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에서 진아까지 -불교 무아 개념의 형성과 전개
/ 김 종 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무아와 오온 3. 무아와 자성 4. 무아와 공 | 5. 무아와 알라야식 6. 무아와 여래장 7. 무아와 불성 그리고 진아 8. 맺는 말 |
【주제분류】불교철학, 중국철학
【주 요 어】무아, 진아, 자아, 불성, 진여
【요 약 문】
초기 불교에서 무아는 자아란 오온화합이라는 연기적 과정에 의한 가립태일 뿐 실체성을 지닌 아트만은 아니며, 이런 고정 불변의 실체성이 제거되었을 때 도리어 수행상의 증진을 도모할 수 있는 주체가 성립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후 설일체유부에서는 비록 연기는 하지만 그 요소들은 실재하고 이런 요소적 제법의 실유가 곧 무아의 입증이라고 본 데 반해서, 중관학에서는 바로 연기하기 때문에 모든 요소들은 실체적으로 실재하지 않으며, 이런 무자성의 공이 곧 무아의 바른 계승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유식사상에서는 일체의 유식성은 제법의 무아성을 밝히는 것이고 알라야식의 존재는 곧 자아의 비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비해서, 여래장사상에서는 여래의 본성인 법성과 공성과 무아성이 자각될 가능성이 우리 내면의 심성에 잠복해 있다고 하여 여래장의 존재로써 무아를 입증하였다. 그런데 여래장을 불성개념으로 대체한 중국 불교에서는 불성을 인성화․본체화하여 불성아(佛性我)를 진아라고 했지만, 불성의 내용이 법성과 공성과 무아성을 함축하는 이상, 진아는 실체아나 아트만의 인정이라기보다는 즉사이진(卽事而眞)이라는 중국적 현실주의의 긍정론에 맞추어 무아를 재해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진아는 아트만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인성론과 심성론과 본체론의 융합이라는 중국적 사유 구조에 맞추어 불성과 일심과 진여가 통합된 개념으로서 무아의 중국화된 표현인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나 또는 자아는 인간을 탐구하고자 하는 철학의 영원한 테마이며, 우리의 일상적 삶의 준거점이다. 이런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불교라고 여겨졌을 때,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해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무아(無我)는 일체 존재자(諸法)가 지닌 세가지의 기본적 특징(三法印)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인도 정통 철학의 아트만론과 대비되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으로서 불교 사상의 핵심이다. 본 논문은 불교 사상의 핵심인 무아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개되어 후대 중국 불교에 이르러 진아(眞我) 개념의 등장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또한 이런 탐문의 과정을 통해서 무아가 오온(五蘊), 자성(自性), 공(空), 알라야식(識), 여래장(如來藏), 불성(佛性) 등 불교의 주요 개념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가 밝혀지게 될 것이다.
2. 무아와 오온
초기 불교에서 삼법인이 지닌 의미는 무상과 무아의 이치를 알지 못해 집착과 망상을 일으키면 괴로움을 낳지만, 그 이치를 확연히 깨우쳐 집착과 망상을 여의면 곧 청정한 열반에 이른다는 점을 제시하는데 있다. 이점은 법구경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서도 확인된다.
제행(諸行)은 무상(anicca)이라고 지혜에 의해 볼 수 있을 때, 거기에서 곧바로 고(dukkha)를 멀리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청정(visuddhi)에 이르는 길이다.
일체법(一切法)은 무아(anattan)라고 지혜에 의해 볼 수 있을 때, 거기에서 곧바로 고를 멀리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이처럼 무상과 무아를 아는 지혜가 고와 열반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는 이상, 무상과 무아의 이치야말로 이고성불(離苦成佛)이라는 불교의 목표를 구현하는데 관건이 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무상(無常, 팔리어 anicca, 범어 anitya)은 ‘배후에(ni) 놓인 어떤 영원 불변할 것(nicca)에 대한 부정(a)’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는 영원 불변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로서, 끊임없는 변화와 덧없이 사라짐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에 비해 무아(無我, 파리어 anattan, 범어 anātman) 사상은 상주(常住)의 아(我, ātman)가 있다고 주장해 내려온 전통적 인도철학사상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으로서, 우파니샤드와 불교의 차이는 이 아트만의 인정과 부정에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도철학은 아트만론(ātmavada)의 정통사상과 반아트만론(anātmavada)의 비정통 사상으로 크게 대별된다.
그런데 이 아트만은 그 연원이 베다 시대에까지 소급되는 무척이나 오래된 개념이다. 베다(Veda) 시대에는 인간이 죽을 때 몸을 버리지만, 그 몸을 버린 뒤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그 자신을 계속한다는 뜻을 나타내던 마나스(manas)와 아수(asu)라는 개념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브라흐마나(Brahmana) 시대에 들어서면서 아수는 프라나(prāṇa)로 대치되어, 죽지 않는 영원불변의 참다운 주체의 뜻을 나타나게 되고, 마나스는 그 중심이 마음의 모든 기능을 통일 제어하는 ‘나’, 즉 아트만에 있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그런데 아트만에는 본래 ‘숨’이라는 뜻이 있어 프라나의 의미를 이미 갖고 있었으므로, 프라나는 아트만에 흡수되고 만다. 그리하여 원래 생명의 근원이 되는 ‘호흡’을 뜻하던 아트만은 이제 인간의 본질로서 상주하는 영원한 존재로 격상된다. 인간의 본체인 이 아트만이 전 우주의 근본 실재인 브라흐만(brahman)과 동일하다는 이른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우파니샤드의 핵심이다.
그런데 붓다는 이런 아트만의 존재에 대한 믿음 속에 내포된 문제점들을 깨닫고, 그런 개념을 어리석은 견해라 하였다.
수행자여, 자아 가운데 어떤 영원한 것이 발견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느니라. … 수행자여, 자아나 자아를 유지하는 어떤 것을 진실로 확실히 찾을 수 없을 때, “세계는 아트만 바로 그것이다. 나는 죽은 후에 영원하고 상주 불변하는 그것이 될 것이며, 거기서 영원한 것으로 지속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견해가 아닌가?
그리하여 붓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으로 아트만을 비판하였다. 첫째, 붓다는 열반을 추구함에 있어 무집착의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아트만에 대한 집착 가능성을 제거하고자 했다. ‘나’를 실체적이고 불변적인 아트만(자아)으로 간주하는 이상, 우리는 그 ‘나’에 집착하여 그것에 반하는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게 되고, 이로 인해 아트만은 과도한 욕망과 증오와 고통을 낳는 근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붓다는 아트만 개념이 지닌 그 비논리성을 지적하였다. 즉 순수하고도 고상하며 영원한 것[→아트만]이 어떻게 육체와 같이 순수하지도 못하고 천하며 덧없는 것과 결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셋째, 붓다는 아트만을 인정할 경우 수행의 증진을 보장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수행을 통해 점점 나아져 간다는 것은 점차 변화해 간다는 것인데, 어떤 변화가 와도 요지부동한 아트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불변적 자아로 인해 수행상의 변화가 불가능하게 되고, 정신적 수행 생활 자체가 모든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오온무아설(五蘊無我說)이 주장되기에 이른다. 오온이란 색(色, rūpa, 물질적 존재), 수(受, vedanā 감각작용), 상(想, saññā 표상작용), 행(行, saṅkhāra 의지작용), 식(識, viññāṇa 사유식별작용)의 다섯가지 기능을 말하는데, 이 오온은 마치 비파의 소리가 모든 부분이 한데 모여져서 적당한 위치 관계에 있음으로 해서 울리는 것처럼, 인연에 의해 얽혀지는 관계에 있을 때에 비로소 아(我)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오온은 그 각각도 인연화합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각각의 온들은 서로를 인과 연으로 하여 존재하므로, 오온에 있어서는 부분적으로도 또 전체적으로도 고정 불변의 실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나라는 것은 오온가합(五蘊假合)이라는 상관관계의 총화로서 잠정적 가합태에 불과할 뿐,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따로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치 수레가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의 집합에 불과한 것과 같이, 인간은 단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기능적 존재들의 집합체로서, 그것들이 ‘자아처럼 보이는 것(pseudo-individuality)’을 구성하고 있을 뿐, 그 요소들을 떠나서는 수레도 인간도 그리고 자아도 관념상의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색수상행식의 오온을 사람․중생․푸드갈라 등으로 부르면서, 보고 듣고 분별하는 나 또는 자기동일적인 나가 존재한다는 관념을 일으킨다. 그러나 보고 듣고 분별하는 일상의 자아는 언어 활동상 임시로 시설된 것이고, 상일주재하는 자아란 단지 오온으로부터 얻어진 헛된 관념일 뿐이다. 이렇게 상일주재적 자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無我]을 말하기 위해, 오온은 그러한 자아가 아니라는 것[非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anātman을 비아(非我)로 읽으면서, 무아가 이면의 진정한 궁극적 자아를 용인하는 것인 양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오온무아설의 불교가 결코 경험적 의미에서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떠한 궁극적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붓다가 영원한 본질적 실체를 부정한 이유는 자신의 입장이 도덕 의식과 업의 영향력 강조에 있었기 때문인데, 전혀 변화가 불가능한 영원 불변의 자아가 있다면 우리의 정신 생활이 모든 의미를 상실케 되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좀 더 나아지거나 혹은 못해지거나 하지 않게 되고, 결국 이것은 우리를 나태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행을 통해 종전과 달라지기 위해서도 수행의 주체가 실체화되어서는 안 된다.
“세존이시여, 누가 취착합니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와 같은 질문은 옳지 않다. 나는 ‘누가 취착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무엇을 조건으로 취착이 일어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해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난다’라고 답변하는 것이 옳다.”
‘취착하는 자’ 또는 ‘갈애하는 자’와 같은 주체는 인연화합에 의해 잠정적으로 그 기능을 이행하는 자일 뿐, 고정된 실체와 같은 주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가 이렇게 실체가 아닐 때 집착에서도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무아의 참뜻은 자아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가 통상적으로 자아라고 알고 있는 그것이 실체가 아닌 가립태일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는데 있는 것이며, 일상적으로 경험되는 나 혹은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일상적 자아의 올바른 실상이 오온가합임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첫댓글 無我 - 無我에서 眞我까지
고맙습니다
늘 평안하시고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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