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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적 선양사업·연구 새전기
윤희순 회갑축시 실린 습재집
■ 윤희순 의병장 출생일 규명과 의미
유자무궁혜압록강지청치자불붕혜백두산지벽효자유삼인혜원자정지응오복
(流者無窮兮鴨綠江之淸峙者不崩兮白頭山之碧孝子有三人兮願慈庭之膺五福)
유자무궁혜압록강지청치자불붕혜백두산지벽효자유삼인혜락자정지다인덕
(流者無窮兮鴨綠江之淸峙者不崩兮白頭山之碧孝子有三人兮樂慈庭之多仁德)
유자무궁혜압록강지청치자불붕혜백두산지벽효자유효부혜장유효손천백
(流者無窮兮鴨綠江之淸峙者不崩兮白頭山之碧孝子有孝婦兮將有孝孫千百)
흐르는 자 무궁하도다
압록강의 맑음을 지켜 허물지 않음이여
백두산의 벽암(푸른 바위), 효자 세 사람이여
원컨대 자혜로운 가정에 오복이 있을 것이다.
흐르는 자 무궁하도다
압록강의 맑음을 지켜 허물지 않음이여
백두산의 벽암, 효자 세 사람이여
즐겁고 자혜로운 가정에 인덕(仁德)이 많을 것이다.
흐르는 자 무궁하도다
압록강의 맑음을 지켜 허물지 않음이여
백두산의 벽암같은 효자 있고 효부 있으니
장차 효손(孝孫)들이 끝없으리라.
국역:김태을씨
윤희순은 한말 항일의병투쟁 때 안사람 의병단을 이끌고 군수물자를 제조하고 군사훈련을 받으며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부르게 하는 등 가부장적 사회분위기와 사회적 약자인 여성으로서 3대에 걸쳐 의병 및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각자로 꼽힌다.
조선시대 여성은 족보에 태어난 연도만 적고 날짜는 기록하지 않는 남녀차별 인습 때문에 윤희순 역시 태어난 해인 조선 철종11년(1860년) 庚申년으로만 기록된 것이 전부여서 유족은 물론 학계, 여성계에서는 출생일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했다.
이번에 기자가 관련 사료를 치밀하게 조사하는 과정에서 윤희순의 출생일 관련 사료를 찾아내 규명한 것은 향후 윤희순 생애 연구 뿐 아니라 춘천시의 윤희순상 제정 등 본격적으로 선양사업이 전개되는 것과 때맞춰 큰 계기를 제공하고있다.
윤희순의 출생일이 기록된 이 사료는 습재 이소응(이명 이직신, 1852~1930)의 수시(壽詩) '유백윤대부인윤씨망칠연수시(柳伯允大夫人尹氏望七宴壽詩)'로 이소응의 문집 '습재집(習齋集)' 권지일(券之一)의 사(詞)편에 수록돼 있다.
시 제목 중 '伯允'은 웃어른의 큰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윤희순의 장남 유돈상(1894~1935)을 지칭하며 '大夫人'은 남의 어머니의 존칭이며 '望七宴'은 환갑잔치의 다른 말이다. 이 시편의 첫 문장 '유우돈상백윤이경신육월이십오일위기대부인윤씨설망칠연(柳友敦相伯允以庚申六月二十五日爲其大夫人尹氏設望七宴)'은 '유돈상이 경신년 6월 25일 대부인 윤씨의 환갑잔치를 여는데 있어'라는 풀이로 윤희순의 출생일이 정확하게 밝혀져있다.
윤희순보다 8세가 많은 이소응은 을미의병 때 춘천의병장으로 윤희순의 시아버지 유홍석(정미의병 춘천의병장), 남편 유제원 일가와 돈독했으며 국권상실후 1911년 4월 윤희순 일가와 중국 요동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이 회갑연 기념시를 쓴 1920년은 유홍석, 유제원 모두 만주에서 별세한 뒤 유돈상이 만주 곳곳에 흩어진 동지를 규합해 조선독립단을 결성할 때다.
이소응은 3장의 이 시편에서 윤희순이 강녕복덕(康寧福德)의 명을 누리고 자손들에게 길이 복을 전하는 무궁한 기약을 하는 생각으로 지었다고 밝혔다. 윤희순의 아들 3명은 효도에 전력을 다해 섬기면서 의롭지 못한 부귀를 보는 것을 마치 뜬구름같이 여기고 있다고며 효성과 절의를 칭찬하고 있다.
춘천의 한문서예가 김태을씨(60·산택서실)에게 이 한시문 국역을 의뢰한 결과 "윤희순의 자녀들이 혼란한 세상을 만나 중국 요동 땅으로 망명해 살면서도 선조들의 살신정신을 본받아 독립운동을 실천하고 있음을 이소응이 높이 평가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이소응과 윤희순 두 애국선열은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차가운 땅 중국에서 각각 1930년 3월 25일, 1935년 8월 1일 차례로 생을 마감했다.
박미현 mihyunpk@kado.net 기사입력일 : 2004-03-03 19:08
[허준구의 新한시기행] <80> 이소응, 계묘제석오수
한 해의 끝자락이 서산 마루에 걸려 아쉬운 듯 막바지 정리를 종용하고 있다. 한 해를 마감하며 무엇을 돌아보겠는가?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이 고향이 아닌 타향이라면 어떻겠는가? 지금 한 선현의 시를 통해 한 해의 마무리를 하여보자. 다음 시는 1895년 을미의병운동 당시 춘천 의병대장을 지낸 습재 이소응 선생께서 1903년 한 해의 마지막 날 지은 계묘제석오수(癸卯除夕五首)이다.
我朝五百歲(아조오백세) 우리 조정 오 백년으로,
仁德厚而深(인덕후이심) 인덕이 두텁고도 깊건만
척촉怪何物(척촉괴하물) 서성거리니 괴이하다, 어찌된 물건이기에,
敢違上帝心(감위상제심) 함부로 상제의 마음을 어기었는가?
<憂國蒙難 나라를 걱정하나 어려움을 만나>
保護天根老(보호천근노) 천근(天根)의 오래됨을 보호하는,
當年卜此山(당년복차산) 이 산에 올해에 살 곳을 정했네.
猶將傳習願(유장전습원) 스승님께 전습(傳習)을 원해서,
感舊幾往還(감구기왕환) 옛날 몇 번을 왕래하였던가를 생각하네.
<卜居九鶴山中歲暮憶先師 구학산 중에 살아가며 세모(歲暮)에 선사를 그리워함>
구勞生育我(구노생육아) 애쓰시며 나를 길러 주신 부모님,
藏魂在關東(장혼재관동) 혼백은 관동(關東 : 춘천)에 묻혀 계신데,
春秋香火事(춘추향화사) 봄가을 향 사르며 제사하는 도리,
不得與人同(부득여인동) 사람과 더불어 함께 하지 못하네.
<故園親墓恨無人可託 고향 어버이 묘소 돌보아 줄 사람 없음을 한하다>
誰哉倡道義(수재창도의) 누구인가 의(義)를 창도(倡道)한 사람?
特立海西風(특립해서풍) 우뚝하게 해서(海西)에 풍교(風敎)를 세웠네.
洪流擬砥柱(홍류의지주) 홍수에 지주(砥柱)이려니,
毅恒兩衰翁(의항양쇠옹) 의암(柳麟錫)과 항와(柳重岳) 두 분의 어른이리라.
<憶毅菴恒窩二丈人 의암과 항와 두 어른을 추억하다>
如何吾輩人(여하오배인) 우리 무리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逢此百艱辰(봉차백간진) 이에 백방으로 어려운 시기를 만났나.
願各服仁義(원각복인의) 각각 인의(仁義)의 옷을 입어,
挽回隆古春(만회융고춘) 옛 봄날의 융성함을 만회(挽回)하기 원하네.
<憶諸親黨散居遠鄕 여러 친당(親黨)이 고향 멀리에서 흩어져 살아감을 생각하며>
첫 번째 시에서는 자신에 대한 반성을 언급하였다. 조선이 오 백년이란 세월을 인덕(仁德)으로 이어왔건만, 자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나라가 기우는 어려움을 만났는가 라고 하였다. 상제의 마음과 어긋났다고 함이 바로 그러함을 말한 것이다. <국가> 두 번째 시에서는 춘천에서 제천으로 오고가며 스승에게 공부 배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였다. <스승> 세 번째 시에서는 고향에 갈 수 없어 부모님의 묘소 관리도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을 말하였다. <부모> 네 번째 시에서는 평생 선배이며 지기(知己)인 의암과 항와에 대해 말하였다. 어려운 시대에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를 추억하였다. <친구> 다섯 번째 시에서는 자신과 가까운 친척이나 동지적 결속을 유지했던 고향 사람을 추억하였다. <고향>
군사부(君師父) 일체라고 하였던가? 여기에 친구와 고향을 돌아보며 한 해를 마무리함은 어떠한가? <청연서당>
<강원도민일보> 기사입력일 : 2005-12-19 19:57
춘천의병장 이소응 연구발표회
춘천문화원… 9일 오전 11시 춘천 남산도서관
한말 을미의병 때 춘천의병장으로 활동한 이소응(1852∼1930)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연구발표회가 9일 오전11시 춘천 남산도서관에서 열린다.
춘천문화원(원장 이대근)은 이소응 탄생 153주년을 맞아 선생의 활동상과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는 책 '습재 이소응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발간하고 세미나를 마련하는 것. 강원대 교수, 강사 등으로 활동중인 신진학자 허준구, 엄찬호, 유성선 박사가 연구 발표에 나서 문학, 역사, 철학 등 다각적인 관점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허준구 박사는 '습재 이소응의 생애'발표를 통해 학자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의리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습재의 파란만장한 굴곡의 생애와 학문적 성과를 조명한다.
'습재 이소응의 춘천의병'을 주제로 연구한 엄찬호 박사는 1897년 1월 18일 봉기한 춘천 을미의병의 대장으로서 친일 현직 고관을 처단한 최초의 사건을 일으킨 활동상 및 가평 전투에 패한 이후 유인석의 호좌의진에 합류해 의병활동을 계속한 습재의 역사적 위치를 규명한다.
유성선 박사는 애국적인 위정척사론을 견지했던 습재 이소응의 '심설논쟁'에 대해 발표한다.
<강원도민일보> 박미현 mihyunpk@kado.net 기사입력일 : 2005-09-05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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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기사
〈언중언〉 강원인의 힘
역사상 강원인의 응집된 힘을 처음 발휘한 것은 후삼국을 통일하던 때였다. 신라의 국정이 문란하고 백성이 굶주리자 북원(원주)에서 양길(梁吉)이 봉기한다. 주변 30여개 성을 정복하자 신라의 애꾸눈 왕자 궁예(弓裔)가 복속한다. 궁예가 철원에서 태봉국(泰封國)을 일으키자 삭주(춘천)의 신숭겸(申崇謙)과 박유(朴儒)가 가담한다. 왕건을 옹립, 고려가 건국할 때 주역은 신숭겸이 맡았다. 양길로부터 궁예로, 다시 왕건에게로 지배체제가 바뀌는 동안 힘의 바탕을 이룬 세력은 강원도 지역 농민군이었다. ▼후삼국통일의 그날이 왔다. 고려와 후백제의 최후결전 때 고려의 최전방을 담당했던 사람은 명주(강릉)의 왕순식(王順式)이었다.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강원도 지역의 출중한 인물, 그리고 군사의 주류를 이룬 강원지역 농민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후삼국통일시대를 강원인의 시대라 일컫기도 하고 후삼국 통일을 이룩한 고려왕조를 강원왕국(江原王國)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강원인이 힘을 모아 국란을 극복하던 때가 있었다. 몽골 4차 침입때 춘천에서 박천기(朴天器) 안찰사등 모든 주민이 항전하다 몰살당했다. 합단적이 침입했을 때는 원주에서 원충갑(元●甲)이 지방군을 이끌고 항전에 항전, 승리했다. 그보다 먼저 거란족이 국토를 유린할 때, 횡성출신의 조충(趙●)장군은 적을 국토 밖으로 몰아내고 항복을 받았다. 이때부터 강원인은 국란극복에 목숨을 걸고 항전하는 모범을 보여왔다.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던 19기말,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기치를 내걸고 의병봉기로 항전했다. 저 유명한 을미의병 정유의병은 강원인이 주동이 되었다. 춘천에서 이소응(李昭應) 제천에서 유인석(柳麟錫) 원주에서 민긍호(閔肯鎬) 강릉에서 민용호(閔龍鎬) 의병장이 맹활약했다. 당시의 의병항전으로 일본 침략세력은 한국을 병탄하는데 10년이상 저항에 부닥쳤다. 새시대를 창조하고 국란을 극복하는데 강원인이 정의롭게 힘을 모아 뚝심을 발휘했던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강원인의 이 잠재된 힘을 어떻게 응집시키고 발휘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리더십의 과제로 남는다. IMF시대 21세기를 여는 제2기 자치제출범에 그 힘이 샘솟기를. <金永琪논설주간>
[춘천]의병장 이소응선생 공적비 건립
【春川】강원도 애국선열추모사업회(회장:柳然丞)는 17일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한 습제 李昭應(이소응)선생의 독립운동및 항일투쟁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적비를 춘천시 남산도서관 정원에 설치했다.
1852년 춘천시 남산면 방곡리에서 태어난 李昭應선생은 을미사변 등을 계기로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주민들을 규합, 봉기하는 등 춘천유림의 주도하에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그후 경기도 가평 등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망명길에 올라 1943년 몽고 사막지대에서 서거했다.
높이 180㎝ 규모의 공적비는 주민들의 420여만원을 들여 설치했다. 제막식은 9월말 열린다.<張奇永기자·kyjang@kwnews.co.kr>
[강원의 인물·9월]구한말 의병장 이소응
-춘천의병 진두지휘한 `황실의 후예'
갑오개혁이래 신제에 따르지 않고 호적에도 입적치 않을 만큼 항일의식이 철저했던 습재 이소응(習齋 李昭應·1861~1930)선생.
을미의병가운데 춘천의병을 이끌었던 이소응은 제천의병의 유인석과 함께 화서 이항로, 성재 유중교로 이어지는 화서학파 가운데 의병항전에 투신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소응은 화서학파의 학문 특색인 춘추대의의 명분론에 입각한 존화양이론에 따라 일제의 강압에 맞서 항일의병투쟁을 벌인 의병장이다.
그러나 유인석연구에 비해 아직까지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앞으로 연구과제가 남아있는 대표적 인물로 우리의 전통문화계승과 구국투쟁에 앞장선 애국지사의 면모를 돌아볼 수 있는 철저한 조사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1. 황실의 후예로 태어나 서화학파의 계보를 따르다.
1852년 강원도 춘천 남면 하방곡리에서 낙향한 황실의 후예 이도재의 장남으로, 선조 제9왕자 경창군의 9대손으로 태어났다.
만세의 스승이 된 공자를 은근히 기대하며 아명을 중만(仲萬)이라 불렀으며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해 대성할 인물로 점쳐졌다.
6세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며 학문을 수학했으나 본격적 학문은 1872년 22세 때 아버지가 교유하던 화서 이항로의 고제(高弟)로 경기도 양평의 한포서사에서 강학중이던 성재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가면서부터다.
화서학파의 학문적 논리를 따르던 이소응은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개항이 논의되던 1876년 동문 47명과 함께 상경해 `복합유생척양소'를 올려 강력한 개항반대론을 펼쳤다.
또 1889년 8월 유중교가 새로운 강학 장소를 찾아 충북제천의 장담으로 남하하자 유인석 등과 함께 스승을 따라 이거, 제천과 처음 인연을 맺으며 독실한 학문수학의 기회를 가졌다.
2. 위정척사론으로 무장하고 의병활동에 나서다.
1894년 6월 김홍집내각의 박영효 등이 갑오개혁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한 선생은 결사 신제를 따르지 않고 호적에도 들지 않는 등 강경한 입장을 펴 나갔다.
특히 일본이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려 민족자존의 상징이던 상투를 잘랐다는 소식을 접한 이소응은 절대적 위기의식을 갖고 단발과 의관제도의 변혁을 비판하는 `훼복훼형론(毁服毁形論)'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이소응은 1896년 1월 유중악, 유봉석과 함께 양평의 용문산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춘천에서 활동하던 이경응을 비롯한 의병주창자들이 의병대장직을 강청하면서 의병항일전에 투신하게 됐다.
창의격문을 붙이고 통문을 돌려 인심을 격동케 만든 이들은 유생 정인회와 군인 성익환, 상인 박현성 등 인근 유생과 농민들의 호응으로 1,000여명을 의병에 가담시켜 춘천관찰부를 습격, 점령했다.
의병장에 오른 이소응은 춘천의소(春川義所)의 이름으로 각 고을에 글을 보내 군수품 마련을 서두르고 전국에 격문을 보내 전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동참해 줄 것을 촉구했다.
이 거의격문에서 이소응은 일제를 왜노라고 지칭하는 등 일부개화파들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규정했다. 나라의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것이 의병이 실천해야 할 임무임을 강조하며 의병활동을 방해하는 지방관리에 대해 즉각 단죄할 것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소의신편(昭義新編)'에서 “유인석이 호좌에서 창의하니 경남, 호서, 호남, 영남, 영동이 상응하게 되고 이소응이 관동에서 창의하니 영서, 경북, 해서, 관북이 상응하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3. 전국 의병활동의 선두에서 요동망명까지.
이소응이 이끌던 춘천의병은 당시 삭발하고 부임하던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을 가평관아에 잡아 처단하는 획기적 사건을 통해 전국적으로 명성을 이어갔다.
이는 의병이 부임관리를 처단한 최초의 사건으로 내각 대신은 물론 지방관원들에게도 일대 충격을 준 사건으로 기록되면서 중앙정부에서 춘천의병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계기를 가져왔다.
그러나 당시 훈련되지 않은데다 전략, 전술에 익숙치 못했던 춘천의병들이 관군과 내통하던 이에 의해 결국 패하게 됨에 따라 이소응은 전력의 열세를 통감하고 제천의진에 합류한 후 강릉의 민용호 의진이나 유인석의 서북행에 합류해 활동을 계속했다.
이 때 이소응은 의병들의 행동강령을 정해 보다 철저한 투쟁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군중사무대강(軍中事務大綱)'을 펴내는 등 참모로서의 역할을 다해 학자와 의병장으로서 면모를 과시했다.
그러나 1896년 유인석이 제천성을 잃고 서북행의 장도에 오르자 이소응도 황해도, 원주 치악산의 동쪽 배양산으로 이거해 은둔하다 1898년 유인석을 따라 서간도의 통화현 오도구로 망명했다.
그는 이 곳에서 화서학파를 중심으로 개항이후 전개된 한국근대항일투쟁사의 전말을 기록한 `척화거의사실대략(斥和擧義事實大略)'을 비롯한 다수의 저술을 남기며 항일의지를 불태웠다.
가난으로 인해 생계의 호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요동, 원주, 제천 등지를 돌며 생활했으나 이 와중에도 유인석과 거의 동일한 행동선상에서 움직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4.이역만리에서 조국광복의 한을 묻다
한일합병을 눈앞에 둔 1909년, 이소응은 일진회원들의 횡포가 가중되자 가족을 이끌고 청풍 장선리 어리곡에서 유거하며 갖은 고초를 겪으며 생활했다.
나라가 망한 이듬해 부인 유씨가 타계하자 이소응은 국외망명을 결심하고 1911년 봄 오랜 숙원이던 망명길을 떠나 20년간 유인석·유홍석 등 지사들과 본토진공의 방략을 모색하다 몽골 사막지대인 강평현 제 7구에서 1930년 4월 23일(음력 3월 25일) 79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이소응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담은 유고가 후학에 의해 1969년 `습재집'으로 간행되었으며 62년 건국훈장 국민장에서 90년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추서됐다.
국가존망의 위기의식속에서 의병항쟁과 항일운동으로 평생을 바친 이소응은 스스로 “평생의 학문은 어디까지나 영광된 조국에 있고 종국(宗國)이 광복될 날만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일본 제국주의 외압이라는 민족적 수난기에 처해 민족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정신적 지표로서 민족 자주의식 고양에 이바지한 그의 뜻이 다시금 새겨질 수 있도록 선양사업의 추진이 요구되고 있다.<鄭明淑기자·brightms@kwnews.co.kr>
-"민족 수난기 절의·구국정신 정신적 지표로 높이 평가"
화서학파의 태두 이항로의 고제인 유중교에게 수학한 습재 이소응(1852∼1930)은 개항에서 망국에 이르는 부당한 현실에서 동문인 유인석과 함께 화서학파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존화양이론과 위정척사론을 철저히 지키고 실천한 유학자(사후 자양영당에 배향됨)였다. 의병대장에 등단한 그는 을미춘천의병항쟁을 선도하여 친일내각을 떨게 한 인물이며, 국치(한일병탄)이후에는 대일 독립투쟁에 투신하여 보국한 애국지사였다.
일제의 강압으로 개항이 논의되던 시기에 화서문인과 함께 `왜양일체론'을 근간으로 한 `복합유생척사소'를 올려 문호개방을 결사 반대하였다. `양물금단론'을 핵심으로 한 `양물론'을 스스로 지어 일제침략에 대응하도록 촉구하였으며,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훼복훼형론'을 서술하여 변복과 단발등의 변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동시에 정체성을 내세워 전통문화보존을 강력히 역설하였다.
그러나 정국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공포로 을미의변을 촉발케하였고, 이에 그는 춘천의병을 주도하여 부일적인 신임 선유사 겸 춘천관찰사를 잡아들여 처단하므로서 전국의병가운데 가장 먼저 의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그 후 첫 망명지 요동(통화현)으로 들어가 을미의병의 전말을 담은 `척사의거사실'을 저술하면서 항일의지를 더욱 다짐하였다.
곧 이어 유인석과 같이 귀국한 그는 10년 동안 사우 제자에게 배일척사사상을 고취하는데 전념하였으며, 국치이후에는 재차 망명지 요동(회인현)에서 20년에 걸쳐 동문 사우(유인석 유홍석 유의석 등) 대한독립단의 임원(박장호 백삼규 박양섭 등)들과 같이 국토수복의 방략을 모색하는 동시에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더구나 갑오개혁 이래 배일 척사적인 그는 국내외의 호적에 등재치 않았기 때문에 농토를 잃고 나무열매로 연명할 정도로 궁색하였다. 그럴수록 그의 배일사상은 더욱 골수에 사무쳐서 그곳 청국인과 일본인이 호적에 입적할 것을 회유 또는 강박하였으나 그들의 지배를 피해 몽골사막과의 접경지(강평현)로 이사하여 고집스럽게 절의를 지키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이렇듯 국가존망의 위기 속에서 주도적으로 대일 의병항쟁을 전개하였고, 망국에 처해서는 항일독립운동으로 일관했던 그의 학문과 사상은 `공자 주자를 종으로 하고, 주의는 존화양이를 주로하며, 뜻은 종국(조국)에 있다'(學宗孔朱 義主尊攘 志存宗國)라고 선묘에 고유하였듯이 오로지 영광된 조국의 광복을 소망하면서 평생토록 항일투쟁에 헌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문화계승과 구국투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보인 위정척사사상이 비록 수구적 한계성을 지녔다 할지라도 당시 암울한 역사의 질곡과 민족적 수난기에 처하여 민족사를 이끌어갈 정신적 지표로서 그가 남긴 피맺힌 공적(건국훈장 독립장 추서함)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의 숭고한 절의정신과 구국정신은 오늘에 되새겨 `하나의 겨레 통일된 조국'을 이룩하는데 있어 퇴폐한 오늘의 세태를 경계하고, 희망찬 내일을 열어가는데에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구용강원대 사학과 명예교수>
취재자: 취재일시:
[강원의 인물·1월]화서 이항로
-민족운동 실천한 위정척사 `태두'
조선 말기 가장 저명한 성리학자로서 존왕양이의 대의를 주장한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1792(정조 16년)~1868(고종 5년))선생을 1월 강원의 인물로 선정합니다.
조선 주리철학 3대 학자 중 하나로 침체되어가는 성리학에 활기를 불어 넣은 이항로는 조선말기 민족사상인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고 일본에 국권이 침탈된 후 민족운동의 실천적 지도이념을 제공한 인물입니다.
특히 위정척사의 태두로서 춘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유인석, 이소응 등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가르침을 전달하고 홍천에서 기거하며 저술작업에 열중한 이항로선생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합니다.
조선 말 저명한 성리학자로 존왕양이의 대의를 주장한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1792(정조 16년)~1868(고종 5년)는 침체되어 가는 성리학에 활기를 불어넣은 대학자로 평가된다.
그의 철학은 조선말기 민족사상인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고 일본에 국권이 침탈된 후에는 민족운동의 실천적 지도이념으로 작용했다.
이 처럼 성릭학의 대가, 위정척사의 태두로 불리는 이항로는 최익현뿐 아니라 춘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유인석, 이소응 등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가르침을 전달했으며 홍천에 기거하며 저술작업에 열을 쏟기도 했다. 조선말 한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는 정신적 지주로서 우뚝섰던 이항로의 삶과 업적을 짚어보고 전국 최초의 의병인 춘천의병에 미친 그의 영향력을 되새겨 본다.
1. 성리학 대부가 되다
이항로의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로 경기도 양평 벽계출생이다. 아버지 증 이조참판 회장(晦章)과 전의 이씨 의집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3살에 `천자문'을 떼고 6살에 `십구사략'을 읽고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었다고 할 만큼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재주를 가진 인물로 기록돼 있다. 그는 학문적 성취와 서얼출신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는 시대적 변화로 인해 서얼출신에서 벗어나 양반으로서 권한을 누리게 된다.
이후 1808년 한성초시인 반시(泮試)에 합격했으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관계를 종용하자 이에 격분, 과장의 출입마저 수치스럽다며 끝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과거를 포기한 뒤 당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울의 임로(任魯)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 등을 찾아가 학우의 관계를 맺었으며 26세가 되던 해 어버이와 사별한 뒤 더욱 학문에 전념했다.
30세 때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여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세속을 피하여 쌍계사·고달사 등 사찰을 옮겨 다니며 `사서삼경'과 `주자대전' 등 성리학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항로의 학덕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수많은 직위에 제수되었지만 고사하고 향리에서 강학에 전념,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로 유명한 최익현, 김평묵, 유중교 등을 문하에서 가르치게 됐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입궐하여 대원군에게 주전론을 건의하였으며 그 뒤 공조참판으로 승진하고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다.
곧은 성격의 그는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한 병인상소를 올리고 만동묘(萬東廟)의 재건을 상소한 후 낙향했다.
그러나 주리철학(主理哲學)에 바탕을 둔 그의 학문은 호남의 기정진, 영남의 이진상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주리철학을 재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조선 주리철학의 3대로 불리고 있다.
2. 쟁쟁한 양반들을 위정척사파로 결집시키다.
조선말기 사상계의 중심축이었던 이항로는 경기도 노론 가문의 서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을 숭앙하는 양반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이들은 최익현 등 당대의 쟁쟁한 양반들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바로 위정척사파를 형성했다.
이항로는 부모상을 당한 1816년을 기점으로 속학을 모두 버리고 구인위기의 공부에만 힘써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선비들과 강학(講學)을 시작, 날마다 학자들과 더불어 경서와 예문을 강론하고 복습하였다.
특히 의리에 관한 강론은 비유가 풍부하여 “마치 용호가 뛰는 듯 통쾌했고 아무리 어리고 노둔한 자라 할지라도 모두 정신이 상쾌하여 깨치는 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강계 10여 조목을 지어 강의가 끝나면 잘 읽는 자로 하여금 한 차례 외우게 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북쪽의 오랑캐 청이 예의를 파괴하고, 서쪽의 천주교가 우리 마음을 좀먹으니, 남보다 앞장서서 마음을 밝히고 눈을 부릅떠서 성현의 가르침과 부조의 업적을 떨어뜨리지 말자”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그의 학설은 주리론(主理論)으로서 우주론에 있어서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시무론에 있어서는 전제(田制)개혁은 토지겸병을 막기 위해서라도 공전(公田)제도 채택, 기민구휼을 위한 사창(私倉), 풍속교화를 위한 향약, 병농의 일원화를 위한 부병제의 시행 등을 주장하고 나섰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 나라의 당면한 특수성에 비추어 직언자로 우국과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를 강조하면서 위정척사와 창의호국의 중심적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는 것이 큰 업적으로 남고 있다.
한말사상계와 의병운동을 주도한 최익현, 김평묵, 유중교, 유인석, 이소응 등 대표적 문인들은 화서의 보수적인 화이사상을 민족자주적인 실천운동으로 전개시킨 대표적인 인물들로 꼽힌다.
문집 `화서집(華西集)'을 비롯하여 송원화동사합편강목, 벽계아언, 주자대전차의집보, 주역석의, 화서아언 등을 펴내며 화서학파의 이론을 정비하고 한말 의병활동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때문에 사후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증되기도 했다.
3. 홍천과 평창에 남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순조 30년인 1830년 그는 금강산에 갔다 오다 홍천 삼포리의 지세(地勢)에 마음이 끌린후 1852년 61세에 가족들과 함께 이 곳으로 이주했다.
여기서 `임천오씨태극설(臨川吳氏太極說)', `재수주자대전차'(再脩朱子大全集箚)'를 저술하며 문인 유중교로 하여금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짓게 했다.
그러나 큰 아들과 둘째 며느리가 운명을 다시 하자 69세가 되던 해 다시 고향인 벽계로 귀향하며 홍천과의 아쉬운 인연을 남겼다.
평창군 봉평 시가지 진입로 국도변 평촌리 동편 산기슭에 위치한 `봉산서재'에는 율곡 이 이와 함께 이항로의 존영이 모셔져 있다.
이 사당은 율곡선생의 부친 이원수공이 수운판관으로 벼슬을 하던 조선 중종 때 이 곳에서 거주하던 18년동안 사임당 신씨가 율곡선생을 잉태한 곳으로 전해져 이를 기리기 위해 창건한 곳이다.
서재경내에 위치한 재실에 율곡 선생의 존영과 화서 이항로(李恒老)를 모시고 지방주민과 유림이 1년내내 받들며 제사를 봉행하고 있어 그의 행적을 쫓고 있다.
춘천출신의 유인석의병장과 이소응의병장에게 정신적 세계관을 심어준 화서학파의 우두머리 이항로 선생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홍천 삼포리를 중심으로 도내에서도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이는 유인석, 이소응 등 강원도가 낳은 인물들에 대한 가치를 함께 재조명하면서 이항로와의 연결고리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때문이다.<鄭明淑기자·brightms@kwnews.co.kr>
취재자: 취재일시:
의병봉기 독려 `춘천통문' 공개
]
-오늘 58주년 광복절
제58주년 광복절을 맞아 일제가 명성왕후를 무참히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고종 32년) 왕실에서 판서를 지낸 인물들이 춘천지역 유림들에게 의병을 일으켜 줄 것을 요청하는 사료가 발굴, 공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강원대 박한설(66)명예교수가 14일 공개한 `춘천통문(春川通文)'은 `의병장 전(前) 판서 김세기 심상훈'이 보낸 일종의 격문으로 국모 시해사건과 잇따른 단발령 조치 등에 격분하며 의병을 일으키니 뜻있는 선비는 함께 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통문은 “왕후를 살해한 원수와 어떻게 함께 하늘을 이고 있겠느냐”며 “이를 보는 사람마다 용기를 내 호응하고 참여하는 것은 위로는 국치를 씻고 백성의 실망을 회복하는 것”이라면서 의병봉기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 더벅마리 식견밖에 없는 자가 대신역할을 하고 있다며 단별령을 앞장서 옹호하던 일부 대신들을 질타하고, 양력을 택한 것은 문명을 버리고 오랑캐를 따르는 것과 같다고 분개한 내용도 담겨있다.
1895년10월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그해 11월 내려진 단발령은 을미의병을 불려와 춘천과 충청도에서 의암 류인석과 이소응 등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키는 등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박한설명예교수는 “왕실에서 당시 화서학파의 본거지였던 춘천에 사람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라고 권고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 자료”라고 강조했다.<金石萬기자·smkim@ kwnews.co.kr> 2003.8.15일자 기사
습재 이소응선생은 어떤 분일까
-9일 춘천 남산도서관서 연구발표회 등 추모행사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인 습재 이소응의 생애와 사상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9일 오전11시 춘천시 남산면 남산도서관에서 열린다.
이소응선생 탄생 153주년을 기념하고 광복 6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이날 추모행사는 이대근춘천문화원장을 비롯 이소응선생의 후손 지역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도서관 경내 선생 기념비 앞에서 열린다. 이어 2층 회의실에서 `습재 이소응선생의 생애와 사상' 출판기념회 및 연구발표회가 마련된다.
습재 이소응(1852~1930)은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에서 태어났으며 의암 유인석과 함께 춘천의병장으로 활동하며 한국유학사의 한 축인 화서학파 내 이론을 정립, 완성한 주인공이다. 특히 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 당시 춘천의병장을 지내면서 머리를 깎고 부임하는 관찰사 조인승의 목을 베 의병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이끌어내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의암선생과 요동으로 나아가 의병활동을 한 습재선생은 일제의 강압적 요구에 의한 갑오개혁이 일어난 이후 민적(民籍)에 편입하지 않으며 꼿꼿한 선비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날 연구발표회에서는 허준구박사가 `습재 이소응의 생애와 사상'을, 엄찬호강원대강사가 `습재 이소응의 춘천의병'을, 유성선강원대교수가 `습재 이소응의 심설논쟁'을 주제로 각각 발표하며 구한말 의병장과 학자로 활동한 습재선생의 발자취를 재조명한다. <鄭明淑기자·brightms@kwnews.co.kr> 05.9.6일자 기사
]“평생 학문은 조국 광복에 있을 뿐…”
-춘천출신 습재 이소응선생
을미사변(국모 명성황후 시해)이 난 1895년 44세의 나이로 춘천의병대장에 추대된 대학자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1852~1930)년선생.
일제의 만행을 피해 몽골 사막지대인 강평현 제7구에서 79세로 숨을 거두기까지 “평생의 학문은 어디까지나 영광된 조국에 있고 종국(宗國)이 광복될 날만을 기다린다”며 조국 광복에 투신한 습재선생의 높은 정신세계를 탐독할 수 있는 책이 나와 향토사의 이해와 연구에 큰 도움을 주게 됐다.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에서 태어나 유학자로 정진한 습재 이소응선생이 평생 견지했던 춘추대의(春秋大義)의 의리정신과 철저한 도덕적 자세, 실천적 투쟁으로 시대의 격랑에 대응했던 지성(知性)의 참모습을 입증하는 책이다.
춘천문화원(원장:이대근)이 광복60주년이었던 지난해부터 시리즈로 발간하고 있는 `습재학총서' 제2권으로 펴낸 `국역 습재선생문집 1'은 습재선생문집 총56권 중 1차로 7권을 가려 펴낸 것. 사(詞)와 시(詩)를 묶은 4권(제1~4권), 상소문과 서간문(제5권) 연보(제55권) 행장(제56권)을 선별해 600쪽에 이르는 한글본으로 묶어 펴냈다. 이 책의 국역 대본은 지난 1969년 한자 석판으로 간행된 `습재선생문집'이다.
이대근 춘천문화원장은 “이번 국역집을 통해 우리는 습재선생의 문학과 생애, 시대인식에 대한 이해보다 소상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만아니라 그동안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선생의 철학적 논설과 인식도 살펴볼 수 있다”며 “이번 번역집 출간을 계기로 습재선생의 생애와 의병·독립운동, 학문과 사상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와 선양사업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습재선생은 춘천을 중심으로 한 북한강 일대에서 번성했던 한말 화서학파(華西學派)의 학맥을 정통으로 이은 유학자. 학계에서는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 의암 유인석 등 화서학파의 쟁쟁한 학자들의 높은 정신적 사유가 습재선생에게서 집대성 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번 책은 번역을 맡은 습재연구소(소장:허준구)가 3년간의 준비작업과 발간을 앞두고 60여일간 밤샘작업을 통해 결실을 본 것. 습재연구소 소장인 허준구박사는 “춘천의병활동이 이 책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며 “대체로 `춘천은 정신문화가 미약하다'고 인식하고 있으나 `한국유학사상의 최종적 집결지'라는 사실이 이 책을 통해 분명하게 입증된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허박사는 또 “의암선생이 그랬듯, 습재선생도 지(知)와 행(行)을 겸비한 진정한 지성이요, 대학자였던 면모를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소개하고 “춘천지역은 물론 한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의암과 습재 두 분의 활동과 정신세계를 보다 심도있게 연구해야 할 과제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습재학총서' 제1권 `습재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펴내고 출판기념회를 겸한 연구발표회를 개최하기도 했던 춘천문화원과 습재연구소는 이번 `국역 습재선생문집 1'에 이어 연차적으로 습재선생문집 전권을 번역·출간한다는 계획이다.
<龍鎬先기자·yonghs@kwnews.co.kr> 06.3.21일자 기사
강촌에 오면
구곡폭포에 들러
"곧은 소리" 한번 듣고
문배마을에 올라 술 한잔 걸치는 코스를 밟는다.
문배가 많이 난다고 해서 문배마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여
수년전 강원도립수목원에서는 이 곳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빈밭에 문배나무를 잔뜩 심기도 했다.
나도 그래서 그런가부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정작 문배마을은 다른 유래가 있었다.
구한말 춘천초대의병장을 지내신 습재 이소응선생은 1853년 이 곳 강촌태생(구곡폭포 입구 삼거리에서 폭포쪽으로 50미터부근 오른쪽 집터가 생가터로 추정됨)으로 유인석 선생과 동문수학하신 유학자로 화서학파의 철학,사상을 사실상 완결한 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랫 글은 습재선생을 연구하고 있는 허준구 박사(강대 한림대 강사 출강 )가 강원도민일보에 연재한 글 가운데 발췌한 것이다.
춘천을 찾는 사람들에게 시 한 수 소개할 겸, 문배마을에 대해 바로 알도록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하여 옮겨 싣습니다. 100
년전으로 돌아가 문배마을 한번 올라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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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구의 新한시기행] <27> 춘천 문배마을 지명유래 (上)
문배 나무 많아… 벼랑위 거룻배 지형
춘천시 남산면에 ‘문배’라는 독특한 마을이름과 구곡폭포가 있다. 구곡폭포(九曲瀑布)의 이름은 언제 어떻게 붙여진 이름인지 모른다. 다만 폭포로 가기 위해서는 구불구불한 골짜기를 많이 지나가야 했기에 많다는 의미로 아홉이란 숫자를 딴 것이라 여겨진다.
문배마을은 구곡폭포 우측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갈 수 있거나, 검봉산을 등산해서 갈 수 있기도 하며 임도를 이용해 차량으로도 갈 수 있다.
이 마을에 도착해 보면 참으로 이런 벼랑 위에 이러한 펑퍼짐한 지형도 있구나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그리고 문배라는 독특한 마을 이름이 사람으로 하여금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이 마을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문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졌다는 설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말을 들으면 아마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금새 문배주를 떠올릴 법하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이곳에서 빚은 동동주는 집집마다 다른 맛을 내기도 한다. 또한 이곳 지형이 전체적으로 거룻배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마을에서는 관정을 설치 않고 구곡폭포로 흘러드는 물을 식수로 이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구곡폭포의 이름과 문배마을의 이름에 대해서 문헌으로 증명된 적은 없다. 여기에 많은 의문을 지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옛 문헌을 읽다가 실마리가 될만한 내용을 발견하였다.
이 문헌에 근거하여 구곡폭포는 문폭(文瀑)이란 이름으로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 문헌은 을미년(1896년) 의병이 일어났을 때 춘천 의병의 선봉장이었던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 : 1852~1930)의 습재집(習齋集)이다.
이 문집의 ‘문폭유거(文瀑幽居)’ ‘문폭잡영(文瀑雜詠)’이라는 시의 제목에 문폭이란 지명이 보인다. 특히 앞 시에서 문배마을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시를 분석하여 보면 문배마을과 구곡폭포와의 관련성과 지명의 형성을 알 수 있다. 구곡폭포와 문배마을의 지명유래를 담은 시를 두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먼저 문폭유거(文瀑幽居) 중에서 문배마을과 문폭관련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此地有文瀑(차지유문폭) 이 곳에 문폭이 있으니,
窈窕何其幽(요조하기유) 깊어서 은거하기 매우 좋구나.
洞裏晴雷殷(동리청뢰은) 골 안은 맑은 날도 천둥치며(폭포소리),
日下丹霞浮(일하단하부) 물보라는 햇빛으로 오색 무지개를 만드네.
四時訪風景(사시방풍경) 사시사철 풍경을 찾아다니며,
意難收(상양의난수) 거닐면 마음이 설레고,
逐流到窮源(축류도궁원) 계곡 물 따라 끝까지 가보면,
有村開平疇(유촌개평주) 마을이 평지에 펼쳐진다.
泉甘而土肥(천감이토비) 샘물은 달고 토지는 비옥하며,
山環似巨舟(산환사거주) 산은 거룻배처럼 둥글게 둘러쳤다. <청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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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배(文背)는 문폭(文瀑: 구곡폭포의 옛 명칭)의 뒤(背 등 배)편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실제 이 곳 강촌노인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문배마을의 형상이 풍수지리학적으로 배처럼 생겨 절대 우물을 파서는 안된다고 하였다는 겁니다.
2004년 8월12일 기사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으면 가라앉는 형국이라는 것이죠.
습재선생은 "문배의 샘물은 달고 토지는 비옥하며 둘러친 산으로 하여 마치 큰 배와 같이 생겼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어릴 적 문배에 살던 친구들은 이 험한 산길을 걸어 20리길이 넘는 남산초등학교엘 다녔습니다.
늦을 라치면 거의 점심때나 도착하여도 오는 것이 가상한지 큰소리로 야단치는 선생님이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곳 사람들은 아주 근면하여 성품이 착하고 우직스러운 것으로 기억됩니다.
김성남이라고 하는 한 친구는 30여년전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는데, 어떻게 사는지 연락도 없어 궁금합니다.
지금 문배마을엔 7~8집이 식당을 하고 있는데, 지하수 관정을 파서 근래들어 구곡폭포의 수량이 크게 줄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춘천시에서는 호구지책으로 생태연못이라는 명분으로 큰 저수지를 만들었지만---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지 말라는 옛 선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지요.<강마을>
[허준구의 新한시기행] <28> 구곡폭포 문배마을 지명유래(2)
조화로운 뒤편… 이상향 상징
구곡폭포의 앞선 이름이 문폭(文瀑)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러면 문폭(文瀑)의 의미는 무엇일까? '문폭'은 마을을 지칭하는 지명이면서 특정 폭포(현 구곡폭포)를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하다. 문(文)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글월' '글자' '문사' '덕' '글재주' '문치' '글 짓다' '무늬' '현상' '문물' '법령조문' '아름답다' '화려하다' '꾸미다' 등으로 참으로 많다. '문폭'에서 문(文)은 '자연계와 인간 사회에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이란 의미로 썼다고 판단된다.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 선생은 '문폭유거(文瀑幽居)' 시편에서 '문폭'에서의 일상사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마을의 풍속이나 일상사, 가정내의 행동거지, 안분지족(安分知足) 등의 내용 등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 사회에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을 말하려 한 것이다. 여기에 다양한 자연 현상을 상징하는 폭포(瀑)와 연계시켜, 자연세계와 인간 사회의 조화로운 결합을 추구하였다.
즉, 자연세계와 인간 사회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려 했던 생각이 '문폭'이란 지명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 '문폭'의 뒤편이란 의미에서 나온 '문배(文背:등은 북쪽이라는 의미와 뒤편이란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였다)'라는 마을은, 습재 선생이 살고자 했던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습재 선생은 '문폭유거(文瀑幽居)' 시편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早晩結小廬(조만결소려) 조만간 작은 집을 지으면,
시수미록유:계절마다 사슴이 울고,
松亭追凉風(송정추량풍) 소나무 정자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苽田引淸溝(고전인청구) 오이 밭엔 맑은 도랑물이 흐른다.
晩對石壁矗(만대석벽촉) 저녁나절 깎아지른 석벽을 마주하고,
朝臨雲海悠(조임운해유) 아침이면 넘실대는 운해에 나아가며,
時誦淵明辭(시송연명사)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조리며,
盤桓於此區(반환어차구) 이 곳을 거닐어본다.
도연명은 세상의 부귀공명을 버리고 자연에 돌아가 안분지족하며 살다간 대표적 은자(隱者)다. 청정(淸淨)과 고절(孤節), 세상의 더러운 기운을 씻어낸 자연 그대로인 문배에서 도연명처럼 귀거래사를 읊조리며 거닐어보는 행복을 누렸던 150여 년 전의 습재 선생의 숨결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청연서당>
기사입력일 : 2004-08-19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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