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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계간 파란 신인상 당선작
시 부문 김민지 top note 외 9편
평론 부문 당선작 없음
시 부문 당선자
김민지 1989년에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something.text@gmail.com
당선작
top note
집집이 놓인 과도를 하나씩 훔쳐 와
긴 칼날은 필요 없어
손잡이와 같은 길이면 적당할 것 같아
볕이 잘 들지 않는 바닥에
유자, 라임, 레몬,
오렌지, 자몽, 귤들을 쏟고서 주저앉아
가장 보기 좋은 단면을 찾아 주자
열매에서 꽃 모양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주어진 방향대로 쪼개진 일상이
하얀 줄들을 벗길 때
손금 읽는 법도 가르쳐 줄게
오래 쓴 도마 같은
네 손이 피할 수 없던 악수들
썰리지 않은 환대가 파과처럼 섞여 있다
스톰 체이서
좌판 위로 가득 쌓아 올린 꽈배기와 찹쌀도너츠
바람은 그 모든 모양새를 망치고
햇살은 무색해지지 않으려 설탕을 녹이고
나는 그런 모양으로 있는 것들이 좋다
졸음을 가누지 못하는 앞사람의 긴 머리카락을 보다가
버스 유리창 실금으로 파고드는 햇빛을 보다가
무지개를 보는 일
빗금의 속도로 무지개가 새겨진다면
제 방향으로 틀어지다가
아무것도 없는 이 세계에 도착해
아무 일이나 만드는 사람들을 좋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각도로 떨어지는 손금들
자주 주먹을 쥐었다 펴면
선명한 무지개를 볼 수 있을까
지독한 바람에겐 이름이 붙듯이
지나가는 나를 불러 세우고 싶을 때
사람들이 쉴 새 없이 걸어오는 길에서
동물과 가축, 짐승의 시선을 기다린다
그 어떤 눈도 해를 똑바로 볼 수 없으니
감은 눈 속에 금붕어를 가득 채운다
볕이 좋은 날에는
그림자도 방향을 굳힌 채
몇 뼘은 더 가서 기다린다
대기실
들러리라는 말
나는 왜 그 말이 외국에서 왔다고 생각했을까
멀리서 온 줄 알았는데
여기에 줄곧 있었던 것들
그런 것들은 세월과 실수에 의해 발견되지
주인공은 정전기를 일으킨다
마찰은 주인공의 숙명이란 지문에 따라
풍선을 머리카락에 갖다 대는 들러리
실수로 들러리가 풍선을 터뜨리면?
시선을 가져와도 입장은 드러내지 못할 거야
주인공이 손에 물을 묻히는 동안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주인공이란 생각을 하면서
모든 것에 맞출 준비를 하면 어긋났다
같은 앵글 다른 구도에서도 감정은 연결하고 가자
행복한 하루 되세요
하루는 되는 게 아니라 보내는 거지
형식적인 말들을 비틀면 뭐가 좀 나오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부스스 일어난 머리카락을 보면서
조용히 극장을 걸어 나왔다
혼자 있는 공간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공간이 될 것처럼
가만히 있는 혀의 감각을 익히며
아 소리를 낸다
떠오르는 감정에 따라 아의 높낮이가 달라진다
호흡을 다 쓰고 나면 아무 말이나 해 본다
입안을 벗어나지 않지만 움직이고 있는
혀의 심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
느끼고 말하는 것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섬포도
가까운 사람에겐 침묵으로 반항하는 편이에요
그대로 있는 것에 반응하는 움직임을 믿으니까
걔네 부모님은 아파트에 색칠하는 일을 한대요
손수 하는 건 아닌데 아무튼 그렇대요
궁금하지도 않은 걸 알려 주고
벽에 시계를 거는 건
예술과 사형의 기원이라고
포도 씨가 말했습니다
많은 것이 한꺼번에 열리면
한 알 한 알 씹지 말고 삼키라고
어디에서 다시 열리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주광색 형광등을 켜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늘진 구석이 없는 곳에서
팔의 너비로 시간을 재고 있으면
시키지 않아도 자꾸 박수가 나옵니다
와인 병을 막고 있는 코르크 마개를 뽑듯이
깊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들에 관해서
기념하는 습관을 들이고 싶어요
처음 가 본 동네 어느 길을 돌아
아파트 동과 동 사이
그 틈으로 들어온 해를 보고도
설명하지 못한 낮이 있었습니다
손바닥이 손바닥을 찾지 않고
마주 보는 외벽에서
이어지는 숫자를 발견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있는지
먼 사람에게 우연히 닿기 위해서
매일 어떤 자세로 아침을 돌려받았는지
그런 이야기를 나눌 방법이 있었다면
엄지를 갖다 댈 만큼 적당한 포도 껍질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를 땐 층을 세요
그 길로 곧장 나가면 되는 길을 걸어요
그때그때 치워야 하는 여름을 생각해요
겨울 깃
날개뼈를 갖고 싶다
그건 날개와 분명히 다른 방식
집에 가면 베갯속을 헤집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가리키며 집사람이야
소개하면 깨는 꿈이었다
아침에는 욕실 바닥에 치약을 흘리고
집에 돌아오면 굳어 있겠지 생각했다
새똥을 맞은 듯 바닥인 채로
적어도 새에게는 바닥일 수 있다는 것
행운이 올 거야
빌어먹을 새는 지금 어디쯤 날고 있는지
이 근처 나무에 앉아 우리를 몰래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마중 나와 있는 입
그렇게 단단한 입으로
허공을 가르거나 바닥을 두드리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던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전선 위에 앉아 있는 새 사진을 찍는 게 좋았다
비가 오면
무엇이든 두드리고 보는 비도
조금 더 낮은 곳으로 모였다
어디서 만날래
물어보면 집에 올 것 같아서
말없이 빗소리를 들었다
휘슬이 울리는 주전자처럼
어떤 온도에 반응하고 싶은데
침을 한 번 삼키는 것으로 이명을 멈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다려서 깬 꿈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회문(回文)공작소
엄마는 핑킹가위를 사 주지 않았다 옆 짝꿍이 가위질 한 번에 여러 계단을 쌓아 올리는 동안
나는 계단을 헛딛는 상상을 하면서 가위질을 배웠다 지그재그 들쑥날쑥 기러기와 토마토 같은 단어를 생각하면서
마음 한쪽에 빛이 들어도 다른 한쪽에 그늘이 진다는 사람 앞에서 양면 색종이 한 장을 집어 들고 무엇이든 접어 보이는 연습
검정을 뒤집으면 주황색 같은 살갗과 빨간 피부터 보이는 뒷면도 있었지만 나는 딱지 같은 검정을 매만지면서
전면이라는 말을 배웠다 그때부터 모든 전면전에는 기억할 만한 어둠이 있음을, 꿈자리에 풀을 바르고 일어서면 따라붙는 간밤의 기억들
엄마는 핑킹가위를 사 주지 않았다 쓰다 남은 풀들만 늘어났고 어느 순간부터 야맹증을 앓았다 전면 승부는 밤에 시작되는데
낮에 만난 친구들은 계단 옆에 난간이라도 세워 보라 했다 그런 난관쯤이야 나는 기어서라도 오를 거야 생각했으니까
나는 무언가 세워 올리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계단은 오르는 것 계단은 오르는 것
어느 날 다시 가위를 들고 잠에 들었을 때 문을 열고 지하실 계단에서 구르는 꿈을 꾼다
온몸을 계단이 두드린 순간, 엄마는 키가 클 거라 했다
나의 단축어 생성
도둑의 까치발, 무용수의 를르베, 말없이, 말이 필요 없이, 조사 없이, 띄어쓰기 없이, 붙였다가 도로 떼는 연습, 이도 저도 안 된다면 그냥 평범한 걸음으로, 걸음의 수를 세면서 대화를 나눠 보세요.
채소와 과일, 고기, 같은 가격이면 고기를 사지, 그런 선택, 어쩔 수 없음, 열량 계산, 열량의 단위로서, 순수한 욕심의 온도를 끌어올릴 수 있습니까.
한도와 약정 중 하나를 반드시 늘려야 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선택의 이유를 서술하시오. (5점)
별점, 다섯 개 만점에 몇 개, 주인공이 죽지 않는 전쟁 영화,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검색어가 예상 검색어로 추천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예상 검색어는 내 검색어에 대한 다른 사용자나 전범자의 진술이 아닙니다.
동물, 식물, 자연스럽게, 그런 표현도 참 인간적으로, 필요 이상으로 많이, 세상과 타향, 감옥에도, 살이, 두 글자를 붙이면서, 백업하시겠습니까.
알림 센터. 계절이란 여벌의 옷이 있습니다.
사복 허용, 음주는 제발 사복을 입고, 귀하의 이름을 제외하고, 다른 말이 적힌 합격 통지서를 받은 친구는 없습니다. 입학을 축하합니다.
인생에도, 무상, 두 글자를 붙이면서, 손을 들겠습니까.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바람 소리가 친구들 귀에 들리지 않게,
구석을 내밀면
잔술집을 아십니까
낱잔을 믿으시나요
떼인 돈
사람 찾기
어떠한 규칙도 배열도 없이
자꾸만 포개지는 기분들
고통은 기분이 아닙니다
이 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각을 묻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을 묻는 겁니다
무더기라는 단어를 적어 두신 것 같은데
간밤에
흩어지던 꿈속에는 어떤 밤의 밑면이
별로입니다 나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은 구석의 감각을 모르거든요
항상 그게 전부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까
이번에도
어쩌지 하는 기분
구석은 밤과 다른데
밤의 흉내를 낼 뿐이지만
그렇게 큰 손으로는 닿을 수 없는데
그래서 그 사람도 나를 별로
좋아할 수 없습니다
축하할 수 없습니다
대폿집이 줄지어 선 골목
세탁소 한 곳을 지나치면서
빠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의 걱정은 이토록 사소하고 꾸준합니다
같은 냄새를 너무 오래 맡으면
저렇게 오래 널려 있으면
어떤 기분을 갖게 될까요
자욱한 기분을 갖고 싶습니다
빠지지 않는 고기 냄새
모두 코를 막고 제 옆을 지나가세요
먼지와 함께 엉켜 있는 머리카락 아래
백 원 미만의 동전들
밀린 청소
떨어뜨린 건 손의 잘못
굴러가는 건 모양의 잘못
다시 찾은 기분보다는 새로 생긴 기분
축복도 예언의 한 축인데
이참에 예언가가 되어 보는 건 어떤지
더 물을 게 없을 때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진분홍색
벗겨진 살색
생활감은 구석을 만들고
구석을 내밀면
고양이가 한쪽 발을 듭니다
전혀 다른 길로 걸어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에스키스
벨벳 천을 여러 방향으로 쓰다듬는다
빛이 닿는 족족 얼룩처럼 보이는 무언가
결이 있고 부드러움이 있고
잘 눕는 방향이 아니면
자꾸 헝클어지는 내가 있다
어젯밤 잠꼬대 속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
같은 자리의 살집만 꼬집는 꿈에서 깨어났을 뿐
영정 속에서
말없이 다물었던 입을 떼는 문상객
그 순간 그의 입술을 보고
그것만큼 붉은 것을 본 적 있는지 되짚어 봤을 뿐
급하게 뜬 육개장
그릇엔 숨이 죽은 파가 걸려 있었고
숟가락으로 그릇 안으로
밀어 넣으며
속으로
자꾸만 소화시키는 나를 허기라고 믿었다
불 꺼진 방에서 벨벳 천을 가만히 쓰다듬을 때
빠져 가는 멍의 가장자리를 닮아 옅게 번져 가는 달빛
고민을 벗어난 고민은
이제 어떤 것도 훔쳐보지 못한다
그나마 심포니
난 말야
연기가 뻗는 방향,
희미한 곡선 끝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한 허공까지
제자리 뛰기를 반복하며 킁킁거리기 좋아하는
진짜가 아냐
재를 뚝뚝 떨어뜨리는 향처럼
대화가 끊기는 길이를 하나하나 재지 않아
대신 그 모든 변주가 흐르는 꿈속에서
오래된 돔과 첨탑의 옆면을 날아다니며 팽이 줄을 감는
징역을 산다
몸의 얇은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으레 골목같이 좁은 오늘을 보내다가도
머리와 목, 손과 팔, 발과 다리
중요한 것들을 잇고 있다 믿어야 된대
그렇게 가늘고 유연한 게 정말 나일까
준비운동할 때 손을 올려 허리를 돌리듯
어느 방향으로든 기억을 살려 보낸다
누구도 구원하지 못할 나
그렇지만 제일 가느다란 나
아무렇지 않게 긋고 나온 밤의 밑줄을 들어 지휘봉으로 써 줘
이곳의 바람이 바닥을 간지럽히고 그림자를 웃게 만든다
당선 소감
도처에 앞이 너무 많습니다
잘 붙지 않아서, 그러나 그래서, 서로 밀며 나아갈 수 있던 극과 극이었습니다. 나의 방향도 시의 방향도 모른 채 어쨌든 영향을 주고받는 일에 집중하자 마음먹은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시작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돈 때문이라는 게 꽤 오래 자주 부끄럽고 답답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지켜볼 수 없던 가족들. 그들 자신조차 꼼꼼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단절의 시간을 향해 그동안 들려주고 보여 줬던 제 말과 표정보다 어쩌면 더 깊은 곳에 손을 뻗어 전하고 싶던 마음이 내내 구석을 채우고 있었음을 뒤늦게나마 전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이러한 시국이 아니더라도 한 명씩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다섯 사람의 시간이 여전히 시만큼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도, 저의 시도 앞으로 조금 더 씩씩하게 나아가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저조차도 저를 정리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지만, 제 곁의 좋은 사람들 덕분에 살았습니다. 각자 인생에 어려운 부분과 좋아질 수도 있는 부분을 스스럼없이 나눈 소중한 이들. 친구들과 제 인생의 어른들에게는 미안함 말고 고마움을 말하는 버릇을 들이겠습니다. 들어서 나쁠 것 없는 유익한 조언을 해 주는데 입만 아프게 해서 그건 좀 미안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언제나 혼자 알아서 잘하고 있는 부분이 있고, 서로가 소중하다는 걸 느끼고 있으니까. 양심과 진심의 맥락을 같이한다면 행복할 거예요.
“요즘은 무슨 일 해?” “요즘도 시 써?” 언젠가부터 자주 듣고 있던 두 질문을 포개어 답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생기다니. 밑바탕부터 차근차근 다져서 유연하게 생각의 뿌리를 내리라고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이라 믿어요. 고맙습니다.
이곳에 그 누구의 이름도 새기지 않았지만, 쉬이 넘어가지는 않겠습니다. 직접 인사드릴게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게 좋아요. 지금까지 시도 그렇게 썼으니까. 그게 익숙해요.
수습할 수 없는 어떤 일. 기다림이 최선으로 남는 어떤 것. 여지가 없어도 직접 닿아 보고 겪어 보려는 노력이 최근 몇 년간 저를 많이 키웠습니다. 닿을 수 없거나 닿을수록 꼬이는, 복잡다단한 모든 것은 시 안에서 신중하게 생각할 겁니다. 자책으로 끝내지 않고, 반성이 도약하는 시작을 거듭하겠습니다.
흔한 이름이라 누군가 뒤에서 반갑게 부를 때도 선뜻 돌아보기 망설여질 때가 많은데 시를 쓸 때만큼은 어디든 앞이라고 여기며 용기 있게 바라보겠습니다. 제 이름을 자주 잊겠습니다. 도처에 앞이 너무 많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든 시와 함께 나아갈 수 있어서 그게 제일 좋습니다.
심사 경위
공모 마감 결과 제1회 계간 파란 신인상에 응모하신 분은 시 부문 240명, 평론 부문 6명이었다. 이 가운데 시와 평론 두 부문 모두 응모하신 분은 2명이었다. 시 부문은 응모자 수가 꽤 많은 편이었고 평론 부문 또한 결코 적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 신인상 공모가 제1회인 만큼 심사의 공정성을 기하고 향후 제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계간 파란 편집 위원들이 심사를 맡기로 결정했는데, 시 부문은 1, 2차 예심과 본심으로 나누어 심사를 진행하고 평론 부문은 예심 없이 곧바로 본심을 가지는 방식을 택했다. 심사 결과 시 부문은 김민지 씨를 당선자로 결정했고, 평론 부문은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아래는 시 부문 1, 2차 예심 결과와 각 부문별 심사 위원 명단이다.
시 부문 1차 예심 결과 42명: 강신명, 강전욱, 고민형, 고안나, 김대경, 김도, 김민지, 김백아, 김일곤, 김진영, 김하빈, 김현우, 나지환, 마윤지, 미교, 박소현, 박시현, 복경연, 서한, 손해담, 신윤하, 심필선, 염형기, 유영서, 유주연, 유현성, 윤재이, 이가원, 이다겸, 이랑, 이상돈, 이상영, 이태주, 이현승, 이현정, 이효영, 정월향, 정희영, 최별, 최보슬, 최유민, 한소리.
시 부문 2차 예심 결과 17명: 강전욱, 고민형, 김도, 김민지, 김하빈, 나지환, 마윤지, 신윤하, 심필선, 유주연, 이가원, 이상돈, 이상영, 이태주, 이현정, 최보슬, 한소리.
시 부문 심사 위원: 장석원 이찬 이현승 장철환 김건영 정우신 조대한.
평론 부문 심사 위원: 이찬 장철환 조대한.
제1회 계간 파란 신인상 공모에 응모하신 모든 분들께 머리를 숙여 감사의 뜻과 더불어 문학을 향한 그 오롯한 열정에 예를 표한다.
심사 소감
알 수 없는 것들의 알쏭달쏭하고 어지러운 언어들의 집합체가 시일지도 모른다. 시가 아니라, ‘시적인 것’이 중요하다. 나의 삶에 출현한 반짝이는 별들을 인식하고 향유한다. 행복해진다. 우리는 조금 더 넓어졌고, 조금 더 아름다워졌다. 우리를 갱신시키는 것을 만나는 열락. 시적인 것의 다양한 개성을 경험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시적인 것의 핵심은 새로움이다. 새로움의 핵심은 상상력이다. 세 가지 개념의 삼각형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움직이면서 우리는 달라진다. 변화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상상력은 무엇인가. 다시, 시적인 것은 무엇인가. 답은 없다. 문제는 주체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학(動力學)이다. ‘나’가 변화할 때, 세계도 변화한다. 세계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의 질서를 다르게 보고, 그것을 다르게 조정하고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상상력이다. 새로운 창조이다. 신인상 심사를 마치고 믿음 하나가 굳세졌다. 새로운 시의 가능성이 넘실거리고 있다.
시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나는 말한다. 상호성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의미를 생성시키는 추상 기호 체계인 언어가 저 세계의 현실태에 관여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 인간 정신의 극한점에서 태동하는 시의 가치가 교환가치로 환원될 수 없다는 완강한 사실 또한 확인하게 되었다. 응모해 주신 분들의 소중한 작품을 읽으면서 공부한 점이다. 진실한 시가 뜨겁게 진동하고 있다.
계간 파란 신인상에 작품을 보내 주신 분들께 하고 싶은 말. 고맙습니다. 그들에게 시인이라는 칭호를 건네 드리고 싶다. 그들은 시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한다. 그들은 시를 쓰면서 현상 이면에 숨은 본질을 인식한다. 타자들의 세계에 자신을 개방한다. 그들 때문에 우리 시단은 넓어지고 깊어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내가 시의 가능성을 감지한 분들, 무엇보다 쓰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던 분들. 이상돈, 이효영, 정월향 그리고 심필선. 이 고유명사 넷은 조만간 다른 지면에서 시인으로서 재회할 것이 분명하다. 신인상에 선정된 김민지 시인에게 축하를 보낸다. 청신한 시인의 탄생이다. 파란의 내일은 창창하다. (장석원)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우리와 뜻을 함께하려는 벗이자 동지일 수 있다면 이미 지척에 살고 있었을지라도, 저 구만리의 길을 건너온 사람처럼 반갑고 기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익히 보아 온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논어> 학이편(學而篇)의 저 오래된 어구가 뜻하는 것 역시, 밤새도록 시와 글과 공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벗이자 동지를 만난 데에서 오는 지극한 설렘과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그런 친구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희귀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저 어구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는 그 거리감만큼이나 아스라한 정취를 휘감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 멀고 먼 길이 안겨다 주는 어려움만큼이나 그(녀)를 만나는 설렘과 기쁨이란 자꾸자꾸 자라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저 아슴아슴한 설렘의 순간을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우리와 함께 같은 길을 걸어 보자고 내민 손들은 빠짐없이 따듯했고 시와 문학을 향한 뜨거운 숨결로 에둘러져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미래 시제에 도래할 어떤 일로 연기해야만 했다. 모두 여섯 분이 열정으로 충만한 글을 보내왔지만 우리는 저 후미진 곳에서 뿜어내는 고난의 빛살을 우리와 함께 간직할 벗을 찾지 못했다. 아니, 우리는 저 한구석의 모서리로 내몰리고 있는 문학적 글쓰기의 대지를 새로운 영기(靈氣)로 북돋우며 치켜세워 줄 빛나는 동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해야 옳겠다. 그래서 가까운 미래를 택하는 쪽으로 모두가 마음을 모았는지도 모르겠다.
강성은론의 김철환 씨나 양안다론의 이주훤 씨, 이수명론의 김효선 씨, 그리고 발랄한 문체와 폭넓은 독서 경험과 입체적인 초점과 스피디한 전개로 최근 한국시의 흐름을 재구성해 보여 준 김지헌 씨는 모두 문학평론이 어떤 언어들로 직조되어야 하며, 어떤 짜임새로 배치되고 구성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득력 있는 논지 전개와 더불어 대상 시인들의 가려진 특성을 나름의 시각으로 간파해 내는 예리한 면모들을 일부에서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분들의 글 가운데 심사 위원들 모두를 감탄하게 하거나 충실한 공감을 안겨다 주는, 그야말로 우리 모두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평론이란 고단한 지성적 작업과 글쓰기의 엄격한 수련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야말로 문학 텍스트의 살을 파고들어 가 오랫동안 그 살과 더불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었다. 대상 텍스트에 대한 정치한 분석은 물론 평론이라는 글쓰기가 존립하기 위한 기본 전제일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저 텍스트에 잠재된 가느다란 생의 기미들을 우리 시의 현재적 지형학이나 우리 문화의 미래와 함께 견주어 보면서, 그 비전을 미리 내다보려는 실존론적 예지와 존재론적 기투를 이번 응모자들과 내일의 평론가들에게 요청하고 싶다. 그리하여, 그런 벗이자 동지들이 우리 파란의 대지 위에서 “한 치를 더 자라는 꽃”처럼 아름답게 자라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그대들의 길이 멀면 멀수록 우리의 만남은 더더욱 큰 기쁨으로 되돌아올 것이 틀림없기에. (이찬)
시에 전력을 기울이는 시간이 있다. 그 전력이 내남없이 언어에 대한 진심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그것은 소중한 일임에 틀림없다. 코로나가 만들어 낸, 이 기이하게 밀봉된 세계에서 갑갑한 막을 뚫고 발화된 언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제1회 계간 파란 신인상 심사는 이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시와 평론 부문 총 246명이 투고한 작품들은 모두 그러한 분투의 결실들이기에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대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허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 너무 이르거나 늦게 도착한 발화들은 당혹스럽거나 변죽을 울리기 십상이다. 설익어 설컹대는 말과 물러서 흐늘대는 언어를 먼저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김하빈 씨의 「레스토랑」 외 9편은 예리한 통찰이 돋보이는 시편들이다. 자유로운 상상이 빛을 발할 때도 있다. 다만 시적 통찰이 유연한 발화에 안착하지 못하는 점은 아쉬웠다. 푸석한 언어들이 시적 통찰과 상상의 비상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돈 씨의 「거짓말 생태학」 외 9편은 일상과 노동의 생리가 꾸밈없이 드러나는 시편들이다. 경험과 체험의 절실함이 시적 발화의 긴장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연륜이 느껴지지만, 그 긴장감이 새로움에 대한 전망을 충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이태주 씨의 「유리나무 숲」 외 9편은 상상의 스펙트럼을 유연한 발화로 이어 간다는 점에서 눈에 띄었다. 다만 일정한 결, 그러니까 ‘너머’에 대한 상상이 일정한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퍽 아쉬웠다. 상상의 폭과 함께 밀도를 높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현정 씨의 「나의 은유」 외 9편은 차갑고 단단한 칼날 같은 시편들이다. 수술을 집도하는 ‘나’의 미세한 공정들은 그가 내면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 기울였는지를 보여 준다. 예리한 칼을 손에 쥘 때는 지금보다 약간 더 힘을 뺐으면 좋겠다.
1・2차 예심을 통과한 제씨의 작품들은 ‘아직’과 ‘이미’ 사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시의 품격이 보증되지는 않는다. 언어의 곳간에는 여러 알갱이들이 섞여 있기 마련이지 않은가. 어려운 일이지만, 함량 미달의 언어를 걸러 내기 위해선 감정과 생각을 까부를 필요가 있다. 키질이 그렇듯, 언어가 조급과 상투의 바람을 견뎌 냈을 때 비로소 시에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김민지 씨의 「top note」 외 9편은 시인의 키질이 그러함을 잘 보여 주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 속 사각지대에 웅크리고 있는 말들을 발굴해 내는 안목이 각별하고, ‘구석’이나 ‘들러리’ 같은 사물들에 활기를 불어넣는 재주 또한 빼어나다. 시의 ‘혀’가 제 마음을 온전히 핥을 때, ‘꿈의 밑면’이 만들어 낸 가위와의 전면전도 가히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당선을 축하한다. (장철환)
응모작들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무척 기쁜 마음이 들었다.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 많아서 심사를 잊고 그저 즐거워하며 읽은 작품들이 많았다. 읽으면서 과연 새로움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시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다. 심사를 하는 내가 과연 자격이 있는가에서부터 진정한 새로움은 소위 ‘문학’ 안에서 감지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낯설고 새로운 것은 문학 바깥에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 새로움이 문학적인 시선을 얼마만큼 결합해 내고 문학적인 것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했다. 더하여 신인에게 새로움만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서글픈 태도라고도 생각했다. 결국 자기 갱신과 새로움은 모든 예술가의 지상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반성을 이끌어 준 응모자분들께 감사했다. 하여 안타깝지만 좋은 시를 쓰는 응모자들 중에서 기존의 관념에 기대 시를 쓰는 경우, 철학적 사유를 육화되지 않은 상태로 활용하는 경우, 기성 시인의 구절을 그대로 차용한 경우 등은 작품 세계를 온전히 지지할 수 없었다.
들여쓰기나 행 갈이, 연 갈이, 제목의 배치 같은 기본적인 문제에서부터 걸리는 작품들도 있었다. 흰 종이 위에 인쇄된 언어들은 시인의 손을 떠나더라도 마치 한 장의 악보처럼 누구나 시인의 의도를 최소한은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시를 완성해 놓고도 종이 위에 정갈하게 부려 놓지 못함은, 독서의 부족함과 세심함의 결여로 읽힐 가능성이 높다.
당선작을 제외하고 주목했던 응모작은 최보슬과 나지환의 원고였다. 최보슬은 마음 깊이 가라앉은 저 아래의 묵직한 슬픔을 끝끝내 마음의 표면으로 끌어올려 형태를 보여 주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추상어와 불명확한 지시대명사를 너무 많이 사용하여 구체적 상황이 잘 그려지지 않는 점이 아쉬웠다. 독자가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잘 그려 낼 수 있도록 구체적 정황을 제시하면서 본인의 장점을 끌어내 본다면 훨씬 더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추상어들을 모두 다 지워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약점이나 단점 역시 개성을 가지고 있다. 단점을 그저 제거만 하는 방식이 아니라 강화하여 독자적인 작법을 찾아 나서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나지환의 시편들은 일상적 어휘나 고유명사를 사용해서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나가는 인상적인 힘이 있었다. 짧게 끊어 나가는 행 갈이를 통해서 독특한 리듬을 구사하기도 했다. 일상으로부터 출발해 환상적 정황 안에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구조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쉬웠다. 순차적인 방식이 기계적이며,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진술이 대부분 평범한 층위에서 일어나는 탓이었다. 익숙한 구조나 방식은 안정적인 대신에 파격적일 수는 없다. 모든 시가 반드시 파격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편을 읽을 때 시편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시를 직조하는 시인의 시선을 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충분히 더 깊게 세심하게 관찰하고 집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에도 너무 작은 전리품만을 품에 안고 돌아온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가 일상에서의 파열을, 부서진 정황들 안에서의 일상성을 발견하는 일에 집중해 보았다면 어땠을지 궁금하다.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 원고들을 보면서 두려우면서도 행복했다. 마지막으로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께 좋은 작품을 보여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 (김건영)
잘 다듬어진 시들이 많았다. 언어들이 능수능란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제도와 각도에 의해 시어가 배치되고 있었다. 행과 연이 운영되고 있었다. 왜곡과 어긋남을 기대했지만 한 치의 오차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언어의 이면으로 젖어 들면서 그 시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공간으로 진입하고 싶었다. 그 시가 주는 감각과 충돌하고 싶었다. 잘 다듬어진 시들에서는 진입로가 차단된 느낌을 받았다. 그런 시들부터 내려놓게 되었다. 잘 다듬어진 시가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시를 읽고 난 후에 신인의 개성마저 모두 깎여 나가 건질 것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잘 다듬어진 시들에는 무언가를 덜어 내며 축조된 시가 있었고 반면 어떤 내용을 인용하거나 대화를 삽입하면서 구축된 시가 있었다. 무언가를 줄이며 다듬은 시보다 먼저 내려놓게 된 시들은 후자의 경우이다. 각주와 이탤릭체, 행과 연의 실험적 전개, 기욤 아폴리네르의 <상형시집>을 떠올리게 하는 초현실주의적인 언어의 활용 등이 사용된 시들은 아쉽지만 내려놓게 되었다. 그 형식에 압도되어 시 자체가 주는 울림이 잘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위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유연하고 강력하게 이루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들을 걷어 내고 자기 자신의 언어와 마주할 때 아주 미미하게 빛나는 그 무엇을, 우리가 쉽게 명명할 수는 없지만 감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발견하는 것이 시의 위의(威儀)가 아닐까 싶다.
김도 씨의 「그래도 네가 있다」 외 9편은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지시하며 이 세계에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저 너머의 어떤 아름다움을 지칭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 더욱 특별했다. ‘나’의 위치를 정립하듯 보이는 다정한 대화들에서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현실에서 줄어든 자신의 몫을 허공이나 하늘을 등장시켜 채우는 모습이 지금 청년 세대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혔다. 씁쓸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후속되는 진술과 이미지들이 조금 위태롭게 느껴졌다. 결국 그 지점에서 시작된 균열은 종결 부분으로 이어져 시의 완성도를 떨어트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서술되고 있는 이미지와 이야기가 ‘나-너’의 관계에서 왜 나오게 되었는지, 저 너머의 세계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우리에게 힌트를 주면 좋을 것 같았다.
이태주 씨의 「유리나무 숲」 외 9편은 우선 재미가 있었다. 시에 다양하게 사용된 소재와 형식만큼이나 문장이 유려했다. 어떤 사건이나 경험 속에서 무심하게 발화하며 현실을 이질적으로 만드는 재주가 돋보였다. 또한 형식이 우위에 있는 시들도 시인 특유의 상상과 잘 맞물려 운용되고 있었다. 다만 그 미적 효과 안에서 시인의 장점으로 생각되는 말맛, 차분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구절들이 오히려 빛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를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시의 규모를 키우고 있었다. 시가 하나의 복합체가 되면서 언어의 함량이 떨어지고 ‘나’, ‘너’, ‘우리’라는 인칭과 관점이 다소 모호해지는 것 같았다. 특히 중간중간에 삽입된 질문들은 시를 체계적으로 끌어가지 못하고 긴장감을 떨어트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무엇을 덜어 내면(혹은 더하면) 자신의 말맛을 향상시킬 수 있을지, 자신을 다른 방향으로 객관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을 해 보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김민지 씨의 「top note」 외 9편을 읽으며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투명한 실금들과 마주한 것 같았다. 행간의 이미지가 분출하는 빛과 감각이 묘했다. 그 교차점이 새롭고 아름다웠다. 기분 좋은 현기(眩氣)가 느껴졌다. 행과 연이 나아갈수록 현실의 얇은 막(膜)이 차례대로 드러났다. 나도 모르게 그 숲의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었다. 어느 순간 시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판단은 사라지게 되었다. 언어의 순수한 공간으로 나는 던져졌다. 어떤 공포가 녹아 있는 청량, 현실의 응축과 해체의 과정에서 쏟아진 잔여물, 멀리 달아나고 싶음에도 무언가 자꾸 나를 이끄는 어떤 에너지가 김민지 씨의 언어에서 발견되었다. 나를 불러 세웠다. 우리에게 스며들어 온 이 언어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마지막으로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언어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는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만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정우신)
심사 총평
시 부문
<계간 파란>의 첫 신인을 뽑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갈고 닦은 수월한 시들이 많았다. 일정한 자기 세계를 갖춘 시들, 좋은 의미가 되었든 나쁜 의미가 되었든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에서 경험치가 느껴지고 그에 준하는 언어적 형식을 가진 시들이 많았다. 우선 더 눈길을 주었던 시들은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른 몸을 가진, 다른 문화 체험과 욕망의 언어를 가진 시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다른 언어가 있었다. 언어와 세계를 이질적 긴장감으로 결합시키는 참신한 이미지의 시나 이야기성을 자재롭게 빨아들이는 복수 화자와 다중 서사가 매혹적으로 공유되고 있었다. 내면적 공간과 실제 공간이 삼투되었고 이는 이미지가 두드러진 시나 내러티브의 시에서나 공히 나타나는 일이었다. 감정과 느낌을 더욱 세련되게 자각하는 이들의 시 세계가 자꾸만 기울여 쓰기 된 복수화된 발화나, 독서 체험을 동시적으로 현재화하는 주석 서술의 빈번한 사용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보였다. 이것이 중요하다. 다른 삶이 다른 몸을, 다른 몸이 다른 언어를 요청하는 것이다. 잘 마름질된 언어의 균열점을 집요하게 찾아 파고드는 언어들을 읽는 이 즐거운 불편이 우리가 신인에게서 기대하고, 신인상 심사에서 누리는 큰 기쁨일 것이다.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쓰는 신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일정한 시적 형식이랄까 방법들은 그 완성도나 성취도와 무관하게 이들이 ‘지금’의 시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돌려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기성이 된 시인들이 신인이었을 때 예상 가능한 어떤 시에 대해 반발하였듯 다음 세대의 시들도 그러한 저항과 함께 다양한 미적 대상을 부단히 개척해 가는 것일 터였다. 이 예비 신인들의 공통감각을 보고 있자면 이들의 작품에는 확실히 시가 현실의 반영이라거나 시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어떤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은 없었지만, 시는 시만이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 대상, 자기화된 느낌과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는 독자성에 대한 고심과 반발력이 보였다. 이런 점들을 확인하는 것은 비슷비슷한 시들을 밀치며 나아가는 고된 심사에 부여된 큰 행복이었다. 다만 이런 것이 디지털 알고리즘의 후광일지는 모르겠으나 분열된 자아나 분기된 화법이 현실의 문제에 대한 더욱 창조적인 해석으로 결과 지어지는 일은 드물었다. 공통감각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그것은 스타일로 공유된 것이기 쉽고 특정 세대의 하위문화와 연결되는 것이기 쉽다. 일련의 시들에는 도무지 지루함이라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그 이미지와 내러티브의 속주를 넘어서는 경이로움은 그만큼 드물었다. 지루할 틈이 없는 새로운 시들을 읽는 일에도 반복에 따른 감각의 둔화가 오고 그만그만한 시들 사이에서 빛나는 한 구절이 목마름을 적시는 기나긴 시 읽기를 통해 1차와 2차 예심의 결과가 추려졌고 본심에서는 17명의 작품이 검토되었다.
최종심에서 논의된 시는 강전욱, 김민지, 이태주, 최보슬, 한소리 다섯 분의 시였다. 강전욱의 시는 소년과 소녀를 익명화하면서 ‘일어나자마자 너무 많은 일을 겪어 버린’ 세대의 성장담을 종유석의 이미지와 소설의 형식으로 밀고 나가는 패기를 보여 주었다. 이 예견된 실패의 운명을 깨뜨리기 위해서 이 시인이 ‘멈추지 않고 나가는 일’ 이상의 가시적인 균열점을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최보슬의 시는 떨어져 내리는 것에 대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떨어지는 빗방울이나 낙수에서 중력을 보지만, 이 심미안이 아름다울 때는 “추락을 향해 제힘을 다 쓰는 물을 볼 때”이다. 그것이 아마도 “한 개의 몸으로/천 개의 마음과 맞서”는 일일 것이다. 존재가 텅 빈 허기의 통로로 자각될 때의 이질감을 가열차게 파고들어 가 주기를, 그래서 더 많은 “몸을 치뤄 내” 주기를 바란다. 한소리의 시는 거침없고 분방하다. 그런가 하면 시간이 멈춘 듯한 장면 속에서 처연하게 슬픔을 꺼낼 줄 안다. 건물을 지우려다 함께 지워진 염소를 슬퍼하면서 바로 그 슬픔의 힘으로 염소와 염소를 떠올리는 자신이 생성된다는 것을 그린다. 레즈비언의 마스크에서 전염병과 함께 은폐를 읽어 내고 삶과 죽음을 겨울의 입김과 담배 연기처럼 분별하려고 한다. 머지않아 이 시인도 단조로운 결말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태주는 다채로운 시적 서사를 보여 주었다. 연대기를 해체한 「아이들은 천국에서 만난다」나 한 편의 짧은 필름 같은 「더 리빙 룸」은 시적인 상황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성장과 공포가 매혹적으로 뒤섞이고 자발적 실종과 의도적 탈은폐가 흥미진진하다. 삶의 불모와 부조리가 경쾌하고 아이러니컬하게 뒤섞인다. 조금씩 엇나가고 비틀린 이야기와 장면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캄캄한 방 속의 그림자처럼 모든 게 다 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이야기는 길어도 장황하지 않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종심의 모든 시인들에게서 더 많은 장점을 꺼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시적 응전이 아직 일정한 짜임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다채로움이나 가능성이란 더 자주 미완이라는 말로 번역된다. 반대로 여전히 미완성이지만 그 미완을 흠결로 보지 않아도 되는 안정감이 당선자의 시에는 있었다. 김민지의 시는 무엇보다 시행을 이끌고 가는 방식이 매혹적이었다. 부분과 전체라는 유기적인 결합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행에는 전체를 예비하는 모나드적인 긴장이 꿈틀거린다. 무심하고 무표정한 서술인데도 한 구절과 다음 구절의 사이에 여러 겹의 의미가 도사린다는 것을 느끼게 만든다. 가까워지고 싶었던 사람과의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궁금하지도 않은 걸 알려 주고/벽에 시계를 거는 건/예술과 사형의 기원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예술과 사형’의 두 존재 방식을 몽상하다가 아름다움과 그 기간이 만상에 작용하는 모순적인 두 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일상의 한복판 가령 이동 중인 버스 안에서 “졸음을 가누지 못하는 앞사람의 긴 머리카락을 보다가/버스 유리창 실금으로 파고드는 햇빛을 보다가/무지개를 보는 일”과 같은 행간을 읽으면 문득 왜 이 시의 제목이 “스톰 체이서”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폭풍을 쫓는 사람들과 눈에 띄지도 않을 일상의 사물에 눈길을 주고 있는 사람이 언뜻 보기엔 한없이 멀어 보여도 결국 구름이 폭풍으로 돌변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예의 주시하는 사람의 시선과 겹쳐지게 된다. 「top note」에는 환대받지 못하는 삶 속에서도 생의 아름다운 단면과 향기로운 발산을 더듬는 자의 수업 시대가 있고 「대기실」이나 「섬포도」 같은 작품에는 이들 세대의 환대받지 못하는 다른 일상이 화용적 심미성을 얻는다. 김민지의 시는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을 넘어가도록 하는,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지 않도록 내버려 둬도 다시 다른 입구를 찾을 수 있는 독자적이고 유연한 시행들과 시행들이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세계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는 점에 더 큰 기대와 신뢰를 가지게 했다. 김민지 시인의 출발을 환영하고 응원한다.
제1회 계간 파란 신인상의 심사에는 신인을 뽑는 일의 두려움은 있었지만 새로운 당선자를 내놓는 데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신인상 심사에서 으레껏 마주치게 마련인 여러 감정들―기대와 우려, 호기심과 의심, 놀라움과 두려움 같은 감정들의 충돌은 이번 계간 파란 신인상의 본심 심사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막상 그 결정의 순간이 허망하게 느껴질 만큼 쉽게 하나의 대상에 의견의 일치가 모아졌다. 눈여겨 둔 복수의 작품과 신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민지라는 신인을 당선자로 선정하는 데에는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일치된 견해였다. 통상적인 신인상 심사에서 나타나게 마련인 주장과 반증의 과정이 없었다. 당선자의 미덕이 낙선자의 악덕에 빚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번 심사에서 가장 분명하고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심사의 여러 소회를 전하기에 앞서 <계간 파란>이 배출하는 새로운 신인이 그 자신과 경합한 다른 동료들에게 가져야 할 마음 빚은 없다는 것을 알려 드린다. 당선인에 대한 선자들의 완전한 지지가 이 신인에 대한 당선의 축하를 전하는 한편 이후 이 신인이 스스로 떠안게 될 한층 심각한 자기부정과 회의를 언제고 더 괜찮은 확신으로 바꿔 줄 든든한 보증이 되기를 바란다.
계간 파란 신인상을 축제로 만들어 준 여러 응모자께 감사의 인사를 돌린다. 응모자들 중에는 아마도 시를 많이 써 보지 않은 듯 추측되는 분들도 있었다. 기탄없고 설익은 감정 표현들이 의심 없이 튀어나왔다. 선별 과정에서는 제외되었지만 이렇게 기껍게 진입하는 분들 가운에서도 미래의 김민지 씨가 있을 것이다. 더 놀라운 분들도 있었다. 시를 읽고 나서 응모자의 나이를 알게 되었을 때 놀라게 되는 그런 분들이었다. 팔순이 넘는 나이에 거의 사오십대의 목소리를 연마한 분들이 있었다. 이 정도의 시차를 거스르는 것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었다. 작품의 완미함이나 잘 마감된 문장을 보자니 이렇게 시를 열심히 쓰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이 눈물겨웠다. 십대부터 팔십대까지 우리 시를 읽고 쓰는 분들이 두텁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그러나 확신이 의심의 소산이듯 부정과 의심 역시 자기의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직 걸음마 단계의 시들이나 기성의 방법으로지만 일정하게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들은 더욱 고유화된 영토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 아직은 그 열정으로 두루 우리 시단의 두터운 지층이요 자산으로 여기면 좋을 것 같았다. 이 모든 시들이 결국 우리의 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파란의 문을 두드려 준 모든 응모자들께, 그리고 마지막까지 가열찬 각축을 별여 준 최종심의 예비 시인들에게 감사와 응원의 인사를 드린다. (이현승)
평론 부문
<계간 파란>의 첫 신인상 평론 부문에 응모된 원고는 총 6편이었다. 받아들이는 관점에 따라 많게도 혹은 적게도 느껴질 수 있을 숫자이지만, 시 평론이라는 한정된 분과의 제반 조건과 기약이 없을지도 모를 70매 내외의 산문에 녹아 있는 시간과 용기를 생각한다면 손쉽게 계량화될 숫자는 아닌 듯싶다. 원고를 보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정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평론 부문은 별다른 예심 선고 작업을 거치지 않았고, 심사자들은 곧바로 본심 과정에 들어가 응모된 원고 전부를 각기 읽어 나갔다.
김철환의 「성장기가 남긴 개체적 징후들―강성은論」은 강성은의 시를 유실된 성장기의 흔적으로 독해하는 글이다. 개별적인 환상의 충격을 보존하고 언어화할 때 한 시인의 고유한 세계가 탄생하게 된다는 것을 강성은의 여러 작품들을 넘나들며 차분히 논증하고 있다.
윤새품의 「잃어버린 시의 낭만에 대하여」는 자칫 소홀히 다루기 쉬운 시의 낭만성에 관한 재고를 요청하는 글이다. 글 전체의 분량과 깊이의 폭이 다소 아쉽기는 했으나, 인용된 윤동주와 김소월의 작품을 닮은 자신만의 서정적인 문체로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시의 낭만적 특질을 밝히고 있다.
이주훤의 「시간여행자의 사랑―양안다 시의 특별한 시공」은 양안다의 시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시간 감각을 조명하고 있는 글이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너’를 경유하여 다시 미래로 진입하는 양안다의 시적 여정을 ‘시간여행자’라는 표상을 통해 흥미롭게 분석하고 있다.
김지헌의 「분노한 경진이의 진격! 새로운 시를 찾아서」는 이소호의 <캣콜링>을 독창성의 관점에서 읽어 나가는 글이다. 페미니즘의 방법론을 기저에 둔 ‘경진’이의 발화가 어느 지점에서 최승자를 포함한 이전의 선례들을 계승하고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발화를 내보이고 있는지를 독특한 구술 형식의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다.
위 응모작들은 각기 나름의 미덕을 지닌 평문이었으나, 심사자들이 최종적으로 고민했던 원고는 다음의 두 작품이었다. 먼저 고민형의 「비평 밖에 대해서」는 비평의 진지한 자기 고민이 담긴 글이었다. 유려한 문장들로 논지를 쌓아 나가는 이 평론은 ‘작품’과 ‘독자’ 사이에 놓인 비평의 존재 조건 그 자체를 겨냥하고 있었고, 둔중한 문제 제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비평의 근본적인 소임을 다시금 고민하게 만들었다. 다만 다소 아포리즘적으로 서술된 문장들은 그 주관적인 매혹 탓에, 차후 다른 방식의 글로 뻗어 나갈 가능성을 손쉽게 알아차릴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한편 김효선의 「왜가리의 탄생―이수명론」은 이수명의 시집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를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글이다. 시인이 명명한 사물들의 주체적인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는 이 글은 시인의 작품과 시론 모두를 끌고 들어와, 해당 시집이 이수명의 시 세계 안에서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짚어 내고 있다. 그러나 1998년에 발간되었던 이수명의 두 번째 시집이 왜 지금 다뤄져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거의 해명되지 못한 것 같다. 너무나도 잘 짜인 구도로 쓰인 탓에 오히려 지금의 시간과는 안전하게 단절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끝내 떨치기 힘들었다.
심사 내내 쥐고 있었던 질문은 문학 혹은 시 평론이 객관적으로 평가되고 논의되기 위해 지녀야 하는 일정한 기준에 관한 것이었다. 비평적 사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제한 없이 펼쳐져야 하지만, 시적 산문이나 사회학적 글쓰기와 문학 평론이 분절되는 고유한 지점은 그것이 작품 비평이든 메타비평이든 문학 텍스트를 경유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나 자신이 쓰고자 하는 바를 보여 주는 첫 번째 글이라면, 그 속엔 고심 끝에 택한 작품과 함께 어째서 그 작품을 선택했는지에 관한 나름의 고민과 질문의 흔적이 담겨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를 통해 문학 평론은 그 텍스트가 단독으로 존재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어떤 해석과 감각의 겹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원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물론 안목의 부족 탓이었을 수도 있고, 제1회 수상작을 향한 높은 기대치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심사 위원들의 긴 논의 끝에 내려진 결정이지만 이 글을 적는 동안에도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수차례 공모전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위로금처럼 얻은 몇 줄의 심사평에서 용기와 좌절을 동시에 겪곤 했다. 누군가가 느낄 그 안타까운 마음과 혹시나 하는 두려움으로 원고를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지만, 이번에는 아쉬운 결과를 전할 수밖에 없을 듯싶다. 금번 결정이 후회스럽도록 조만간 다른 지면에서 멋진 글을 만날 수 있길 바라 본다. 그 글이 바깥으로 나오기 전까지 드러나지 않을 여백의 고투와 시간에도 진심으로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조대한)
첫댓글 심사위원님들의 애정이 담긴 심사평까지 정말 잘 보고 갑니다! 많이 배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