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Israel)
1. 일반사항
(1) 국명
- 이스라엘 State of Israel(Israel)
[참조] 이스라엘 유래
아래 야곱이 바로 유대인들의 선조 '이스라엘' 이며, 훗날 유대인들은 그의 이름을 따 자신들의 국가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불렀다.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었다. 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묻자, “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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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도
예루살렘(Jerusalem) 예루살렘 지위 문제에 대해 논란이 있으며, 미국과 과테말라 대사관은 예루살렘에 소재하고 여타 국가들의 대사관은 텔아비브 또는 인근에 소재
(3) 인구
- 959만명 ('22)
(4) 면적
- 2만 770㎢ (1967년 이후 점령지 제외)
(5) 언어
- 히브리어(공용어), 아랍어(공용어), 영어
(6) 종교
- 유대교(75%), 이슬람교(17.7%), 기독교(2.0%), 드루즈(1.6%), 기타(3.9%)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관련, 유엔 안보리 결의는 서안 지역(West Bank) 및 가자 지구(Gaza Strip)를 점령지역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국제사회가 지지하는 '두국가 해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정치적 협상을 통하여 두 개의 국가로 평화공존하는 상태를 목표로 함
- 우리 정부는 현재 팔레스타인에 대해 국가승인을 하지 않은 상태이나, 2006년 서안지역내 라말라(Ramallah)에 대표사무소 설립
2. 정치현황
(1) 정부형태 - 의원내각제
(2) 주요인사
- 대통령 : Issac Herzog(이츠하크 헤르초그)
- 총리 : Benjamin Netanyahu(벤야민 네탄야후)
(3) 의회구성 - 단원제(120석)
3. 경제현황
(1) GDP - 4885억$ ('21)
(2) 1인당GDP - 4만 4339$ ('21)
(3) 화폐단위
- NIS(New Israeli Shekel) (1$=NIS 3.5) ('21.9)
(4) 교역 : '21
- 수출액 : 701억$
- 수입액 : 916억$
- 수출품목 : 하이테크 산업, 방산품
- 수입품목 : 투자재, 원자재, 소비재
4. 우리나라와의 관계
(1) 외교관계
- 1962.04.10. 수교
(2) 공관현황
- 1993.12.27. 주이스라엘 한국대사관 개설
- 1992.1.9. 주한 이스라엘대사관 개설
(3) 투자현황
- 對이스라엘-1.04억불(49건), 對한국-1.6억불(109건)
(4) 교역 : '21
- 수출액 : 18억 2400만$
- 수입액 : 16억$
- 수출품목 : 자동차, TV, 합성수지 등
- 수입품목 : 반도체 제조용 장비, 항공기부품
(5) 교민현황 : 500명('21.3)
5. 국기
■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된 제1회 시온주의 의회에서 채택되어 시온주의를 상징하는 깃발로 사용
■ 흰 바탕에 파란 가로띠는 유대교에서 기도 시 사용하는 숄인 ‘탈릿’의 문양이며, 중앙에 위치한 6각 별 모양은 고대 이스라엘 다윗왕의 방패에서 유래하여 유대교와 유대인의 대표적 상징
[참조 1] 탈릿(탈리트) 탈리트, 탈릿(히브리어: טַלִּית tallit[1], 기도보)는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덮어 쓰는 종교적인 옷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탈리트를 입고 기도를 한다. 탈리트는 기도 시에 외부와 차단하여 깊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침 기도(Shacharit), 욤 키푸르(Yom Kippur) 기간 중에 기도할 때에 입는다. |
[참조 2] 시오니즘 1. 시온 - 시온(Sion)이란 원래 예루살렘 남동부에 위치한 언덕의 이름이었다. 다윗이 계약의 궤를 이곳에 옮기고 제단을 쌓은 이래, 이곳을 “야훼의 거룩한 산”이라 불렀다(2사무 6,12-18; 시편 2,6). 그 후 솔로몬이 세운 모리아 산의 성전까지도 시온이라 하였다(이사 18,7). 그런데 그 후 시온은 상징적으로 “예루살렘”을 의미하였으며(시편 48,2; 이사 2,3), 이는 야훼의 도시로서 예루살렘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시온의 딸”이라는 성서적 표현법은 “예루살렘의 시민”이나 “유다의 신정(神政)”을 뜻하기도 하였으며(시편 126,1; 이사 34,8), 신약 시대는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도성”을 의미하였다(히브 12,22; 묵시 14,1).
2. 시오니즘 - 시오니즘(Sionism)은 19세기 말에 일어난 유다 민족의 국가 건설 운동이다. 흩어져 살던 생활을 청산하고, 조상들이 살던 곳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1948년 팔레스타인(팔레스티나) 지방에 테오도르 헤르츨(T. Herzl)에 의해 이스라엘이 건설되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임을 주장하면서, 대표자(시오니스트)회를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하였다. 그 후 유다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여, 1920년 영국의 위임 통치를 받다가, 1947년 국제 연합에 의해 유다인 국가 건설이 결의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1948년 이스라엘 독립 국가가 서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던 아랍 민족과 심한 대립을 물론 마찰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데에 있다. 이는 오늘날 중동 전쟁의 불씨가 되었고, 이곳은 세계의 화약고가 되었다. |
예루살렘은 세계 3대 유일신교인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거룩한 장소이다. 기원후 1세기의 로마 지리학자인 원로 플리니우스는 예루살렘을 “고대 동방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로 묘사한다. “거룩한 도성”(이사 52,1)이며 “세상의 중심”(에제 38,12)인 예루살렘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역사가 펼쳐진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다.
6. 예루살렘의 지리
예루살렘의 히브리어 이름은 “평화의 도시”, “평화의 터전”이라는 의미를 가진 예루샬라임이다. 구약성경에서 예루살렘이 처음 언급된 것은 여호 10,1인데, 그 외에 “아리엘”(이사 29,1), “오홀리바”(에제 23,4), “주님의 도성”(이사 60,14), “도성”(예레 32,24; 에제 7,23), “야훼 삼마”(에제 48,35), “살렘”(시편 76,3), “모리야”(창세 22,2), “여부스”(여호 18,28), “시온”(2열왕 19,21), “다윗 성”(2사무 5,7), “거룩한 도성”(느헤 11,1; 마태 4,5)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제2차 유다 봉기를 진압한 하드리아누스 황제(117년-138년)는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불렀다.
예루살렘은 팔레스티나의 중앙 산악 지대에 위치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헤브론, 베들레헴, 예루살렘, 베텔, 사마리아 등이 이 산악 지대에 있었다. 해발 640-770m의 석회암 고원에 자리 잡은 예루살렘은 유다 산악 지대에 위치한다. 산위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라고 표현한다. 지중해의 텔 아비브(Tel Aviv)로부터 약 50km 떨어진 예루살렘의 서쪽에는 유다 지역의 산들이 있고 동쪽으로는 사해(Dead Sea)로 내려가는 유다 광야가 있다. 예루살렘의 산등성이들은 군사적인 장점으로서 이 도시를 보호하여 군사 요충지가 되게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무역에는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사실 팔레스티나의 주요 무역 중심지는 산악 지대가 아니라 지중해 해안 평야 지대에 위치하였다.
7. 예루살렘의 역사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구석기 시대의 거주지가 발견되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19세기의 이집트 문헌에 언급된다. 여호 10장에 따르면 여호수아는 아모리족의 다섯 임금을 처형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예루살렘 임금 아도니 체덱이 있었다.
창세 14,17-20은 크도를라오메르에게서 승리를 거둔 후 아브람이 소돔의 임금과 멜키체덱을 만난 이야기이다. 여기서 멜키체덱은 살렘의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로 소개된다. 멜키체덱은 아브람에게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왔고 그를 축복하고, 하늘과 땅의 창조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리고 아브람은 멜키체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사실 고대 근동에서는 임금들이 사제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후대 전승에 따르면 창세기 본문의 살렘은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창세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모리야 땅에 있는 어떤 산으로 간다. 2역대 3,1에 따르면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곳은 “모리야 산”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마련하신 숫양을 번제물로 바치고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창세 22,14)라 하였다.
기원전 1000년경 다윗은 여부스족이 차지하고 있던 시온 산성, 곧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다윗 성이라 하였다.(2사무 5,6-10) 예루살렘은 유다 지파의 영역 안에 있어서 다윗 왕조의 정치적 안정을 이루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다윗은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김으로써 왕조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윗은 판관 시대 말에 필리스티아인들에 빼앗겼다 되돌려 받은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정치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중심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에 계약 궤를 모셨다.(1열왕 8,1-30) 이것은 다윗이 시도했던 종교적 수도로서의 예루살렘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솔로몬은 궁전과 성벽 등 많은 건축물들을 지어 예루살렘이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남 왕국과 북 왕국이 분열되었다. 남 왕국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수도는 예루살렘이었다. 남쪽 유다 왕국은 북 왕국 멸망(기원전 722년경) 후에도 존속했다.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을 초대 임금으로 20명이 왕위를 계승하여 남쪽 유다 왕국을 지배하였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은 바빌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기원전 604-562년)에 의하여 사상 유례 없는 침략의 고통을 당해야 했다. 치드키야 임금은 바빌론에 굴복하라는 예레미야의 충고에도 불구하고(예레 27-29장), 이집트를 의지하면서 바빌론에 반기를 들었다.(2열왕 25,1) 그러자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는 기원전 588년 유다 왕국을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일 년 반 동안 포위하고 함락시켰다. 바빌론은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완전히 파괴하였으며 전 유다 왕국을 황폐화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바빌론 유배는 기원 539년경까지 계속되었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임금이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바빌론의 포로들을 해방시키는 칙령을 발표했다.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유다인들의 당면과제는 바빌론 제국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었다.(에즈 1,1-4) 성전은 기원전 515년에 다시 세워졌는데, 이것을 제2 성전(Second Temple)이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재건된 이후 기원후 70년 이 성전이 로마 제국에 의해 파괴되기까지의 기간을 제2 성전시대라고 한다.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23년에 사망)은 지중해 주변과 중근동에 대대적인 정복 사업을 벌였다. 그는 자기가 정복한 지역에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를 널리 퍼뜨리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 문화와 동방의 문화가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생겨난 것이 바로 헬레니즘이다.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팔레스티나를 점령하였다. 그가 죽은 후 팔레스티나는 기원전 320-200년경 사이에는 프톨로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고, 기원전 200-164년경 사이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대에는 유다이즘과 헬레니즘 사이의 다양한 문화적 충돌이 일어났다. 기원전 166년에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이 셀레우코스의 임금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마카베오 항쟁이다. 유다 마카베오는 기원전 164년에 예루살렘을 되찾고 성전을 정화하였다. 마카베오 가문은 하스모니아 왕조를 세웠다.
하스모니아 왕조를 정복한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이 로마 시대는 세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히르카누스 2세(기원전 63-40년) 하의 속국 단계, 헤로데 가문의 통치 단계(기원전 37-기원후 6년), 그리고 로마의 직접 통치 단계(기원후 6-66년) 등이 그것이다. 기원후 66-70년에는 로마 제국에 대항한 제1차 유다항쟁이 일어났는데,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 132-136년의 제2차 유다항쟁도 로마 제국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다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천주교 광주대교구
남동 5.18 기념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