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巳譜序(을사보서)
-을사년(乙巳年)에 간행(刊行)한 보첩(譜牒)의 서문(序文-논문이나 책따위의 내용의 대강을 권두에 적는 글)
譜之爲書(보지위서)는 五常(오상)이 具焉(구언)하니 追本源而收宗族(추본원이수종족)은 仁也(인야)요 明昭穆而辨嫡孽(명소목이변적얼)은 義也(의야)요 標墳墓而識生卒(표분묘이지생졸)하고 序爵秩而別子女(서작질이별자녀)는 禮也(예야)요 或有疑誤則攷證之(혹유의오즉고증지)하고 攷證而不得則闕疑(고증이불득칙궐의)는 智也(지야)요 記先德而守之不失(기선덕이수지불실)은 信也(신야)라.
-족보(族譜)의 서책(書冊)에는 오상(五常-인의예지신)이 구비(俱備-골고루 갖춤)했으니 먼 선조(先祖)를 추모(追慕)하고 여러 종족(宗族)을 수습(收拾)하는 것은 인(仁)이요, ①소목(昭穆)을 밝히며 적서(嫡庶-적자(정실의 아들)와 서자(첩의 아들))를 분변(分辨-분별)하는 것은 의(義)요, 분묘(墳墓-무덤)를 표시(標示)하고 생졸년월일(生卒年月日)을 기록(記錄)하며 관직(官職)을 서술(敍述)하고 자녀(子女)를 구별(區別)하는 것은 예(禮)요, 의혹(疑惑)이 있으면 고증(考證)하고 고증(考證)하여도 알 길이 없으면 그대로 비워두는 것은 지(智)요, 선세(先世)의 덕행(德行)을 기록(記錄)하여 유실(遺失-잃어버림)되지 않도록 간직하는 것은 신(信)이다.
是以(시이)로 先王(선왕)이 謹之(근지)하사 以爲維持天下之一法(이위유지천하지일법)하고 至有周禮(지유주례)에 立別姓定系之官(입별성정계지관)한대 於是(어시)에 孝悌興而忠義立(효제흥이충의립)하고 風俗美而天下治(풍속미이천하치)하니 其爲法(기위법)이 顧不重且大歟(고불중차대여)아.
-그러므로 옛날 성군(聖君)은 이를 삼가하여 천하(天下)를 유지(維持)해 가는 한 양책(良策-좋은 계책)을 삼았으며 ②주례(周禮-주나라의 예법)에 성씨(姓氏)를 분별(分別)하고 계통(系統)을 밝히는 관원(官員-관리)을 세움에 이에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도타워지고 충의(忠義)와 기절(氣節-절의)을 숭상(崇尙)하여 풍속(風俗)이 아름답고 나라가 다스려졌으니, 이 법칙(法則)이 어찌 중대(重大)하지 않겠는가?
惟我鄭氏之源(유아정씨지원)이 久矣(구의)니 珍支部大人諱智伯虎(진지부대인휘지백호)는 肇基於羅初(조기어라초)하고 至麗朝(지려조)하야 有諱子輿(유휘자여)는 受封長鬐伯(수봉장기백)하야 其貫籍(기관적)이 始此(시차)라.
-오직 우리 정씨(鄭氏)의 본원(本源)은 오랜 옛날에 비로섰으니 진지부대인(珍支部大人-신라육촌의 진지부 촌장) 지백호(智伯虎)께서 신라(新羅)의 창업초두(創業初頭)에 처음 기초(基礎-터의 초석)를 세웠고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문경공(文敬公)께서는 장기백(長鬐伯)의 봉작(封爵-식읍의 봉토)을 받아 관적(貫籍-본관)이 이에서 시작(始作)되었다.
嗚呼(오호)라 羅麗二代千五百年(라여이대천오백년)에 襲簪組(습잠조)하야 德業功名(덕업공명)이 彪炳于世(표병우세)하고 及麗亡(급려망)에 雲隱公父子(운은공부자)는 俱守伯夷之節(구수백리지절)하고 雲隱公之弟蓬山君(운은공지제봉산군)은 行太公之事(행태공지사)하다.
-아!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의 양조(兩朝-두나라) 천오백년(千五百年)에 걸쳐 대대(代代)로 관작(官爵)을 이어받아 덕업(德業)과 훈공(勳功)이 온 세상(世上)을 들울렸으며 고려(高麗)의 멸망(滅亡)함에 미쳐 운은공(雲隱公) 부자(父子)분께서는 백이(伯夷-은나라말 현인)의 지조(志操)를 지켜 산림(山林)에 은퇴(隱退)하였고 운은공(雲隱公)의 아우 봉산군(蓬山君)께서는 태공(太公-주나라 개국공신 강태공)의 권도(權度-저울과 자, 좇아야 할 법도와 규범)를 본받아 큰 훈공(勳功-공훈)을 이룩하였다.
歷數世而金堤公(역수세이김제공)이 始卜居於公州治之南四十里大鳥山下(시점거어공주치지남사십리대조산하)하야 山開山麗(산개산려)에 不下於王摩詰之輞川(불하어왕마힐지망천)과 李德裕之平泉(이덕유지평천)이라 世人(세인)이 稱之曰鄭川(칭지왈정천)이라 하니 其垂裕後昆(기수유후곤)이 豈不偉哉(기불위재)아
-그 후(後) 수대(數代)를 내려와 김제공(金堤公)께서 비로서 공주(公州)의 남쪽 사십리허(四十里許-사십리쯤)에 있는 대조산(大鳥山) 아래에 터전을 잡았는데 산(山)은 높고 묽은 맑아 ③왕마힐(王摩詰)의 망천(輞川)과 ④이덕유(李德裕)의 평천(平泉)에 못지 않아 세상(世上) 사람들이 정천(鄭川-지금의 경천)이라 일컬었으니, 그 자손만대(子孫萬代)에 혜택(惠澤)을 입힘이 어찌 거룩하지 않겠는가?
自後(자후)로 又以德義相傳(우이덕의상전)하야 如司成公之文學(여사성공지문학)과 四槐公之孝養(사괴공지효양)과 公之弟承旨公之忠義(공지제승지공지충의)와 別提公之文章(별제공지문장)과 司藝公之德行(사예공지덕행)과 訥齋公之嚴毅方正(눌재공지엄의방정)과 宋氏朴氏兩祖妣之孝烈文章(송씨박씨양조비지효열문장)은 皆可以爲世模範(개가이위세모범)하니 此於崔舍人弘濟(차어최사인홍제)와 栗谷陶庵李先生所撰及藍遊擊種德碑與重峰先生抗義編(율곡도암이선생소찬급람유격종덕비여중봉선생항의편)과 李西溪筆帖(이서계필첩)을 可考而知也(가고이지야)라
-그 후(後)에 또 도학(道學)과 절의(節義-절개와 의리)로써 계승(繼承)했으니 사성공(司成公)의 문학(文學)과 사괴공(四槐公)의 효양(孝養-효행으로 봉양)과 승지공(承旨公)의 충의(忠義)와 별제공(別提公)의 문장(文章)과 사예공(司藝公)의 덕행(德行)과 눌재공(訥齋公)의 엄정(嚴正)함과 송씨(宋氏) 박씨(朴氏) 양조비(兩祖妣-두할머니)의 효열(孝烈-효행과 열행)과 문장(文章)은 모두 세상(世上)의 모범(模範)이 되었다. 이는 사인(舍人-조선 의정부 소속 관리) 최홍제(崔弘濟), 율곡(栗谷) 이이(李珥),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지은 묘표문(墓表文)과 유격장(遊擊將-유격장군) 람방위(藍芳威-명나라장수)의 종덕비문(種德碑文)과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항의신편(抗義新編) 및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의 필첩(筆帖-필적을 모아 엮은 책)을 참고(參考)하면 소상(昭詳-자세히)히 알 수 있다.
至若華山公則以性潭宋文敬之高弟(지약화산공칙이성담송문경지고제)로 道學文章(도학문장)이 蔚然乎爲世大儒(울연호위세대유)하야 其嘉言善行(기가언선행)이 具載於剛齋宋先生所作墓表(구재어강재송선생소작묘표)하니 猗歟盛哉(의여성재)라. 我鄭氏世德之美也(아정씨세덕지미야)여.
-그리고 화산공(華山公)에 이르러서는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의 문인(門人)으로서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울연(蔚然-나무가 우거질 정도로 성하게)히 한 세대(世代)의 홍장거유(鴻匠巨儒-대선비)가 되어 그 아름다운 언행(言行)은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의 지은 바 묘표(墓表)에 소상(昭詳)히 실렸으니, 아! 우리 정씨(鄭氏)의 세덕(世德-대대로 쌓은 아름다운 덕)은 참으로 거룩하였다.
秀鎔(수용)이 雖不肖(수불초)나 亦有彜性(역유이성)하야 粗知夫尊祖敬宗(조지부존조경종)과 報本睦族之道(보본목족지도)라 所以首倡重修譜牒之論(소이수창중수보첩지론)한대 而一門(이일문)이 同聲相應(동성상응)하니 此亦非祖先之遺風餘韻(차역비조선지유풍여운)이 猶有存焉者耶(유유존언자야)아.
-수용(秀鎔)이 비록 불초(不肖)하나 또한 하늘에서 태어난 이성(理性)이 있어 선조(先祖)를 숭배(崇拜)하고 종족(宗族)과 돈목(敦睦)하는 도리(道理)를 조금이나마 짐작하여 보첩(譜牒)의 중간(重刊-거듭 간행)하는 일을 앞장서 발론(發論-의논을 꺼냄)함에 온 문중(門中)의 종인(宗人)들이 만장일치(滿場一致)로 호응(呼應)했으니, 이 또한 조종(祖宗-선조와 종중)의 끼쳐진 풍채(風采-의젓한 모양)와 운치(韻致-고아한 멋)가 오히려 남아있음이 아니겠는가?
凡我宗族(범아종족)은 可不交相勖勵(가불교상욱려)하고 種學積德(종학적덕)하며 課忠責孝(과충책효)하야 庶幾有以繼述其萬一而無忝所生矣乎(서기유이계술기만일이무첨소생의호)아
-무릇 우리 종족(宗族)들은 서로 근면(勤勉)하여 학문(學問)에 힘쓰고 덕의(德義)를 닦으며 충효사상(忠孝思想)을 고취(鼓吹-북치고 피리 붊. 기운을 북돋움)함으로써 전래(傳來-전해져 온)의 유업(遺業)을 이어받아 부모(父母)님에게 욕됨이 없기를 바라는 바이다.
吳草廬甞言(오초려상언)호대 爲人子孫者(위인자손자)는 思自立而已矣(사자립이이의)라 하니 族姓之或微或著(족성지혹미혹저)를 何算焉(하산언)이리요 苟能自立歟(구능자립여)아 雖微而浸著(수미이침저)요 不能自立歟(불능자립여)아 雖著浸微(수저침미)하리니 盛衰興替(성쇠흥체) 何常之有(하상지유)리요 惟自立爲貴(유자립위귀)니 此(차)는 天下之至言也(천하지지언야)라.
-⑤오초려(吳草廬)가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의 자손(子孫)된 자는 오직 자립(自立)하는데 힘쓰기를 생각할 뿐이니 문벌(門閥-대대로 내려오는 한 집안의 신분이나 지위)의 한미(寒微-지체가 가난하고 변변치 못함)하고 혹은 번성(繁盛)함을 어찌 계교(計巧-꾀하여 계산함)할 필요가 있겠는가? 진실로 자립(自立)할 수 있다면 비록 한미(寒微)하더라도 점차 번성(繁盛)할 것이요 만일 자립(自立)을 하지 못한다면 비록 번성(繁盛)하더라도 점차 쇠퇴(衰頹)할 것인즉 성쇠(盛衰)와 흥망(興亡)이 어찌 전정(前定-전생에 정해짐)된 명수(命數-운명과 재수)가 있겠는가? 오직 자립(自立)함이 귀중(貴重)하다.]고 했으니, 참으로 천하(天下)의 지당(至當)한 말이다.
今我鄭(금아정)은 不可謂不著(불가위불저)나 然(연)이나 能自立則著益著矣(능자립즉저익저의)요 不然(불연)이면 反是(반시)하리니 惕之哉勉之哉(척지재면지재)어다.
-이제 우리 정씨(鄭氏)는 번성(繁盛)하지 않다고 이를 수는 없으나, 참으로 자립정신(自立精神)을 갖는다면 번성(繁盛)한 위에 더욱 번성(繁盛)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이와 상반(相反)된 결과가 나타날 것이니, 각별(各別-특별)히 조심하고 힘쓰기 바란다.
崇禎紀元後五乙巳季春上澣(숭정기원후오을사계춘상한)에
*명나라 의종연호를 기원으로 하여 다섯번째 맞는 을사년 계춘상한)에
-光武九年(광무구년-고종9년, 서기1905년) 乙巳三月上澣(을사삼월상한-을사년 3월 초순)에
後孫(후손)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秀鎔(수용)은 謹序(근서)라
-후손(後孫) ⑥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수용(秀鎔)은 근서(謹序-삼가 서문을 짓는다)한다.
註
①소목(昭穆)-옛날 사당(祠堂-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집)에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位)를 베푸는 나무 패(牌))를 모시는 예법제도(禮法制度)이니 황제(皇帝)는 일세(一世)를 중앙(中央)에 모시고 이세(二世), 사세(四世), 육세(六世)는 소(昭)라 하여 좌편(左便)에 모시며, 삼세(三世), 오세(五世), 칠세(七世)는 목(穆)이라 하여 우편(右便)에 모시어 삼소(三昭) 삼목(三穆)의 칠묘(七廟)가 되고, 제후(諸侯)는 이소(二昭) 이목(二穆)의 오묘(五廟)가 되며, 사대부(士大夫)는 일소(一昭) 일목(一穆)의 삼묘(三廟)가 됨.
②주례(周禮)-서적(書籍)의 이름. 주공(周公)이 저술(著述)한 주(周)나라의 관제(官制-국가 행정 기관 전반에 관한 법규)이니 천관(天官) 지관(地官) 춘관(春官) 하관(夏官) 추관(秋官) 동관(冬官)의 육편(六篇)으로 되어 있음.
③왕마힐(王摩詰)-이름은 유(維)요 자(字)는 마힐(摩詰)이니 당(唐)나라 때 시서화(詩書畵)의 대방가(大方家-문장 학술이 뛰어난 사람)로서 망천(輞川)의 명승지(名勝地)를 택(擇)하여 별장(別莊)을 두었음.
④이덕유(李德裕)-당무종(唐武宗) 때 명상(名相)으로서 평천(平泉)의 명승지(名勝地)에 주회사십리(周廻四十里-빙 둘레를 돌아 사십리=16키로미터)의 별장(別莊)을 두었음.
⑤오초려(吳草廬)-이름은 징(澄)이요 호(號)는 초려(草廬)이니 원(元)나라 때 대유학자(大儒學者)였음.
⑥가선대부(嘉善大夫)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선대부는 조선 종2품 문무관의 품계이다. 동지중추부사는 조선 중추부의 종2품 벼슬이다. 품계, 벼슬, 이름 순으로 열기(列記-나열하여 기록)한다
*嫡孽(적얼)-嫡庶(적서) 적자와 서자
*爵秩(작질)-관작과 녹봉을 말함
* 襲簪組(습잠조)-襲(습)은 잇는 것을 말하며 簪組(잠조)는 冠(관)에 꽂는 비녀와 묶는 인끈(사슴가죽끈)으로 고위관리를 이르는 말이며 簪紱(잠불)과 같다
*彪炳(표병)-화려한 표범무늬가 밝게 드러나 보이다란 뜻으로 세상에 들울린다는 뜻임
*高弟(고제)-高足弟子(고족제자)의 준말로 학문과 품행이 우수한 제자
*後昆(후곤)-6대손을 昆孫(곤손)이라 하며 후손을 이르는 말이다
*首倡(수창)-제일 먼저 앞장서 주창함
*族姓(족성)-문벌(門閥-가문의 신분이나 지위)을 뜻함
*浸著(침저)-점차 소저(昭著), 흥성(興盛), 번성(繁盛)해짐
*浸微(침미)-점차 쇠퇴(衰頹)해짐
*興替(흥체)-흥망(興亡)과 같고 성쇠(盛衰)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