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 창립 57주년 기획 특별인터뷰] 안종일 전 회장이 말하는 전남대학교 총동창회 과거와 미래
동문들 보듬는 보금자리같은 동창회 돼야
(광주.전남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으로 활동 중인 안종일 전 회장이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어렵던 시절 동창회관 등 지으며 발전 초석 닦았던 기억 새로워
선후배간 만남자리 더 늘리고 해외로도 눈을 돌려야 할 때
후배 양성위한 장학금 지원 등 후원과 더불어 견제와 조언도 해야
동창회 창립 57주년을 맞아 본보는 안종일 전 회장을 인터뷰했다. 안종일 전 회장은 모교 1회 입학생이자 총동창회 16대와 25대 회장을 지낸 바 있어 전남대학교 총동창회의 산 증인이나 다름없다. 안 전 회장으로부터 동창회의 과거와 함께 60주년을 앞둔 미래상을 들어보았다.
Q. 1956년 7월 8일 발족한 동창회가 57번째 돌을 맞았는데, 그 감회는...
동창회 발족이 어제 일 같은데 벌써 반백년이 훌쩍 넘어갔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새삼 와 닿는다.
동창회는 졸업과 동시에 발족한 것이 아니고, 그 다음해에 이르러서야 당시 대학원에 다니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총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됐다. 국립 전남대학교는 1952년 발족했지만, 이에 앞서 1951년 설립인가를 받으면서 그해 바로 신입생을 모집했고, 1회 입학생은 1955년에 졸업을 했기 때문이다.
(1955년 문리과대학의 졸업식에서 찍은 단체사진. 사진 하단에 '전남대학교문리과대학 제1회 졸업기념' 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당시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 공장의 공원들을 위한 숙사.)
Q. 인가를 받은 게 6.25 전쟁 시기인데, 그 당시 학교는 어땠는지...
문리과대학은 교사(校舍)가 없어 남광주역 구내 빈 창고와 중등교사 양성소(지금의 중앙도서관) 그리고 학동 의과대학 빈 강의실 등 이리저리 장소를 옮겨 다니며 공부를 했다. 하지만 당시 교수들은 훌륭한 분들이 많았다. 6.25 전쟁 중이라 많은 서울대학교 교수들이 전쟁을 피해 광주에 내려와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지난날 양동시장 북새통 속에서 참 부단히도 열심히 다녔다.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 공장(지금의 양동금호아파트)에 마련한 임시교사의 교문(실은 공장출입문)을 출입하던 선배들의 의기와 자신감 그리고 원대한 포부를 화려하고 번잡한 캠퍼스 주변의 거리를 활보하는 현재의 후배들이 지금도 느끼는지 모르겠다.
졸업식과 축하연도 남다른 추억으로 남는다. 당시 대학이 거의 없던 때 아닌가. 거기다 남도 최초의 국립대학 졸업식이라 긍지도 높았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지역 유력인사들까지 모두 하객으로 참석할 정도였다.
식이 끝난 뒤에는 총장 이하 모든 교직원과 하객 가족들이 모두 넓은 잔디밭에 모여 소위 가든파티를 했다. 학교에서 도시락과 기념품을 준비하고, 가족들은 음식과 꽃다발을 준비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총장과 교수들이 돌아다니며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독이고 앞날을 축복하고 다녔다. 대표가 나와서 한꺼번에 받는 졸업장이 아닌 학생 각자가 꿈을 안고 축복받는 졸업식이었다. 스승과 제자, 학우와 학우가 헤어짐이 아쉬워 자꾸 돌아보던 정겨운 졸업식의 느낌을 지금의 후배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Q. 57년 동안 총동창회는 역동의 역사와 함께 해 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과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 있다면...
동창회가 발족하고 초기에는 지금처럼 동창회가 자리 잡지 못했다. 동문들이라고 해봐야 다들 젊어서 아직 사회에 뿌리내리기도 전이라 사실상 동창회가 활동할 만한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동창회 초기에 회장은 직책만 있고, 동창회 활동도 거의 전무했다. 나중에 의대 정담진 회장이 동창회장을 맡으면서 동창회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16대와 25대 2번의 회장을 맡으면서 가장 핵심적인 사업은 동창회관과 관련된 일이었다.
1986년 농성동에 있던 동창회관 건립을 위한 부지를 팔고 현재 동창회관 자리를 토지개발공사로부터 매입했다. 부족한 자금은 동문들에게 기금을 모금하고 신입생들에게 동창회비를 일괄로 징수해 마련했다. 단지 바로 옆 번지까지 사지 못한 것이 그 당시는 아쉬웠다.
건축이라는 것이 생각만큼 쉽게 되는 것이 아니지만, 우여곡절 끝에 완공을 해놓고 보니 그것만으로도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어디를 가든지 어느 다른 동창회와 비교하더라도 7층짜리 나의 집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다시 재임할 때는 동창회관이 어려워 효율적인 운영이 필요할 때였다. 동창회관 건립 당시는 경기가 좋아 건축이 활발할 때라 남의 돈으로 건물을 올렸다. 건축비는 이후 건물을 임대해 임대료 수입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빚을 다 갚기도 전에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임대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손꼽을 만큼 특별히 아쉬운 점은 없다. 그동안 숱한 어려움과 험난한 길을 걸어온 동창회가 이만큼 발전한 것은 역대회장들의 수고와 노력 덕분이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을 것이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큰 힘이었다.
Q. 동창회관 건립 이외 총동창회장 재임 시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면...
정말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당시 5․18을 겪은 이후라 면학 분위기도 불안정했고, 취업도 어려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과의 대화였다.
이를 위해 당시 시내에 있던 제일반점이라는 중식집에서 후배들과 만남의 자리를 만들고, ‘동문의 날 기념제전’이라는 이름으로 체육대회를 열었다. 졸업생, 재학생, 교직원 너나 할 것 없이 체육관과 운동장에 모여 경기를 하고,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분위기를 위해 MBC 김형주 아나운서와 KBS 박재효 아나운서를 초청해 2부 행사 사회를 맡기기도 했다.
한번은 학생들이 12대 김영인 총장을 연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로 찾아갔다. 총장실 출입을 막는 학생들과 총장을 차례로 만나 원만하게 마무리하도록 얘기를 했다. 그 당시 총학생회장이 현재 김승남 국회의원이다. 지금도 가끔 만나면 그때를 회상하곤 한다.
(위 사진은 1985년 8월 16일 시내 제일반점에서 열린 '제2차 선후배 동문 간담회'.
아래는 같은 해 11월 16일 모교 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동문의 날 기념제전' 사진.)
Q. 57주년을 맞은 총동창회가 60주년 나아가 100주년을 앞두고 지금 관심을 갖고 준비해야 할 부분은...
무엇보다 동창회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야 한다. 마치 시집간 딸아이가 고향 친정집을 찾아올 때 느낌처럼 말이다. 가끔 보면 동창회를 정치단체나 권력기관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지금까지 동창회가 내실을 다지는 시기였다면, 이제는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동문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개발해야 한다.
또 어려움을 겪는 동문을 찾아 그들의 어려움을 감싸 안아야 한다. 성공하고 잘나가는 동문만 동문이 아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문들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
Q. 선․후배가 어울리기 위해 기존에 오프라인 중심으로 활동했던 선배들이 온라인 중심으로 변화하는 젊은 후배들과 융합하기 위한 방법은...
요즘에는 발전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 나이든 사람들은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바뀌지 않는다. 도구나 매체가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인 접촉 즉 만남으로 엮어지는 것이다. 사회가 점차 디지털화 되어 가면서 이 만남이라는 것이 줄어들고 있다. 사람들의 만남이 줄어드니 자연스럽게 동창회 행사도 점차 축소되어 가는 것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 서로 자주 만나야 한다.
Q. 오는 2016년 동창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총동창회가 준비해야 할 부분은... 또 모교와 동창회 발전을 위해 당부하고 싶은 부분은...
기본적으로 동양권에서 60주년은 큰 의미가 있다. 작년은 모교 개교 60주년이었다. 그때 학교에서 큰 행사를 많이 준비하고, 동창회에 거기에 맞춰 발전기금도 모금하고 다양하게 참여를 했다.
모교와 별도로 동창회가 60주년을 기념하는 것보다 학교 개교기념식에 맞춰 동창회가 학교 행사에 동참하며 힘을 실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해야 동창회와 모교가 함께 가는 것 아닌가.
모교 발전과 후배양성을 위해 동창회는 장학금 지급 등 협력과 지원을 더욱 늘리고, 동시에 학교가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견제와 조언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모교가 진정한 모교가 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동창회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