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변경선
김남권
순천만에 보름달이 뜨면
갈대가 일제히 달빛을 발라먹느라 분주해진다
사사삭 사삭, 사사사삭 사삭
밤손님 다녀가느라 숨죽인 자정 무렵,
나는 국경을 넘듯 몰래 경도180도의
슬픔변경선을 넘어
철새들이 잠들어 있는 갈대의 심장 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물고기들의 비밀 언어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갈대의 목울대 너머로 오억만 년 전
갯벌의 비릿한 숨소리가 끌려나온다
아버지가 걸어 왔던 진흙 밭도 그랬다
평생을 객지로 떠돌며
끊임없는 수렁 속으로 끌려 들어가
늪을 빠져 나오지 못한 채
그리니치 천문대로 향하는 사월의 슬픔변경선을
넘고 말았다
한 달에 한번 보름날이 되면
순천만에 뿌리를 둔 갈대들이
수인리의 선착장으로 몰려와
꽃등 하나 켜 놓고
사사삭 사삭, 사사사삭 사삭
물고기 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화엄경을 읽다/김남권
돌아서서 가는 그 사람의 등을 보았다
입술의 무늬보다
눈동자의 무늬보다
더 따뜻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로 굽이쳐 내려오는 어깨의 능선 아래로
세월의 무게가 구름처럼 걸려 있었다
경추를 지나 요추로 향하는 갈비뼈를 덮고 있는
단단하게 굽은
날개와 날개 사이로 오랫동안
참아온 슬픔이 덮여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정면으로 마주칠 때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사연들이
어느 날 나를 돌아서 가는 겨울처럼
쓸쓸한 뒷모습을 보다가 알게 되었다
그 허전한 등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무늬를,
말보다 깊은 경전을 혼자 써 내려가느라
다 닳아진 어깨를,
이순의 강을 혼자 건너오느라
툭, 툭, 불거진 울음주머니가
갈비뼈 마디마다
무디어가는 봉분처럼 숨어 있었다는 것을,
고요하게 들썩이며 잠든
그 사람의 등을 한 번 만져 보아라
법정 스님의 법문보다 더 깊은
화엄의 무니가 보일 것이다
프로필
2015년 시문학 등단, 이어도문학상 대상, kbs창작동요대회 노랫말우수상
(현) 문화예술창작아카데미 서울 대표
시집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외 다수
동시집 엄마는 마법사 외 다수
kng21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