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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나무 소나무, 그 일상과 예술과 문화>
애국가에도 등장하는 소나무는 국민 51%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한국갤럽조사 2019년)라고 답한 국민나무다. 한국인은 금줄에 끼인 소나무와 같이 세상에 왔다가 소나무 관과 함께 가고, 무덤에서는 도래솔의 보호를 받으며, 또한 사후의 영혼은 모사(茅沙)라는 이름으로 꽂힌 솔가지 제상을 받는다. 가축으로는 소, 나무로는 소나무가 우리 삶과 가장 밀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태어나서부터 죽은 후까지 함께하는 소나무가 얼마나 우리 삶속에 뿌리박혀 있는지 살피고 그 문화적 의미를 생각해본다.
1. 소나무 나라의 소나무
소나무는 한국사람이 압도적으로 좋아하는 나무다. 위 갤럽 조사에서 소나무는 51%로 1위, 2위 벚나무는 7%였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수종 중에서도 가장 넓은 분포면적을 가지고 있고, 그 개체수도 가장 많다. 애국가 ‘남산위의 저 소나무’에서부터 ‘선구자’의 ‘일송정 푸른솔’에 이르기까지 소나무는 한민족의 일체감을 나타내는 상징성도 가지고 있다.
소나무의 학명은 Pinus densiflora S. et Z., 이름은 솔·솔나무·송목·적송·육송 및 송유송(松油松)·여송(女松)·자송(雌松)·청송(靑松)·솔보득이 등등 다양하다. 대표명칭 ‘소나무’는 ‘솔+나무’에서 ‘ㄹ’탈락이 일어난 경우다. 솔은 나무 중에서 으뜸, 우두머리라는 뜻의 ‘수리’가 ‘술>솔’로 변했다고 보기(김선풍)도 한다.
소나무는 전국 산야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데, 지역과 지형에 따라 품종이 달라진다. 동북형·금강형·중남부평지형·안강형·중남부고지형 중, 안강형은 경상북도 일대에서 자라고, 금강형은 강원도의 금강송(金剛松)이다.
소나무는 나무줄기가 붉어서 ‘적송(赤松)’, 내륙 지방에서 자란다고 ‘육송(陸松)’, 여인의 자태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여송(女松)’이라고도 한다. 적송(赤松)은 일본 이름 ‘아카마쯔’(あかまつ, 赤松)의 한자어 독음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말 말살 정책 때 강요한 이름이 아직도 널리 쓰이는데 줄기가 붉은 데서 유래한 말이다. 옛 문헌에서 소나무는 송(松)이나 송목(松木)이다.
소나무는 일본이 먼저 세계에 소개하였기 때문에 영어 이름은 일본적송(Japanese red pine)이다. 감은 우리가 많이 나고, 일본에서는 별로 나지 않는데, 불란서 과일가게에서 보니 Kaki 카키라고 일본어 발음표기로 되어 있었다. 일본이 세계에 먼저 소개하여 일본식으로 알려진 이름은 한둘이 아니다.
해송(海松)은 바닷가에서 자라는 소나무의 형제로 원래 이름은 곰솔이다. 반송(盤松)은 보통 소나무가 외줄기인 것과 달리 아래부터 여럿으로 갈라지는 소나무로 만지송(萬枝松)·다행송(多行松)이라고도 한다.
춘양목(春陽木)은 해방 직후 1955년 개통된 영동선 춘양역에서 가져오는 금강송을 말한다. 금강송의 우리 이름은 황장목이다. 몸통 부분이 누런 색을 띄고 재질이 단단하고 좋은 나무로서 그 심재부로 조제한 목재는 왕실의 관인 재궁(梓宮)을 만드는 데 쓰인다.
소나무는 어릴 때는 일사량이 풍부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건조하거나 지력이 낮은 곳에서 견디는 힘이 강해 인구증가와 함께 주요수종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추측한다. 1,400년 전부터 늘어난 것이 이런 까닭이다. 높고 굵게 크는 나무로 은행나무 다음으로 크고 오래 살므로 장수의 상징 십장생(十長生)의 하나이다.
거기다 소나무는 마을 가까이에 숲을 이루고 있어 생활 친연성이 높다. 집도 배도 농기구도 집안의 집기들도 대부분 소나무를 사용하였다. 세종조에 “선재(船材)는 꼭 송목(松木)을 사용하는데, 경인년 이후부터 해마다 배를 건조해서 물과 가까운 지방은 송목이 거의 다했고, ... 송목을 양성하는 기술과 병선을 수호하는 방법을 상세하게 갖추어서 알리라.”는 하명을 할 정도였다.
선비들은 소나무 그을음으로 만드는 송연묵(松煙墨)을 사용하였다. 재는 물론 그을음까지 사용하였던 것이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송연묵(松煙墨)은 맹주(猛州 평안북도 맹산(孟山)) 것을 귀히 여긴다고 했다. 생활과 가장 가까운 나무가 소나무인 것이다.
2. 소나무 둘러보기
1) 조선왕릉
*조선조 왕릉에는 소나무가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묘소 옆의 도래솔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 권역을 덮고 있는 숲도 소나무가 많다. 특히 조선조에는 소나무가 주요 수종이었으므로 묘역에 소나무를 많이 심는 것은, 태조 이성계가 묘소에 억새를 심어달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성종의 묘소. 선릉. 입구에서부터 소나무가 눈에 띈다.
성종대왕릉, 선릉 주위의 도래솔
* 선릉주위의 도래솔, 곡장 주위까지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도래솔이다. 곡장 밖에서 안으로 뻗은 소나무 가지가 성종을 옹위하고 있는 듯하다. 선릉은 제9대 성종(1457~1494)과 계비 정현왕후(1462~1530) 윤 씨의 능으로 동원이강릉이다. 각기 다른 능침을 갖고 있지만 홍살문, 정자각은 하나다. 좌측이 성종의 능, 우측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실제로 보면 정현왕후의 능은 뒤쪽에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왕릉에 제일 많은 것은 소나무다. 오래된 고목들이 가지가지 모습으로 왕을 지키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조성한다. 소나무는 국민나무다. 오래전부터 왕의 나무이기도 하고, 백성의 나무이기도 했다.
식당 이름 중 나무 이름으로 명명한 것중 가장 많은 것이 소나무집이다. 주막이름에서부터 연원이 유래하는 지형지물 명명법이 이어진 이름, 나무를 이름으로 삼은 식당상호는 소나무집, 감나무집, 버드나무집 등등인데 이중 소나무집이 제일 많은 거 같다.
소나무는 왕의 나무고 동시에 백성의 나무다. 왕릉에 드리운 소나무는 왕이고 백성이다. 왕은 죽어서도 백성의 보호를 받는다. 백성은 왕을 보호하고 왕은 백성을 보호한다. 소나무도 그것을 말해준다.
정현왕후릉의 도래솔. 왕비의 묘소가 국왕의 묘소와 크기가 같다. 남녀평등인지 부부평등인지, 묘소를 보면 전혀 남녀 차별, 부부차별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들을 낳지 못한 후궁 정도는 순장해버린 중국과도 비교된다.
왕릉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숲으로 보인다. 숲의 나무에는 소나무가 제일 많다. 왕릉의 왕도 쉬고, 참배하는 후손도 소나무숲에서 쉰다. 참배의 의사가 없는 사람도 쉬어가면 된다. 서울에서 왕릉은 소나무 허파이다.
중종의 묘소. 아파트 빌딩 숲속에 유네스코문화유산인 조선왕조 왕릉이 있다. 서울 사람이 이래서 숨을 쉬며 살 수가 있다.
비각
어로로 걸으라 해도 걷지 않고 옆에 다른 길을 내서 걷는다. 향로는 혼의 길이고 어로는 임금의 길이니 어로로 걸으라 하지만, 왕의 길을 함부로 걸을 수 없다는 생각, 모두 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왕을 존중하려는 의도가 이렇게 두 갈래 선명한 새 길을 냈다. 존중해야 할 것은 존중하는 마음이 같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정자를 지으면서 소나무를 사용하지 않았다. 모두 잡목을 사용하면서 말하기를 소나무는 국가에서 금하는 것이니 범하면 안 된다"라고 했다.(전남문화 찾아가기 372면, 근간예정) 소나무를 나라의 나무로 보아 아끼고 경외하는 신하의 관점이 들어 있다. 소나무는 국가의 나무, 국왕의 나무이기도 한 것이다. 보길도에서까지 누가 나무랴라마는 어디에 있든지 백성의 자세를 갖으면서 나무 하나까지 보호하고 공경하려는 자세가 존중스럽다.
오늘날 어로를 피하는 대한 국민의 자세 또한 이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3. 일상과 함께하는 소나무
옛날에는 소나무로 지어진 집의 안방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소나무 장작으로 데워진 온돌에서 산모는 몸조리를 했다.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금줄에는 솔가지가 끼워진다. 아이가 자라면서 뒷동산의 솔숲은 놀이터가 되고 땔감을 해오는 일터가 되기도 한다. 명절이면 송홧가루로 만든 다식(茶食)을 먹고 양반가라면 소나무가 포함된 십장생도가 그려진 병풍을 치고 꿈나라로 들어간다.
가구를 비롯한 여러 생활필수품에도 소나무는 빠지지 않았다. 선비로 행세를 하려면 송연묵으로 간 먹물을 붓에 묻혀 일필휘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세상살이가 끝나면 소나무로 만든 관 속에 들어가 땅속에 묻힌다. 그러고도 소나무와 인연은 끝나지 않는다. 도래솔로 주위를 둘러치고는 다시 영겁의 시간을 소나무와 함께 한다.
조선왕조는 소나무 왕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소나무를 숭상했다. 관청이나 양반의 집을 짓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나무였으며, 배를 만들거나 임금의 관재에도 꼭 사용되었다. 이를 위하여 전국에 소나무가 잘 자라는 2백여 곳에 봉산(封山)을 설치하여 아예 출입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박상진, 우리 나무의 세계2 인용)
우리나라에서의 소나무 발생과정을 화분 분석을 통해서 추정해 보면, 지금부터 약 7000년에서 1만년 전에는 참나무류가 성하였고, 그 뒤 소나무속이 나타나서 참나무속·서나무속·느릅나무속·호도나무속 등과 함께 오래 살아왔고, 약 1400년 전부터 소나무가 갑자기 불어났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소나무 증가도 인구 증가와 농경에 의한 문명의 발달에 발맞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소나무 생육지는 생태계의 조화가 크게 깨지면서 솔나방의 유충, 솔잎혹파리·소나무좀 및 대기의 오염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
목재는 기둥·서까래·대들보·창틀·문짝 등에 쓰이는 건축재, 상자·옷장·뒤주·찬장·책장·도마·다듬이·빨래방망이·병풍틀·말·되·벼룻집 등의 가구재, 소반·주걱·목기·제상·떡판 등의 식생활용구, 지게·절구·절구공이·쟁기·풍구·가래·멍에·가마니틀·자리틀·물레·벌통·풀무·물방아공이·사다리 등의 농기구재, 그리고 관재(棺材)·장구(葬具)·나막신재 등 그 용도가 다방면에 이르렀다. 특히, 해안을 따라 자라는 큰 목재는 조선용(造船用)으로 중요시되어 보호되어 왔다.
왕실 또는 귀족들의 관재로 삼기 위해서 소나무숲이 보호된 바 있는데, 굵게 자라서 안쪽의 심재가 황적색을 띤 고급재로 유용한 것을 황장목(黃腸木)이라 하였다.
1420년 예조(禮曹)에서 “천자와 제후의 곽(槨)은 반드시 황장으로 만들며, 황장이란 송심(松心)이며 그 황심(黃心)은 단단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아니합니다. 백변(白邊)은 수습에 견디지 못하고 속이 썩습니다.”라고 한 대목으로 보아 소나무의 심재가 관재로 높이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온돌의 난방용으로는 소나무장작이 가장 뛰어났다. 이것이 삼림을 황폐화시키고 숲의 형질을 퇴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솔잎은 취사할 때 불의 힘을 조절하기에 가장 좋은 재료로서,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는 데에는 솔잎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름을 솔갈비라고까지 치켜올려 부르게 되었다. 숯에는 백탄과 흑탄이 있는데, 흑탄이 일반적인 것이었고 소나무가 원료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반면 소나무는 불이 나면 취약하다. 송진이 휘발성을가지고 오래 타서 불을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최근 울진 산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3. 도래솔
무덤가에 있는 나무를 구목(丘木)이라 한다. 그 중에서 무덤가에 둘러선 소나무를 도래솔이라고 한다. 대개 구목으로는 소나무를 썼고, 둥글게 심었으므로 구목과 도래솔은 동의어로 쓴다. 도래솔은 도래와 솔을 합친말로 솔은 소나무이다. 도래는 둥근 물건의 테두리를 말하는데, 둥근 모양을 한 사물에 붙여 사용하였다.
도래상, 도래샘, 도래방석, 도래함지, 도래뼈, 도래창 등등에서 용례가 보인다. 요즘 도래창을 조리하는 식당이 생겨나는데, 돼지 창자를 둘러싼 횡격막을 말하는데 돼지고기 특수부위이다. 곱창같은 모양새로 전체적으로도 둥글고 여러겹이 둥글둥글 말려 있는데 맛이 특별하다 하여 새로 주목받고 있는 음식이다.
도래방석은 짚으로 둥글게 짠 방석이고, 도래뼈는 팔꿈치의 동그스름한 뼈이다. 도래샘은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이고 도래상은 둥근상의 전남방언인데, 보통 두레반이라고 한다. 두레 또한 도래처럼 둥근 것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예기치 않은 횡재를 가리키는 '얻은 떡이 두레 반'이라는 말은 떡시루의 한 켜 떡인 두레 말고도 또 반을 더 얻었다는 말이다. 전을 둥글게 부쳐내면 '두레로 부쳐냈다'는 말을 쓴다.
도래도 둥근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능침 뒤의 곡장 주위에 둘러 심은 나무가 도래솔이다. 곡장(曲墻)은 무덤 뒤의 둥근 담을 말한다. 도래솔은 근처 숲과의 경계를 뜻하는 물리적인 의미가 있고, 망자에게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뜻하는 추상적인 의미가 있다. 이승을 돌아보지 말고 맘 편하게 저승으로 가시라는 후손의 배려가 담겨 있다. 또한 솔잎이 가진 방부의 기능과 관련하여 삿된 것을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벽사의 기능도 있다.
그래서 도래솔은 묘소를 지키는 지킴이지만, 망자에게는 친구같은 존재이다. 도래솔은 왕후장상에서부터 범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용하였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억하는 데 구체적으로는 도래솔을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래솔은 그 자체가 부모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래솔은 어떤 경우라도 잘 베어내지 않는다. 도래솔을 베어내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언이 있을 정도다. 조선 중기의 문신 도촌(道村) 강홍중(姜弘重 1577(선조10) ~ 1642(인조20))이 통신 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와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사행일록(使行日錄)인 동사록(東槎錄)에 보면 " 임진왜란 이후로 향화(香火)가 끊어지고 도래솔[丘木]도 모두 베어 민둥산이 되었으며 수호하는 사람도 없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부모님과 같은 구목, 혹은 도래솔을 베어다 써야 하는 정도로 피폐했던 임란 전후 사정을 말해준다.
하지만 보통 도래솔은 건강하게 잘 자란다. 숲에서 다른 나무들과 함께 치열한 경쟁을 겪지 않고 편히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햇빛을 좋아하는 소나무가 능 옆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햇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으므로 도래솔은 건강한 모습으로 굳건하게 능을 지켜낼 수 있다.
소나무는 국민나무, 친구나무, 죽어서도 국민이 친구가 함께 하니 망자는 외롭지 않고, 후손은 마음 편하게 망자를 대할 수 있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궁실(宮室)을 짓되 도래솔을 베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궁실 건축에도 도래솔을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아꼈고, 도래솔은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나무가 한반도 주요수종이 되면서 국민나무가 되고, 조선왕조를 거치면서 도래솔은 우리 풍속으로 완전히 자리잡아 우리의 문화가 되었다. 도래솔 속에 배인 조상들의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4. 예술작품의 소재 : 흥취의 대상, 삶에 대한 성찰의 계기
소나무는 첫째, 실생활에 필요한 물품이었다. 재목으로도 땔나무로도 썼고, 식품으로도 썼다. 이런 실용적인 목적을 넘어서는 흥취의 대상으로의 의미도 중요하였다. 아름다움으로 산수에 묻혀 사는 흥겨움을 선사했다. 또한 소나무는 삶에 위안을 주었다. 오랜동안의 시련에서 벗어나는 의지를 갖는 데 풍상을 겪어내는 소나무가 많은 위로가 되었다. 네번째로 소나무는 삶에 대한 성찰을 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윤선도(尹善道)의 <오우가(五友歌)> 넷째 수는 소나무 노래이다.
“더우면 곳 퓌고 치우면 닙 디거/솔아 너 얻디 눈서리 모다/구쳔(九泉)의 블희 고 줄을 글로 야 아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 모르는가?
구천의 뿌리 곧은 줄을 글로 하여 아노라.
소나무가 추위에도 잎이 지지 않는 것을 구천까지 박힌 뿌리가 곧기 때문이라고 했다. 눈서리를 모르는 솔의 불굴(不屈)을 절개의 상징으로 보았다. (조동일, 소나무가 하는 말, 세계 지방화시대의 한국학2, 계명대출판부 )
조동일은 이어서 소나무는 우리의 삶 자체이며 겨레의 나무라고 보았다. 이런 배경에서 위 인용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소나무를 고향, 소 등등과 함께 특별항목으로 설정하여 상세하게 고찰하였다.
알려진 소나무 한시를 한편 보자.
강세황, <돌벼랑의 위태로운 소나무>(姜世晃, <石壁危松>)
落落長松樹
巉巉亂石層
下臨幽磵曲
秋水晩踰澄
구불구불 길게 뻗은 소나무,
거듭 가파르게 포개진 바위.
그 아래 깊숙이 시내 감돌고
가을 물결 저녁에 더욱 맑다.
강세황은 한국 조선후기의 시인이고 화가였다. 소나무가 가지를 구불구불하게 뻗어 위태로운 곳에 가까스로 서 있어야 높이 평가했다. 소나무 아래에는 바위가 버티고 있고, 그 아래에는 보일듯 말듯 시냇물이 흘러 풍경이 잘 어울린 모습을 그렸다. 소나무와 그 주위 풍광에서 사람이 사는 자세를 되돌아보게 한다. (조동일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 인용)
강세황은 소나무 그림도 많이 그렸는데, <태종대> 송도기행첩(1757년), <산수도>(1788), <벽오청서도>, <청석담>, <비폭도>, 「과옹십취첩」중 <항점조어천성(巷占鳥語泉聲)> 등의 그림이 눈에 띈다.
대표적인 문인화가로서 특정 소재에 집착한 것은 아닌데, 삶과 사상을 그림과 문학작품에 담다보니 소나무도 자연스럽게 많은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그가 그린 소나무는 쭉쭉 뻗은 소나무, 구부구불 힘들어 보이는 소나무, 구부러졌지만 멋드러진 소나무 등등 다양한 모습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소나무의 모습이다. 소나무를 통해 인간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신라 진흥왕 때 솔거(率居)의 황룡사 「노송도(老松圖)」, 김홍도(金弘道)의 「송하취생도(松下吹笙圖)」,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는 소나무를 소재로 한 유명한 그림이고 화가이다. 사실 조선의 화가치고 소나무를 그리지 않은 화가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일상속의 나무이면서 어느 산에서나 쉽게 볼 수 있어 산수화를 그릴 때는 빠질 수 없었는데, 산수화를 그리지 않은 화원화가나 문인화가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나무는 그리기 어려운 소재라고 생각된다. 그냥 보기에도 전형적인 면모를 수렴해내기 어려운 만큼 스펙트럼이 넓은 시각적 이미지를 갖고 있어 어느 관점과 맞게 그려야 할지 어려울 거 같다. 그러다 보니 특히 전문적으로 접근하는 화가 아니면 조금은 회피하는 소재가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현대 화가 이호중, 사진작가 배병우는 각각 소나무를 전문적으로 그리고 찍어 널리 알려져 주목된다.
모든 화가의 소재에서 특정화가의 소재로 제한되어 온 것은 소나무 속담이 우리 생활속에서 밀려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소나무는 여전히 예술의 중요한 소재이다. 소나무의 다양한 모습은 그 자체로 다양한 인간과 환경의 모습을 반영한다. 우리에게는 사람이 소나무고, 소나무가 사람인 것이다.
5. 소나무 속담
피나무 껍질 벗기듯. -물오른 소나무의 속껍질을 벗긴다는 뜻으로, 겉에 두르고 있는 의복이나 껍데기 따위를 말끔히 빼앗거나 벗기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가랑잎이 버썩하니 솔잎도 버썩한다. - 분수에 넘게 남을 따라한다는 말.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고 한다. -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겨울이 다 되어야 솔이 푸르름을 안다. - <<논어>>(論語) “子曰 歲寒 然後 知松柏之後凋也”(<子罕>)에서 “세한이 닥친 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 속담으로도 쓰였다.
(등)굽은 소나무가 고향/선산 지킨다.
낙랑장송도 근본은 종자이다. - 훌륭한 사람도 처음에는 보통 사람들과 같지만 노력과 재질을 발휘하여 그렇게 되었다는 말. 또는 대단한 일이라도 그 시작은 아주 보잘것없었음을 이르는 말.
남산 소나무를 다 주어도 서캐조롱 장사를 하겠다. -남산의 소나무를 다 주어도 고작 서캐조롱 장사밖에 못한다는 뜻으로, 소견이 몹시 좁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못된 소나무 솔방울만 많다 -쓸데없는 것이 번식만 많이 한다는 말.
물 오른 송기 때 벗기듯 -물오른 소나무의 속껍질을 벗긴다는 뜻으로, 겉에 두르고 있는 의복이나 껍데기 따위를 말끔히 빼앗거나 벗기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배꼽에 노송나무 나거든 -사람이 죽은 뒤 무덤 위에 소나무가 나서 노송이 된다는 뜻으로, 기약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소나무가 말라 죽으면 잣나무가 슬퍼한다 -어떤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그와 가까운 사람이 함께 동정하며 서러워한다는 말.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도 기뻐한다 -가까운 동료나 친구 또는 자기편 사람이 잘되면 좋아한다는 말. 위 속담과 대조되는 말이다.
소나무에 잣 열리고, 고욤나무에 감 달릴까? - 불가능을 이르는 말이다.
소나무와 잣나무 밑에는 풀이 자라지 못한다. - 소나무가 메마른 곳에서 잘 자라므로 옛 문헌에 “소나무 아래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松柏之下 其草不殖)”라고 하였다.
솔 심어 정자라 -솔의 씨를 심어서 소나무가 자란 다음에 그것을 풍치 삼아 정자를 짓거나 또는 그것을 베어 정자를 짓는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여 성공하기까지는 너무도 까마득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솔방울이 울거든 -소나무에 달린 솔방울이 절대로 울 리 없는 것처럼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솔밭에 가서 고기 낚기 – 우물에 가서 숭늉찾는다와 비슷한 속담.
솔잎이 새파라니 오뉴월로 여긴다.
절로 죽은 고목에 꽃 피거든 -사람이 죽은 뒤 무덤 위에 소나무가 나서 노송이 된다는 뜻으로, 기약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정 떨어져 헤어진 남녀말고 솔뿌리 끈으로는 못 꿰매는 것이 없다.
이처럼 소나무 관련 다양한 속담이 일상언어 속에서 사용되었다. 생활 속의 나무였음을 보여준다. 이중에서 오늘날 언어 속에서도 계속 사용되는 속담은 얼마나 될까. 개화기까지는 매우 폭넓게 사용되던 속담이 일제강점기 문학작품에서는 현저하게 줄어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 후는 더욱 위축되었다. 일상어의 마르고 건조해진 면모를 거꾸로 확인할 수 있다. 속담의 빈자리를 어떤 언어가 채우고 있는지, 우리 생활과 사고는 어떻게 변모되어 왔는지 읽어낼 수 있다. 속담의 퇴화는 소나무와 우리 일상의 거리와 비례하는지 모른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선풍(1993), 민속과 문확에 나타난 소나무
박상진, 우리 나무의 세계2
이훈종, 소나무와 정서생활,
황재우, 춘양목,
박봉우(1993), 황장목과 황장목산,
조동일,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 외
관련 신문기사 외 다수
이 글은 <국민나무 소나무와 그 문화권> 세 편 중 한 편입니다.
1. 국민나무 소나무, 그 일상과 예술과 문화 : '한국문화 연경기언' 게시판
2. 나무 문화권 비교, 한국 소나무, 일본 삼나무와 유럽권 자작나무와 올리브나무 : '한국문화 연경기언' 게시판
3. 소나무 음식, 구황음식에서 국민음식, 귀족음식까지 : '음식문화 연경기언'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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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선교장 소나무
촬영 : 2023.2.23.
선교장 본채 뒤편 소나무
*활래정 앞 연못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