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희, 「화양연화」
―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은 과연 언제였을까
어떤 마음들이
저 돌담을 쌓아 올렸을까
화가 났던 돌, 쓸쓸했던 돌, 눈물 흘렸던 돌,
슬펐던 돌, 안타까웠던 돌, 체념했던 돌,
그런 돌들을 차곡차곡 올려놓았을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을
때로는 발길질에 채였을
어느 순간 차였다는 사실도 잊은 채
제자리 지키고 있었을
조금은 흙 속에 제 몸을 숨겼을
심연 속에서 푸른 눈을 뜨고 있었을
그런 것들을 일으켜 세웠을까
저자거리를 헤매이던 마음들이
그 바람 불던 거리에서
자꾸만 넘어지던 마음들이
자기 몸을 세우듯
돌을 쌓아 올려
돌담을 세워
태풍에도 끄떡없는
울타리를 만들었을까
하나하나의 돌멩이들이 채워 논 풍경
그 돌담 밖으로 목련꽃 봉오리 벙그러질 때
그리운 추억의 이름으로 견고해지는 봉인
아름다운 시절을 소망하는 합장하는 손들
● 시_ 조윤희 – 1955년 전남 장흥 출생. 시집 『모서리의 사랑』, 『얼룩무늬 저 여자』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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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_ 『얼룩무늬 저 여자』(발견)
배달하며
변호사 양지열의 에세이 『당신의 권리를 찾아줄 착한 법』을 읽기 시작했다. 초장부터 꽤 재밌다. ‘언제부터 법률이 정한 사람으로 보아야 할까?’ 대한민국 민법에서는 아이가 어머니 몸 밖으로 완전히 나왔을 때로 보는 것, 즉 ‘전부노출설’이 일반적이란다. 전부노출설이라…적나라하게 날것인 이 조합어의 묘미라니. 생경하고 우스꽝스럽고, 그러나 적확하다. 이런 야릇한 말맛이 법률 공부하는 사람들의 지루함을 간간 덜어줬으리라.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몰랐던 듯도 하고 알았던 듯도 한 사실을 깨달으니 갑자기 숨이 막힌다. 대부분 사람들처럼 나도 분명 법의 보호를 받았으면 받았지 방해를 받지는 않을 터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상상을 해본다. 가령 사랑법이라는 게 있다면,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법률이 정한 사랑으로 보아야 할까?’ 알 수 있으련만. 사랑의 의무와 권리의 세목들을 명시한 ‘사랑의 법전’이 있으면 사랑의 약자들을 보호할 수 있으련만. 항상 자기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랑의 약자들. 기실, 사랑의 강자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혹은 여자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뜻한다지. 아름답고 쓸쓸한 말이다. 시인 조윤희가 좋아하는 감독 왕가위도 같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나도 왕가위를 좋아한다. 가령 영화 <동사서독>에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당신은 내 옆에 없었더랬죠.”, 이런 대사! 아주 사람을 호린다.
「화양연화」는 사랑이 견고해지는 과정을 그린 시다. 화자는 어쩌면 영화 <화양연화>에 나온 그 돌담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돌담 앞에서 옛사랑을 돌이켜보며 그는, 그 사랑의 마음이 점점 더 돌처럼 단단해지는 걸 느낀다. 마지막 세 행이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지금은 없는 사랑, 존재하지 않는 사랑이지만, ‘그리운 추억의 이름으로 견고해지는 봉인’, 봉인됨으로써 그 사랑은 결코 흩어지지 않는다. 봉인된 사랑! 세상 모든 봉인된 사랑, 돌처럼 단단한 그 사랑들이 채곡채곡 쌓여 빛나는 담을 이룬 화양연화!
문학집배원 황인숙
첫댓글 가령 사랑법이라는 게 있다면,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법률이 정한 사랑으로 보아야 할까?’ 알 수 있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