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길> 월정사-상원사 구간 걷기
위치 :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걸은날 : 2019.6.8.
날은 화창하고 좋았다. 서울보다 3,4도 낮은 이곳은 미안할 정도로 서늘하고 깊은 산속의 정취와 깨끗한 공기를 다 만끽하게 해줬다. 이렇게 좋은 곳이 곳곳에 있다. 참으로 보배로운 나라다.
오대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선재길은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9키로 남짓의 도보길이다. 가는 길에 수없는 다리를 왔다갔다 건너면서 오대천 계곡을 끼고 완만하게 올라간다. 전국의 명산 중 식생이 가장 다양하다는 오대산의 숲길인지라 수많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며, 애기똥풀 등 친근한 들풀에 희귀식물까지 들꽃이 지천이다. 갖가지 야생동물들도 내내 벗을 해준다. 섶다리, 출렁다리 등 다리들도 모양과 문양이 다양하여 거리에 비례해 기대도 커진다.
소리도 다양하다. 오대천 계곡의 물소리가 멀리서 가까이서 왁자하게 혹은 소살거리며 다양한 소리결로 다가온다. 새소리 또한 익숙하게 낯설게 곁을 떠나지 않는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삼림 외에 사람 손을 겪은 밭뙤기도 간간이 만난다. 일제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화전민의 흔적이다. 이 깊은 곳까지 들어와 산림벌채 인력으로 살았다는 사람들의 삶의 스토리가 오죽 신산했을까. 하지만 이제는 아름다움으로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산화한 고락이 우리에게 편안한 사람 냄새로 다가온다.
다리를 왔다갔다 하며 상원사로 오르는 동안에는 큰길도 만난다. 버스와 자동차가 소리와 먼지를 내며 달리는 그 길은 선재길의 벗으로 속세와 선세를 연결해주는 또 다른 길이다. 내가 속해 있는 세상을 잊지 않게 해주는 건너편 그 길은 속세 현실에 대한 공감을 일깨운다.
열하일기, 북경으로 떠난 사신 일행이 황제가 피서산장으로 떠나고 없어 다시 열하, 지금 승덕이라는 곳까지 오간 과정을 기록한 여행지이다.
열하는 황제의 여름 별장이 있는 곳이고 이름 또한 피서산장이니 얼마나 시원하고 쾌적한 곳일까 싶겠지만 사실 기대와는 많이 다르다. 덥고 그다지 쾌적하지 않다. 물론 피서산장은 북쪽 이민족 견제라는 정치적 의미가 더 중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피서가 결코 피서가 되지 못하는 그 한계는 '더운 물'이라는 이름 '열하'가 안고 있는 한계였을 수도, 북경에서 가깝고 시원한 곳 찾기 어려운 한계였을 수도 있다.
우리는 작지만 어디서든 조금 움직이면 이렇게 확실히 피서가 되는 다양한 쉼터를 많이 갖고 있다. 어디 쉼터이기만 하랴. 휴식과 충전과 치유를 함께 하는 공간, 그것도 소통이 가능한 길인 곳이 많다. 최근에는 적극적으로 올렛길, 둘렛길이라는 이름으로 아예 걷기 좋은 길을 개발하고 있다.
선재길은 그중에서도 명상의 길이자 구도의 길이다. 인위적인 길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구도를 위해 혹은 이동 자체를 위해 오갔던 길이었다.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구하는 구법의 길이었다는 선재길은 이제는 누구나 지혜를 구하러, 마음의 치유를 하러 걷는 치유의 길이 되었다.
알고보니 5월 15일까지는 산불조심기간으로 입산금지 기간이었단다. 때맞춰 와서 구도의 길을 자기 치유의 기회로 삼아 걸을 수 있었던 행운이 감사할 따름이다. 이 길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안내해주고 완주하게 해준 벗들에게 감사한다.
*우렁차게 물이 흐르는 계곡 저편은 큰길, 달리는 자동차가 보인다. 깊은 산길인 거 같은 선재길은 대로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길이니 차안이 곧 피안이다.
*화전민이 일군 밭
*출렁다리
일본 홋카이도 북쪽 시레토코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다. 이중 5개 호수 지역은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걷는 길이다. 깊은 삼림 속에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있어 간혹 곰이 출몰한다는 위험지역이지만 간단한 주의를 받고 5개 호수를 돌아보는 것이 큰 즐거움을 주는 코스이다. 그 길도 선재길처럼 물과 삼림이 있고, 깊은 산속 자연을 즐길 수 있으나 평지길이어서 관광객 편한 차림으로도 부담없이 걸을 수 있어 좋은 길이다.
시레토코는 아이누 말로 '땅이 끝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5호길은 그래선지 홋카이도 끝이면서 사람을 만날 수 없는 길이다. 만나는 사람은 떠도는 관광객이고, 이곳에 삶의 뿌리를 내린 생활인이나 구도자는 없다. 곰을 만날까 보아 방울을 사들고 동물을 두려워하면서 인간세에서 고립되어 잠시 틈입자가 되어 자연과 인간에서 소외되어 거죽만을 느끼고 와야 한다.
자연속의 길일 뿐이어서 길이지만 길이 아니다. 세상으로 인간으로 통하지 않으니 길이 아니다. 선재길은 깊은 산과 깊은 계곡과 맑은 공기가 있으나 인간세와 통하는 길이다.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길이다. 길은 통해야 한다. 인간으로 자연으로 통해서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나를 돌아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선재길은 그런 길이다.
'땅이 끝나는 곳'이 아니라 "땅이 시작되는 곳'이고, 길이 끝나면서 시작되는 곳이다. 사람을 자연을 만나고 나를 버리는, 그래서 나를 찾는 길이 선재길이다.
* 상원사 쪽의 선재길 초입. 월정사에서 갔으니 도착지, 목적지이다. 도착은 돌아서면 출발인 셈이다. 길은 시작이자 끝이다.
상원사 입구에서 월정사 입구까지 버스를 타고 내려와 다시 월정사, 원점으로 돌아왔다.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월정사, 창건당시 초암을 지어 머물면서 문수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국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고자 했으나 한 스님으로부터 부처의 진신사리를 받은 뒤 우리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뵙도록 하라는 말을 듣고 귀국한 터였다. 그 스님은 또 말하였다. 그대의 본국 오대산에는 일 만의 문수보살이 머물러 있다오.
<삼국유사>에는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문수보살을 만나 불법의 요지를 들으려고 자장대사가 기다리고 있는데, 남루한 옷을 입은 늙은 거사가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와서 수행 제자에게 자장을 보러왔다고 말했다. 제자는 감히 스승의 이름을 말한다며 미친 말이라고 스승에게 아뢰자 자장 또한 미친 사람인 모양이라고 했다. 거사는 '아상이 있는 사람이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나'라고 말하며 삼태기를 거꾸로 털어 사자보좌가 된 죽은 강아지를 타고 사라졌다. 자장은 비로소 깨닫고 빛을 쫓아 따라갔으나 아득하여 쫓지 못하고 몸을 던져 죽었다.
오대산이란 말은 다섯 개의 높은 봉우리를 지칭한다는 말과 중국 오대산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설이 있다. 중국 오대산에 다녀온 자장이 문수보살을 모시기 위해 월정사를 세운 곳이니 아무래도 후자의 명명설에 더 무게가 실린다.
중국 오대산은 산 전체가 사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정도로 사찰로 메워져 있다. 옆집도 그 옆집도 사찰이다. 티벳 사찰도 중국 사찰도 있다. 붉은 옷 가사도 황색 가사도 있다. 어느 사찰이나 문수보살의 지혜를 빌리고자 시험을 앞둔 자녀와 그 부모들로 붐빈다.
스님은 여름 한철 승려로 있다 관광객과 신도들의 발길이 끊기는 겨울이면 고향으로 돌아가 있다가 길이 열리면 다시 돌아와 승려가 되는 탄력적인 출가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태반이 대처승이니 승려와 속인의 구분이 어려울 듯하다.
우리 오대산은 승려가 아니어도 승려가 되는 듯한 느낌이다. 번뇌를 털려는 선재길이 속세와 탈속을 이어주는 길같은 느낌이라 한층 더 그러한지 모르겠다. 번뇌를 떨치고 마음의 정화를 통해 탈속을 하게 되면 이곳이 저곳이 되지 않겠는가.
차안과 피안의 구분도 마음 속에 있고 차안과 피안을 잇는 길도 마음속에 있지 않겠는가. 내 안의 아상을 떨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상은 자만심이다.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세상과의 길을 막는 내 맘 속의 장애물이다.
석가탄일 연등로가 아직 남아 있다. 형형색색의 연등이 고풍스러운 사찰 속에 또 하나의 길을 냈다. 선재길의 석탄일 재현이다.
#선재길 #월정사 #문수보살 #상원사 #구도길 #치유길
첫댓글 http://cafe.daum.net/koreawonderland/jIFA/15
http://cafe.daum.net/koreawonderland/jIFA/16
시레토코 5호 관련 글과 사진자료는 위 주소를 링크하면 볼 수 있습니다. 본카페 <신명나라 세계문화> 게시판 홋카이도 자유여행 편입니다. 필자 연경
글을 따라 길을 가는데, 제 몸이 실제 길 위를 걷는 것 같습니다. 어쩜 글이 이리도 잔잔하면서 맛깔스러울 수 있나요? 찬찬히 거듭 읽었습니다.
위에 소개한 훗가이도 주소는 링크가 안돼 게시판 훗카이도 자유여행편을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굽이굽이 마다 문수보살과 현자들을 만나 황홀경에 빠져.. 일장춘몽이었나 ... 20여리를 지척처럼 눈깜짝할 사이에 도착했다. 억겁과 찰라가 한순간...
여행은 주로 보기 위해 걷는데 이번 코스는 걷기 위해 보는 것이 된 거 같습니다. 길이 참 특별했지요. 길인 거 같으면 산이고, 수많은 다리를 건너야 하고, 깊은 산인가 하여 고개 들면 바로 건너가 큰 길이고, 찻길옆이 숲길이고, 덕분에 생각을 하면서 걸었습니다. 갔다 와서 음미하는 길이 두 분의 동참으로 더 좋은 길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