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10월 21일 전북 김제시 월성동 출생
초등학교 학년까지 김제 월성리(동)에서 살았다.
아버지를 일찌기 잃었다.
형제는 3남 3녀고 그중 아래로 두명의 동생이 있다.
초등학교 기억은 그저 배고픔 밖에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 어머니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를 한다.
그런데 집이 여의치 않아 모든 가족이 올라가지 못했다 어린 초등학교 누나와 함께 2년간을 시골집에서 살았다.
그때 기억은 배고픔이었다.
유일한 기쁨은 동산위에 있는 교회에 가는 것이다. 교회 선생님과 장로님(당시 목사가 없었다.) 교인들의 사랑스런 대함으로
교회 가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군과 도에서 시행하는 성경 퀴즈, 경시대회에서 항상 1,2등을 했다. 교인들의 관심의 열매인듯 싶었다.
이후 초등 4학년때 서울로 상경한다.
그곳은 왕십리 시장 근처 포장마차!
어머니는 포장마치 일을 하면서 옆에 간단한 숙소를 얽기 설기 만들었다.
여섯식구가 거기서 살았다. 가난과 수치를 너무 일찌기 배웠다.
10대는 방황의 시기였다. 우리 가족의 불행은 소통이 없었다는 것이다. 소통과 그 목적의 주체가 확실하지 않았다.
10대 시대때는 신문배달등을 하면서 일찌기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중학교 1학년때 가출 경기도 곤지암 어느 농가의 일꾼으로 들어갔다.
혹독한 겨울과 고생을 겪으면서 4개월만에 집에 돌아왔다.
이후 야간학교를 수없이 전전했다. 하지만 최종 학력은 고등 공민학교 3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중퇴하였다.
고독한 십대의 유일한 위안은 만화 그리기였다.
오선일, 강철수, 이두호, 방학기, 정한기 등 당대 유명 만화가를 찾아 다니며 만화를 배우려 했다.
한때 정한기 선생 문하에서 수학을 했다.
그러다 배고픈 만화 그만 두라고 하신 어머니의 소개로 오금동에 있는 불교 미술화가인 (고) 조인행 화백및에서 불교 미술을 시작했다. 이후 8년간 불교 미술을 전념하게 된다.
불교에 대한 신심은 많지 않았으나 좋은 작품을 위해 천수경을 낭송하면서 나름 신심을 다해 불화를 그렸다. 나의 영향으로 같이 만화수업을 하던 친구 김의식도 불화를 했다. 한국 불화계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나의 남동생 참나 박경귀도 나의 불화 일을 돕다가 동국대 불교미술대를 수학하고 전통 화가로써 자리를 잡았다. 청와대 및에 5층짜리 불화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여동생과 누나 매제등도 불화에 전업을 하는 불교 미술 패밀리를 이뤘다. 현재 조카들도 불화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잘 나가던 불교 미술을 어느날 한순간 접게 된다.
그것은 종교적 문제 때문이다. 어느날 깊은 영적 체험을 하면서 나는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성령 체험을 깊게 한 것이다.
불교 미술할때도 사찰에 머물며 영적 체험을 간간히 했었지만 기독교에서 접한 체험은 너무나 강력했다.
한순간 불교 미술을 그만 두고 다시 만화를 시작하게 된다.
그후 십여년을 만화가공부와 함께 만화 일을 하게 되었다. 만화가 하승남, 천제황등 사극만화 펜터치를 하면서 작가의꿈을 꿨다. 그 이전 시작은 권법소년 일본 만화를 각색하는 작가 밑에서 일을 해웠다.
이후 두번째 온 신앙적 강력한 체험이 나를 일반 만화에서 선교 만화가로 전환케 했다.
아마 이때 글쓰기의 능력을 영적 능력을 받은 때라 본다.
성경을 보는데 갑자기 성경이 저절로 해석 되어졌다.
세상 이치를 저절로 깨닫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선교 만화를 그리기 위해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신학교에 입학하고 성경 연구에 몰두 했다.
박작가의 신앙스토리는 기독교 방송 '새롭게 하소서'에도 방송 되었다.
현대 종교라는 기독교 잡지에 소개 되면서 당시 소장이었던 고) 탁명환 교수를 만나게 된다.
그분의 인도따라 많은 이단과 사이비의 실체를 배우고 올바른 신앙정립을 하게 되었다.
당시 그곳에서 신앙 상담을 해주던 목사는 국내 몇 없는 이단 상담 전문가였다. 그분으로 부터 10년이 성경과 신학을 사사 받았다.
'사탄의 마지막 음모'라는 선교 만화를 출간했다.
기독교 만화 선교회를 창립했다. 당시 회장으로는 백성민 화백이었다. 웬만한 유명기독 만화가는 다 모였었다.
37세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신학교 졸업후 스승님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의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개척을 한 후 3년 6개월동안 발에 닳도록 전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며 영적 능력을 받기 위해 애를 썼다.
많은 체험과 능력을 경험했다. 그러던 중 캐나다에서 만난 아프리카 선교사의 집회때 강력한 영적 체험을 하고 다시 영계가 열렸다.
모든 성경이 사랑으로 열리고 그 말씀이 글로 척척 써지는 것이다.
당시 강력했던 체험에 따라 아프리카 선교를 가려 했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이미 말씀으로 사랑의 능력이 왔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가기 위한 것을 접고 이후 부터 하늘로부터 내리는 말씀을 글로 적기 시작했다.
골방과 산속 기도원, 그리고 중국까지 건너가 홀로 영적인 말씀을 받고 글로 썼다. 그러던 어느날 몇분으로 부터 성경공부를 요청 받았다. 스터디를 할 때 강력한 파워가 나왔다. 강의를 듣는 분들이 3개월도 못되어 완전히 변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삶이 변하고 헌신자가 나왔다.
3년만에 귀국한 후 이런 제자 사역에 몰두를 했다.
2010년 8월 제자 사역은 끝을 맺었다.
이후 제자 사역을 그만 두고 다시 골방으로 들어갔다. 부여 산속 기도원과 익산 골방에 있으면서 기도와 책쓰기에 몰두 했다.
극심한 가난과 고난이 몰려왔다. 온 가족은 뿔뿔히 흩어지고 아내와는 이별을 했다.
형제와 연을 끊다시피하고 오직 홀로 남아 글쓰기만 몰두 했다.
너무 배고프고 힘들어서 견딜수 없었다. 해서 노가다, 경비, 청소부, 좌판 장사, 등등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하면서 생활을 이겨내려 했다. 가난은 가장 무서운 재해다.
박작가는 잠시 글쓰는 것을 멈추고 가난을 벗기 위해 돈벌이를 시작했다.
분양상담사, 식자재 프랜차이즈 영업, 건강식품 홍보 강사 등 영업을 몰두 했다.
박작가는 얼마나 영업에 형편 없는지를 깨달았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