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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천역사문화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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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및 설화 스크랩 한천자 묘
강마을(정재억) 추천 0 조회 105 11.10.17 13:07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머슴 집안에서 천자를 배출케 한 명당
 
가리산의 한천자 묘

묘를 잘 써 머슴 집안에서 천자(天子)가 나왔다면 이보다 더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까. 그런데 실제(?)로 머슴이 천자가 된 이야기가 있다.
강원도 춘천의 가리산(해발 1,051미터) 중턱에 있는 ‘한(漢)천자 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금은 산자락 끝에 볼품없는 묘소만 남아 있지만, 지역 주민들 사이에 구전(口傳)돼 오고 있는 전설은 머슴의 신분 상승과 그 영화(榮華)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또 천자는 못 되더라도 자식들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바라는 이들이나, 복덕(福德)을 구하려는 기도 인파가 암암리에 이곳을 찾아와 한천자 묘는 수백 년 세월 뒤에도 여전히 중생들의 선망(先望)이 되고 있다.

가리산 중턱에 있는 작은 묘

강원도 춘천 어디엔가에 한천자 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궁금히 여기고 있던 차에 향토 연구가 허영수 씨로부터 좀더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소양강 근처 물노리(勿老里)에 가면 한천자 묘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말만 믿고 무작정 길을 떠난 것이 한여름 장마철이었다. 다행히 전날 일기예보는 ‘대체로 맑음’이라고 했지만 TV가 낡아 일기예보가 자주 틀리는 탓(?)인지 길을 떠나자마자 하늘이 벌써 심상치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춘천에 도착하기도 전에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는, 소양댐 선착장에 이르자 아예 굵은 소나기로 바뀌어 버렸다.
 
여행(답사) 뒷심은 곧 뱃심(배가 든든해야 만사형통)이라는 사실은 이미 숱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오후 4시에 출발하는 물노리 경유 북산행 배를 기다리며 막국수 한 그릇을 얼른 비웠다.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두는 것은 오지(奧地)에 들어가기 전 꼭 챙겨야 하는 첫번째 일이기도 하다. 가게에 들러 빵 두어 개와 초콜릿, 음료수 등 식량 대용품을 사 배낭을 채우고 배에 올라타니 외지인은 달랑 나 하나다.
 
물노리까지 배삯(현지 주민보다 두 배가 비싸다)을 내며 천자묘를 물으니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금방 안심이 돼 의자에 앉으며 정확한 천자묘 위치를 되묻자, 이번에는 아는 이는 별로 없고 대신 가리산 중턱에 있는 연국사를 찾아 주지 스님께 물어보면 될 것이라는 말뿐이었다. 다시 시커먼 구름이 뒤덮인 하늘처럼 마음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물노리에 도착하니 정확히 445분이었다. 꼭 45분을 달려온 셈이다. 가뭄 탓인지 소양호는 물이 많이 줄어들어 물노리 마을 입구까지 배가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 임시 선착장에 짐을 풀게 했다. 여기서부터 마을까지는 줄잡아 20~30분을 걸어야 될 판이었다. 다행히 마을 주민이 1톤 트럭을 가지고 마중을 나왔다. 나만 빼고 다들 잘 아는 사이인지라 서슴없이 차에 올라탄다. 머뭇거리고 있다가는 걸음 품을 상당히 팔아야 될 처지여서 인사를 꾸벅 하고 얼른 차 짐칸에 올라탔다.
 
목표는 마을 회관 앞. 그런데 젊은 기사는 객식구에게 운전 솜씨를 보여주려는지, 비포장 산길을 어찌나 빠르게 달리는지 엉덩방아를 수십 번도 더 찧었다. 그래도 차 탄 덕분에 몇십 분을 벌었다고 생각하니 엉덩이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려도 기분은 상쾌했다.
배 안에서, 그리고 트럭 기사한테 천자묘로 가는 방향을 거듭 확인한 바 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길로 접어들기 전에 만난 마을 청년들을 붙잡고 또 한번 물어보았다. 40분 가량 더 걸어 올라가면 연국사에 이를 수 있다는 답을 듣고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갈림길 이정표는 연국사 대신 한국불교태고종 은주사라는 돌비가 서 있었다. 다행히 마을 청년들이 가리켜 준 방향을 따라 연국사로 올라가다 보니 오른쪽에 큰 입불(入佛)이 보였다. 과거에 절터였거니 생각하면서 걸음을 재촉해 숲속 길을 헉헉거리며 삼십 분쯤 오르니,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은주사 대웅전이 나타났다. 채소밭에서 일하는 보살한테 연국사는 얼마나 더 가야 되느냐고 물으니 바로 여기가 거기라고 대답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주지 스님인 듯한 노비구니가 나오더니 그 대답을 해주었다. 얼마 전 연국사를 은주사로 개명했다고.
 
스님께 여기까지 온 자초지종을 말하고 한천자 묘소 위치를  묻자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 가며 정확한 위치를 일러주었다. 해가 지기 전 사진 촬영부터 마칠 양으로 숲속으로 들어가 묘부터 찾았다. 스님의 세심한 배려 때문인지, 아니면 수백 리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온 객을 맞이하기 위해 망자(亡者)가 길 안내를 잘 해주어서인지 묘는 어렵지 않게 찾았다.
 
은주사 산신각을 지나 2백여 미터쯤 올라가다 보니 그 흔적이 보였다. 분토는 다 허물어져내려 있고 주위는 울창한 산림 때문에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그늘이 지는 곳이지만, 북쪽으로 훤히 터 있는 공간이 가슴까지 시원하게 해주었다. 다시 말하면 수백리 저쪽에서부터 기(氣)가 몰려와 응집되는 곳이 바로 한천자 묘터가 되는 셈이다. 능선의 끝이라면 끝이요, 가리산 정상과 연결되는 시작점이라면 그 점이 될 만한 곳에 묘가 들어서 있는 셈이다.
 
허물어진 봉분 앞에 누군가 정성들여 갖다 놓았음직한 스텐리스 잔 하나가 고분(古墳)과는 오히려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곳이 머슴 집안에서 천자를 배출케 한 명당이라는 사실(?)에는 공감이 잘 안 간다. 글쎄 범부(凡夫)의 눈으로 명당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겠냐만, 어쨌거나 여기에 천자묘가 들어서게 된 이유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급히 하산해 은주사 주지 스님께 그 전설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들은 한천자 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옛날, 춘천시 북산면 내평리에 한(漢)씨 성을 가진 마음씨 착한 머슴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머슴이 사는 집에 스님 두명이 찾아와 하룻밤 쉬어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야박한 주인은 방이 없다며 냉정하게 거절하다가 못 이기는 척하더니, 머슴 방이라도 좋다면 거기서 묵고 가라고 했다.
 
머슴은 스님들을 정중히 자기 방으로 모셨다. 그러자 봇짐을 푼 스님들은 머슴에게 달걀을 세 알만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머슴은 스님들이 육식을 하지 못하니 대신 달걀이라도 먹으려나 보다 싶어 얼른 구해 와 먹기 좋게 쇠죽 끓이는 데다 삶아서 갖다 드렸다.
머슴은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없을까 싶어 문 가까이 갔다가  스님들이 조심스럽게 나누는 대화를 그만 엿듣게 되었다. 스님들은 가리산에 있다는 명당 터를 확인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스님들의 대화는 이러했다.
 
가리산 명당 터에 달걀을 묻어 두고 기다려 보아 이것이 축시(丑時;오전 1~3시 사이)에 부화돼 홰를 치면 천자가 나오는 터가 틀림이 없고, 인시(寅時;오전 3~5시 사이)에 부화하면 역적이 날 자리라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엿들은 머슴은 웃음이 나왔다. ‘삶은 달걀에서 웬 병아리’ 하면서도 엿들은 사실이 탄로날까 봐 차마 그 이야기를 털어놓지를 못했다. 한밤중이 되자 스님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옆에서 잠자는 척했던 머슴도 슬그머니 일어나 스님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스님들은 소양강을 건너더니 물노리에 있는 가리산 중턱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어느 산자락에 이르러 달걀을 파묻어 놓고는 부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천자가 나온다는 축시가 지나고 인시까지 지나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숲속에서 이를 몰래 지켜보던 머슴은 또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아무렴 삶은 달걀에서 무슨 병아리가 나온다고 저 야단들일까.’
머슴이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묘시(卯時;오전 5~7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삶은 달걀을 묻어 놓은 곳에서 닭이 튀어 나오며 홰를 치는 게 아닌가. 그러자 스님들은 투덜 거리며 일어났다.
 
“에이 헛수고만 했네. 하필 묘시에 닭이 나올 게 뭐람. 이곳은 천자도 역적도 아니 날 곳이 아닌가.”
그런데 한 스님은 못내 아쉬운 듯하면서 한마디를 보탰다.
“닭이 묘시에 홰를 쳤더라도 금으로 만든 관을 쓰고, 황소 백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나면 천자가 나올 수 있는 명당이 될텐데. 그런 정성을 쏟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더니 두 스님은 산을 내려가 버렸다.
집에 돌아온 머슴은 스님들의 이야기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몇 달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을 그곳에 옮겨 묻기로 결심했다. 역적이 나든 말든 종놈의 신세보다야 더 낫지 싶어서였다. 궁리 끝에 머슴은 금관을 대신해 노란 귀리(볏과의 두해살이 재배식물로 열매를 먹는다)대로 시신을 싸서 묻었다. 그러나 머슴 팔자에 황소를 잡아 제사를 지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백 마리를 장만해야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쉽지만 그냥 돌아서야 할 참이었다. 주변 정리를 하고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쉬고 있는 동안 몸안에 있던 이들이 난리법석을 떨어 댔다. 참다 못한 머슴이 윗옷을 벗어 들고 이를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가 어찌나 머슴의 피를 많이 빨아 먹었는지 그 크기가 엄청났다. 머슴은 이를 잡으며 무심코 ‘어따 이놈의 이들 꼭 황소만하네’ 하고 소리를 연발했다. 그러길 벌써 백여 마리째를 잡아 무덤 앞 잔디에 떨어뜨렸다. 엉겁결에 머슴은 황소 대신 황소만한 이를 백 마리나 제물로 올린 셈이 되었다. 머슴은 이제사 아버지의 유택을 마련해 드렸다는 안도감을 갖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나서 며칠이 지났다. 한밤중에 뇌성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너는 빨리 일어나 아이를 데리고 집을 떠나라.”
머슴은 그 소리에 너무 놀라 잠자는 아이만 깨워 급히 산으로 올라갔다. 얼마 후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온 동네가 삽시간에 물에 잠겨 버리는 게 아닌가. 머슴이 살던 집도 논밭도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겨우 목숨을 구한 머슴은 살길을 찾아 북으로 북으로 한없이 올라갔다. 그러자 어느덧 중국을 넘어가는 국경 근처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중국에서는 천자가 죽고 후사가 없어 새 천자를 구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 방법이 독특했다. 관리들이 길가에 짚으로 만든 북을 걸어 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쳐보게 했다. 천자가 될 인물은 짚북을 쳐도 소리를 낸다는 것이었다.
한씨 머슴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북을 쳐보았는데 역시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냥 지나치려는데 관리가 머슴의 어린아이에게 ‘너도 사내자식이니 한번 쳐봐라’며 농담처럼 말했다. 얼떨결에 북채를 쥔 아이가 힘껏 북을 내리치자 놀랍게도 ‘쿵, 쿵, 쿵’ 하면서 북이 울렸다. 관리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엎드려 코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이후 머슴 아들은 중국의 천자가 되었다. 이후로 한씨 머슴이 살던 마을은 한터로 부르게 되었고, 그 묘소 자리는 한천자 묘가 돼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기(氣)가 응집된 명당으로 소문

은주사 주지 보경 스님은 또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한천자 묘는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 볼품이 없지만 골짜기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기운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세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곳 마을 사람들은 은주사(연국사) 산신각 자리에서 매년 삼짇날(음력 33일)마다 가리산 산신께 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때는 산 돼지를 마을에서 골짜기 입구까지 몰아서 오는데, 이 돼지가 산 중턱쯤 올라오면 급사(急死)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산 기운에 의한 것인데, 마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어 돼지를 일부러 죽이지 않고 이곳까지 끌고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정육점에서 돼지 머리만 사가지고 와서 제사를 지내는 통에 별난 의식을 보기가 힘들게 됐다고 한다.
 
또 이곳이 기가 세다는 소문을 믿고 사실 확인차 왔던 한 카메라맨은 한천자 묘를 촬영하다 멀쩡한 카메라가 고장이 났는가 하면, 내려오는 도중에 반나절 이상을 제자리서 뱅뱅 돈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모두가 기가 센 곳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이다.
또 이곳에서는 말을 잘못해 패가망신(敗家亡身)한 사람도 있다. 은주사와 천자묘 위쪽에는 과거 광산을 한 흔적이 있다. 일부에서는 중석을 캐던 곳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중요한 광석을 캔 곳이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어쨌든 광산이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이때 광산을 하던 주인이 ‘가리산 밑을 몽땅 파내 산을 무너뜨리겠다’고 호언했는데, 이 말이 퍼진 뒤 얼마 안 돼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여 결국은 야반도주하는 신세가 됐다고 한다.
물노리 사람들은 날이 가물거나 마을에 좋지 않은 일들이 계속해 일어나면 천자묘를 파묘해 보는 풍습이 있다. 그때마다 천자묘 터에서는 누군가 몰래 묻어 놓은 시신이 나오곤 했다. 명당 덕을 보려는 사람들이 마을 사람 몰래 시신을 묻어 놓고 가버리기 때문이었다. 천자가 난 자리에 함부로 묘를 쓰면 그 마을에 재앙이 내린다는 속설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더 큰 재앙을 피하기 위해 파묘를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액(厄)만 가져다 주는 곳은 아니다. 일부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복과 행운을 주는 곳으로 입 소문이 나 있을 정도다. 강원도 심마니들 사이에서는 해마다 이곳에 와 제일 먼저 벌초하는 사람이 산삼을 캔다는 믿음이 전하고 있으며, 일반인들도 가장 먼저 잡초를 뽑아 주면 그 집안이 한 해 동안 운수대통한다는 소문이 나 있을 정도다. 덕분에 천자묘는 봉분이 다 내려앉고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지만, 잡초가 자랄 틈이 없다. 풀 하나 뽑고 복 달라고 이곳까지 찾아오는 중생들 때문이다.
 
얘기는 길고, 갈 길은 먼데

그렇잖아도 해가 짧은 산동네. 배편도 없고 차도 없으니 자고 가라는 주지 스님의 호의를 마다하고 산길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다음날 서울에서 오랜 지인(知人)과의 선약이 있어서였다. 낮에 낚시를 하러 들어온 몇몇 지프를 눈여겨봐 놓은 것도 내심 믿는 구석이었다. 연국사에서 10여 분 내려오자 이번에는 고깔바위가 눈에 띄었다. 사실 여름에는 숲이 우거져 눈에 잘 띄지는 않는다. 다만 스님한테 정확한 위치를 언질받고, 주변을 잘 살펴본 덕분에 대략 그 모습을 확인하고 올라가 볼 수가 있었다.
 
고깔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싶지만 기실 고깔은 또 어떤 모양새인가. 소위 사내의 심볼을 닮은 남근석(男根石) 모양이 아닌가. 그저 점잖은 이름이 고깔바위인 셈이다. 그런데 이 바위 측면에는 구멍이 뻥 뚫린 여근석(女根石)도 함께 있다. 그래서 영험이 배(培)가 되는 것일까. 이곳은 1년 내내 무속인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답사한 날도 장마철임에도 불구하고 비닐 하우스까지 설치해 놓고 기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옆에는 아예 자연석으로 구들을 만들어 놓아 언제든지 불을 지필 수 있도록 해놓았다. 산불 내기 꼭 좋은 시설(?)이어서 아찔하게 했다. 어둠이 시작된 산속에서 급히 카메라를 빼들고 몇 장을 담은 뒤 다시 마을을 향해 구보를 시작했다. 우선 낚시꾼들이 모여 있던 길가로 나가는 것이 급했으니까.
 
결국 나루터까지 나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미 이곳에 있던 꾼들은 빠져 나간 뒤였고, 춘천 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은 강 건너에 있었다. 다행히 물이 빠진 지류를 건너 30~40미터의 벼랑을 기어오르는데, 바위는 미끄러워 잡기 힘들고 잡목은 뿌리가 짧아 잡는 대로 뽑혀 버리니 도무지 기댈 곳이 없었다. 그것도 벼랑 중간에서 당한 일이고 보니 진퇴양난이 다름 아니었다. 겨우 혼신의 힘을 다해 벼랑을 기어오르고 나니 이번에는 오른손 검지에 통증이 왔다. 어둠 속에서 살펴보니 손톱이 갈라져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땀 닦던 손수건으로 돌려 묶고 다시 길을 재촉했는데, 한 시간을 걸어도 민가가 보이질 않는다. 아니 민가는 그만두고 아무런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세 갈래 길을 만나고 보니 방향 감각이 제로가 됐다. 자칫하다가는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온갖 상식을 다 동원해 큰길로 향하는 쪽을 찾아보지만 소득이 없었다. 길 넓이나 차량이 다닌 흔적도 비슷했고, 산으로 가려진 방향도 똑같았다. 혹시 전봇대가 큰 쪽이 나가는 길이 아닌가 싶어 이쪽저쪽을 다니며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기도는 이럴 때 하라고 있던가. 결국 오른쪽 길을 택해 30분쯤 더 걷자 불빛이 들어왔다. 너무 반가워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주인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주인은 깊은 산중, 그것도 한밤에 배낭을 멘 사람이 들이닥치자 깜짝 놀랐고, 그 사람들이 너무 당황하는 바람에 나는 덩달아 놀란 셈이다.
이들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로 시골집을 사서 별장처럼 개조하고 있던 터였다. 저녁 늦게까지 공사를 하다가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중이었다. 이들한테 큰길로 나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느냐고 묻자 경계의 눈빛으로 다시 한번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면서 ‘정말 당신 뭐하는 사람이요’ 하고 묻는다.
여차저차해서 가리산에 있는 한천자 묘를 찾아갔다가 오는 길인데 배편도 끊기고, 낚시 차량을 얻어 탈 양으로 무작정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하자, ‘허참 별 사람 다 보겠군’ 하더니 자리 한 켠을 내주었다.
 
“이보시오, 여기서 큰길까지만 해도 내 지프로 시간 반 이상 걸려요. 그런데 이 밤중에 걷겠다니 말이 되오. 큰길에서 춘천까지는 또 얼마나 걸리는데.”
낮에 내리다 그친 비가 다시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고, 시장한 뱃속에서는 먹을 것을 넣으라고 아우성인데, 밤 거리로 내밀리다가는 큰일나지 싶어진다.
“저, 그러면 오늘 밤 내가 이곳에서 보초를 서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보아하니 건축 자재도 많고 비싼 연장도 있는 것 같은데…….”
그러자 주인인 듯한 사람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소, 아무 말 말고 이 고기나 좀 들면서 천자묘 이야기나 해주소. 재미있으면 하룻밤 재워 드리리다.”
이 소리에 적이 안심하면서 한천자 묘 전설에다 ‘뻥’까지 섞어 가며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 이날처럼 내 입이 바빴던 적도 드물었다.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먹으랴, 전설을 말하랴. 안 그랬겠는가.
 
늦은 밤, 담요 한 장과 베개를 받아들고 일꾼들과 함께 방에 누웠는데 이번에는 더 큰 걱정에 잠이 안 왔다. 일꾼 중에 김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얼마나 코를 요란하게 고는지, 차라리 길을 계속 가다가 바위 밑에서 새우잠을 자는 게 더 낫지 싶어졌다. 이날 밤 영원히 잠 못 들 것 같았는데 새벽녘 그만 살포시 잠이 들었나 보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에 잠이 깼다. 방안까지 뿌려 대는 빗줄기는 그 기세 또한 엄청났다.
아침까지 내리던 비가 잠시 소강 상태에 빠지자 서둘러 이 집에서 빠져 나와 아랫마을 선착장으로 나갔다. 골짜기마다 불어난 물 때문에 등산화는 이미 장화로 변해 버렸고, 청바지는 흙탕물 범벅이 됐다. 물에 빠진 쥐 모양으로 선착장에서 아침배를 기다리며, 전날 소양댐 휴게소에서 산 빵과 음료수로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그래도 어젯밤 몇 점 얻어먹은 고기 덕분에 배고픔은 면할 수가 있었다.
 
10시가 조금 넘어 배 한 척이 들어왔다. 혹시나 나를 보지 못하고 그냥 갈까 싶어 실성한 사람처럼 윗옷을 벗어 흔들며 소리를 질러 댔다. 그도 그럴 것이 선착장에는 나 혼자만 있었기 때문이다. 반갑게 배에 올라타자 이곳에도 손님은 역시 나 하나뿐이 아닌가.
이날 늦게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경찰이 다가오더니 신분증 좀 보잔다. 하기사 내 꼴이 오죽했으면 요즘 세상에 검문을 다 당할까.
이날 집에 와서 샤워하고 TV를 켜니 춘천지방에 호우경보가 내려 있었다. 아, 이날 밤 공사중인 서울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한없이 걸었다면 중간에 만난 폭우를 어찌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한 것은 묘지를 찾아 취재할 때마다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망자(亡者)가 자신의 유택을 찾아온 손님에 대한 배려 때문일까. 깊은 산중 잡목과 잡초에 덮여 있는 묘터도 단 한번에 찾아낼 때가 많다. 그리고 되돌아올 때도 차가 끊긴 시간이지만 용케도 다른 탈 것을 만나게 되어, 헛 발품을 파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번에 취재한 천자묘도 장마철에 무리한 도전이었지만 용케도 모든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잖은가. 서울에서의 선약까지도 지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참 묘한 일이다. 전설만 듣던 천자묘 취재도 이렇게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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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0.18 12:57

    첫댓글 글 출처가 어딘지 명확하게 밝혀 놓는 것이 좋겠습니다.

  • 작성자 11.10.19 16:45

    출처 : 다음블로그 知止(류의옥)

  • 14.12.21 21:58

    아주 아아주 재밌게 읽었네요. 지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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