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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는 천사 어렸을 때에 지은 글이라 하사 「운래중석하산원(運來重石何山遠) 장득척추고목추(粧得尺椎古木秋)」를 외워주시며 「선생문명(先生文明)이 아닐런가」라고 심고하고 받으라 하시고 (중략) 「시세(市勢)를 짐작(斟酌)컨데 대인보국정지신(大人輔國正知身) 마세진천운기신(磨洗塵天運氣新) 유한경심종성의(遺恨警深終聖意)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이라 창(唱)하시며 가라사대 이 글은 민영환의 만장(挽章)이니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으로 세상 일을 알게 되리라 하시고(이 뒤에 민영환 순절(殉節)함). (대순전경 3:10) |
* 하루는 한 성도가 여쭈기를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자결하였는데 벽혈(碧血)이 나오고 그 자리에서 청죽(靑竹)이 생겨났다 하니 이는 어떤 연고입니까?” 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의롭게 죽었으므로 내가 혈죽을 내려 그의 충의(忠義)를 표창하였느니라.” 하시니라. (道典 5:140) |
민영환은 1861년 서울시 견지동에서 태어났다. 친아버지는 민겸호였으나, 뒤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인 민태호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187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후 세도를 구가하던 민씨 척족의 총아로서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는 등 쾌속 승진을 거듭하며 요직을 거쳤다. 하지만 임오군란때 생부 민겸호가 살해되자 거상을 위해 사직하였다.
4년 후인 1886년에 이조참의로 제수되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하였고, 이후 도승지, 이조참판, 예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윤, 독판내무부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1895년 8월에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10월에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부임하지 못한 채 사직했다. 그리고 곧이어 친러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낙향해 두문불출했다.
이듬해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그는 일본, 미국, 영국등지를 거치면서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귀국후에 그는 의정부찬정(贊政), 군부 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년) 또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에 대한 특명전권공사로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뜨게된 민영환은 개화 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 열강 세력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 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고종에 상소를 올린다. 다만 이는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고종의 성향과 반대되는 것이었고 그의 상소는 군사제도 개편만이 채택되어, 고종은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였고, 보다 근대적인 개혁을 시도할려다가 수구세력인 민씨일파에게 반감과 미움을 사게되어 요직에서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참정대신(參政大臣)등을 지내고,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그리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1897년 유럽 6개국 특명전권대사,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등 역임하면서 주요 관료로 겸임한다. 또한 대한제국 반포하기 이전의 여러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제국 선포 후 태극장(太極章)을 수여받았다.
민영환은 친일적인 대신,관료들과 수차례 대립하였고, 일본제국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주요요직에서 밀려나게 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1861~1905)은 전 의정대신 조병세(1827~1905)와 함께 역적을 벌하고 조약을 파기할 대책을 상의했다. 조병세는 고령으로 낙향했다가 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79세 노구를 이끌고 상경했다. 그들은 조병세를 소두(疏頭: 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로 백관(百官)이 연명한 상소문을 올리고 외무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오적(五賊)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했다. 일본 헌병은 황제의 윤허도 얻지 않고 조병세를 체포하고 상소를 올린 백관들을 강제 해산했다.
민영환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소두가 되어 백관들을 거느리고 거듭 상소를 올리며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민영환 등은 '충성스러운 마음을 알았으니 그만 물러나라'는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궁중에서 농성하다가 평리원(平理院: 재판소)에 구속되었다가 하루 만에 석방되었다. 민영환은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기울어가는 국운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칼로 자신의 몸을 수차례 찔러 자결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11월 30일 자결하였다. 유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민영환이 단도로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은 11월 30일 아침 6시쯤이었다. 하지만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목을 찔러 자결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다음 날 시신에 수의를 갈아입히려고 할 때 옷소매에서 서구식 명함 앞뒷면에 한자로 깨알같이 적어놓은 유서 몇 장이 발견되었다.
〈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我人民將且殄滅於生存競争之中矣。夫要生者必死,期死者得生,諸公豈不諒只。泳煥徒以一死仰報皇恩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泳煥死而不死期助諸君於九泉之下,幸我同胞兄弟千萬億加奮勵,堅乃志氣勉其學問,決心戮力復我自由獨立即死子當喜笑於冥冥之中矣。鳴呼,勿少失望。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함〉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진멸당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배 더욱 기운내어 힘씀으로써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 민영환, 경고 이천만 동포 유서
민영환이 자결한 지 8개월이 지난 1906년 7월 그가 자결하면서 피를 흘린 집안 나무 바닥에서 대나무가 자란다는 사실이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 보도되었다. 대나무는 민영환의 피에서 자라났다고 '혈죽(血竹)'으로 명명되었고, 민영환의 자택에는 혈죽을 구경하고 그의 넋을 기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민영환은 대한제국의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되었고, '혈죽'은 민족 부활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충정공(忠正公) 곧은 절개 포은(圃隱) 선생 우희로다/ 석교(石橋)에 솟은 대도 선죽(善竹)이라 유전커든/ 하물며 방 중에 난 대야 일러 무삼하리오" ('혈죽가', 대한매일신보, 1906.7.21.)
민영환의 부인 박수영이 보관하고 있던 혈죽은 광복 이후 그의 유품과 함께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되어 지금도 전시되고 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중식(安中植·1861∼1919)이 1906년 민영환의 집에서 혈죽을 직접 보고 그린 ‘민충정공 혈죽도’의 사본도 전시된다. 원작은 행방불명됐다.
조선 견문록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상투튼 사람들과의 15년)
옥성득, <한반도 대부흥> (홍성사, 2009), 72-73.
1905년 대한제국이 외교자결권을 상실한 을사조약이 맺어지자민영환(閔泳煥, 1861~1905년 11월 30일)은 자결했다. 언더우드 부인(Mrs. Lillias H. Underwood)은 사익을 바라지 않고 오직 나라와 공의를 위해 살다가 자결한 의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애국 자결에 죄라는 말은 당시에 도무지 없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기회주의적이고 돈을 사랑하고 양심이 없는 관리층 가운데, 그는 놀라울 정도로 正道를 고수했다. 백성에게 봉사하고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 그의 첫 번째 목적이었고,그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나라나 교회를 위한 순국이나 순교는 모두 큰 사랑의 행동이다. 작은 사랑을 실천해 온 자만이 최후에 큰 사랑을 할 수 있다. 일관성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그 큰 사랑은 작은 사랑을 축적해 온 자만 할 수 있는 의무요 특권이다.
을사늑약 체결되자 자결로 항거한 순국열사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21) 민영환(閔泳煥)
1873년(고종 10),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조선은 개방정책을 폈다. 그중 하나가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 창설이었다. 재정난으로 기존의 군인들에 대한 군료(軍料)가 제대로 지불되지 못하자 1882년, 일본인 교관과 일본인 13명이 살해되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했다. 고종은 청국에 군란 제압을 요청했다. 청이 4500명의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군함을 이끌고 와서 군란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청이 군란을 수습한 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자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신진 혁신 세력이 반대에 나섰다. 메이지 신(新)일본의 성공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청의 조선 속방화 정책에 저항하면서 친청 민씨 척족 세력과 각을 세워 대립하였다. 정한론(征韓論)의 분위기가 팽배해진 일본은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일본 공사를 통해 이들을 부추겼다.
김옥균 등은 1884년 10월 우정국(郵政局) 개설 축하연을 이용하여 거사를 감행했다. 때마침 조선에 주둔한 청군은 베트남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3000여 명이 철수한 상태였다. 이들은 일본군 200명과 조선 군인 50여 명을 동원하여 고종과 민비를 볼모로 잡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것이다.
정변이 일어나자 민비와 외척 정권은 다시 청에 원병을 요청했다.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 명의 청군이 정변 세력을 공격하자 일본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은 공사관 화재와 거류민 희생에 대한 책임을 조선에 전가하였다. 결국 조선은 일본에 배상금과 일본 공사관 수축비를 부담하는 굴욕적인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고 마무리하였다. 일본은 청국과도 천진(天津)조약을 체결해 조선에 대한 파병(派兵)권을 얻게 되었다.
청의 간섭 견제하기 위한 親露拒淸策과 한러 밀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치르며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이 도를 넘었다. 청을 견제하기 위해 고종이 러시아에 접근한 이면에는 ‘외교 참모’ 민비가 있었다. 러시아도 독일과 영국이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조선과의 국교 수립을 서둘러 1884년 7월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군란과 정변의 내우외환 와중에 생부 민겸호(閔謙鎬)가 살해되어 거상하고 있던 민영환은 1884년(고종 21) 9월 이조참의에 임명되어 정치에 복귀했다. 이때 민씨 척족의 실세인 민영익(閔泳翊)이 갑신정변에서 칼에 맞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민영환이 민씨 척족 세력의 중심인물로 주목받게 된다.
1885년(고종 22) 2월, 예조참판 서상우(徐相雨)는 일본에 있던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Davidov)와 접촉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보호와 군사교관의 파견 등을 협의했다. ‘제1차 한러 밀약’ 사건이다. 이 밀약이 청과 일본에 알려지면서 청의 이홍장(李鴻章)은 흥선대원군을 귀국시켜 조선의 친러정책을 견제하려 했다. 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하고 큰아들 이재면을 임금으로 만들려는 계획도 꾸몄으나 실패했다.
제1차 러시아 접촉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종과 민비는 민영환을 내세웠다. 1886년 3월 민영환은 김가진(金嘉鎭) 등과 함께 러시아 측에 접근했다.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를 통해 유사시 청국 견제를 위해 러시아가 군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제2차 한러 밀약’ 사건이다. 이 시도도 민영익이 청국 주차관 원세개(袁世凱)에게 밀고함으로써 실패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리자 다시 1887년 출국하여 홍콩과 상해 등지를 전전하게 되고, 원세개는 청 정부에 고종 폐위와 대원군 섭정을 건의했다. 당황한 고종은 러시아 접촉을 부인하고 김가진 등을 문서날조 혐의로 유배시켜 사건을 무마시켰다. 김가진은 유배됐지만 민영환은 왕실의 보호로 이듬해에 예조판서가 된다.
일본 견제를 위한 引俄拒日策과 을미사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은 다시 청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일본도 10년 전 체결한 ‘천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출병했다. 출병에 앞서 정한을 위해 지난 10년을 준비해 온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일본은 전리품으로 요동반도(遼東半島)도 점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만주에 이해가 큰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연합해 1895년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개입했다. 일본은 수중에 넣었던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고 말았다. 러시아의 힘을 목격한 민비는 민영환 등을 앞세워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으로 러시아를 일본의 경쟁상대로 등장시킨 것이다.
러시아의 힘을 두려워한 일본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민비를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이 만행이 1895년 8월 자행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일본은 국모를 시해한 후 그 만행을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투쟁에서 빚어진 사고로 위장시켰다. 고종은 할 수 없이 “왕후 민씨는 짐의 명령을 위조해 사변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홀로 몸을 피해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곧이어 친러파가 축출되고, 김홍집(金弘集)을 주축으로 하는 친일 내각을 구성해 개혁을 단행했다. 개혁 중에는 단발령(斷髮令)도 포함돼 있었다. 고종은 1895년 11월, 단발령을 명하면서 동시에 왕세자와 함께 상투를 잘랐다.
(중략)
러일의 충돌과 미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종말
1905년 10월, 일본 정부 수뇌는 추밀원의장(樞密院議長)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했다. 11월 9일 ‘한일협약안’을 들고 서울에 온 이토는 다음날 궁궐 내외를 포위하고 고종을 협박했다. 고종이 조약 승인을 거부하자 일본은 조정 대신들을 위협하면서 매수공작에 나섰다.
이토는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고종은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했다. 이토는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궐내로 들어가 대신들에게 가부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은 불가(不可)를,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은 찬성했다. 이 다섯 명이 ‘을사오적’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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