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야구 선수 출신이던 아버지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진갑용은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표현했다. 부산고 시절부터 고교 랭킹 1위의 포수로 이름을 날린 그였지만 어린 시절 이야기는 그 명성과 사뭇 달랐다.
“처음 야구를 시작했을 때는 정말 못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몸도 좋고 야구도 다 잘했는데 저는 그때 굉장히 왜소했거든요. 그냥 조그마한 애가 공 잘 받고 잘 던지고 하니까 감독님께서 포수를 시키신 거죠. 지금은 포수가 제일 중요한 포지션이라고 그러는데 그때 당시에는 다들 기피하는 포지션이었어요. 야구 잘 하는 애들 틈 사이에서 밀리고 밀려서 얼떨결에 포수 자리에 앉게 되었죠.”
밀리고 밀려 하게 된 포수. 하지만 진갑용은 그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뛰어난 타격능력은 물론이고, 투수를 이끄는 리드능력과 수비, 송구 등 포수로서의 능력을 모두 갖춘 타고난 포수였다. 왜소하고 작았던 어린 포수에서 진갑용은 어느덧 손민한과 함께 대학야구 최고의 명문인 고려대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고려대에서 그는 처음으로 ‘감격스러운 승리’의 맛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 시절에 고연전을 하는데, 감독님이 경기하기 전에 돌아가신 거예요. 그래서 더그아웃에 감독님 영전을 모시고 경기를 했거든요. 그러니 다들 각오가 비장했죠. 결국엔 역전승 하고, 선수들도 울고 관중석에 앉아있던 학생들도 다 울었어요. 그 전에는 이기면 그냥 기쁘기만 했는데, 이기고 감격스러웠던 건 그때가 야구하고 처음이었던 거 같아요. 아마 지금도 고대 나오신 선배님들은 다 기억하고 계실 거예요.”
진갑용이 대학을 졸업할 시기에는 포수라는 포지션이 가장 중요한 포지션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때문에 모든 구단과 언론의 최대 관심사는 진갑용이 어느 팀에 지명되느냐였다. 오죽하면 서울 라이벌이었던 LG와 OB가 드래프트에서 높은 순번을 차지하기 위해 일부러 경기에서 졌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때는 제가 보기에도 서로 지려고 했던 거 같아요.(웃음) 그때 OB에는 김인식 감독님이 계셨고, LG는 아마 새로 바뀐 감독님이 계셨을 거예요. 감독님이 새로 바뀌었으니까 아무래도 이기는 모습을 좀 보여줘야 되잖아요. 그래서 LG가 7위를 했고, 저는 OB로 입단하게 된 거죠. 그렇게 주목을 받고 프로에 들어가니까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굉장히 건방졌었어요. 서울에서 혼자 생활했는데 주위에 아는 선배들도 많았고, 자만심에 휩싸여서 좀 나태하게 생활을 했었죠.”
프로 입단과 좌절,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
OB 베어스로 입단한 진갑용을 두고 모든 야구인들
은 그가 프로에서도 반드시 통할 것이라 점고, 그 의견에 이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프로 무대는 달랐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타격 능력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좀처럼 달아오르지 않았다. 기대했던 선수가 기대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만큼 실망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그는 결국 그저 그런 선수로 전락하기 시작했고 프로입단 3년차였던 1998년, 또 다른 포수 유망주인 홍성흔이 OB에 입단하게 된다.
“왜 그랬는지 그때는 하려고 해도 잘 안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고, 나중에는 결국 감독님한테 먼저 트레이드 얘기를 꺼내게 됐죠. 감독님께서는 ‘트레이드는 안 된다. 구단하고 얘기를 해 봐라’라고 하셔서 구단에 얘기를 꺼냈더니 괘씸죄로 두 달 정도 2군에 내려가 있었어요. 구단에서는 그만큼 저한테 투자를 많이 했기 때문에 트레이드하기에는 아까웠을 거고, 그러다 결국엔 삼성하고 얘기가 잘 돼서 삼성으로 트레이드 된 거죠.”
그렇게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 진갑용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기도 전에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처음으로 한국 프로야구에 FA제도가 도입되었고, 삼성은 당대 최고의 포수인 김동수를 영입했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앞서 말했듯이 기대치가 높은 선수가 기대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만큼 실망스러운 일은 없듯이 이번엔 김동수가 그랬다. 김동수는 삼성으로 이적한 이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반면 기대치가 낮았던 진갑용이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김동수 선배님이 워낙 저보다 실력이 월등하셨기 때문에 부담이 많이 됐어요. 그런데 그 상황에서 또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할 수도 없는 거고, 그냥 여기서 뼈를 묻을 각오로 선배들 하는 거 보면서 배우고, 코치님이 시키시는 거 열심히 하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레 저한테도 기회가 오더라고요.”
사실 이러한 진갑용의 활약은 전 기아 타이거즈의 감독이었던 조범현 감독의 역할이 컸다. 이미 SK의 베테랑 포수 박경완을 키워낸 경험이 있는 조범현 감독은 당시 삼성에서 배터리 코치를 맡으며 만년유망주 타이틀의 진갑용을 철저히 지도하기 시작했다.
“조범현 감독님이 저랑 (박)경완이형이랑 비교를 많이 하셨어요. ‘경완이는 연습생 출신인데도 그 정도 하는데 너는 엘리트 코스 밟고 와서 이 정도 하는 게 자존심도 안상하냐.’ 그러시면서요. 그런 말 들으니까 자극도 많이 받게 되고 오기도 생기더라고요.”
이후 김동수는 2001 시즌이 끝난 뒤 SK로 트레이드되며 진갑용은 명실상부한 삼성의 안방마님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2002년, 진갑용은 데뷔 이후 최고의 한 해를 보내게 된다. 130안타와 18개의 홈런, 타율 2할 8푼 1리를 기록하였으며 무엇보다 득점권 타율 3위에 빛나는 순도 높은 활약을 펼쳤다. 그 활약에 힘입어 연말에는 최초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포수로 인정받기도 했다. 또한 삼성 라이온즈 창단 이래 최초로 한국 시리즈 우승을 이뤄내는 데 일조하며 팀과 개인 모든 면에서 최고의 한해를 보내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당시에는 삼성에 온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우승이 크게 와 닿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옆에서 (이)승엽이, (양)준혁이 형, (김)한수 형 다 펑펑 우는 거예요. 그때 든 생각이 ‘그동안의 한이 얼마나 맺혔으면 이렇게 좋아할까, 이정도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계속 우승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사실 저는 처음 우승했을 때보다 작년에 했던 우승이 더 기억에 남아요. 2002년에는 제가 한 것도 별로 없었고.(웃음) 작년에는 여태 삼성이 우승했던 패턴과는 다르게 몇 명의 스타플레이어 선수들 때문이 아닌 팀워크만으로 우승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사실 선수생활 통틀어서 최고로 좋았던 순간은 베이징 올림픽이었고, 삼성 라이온즈 선수로서는 작년 우승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진갑용이 말하는 좋은 리더
그가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 2008 베이징 올림픽.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 선수들은 9전 전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이뤄내며 한국 야구 성인 국가대표팀 최초로 국제대회 우승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쓰기도 했다. 쿠바와의 결승전이 열렸던 9회 말, 당시 진갑용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결과는 크게 달라져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성 라이온즈의 진갑용은 국가대표 안에서의 존재감 역시 절대적이었다.
그가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 2008 베이징 올림픽.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 선수들은 9전 전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이뤄내며 한국 야구 성인 국가대표팀 최초로 국제대회 우승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쓰기도 했다. 쿠바와의 결승전이 열렸던 9회 말, 당시 진갑용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결과는 크게 달라져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성 라이온즈의 진갑용은 국가대표 안에서의 존재감 역시 절대적이었다.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로 뽑혔을 땐 솔직히 실력 때문에 간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김경문 감독님도 너는 주장시키려고 뽑았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웃음) 그 말 듣고 처음에는 왜 저를 주장시키려고 하냐면서 거부했죠. 그 전에 국제대회에 몇 번 나갔던 경험은 있지만 그렇게 큰 대회에 주장 완장을 차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솔직히 부담이 많이 되더라고요.”
하지만 2004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주장을 맡은 경험을 살렸던 것일까? 그는 2008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의 주장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냈다. 보통은 한 팀에서 2시즌씩 주장을 맡고 완장을 넘기는 것이 관례지만 진갑용은 4시즌동안 주장을 도맡아했다. 진갑용만큼 주장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선수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포수는 경기 중 다른 어떤 포지션보다도 챙겨야할 게 많은 자리다. 그리고 진갑용은 주장의 역할에서도 이를 이용했다.
“저는 선수단하고 미팅을 잘 안 해요. 선수들 다 불러놓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건 잔소리밖에 안되거든요. 백 마디 말보다 직접 나서서 행동하는 걸 보여주는 게 선수들한테도 잘 통하는 거 같아요. 그리고 선수들하고도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면서 이런 저런 얘기하고 힘 복 돋워주고, 챙겨주는 게 가장 좋은 리더라고 생각하고요.”
테랑 선수의 역할
작년 한 해 페넌트레이스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 아시아시리즈 우승을 이뤄내며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올해 이승엽이 복귀함으로써 더욱 막강해진 전력으로 돌아온 삼성 라이온즈의 우승을 예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시즌 초반 부진의 늪에 빠진 삼성 라이온즈는 선발진의 난조와 답답한 타선에 막혀 7위까지 추락하는 좌절을 맛봐야 했다. 하지만 역시나 삼성은 저력 있는 팀이었다. 어느새 자타 공인 ‘1강’으로 꼽혔던 팀다운 면모와 상승세를 보여주며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그래서였을까. 진갑용 역시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사실 시즌 초반에는 내심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정말 많이 불안했죠. 아픈 애들도 없는데 왜 이럴까, 우승 후유증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고, 감독님도 얼마나 걱정이 많았겠어요. 그나마 저나 (이)승엽이, (박)한이 같은 베테랑 선수들이 잘 이끌고 해줬기 때문에 다시 올라온 거라 생각하고, 이제는 젊은 선수들이 잘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경우에 따라 베테랑들은 그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내몰리게 되지만 오히려 베테랑 선수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그 가치와 존재가 더욱 중요해진다. 특히나 진갑용이 말했듯이 팀이 위기에 빠지면 더욱 그렇다.
“베테랑 선수들은 경험도 많고,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유지한다는 게 쉬운 것도 아니잖아요. 마흔까지 야구한다는 거는 정말 신이 내린 선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만큼 경쟁자들도 많았을 거고. 그렇기 때문에 위기가 왔을 때도 잘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해요. 위기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베테랑이 왜 베테랑인지에 대해 계속 얘기가 나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해마다 치열한 생존경쟁에 내몰리는 베테랑 선수들 사이에서 대부분의 젊은 선수들은 오랫동안 야구를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그리고 베테랑 선수들은 그들에게 매해 새로운 롤 모델을 제시해주고 있다. 많은 프로 선수들의 꿈을 이뤄내고 있는 진갑용에게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우스우면서도 명쾌하게 답했다.
“따로 몸 관리 하는 건 없어요. 그냥 먹고 싶은 거 먹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음, 그런데 오히려 몸 관리하면 더 스트레스 받을 거 같은데? 음식 골라먹고 이러면. 그렇지 않나? 하하하.”
영원한 라이온즈 맨 진갑용은 2012 시즌이 시작되기 전 가졌던 인터뷰에서 주전이 아닌 백업 포수로 전락하게 된다면 깨끗하게 선수 생활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의미는 이제는 제 몫을 다했다는 뜻이 아니다. 더욱 열정을 불태우며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겠다는 포부였다. 올 시즌 삼성은 또 다시 우승을 목표로 순항중이다. 그리고 2002년 첫 우승을 경험했던 진갑용은 10년 후에도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삼성의 프랜차이즈스타는 아니지만 삼성 라이온즈
의 유니폼이 가장 잘 어울리는 선수. 이렇게 한 팀을 훌륭히 이끄는 베테랑 선수가 존재한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그 축복을 나누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 팬들에게 진갑용은 특유의 듬직한 어조로 말했다.
“항상 덕분에 이렇게 즐겁게 야구하고 있고, 팬 여러분들 성원에 힘입어 좋은 성적내고 있습니다. 초반에 부진했던 거, 질타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성적 그대로 유지해서 올해도 작년처럼 좋은 성적으로 보답해드릴 테니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영원한 라이온즈 맨 진갑용. 언제나 변함없는 그의 헌신과 희생이 있기에 삼성 라이온즈의 우승을 향한 발걸음은 여전히 든든해 보인다.
촬영장소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
진갑용 선수는 2013시즌에도 성실한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달 19일 포항구장에서 열리는 2013 한국야쿠르트 세븐프로야구 올스타전에도 나서게 된다.
현재 올 시즌 60경기 출장에서 107타수 28안타(타율 0.262) 3홈런 22타점 13득점을 올리는 중이며
지난 6일 두산의 유희관 선수의 시속 79km짜리 초슬로 커브에 당하며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는 이슈가 있었다.
야구계의 선배로서 의연하게 대처해나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