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나는 모자를 좋아하고 즐겨한다.
시장에 갈때나 친구들과 만남을 할때도 모자를 쓴다. 여행갈때는 모자를 여벌로 넣고 갈때도 있다. 장소에 따라 모자를 바꿔쓰면 여행의 멋도 즐거움도 달라진다.
예쁜 모자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방학이었다.
달랑 세 가구밖에 살지 않았던 외딴 산골에 이웃 집으로 놀러온 도시의 아이들이 있었다. 하얀 얼굴에 물방울 무늬 원피스. 맹꽁이 운동화. 하얀 모자를 쓴 아이들은 마치 동화속에 나오는 공주님들 같았다.
예쁜 원피스 운동화 다 부러웠지만 하얀 모자를 제일 써 보고 싶었다. 아이들은 시골생활과 촌스런 소녀의 모습이 신기한것 같았다. 보리쌀을 씻으러 우물에 갈때도 참외밭 원두막에 갈때도 졸졸 따라 다니며 이것 저것 물었다. 나도 도시에 아이들의 생활이 궁금했다.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엄마 몰래 옥수수와 토마토를 선물하기도 했다.
헤어질 무렵에는 서로가 선생님과 친구들 부모님에 이야기까지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래도 헤어질때까지 그 이쁜 모자를 한번 써 보자는 말은 하지 못했다. 즐거운 여름 방학이 끝나고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정이 많이 들었는지 아이들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어머니에게 그 친구들이 쓰고 있던 하얀 모자를 사 달라고 떼를 썼다.
하지만 오일 장날 마다 어머니 손에는 빈 광주리와 동아리만 들려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 취직을 한뒤 여름휴가 준비로 생전 처음 모자를 샀다. 설레는마음으로 모자를 쓰고 거울을 보았다. 처음 써서 그런지 낯설어 보였다. 챙을 올렸다 내렸다가 밤 늦게까지모자와 씨름을 하였다.
한탄강으로 친구들과 함께 피서를 갔다. 모두가 내 모자만 바라보는것 같은 착깍을 하였다.
결혼후 첫 임신을 하여 유아 용품 가게에 들렸다.
제일 먼저 눈에 띤 것은 앙증 맞은 아기 모자였다.
첫 딸이 태어나자 사 놓았던 핑크색 모자를 씌워서 안고 다녔다. 아장 아장 걸음마를 할 무렵에는 노란 우주복에 노란 모자를 씌워 손잡고 온 동네를 누볐다. 노랑 병아리 같은 아기를 보며 동네 아줌마들이 모두들 이쁘다고 찬사를 보냈다. 둘째로 태어난 아들에게도 모자를 씌웠다. 누나가 쓰던 것을 씌우기도 하고 귀여운 야구 모자를 새로 사서 씌우기도 했다.
아들이 유치원을 다닐 무렵 아이들을 데리고 친척들과 올림픽 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넓은 공원을 돌며 조각품들을 구경하다가 다리가 아파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두 동생들과 열심히 수다를 떨다 보니 아들이 쓰고 있던 모자가 없어 졌다. 가족들을 동원하여 공원을 몇 바퀴나 돌았지만 아들의 모자는 찾지 못했다. 얼마나 앙통하던지 어린 아들에게 바보같이 모자를 잃어 버렸다고 마구 화를 냈다.
딸은 대학생이 되면서 모자를 잘 쓰지 않았다. 유럽 여행을 갈때는 옷가지와 함께 모자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때 모자를 좋아 했다.
등교길에 저 만치 가다가도 다시 돌아와 야구 모자를 찾았다.
아들도 크면서 모자를 쓰기를 귀찮아 했다. 대학생이 되어 M.T 를 가는 아들에게 모자를 건냈더니 그냥 나가 버렸다.
충청도 고향집에 내려 갈때마다 나와 아이들은 모자를 썼다. 고즈넉한넓은 들판에서 모자를 쓰고 농사일을 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대청 마루에 놓여 있는 친정 아버지의 낡은 밀집 모자를 보았다. 다음에 올때는 시원한 모자를 사다 드려야지. 마음 먹었지만 번번이 잊어 버렸다. 아버지가 천국 가신후 생전에 사용하셨던 소지품들을 태웠다. 케케한 냄새가 나는 구멍 뚫린 밀집모자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가끔 친구들과 남대문 시장에 갈때마다 쇼핑 코스에서 빼놓지 않는 곳은 바로 모자 가게였다. 경제 사정으로 자주 사지는 못했다. 다양한 모자들을 써보기도 하고 구경하는 재미는 솔솔했다.
어떤 선물보다 모자 선물을 받을 때가 즐겁다.
고향 친구로 부터 털실로 직접 뜬 아이보리색 모자를 받았을때 기뻤다. 나 역시 지인들에게 모자를 선물 할 때 가 있다. 내가 준 모자를 멋지게 쓰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뿌듯했다.
언제부터인가 모자를 쓴 사람들을 만나면 판단하는 버릇이 생겼다. 얼굴형에 맞는 모자를 쓴 사람을 보면 참 멋지게 썼네 라고 했다.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모자를 쓴 사람은 조언해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얼굴이 동그란 사람은 벙거지형 모자가 어울리고 갸름한 사람은 야구 모자가 어울렸다.
텔레비젼을 시청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모자 쓴 모습들을 보았다. 영국 여왕의 모자를 쓴 모습은 품위가 있었다. 죄수들이 경찰에 끌려 가면서 모자를 푹 눌러 쓴것은 추해 보였다. 연예인들의 모자 쓴 모습은 언제 봐도 멋이 있었다.
의학 정보에 의하면 모자는 건강에 도움을 준다고 했다.
여름에 모자를 쓰면 햇빛을 가려서 피부를 보호해 주고 겨울에 쓰면 노인들의 중풍도 예방할수 있다고 했다. 외모도 멋지게 꾸며주고 헝쿨어진 머리도 감추어 주는 편리한 모자, 건강까지 챙겨 준다니 참 고마운 친구다.
군대 간 아들에게서 가족 사진을 보내 달라는 편지가 왔다.
잘 찍힌 사진을 고르느라 사진 첩을 뒤지다 보니 두 아이 머리에는 언제나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그런데 어린이 답지 않게 웃는 모습보다 골이 나 있는 사진들이 많았다.
쓰기 싫어하는 모자를 억지로 씌웠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모자를 가지고 쓰라커니 안 쓴다커니 싸움하던 옛 추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괴롭힌것 같아 미안 하기도 했다.
모자를 쓴 꼬마 아들의 사진들을 보면서 건강히 잘 자라 입대한 아들이 정말 고맙고 감사했다.
아들에게 보낼 편지봉투 속에 입대하기 전 가족 여행때 찍은 사진을 넣었다. 지금 쯤 고되게 훈련하고 있을 아들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겁다.
며칠이 지나면 군인 모자를 쓴 씩씩한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