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大同譜略上系事蹟(대동보략상계사적)
-대동보략상계사적(大同譜略上系事蹟-대동보략의 옛 계보에 관한 자취)
始祖鄭宗殷(시조정종은)은 新羅武烈王朝(신라무열왕조)에 仕諫議大夫(사간의대부)하고 與金庾信(여김유신)으로 協謨統合三韓時(협모통합삼한시)에 以言事(이언사)로 謫仁同若木縣(적인동약목현)하니 因居焉(인거언)하다. 此下二十世(차하이십세)는 佚而不傳(일이부전)이라.
-시조(始祖) 정종은(鄭宗殷)은 신라무열왕(新羅武烈王-신라 29대 임금, 김춘추) 때에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간언관)였고 김유신(金庾信)과 더불어 함께 삼국통일(三國統一)을 도모(圖謀)할 때에 직언(直言)으로 인동(仁同-구미 부근) 약목현(若木縣-칠곡 부근)에 귀양을 가게 되었으니 인(因)하여 살게 되었다. 이 아래로 이십세(二十世)는 잃어버려 전(傳)하지 않는다.
後孫(후손) 宜卿(의경)은 始遷于迎日縣(시천우영일현)하야 職定戶長(직정호장)하고 復起爲縣監(부기위현감)하다.
-후손(後孫) 의경(宜卿)은 비로소 영일현(迎日縣)으로 옮겨 직책(職責)이 호장(戶長-촌장)이 되었고 다시 현감(縣監-현령)이 되었다.
●後孫滎陽公諱襲明(후손형양공휘습명)이 爲一派(위일파)라.
-후손(後孫) 형양공(滎陽公) 휘(諱-죽은 어른의 이름을 말할 때 휘라 함) 습명(襲明)이 한 파(派-갈래)가 된다.-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一世(일세)
襲明(습명)은 高麗睿宗朝(고려예종조)에 以鄕貢(이향공)으로 登文科(등문과)하야 歷翰林玉堂(력한림옥당)하고 至銀靑光祿大夫樞密院知奏事(지은청광록대부추밀원지주사)하니 一云封滎陽公(일운봉형양공)이라. 紹興辛未三月二十一日卒(소흥신미삼월이십일일졸)하니 墓(묘)는 迎日舊邑址官廳後云(영일구읍지관청후운)이니 而久遠難的(이구원난적)하고 有壇碑(유단비)하니 文領議政俞公拓基撰(문영의정유공탁기찬)하다. ○麗史(려사)에 有本傳(유본전)이라. ○享迎日烏川書院(향영일오천서원)하고 有實記(유실기)라.
-습명(襲明)은 고려예종조(高麗睿宗朝-고려예종때)에 향공(鄕貢-고려 지방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자격을 얻은 사람)으로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한림옥당(翰林玉堂-한림원을 옥당이라 부르며 왕의 명을 제찬하는 일을 함)을 지냈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고려 정삼품 품계)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왕명을 출납하는 관청인 추밀원의 지주사로 조선의 승지직에 해당)를 지냈으며 또 형양공(滎陽公)에 봉(封)해졌다. 소흥(紹興-남송 고종의 연호) 신미(辛未-고려 의종5년,서기 1151년) 삼월(三月) 이십일일(二十一日) 졸(卒-생을 마침)하니 묘(墓)는 영일(迎日) 구읍(舊邑-옛 읍)이 위치(位置)하였던 관청(官廳)자리라 후(後)에 말하니 구원난적(久遠難的-오래되고 멀어 알기 어렵다)하고 단소(壇所-시신없이 제단을 모신 곳)의 비(碑)가 있으니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유탁기(俞拓基)가 비음기(碑陰記-비에 뒤에 세긴 글)를 찬(撰-짓다)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본전(本傳-한 사람의 전기와 같이 그사람에 관한 글)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영일(迎日)의 오천서원(烏川書院)에 배향(配享)되었고 실기(實記-자취에 관한 사실의 기록물)가 있다.
二世(이세)
燮均(섭균)은 衛尉注簿同正(위위주부동정)이라.
-섭균(燮均)은 위위시(衛尉寺-고려 의례기구를 담당하는 사무관청)의 주부동정(注簿同正-동정직이란 실직이 아닌 명예직이며 녹봉이 없다)을 지냈다.
三世(삼세)
謙牧(겸목)은 內侍注簿同正(내시주부동정)이라.
-겸목(謙牧)은 내시(內侍-고려의 내시는 환관과는 다르며 공신이나 학자의 자제들로 선발했으며 문무관과 더불어 지배층의 중핵이었음.)의 주부(注簿-고려 하급 경관직으로 여러 관청에 두었음) 동정(同正-검교와 같은 명예직)을 지냈다.
四世(사세)
麟信(린신)은 太學博士(태학박사)요 又云奉衛同正(봉위동정)이라.
-린신(麟信)은 태학박사(太學博士-고려 국자감에 설치한 육학의 한 분과가 태학이며 태학박사와 태학조교를 두었음)를 지냈으며 또 봉위동정(奉衛同正)을 지냈다.
五世(오세)
之泰(지태)는 典書(전서)요 又云注簿同正(우운주부동정)이라. ○配(배)는 杞溪郡夫人杞溪尹氏(기계군부인기계윤씨)니 父(부)는 監察御史昇(감찰어사승)이라.
-지태(之泰)는 전서(典書-고려 육부의 으뜸 벼슬)를 지냈으며 주부동정(注簿同正- 고려 여러관청에 둔 명예 하급 경관직)을 지냈다. ○부인(夫人)은 기계윤씨(杞溪尹氏)니 부친(父親)은 감찰어사(監察御史-고려 사헌부의 종6품직)를 지낸 승(昇)이다.
六世(육세)
宗興(종흥)은 進賢舘提學(진현관제학)이요 又云中顯大夫監門衛大護軍(우운중현대부감문위대호군)이라. ○配(배)는 陳氏(진씨)니 父(부)는 掌治署丞就烈(장치서승취열)이요 祖(조)는 檢校軍器監令規(검교군기감영규)이며 曾祖(증조)는 戶部全史同正永輔(호부전사동정영보)라.
-종흥(宗興)은 진현관제학(進賢舘提學-진현관은 고려 학문기관인 관전의 하나이며 제학과 학사를 둠)을 지냈으며 또 중현대부(中顯大夫-고려 종삼품 하계의 품계)인 감문위(監門衛-고려 군사조직의 2군6위의 6위 중 하나)의 대호군(大護軍- 종삼품의 장군)을 지냈다. ○부인(夫人)은 진씨(陳氏)니 부친(父親)은 장치서승(掌治署丞-고려 궁중에서 쓰는 수공업 공장을 관리하는 관청의 관리)를 지낸 취열(就烈)이며 조부(祖父)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고려 병기 만드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인 군기감의 명예관직)을 지낸 영규(令規)이며 증조(曾祖)는 호부전사동정(戶部全史同正)을 지낸 영보(永輔)이다.
七世(칠세)
林(림)은 奉翊大夫版圖判書(봉익대부판도판서)라. ○配(배)는 義昌朴氏(의창박씨)니 父(부)는 典客副令益(전객부령익)이요 祖(조)는 將軍承盖(장군승개)이며 曾祖(증조)는 禮賓丞同正奇(예빈승동정기)라.
-림(林)은 봉익대부(奉翊大夫-고려 문산계 종2품 하계)로 판도판서(版圖判書-호부의 으뜸벼슬)를 지냈다. ○부인(夫人)은 의창박씨(義昌朴氏)니 부친(父親)은 전객부령(典客副令-고려 典客寺전객시에 딸린 정사품 벼슬)을 지낸 익(益)이요. 조부(祖父)는 장군(將軍) 승개(承盖)이며 증조(曾祖)는 예빈승동정(禮賓丞同正-전객시는 예빈시의 전신이며 빈객 대접을 관장하는 관청이다. 그에 딸린 정5품 벼슬의 명예직이 동정임)을 지낸 기(奇)라.
八世(팔세)
仁壽(인수)는 檢校軍器監(검교군기감)이니 以曾孫夢周貴(이증손몽주귀)로 贈奉翊大夫開城尹上護軍(증봉익대부개성윤상호군)하다.
-인수(仁壽)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병기를 만드는 군기감의 명예직)이었으며 증손(曾孫) 몽주(夢周)가 귀(貴-고귀)해지므로 봉익대부(奉翊大夫-종 2품 문산계)로 개성윤(開城尹-개성부의 최고 책임자)과 상호군(上護軍-상장군)으로 추증(追贈-벼슬이 높여짐)되었다.
九世(구세)
裕(유)는 直長同正(직장동정)이니 以孫夢周貴(이손몽주귀)로 贈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증봉익대부밀직부사상호군)하다. ○配(배)는 谷山延氏(곡산연씨)이니 父(부)는 金吾衛大將軍丹瑞(금오위대장군단서)요 祖(조)는 散員祚(산원조)이며 曾祖(증조)는 侍中鏡(시중경)이오 外祖(외조)는 金海金○○(김해김○○)이라.
-유(裕)는 직장동정(直長同正-직장은 고려시대 각 시寺·감監·서署·국局·고庫의 하급 관직이며 동정이란 명예직임)이니 손자(孫子) 몽주(夢周)가 고귀(高貴)해지므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부사(密直副使-중추원이 추밀원으로 또 밀직사로 개칭되었으며 밀직사의 한 벼슬)와 상호군(上護軍-상장군)으로 추증(追贈)되었다. ○부인(夫人)은 곡산연씨(谷山延氏)니 부친(父親)은 금오위(金吾衛-이군육위의 하나)의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단서(丹瑞)요 조부(祖父)는 산원(散員-이군육위의 하급군관으로 낭장과 별장의 보좌관)을 지낸 조(祚)이며 증조(曾祖)는 시중(侍中-고려 중서문하성의 최고 관직)을 지낸 경(鏡)이오. 외조부(外祖父)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인 ○○이다.
十世(십세)
云瓘(운관)은 成均服膺齋生(성균복응재생)이니 至正乙未正月卒(지정을미정월졸)하다. 以子夢周貴(이자몽주귀)로 贈愼德守義誠勤翊祚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兵曺事上護軍領景靈殿事日城府院君(증신덕수의성근익조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하시중판병조사상호군령경령전사일성부원군)하다. 墓(묘)는 永川北二十里許阿川里道一洞壬坐合窆(영천북이십리허아천리도일동임좌합폄)이요 表陰(표음)은 九世孫榏(구세손익)이 記(기)하고 神道碑文(신도비문)은 十七世孫鳳基(십칠세손봉기) 記(기)하다. ○配(배)는 贈卞韓國夫人永川李氏(증변한국부인영천이씨)니 父(부)는 膳官署丞約(선관서승약)이요 祖(조)는 禮賓丞仁挻(예빈승인연)이며 曾祖(증조)는 郞將軌(낭장궤)요 至正乙巳正月卒(지정을사정월졸)하니 墓祔(묘부)라.
-운관(云瓘)은 성균관(成均館)의 복응재생(服膺齋生-상급 학부인 칠재 중에서 예를 공부하는 복응재의 학생)이었으니 지정(至正-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 혜종의 연호) 을미(乙未-서기1355년, 공민왕4년) 정월(正月-음력 일월)에 생을 마쳤다. 아들 몽주(夢周)가 고귀해지므로 인하여 신덕수의성근익조공신(愼德守義誠勤翊祚功臣)에 추록(追錄)되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고려 정일품의 문관품계)으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고려 재상직) 겸 판병조사(判兵曹事-대개 겸직으로 병조의 판서 감독직) 상호군(上護軍-상장군)과 영경령전사(領景靈殿事-고려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던 곳이 경령전이며 으뜸직에 영사를 둠)로 추증(追贈)되었으며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묘(墓)는 영천(永川)의 북쪽 이십리(二十里)쯤 아천리(阿川里)의 도일동(道一洞)에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언덕에 합폄(合窆-부부를 같이 무덤에 묻음)하였으며 묘표문(墓表文)은 구세손(九世孫) 익(榏)이 지었고 신도비문(神道碑文)은 십칠세손(十七世孫) 봉기(鳳基)가 지었다. ○부인(夫人)은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정1품 공신의 처)으로 추증(追贈)되었으며 영천이씨(永川李氏)로 부친(父親)은 선관서승(膳官署丞-고려 궁중의 제사나 연회에 쓸 음식을 맡아보는 선관서의 관원)을 지낸 약(約)이요, 조부(祖父)는 예빈승(禮賓丞-고려 외국의 빈객을 접대하는 예빈성의 관원)을 지낸 인연(仁挻)이며 증조(曾祖)는 낭장(郎將-고려 중낭장 아래의 정6품 무관직)을 지낸 궤(軌)요, 지정(至正-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 혜종의 연호) 을사(乙巳-서기1365년, 공민왕14년) 정월(正月-음력 일월)에 생을 마치니 부좌(祔左-남편의 왼쪽에 묻어 합장함)하였다.
十一世(십일세)
夢周(몽주)는 字達可(자달가)요 號圃隱(호포은)이니 至元丁丑十二月戊子生(지원정축십이월무자생)이라. 丁酉(정유)에 進士(진사)요 庚子(경자)에 文科(문과)하니 連魁三塲(연괴삼장)하다. 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순충론도동덕좌명공신)과 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하시중)과 判都評議使司(판도평의사사)와 兵曹尙瑞寺事(병조상서시사)와 領景靈殿事(령경령전사)와 右文館大提學(우문관대제학)과 監春秋館事(감춘추관사)와 領經筵事(령경연사)와 益陽君(익양군)과 忠義伯(충의백)이라. 洪武壬申四月四日(홍무임신사월사일)에 卒于善竹橋(졸우선죽교)하니 朝鮮太宗朝(조선태종조)에 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증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부사)와 修文殿大提學兼藝文春秋館事(수문전대제학겸예문춘추관사)와 益陽府院君(익양부원군)이요 諡文忠(시문충)이라. 墓(묘)는 龍仁東北十五里慕賢村曬布里文秀山辰坐合窆(용인동북십오리모현촌쇄포리문수산진좌합폄)이요 神道碑銘(신도비명)은 尤庵宋文正公時烈撰(우암송문정공시열찬)하고 神道碑追記(신도비추기)는 遂菴權文純公尙夏撰(수암권문순공상하찬)이며 誌銘(지명)은 陶庵李文正公縡撰(도암이문정공재찬)이라. ○從祀文廟西廡(종사문묘서무)하고 享永川臨皐(향영천임고)와 松都崧陽(송도숭양)과 龍仁忠烈(용인충렬)과 迎日烏川(영일오천)과 尙州道南(상주도남)과 永興興賢(영흥흥현)과 順安星山(순안성산)과 蔚山鷗江(울산구강)과 晋州玉山書院(진주옥산서원)과 東鶴三隱閣(동학삼은각)하며 有文集(유문집)이라. ○配(배)는 敬順宅主慶州李氏(경순택주경주이씨)니 父(부)는 判事士贇(판사사윤)이요 十二月十二日卒(십이월십이일졸)하니 墓祔(묘부)라.
-몽주(夢周)는 ①자(字)가 달가(達可)이고 ②호(號)는 포은(圃隱)이니 지원(至元-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 혜종의 연호) 정축(丁丑-충숙왕 6년, 서기 1337년) 십이월(十二月) 무자생(戊子生)이라. 정유(丁酉-서기 1357년)에 진사(進士-과거시험의 소과인 초시 합격자)가 되었고 경자(庚子-서기 1360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합격)하니 연달아 삼장(三場-과거시험 대과인 복시의 초,중,종장)에 장원(壯元)하였다. 순충론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하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고려 재상직인 수문하시중의 정일품 문관품계)과 판도평의사사(判都評議使司-고려 재상의 겸직으로 국정의 논의및 의결기관)와 병조상서시사(兵曺尙瑞寺事-병조는 군의 인사권, 상서원은 왕의 옥새와 부신, 부월을 관장하는 기관)와 령경령전사(領景靈殿事-고려 불천위인 태조의 초상화와 현국왕의 사대친 즉, 부와 조와 증조와 고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영전이 경령전이며 관장하는 으뜸벼슬이 영사임)와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임금이 학사와 경서를 강론하는 곳의 으뜸벼슬)과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고려 시정을 기록하는 관청이 춘추관이며 수상이 겸직하였음)와 령경연사(領經筵事-왕의 학문과 치도를 지도하고 강론하던 경연관의 영사로 주로 재상이 겸직)를 지냈으며 익양군(益陽君)의 군호(君號-군의 칭호)와 충의백(忠義伯)에 봉작(封爵-작위에 봉해짐)되었다. 홍무(洪武-명태조 주원장의 연호) 임신(壬申-조선 태조 1년, 서기 1392년) 사월(四月) 사일(四日)에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李芳遠) 일파(一派)에게 피살(被殺)되었으나, 조선태종조(朝鮮太宗朝-조선 3대왕 태종 이방원의 집정기)에 증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부사(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조선 정일품 문관의 상품계로 영의정)와 수문전대제학겸예문춘추관사(修文殿大提學兼藝文春秋館事-왕의 시종기관으로 문신 중에서 재질과 학식이 뛰어난 자를 선발했으며 으뜸벼슬이 대제학임, 왕명을 작성하는 예문관과 시정과 역사기록을 하는 춘추관에 관직으로 가선대부 이상이 겸직)에 추증(追贈-죽은 뒤에 벼슬이 하사되거나 올려짐)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죽은 뒤에 올려 봉작됨)되었으며 문충공(文忠公)의 시호(諡號)를 하사(下賜)받았다. 묘(墓)는 용인(龍仁) 동북쪽으로 십오리(十五里)쯤 되는 모현촌(慕賢村-지금의 모현읍) 쇄포리(曬布里) 문수산(文秀山) 진좌술향(辰坐戌向)의 언덕에 합폄(合窆-부부를 같이 무덤에 묻음)하였다. 신도비명(神道碑銘-신도비문)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先生)이 지었으며 신도비추기(神道碑追記-신도비의 빠진 내용을 추가하여 기록)는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선생(先生)이 지었고 지명(誌銘-묘 앞의 비문)은 도암(陶庵) 이재(李縡) 선생(先生)이 지었다. ○문묘(文廟-공자와 우리나라의 십팔현인을 모시는 사당)의 서무(西廡-문묘에 공자의 대성전 서쪽의 아래채)에 종사(從祀-위패와 제사를 모심)되었고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과 송도(松都)의 숭양서원(崧陽書院)과 용인(龍仁)의 충렬서원(忠烈書院)과 영일(迎日)의 오천서원(烏川書院)과 상주(尙州)의 도남서원(道南書院)과 영흥(永興)의 흥현서원(興賢書院)과 순안(順安)의 성산서원(星山書院)과 울산(蔚山)의 구강서언(鷗江書院)과 진주(晉州)의 옥산서원(玉山書院)과 동학사(東鶴寺)의 삼은각(三隱閣)에 제향(祭享-위패와 제사를 모심)되었으며 문집(文集)이 보관(保管)되어 있다.○부인(夫人)의 택호(宅號-성명 대신 출신지나 벼슬이름을 사용하여'~댁'이란 뜻과 같음)는 경순택주(敬順宅主-택주는 종실제군의 부인이나 공신 종1품의 처를 일컬음)이며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니 부친(父親)은 판사(判事-고려 각 관부의 최고 관직) 사윤(士贇)이요, 십이월(十二月) 십이일(十二日)에 생(生)을 마치니 묘부(墓祔-부좌, 합장, 합폄, 합부와 같음, 남편과 합쳐 묘를 씀)라.
十二世(십이세)
宗誠(종성)은 李朝通政大夫吏曹叅議(이조통정대부이조참의)요 三月二十七日卒(삼월이십칠일졸)하니 墓(묘)는 圃隱先生墓左長麓百七十餘步乙坐合窆(포은선생묘좌장록백칠십여보을좌합폄)하고 有表石(유표석)이라. ○配(배)는 延昌郡夫人竹山朴氏(연창군부인죽산박씨)니 父(부)는 提學仲容(제학중용)이요 祖(조)는 贊成形(찬성형)이며 曾祖(증조)는 上護軍德龍(상호군덕룡)이요 外祖(외조)는 判書金敬先(판서김경선)이라. 十二月二十三日卒(십이월이십삼일졸)하니 墓祔左(묘부좌)라.
-종성(宗誠)은 이조(李朝-이씨 조선) 통정대부(通政大夫-조선 정3품 상계의 품계)로 이조참의(吏曹參議-이조의 판서 아래가 참판이며 그 아래가 참의)요, 삼월(三月) 이십칠일(二十七日) 생(生)을 마치니 묘(墓)는 포은선생(圃隱先生) 묘(墓) 왼쪽의 백칠십여보(百七十餘步) 떨어진 긴 산줄기로 을좌신향(乙坐辛向-을방을 등지고 신방을 바라봄)의 언덕에 합폄(合窆-아내와 같이 묻다)하였고 표석(表石-묘 앞에 표지한 비석)을 세웠다. ○부인(夫人)은 연창군부인(延昌郡夫人-연창은 읍호로 본인이나 남편의 관향 연고지이며 군부인은 조선 정/종1품 공신 처의 작호임) 죽산박씨(竹山朴氏)니 부친(父親)은 제학(提學-예문춘추관, 예문관, 보문각, 우문관, 집현관에 소속된 정3품 벼슬)을 지낸 중용(仲容)이요, 조부(祖父)는 찬성(贊成-조선 의정부 차관직으로 종1품)을 지낸 형(形)이며 증조(曾祖)는 상호군(上護軍-고려 정3품 무관직, 상장군)을 지낸 덕룡(德龍)이요, 외조부(外祖父)는 판서(判書-육조의 으뜸벼슬, 장관직)를 지낸 김경선(金敬先)이라. 십이월(十二月) 이십삼일(二十三日) 생(生)을 마치니 묘(墓)는 부좌(祔左-남편의 왼쪽에 묻음)하였다.
宗本(종본)은 建文辛巳(건문신사)에 文科(문과)하야 成均館司藝(성균관사예)요 一云通訓大夫判典農寺事(일운통훈대부판전농시사)니 贈通政大夫兵曹參議(증통정대부병조참의)하다. 墓(묘)는 高陽南十五里沙里峴庚坐(고양남십오리사리현경좌)라. ○配(배)는 贈淑夫人慶州李氏(증숙부인경주이씨)니 父(부)는 密直事廷堅(밀직사정견)이요 祖(조)는 少監毓(소감육)이며 曾祖(증조)는 月城君敬中(월성군경중)이요 外祖(외조)는 密直光州金天利(밀직광주김천리)라.
-종본(宗本)은 건문(建文-명나라 2대 황제인 혜종 건문제의 연호) 신사(辛巳-태종 1년, 서기 1401년)에 문과(文科)에 등제(登第-과거시험에 급제함)하여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정4품으로 성균관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악정)를 지냈고 또 통훈대부(通訓大夫-조선 정3품 하계의 품계)로 전농시(典農寺-국가의 여러 제사에 쓸 곡물을 관장하던 관서)의 판사(判事-으뜸벼슬)를 지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조선 정3품 상계의 품계)로 병조참의(兵曹參議-병조의 참의로 차차관직)에 추증(追贈-아들이나 손자의 출세나 공훈으로 인해 죽은 뒤 벼슬이 올려지는 일)되었다. 묘(墓)는 고양(高陽-경기도 고양) 남쪽 십오리(十五里) 사리현(沙里峴)의 경좌원(庚坐原-경좌갑향으로 묘를 쓴 언덕)에 있다. ○부인(夫人)은 숙부인(淑夫人-정3품 아내의 작호)으로 추증(追贈)된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니 부친(父親)은 밀직사(密直事-밀직사에 속한 한 관직)를 지낸 정견(廷堅)이요, 조부(祖父)는 소감(少監-조선 여러 관서에 두었던 종4품직)을 지낸 육(毓)이며 증조(曾祖)는 월성군(月城君-월성군에 봉작됨) 경중(敬中)이요, 외조부(外祖父)는 밀직사(密直事-밀직사에 속한 한 관직)를 지낸 광주김씨(光州金氏) 천리(天利)이다.
十三世(십삼세)
保(보)는 宗誠子(종성자)요 號雪谷(호설곡)이며 進士(진사)니 通訓大夫司憲府監察(통훈대부사헌부감찰)이요 四月二十日卒于丹城謫所(사월이십일졸우단성적소)하다. 以曾孫世弼貴(이증손세필귀)로 贈司僕寺正(증사복시정)하고 肅宗癸未(숙종계미)에 以莊陵節義(이장릉절의)로 特贈通政大夫吏曹參議(특증통정대부이조참의)하며 光武乙巳(광무을사)에 加贈資憲大夫吏曹判書(가증자헌대부이조판서)하다. 墓(묘)는 圃隱先生墓右長麓內第一岡四十餘步甲坐上下墳(포은선생묘우장록내제일강사십여보갑좌상하분)이요 表陰(표음)은 陶庵李文正公縡撰(도암이문정공재찬)하고 墓誌銘(묘지명)은 參判李公采撰(참판이공채찬)하다. 世祖丙子六臣之獄(세조병자육신지옥)에 公(공)이 亦坐將刑(역좌장형)이러니 上(상)이 以圃隱先生孫(이포은선생손)으로 特命減死(특명감사)하고 流配迎日(유배영일)이라가 後徙丹城(후사단성)하니 事載國史及丹城誌(사재국사급단성지)하다. 享寧越八賢祠(향영월팔현사)와 龍仁忠烈祠(용인충렬사)와 晋州玉山書院(진주옥산서원)하고 有實記(유실기)하다. ○配(배)는 贈貞敬夫人密陽朴氏(증정경부인밀양박씨)니 父(부)는 兵使登(병사등)이니 一云簦(일운등)이요 祖(조)는 少尹瞻(소윤첨)이니 一云暿(일운희)이며 曾祖(증조)는 府院君仲美(부원군중미)요 外祖(외조)는 大提學文敬公淸州韓修(대제학문경공청주한수)라. 二月二十七日卒(이월이십칠일졸)하니 上下墳(상하분)이라.
-보(保)는 종성(宗誠)의 아들이요 호(號)는 설곡(雪谷)이며 진사(進士)니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하계의 품계)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조선 사헌부에 소속된 관리)을 지냈으며, 사월이십일(四月二十日)에 귀양을 간 곳인 단성(丹城-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서 생(生)을 마쳤다. 증손(曾孫) 세필(世弼)이 고귀(高貴-출세로 지위가 높아져)해지므로 사복시정(司僕寺正-조선 말과 수레, 농장을 관장하는 관청인 사복시에 속한 관리)에 추증(追贈)되었고 숙종(肅宗-조선 19대 왕) 계미(癸未)에 장릉절의(莊陵節義-단종에게 절개를 지킨 신하)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상계의 품계)인 이조참의(吏曹參議-이조의 판서와 참판 아래)에 특명(特命)으로 추증(追贈)되었으며 광무을사(光武乙巳-서기 1905년, 대한제국의 연호가 광무)에 자헌대부(資憲大夫-조선 정2품 하계의 품계)인 이조판서(吏曹判書-이조의 으뜸벼슬)에 올려 추증(追贈)되었다. 묘(墓)는 포은선생(圃隱先生) 묘(墓)의 오른쪽 능선(稜線)에 있는 첫번째 언덕으로 사십여보(四十餘步) 떨어진 갑자경향(甲坐庚向-묘의 좌향을 말함)의 상하분(上下墳-부부의 묘를 위와 아래로 씀)이요, 표음(表陰-묘표비의 뒷면에 쓴 글)은 도암(陶庵)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 선생(先生)이 지었고 묘지명(墓誌銘-묘의 주인에 관한 신원이나 공덕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글로 돌에 새겨 무덤에 넣었음)은 참판(參判-판서의 아래)을 지낸 이채(李采) 선생(先生)이 지었다. 세조(世祖-조선 7대왕) 병자(丙子)에 육신지옥(六臣之獄-단종에 정절을 지킨 사육신의 옥사)이 있자 공(公)이 또한 장차(將次) 사형(死刑)의 죄(罪)를 입었으나 상(上-임금, 세조를 말함)이 포은선생(圃隱先生)의 손자(孫子)임을 감안(勘案-참고하여 생각함)하여 특명(特命)으로 사형(死刑)을 면(免)케 하였고 영일(迎日)에 유배(流配-귀양)케 하였다가 후(後)에 단성(丹城-산청군 단성면)으로 옮겨졌으니 국사(國史-나라의 역사서)와 단성지(丹城誌-단성읍의 읍지)에 사실이 실려 있다. 영월(寧越) 팔현사(八賢祠)와 용인(龍仁) 충렬사(忠烈祠)와 진주(晋州)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종사(從祀-학덕이 높은 사람의 위패를 모심)되었으니 실기(實記-자취에 대한 사실의 기록)가 있다. ○배위(配位-부인)는 정경부인(貞敬夫人-조선 정.종1품 문무관의 처에게 주던 위호)에 추증(追贈)된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니 부친(父親)은 병사(兵使-조선 지방의 군대를 통솔하던 종2품 무관직)를 지낸 등(登)이며 또 달리 (簦)이라고 쓰기도 한다. 증조(曾祖)는 부원군(府院君-임금의 장인) 중미(仲美)요, 외조부(外祖父)는 대제학(大提學-조선 예문관과 홍문관의 최고직)을 지낸 문경공(文敬公) 청주한씨(淸州韓氏) 수(修)이다. 이월이십칠일(二月二十七日)에 졸(卒-생을 마침)이니 상하분(上下墳-부부의 묘를 위아래로 따로 쓴 형태)이라.
脩(수)는 宗誠子(종성자)요 宣務郞司憲府監察(선무랑사헌부감찰)이니 墓(묘)는 楊州南五里綠楊驛北越崗南防里午坐(양주남오리녹양역북월강남방리오좌)요 有表石(유표석)하다. ○配(배)는 淸州鄭氏(청주정씨)니 父(부)는 持平持(지평지)요 祖(조)는 文簡公樞(문간공추)이며 曾祖(증조)는 直提學誧(직제학포)요 外祖(외조)는 文府使鎭川宋愚(문부사진천송우)라
-수(脩)는 종성(宗誠)의 아들이요 선무랑(宣務郞-조선 종6품 하계의 품계)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사헌부에 속한 관직)을 지냈으니 묘(墓)는 양주(楊州-경기도 양주)의 남쪽으로 오리(五里-약2키로) 떨어진 녹양역(綠楊驛) 북쪽 언덕을 넘어 남방리(南防里)에 오좌자향(午坐子向)으로 썼으며 묘표석(墓表石-묘 앞의 표비석)이 있다. ○배위(配位-부인)는 청주정씨(淸州鄭氏)니 부친(父親)은 지평(持平-조선 사헌부의 정5품 관직)을 지낸 지(持)요, 조부(祖父)는 문간공(文簡公-죽은 이의 시호) 추(樞)이며 증조부(曾祖父)는 직제학(直提學-조선 홍문과과 예문관의 관직으로 정3품의 당하관)을 지낸 포(誧)요, 외조부(外祖父)는 문신(文臣) 출신(出身)의 부사(府使-조선 지방 행정은 부,목, 군, 현이 있었으니 부의 수령을 말함)였던 진천송씨(鎭川宋氏) 우(愚)라.
恂(순)은 宗本子(종본자)이니 生員(생원)에 啓功郞(계공랑)이요 義盈庫直長(의영고직장)이며 天順己卯卒(천순기묘졸)하다. ○配(배)는 江陵金氏(강릉김씨)니 父(부)는 監務從南(감무종남)이요 祖(조)는 判書錘(판서추)이며 曾祖(증조)는 侍中光乙(시중광을)이요 外祖(외조)는 參贊淸州李至(참찬청주이지)라. 生二子三女(생이자삼녀)하다. ○繼配(계배)는 陽城李氏(양성이씨)니 父(부)는 縣監仲臣(현감중신)이요 祖(조)는 判書仁奇(판서인기)이며 曾祖(증조)는 判書琯(판서관)이요 外祖(외조)는 判書咸安李瑗(판서함안이원)이라. 永樂乙未生(영락을미생)이요 丁巳七月十三日卒(정사칠월십삼일졸)하니 享年八十三(향년팔십삼)이며 墓(묘)는 晉州東五里飛鳳山下猪洞後谷乾坐(진주동오리비봉산하저동후곡건좌)요 有表陰(유표음)하다.
-순(恂)은 종본(宗本)의 아들이니 생원(生員-생원시에 합격한 자)이었으며 계공랑(啓功郞-조선 종7품의 관리)이요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조선 궁중의 기름, 꿀, 과일 등을 관리하던 의영고에 속한 종7품 관직)이었으며 천순(天順-명나라 6대황제인 영종의 연호) 기묘(己卯-세조 5년, 서기1459년)에 졸(卒-사망)하다. ○배위(配位-부인)는 강릉김씨(江陵金氏)니 부친(父親)은 감무(監務-고려와 조선 지방에 판견된 지방관)를 지낸 종남(從南)이요, 조부(祖父)는 판서(判書-조선 육조의 장관직)를 지낸 추(錘)이며 증조(曾祖)는 시중(侍中-고려 중서문하성의 최고직으로 수상직)을 지낸 광을(光乙)이요, 외조부(外祖父)는 참찬(參贊-의정부 차차석으로 좌우의정 아래인 찬성의 아래)을 지낸 청주이씨(淸州李氏) 지(至)라. 이남삼녀(二男三女)를 낳았다. ○계배(繼配-두번째 부인)는 양성이씨(陽城李氏)니 부친(父親)은 현감(縣監-현의 지방관)을 지낸 중신(仲臣)이요, 조부(祖父)는 판서(判書-육조의 으뜸직)를 지낸 인기(仁奇)이며 증조(曾祖)는 판서(判書)를 지낸 관(琯)이요, 외조(外祖)는 판서(判書)를 지낸 함안이씨(咸安李氏) 원(瑗)이라. 영락(永樂-명나라 3대황제 영락제의 연호) 을미(乙未-태종15년, 서기1415년)에 태어나 정사(丁巳) 칠월십삼일(七月十三日) 졸(卒-사망)하니 향년(享年-일생동안 산 해)은 팔십삼세(八十三歲)이며 묘(墓)는 진주(晉州) 동쪽으로 오리(五里-2키로) 떨어진 비봉산(飛鳳山) 아래의 저동(猪洞) 뒷골짜기 건좌손향(乾坐巽向)이요, 표음(表陰-묘 앞에 세운 비문)이 있다.
慣(관)은 宗本子(종본자)니 司果(사과)요 墓(묘)는 考司藝公墓右(고사예공묘우)라. ○配(배)는 南平文氏(남평문씨)니 父(부)는 持平承祚(지평승조)요 祖(조)는 都摠制繼宗(도총제계종)이며 曾祖(증조)는 順平君達漢(순평군달한)이요 外祖(외조)는 縣監遂安李季林(현감수안이계림)이라.
-관(慣)은 종본(宗本)의 아들이니 사과(司果-정6품 무관직으로 오위의 200명 단위부대의 지휘관, 교위와 낭장이 사과로 변함)를 지냈으며 묘(墓)는 돌아가신 아버지인 사예공(司藝公-성균관의 사예직으로 음악을 가르치던 관직)의 묘(墓) 오른쪽에 있다. ○배위(配位-부인)는 남평문씨(南平文氏)니 부친(父親)은 지평(持平-사헌부에 속한 관직)을 지낸 승조(承祚)요 조부(祖父)는 도총제(都摠制-고려와 조선초의 중앙군인 삼군의 각 수장)를 지낸 계종(繼宗)이며 증조(曾祖)는 순평군(順平君)인 달한(達漢)이요, 외조(外祖)는 현감(縣監-지방 현의 수령)을 지낸 수안이씨(遂安李氏) 계림(季林)이라.
愼(신)은 宗本子(종본자)니 司正(사정)이요 天順戊寅卒(천순무인졸)하다. 墓(묘)는 晉州伯叟李氏墓右邊下十步許乾坐(진주백수이씨묘우변하십보허건좌)니 雙墳(쌍분)이요 有表石(유표석)하다. ○配(배)는 晉州姜氏(진주강씨)니 父(부)는 孝孫(효손)이요 祖(조)는 府院君孟卿(부원군맹경)이라. 成化己亥卒(성화기해졸)하니 墓祔左(묘부좌)라.
-신(愼)은 종본(宗本)의 아들이니 사정(司正-조선시대 오위에 속한 정칠품 벼슬로 부사과의 아래)이요 천순(天順-명나라 6대황제 영종의 연호) 무인(戊寅-서기 1458년)에 졸(卒-생을 마침)하다. 묘(墓)는 진주(晉州) 백수이씨묘(伯叟李氏墓)의 오른편 아래로 십보(十步)쯤 되는 곳에 건좌손향(乾坐巽向)의 쌍분(雙墳-둘로 쓴 봉분)이요 표석(表石-무덤 앞의 비석)이 있다. ○배위(配位-부인)는 진주강씨(晉州姜氏)니 부친(父親)은 효손(孝孫)이요 조부(祖父)는 부원군(府院君) 맹경(孟卿)이라. 성화(成化-명나라 8대황제 헌종의 연호) 기해(己亥-서기 1479년)에 졸(卒-생을 마침)하니 묘부좌(墓祔左-묘는 남편의 왼쪽에 합장)라.
●後孫監務公諱克儒爲一派(후손감무공휘극유위일파)라.
-후손(後孫) 감무공(監務公-감무는 고려시대 지방 군현에 판견된 지방관) 휘(諱-죽은 어른의 이름을 말할 때 휘라 함) 극유(克儒)가 한 파(派-갈래)가 된다. -감무공파(監務公派)
一世(일세)
克儒(극유)는 仕高麗縣監(사고려현감)이니 高麗士行傳(고려사행전)에 云(운)호대 公於宗殷(공어종은)에 爲二十一世孫(위이십일세손)이라. 按忠州譜(안충주보)에 云(운)호대 舊牒(구첩)에 以宜卿(이의경)으로 爲宗殷遠孫(위종은원손)하고 而任慶昌姓苑叢錄(이임경창성원총록)에는 以宜卿(이의경)으로 爲宗殷孫(위종은손)이라. 又云(우운)호대 舊牒(구첩)에는 以克儒(이극유)로 爲宜卿二十一世孫(위의경이십일세손)하고 而姓苑叢錄(이성원총록)에는 以克儒(이극유)로 爲宗殷二十一世孫故(위종은이십일세손고)로 兩書之(양서지)어늘 今亦依此追錄(금역의차추록)이라.
-극유(克儒)는 고려(高麗)에 벼슬한 현감(縣監)이니 고려사행전(高麗士行傳)에 이르되 공(公)은 종은(宗殷)에 이십일세손(二十一世孫)이 된다고 하였다. 충주보(忠州譜)를 살핌에 이르되 구첩(舊牒)에 의경(宜卿)으로 종은(宗殷)의 먼 후손(後孫)이라 하였고 임경창(任慶昌)의 성원총록(姓苑叢錄)에는 의경(宜卿)으로 종은(宗殷)의 후손(後孫)이라 하였다. 또 이르되 구첩(舊牒)에는 극유(克儒)로 의경(宜卿)의 이십일세손(二十一世孫)이라 하였고 성원총록(姓苑叢錄)에는 극유(克儒)로 종은(宗殷)의 이십일세손(二十一世孫)이라 하였던 고(故)로 양서(兩書)가 기록하였으니 지금 역시 이에 의해서 추록(追錄-추가하여 써넣음)한다.
二世(이세)
昌祐(창우)는 進士(진사)요 贈朝議大夫判禮賓寺事(증조의대부판예빈시사)니 墓在迎일(묘재迎日)이라.
-창우(昌祐)는 진사(進士)요, 품계(品階-벼슬아치의 직품과 관계)는 조의대부(朝議大夫-정5품 하계)로 예빈시(禮賓寺-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의 관장부서)의 판사(判事-정3품 판사직)에 추증(追贈-죽은 뒤에 관직을 올려 받는 것)되니 묘(墓)는 영일(迎日)에 있다.
三世(삼세)
均之(균지)는 仕高麗(사고려)하야 檢校軍器監(검교군기감)이요 贈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증금자광록대부문하시랑평장사)라.
-균지(均之)는 고려(高麗)에 벼슬하여 군기감(軍器監-병기 만드는 관청)에 검교직(檢校職-실직이 아닌 명예직)을 지냈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종1품 상계의 품계)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고려 최고 정무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정2품 관직)에 추증(追贈)되었다.
四世(사세)
潤(윤)은 奉善大夫讞部議郞(봉선대부언부의랑)과 知製敎(지제교)라. ○配(배)는 宜寧南氏(의령남씨)니 父(부)는 及第之卓(급제지탁)이오 祖(조)는 檢校禮賓卿叔孫(검교예빈경숙손)이며 曾祖(증조)는 衛尉注簿同正謙(위위주부동정겸)이요 外祖(외조)는 衛尉注簿同正禮州朴文奎(위위주부동정예주박문규)라. 生六子一女(생육자일녀)하다.
-윤(潤)은 봉선대부(奉善大夫-고려 때 종4품의 문관 품계)로 언부(讞部-형조를 고친 이름이며 전법사라 불리기도 함, 판사, 전서, 지사, 의랑, 직랑, 산랑의 관원이 있음)의 의랑(議郞)과 지제교(知製敎-임금의 교서 따위의 글을 짓는 일을 벼슬)를 역임했다. ○부인은 의령남씨(宜寧南氏)니 아버지는 급제(及第-과거에 합격)한 지탁(之卓)이요, 할아버지는 검교(檢校-고려와 조선에 벼슬자리의 정원 밖에 실제 사무를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는 명예직) 예빈경(禮賓卿-고려 외국의 빈객을 접대하는 관청의 종3품의 품계)이었던 숙손(叔孫)이며, 증조부는 위위시(衛尉寺-고려 의장식에 쓰이는 물건이나 기구를 맡아 보던 관청)의 주부동정(注簿同正-고려 여러 관청에 딸린 하급문관이 주부이며 종7품, 실무를 보지 않는 명목만 있는 명예직이 동정)인 겸(謙)이요, 외할아버지는 위위시(衛尉寺) 주부동정(注簿同正)였던 예주(禮州-경상북도 영덕지역의 옛지명) 박씨(朴氏) 문규(文奎)라. 육남일녀를 낳았다.
①자(字)- 옛날에는 학식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본명을 부르는 것을 꺼리는 풍속이었기 때문에 자와 호를 짓는 경우가 많았다.
자는 성인이 되면 웃사람이 지어주었으며 동년배 이하인 경우에 자를 사용하였으며 부모나 스승이 부를 때는 본명을 불렀다.
②호(號)- 자(字)와 마찬가지로 본명을 부르는 것을 꺼리는 풍속에서 지어 사용하였으며 주변이나 본인이 지었다. 호는 본인의 취향이나 사는 곳, 또는 학문을 배운 곳을 연관하여 지었으며 호를 얻게 되면 대개 자나 본명은 부르지 않았다. 자와 호는 동년배 이하의 사람들에게 사용되었으며 부모나 스승이나 임금은 본명을 불렀다.
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