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세보)의 기록은 모두 옳을까? 물론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기록은 모두 옳다고 믿고,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기록은 옳지 않다고 믿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 족보의 기록은 신뢰도가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것은 내가 지난 10여 년 동안 족보를 살펴 보고 얻은 결론이다. 물론 족보의 기록이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20세기(190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 한편, 조선 시대와 그 이전 시기에 활동한 인물들에 관한 기록도 사실인 경우가 많지만 그 내용이 의심스러운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족보의 기록(특히 옛날 조상에 관한 기록)은 세심하게 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반남박씨(潘南朴氏)라는 씨족의 대동(大同) 족보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1642년(조선 인조 20년)으로, 경상북도 영주(옛 이름은 榮川)에서 간행된 임오보(壬午譜)이다. 거기에 보면, 시조는 박응주(朴應珠)이고 그 후대가 박의(朴宜) - 박윤무(朴允茂) - 박수(朴秀) - 박상충(朴尙衷) - . . . . . 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사실일까? 족보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일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모든 족보의 기록은 신뢰도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족보의 모든 기록은 일단 의심해야 한다. 족보에 기록된 옛 인물들의 방주(傍註) 내용은 반드시 족보 외의 다른 어떤 객관적 문헌 자료를 통해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반남박씨족보(세보)도 예외가 아니다.
인물과 관련된 역사 기록은 과장되거나 왜곡된 경우가 매우 많다. 심지어 조작ㆍ날조된 경우도 흔하게 발견된다. 옛날 인물들의 이력(履歷)은 거의 대부분이 행장(行狀)ㆍ비문(碑文)ㆍ실기(實記) 등을 기본 자료로 삼아 기록된다. 잘 알다시피 행장이나 비문은 그 성격상 예외없이 찬사(讚辭)와 과장(誇張)된 표현으로 충만하다. 실기라는 것도 말이 '實記(실기)'이지 그 내용은 허황한 경우가 많아 '허기(虛記)'처럼 보이는 경우도 흔하게 나타난다. 심지어는 해당 인물의 후손들이 수 백년 뒤에 조작ㆍ날조한 것으로 의심되는 예들도 보인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거니와, 족보의 기록을 그대로 사실(진실)로 믿고 세상에 퍼트려서는 안 된다. 반드시 족보 외의 다른 복수(複數)의 믿을 만한 문헌 기록에 의해 검증해야 한다. 족보ㆍ호적ㆍ행장ㆍ비문ㆍ인물사서(人物辭書) 등을 비롯하여 『고려사』ㆍ『조선왕조실록』ㆍ『승정원일기』ㆍ『비변사등록』ㆍ『일성록』 등 공인된 역사 기록 문헌들도 함께 살펴 보아야 한다. 족보 외의 다른 자료에서는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옛날 인물들의 존재와 이력에 대한 믿음은 일단 유보해 두는 것이 옳은 태도일 것이다. 특히 19세기(1800년대) 이전에 활동한 인물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지금부터 반남박씨 최초의 대동보(大同譜)인 임오보(壬午譜: 1642년 간행) 이전에 활동했던 선조들의 실존과 이력을 족보가 아닌 다른 문헌 자료를 통해 검증해 보고자 한다. 반남박씨 1세(시조)로 알려진 호장공 박응주(朴應珠)로부터 대략 13세(世) 전후가 여기에 해당한다. 임오보 편찬ㆍ간행을 주도한 세대가 13세(박회무朴檜茂)와 14세(朴濠박호ㆍ박미朴瀰)였으므로 그 이후의 세대는 임오보 이후에 간행된 연속된 족보(세보)의 기록을 통시적(通時的)(종적縱的)으로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기록의 신뢰도를 어느 정도 측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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