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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호 1장 1절(선지자의 결혼)1907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장 1절입니다. 구약성경 1256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솔로몬과 다윗에게 말씀을 주셔서, 그 왕이 제대로 백성을 하나님 백성답게 지배하고 통치하는 그런 시스템이 갖추어진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듯이 웃시야, 왕이지요. 요담도 왕이지요, 아하스도 왕이지요, 히스기야도 왕이지요, 여로보암도 왕이죠.
앞에 있는 왕들이 남쪽 유다 왕들이라면 마지막에 나오는 여로보암은 북쪽 왕입니다. 이렇게 거의 80년 가까이 여러 왕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고, 오직 말씀은 왕이 아닌 호세아라는 사람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 이 말이지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기존의 왕 체제,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구상한 그 하나님의 나라가 더 이상 아니다, 라는 선언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가짜 하나님의 나라, 백성, 그런 것을 계속 묵인해 오셨죠. 그리고 그걸 지켜보셨습니다. 그건 제대로 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 나라들이 망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진짜 하나임의 나라가 옵니다. 그러면 이 선지자가 하는 역할은 뭐냐? 그때 나중에 오게 될 진짜 하나님의 나라를, 일찌감치 망해가는 하나님의 그 이스라엘, 망해가는 나라 이스라엘, 하나님이 택한 나라에다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이 선지자들이 하는 거예요.
호세아도 선지자지만 예레미아, 에스겔, 이 사람들이 다 선지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선지자만큼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과 그리고 정말 제대로 완료된, 완성되는 나라의 차이점을 그 시대에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학생들이 시험 칠 때 초조한 이유는, 어떤 문제가 나올지 몰라서 초조한 거예요. 만약에 혹시 학생들의 아버지가 교무부장이라면 시험 치기 전에 시험문제 참고해가지고 문제하고 답하고 다 알고 있다면, 아침에 해 뜨는 것을, 다음날 시험 치는 날을 전혀 초조해 하지 않고 환희의 날, 기쁨의 날, 그렇게 될 거예요.
그 교무부장 딸, 그 쌍둥이 둘 다가 같은 학교를 다닌다면 이것은 룰루랄라, 신나기 짝이 없어요. 대학입시 수능문제를, 정답을 미리 다 알고 점수까지 미리 다 안다면 수능문제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 선지자는 지금 이 시대가 인간을 평가하고 규제하는 그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장차 천국이 올 때 그 기준을 미리 자기 몸에 탑재하고, 장착하면서 마음껏 룰루랄라, 그 시대를 보내는 사람이에요.
그러한 선지자 중에서 선지자의 마지막 주자, 바통 넘겨줄 때 가장 마지막 주자로 신약에 누가 나오느냐? 세례요한이 나오는 겁니다. 그 세례 요한의 기능은 요한복음에 뭐라고 되어있냐 하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 되어 있어요.
그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칸 영화제나 세계영화제에서 세계 유명 감독과 배우들이 그냥 계단에 올라오지는 않죠. 롱드레스 입고 자빠지면 안 되잖아요. 빨간 카펫을 좍, 깔아버리죠. 그 빨간 카펫 까는 사람, 선지자입니다. “거기로 가지 마시고 이리로, 그래야 영화제 출입구에 들어갑니다.” 라고 이끌어주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과 최종나라 사이에 연결사다리 같은, 연결, 통하는 길 역할 하는 사람들이 선지자에요. 그 선지자의 소속이 어디냐 하면, 하늘나라 소속이에요. 쉽게 말해서 하늘나라에 이미 취업이 된 사람이에요. 취업 된 상태에서 아직 그 나라를 모르는 이 현 나라에 파견 근무 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쉬워요.
그러면 선지자 외에 사람들은 그럼 평소에 어떻게 사는가? 평소에 사람들이 이 호세아나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면 ‘그들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쫓겨 가면서, 벌벌 떨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성경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언제 두렵고, 언제 공포스러운가? 공포영화를 볼 때 두려원가? 목이 휙 휙 돌아가고 귀신 쫒아낸다 할 때 그게 무서우냐? 아니에요.
그 무서움이 오는 근본적인 바탕,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요. 죄 문제가.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그 공포, 두려움, 왜 그런 공포와 두려움이 오는지 원인조차 모르는 것이 더 큰 문제거든요. 그걸 성경이 밝혀 줍니다. 죄에 쫓기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 이유가 무엇이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악을 저지르면 반드시 저주가 온다. 선한 하나님은 복이 온다. 그렇다면 사람이 악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악을 저지르거나 죄를 짓고 싶지 않더라도, ‘행여 저주가 온다면 그건 내 인생 완전히 꼴아 박는 거잖아. 내 인생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잖아.’
그러니까 ‘내 인생은 실패할 수 있다, 있을 가능성이 있다.’ 에서 오는 그러한 불안감. 내가 내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이 주는 공포성. 그게 사람들에게 제일 무서운 거예요. 나는 장차 무엇이 될까, 어떻게 살까, 우리 어디서 다시 만날까,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 나무 밑에다가 캡슐을 해가지고 10년 뒤에 만나자. 만나자고 해봐야 아무도 안 만나요. 부끄러워서 아무도 안 오는데. 그런 식으로 미래에 대해서 조마조마하고, 어떤 울렁증이 있다고나 할까, 가만히 있어도 무서운 것은, 잘 못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근심 걱정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마음가짐, 또는 심리 상태를 볼 때, 말과 어떤 행동을 볼 때, 그냥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닥에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깔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어있어요.
제가 이발하러 어떤 미장원에 갔는데 예약제라서 문을 안 열었어요. 그래서 앞에 의자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줄을 죽죽 그어가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 맞은편에 고물상이 있었어요. 저한테 “어디서 조사 나오셨습니까? 혹시 장물 조사하러 형사 쪽에서 오셨습니까?” 아니면 어디 세무서에서 왔는지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걱정을 하느냐면 자칫하면 고물상 문 닫을 수가 있다는 거예요. 고물상 문 닫으면 어떠하냐. 고물상 문 닫으면 나는 생계수단이 없어진다. 생계수단 없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그럼 나는 인생 망하고 죽지. 죽으면 어떤데? 그 다음부터는 대책이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조사 나오면 내 숨긴 죄가 드러나는 데서 오는 걱정 근심이에요.
그렇다면 이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이 모든 것은, 인간은 선악을 알기 때문에 벌써 마귀한테 쫓기고 자기 죄한테, 알 수 없는 죄로 쫓기고 있다면, 그것은 이 시대에, 끝나지 않은 이 시대의 속성이고 생명이거든요. 그럼 마지막에 주의 길을 예비하듯이 마지막에 이미 천국의 길에 합격된 사람이 지금 이 세상에 산다면 어떤 문제가 해결된 사람이냐 하면, 죄 문제가 해결된 거예요.
합격한 동시에 용서를 받은 사람이 바로 벌벌 떠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겁니다. 죄 문제가 해결됐으니까, 죄 문제가 해결 되면 저주가 없지요. 저주가 없다는 말은 어떤 것을 해도 그게 합력하여 선이 되는 거예요. 그게 다 복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이 정도 되면요, 사람이 이 정도로 성령 받고, 이 정도로 이 어두운 시대에 선지자처럼 되게 되면, 그 사람은 뭘 먹어도 살쪄요.
기분이 좋으니까. 야식 먹어도 살찌고, 기분 좋아서 아침에 한 개 먹고, 점심 먹기 전에 간식으로 또 한 개 더 먹고, 밤에 탕수육 시키고, 짬뽕 시키고, 치킨 시키고. 어차피 나는 이쪽 세상이니까. 이거 먹고 살쪄봐야 폭발하기밖에 더 하겠느냐? 터지겠지. 터져도 괜찮죠. 터지는 것에 전혀 공포를 느끼지 않죠.
예가 조금 이상한 예가 되었습니다만. 두려움에 쫓기지 않아요. 누가 와서 “저 형사인데요.” 해도 형사가 오든, 형사 한 트럭이 오든 겁날 것이 없어요. 죄 문제가 해결 됐기 때문에. “혹시 실수한 것 있으면 잡아가세요. 사형 시키세요. 사형하는 그날 나는 천국이다.”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이게 바로 선지자입니다.
자, 그러면 그런 선지자, 호세아 같은 선지자, 이 땅에 왕이 있더라도 왕을 아주 무시하고, ‘왕 같은 소리 하네. 왕이 있는데도 나라꼴이 그렇게 망했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줬지 왕을 준 게 아니거든요. 왕이 있어도 허수아비에요. 다섯 명, 여섯 명의 왕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에게 준 겁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어떤 입장에 있는가? 누가복음 1장 10절에서 11절까지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10절에 보면, 세례요한 아버지 사가랴의 이야기입니다. 사가랴라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마침 성전에 가서 자기 업무를 추진하는 중에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중입니다.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그리고 11절에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1절 다시 읽어볼게요.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주의 천사가 사가랴 제사장에게 나타났다 이 이야기입니다. 이거 수능에 안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비현실로 봐요. 과학시대에 그런 미신은 언급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거예요.
자 설교 다시 처음으로 갑시다. 사람들은 말 하나, 행동 하나 무섭고 두려워하는 거예요. 그런 무섭고 두려워하는 것은 자체적으로 해결이 안 돼요. 왜냐하면 내가 아는 사는 기준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기준 외에 다른 기준을 아는 게 없어요. ‘착해야 복을 좀 받을 걸. 하지만 늘 착할 수가 없다면 우리는 아주 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 사이에 그 틈 사이에서 끼어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다른 외부에서 ‘너 이런 인간이야’라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너는 이런 일을 해야 해’ 하고 외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계속 하는 거예요. 저는 유치원 애들이나 초등학교 애들이 방송에 나온 것도 보고, 내가 또 직접 물어도 보고 하는데, “너 커서 뭐 될래?” 하고 물어봐도 나는 대통령, 나는 방탄소년단, 나는 손 흥민, 나는 뭐 야구 잘하는 박 찬호, 그런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어떤 인간도 “난 천사가 될래요.” 하는 사람 들어본 적이 없어요.
슈퍼맨이 될 사람은 있지만 천사가 될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골라잡을 직업은, 모든 것은 공포와 두려움에 쫓기게 되어 있어요. 망하면 안 된다, 망하면 안 된다. 그것이 분노할 때, 화낼 때는 실감 나지요. 쫓기고 있다는 걸.
누가복음 17절에 보면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바로 이 사가랴에게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을 성령으로 낳는데, 성령의 예고로서 그 아기가 이름이 요한이고, 그 아기는 주의 길을 예비할 사람으로서 마지막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호세아 하다가 왜 누가복음을 하느냐? 바로 선지자는 같은 계열이에요. 같은 계열.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 때 그러한 역할을, 주의 길을 예비 한다면, 그 주의 길, 그 빨간 카펫을 좀 길게 늘어뜨리면 그게 호세아에요. 주님 오시기 700년 전에 깔아놓은 그 호세아에요. 자, 그렇다면 이 호세아가 주의 길을 어떤 식으로 예비하느냐?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야 될 순서이지요.
미리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그 당시 세상 인간들이 사는 선악이라는 그런 기준을 제거하고 장차 천국에만 통하는 기준으로 바꿔치기 해주는, 바꿔치기 하라고 호소하는, 알려주는 기능을 호세아 선지자가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새로운 기준은 뭐냐? 새로운 기준은 긍휼이에요. 불쌍히 여김이에요. 죄를 없애주는 것이 아니고, 죄가 있기는 있는데 그 죄를 하나님의 의로, 사랑으로 바꿔주는 그 사랑, 긍휼이라는 기준으로 장착하는 사람만이 장차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 소식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 선지자가 먼저 그걸 이미 장착하고 있고, 본인이 장착하고 있고 “나처럼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천국의 백성이 됩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왜 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을 때는 ‘따먹어라’를 반대적으로 알려줍니다. 따먹으라고 한 나무가 있었어요. 그건 생명나무고 따먹지 말라고 한 나무는 선악과거든요. 따라서 이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내가 있다’가 아니라 인간들을 통해서 ‘악이 있다. 또 선이 있다.’ 또 ‘죄가 있다. 의가 있다.’ 같은 말로 ‘악이 있다. 선이 있다.’ 같은 말이에요.
인간이 있다,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있는 이유는 인간 배후에 어디로 연결되어 있느냐, 어디로 통하느냐 하면, 영원한 죄의 나라가 있고 영원한 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이 땅에 만들었어요. 죄가 처리되지 못한 인간은, 그 끝이 뭐로 통하느냐? 지옥으로 통하고, 의로 이미 바꾸어진 사람의 끝은 어디로 통하느냐? 천국으로 통하는 겁니다.
인간의 길은 딱 두 가지 밖에 없어요.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과 천국으로, 영생으로 통하는 좁은 길, 딱 그 두 가지 길 밖에 없어요. 인간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길을 위하여 인간이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길을 위하여 인간이 있어요.
그래서 성도라고 하는 것은 아스팔트에 있는 그 콜타르와 같은 존재, 거기에 섞여 들어가는 모래와 자갈 같은 존재에요. 천국을 장식하는, 천국의 길을 닦는 재료로서 성도가 전부 다 거기에 개입 되는 겁니다. 선지자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세상에 가보세요. 사람들은 ‘죄가 있다. 의에 있다.’를 묻지 않죠. 뭐라고 하느냐? “내가 있다고 이야기해요. 나는 직업이 뭐다, 의사다. 나는 돈이 많다.” 어쩌라고? 어쩌라고? “나 여기 있다.” 어쩌라고? “나 하와이 가봤다.” 어쩌라고, 그래! 그럼 그걸로 끝이에요. “나는 하와이 가본 나.” 나에서부터 출발해서 마지막에 나로 끝나요.
그러나 선지자는 나부터 출발해서 천국이 있다, 천국까지 통한다고요. 빨간 카펫.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심어 놓으셨을 때, 아담과 하와 특히 여자가 먼저 문제였죠. “먹는날에는 죽으리라.” 하니까 여자가 뱀에게 유혹을 받아 여자가 말하기를, “과연 죽겠느냐?” 하고 인간 쪽에서 먼저 하나님을 테스트 했어요.
하나님 말이 정말 신빙성이 있는지, 이게 실효성이 있는지 먼저 테스트 했다고요. ‘따먹지 말라고 하는데 따먹어 봐야 진짜 죽는지 아닌지 알지.’ 하고 악마가 자꾸 부추겨 가지고 ‘에라 모르겠다. 따먹자.’ 따먹으니까 그 인간은 그 때부터 죽었어요.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하지 말라는 그 선을 넘어서서 시험을 했다면,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느냐? 이제는 하나님께서 인간 선을 넘어와서 인간을 테스트하는 거예요. 네가 한 짓 그대로 하겠다. 그러면 그 방법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호세아에게 말씀을 줘서 호세아 자체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시험하는 선악과나무로서 꽂혀버리는 거예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나무가 꽂혀 있듯이 이제는 호세아라는 사람을 그 나라, 북쪽 나라에 선지자로서 꽂아 놓아버리는 거예요. 꽂아놓으니까 그것은 기존에 사람들이 알던 말씀이 아니니까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또 패스 하겠지요. 호세아 말이, ‘자기는 하나님 말씀이라는데 저게 맞겠나, 안 맞겠나?’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시험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가졌고 이만큼 출세했다. 그 자체를 두고 거기에 가치를 두지 마세요. 사람이 자기한테 가치를 두게 되면, 내가 왜 사는지,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그걸 전혀 모르게 돼요. 호세아는 그걸 알아요. 나는 나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여기 태어났고, 그리고 하나님말씀으로 인하여 나는 존재하는 것이 이유다. 그걸 이미 아는 거예요.
하나님의 죄와 하나님의 의가 어디서 결정되는지를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나는 이 세상에 사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느 쪽이에요? 왜 삽니까? 물론 사람이 자기가 하루아침에 깨달아서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욥 3장 11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욥은 의인이고 믿음이 있다고 자부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자부하는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태어날 때 내가 죽었으면 그 때 얼마나 내가 편했겠는가, 라는 애통의 고백을 하고 있어요. 소위 믿음이 있다는 욥의 입에서. 운전면허시험 떨어졌나요? 그래서 지금 이런 통탄할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까?
내 뜻대로 시험을 쳤는데, 예를 들어 운전면허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다. 떨어졌을 때 3장 11절, ‘아이고, 이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다. 내가 그 때 태어나지 않았으면 지금 운전면허 시험 치지도 않았지.’ 그런 심정이 들 수도 있어요. 여기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태어나지 않는 것과 태어나서 죽는 것의 차이점을 욥이 모르고 있어요.
태어나지 않는 것과 내가 죽는 것과의 차이점. 우선 결과적으로 죽어도 없어지고,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예 없는 것이고, 나 개인 입장에서는 죽는 것과 태어나지 않는 것에 결과적으로는 차이가 없어 보여요. 내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러나 하나님의 의미에서 보면 태어나지 않는 것과 죽는 것은 큰 차이가 나요.
어떤 큰 차이가 나느냐 하면, 일단 태어나서 무슨 일을 겪어야 ‘아, 내가 태어난 것이 나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내가 죽는 것도 나 좋으라고, 나 기쁘라고, 편히 쉬라고 죽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그 모든 이유가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계획이 있구나.’라는 것을 죽을 때나 아는 거예요. 차이점 확실하지요
욥은 자기 몸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안 태어나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다.’ 하는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태어나서 어떤 고생을 하든 어떤 호강을 하든 관계없이 그것조차도 너 좋으라고, 너 호강시키고, 혹은 너 나쁘라고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의도한 바를 위해서 태어나고 죽게 하셨다는 것.
그 의도가 뭐냐? 어떠한 기준이 우리를 지옥가게 하고 어떠한 기준이 천국가게 하느냐?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 호세아에서는 어떤 이유로 호세아는 태어났고, 어떤 이유로 호세아는 죽을 때까지 선지자노릇을 해야 되는가?
그것은, 호세아시대 때 사람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나라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섬기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멸망시켜야 될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를 호세아서 말씀에 담은 겁니다. 너희들은 네 나라기 때문에 안 망했으면 좋겠다, 싶지만 멸망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이 수출 규제할 때 일본은 끄떡도 없는데 대한민국 사람들은 난리도 아니에요. 아주 발악을 해요. 마치 지옥이라도 된 것처럼. 옛날부터 지옥이지만. 어쩔 줄을 몰라요. 발악을 하면서 사정하듯이 지금 데모해요. 살려달라고 하면서 데모를 하고 있고 불매운동을 하고 있잖아요.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내가 사는 나라기 때문에 안 망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사는 기준을 전혀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이 나라 붙들고 있다고 안 망해야 된다는 그것이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그게 아니에요. 호세아는 장차 올 하늘나라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돌아가는 나라인지를 북쪽 이스라엘 나라에서 외치기 때문에 이 나라는 필히 망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냥 망한다, 하면 안 되겠지요. 망하는 이유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 북쪽 나라 이스라엘, 남쪽 나라 유다 다 여호와를 믿는다는 거예요. 그러나 실은 내부적으로 여호와 믿는 것이 아니고 우상과 친했어요. 형식은 여호와인데 내부적으로는 옆에 잘사는 나라의 신, 그 신을 오히려 더 부러워하고 신봉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외부와 내부가 다른 그들에게 안에 있는 더러운 내부의 우상숭배요소를 끄집어내서, 네가 신을 안 믿기 때문에 필히 망해야 된다는 것을 알리게 되면, 하나님께서 조치가 뭐냐 하면, 네가 결혼을 하되 음란한 여자와 결혼을 하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주신 하나의 사명이고 임무였어요. 음란한 여자와 결혼해서 아주 멸망될, 망해야 될 자식을 낳아라.
그래서 고멜이라는 여자, 그 뜻은 마지막, 끝이라는 뜻인데, 그 고멜이라는 여자와 결혼해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2남 1녀 다 망합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남편이고 고멜이 아내인데, 보통 남편이 여자하고 결혼할 때 여자는 요조숙녀처럼 위장을 해요. 이것은 남자는 듣지 말고 여자만 들으세요. 요조숙녀처럼 아주 정숙하고, 교양 있고, 우아하고, 애교 넘치고, 남편을 하늘같이 받들 용의가 되어 있다고.
그래서 여자가 남자에게 꽂히고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요, 여자의 특징은 남자와 결혼하게 되면 그 남자만 있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요. 그게 여자의 특징이에요. 조국, 민족, 나라, 자기의 직업, 자기의 약점, 장점, 이런 것, 아낌없이 남편이 가라 하는 대로 무조건 ‘가라 하면 가나이다.’ 할 정도로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 남자를 위해서 자기 집안도 버리고, 자기 종교도 버리고 다 버립니다.
만약에 미국에서 남자와 여자 둘이 결혼했는데, 그 여자가 미국시민권을 갖고 있고 남자는 한국 남자인데 사상적으로 ‘나는 저 북한 가서 살래’ 하면, 여자는 그 남자가 북한이든 알래스카든 북극이든 상관없어요. 내 남편이 간다고 하면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북한이든, 중국이든 ‘당신만 있으면 나는 족해요’ 하고 따라 붙는 것이 여자에요.
요새도 그런 줄 모르겠습니다만 안 그런 사람은 남자를 진짜 사랑 안 해서 그래요. 진짜로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너는 족보가 같은 성씨이니 하지 말라’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해요. 사랑은 위대하니까. 사랑은 위대하니까!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사랑에는 조건도 보이지 않고. “얘야. 네 남편은 백수고 너는 한 달 5백만 원짜리 고소득이잖아 그 결혼이 맞나? 네 남편은 초등학교 중퇴인데 너는 박사학위 소지했잖아.”
그런 소리도 안 들려요. 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는 거예요. 그 남자가 가는 곳이라면 종교도 버린다니까요. 신앙도 버리지요. 그 남자가 지옥 간다면 아낌없이 지옥 불에 뛰어듭니다. 이게 과장된 것이 아니에요. 사랑은 죽음보다 더 세니까.
그런데 그 때 남편은, 자기가 남편이고 저 사람이 아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바로 호세아는 그것을 엎어버립니다. 인간은 절대로 남편이라는 인간은 없고 아내라는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남편과 아내가 아니면 뭐냐?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거예요.
이번 수련회 강의에 나옵니다. 남자가 여자하고 결혼한 줄 알았더니만 세상에, 자기보다 더 남자 같아요. 얼마나 우악스러운지. 껍데기만 여자고 속은 여장부, 여장부가 아니고 남장부 비슷해요. 그러니까 남자니 여자니 하는 그 자리는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서 제공되는 것이지, 그냥 멸망하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남자, 여자, 그것은 잊으세요.
그러면 성경에서 마련해주는 진정한 남편의 자리는 뭐냐? 에베소서 5장 25절에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남편은 들으면 안돼요. 너무 무서워서. 여자만 들으세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자기 목숨을 아내를 위해서 바치는 사람이 남편입니다. 남편들 안 들었지요? 우우우어어어어! 안들은 것으로 하지요.
이번엔 남편만 들으시고 아내는 듣지 마세요. 에베소서 5장 22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갑자기 웃음이 나오는데요. 자기 남편 섬기기를 주님께 하듯 하라. 어어어어어어어! 여자분들 안 들었지요? 어어어어어우우우우우! 나 못 들었다. 이상하게 안 들리네. 이상하게 그 부분이 안 들리네. 갑자기 눈이 침침해서 그 부분이 안보이네. 그런 식으로요.
이 세상에 남편 같은 남편 없습니다. 이 세상에 아내 같은 아내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호세아는 일단은 천국과 관련된 선지자기 때문에 일단은 제대로 된 남편이라고 인정하고, 남편자리에 있는 제대로 된 남편이라고 인정하고, 문제는 그 남편과 결혼하는, 혼인하게 된 여자는 뭐냐? 이 세상 출신이기 때문에 음란한 아내가 되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 전체 백성 안에 있는 감추어진 내면의 모습이에요. 여호와의 뜻을 모르고, 여호와의 지정한 자리를 모르고 그저 건성으로는 ‘여호와’ 하지만 속으로는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그것이 고멜이라는 아내가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와 여자를 대변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호세아는 장차 올 천국을 대변하고 아내 고멜은 현 이스라엘, 그리고 남쪽 유다, 멸망해야 될 두 나라를 동시에 대변자로서 선지자와 혼인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식을 낳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전부 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2남 1녀가 나오는 거예요. 그 자식들 이름도 ‘긍휼을 받지 못했다. 내 백성 아니다.’ 이렇게 나와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느냐? 음란하지 않는 여자가 없어요. 아무나 골라잡아도 음란한 여자에요. 왜? 세상과 짝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어떤 남자도 음란한 남자에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왜 그들이 음란하고, 왜 음란한 남자고 음란한 여자냐? 천국의 기준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천국의 기준은 뭐냐? 죄에 대해서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이에요. 죄는 있되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용서를 받은 그런 남편, 그런 아내, 그게 천국에서 미리 우리에게 보여준 남편다움이고 아내다움이에요. 죄 안 짓는다가 아니라 더 이상 죄에 쫓기거나, 저주에 쫓기거나, ‘이러면 우리가 망하지. 우리가 실패하지.’에 더 이상 공포심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벌벌 떨지 않는 사람, 어떤 말이나 행동에서 공포심을 함유해서 살지 않는 사람, 이미 사랑으로 충만해서 그런 저주로부터 벗어난 사람, 그 사람이 천국에 합격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음란한 여자가 고멜이라면 그 남편은 뭐냐? 천국을 대표하는 호세아에요. 이 호세아하고 그 아내를 억지로 결혼을 시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국 음란한 백성을 천국의 백성답게 변화시키는 작업을 이제부터 남편 되는 호세아로부터 슬슬 나오게 한다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이사야에도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남편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남은 자를 자기의 신부, 색시로 맞이합니다. 수련회 이사야 마지막에 나오는 거기에 대해서 제가 강의했어요. 62장 4절에 보면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쀼ㄹ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헵시바,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 자기신부를 보고 나는 너 때문에 산다고 할 정도로 용서하시는 주님이 용서받은 우리보고 그렇게 기쁘대요. 왜? 주님의 자기사랑과, 자기긍휼과, 자기용서하심이 신부한테 탑재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그 시온, 구원받은 사람은 결혼한 여자가 되고 그리고 자식을 낳는데 자식의 직업이 있어요.
그 직업이 뭐냐 하면, 제사장입니다. 이사야 마지막 66장 21절에 보면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하나님께서 거기서 난 자식을 천국의 제사장 삼는다는 거예요. 제사장은 뭐냐 하면 거룩한 사람이에요. 거룩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결국 오늘 설교에서 한 이야기는 뭐였습니까? 장차 올 하늘나라에 소속된 선지자가 미리 앞당겨서 주의 일을 예비해서 이 땅에 등장하는 것은 세상사는 천국 백성이라면 세상사는 기준이 달라야 된다. 바뀌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안 바꿔지게 되면 뭐냐? 항상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벌벌, 바들바들 떨면서 살아요.
‘시험에 떨어지면 안 되지. 몸 아프면 안 되지. 집에 돈 없으면, 부도나면 안 되지. 뭐든지, 내 자식이 반드시 출세를 해야지.’ 뭔가 쫓기듯이 벌벌 공포에 휩싸여 있어요. 그 공포는 뭐냐? 죄 문제가 해결 안 된 거예요. 그러면 죄 문제가 어디서 나오는가?
그 선과 악을 안다는 자체가 죄에요. 이제는 선악이 아니고 생명나무의 기준으로서 바뀌어져 버리면 용서받은 자로 마음껏 이 땅에서 자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이 땅에 성령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 저와 여러분입니다. 성령 받은 성도를 이 땅에 아직까지 죽지 않게 살려주시고, 살게 하시는 그 본연의 사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알 수 없는 공포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바들바들 떠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을 늘 보이고 있습니다. 망하면 안 되고 실패하면 안 된다는 그런 기준자체가 죄악된 것이고 용서받지 못한 사람의 자세인 것을 깨달아서, 이제는 어떤 공포와 두려움에도 변동이 없고 안정될 수 있는 저희들의 마음자세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