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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 18. (재)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대한민국경제학박사 제1호 백영훈 박사님께 방문을 허락받고 2019. 2. 19. 10:00 여 섯분의 이사님들이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파독광부의 대부 백영훈 박사님께서 출근하셔서 이우연 회장님과 심극수 수석부회장님의 인사를 받고 명함을 교환하고 계십니다. 1930년생인 백영훈 박사님은 아직도 정정하시고 건강해 보이셨다. 벽에 걸린 사진을 설명하시는 백박사님은 감회가 깊으셨다. 박정희 대통령 백영훈 통역 이후락(비서실장 서 있는 분) 아데나워 수상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눈물을 흘리시며 안데나워 수상에게 "대한민국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같은 분단국가로서 일제의 식민지와 6.25 동족상잔으로 전국토가 황폐화 돼 있고 미국의(케네디 대통렁) 원조마져 끊긴상태의 경제상황을 설명하였다고 한다. 아데나워 총리는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고 하였다. 정초에 파독광부 대부인 본인(백영훈 박사)을 찾아 준 것에 감사한다. 여러 분들은 대한민국의 경제개발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들로서 영웅들이고 또 앞으로 할 일이 많다.
1963년 12월 21일은 외화벌이의 첫 삽을 떳고 당시 국민소득은 67불로 전 세계 200여 국가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나라였다. 지금은 3만불 시대가 되었지만 여기서 만족할 것이 아니고 제2차 경제개발을 한다는 각오로 5만불 시대를 파독광부가 열어주기 바란다. 오늘의 풍요를 가져 온 여러분들의 헌신이 후손들에게 알리는 것도 중요하고 또 주변국가들의 야욕이 끝없이 상존하는 이상 안심할 수도 없다. 만약 1960년대 초 파독광부가 없었다면 피폐한 경제는 공산주의의 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분들은 영웅이다. 파독광부들은 대한민국 남북통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셨다. 1955년 고려대학교 4학년 때 최우진 교수가 백영훈 너는 독일어를 공부하라고 하여 독일어 사전도 없을 때 독일어를 공부하던 중 이승만 건국대통령께서 국비장학생을 뽑는다고 하여서 신청하고 기다리던 중 발표날이 다가와서 가보니 발표자 명단에는 오직 백영훈 한 사람의 이름만 있더라는 것이다. 잘사는 독일 경제부흥이 일어나는 독일을 배우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독일의 경제를 배워오기 위하여 경제학도를 국비장학생으로 뽑아서 독일로 보냈던 것이다. 전북 김제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어머니의 기도로 백영훈은 프로펠러 쌍발기를 타고 미군들이 휴가가는 대 끼여서 동남아쪽으로 가고 있는데 주머니에는 단돈 10달라 뿐이었다고 한다. 이돈은 독일에 내려서 학교 찾아갈 때 쓰려고 한 것이어서 기내식도 추가 지불해야 하는 줄 알고 안내양이 음식을 가져와서 거절하고 굶으면서 홍콩에 내렸고 1달라로 바나나를 샀더니만 한 봇따리어서 푸랑크푸르트 공항갈 때까지 바나나만 먹었고 이것이 설사가 되어서 혼이 난 경험담을 들려 주어 폭소와 같이 가난을 간접경험해 보기도 하였다. 5.16군사혁명을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케네디를 찾았으나 아시아의 군사정권의 도미노 현상을 막기위하여 문전박대 당하여 귀국한 후 정래혁 상공부장관을 독일로 보내 상업차관을 해 오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이때 백영훈 박사는 중앙대햑교 교수로 있었고 임영신 총장님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수업 시간에 군인들이 들어닦쳐서 백영훈 교수를 병역미필자로 논산훈련소로 호송하였다고 하였다. 독일에 가서 상업차관을 받아오라는 특명을 받은 정래혁 상공부장관은 독일말 잘하는 사럼을 찾던 중 독일에서 경제학박사로서 논산훈련소의 백영훈 박사를 알고 급히 사람을 보내 모셔왔고 장관의 통역관으로 독일로 갔다고 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독일에 절대로 차관을 해주지 말라고 하여서 독일은 정래혁 상공부장관의 요청을 들어 줄 수 없었다고 한다. 빈손으로 귀국해야 할 지경에서 백영훈 박사는 은사를 찾아가서 1주일 동안 조르고 또 졸라서 경제성차관을 만날 수 있었고 우선 2만불의 차관을 허락 받았는데 지급보증을 해 오라는 요구를 들어 줄 수 없어서 영국 홍콩의 은행들에게 부탁을 하여도 거절 당했다고 한다. 이 때 백영훈 박사님의 학교 친구였던 "슈미트"가 경제성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국에는 실업자가 많고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사람이 필요하는 광부 5천명을 보내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여서 5만명이라고 보내 줄 수 있다고 하였단다. 그래서 광부들의 임금을 담보가 지급보증이 되어서 정래혁 상공부장관은 빈손이 아닌 광부 5천명의 제안을 받고 귀국했다는 것이다. 광부 500명 모집(고졸 이상)에 4만명이 몰렸고 고등실업자(학사)들이 대부분 선정이되어서 첫 출국 1963년 12월 21일 에어프랑스에 247명이 파견되었다고 설명하셨다. 여러분들이 애국자인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UN한국조사단이 와서 둘러보고 난 후 인도출신 미스터 메논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를 "대통령 각하 쓰레디더미에서 장미꽃이 필수 없습니다. 그러하니 UN의 신탁통치를 받으십시오."라고 하였다고 한다. 쏘련이나 중공 일본이 야욕을 드러내 놓고 이런 분위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때의 빈곤을 파독광부가 해결하여 줌으로써 대한민국이 공산화 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1930생 박사님의 손은 아직도 따뜻하였고 "너희들은 앞으로 할 일이 많다. 제2의 경제개발의 시발점으로 생각하고 5만불 시대를 열어라. 파독광부들만이 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이 책을 국민도서로 채택하여 읽도록 하여라. 정가 15,000원 인데 원가 8천 원이다. 12,000원에 팔아서 수입도 챙기고 또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시켜 국민소득 5만불 시대를 열어라 명령이다. 나를 보아라 70대 중반 80대 시작이 무엇이 나이가 들었다고 노인 행세를 하느냐? 다들 일어서라!" (재)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님으로써 "국가 건설의 새 역사 창조"라는 슬로건 으로 아래와 같은 계획지를 우리들에게 주시고 설명을 이어나가셨다. 한국 산업 개발 공사 라는 타이틀을 파독광부간호사연합회로 고치고 새 역사를 창조하라고 당부하셨다. 펑펑 내리던 눈이 그치고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연초(우수 보름날)에 찾아 준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여 점심을 이태리식 레스토랑에서 초대해 주셨고 와인을 마시는 방법을 설명해 주시고 음미하는 방법과 또 독일어로 보리수를 들러 주셨다. 독일 정부가 주는 기사칭호를 자랑하시고 벤츠 자동차를 대통령 전용기에 싣고 와서 전해준 이야기도 들려 주셨다. 지하 영상실 "그 때 이후"라는 영상을 제작한 것을 보여 주시면서 역사적인 순간에 촬영해 놓은 것은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인데 다 독일 정부와 친구의 도움이 였다고 말씀하셨다. 방문시 서양란을 준비해 갔는데 아주 고맙다고 사진촬영을 하였고 비서를 시켜서 연구원의 카메라로 촬영도 하였다. 연구원은 남부순환도로 예술의 전당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고 연구원이 들어서기 전에 정수영 회장과 김우중 회장이 아파트 지으려고 샀던 땅을 "도시의 교통순환을 위하여는 절대적으로 순화도로가 필요하니 아파트 건설을 지양하고 도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박사님이 주장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제가를 받아서 순환도로가 만들어 졌고, 정주영 회장은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재단법인 한국산업개발연구원"을 지어서 선물하였다고 설명하셨다. 거인은 거인을 알아보는 혜안을 가졌다고 하겠다. 옥상에서 남부순환도로를 바로 뒤로 하면서 촬영 하였다. 백영훈 박사님의 집무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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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읍니다
모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