삶을 영위하였던 유한익 목사의 일대기가 아직까지도 없다는 것에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점은 유목사가 단순히 춘농 학생들만 지도하였던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춘고 학생들에게도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춘천학생운동 연구에 있어서 유목사의 역할은 대단히 비중이 컸다고 본다.
일제시대의 목회자이면서 동시에 독립운동가인 유한익 목사가 내년이면 정확히 서거한지 7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를 맞게 된다.
오랫동안 역사속에서 묻혀 있던 유한익 목사의 80년 생애가 재조명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박관우 항일독립운동연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