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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다.(1868. 8. 27∼1943. 10. 25))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여천(汝千)이다.
태어난지 7일만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업고 주변 동냥젓을 얻어 먹으면서 성장을 하나 9살 되던해 아버지 홍윤식이 죽고
고아가 된다. 철도 들지 않은 소년이 부잣집 머슴 노릇을 하던 홍범도
15살이 되던 해인 1883년 나이를 두살이나 부풀려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 하게 된다.3년여 간의 군생활은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체험한 시기이기도 하다.군 교관들의 부정 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참지 못하고 상관 한사람을 두들겨 패고 탈영 하고만다.
이후 황해도로 거처를 옮겨 탄광등 제지소 노동자로부터 머슴일까지 닥치는대로 일을 하지만 겨우 감자 주먹밥 얻어 먹는것이
전부였다.1890년 23살 되던해 금강산 신계사에 절머슴으로 들어간다.이 때 비구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아들을 낳는다.
뜻하지 않은 화적때를 만나 아내와 자식을 생이별하고...,
다시 강원도 먹패장골에 거처를 옮겨 남의땅을 빌어 밭농사를 지으며 군 나팔수 당시 익혔던 사격술로
강원도 포수로 변신 한다.
당시 조선은 열강들의 틈바구니속에서 급박하게 돌아 간다.
1894년 동학 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군대를 조선에 파견한뒤 6월 21일 경북궁에 침범하여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또 청일 전쟁을 일으켜 청나라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1895년 조선의 국모(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러고 단발령 까지 내리면서..
이때 조선에서 의병 봉기가 팔도 각처에서 일어난다.
홍범도는 동료 포수들과 의기투합 경기,강원도를 연결하는 철령에 숨어있다 일본군 10명을 사살 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홍범도 나이 28살의 나이에 홍범도는 항일의 기치를 올린다.
소총과 탄약등 전리품을 획득하여 함경도로 거처를 옮겨 북청에서 12명의 포수를 모아 의병대를 조직 한다.
이후 장군은 함경도 산간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 하면서 친일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 하는등 울분을 토하며 포수들과
항일 의식을 고취하여 간다.
이때 헤어진 부인과 자식을 5넌만에 만난다
1907년 9월 3일 일본이 제정 공포된 총포및 화약류법이 강제 시행된다. 조선인이 가진 총기나 화약류는 관청으로 반납 하라는
강제 시행령이었다.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포수들게는 치명적이었다. 홍범도는 포수들과 농민,탄광 노동자등 70여명을 모아
산포대를 조직 다시 의병을 일으킨다.북청의 후치령을 중심으로 삼수,갑산,혜산,풍산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항일의 기치를 더 올린다.
지역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반출하는 일본군을 후치령에서 습격하여 일본군과 순사들을 사살한다. 수일후 다시
이곳에서 일본군 대위가 지휘하는 군경 70여 명과 3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30여 명을 사살 하는 전과를 올리고
삼수,갑산등을 탈환 하기도 하고 헌병 분견소 일본군 관사등 일본인 금광을 습격 금괴를 빼았아 군자금으로 사용 하는등 대담
무쌍한 활약을 벌였다.
1년 남짓 60여차례의 교전을 벌이면서 단 한번도 패한 적 없는 의병사의 전설. ‘하늘을 나는 홍범도다는 민초들의 입에서
소문을 탄다.’
그를 잡거나 사살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부인을 잡아들여 귀순공작을 벌인다.부인은 투항 권고문을 쓰라는 요구에
“망해가는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영웅호걸이 어리석은 아낙이 글을 쓴다고 굴복하리라 믿는가!” 오히려 호통을 치다가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아내.. 1개월 뒤 1908년 6월 함흥수비대와 교전 중에 의병으로 전사한 아들을 지켜보면서
눈물이 흐른다. 홍범도는 더한 무장투쟁의 의지를 다진다.
홍범도는 백두산 일대서 너무 많이 알려졌고 일본군에 쫏기면서 조선에서 더이상 활동이 어려워진다. 1908년 가을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을 한다.연해주에서도 이범윤.이진용,이상설,안창호등과 협력 하면서 유인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13도
의병군 창립에도 참여 하면서 국내 진격 작전을 도모 하면서 기회를 기다린다. 다시 무기 구입 자금 확보로 홍범도 일행들은 함께 노동일을 시작 한다.
1910년 4월 최원세의 도움과 노동으로 얻은 자금으로 구입한 총기등으로 무장한 홍범도..다시 두만강을 따라
함경도로 진격 일본 수비대를 급습 일본군을 사살하고 다시 두만강을 건너온다.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 파견소나 지서등을 공격 국내진공 작전은 끊임 없이 펼쳐지고 조선의 국내서는 3.1 운동이 일어
나면서 반일 감정은 극도에 달한다.홍범도의 국내 진공작전 소식을 전해 들은 조선의 민초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 한다.
이당시 봉오동 일대 홍범도 대한 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명의 병력 소총 200여정 권총 30여정의 무기로.
지휘부는 사령관에 홍범도 부사령관에 주건 참모장 박경철로 구성 되어 있었다 .
1919년 국내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진공 작전의 횟수가 늘어 나면서 함경도 온성,회령,무산등 두만강 지역 일본군 수비대의 피해가 갈수록 늘어 난다.
1920년 6월 4일 봉오동 전투의 신호탄이 울린다.홍범도.최진동 부대 1개 소대가 두만강변촌 삼둔자(간평)를 출발 두만강 건너
함경도 종성군 강양동 두만강변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 일본군 국경 헌병 초소를 습격하여 불을 지러고 일본군을 사살 한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함경도 남양 수비대는 1개 중대병력을 파견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영토를 침입 추격전을 벌인다.
6일 오전 미리 예측한 홍범도는 두만강변 삼둔자(간평) 강변 산기슭에 1개 소대를 매복 시킨뒤 유인책으로 몇명이 앞으로 나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 중대병력을 산골로 유인 하여 일격에 격퇴 시킨다.
일본 정규군 최초의 패배로 일본군은 큰 충격을갖는다. 함경도 19사단장 소좌 야스키와가 지휘하는 보병및 기관총대대와
1개 여단을 출동 시킨다.홍범도. 최진동등 독립군 수뇌부는 작은 병력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 할려면 고지를 점령하고 대기하는것이 최상책이라고 판단 하였다.
6월 7일 오후 1시쯤 일본군은 기관총 대대를 앞세워 고려령을 넘어 봉오동 상동 남쪽 300m 지점까지 들어오자
홍범도의 신호탄으로 3면 고지에 매복한 독립군은 사격을 개시 하면서 시작된 봉오동 전투는 3시간 이상 벌어져 일본군의
사상자가 늘어 나면서 일본군은 도주하기 시작 한다. 강상모 중대장은 2중대를 이끌고 추격 하면서 마지막까지 일본군에
타격을 가한다. 일본군은 이날 전투에서 전사자 157명 중상자 300여명 대한 독립군은 전사자 4명 중상 2명에 불과 했다.
조선 독립 운동사 최초의 승리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거둔 대첩 이후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첫 대승이었다.
4개월뒤 인근 청산리 대첩의 예고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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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와 국내 진공 작전등으로 큰피해를 입게된 일본은 북간도에 활약 하는 무장 독립군을 진압하지 않고는 조선을
안정적으로 지배 할수 없다고 판단 대대적인 근거지 진압 계획을 세운다.
그 첫번째가 훈춘 사건을 일으킨다..
"훈춘사건"
일본은 먼저 창장하오라는 중국마적 두목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공격 하게 한다.
1920년 10월 12일 창장하오 마적단은 400여명의 마적단을 이끌고 훈춘성을 공격 오전 9시부터 4시간동안 무차별 살인과
약탈을 자행 조선인,중국인,일본인,가리지 않고 100여명을 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을 불태워 버린다.
일본은 자신들의 자작극 사건을 빌미로 중국 영토로 일본군의 출병 구실을 만들었고 그날짜로 함경도 나진에 주둔 하던
일본군 19사단등 3개 사단 5만명을 출동 시켜 훈춘 시가지에 나타난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여
총살을 자행 한다. 이때 희생된 조선인의 수가 백여명이 넘었다.
훈춘에서 천인 공노할 만행을 저지런 일본군 3개 사단 병력 5만명은 대한 독립군을 목표로 근거지 초토화 작전을
전개 한다.일본군 대병력은 두만강을따라 양수와 도문을 거쳐 삼둔자로 진격 고려령을 넘고 봉오동으로 진격하나 홍범도 대한
독립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는 지리적 조건이 유리한 화룔 청산리 이도구로 이동
한달여 넘게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십리평 서일의 북로정서군에도 연통이 날아온다. 중국군측으로 부터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으로 독립군 근거지
초토화 작전을 알려 온것이다. 포위망이 좁혀져 오는것을 알아차린 서일과 김좌진은 북로정서군의 다음 근거지는
백두산에 새롭게 건설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말경 백두산으로 이동을 시작 하면서 10월 10일 안도현 경계지역인
청산리 삼도구에 도착 홍범도를 만난다.
서일과 김좌진은 같이 싸우자는 홍범도의 주전론과 서일과 김좌진은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피주전론이 맞서나 일본군은
어느새청산리 주변으로 5만명이 대병력이 밀려오고 있었다
10월 21일 청산리 계곡으로 일본군 선발대가 접어 들었고
홍범도 대한독립군과 최진동부대 1.400명 김좌진 북로군정서군 1.600명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또한번 홍범도의 지략에 걸린 일본군은 6일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 3.000여명 중사자 2.000여명을
내고 홍범도는 다시한번 대승을 거둔다.
독립군 전사자는 100여명이었다..
청산리 전투는 세계 전사에도 남을만한 전투였고 조선의 독립 운동사에서도 가장큰 승리로 남아 있다.
청산리 전투를 김좌진을 영웅으로 부각시킨 우리 근대사의 왜곡된 역사의 진실등이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남겨두고우리 학계서는 지금 하나식 밝혀내고 있다.
청산리 전투도 홍범도와 봉오동 주민으로서 독립군의 한부대를 이끌은 최진동의 공동 지략이었다는것이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이때 홍범도 나이가 52세 김좌진이 31세 김좌진의 부관 이범석이 20세였다)
청산리 전투를 끝으로 두만강변의 북간도는 더이상 독립군의 근거지가 될수가 없었고 훈춘 사건을 계기로 자국민의 보호와
독립군 근거지 초토화 계획을 세우고 일본군 수많은 병력이 북간도로 집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북간도에는 크고 작은 무장 독립 단체들이 300여개가 넘었고. 이들 북간도 모든 무장 단체들은 서로 연통을 넣어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에 집결하기로 한다..홍범도와 김좌진도 대한독립군과 북로군정서군을 이끌고 송화강을 따라 북진
흑룡강을 거쳐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을 한다.
"간도참변"
봉오동 전투에 이어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지원군을 다시 보강하여 대오를 갖추고 추격전을 펼치면서
봉오동과 청산리로 다시 진격
하나 홍범도와 독립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대패의 분을 삭이지 못하던 일본군은 조선인 일반 사회 단체나
학교 등을 초토화 시키는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1921년 4월까지 6개월동안 조선인 마을을 대상으로
부녀자 겁탈 방화 약탈을 일삼고 조선인은 보는대로 학살을 일삼는다. 이때 화룡,용정,연길.도문,훈춘등에서 희생된 조선인만 3만명이 넘었고 2.500여채의 가옥과 30여개의 조선학교 건물등이 방화로 소실 되었다.
이때의 대참사를 일컬어 ‘간도참변’이라 한다.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런 이 왜구 종자들과 우리는 지금도
화해 하지 못하는 이유들이다.
이 참변으로 인하여 북간도 조선인 사회는 거의 공항 상태에 빠졌고,
북간도 모든 독립군은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 한다..
북간도 독립군 단체들은 러시아 자유시(알렉세프스크)로 이동 하면서 중,러 국경 근처 밀산에서 만나 각 조직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에 합의를 하고 명칭은 대한 독립군 하나의 군단으로 홍범도의 조직 명칭을 사용 하기로 합의를 한다.
하나로 재편된 대한 독립군단에 참여한 조직은 다음과 같다.
1. 대한 독립군 (홍범도)
2. 북로군정서군 (서일.김좌진)
3. 한국 독립군 (지청천)
4. 간도 국민회 (구춘선)
5. 대한 신민회 (김성배)
6. 의군부 (이범윤
7. 광복단 (이범윤)
8. 혈성단 (김국초)
9. 도독부 (최명록)
10. 야단 (김소래)
11. 대한정의군정사 (이규)
12. 군비단 (김백일)
대한 독립군의 총재는 북로군정서군의 서일이 추대가 되었고 부총재로 홍범도, 김좌진.조성환, 총사령관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이 추대 되었다.
여단장에 지청천 중대장에 김창완.조동식,오광선,이범석등이 선임 되었다.
대한 독립군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아래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의 소대로 편성 되었고 총병력은 3.500 명이었다.
새롭게 태어난 대한독립군단은 겨울을 밀산에서 보내고 3월에 대한 독립군은 대대별로 시간을 두고 러시아
자유시(알렉세프스크)로 이동을 한다.당시 연해주 아무르강 일대에서 활동중이던 오하묵(연해주 자유시 부대장)의
도움을 받아 아무르강을 건너 안전 지대인 연해주 이만(달내레츠스크)에 집결 한다.오하묵은 노령 자유시(알렉세프스크)에
군대 주둔지를 마련 하여 대한독립군들을 집결 하도록 배려 한다.
당시 러시아는 내전중으로 연해주에는 붉은군대(적군파)와 반혁명군 하얀 군대가 내전중에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 반 혁명군 하얀군대의 지원을 위해 1918년 연해주로 일본군을 보내지만 실상은 연해주의 조선 독립군들의
진압 목적도 함게 있었고. 대한독립군단과 ,러시아 연해주 독립군들은 적군파와 함게 대일 항전을 펼치면서,적군파를 도와
후일 연해주에 고려 자치주를 보장 받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흑하사변"
당시 러시아 연해주에도 북간도처럼 많은 독립군 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사할린 조선 의용대는 이항 부대라고도 한다.이항 부대장 박이리아는 이항시(니콜라예프스크) 에서 러시아 적군파와 합동
작전으로 일본군을 대파 시키고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들어 왔다. 당시 자유시에는 북간도에서 넘어온 홍범도를 비롯
대한 독립군 부대와 자유시에서 활동중인 조선 독립군 오하묵 자유부대가 있었다
이항부대장 박이리아와 자유부대장 오하묵과 전체 군통수권을 둘러싸고 대립을 하게 된다. 이때 양파의 대립을 조정 하기위한
고려 혁명군 군정의회가 결성 되었고 이곳 회의서 러시아 적군파 빨치산 영웅 갈란다라시윌린을 의장 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군통수권을 책임지도록 했다.이것이 발단이 되고 이항부대 박이리아는 이에 불복 하면서 자신의 이항 부대와 북간도
대한 독립군단을 자유시에서 5km 떨어진 수라세프카로 이동 시킨다. 홍범도는 이때 부하들의 안전을 생각 자유시
오하묵 자유부대에 남는다.
박이리아와 몇번의 설득에 실패한 갈란다라시윌린은 자신의 부대 러시아 적군파 29연대를 동원,1921년 6월 27일
수라셰프카로 이동해 있던 박이리아 이항 부대와 대한 독립군단에 대해 무장해제를 단행했고 이때 자유부대장 오하묵도
적군파 29연대와 함께 행동 한다. 이항 부대장 박이리아가 저항 하면서 쌍방간 총격전이 벌아지면서 함게 있던 북간도의
대한 독립군단도 많은 사상자를 낸다.
이사태를 자유시사변 또는 흑하 사변이라고 한다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17명으로 되어 있다. 박이리아를 따르지 않은 홍범도는 살아 남았고 당시 박이리아는
무사히 탈출했다. 서일,김좌진,이범석은 참변 수일전 중국 밀산으로가 살아 남았지만 총재 서일은 마적단을 만나 부하
수십명이 희생을 당하고 자책감에서 자결하고 만다.
자유시 참변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후일 사가들의 입장에 따라 해석과 평가가 다르나 분명한것은 연해주 독립군들의
파벌싸움이 하나로 통일된 북간도 대한독립군마저 시베리아서 희생 시키면서 와해 되었다는 사실이다.
흑하 사변에서 300여명의 부하들을 살린 홍범도는 재기를 위해 노력 하지만 자신의 부대가 오하묵 자유부대원과 함계
적군파 여단에 편성되어 항일전을 이끌 지위를 인정 받지 못한다. 2년후 적군파를 떠나 55세의 노구를 끌고 시베리아 집단
농장으로 들어가 조선인들의 항일사상 고취와 계몽운동을 벌이면서 노후를 보낸다.
1937년 10월 러시아가 연해주 조선인들을 중앙 아시아 강제 이주 정책에는 천하의 범 홍범도도 비켜 가지를 못하고 차가운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중앙 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한다.이때 홍범도 나이가 70세였다.
조선의 범 홍범도는 카자흐스탄 황무지에서 움막 생활을 시작 하면서
병원경비 극장수위등을 하면서 마지막 노후를 보내다.1942년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때 홍범도는 러시아 군부대을 찻는다.
일본과의 전쟁터에 보내달라고 사정 하나 거부를 당한다. 홍범도는 마지막까지 항일 무장 투쟁가로서 기개를 잃지 않았다.
1943년 10월 홍범도는 주변 동지들을 불러 모아 돼지를 한마리를 잡는다. 이것이 홍범도 생의 마지막이었다.
조국 광복에 일생을 바친 북간도 범 홍범도는 그토록 바라던 광복 2년을 남겨두고 1843년 10월 25일 이국 멀리 중앙 아시아
카자흐흐스탄에서 지켜보는 피부치 하나 없이 쓸쓸히 눈을 감는다.조선 독립의 영웅 홍범도는 그렇게 갔다.이곳 동포들은
이름없는 공동 묘지지만 정성을 다한 묘지를 만들었고 추모 공간을 만들었다. 카자흐스탄 당국에서도 홍범도 거리까지 조성 시켜
지금도 그를 추모하고 있지만.그가 일구어낸 조국은 지금까지 홍범도의 유해를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다.
청산리 전투 공적마저 김좌진에게 다 내주고
화룡 청산리 전투장은 기념비도 세우고 김좌진 찬양 일색의 글로 도배하고 있지만
홍범도를 언급한 글은 단 한줄도 없다.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봉오동 산골은 댐으로 수몰되고 우리 정부에서 세운 기념비
하나 없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부에서 댐아래 작은 기념비 하나 세운것이 다다.
광복후 이승만 정권의 초대 국무총리였던 이범석은 저서에서 홍범도를을 도망자로 묘사했다. 일본군이 노획한 무기는 모두
홍범도 부대의 것이라고 저서에 남겼다, 즉 홍범도는 전투에서 매번 패하고 도망이나 단녔고 무기는 매번 일본군에 뺏았겼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길수가 없다. 진실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 하나 하나 밝혀지고 있다.당시 청산리 전투는 52세의 노병 홍범도의 지략으로로 승리를 이끌었다는것이 지금 학계서 정설로 굳어가고 있다.
권력을 가진 산자의 입맛대로 써여진 대한독립 운동사
머슴 출신 그는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아내와 자식까지 조국 광복에 다 바친 홍범도 그는 영원한 머슴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에게 많은 채무를 안고 살아 가고 있다.
올해가 대한민국 건국 영웅 홍범도 서거 73주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96주년이 되는 해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 4년이 남았다 .2020년6월 7일 봉오동 전투 100주년 이때
구천에 떠도는 대한독립의 영혼들게 고마움을 다 담은 막걸리 한사발과 이글을 올린다 .
가장 뒷줄 오른편이 봉오동 전투당시 홍범도
팔공산 자락에서
2016.복더위 중간날
※일부 편견이 있겠지만 역사는 진실을 밝혀야 하낟에는 공감한다.너무나 많은 역사가 독재자들에 의해 왜곡 되였다.아래에 댓글들을 보면 알수 있다.
댓글1:이분이 대한독립을위해 싸운거야 아니면 조선독립을위해 싸은거야,,,,,
댓글2:그누구를 위해서 싸웟냐가 중요하다구 생각 하지 않습니다.그시대에 제일 중요한건 일본놈을 조선땅에서 중국땅에서 몰아내는게 최 우선이고.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함니다
※우리는 조선인들이 조선독립을 위해서 항일을 하였다고만 배웠다.그런데 조선왕조는 이미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었고 일본에 의해 망국을 하였다.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건립된것두 몰랐다.긔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진행한 반일투쟁도 몰랐었다.대한독립을 위해 싸웠다가 정론이라 하겠다.동북에서 구소련 동방여단 연안에 조선의용군 모두 조선왕조의 조선을 국호로 생각했던게 틀린 것이다.수십년이 지난 오늘 북한김씨는 과연 새로운 조선왕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