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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 신학이 짧은 나머지 ‘존 칼빈 선생님 구원론을 받들어 구원파 교리를 비평하신 예장 고신 박영돈 교수님 구원론’을 이단시함으로써 이단성을 드러낸 예장 합동 정이철 목사가 또 자신의 이단성을 드러내는 줄도 모른 채 청교도 신학자들 ‘준비은혜(회심준비) 교리’를 두고 {바른 믿음}에서 이단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일, 선무당으로서 자신이 자신을 잡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페북} 제 담벼락과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두 그룹에 올린 제 글을 다듬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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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 목사님과 존 머레이 목사님 ‘준비은혜’론:
‘믿음의 씨’를 품고 예정된 나무를 향해 ‘가시 채’를 휘두르며 다가오는 중생의 바람!
朴埰同 (2019.04.11.22:24)
{바른 믿음} 정이철 <영국에서 출현한 회중교-청교도 신앙의 역사적 배경>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450
{바른 믿음} 정이철 <16세기 장로교-청교도 운동과 회중교-청교도 운동의 시작>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458
{바른 믿음} 정이철 <회중-청교도에서 발전시킨 회심준비론이란 무엇인가요?>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465
{바른 믿음} 정이철 [Pastor 서문강 is GOOD in English but NO GOOD in Saving Faith]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476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돼,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 3:24)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하)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나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을 ‘구별’할 수는 있으나 결코 ‘분리’해서는 안 되듯이, 그리스도 ‘능동 순종’과 ‘수동 순종’은 ‘구별’할 수는 있으나 결코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똑같이 갈라디아서 3장 24절이 가르치는 대로 ‘율법’과 ‘복음’은 ‘구별’할 수 있으나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바른 믿음}에서 정이철 목사가 ‘존 칼빈 선생님 준비은혜(회심준비)론을 이어받아 이를 변주(variation)하신 청교도 신학자들 준비은혜(회심준비)론’을 두고 돈키호테 칼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율법의 제2용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의 기능’을 아는 정이철 목사···. 그러나 요한일서 3장 9절에 적힌 “하나님의 씨”, ‘믿음의 씨(semen fidei)’로 성화ㅡ확정(결정)성화ㅡ된 중생자 삶의 지침으로서 점진성화 기능을 하는 율법의 제3용도’를 잘 모르는 정이철 목사···. 신학이 짧은 정이철 목사가 ‘중생의 바람이신 성령께서 예정된 나무에게 믿음의 씨(중생의 씨)를 심으시는 순간중생 사역, 성령의 특별 사역(내소, internal calling)’만 알고, ‘예정된 나무를 위한 믿음의 씨를 품으신 성령께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사역, 예정된 나무를 꺾으려고 책망하시는 사역, 중생하지 못한 예정된 나무를 서서히 흔들며 예정된 나무를 향해 다가오시는 사역, 성령의 일반 사역’은 모르나 봅니다. ㅠㅠ. 결코 ‘분리’해서는 안 되는 ‘율법’과 ‘복음’을 ‘분리’한 정이철 목사가 ‘성령의 일반 사역으로서 보편(일반) 부르심(외소, external calling)’이라는 용어는 아나 모르겠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바울 사도 말씀이 뜻하는 대로 믿음은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성령께서는 예정된 나무에게 율법 같은 하나님 말씀을 조명해 ‘중생하지 못한 예정된 나무가 뿌리박은 땅ㅡ예정된 나무 영혼의 밭ㅡ’을 갈아엎으신 뒤 초자연의 씨인 ‘믿음(생명)의 씨’를 뿌리십니다.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해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음이요, (요 16:8~9)
중생하지 못한 예정된 나무에게 복음 전도자나 설교자를 통해 성령께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 율법’ 설교를 들려 줘 죄를 책망하시면, 중생하지 못한 예정된 나무 영혼 상태는 어찌 돼야 할까요?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께서 예정된 나무에게 죄 각성과 함께 죄와 심판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그리스도께로 가려는 열망, 삭개오처럼 그리스도를 보고자 나무 위로 올라가는 열망을 일으키시지 않을까요?
중생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구원 받을 수 있는데, 삭개오가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 그분 일반(보통) 은혜’가 없는 ‘타락’한 자유의지를 발동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알고 싶어 나무 위로 올라갔을까요? 아니면, 성령께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을 사용해 삭개오 죄인 됨을 각성케 하는 사역을 하셔서 ‘죄인으로서 멸망(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삭개오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하심으로써, 영혼이 각성된 삭개오로 하여금 구원(영생)을 열망하게 해 나무 위로 올라가게 만드셨을까요?
구원을 열망해 나무 위로 올라간 삭개오를 보시며 주님께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셨을 때, 주님 심중에 있는 말씀은 어떤 말씀이었을까요? ‘삭개오야, 너에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았다. 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 순간중생(구원)이 멀지 않았다.’는 말씀이겠지요.
신학이 짧아 청교도 신학자들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이 있는 율법을 사용하시는 성령, 성령의 일반 사역으로서 준비은혜’론, ‘갈라디아서 3장 24절과 로마서 3장 20절과 10장 17절과 요한복음 5장 39절과 16장 8절~9절과 마가복음 12장 34절이 그 증거성구’인 ‘청교도 신학자들 준비은혜 교리’에 담긴 가치를 모른 나머지 ‘율법’과 ‘복음’을 ‘분리’한 정이철 목사···. 그래서 윌리엄 퍼킨스 목사님이나 존 오웬 목사님 같은 청교도 신학자들을 두고 “회중교”라며 돈키호테 식 마녀사냥을 일삼는 정이철 목사가 아래에 인용하는 주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합니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막 12:34 상)
주님께 ‘겸비’하게 무릎을 꿇어 “선하신 선생님,” 하며 영생을 얻는 길을 여쭸다가 재물이 많은 나머지 근심하며 주님을 떠난 부자 관원···. 그리고 부자 관원이 떠난 뒤 제자들에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는 도리, ‘하나님만의 절대 대권 사역으로서 중생’의 도리를 말씀하신 주님···. 부자 관원, 그를 주님께서는 왜 ‘사랑’하셨을까요?
그가 여쭈되 “선생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막 10:20~21 상)
‘핸드릭슨 {마가복음 주석}’에 따르면, 여기에 쓰인 “사랑” 성경 원어 헬라어는 하나님 사랑에서 ‘최고의 사랑, 극치의 사랑’을 뜻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물론, 중생하지 못했지만, 중생하지 못했음에도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기억하시며 눈을 떼시지 않는 자, 중생하지 않았을 때도 하나님께 ‘극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는 고넬료 같은 예정된 나무입니다.
그가 경건해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돼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해 보고 두려워 “주여, 무슨 일이나이까?” 하니, 천사가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돼 기억하신 바가 됐으니,”(행 10:2~4)
만유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화평의 복음’을 들어 알고 있으나(행 10:36~37) ‘그 예수께서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심을, 이사야서에 예언된 어린 양이심’을 아는 믿음이 없는 채 영생을 갈망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구제와 기도에 힘썼던 ‘경건’한 고넬료···. 중생하지 못한 경건한 구도자求道者인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를 ‘흠향’하신 하나님···.
고넬료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 ‘예정된 나무로서, 성령의 준비은혜로 영혼(양심)이 각성돼 영생(중생)을 갈망하는 경건한 구도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분 ‘최고의 사랑’!!!!!!! 고넬료의 ‘하나님 경외(하나님 사랑)와 구제(이웃 사랑)’는 바로 이 ‘하나님 최고의 사랑, 극치의 사랑’이 낳은 열매였습니다. 예정된 나무에게 바람처럼 서서히 다가오시며 죄와 심판과 의를 책망하시는 성령께서 고넬료 마음을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부복하게 하는 ‘겸비’, ‘겸비’하게 하심으로써 맺은 열매였습니다.
예정된 나무를 ‘죄와 의와 심판의 가시 채’로 책망해 구도자 길을 걷게 하시는 사랑···. 바로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 24절을 근거로 존 칼빈 선생님과 청교도 신학자들께서 밝히신 진리, ‘성경의 진리’로서 ‘준비은혜’론입니다.
믿음의 씨를 품고 책망의 가시 채를 휘두르며 예정된 나무를 향해 다가오는 중생의 바람······.불가항력(저항할 수 없는) 초대형 태풍으로서 중생의 바람···. 그 핵이 99.9%까지 다가왔음에도 꺾이지 않으려고 주님을 핍박하며 끝까지 저항하는 ‘생’고생을 했던 우직한 소(牛)로서 초대형 ‘거목巨木’이셨던 바울 사도···.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해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 26:14 하)
정이철 목사가 “날마다 맥도날드에서 {기독교 강요}를 읽고 있다.” 고 밝혔는데,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가 {기독교 강요 제2권} [7장] <11항: 율법이 초등교사 역할을 함>을 읽었더라도, 이 항 마지막 문장 “하나님을 모르는 가운데서 이리저리 더듬거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율법의 굴레에 제재를 받고 하나님을 향해 모종의 두려움과 존경심을 갖고 있다가, 성령으로 중생하면서부터 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는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음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6문답>입니다.
문: 도덕법이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답: 도덕법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도 소용이 있습니다. 그들 양심을 그것으로 일깨워 장차 임할 진노를 피하려고 그리스도께로 그들을 나아가게 하거나, 혹은 죄의 상태와 죄의 길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경우 그들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게 해 그 저주 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존 칼빈 선생님께서 ‘로마교 추기경 사돌레토’에게 쓰신 답신, [사돌레토에게 주는 답신]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칼뱅 소품집 제1권} 박건택 편역 (경기: 크리스천르네상스, 2016)’ 547쪽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먼저 자신들을 살펴보도록 권고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단지 피상적이고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양심을 하나님 법정 앞에 세우기 위해서 하고, 자기 자신의 불의함이 엄격하게 확신될 때는 모든 죄인들에게 선포된 심판의 엄격함을 생각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리해 그는 자신의 비참함에 놀라고 당황해 하나님 앞에 부복해 엎드려 겸손하게 되고 자신감을 모두 벗어 버리며 마지막 멸망에 던져진 자처럼 신음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들은 우리 구원의 모든 부분이 완성되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 가운데만 유일한 안식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래에 링크하는 글은 현대 개혁신학자들께서 “20세기 개혁신학 보물”로 높이시는 성경의 진리, ‘단회 순간중생 시 확정(결정, 단회)성화’ 진리를 해박한 성경 원어 실력으로 밝히신 존 머레이 목사님, 20세기 개혁신학 거목 존 머레이 목사님 준비은혜론입니다.
존 머레이 {조직신학}<준비은혜>:
개혁 신학 ‘준비은혜라는 과정이 있는 단회 순간중생 시 회심’론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http://cafe.daum.net/reformedcafe/JGQd/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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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한 존 머레이 목사님 글을 ‘운영자 이상 보기’로 바꾼 까닭으로 아래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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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은혜의 목적
하나님 섭리의 모든 다른 국면에서 그렇듯이 하나님의 영광이 보통 은혜의 궁극 목적이지만, 우리는 모든 것들 최종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만들어 내는 속성의 현시라는 궁극 목적에 종속해 있는 보통 은혜에 의해 장려되는 더 가깝고 특수한 목적을 탐구해야 한다. 특수한 목적은 하나의 목적으로 단순화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논의된 본문들에서 이미 보여졌던 명백한 하나의 가까운 목적이 있다. 그것은 보통은혜는 특별 은혜나 구속 은혜의 목적을 돕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 은혜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 전체의 영화榮化라는 특별한 목적이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 이름의 영광이라는 긍극 목적을 차례로 갖는다.
하나님 구속의 목적은 이 세상의 역사 중심에 놓여 있다.
…(중략)…
보통 은혜에 의해 마련되는 그러한 삶의 영역 또는 역사의 폭넓은 흐름은 구속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지지되고 보존되는 이 세상은, 특별 은혜의 활동이 일어나서 하나님 구속의 목적을 성취하고 선택된 자들 전체의 완전을 성취하게 하는 장이며 발판이다.
보통 은혜는 특별 은혜로부터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특별 은혜는 보통 은혜에서 그 선결 조건과 활동의 장을 얻는다. 보통 은혜가 없다면 특별 은혜는 그 구조를 세울 재료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다. 보통 은혜는 잘 짜인 구조물이 주 안에서 성전으로 지어져 갈 수 있는 장과 재료를 제공한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시고 하나님께서 많은 은사들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지지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 세상 안에서 다양한 노동의 추구와 노동의 분야들을 통해 살아가는 인류가 구속과 중생의 은혜를 위한 신민을 준비해 놓는다.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을 따르지 않으시고 사람 가운데서 구속된 사람들로 그의 몸 된 교회를 완전하게 하신다.
만약 우리가 교회의 관점에서 하나님 구속의 목적을 바라본다면, 교회는 이 세상의 더 넓은 역사의 장과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략)…
구속 은혜의 신민이 될 개인을 다룰 때조차도 우리는 그의 중생이 본래 그의 모습 그리고 중생 전 그의 모습과 완전한 결렬을 초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근본적인 도덕적 영적 변화는 있다. 그는 흑암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진다. 그리고 그 변화는 모든 삶과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의 본래 모습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영향력으로 변화를 겪는다. 그러나 그의 모든 모습이 무효화되거나 버려지지는 않는다. 그의 정체성은 변화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이전에 주셨던 많은 재능과 자질들, 은사들과 소유물은 파괴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비록 그가 영적으로는 유아가 되지만, 심리학적으로는 전부 다시 유아가 돼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구속 은혜의 영역 밖에 있는 과거지사와 과정에 의해 그의 독특한 개체성으로 형성되고 구형된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지위를 행사하며, 하나님 나라에 거한다.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의 학생이었다는 것과 모세가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웠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모든 것을 포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섭리의 계획 안에서 기획된 보통 은혜의 영역에서 기나긴 준비의 도정은 하나님의 종들 중에 가장 복 받은 종들을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야 했던 특별한 역할에 적합하도록 만들었다.
나아가, 우리가 실제 회심의 시점에 이르게 될 때, 회심에 포함된 믿음과 회개는 복음 진리에 대한 지식과 동떨어져 발생하지 않는다. 그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과, 믿음의 재료가 되는 내용을 전달해 주는 복음의 진리 내용이, 믿고 회개해 그의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사람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임이 틀림없다. 최소한 어느 정도는 구원하는 믿음과 회개의 작용 이전에 율법과 복음이 지닌 의미에 대한 인지와 인식이 있음이 틀림없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러나 믿음과 회개 이전에 존재하는, 그러므로 믿음과 회개가 우리 양심에 일으키는 직접 결과인 중생 이전에 존재하는 복음 진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엄격히 성령의 구원하시는 활동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그것들은 성령의 구원 활동을 예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의도 속에서 사람을 믿음과 회개라는 지성적 작용의 선행 조건인 심리학적 상태에 놓아 두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그의 의식에 복음을 의미 있게 만드는 통각統覺의 내용을 마음속에 준비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믿음과 회개의 구원하시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구속 은혜와 다르다. 즉 비구속 은혜, 또는 보통 은혜 범주에 속해 있다.
보통 은혜의 활동에서 우리는 믿음의 현관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갖게 된다. 우리에게 성령께서 그의 은혜의 특별한 구원하시는 활동을 가지고 들어오는 이른바 “접촉점(Anknüpfungspunkt)”이 있다. 믿음은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통 은혜의 활동 속에서 논리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선행 조건과 전제 조건을 가지고 있다.7) 개인적 영역과 유기체적 역사 활동의 영역에서, 기독교 신앙의 진보 과정은 선행된 준비들과 둘러쳐진 조건들과, 일반적인 하나님 섭리의 장에 속한 것만이 아니라, 자애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하나님 경륜의 특별한 영역, 즉 그 자체가 명백히 구속적이지 않은 보통 은혜의 영역에 속하는 준비들과 조건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결론으로 말하면, 보통 은혜는 특별 은혜의 활동 영역을 제공하고, 특별은혜는 보통 은혜의 존재 이유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구속 목적 성취가 보통 은혜의 유일한 존재 근거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 곧 의인들이 세상의 소금인 것은 사실이지만,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사 1:9)는 예언자에 의해 표현된 원리를 세상의 역사라는 넓은 규모에 적용하는 것이 아마도 필요하겠지만, 밀 때문에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자라도록 내버려 두시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보통 은혜의 전 목적은 특별 은혜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특별 은혜는 보통 은혜가 활동하는 전제 조건이지만, 보통 은혜의 목적은 특별 은혜에만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은 또 다른 사실의 존재 조건이 될 수 있지만, 그 또 다른 사실이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이 아닐 수 있다는 단순한 구별에서 알 수 있다.
보통 은혜로 조성되는 다른 목적이 무엇인지를 추단하는 것은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모든 일에 나타나 있으며, 그의 지혜와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인자와 자비의 영광이 보통은혜의 활동 속에 드러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한 궁극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 일군의 세분된 까닭들은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 목적 안에 포괄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각주 7) 이와 관련해서, 여러 종류의 전도와 선포를 통해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는 복음의 진리 내용이 그 자체로 보통 은혜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행위와 말씀 안에서 특별 계시의 산물이다. 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중생과 믿음 이전에 진리의 내용이 의식의 소유물이 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에서 작용들은 그 자체가 구원 은혜가 아니며, 따라서 보통 은혜에 속한다는 것이다.
* ‘존 머레이 {조직신학 ②}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8)’ [제10장: 보통 은혜]에서. *
* 배경색은 강조하려고 제가 칠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