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의 다양한 그림세계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년 6월 24일 ~ 1979년 2월 7일)
아명(兒名)은 김양은(金良殷)
일본식 이름은 쓰루야마 마사시노기(鶴山殷鎬)
아호(雅號)는 이당(以堂)
대한민국의 동양화가, 한국화가. 미술교육자
학력
경기도 인천일어학교 졸업
경기도 인천 인흥측량기술학교 졸업
조선서화미술회 강습소 화과3년 서과3년 졸업
일본 도쿄 우에노 미술학교 수학
1892년 조선 경기도 인천군 문학산 아래 향교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관립인천일어학교를 졸업한 뒤 인흥학교에서 측량을 공부했다.
서울에 올라온 후 측량기사의 조수로 일하고 고서를 베끼는 일을 하다가 이왕직에서 운영하는 미술학교인 조선서화미술회 강습소에 편입하여 화가가 되었다. 서화미술회 편입에는 사학자이며 서예가인 현채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김교성의 도움이 있었다. 조석진(趙錫晋)·안중식(安中植)을 사사하고, 뛰어난 인물 묘사 실력으로 송병준, 대한제국 순종황제 등의 얼굴을 그리면서 점차 이름을 얻게 되어 한말 최후의 어진화사(御眞畵師)를 지냈다. 1919년 서화협회 회원이 되었다. 1920년 도일하여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청강생으로 3년 동안 수학했다.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제전(帝國美術展覽會) 등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였다.
1922년에서 1930년 사이 선전에 출품하여, 5회(1·2·3·4·8회) 입선, 2회(6,7회) 특선을 기록하였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우에노[上野]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33년 ‘제미전(帝美展)’에서 1등상을 수상하고 1937년의 제16회 선전에서는 창덕궁상을 받아 다음해에는 선전 참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1937년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이 되어 같은 해 11월 일본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렸다.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2년간 체류하였다.[1]
한편, 1942년부터 2년간 화필보국(畵筆報國)·회화봉공(繪畵奉公)을 표방했던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 심사위원을 맡아 후세에 친일의 굴레를 쓰게되는 빌미가 되었다. 그밖에 조선남화연맹전(1940),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1), 조선총독부와 《아사히신문》이 후원한 일만화(日滿華)연합 남종화전람회(1943.7) 등 미술전에 참여하였다.
1920년 후반부터 화실을 개방하여 백윤문(白潤文)·김기창(金基昶)·장우성(張遇聖)·이유태(李惟台)·한유동(韓維東) 등 후진을 길러냄으로써 한국 회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미술교육자이기도 하다. 8·15해방 후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추천작가, 1955년에서 57년에는 제4,5,6회 국전 심사위원이 되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고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3·1문화상(1965)과 예술원상(1968)도 수상했다. 수도여자사범대학(세종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작품 및 화풍
한국 화가로는 드문 북종화 계통의 화가로서 채화(彩畵)를 통하여 한국의 풍속화를 새로운 경지로 끌어갔으며, 중국 명대(明代)의 구영(仇英)이나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와도 비견할 사녀도(仕女圖) 형식의 한국적 화풍을 수립한 화가로 평가된다. 그외 채색화로서 산수·인물·화조 등 다양한 작품세계를 전개시켰고 재래 도화서풍의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 작품으로 〈향로(香爐)〉 등이 있다.[1]
항일과 친일 논란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을 수감하고 순종황제의 밀사로 내탕금과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에 기여했는데 만해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한 일은 운반책을 맡은 일당 김태신의 입으로 알려졌다. 이때 일당은 조선총독부 정보담당 책임자였던 생부의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그 당시 상당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일당의 생부는 일엽스님과의 열애로 일당을 낳았으나 일본의 명문가였던 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허락 받지 못하고 평생동안 일엽을 그리며 독신으로 살았다. 일당은 나혜석이 맡아 기르다가 이당 김은호의 양자가 되어 평생 이당을 아버지로 섬기며 살았다.) 1920년대 후반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히면서 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즐겨 그린 그림은 〈승무도〉 연작으로 대표되는 미인도와 신선도, 화조도 등이다.
중일 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에 애국금차회의 활동 모습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제작하여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증정하는 등 미술계에서 태평양전쟁 기간 중 친일작품을 많이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하여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 작품을 심사하거나 전시하는데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이러한 경력 때문에 대부분의 미술인들이 망라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되었으나, 이후 다시 미술계의 중심에 복귀했다. 김은호는 일찍부터 후진 양성에 관심을 보이고 후소회를 통해 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현대 동양화단의 큰 맥을 형성하였다. 운보 김기창 월전 장우성이 대표적인 김은호의 제자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문화예술계 인사를 많이 선정하지 않은 2002년 발표 친일파 708인 명단에도 미술 분야에 심형구와 함께 포함되어 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잘 알려진 친일 작품 이력과 일본풍으로 의심받는 화풍과 관련하여, 김은호가 그린 논개와 춘향의 영정을 철거하자는 주장과 논란이 있었다.
참고문헌
↑ 가 나 다 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근대미술/한국 근대 동양화/김은호, 《글로벌 세계 대백과》
↑ 박종찬 (2004년 10월 1일). ““붓으로 화폭으로 진충보국하라”- ‘식민지 조선과 전쟁미술전’…미술계 거목들의 친일대표작 한자리에”. 한겨레. 2008년 4월 10일에 확인함.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김기창 :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이태호)〉.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3-1.
↑ 임형두 (2001년 1월 23일). “운보 김기창 화백 별세”. 조선일보 (연합뉴스 인용).
↑ 김수현 (2005년 5월 17일). “친일화가 춘향영전 파문”. 전라일보. 2007년 9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25일에 확인함.
김은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은호《브리태니커백과》
참고자료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김은호 :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 (이태호)〉.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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