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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조선의 베스트 셀러이자 또 불온서적이 됐었던 책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무슨 책일까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불온서적?
원동연/영화제작자: 불온서적이라면 남녀간의 찐한 사랑 이야기 아닌가요?
최원정: 역시 흥행을 아시네요?
임윤선/변호사: 그게 아니라면 생각할 수 있는 게 국보법 위반에 해당하여 현재 정권에 위협이 될만한 불온한 정감록? 뭐 이런 예언서 같은 게 아닐까요?
원동연: 진짜 저 영화 좋아했죠 <스캔들> 영화…
18세기 한양에 소설열풍이 불자 소설책을 빌려서 베껴주는 새 책집까지 등장했는데…
내가 찾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사대부들 사이에서 최고의 베스트 셀러는 다른 아닌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였다.
최원정: 자, 영화, 스캔들의 한 장면을 보셨습니다. 열하일기가 남녀 당연지사를 다룬 책은 아니잖아요?
최태성: 열하일기는 일종의 기행문이에요. 박지원이 1780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에 갔다와서 집필해서 쓴 책인데 청의 어떤 풍속이나 지리 인문 이런 것들을 다 잘 적어 놓은 기행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면, 이게 26권 10책, 열하에 갔다와서 이렇게 많이 쓰셨네. 오늘날과 개념이 좀 틀린데 권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단편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 단편들을 딱딱딱 끼운 다음에 하나로 뚝 묶어서 나온게 이게 1책이 되는 거예요.
원동연: 그런데 무슨 일기가 이렇게 방대해요? 그러면 보통 베스트 셀러가 되려면 방대하면 어려울 것 같은데, 무지하게 재미있나봐요.
임윤선: 한꺼번에 쓴 게 아니라 하나를 냈는데 너무 인기가 좋아서 그래서 두번째 또 냈어요. 또 여전히 인기가 좋아 세번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얼마나 인기가 좋았어요.
최태성: 열하일기 1편, 열하일기 2편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그렇지는 않고요. 한번에 썼는데, 메모를 해 와서 쓴 거죠. 단순히 여행기가 아니라 정말 날짜별로 그날 있었던 일을 굉장히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중국에 다녀오면서 보고 들은 것, 학자들과 필담을 한 것, 또 자기의 생각까지 적는데 이것이 내용도 아주 풍부하고 조선 사람들이 볼 때는 굉장히 신기한 이야기 잖아요. (열하일기의 내용-①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견문록 ②학자들과의 筆談 ③ 연암 박지원의 생각). 여기에 연암 박지원의 독특한 통찰력이 있어요. 그래서 이것은 정말 간행을 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베껴서 커진 거예요. (출판하기도 전에 필사본이 유출된 열하일기).
원동연: 얼마나 재미있길래 필사본이 돌아다닐 정도였다면, 예를 들면 영화로 치면, 우리 극장 개봉하기도 전에 파일이 유출되어 가지고 여기 저기 파일이 막 돌아다니는 거지요.
최원정: 도대체, 열하일기의 인기비결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교수님?
김문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분이 굉장히 해학적인 분이에요. 웃기기도 좋아하고 제가 기억하는 장면이 북경에 가는 도중에 술집에 갔는데 거기에 덩치가 큰 몽골 사람이 있는 거예요. 몽골말로 통하지를 않으니까 그런데 술을 마시는데 호기롭게 고량주 있잖아요? 큰 사발로 딱 마시니까 그러니까 저쪽에서 술 잘 마시면 하오하오 하잖아요. 좋은 사람(好人)이라는 거죠. 그래서 기싸움 벌리는 이런 장면도 일기에 써놓았어요.
최원정: 사람 자체가 굉장히 재미있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사흘 동안 누굴 웃기지 못하면 옆구리가 시리더라고 할 정도로, 게다가 술도 잘 드시고 약간 이런 분이 현재 존재한다면 여기 모셔놓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렇죠?
임윤선: 그런데 북경 얘기도 아니고 굳이 꼭 집어서 열하일기 라고 했는데 의문이에요.
최태성: 열하 열하 얘기하고 있는데 열하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시죠? 중국지도 A, B, C, D에서 열하가 어디인지 찾아보시죠.
최원정: 4지선다형 진짜 싫어요~
원동연: 홍콩쪽 C 아니예요 더워서 열하?
최원정: 남쪽일 것이다.
이익주: 아무리 그래도 C가 홍콩은 아닐 것이다.
임윤선: 저는 아까 선생님 말씀하신대로 힌트를 얻었어요. 아까 몽골인을 마주쳤다고 하였거든요.
최원정: A 아니면 B 예요?
최태성: 정답은 바로 B 입니다.
원동연: 제일 북쪽이에요?
최태성: 열하가 하북성 북부의 승덕[承德]이란 곳인데, 박지원이 바로 저기를 갔다와서 쓴 게 바로 열하일기가 되겠습니다. (열하[熱河)-하북성 북부에 위치한 도시 지금의 승덕[承德]).
최원정: 그렇다면 박지원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최태성: 지금 박지원의 이력서 나왔습니다. 호는 연암, 본관이 반남 박씨예요. 박지원의 8촌 형에 박명원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영조의 딸 화평옹주의 남편입니다. 그러니까 정조의 고모부가 되는 거지요. 한마디로 얘기하면 왕가와 연결되어 있는 로열 패밀리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분이 참 특이하신 분인데 영조 때 1차 과거시험을 보세요. 장원급제해요. 그럴 수 있어요. 문제는 뭐냐 하면 2차 때 백지 답안지를 내신 분이에요.
최원정: 왜 백지 답안지를 냈을까요?
최태성: 굉장히 중요한 시험인데, 인생이 걸린 시험인데 왜 백지 답안지를 냈을까요?
최원정: 시험 전날 과음?
원동연: 세상에 불만이 많았다? 불만이 있으면 머리 박박 깎고 백지 시험지 내고? 고등학교 때 그랬거든요.
임윤선: 그러면 1차는 왜 봤어요?
김문식: 과거에 뜻이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2차 시험에 백지를 냈다는 것은 집안의 기대로 1차 시험까지는 가봤지만 2차 시험부터는 뜻이 없다는 것이고, 이게 19세기 까지는 세도가의 한 집이에요. 아주 유명한 집안이구요. 그런데 본인은 특히 정조를 떠받쳤다가 홍국영과 갈등이 있었구요. 그래서 과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는 정신이 강했고,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에 있는 연암협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은거하고 있다시피했는데 44세가 될 때 8촌 형이 중국에 연행사의 정사가 되신 거죠. (子弟軍官-외국에 보내는 사신의 子弟를 군관으로 임면). 그래서 자제군관으로 수하 군관으로 참여를 하게 되구요. 44세라는 늦은 나이에 그렇게 꿈에 그리던 북경을 가게 되는 거지요.
최원정: 제가 44세이에요. 그러니까 제 나이 때 간 거네요.
최태성: 존재감을 참 잘 찾으시네요.
최원정: 져야 지금 쌩쌩하지만 당시 마흔넷은 좀 나이가 있으신 게,
원동연: 그렇게 쌩쌩하진 않아요.
최원정: 박지원은 마흔네살 때 손자도 있었데요!
이익주: 박지원 보다는 훨씬 쌩쌩합니다.
원동연: 저희가 지난 시간에 일본에 간 사람은 통신사라고 해서 배웠는데 그런데 연행사는 처음 들어보거든요.
이익주: 연행사는 말 그대로 연경에 가는 사신입니다. (燕行使-연경(燕京)(지금의 북경)에 가는 사신). 연경은 지금 북경의 옛날 이름이에요. 원래 조선 전기에 명나라 수도가 북경이었는데 그때는 연행사라고 하지 않고 조천사(朝天使)라고 했습니다. (명나라에 보내는 사신 朝天使). 天子(하늘의 아들)의 궁궐에 조회가는 사신 그런데 조선후기 사람들이 淸(오랑캐 청) 나라의 황제를 天子라고 인정을 안하잖아요. 그래서 朝天使라고 하지 않고 지역 이름을 따 가지고 燕行使라고 낮추어 부른 거죠. 박지원이가 간 이 사신은 청나라 황제 건륭제가 칠십세가 되는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한 특별 사신단으로 청나라에 파견된 것이죠.
박지원’s 여행 블로그-조선판 우물안 개구리 박지원, 열하에 가다
다들 안녕들 하쇼? 나 연암 박지원이오. 나 박지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방문자수가 무려 이십하고도 오억명, 지금 이 순간에도 기록생신중인 조선 최고의 파워 블로그가 되겠소, 이 몸이 지금부터 조선 최초로 열하에 다녀온 얘기를 하려고 하니 댓글 다는 것 잊지 마쇼. 지금껏 우리나라 선비들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조선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였소. 허나 나 박지원 만리장성 밖으로 나와 북쪽 사막에 이른 것이니 일찍이 선배들도 없었던 일 아니겠소.
자칭 사대부란 자가 묻더이다. 오랑캐 나라에서 뭘 보고 왔냐고, 비단 옷과 비단 신, 진귀한 물건들이 셀 수 없이 많더이다. 보고 있자니 하루 두끼도 겨우 먹고 무명 옷 한 벌도 못해 입는 조선의 현실이 떠 오르더이다. 어허 통제라! 여러가지로 궁금하시우 허면 이 몸이 쓴 열하일기를 보시오. 아마 책상을 탁 치며 이렇게 외칠 것이오. 기이하구나! 참으로 기이하구나!
최원정: 와, 여행 블로그 보셨습니다. 우리가 어딜 떠날 때 이건 파워 블로그들의 기록들을 보고어딜 갈까하고 계획을 짜는데 여기 열하일기를 쓴 기록을 토대로 블로그를 꾸며 봤는데, 대단했을 거예요. 저 느낌 그대로 였을 거예요.
임윤선: 약간 당시 선비하고는 좀 다르네요. 문장 쓰는 게요. 약간 장난기가 많네요.
원동연: 그래서 인기가 많았을 수도 있죠.
최원정: 연암체?
원동연: 보니까 우리나라 선비들은 죽을 때까지 조선땅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다. 조선의 사람들로서 해외를 볼 수 있다는 건 거의 기회가 없었다는 건데 많이 안타깝네요.
최태성: 그 당시 여행은 거리를 보면 한양을 출발해 가지고 북경을 통해 가지고 지금 열하까지 갔잖아요. 이 거리가 한 1600km 정도됩니다. 한양-박천-의주-요양-성경(심양)-거류하-소축신-복진-고령역-산해관-풍은-옥전-계루-연경(북경)-열하. 약 4069리=약 1600km!.
한양에서 열하까지 3200km인데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800km로 약 4배. 엄청난 거리를 갔다 왔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기간이 5월에서 10월 사이니까 여름이 들어가요. 비가 엄청 많이 왔고 엄청 더웠어요. (5월 25일~10월 27일-폭우와 폭염이 기승을 부렸던 시기). 굉장히 힘든 시기에 갔다 왔다고 볼 수 있죠.
최원정: 지금 나가서 객지 생활한다고 해도 얼마나 힘들어요.
원동연: 일주일만 넘어도 엄청 힘들거든요. 그럼 진짜 연행사가 되려면 1순위 조건이 체격일 것 같애요
최원정: 아프지도 않아야 되겠지만 틈틈히 계속 뭘 썼다는 얘기잖아요? 그게 너무 신기해요. 저렇게 많이 과연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힌트를 오늘은 비밀의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추리박스?-고된 여정 속에서 어떻게 글을 썼을까? 최태성씨가 준비된 무대로 걸어나갑니다.
임윤선: 저게 뭐예요?
최태성: 이게 말 안장이잖아요?
원동연/임윤선: 말 위에서 썼다구요?
최태성: 그럼, 원동연 대표님께서 나와서 타 보시죠.
원동연: 제가 사극을 찍어봐서 말을 좀 타 봤거든요.
최태성: 그럼 이제 임대표님이 박지원이 되는 겁니다. 종이를 드립니다. 자, 그러면 붓을 또 드리겠습니다.
최원정: 거기서 직접 써 보라구요.
임윤선: 그냥 앉아 있는 상태에서도 저건 힘든데…
최태성: 잘 쓰시죠? 좋아요. 쓰시고 있다가 출발합니다. 너무 놀래지 마세요! 네, 갑니다. 출발!
최태성: 좋아요. 쓸만하신가요? 자, 그러면 걸어가는 말 위에선 쓰는 게 가능할 듯,
임동원: 재밋어요.
최원정: 말아~쎄게~ 달려, 분부대로 질주
원동연: 너무 빠른데?
김문식: 저 장면이 하나가 다른데 마부가 있어요. 하인이 말을 끌고 가고 속도는 걸어가는 속도니까 너무 빠르지는 않고요. 그렇지만 이제 연행길 내내 붓, 종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일기를 씁니다. 속기를 했겠죠. 그때 그때 써놓고 나중에 이걸 모아서 정리한 게 열하일기라고 보시면 되는데, 그 열하일기 기록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말 안장에 달린 두개의 주머니에 벼루, 거울, 거울은 수시로 얼굴 보는 거고, 그 다음에 붓 두자루, 먹 하나, 작은 공책을 넣어다녔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열하일기(도강록)-말 안장에 달린 두 개의 주머니 중 왼쪽은 벼루, 오른쪽은 거울, 붓 두자루, 먹 하나, 작은 공책 4권이 들었다). 그리고 또 밤낮으로 숙소를 벗어나서 중국 사람들 만나면 필담을 하였습니다. 연암 선생은 중국어가 능통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갈 때와 올 때 다르게 굉장히 중국어가 늘어서 오는 것은 보이는데, 그래서 주로 필담을 많이 하게 되고 그래서 관광에 미친 사람이다. 이런 소리도 듣게 되고요.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직접 그 현장에서 세세한 기록으로 남겨놓았기 때문에 오늘날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열하일기가 탄생할 수 있었던 거죠.
최원정: 원 대표님, 수고 하셨습니다. 들어오세요.
임윤선: 멀미는 안나셨어요? 사실 우리가 흔들리는 곳에서 글만 읽어도 멀미가 나는데,
원동연: 그게 가능했는지 모르겠어요.
최원정: 대단한 열정이에요. 길이 곧 글이 되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는 여행길이 아니라 거의 취재길에 나선 거예요. 사명감 투철한 기자로 보이거든요, 그렇죠?
최원정: 직접 체험해 보시니까 어떻든가요?
원동연: 그냥 말에서 중심 잡기도 쉽지 않은데, 거기서 글을 쓴다는 건 정말 상상도 안되는 일입니다. 박지원 선생님이 그걸 쓰셨다는게 정말 대단하네요.
김문식: 박지원은 젊은 시절부터 꿈꾸던 북경여행이잖아요. 그러니까 드디어 기회가 온 거지요. 최대한 보겠다는 욕심을 가졌던 거지요. 박지원이 여행한 시기가 청나라에서는 조선 사신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놔주자던 시절이었는데, 왜냐하면 17세기에 우리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하고나서 남쪽의 명은 살아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한 40년이 지나서 비로서 청이 중국을 완전히 장악을 하게 돼죠 (1664년 남명 멸망-중국을 장악한 청).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우리 나라 사신이 청나라를 간다하더라도 숙소에 들어가면 꼼짝 말아야 해요. 밖으로 나올 수 없어요. 혹시나 명의 잔당이라고 표현할까요 유민들을 만나서 조선과 어떤 일이 일어날수도 있으니까 정보를 안주겠다는 거죠. 그런데 이제 18세기에 들어오면 서서히 문금제도가 느슨해지기 시작합니다. (門禁-중국에서 조선 사신이 정해진 숙소에서 함부로 밖에 나가거나 상인들과 거래하는 것을 금지한 조치). 좀 관리에게 잘 보이면 밖으로 나가서 구경을 할 수 있는 이런 시대가 돼죠.
최태성: 여행을 가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여행갈 때 마다 이렇게 많이 기록하세요, 아니죠?
이익주: 박지원뿐 아니라 연행사들이 쓴 기록을 연행록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지금 500편 정도 남아있죠. (燕行錄-조선시대에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이나 그 수행원들이 남긴 기행문). 조선의 선비들은 호운불백년 이걸 아주 철썩 같이 믿고 있었어요. (胡運不百年-오랑캐의 운세는 100년을 넘기지 못한다). 그래서 계속 연행을 가서도 이 나라가 언제 망하지? 계속 이걸 묻고 다니는 거예요. 그러니까 중국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요. 그래서 조선 연행사들을 상대로 가짜 뉴스를 만들어서 팝니다. 찌라시가 만들어지는 거죠. 청이 흔들린다 망해간다. 조선 연행사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주고 이렇게 연행사들도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이걸 가지고 오는 거예요. 이렇게 되다 보니까 청의 현실에 대해서 조선이 제대로 파악하기가 참 어려워지는 건데, 그러다가 청나라로서의 최전성기가 강희, 옹정, 건륭이잖아요. (청나라의 최전성기-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재위했던 130여년). 이때가 건륭제 45년 입니다. 이 때가 청나라 역사의 절정 중에 절정이었습니다.
임윤선: 그런데 사실 그래요 사람 마음이라는게 부동산 폭락을 바라는 사람은 폭락한다는 뉴스만 열어보고요. 폭등을 바라는 사람은 맨날 폭등한다는 뉴스만 열어보고 싶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최태성: 과거 연행사들이 제한된 정보를 가져온 반면에 박지원은 좀 달랐어요. 박지원이 가지고 온 정보는 알찬 정보들이 많았을 수 밖에 없겠죠. 열하일기<도강록>에 수록된 글입니다. 점포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반듯하게 진열되어 단정하고 한가지 일도 구차하거나 미봉으로 한 법이 없고 한가지 물건도 삐뚫어지고 난잡한 모양이 없다. 비록 소외양간, 돼지우리 라도 널찍하고 곧아서 법도가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장작더미나 거름 구덩이 까지도 모두 정밀하고 깨끗해서 마치 그린 것과 같았다.
원동연: 돼지우리까지도 반듯 반듯하다고 하니까 정말 대단한 칭찬을 했는데 지금으로치면 우리계획도시 신도시들 도로 다 정비해놓고 공원 다 정비해 놓은 그런 느낌을 받는 것 같애요, 청나라가.
임윤선: 그러니까 행정구획이 아예 되있었다 라는 것 아니에요.
최원정: 자, 그렇다면 또 다른 연행사의 눈에는 이런 모습이 어떻게 비춰졌는지 비교해 볼까요?
홍순학의 <병자연행가>에 수록된 글입니다.
일년삼백육십 일에 양치 한번 아니하여 이빨은 황금이오 손톱은 다섯치라 묵을 곳이라고 찾아가니 집 제도가 우습도다. 캉의 모양이 어떻더냐 캉의 제도를 못보았거든 우리나라 부뚜막이 그와 거의 흡사하다. 기름칠을 한 완자창과 회를 바른 담벼락은 미천한 오랑캐들도 겉치레가 지나치구나. 앞서 박지원이 봤던 청나라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네요. 같은 청에 다녀와 놓고 왜 이렇게 다른 걸까요.
임윤선: 보니까 사실관계는 크게 안달라요. 평가가 다를뿐인 거지, 부뚜막이 있었다. 난방시설이 있었다 본 얘기죠. 회칠을 한 담벼락이 있었다. 이걸 겉치레가 심했다 라고 평가절하하는 거죠. 이건 평가가 다를 뿐,
김문식: 실제가 달라요. 1780년에 박지원이 열하를 쓴 것이고 홍순학의 일기는 1866년이에요.
원동연: 그럼 더 발전했을 것 아니에요?
김문식: 더 발달할 수도 있을테지만 사실은 청이 기울 때지요. 2차 대전이 벌어지고 북경이 함락되었거든요. 서양군대에게 그랬으니까 평화할 수 있는 정치적 배경, 역사적 배경은 있긴 합니다만 결국은 보는 사람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이 되었다고 봐야 되겠지요. 박지원 같은 경우는 하나라도 더 봐서 우리에게 필요한 문물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기록을 하겠다는 시각이고 홍순학의 연행기에서는 그런 의식은 나타나지를 않죠. 박지원 일행은 한양에서 출발한지 두달만에 힘들게 힘들게 청의 수도 북경에 도착한다. 건륭제를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던 그들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지는데 황제는 지금 북경이 아닌 열하에 있다는 것, 대체 이들에겐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최원정: 진짜 굉장히 어렵게 북경까지 갔을텐데 주인공이 없어요. 어디 간 거예요? 황제가 열하에 간 거예요?
김문식: 이때 건륭제가 열하에 피서산장(避暑山莊)이란 걸 두고 매년 여름에 가는데 마침 생일잔치를 열하에서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열하에 가 있었고요. (열하에서 건륭제의 70세 생일만수절 행사가 열릴 예정). 8월1일에 사신단이 북경에 도착해서 짐을 다 풀었어요. 그래서 몇백명이 짐을 다 풀고 공식절차를 밟을려고 그러는데 그날 황제가 열하에 있고 황제 생일이 열흘정도 남았는데 그 사이에 빨리 열하로 오라고 하죠. (열하일기<막북행정록>-“황제께옵서 사신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반드시 초 아흐렛날 아침까지는 열하에 도착하셔야 합니다). 그때 열하일기 장면을 보면 밤에 막 정신없이 짐을 싸가지고 급하게 떠나는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어떤 날은 하루 밤 아홉개 강을 건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5일만에 혹시나 잔치에 늦을까봐…
이익주: 원래는 생일잔치를 늘 북경에서 했어요. 그러니까 조선에서는 북경에 가면 황제가 당연히있을 줄 알고 갔는데 이번 일만은 특별히 열하에서 하기로 하고 건륭제가 열하에 가 있었던 겁니다. 조선 사신단은 북경에서 멀리 절하고 돌아올 참이었는데 특별히 배려를 한 거예요. 올때 이리로 와라 그때 까지 모든 연행사들은 북경까지만 갔어요. 박지원의 호기심이 발동한 거지요. 내가 저길 가 볼 수 있는데 그래서 조선의 연행사로서는 최초로 열하를 다녀오는 행운을 잡게 되는 거지요.
최원정: 열하에서 보고 깜짝 놀란 게 있었데요. 볼까요?
추리박스 열어주세요.
추리박스?-박지원이 열하에서 놀란 이것의 정체는?
일종: 에이구 이건 그냥 금기와, 기와에 금칠이 된 거예요? 멋지다.
원동연: (추리) 열하지역 토우 사람들이 건륭제한테 이걸 매년 선물을 하니까 건륭제가 안가겠습니까?
임윤선: 그럼 열하가 금광이 있는 지역인 거 같아요.
최원정: 열하는 엘도라도?
열하일기 <태학유관록>에 실린 글입니다. 전각은 모두 겹처마에 황금 기와를 얹었고 지붕 위에 걸어가는 용 여섯 마리는 모두 황금으로 만들었다. 반선은 가부좌를 하고 남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반선이란 티베트 불교의 수장 판첸라마를 뜻하는 한자어인데요. 열하에서 연행사가 만난 사람은 바로 판첸라마 였습니다.
최원정: 그리고 달라이라마는 다 아시잖아요, 판첸라마가 누구지?
이익주: 티베트 불교는 활불, 살아있는 불교가 전생을 해요. 계속 태어나는 거죠 (활불전세(活佛轉世)-티베트 불교애서 살아있는 부처가 환생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유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달라이라마인데 달라이라마 말고 또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판첸라마예요. 그래서 판첸라마가 이시기에 정말 티베트 몽골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어 있는데 이때 건륭제가 자기의 만수절을 북경에서 하지 않고 여기 열하에서 하는 이유도 판첸라마를 그곳으로 초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최태성: 그림에서 저기 보이는 것이 있죠 저기가 바로 교수님이 말씀하신 건륭제가 판첸라마를 위해서 지은 사찰이에요. 황금 기와와 황금 용입니다. 황금 도금으로 지붕을 싹 덮어버리니까 얼마나 비싸겠습니까. (등기와를 도금한 황금지붕 & 황금용).
임윤선: 하나만 주어오고 싶다.
임동연: 건륭제가 다른 나라 스님한테 이런 황금 사원까지 지어줄 정도로 이렇게 관심을 보였다면 혹시 건륭제 개인 종교가 티베트 불교였나요?
이익주: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건륭제의 개인적인 종교 보다는 청나라가 모든 종교를 다 인정을 했어요 (다양한 종교, 이슬람, 티베트, 불교와 문화를 받아들인 청).
김문식: 지금 현재 판첸라마는 티베트의 종교 수장이죠. 그 부분을 이제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초대를 한 것이죠. 그런데 몽골이 믿는 종교가 바로 이 티베트 불교입니다. (몽골의 국교 역시 티베트 불교). 그래서 청황제가 티베트의 종교수장을 우대한다는 것은 몽골을 제압한다는 것이죠 (티베트 불교예우=몽골제압 효과). 몽골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한쪽에서는 티베트의 불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고, 이것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판첸라마와 나린히 앉고 스승으로서 예우를 해줍니다. 그리고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이 바로 몽골의 왕입니다. 그것을 박지원이 가서 보면서 열하는 천하의 두뇌와도 같다.
(열하일기, 황교문답-열하는 천하의 두뇌와도 같다. 황제가 어정거리면서 북쪽으로 온 것은 다름 아니라 정수리에 앉아 몽골의 목을 틀어잡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몽골을 목조르기를 해서 잡기 위한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하죠. 박지원이 우연히 보게된 열하에서의 만수절은 청나라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져요. 이것이 건륭제가 판첸라마를 처음 만나는 자리였거든요. 그래서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만나는 장면도 아주 자세하게 묘사를 해놔서 지금도 청나라가 역사, 티베트 불교를 연구하는데 열하일기가 굉장히 중요한 자료로 이용이 되고 있습니다. (청나라史 티베트 불교-연구자료로 주목받는 열하일기).
임동연: 대단하네요. 조선은 그 동안 청을 오랑캐라고 되게 업신여기고 그랬는데 이미 건륭제는 이이제이 [以夷制夷] 전략처럼 몽고와 티베트를 각각 인정하는 것처럼 하면서 견제하게 했다는 걸 보면 건륭제가 대단하다고 보는데 그런 건륭제의 전략을 꿰뚫어보는 박지원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최태성: 연행사는 열하에서의 모든 공식일정을 소화하고 북경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래서 북경에서 한달간 머물게 되요. 박지원이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북경에 온 건데 북경 근처에 대운하 도시(통주)가 있어요. 기록에 의하면 강에 늘어선 배들의 형상이 만리장성에 견줄 만하다. (열하일기, 관내정신). (고소번화도(姑蘇繁華圖)-청의 남쪽 운하도시, 소주 지역의 번영과 백성들의 윤택한 삶을 묘사한 12m 화첩). 놀랠만 하네요.
원동연: 아니 18세기에 중국에 배가 이렇게 많았다는 게 마치 현대 인천항이나 부산항 같은데요. 어마 어마하네요.
임윤선: 나룻배가 아니라 진짜 상선 같은 거잖아요. 저렇게 큰, 그러면 저게 정말 무역 때문일텐데, 굉장한 무역대국인데요.
김문식: 천하의 선박들이 모두 통주에 집결하니 선박들을 구경하지 않고선 연경의 장관을 봤다고 하기 어렵다. (열하일기, 관내정사). 이렇게 이야기 하죠. 중국은 내륙에 그 운하가 발달되어 있죠. 그러니까 통주에 몰려있는 배들을 보면서 바로 청나라가 부국강병 할 수 있다는 조건은 이 배들에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죠.
이익주: 저 운하가 통주를 거쳐서 북경까지 가는 겁니다. (청나라 발전의 원동력-강남에서 북경까지 이어진 대운하). 그래서 양츠강 이남 이북을 잇는 그 당시 동맥이죠. 저 운하가 그래서 정말 통주 끝에서 본 거지만 박지원도 거의 저런 모습 봤을 겁니다. (운하의 도시-통주에서 무역의 중요성을 느꼈을 박지원).
최태성: 자, 제가 여기서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ㅁ는 하늘이 낸 물건이로다. 조선에 ㅁ가 다니지 않기에 백성의 살림살이가 가난한 것이다. 자, 네모에 들어갈 단어는 무엇일까요?
임윤선: 조금전에 운하 얘기가 나왔으니까 아마도 운하? 배가 아닐까요?
최원정 마차?
김문식: 정답은 바로 수레입니다. (수레는 하늘이 낸 물건이로다. 조선에 수레가 다니지 않기에 백성의 살림살이가 가난한 것이다). 수레인데요. 그런데 앞서 통주에서 여러 배들이 물건을 싣고 오가는 것을 보잖아요. 그런데 길 위에서는 수레에 짐을 싣고 다니는 것을 보게 돼요. 그래서 북경에 도착한 이후의 표현인데 동문에서 서문에 이르는 5리, 5리면 지금으로 하면 2km 정도됩니다. 2km를 걸어가는데 그 사이 수레 수만대를 봤다는 겁니다. (열하일기, 관내정사-동문을 거쳐 서문에 이르는 5리동안 수레 수만 대가 길을 메우고 있어 몸 돌릴 틈조차 없다). 수레나 선박이라는 것은 운송시설이잖아요. 그러니까 물류가 잘 통한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최원정: 하늘이 내린 물건 정도는 아니잖아요?
임동연: 우리나라에서 수레는 귀양가거나 죄인들 압송할 때 보면 수레에 끌고 가잖아요.
김문식: 수레는 있지만 그렇게 많은 수레를 본 적은 없는 거지요. 그래서 수레 수만 대가 길을 메우고 있어서 몸을 돌릴 틈조차 없다.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실제로 연행록에 보면 조선 사람이 제일 놀라는 게 북경에서 수레가 길 위를 달리는데 소리가 굉장히 크잖아요. 그 소리에 놀라고 수레의 댓수에 놀라고 사람에 놀라요.
임윤선: 지금 한국은 자동차 수출국인데 수레를 이용 안했군요.
최태성: 왜 기억 안나세요? 삼국시대에 가면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면 수레가 나와요. 수레가 그려져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조선시대에 와서는 방금 말씀하신대로 죄인을 호송할 때 이런 대로만 쓰였지 실용화가 안돼요.
임동연: 아니 없어서 못쓰는 게 아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안쓰는 거예요? 그게 무슨 나쁜 것도 아니고 불편한 것도 아닌데…
임윤선: 아니면 한국이 워낙 산악지형이어서~
김문식: 저 사진은 구한말 때 서양인이 찍은 사진으로 나무로 만든 다리 위로 나귀에 짐을 싣고 가는 이 정도의 모습으로 보이잖아요. (구한말까지도 열악했던 조선의 도로). 그러니까 조선의 도로시설의 취약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길은 고사하고 지게를 지고 가기에도 어려운 상태가 보이죠. 그러니까 수레를 안쓰니까 길이 나지 않는다는 게 박지원의 생각이죠. 박지원은 수레가 다니면 길은 생긴다. (수레를 쓰지 않으니 길이 나지 않는다 VS 길이 없어 수레가 다니지 못한다).
임윤선: 올레길도 그렇게 생긴 거잖아요. 사람이 다니면 길은 날 것이다 라고 해서 길이 생기면 수레도 다니지만 수레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도로가 생길 것이다 라는 말도 이해가 가요.
최태성: 조선에서 이 수레를 잘 쓰지 않은 이유가 세가지 정도 있어요. 첫번째는 도로가 없어요. 원래 길은 있었는데 쓰지를 않으니까 길이 점점 사라지는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조선은 또 어떤 생각을 했느냐면 도로를 만들면 도로를 통해서 적이 들어온다. 굉장히 소극적인 국방정책, 교통정책 이런 생각이니까 도로가 발달되지를 않는 거예요.
원동연: 병란, 임란을 다 거쳤다해도 도로가 생기면 적군이 쳐들어오니까 차라리 도로를 만들지 말자 라고 하는 건 사실 구데기 무서워서 장 담그지 말자 라는 얘기잖아요.
김문식: 그리고 또 청나라의 도로 상황을 보면서 청나라의 진수는 기와와 말똥에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하죠.
원동연: 다른 건 다 이해하겠는데 청나라의 진수가 말똥에 있다고 하는 건 청나라를 너무 칭송하는게 아니에요? 신봉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이익주: 생각하지 못한 어떤 의도가 있는 거죠. 진수라고 할만큼 청나라에서는 말똥, 말의 배설물을 모아서 거름으로 씁니다. 깨진 기와조각 이건 뭘로 쓰느냐 하면 담벽에 장식을 하는 거예요. 이런 걸 쓰는 걸 본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로 치면 폐기물 재활용 이런 게 될텐데 버리는 것도 다시 쓰는 이런 청의 모습에서 천하의 道가 여기 있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임윤선: 저희 스스로가 반성해야 되는게 여행을 가면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청의 웅장한 자연경관, 예뿐 궁정 이런 건만 자세히 묘사를 할테고 우리가 바로 만약 네넬란드에 여행을 갔다면 대뜸 풍차사진 이런 건만 사진을 찍었을 텐데 오직 한 사람이 네델란드의 재활용 시스템을 보고 왔다는 거잖아요? 박지원이 남다른 사람이었구나. 좀 일찍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최태성: 여기서 두번째 퀴즈 내드립니다. 마침 저기 있어요. ㅁ을 쓰면 화재나 도둑걱정이 없고, 새, 쥐, 뱀 등에 의한 피해를 막을 수 있다. ㅁ은 무엇일까요?
임윤선: 이거 약간 세XXX광고 인데요?
일동: 웃음 대폭발,
최태성: 정답은 벽돌입니다. 박지원이 청에 가서 제일 눈에 띄는게 벽돌입니다. 벽돌
임동연: 아니 뭐 굉장히 대단한 줄 알았는데 벽돌이 무슨 그렇게 만능기능이 있는 거예요?
최태성: 당시 흙과 짚으로 벽돌을 만들잖아요. 그런데 청의 벽돌집을 자세히 봤을 때는 기둥이 벽 속에 들어가 있어 비바람을 겪지 않아 불이 나지않고 도둑이 뚫을 염려도 없다. (열하일기, 도강록-기둥은 벽 속에 들어있어서 비바람을 겪지 않아 불이 번질 염려도 없고 도둑이 뚫을 위험도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최원정: 벽돌이 대단한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도자기를 굽는 나라인데 그 기술이 없어서 못구은거예요?
이익주: 벽돌은 정말 우리 역사에 미스터리예요. 우리 옛날에 백제 무령 왕릉 벽돌 무덤이 있어요.
(백제 무령왕릉(사적 제13호)-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벽돌 무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안동에 가면은 벽돌로 만든 탑이 있습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국보 제16호). 우리가 벽돌을 만들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우리는 탑을 만들 때 주로 화강암을 깎아서 석탑을 만들고, 민간에서 집을 지을 때는 흙담을 쌓았어요. 벽돌을 안만든거죠. 아무튼 벽돌을 알았고 만들 줄도 알았는데 흙도 있고 또 청자 도자기를 만들었으니 가마기술도 있고 자, 이걸 못만들었을까 안만들었을까 저는 안만들었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주 오랫동안 뭔가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까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거지요. 그런데 이때 박지원이 중국에 가서 보니까 이게 새로운 물건으로 보인 거죠. 이걸 만들면 참 좋겠다 왜 우리는 이걸 못만들까 그제서야 이 벽돌의 필요성을 이제 새롭게 인식을 하고 이걸 좀 만들어야 되겠다 이런 주장을 하게 된게 아닌가 박지원은 무엇보다도 교역이라는 게 중요하다. 이 점을 아주 절실하게 느끼는데 이 교역을 통해서 발전된 문명을 받아들여야 된다.
남산골에 사는 가난한 선비 허생은 하루 종일 책만 보는 무능한 가장이었다. 아니 정말 이러기 예요? 양반이라고 처자식은 굶는데, 칠년째 책만 읽으면 다냐구요. 아이, 정말 아내의 등쌀에 못이겨 공부를 중단한 그는 장안의 갑주 변씨를 찾아간다. 만냥만 빌려 주십시오. 그 열배로 갚겠습니다. 놀랍게도 만냥을 떡 빌려온 허생, 그 돈으로 장안의 과일이란 과일은 죄다 사 모우시오. 그는 과일을 모조리 사재기해 비싼 값에 팔고 제주도에서 사재기한 말총을 되파는 방식으로 그야말로 돈 방석에 앉는다. 허생은 그 돈으로 도둑들을 모아 무인도에서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농작물을 바다 건너 장기도에 가서 팔아 은백만냥을 벌어온다. “이것으로 내 작은 시험은 끝났네”
최원정: 네, 박지원의 허생전으로 워낙 유명한 얘기고 이게 열하일기 안에 수록된 거라고요.
임윤선: 예전에는 저걸 그냥 위트 넘치는 무능한 양반을 비판하는 이야기로 봤는데 이제 보니까 아니 내용이 그 보다 더 심오하네요.
최태성: 허생전을 보면은 조선이 참 많이 가난했구나 이런 것들을 보게되고 현실을 탄식하는 그런 모습도 나오지만 반면에 교역을 통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 거예요. (허생전의 내용 1. 조선의 허약한 경제구조 비판, 2. 교역을 통한 수익창출 가능성). 이런 상반된 모습도 가치 있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원동연: 매점 매석 해가지고 무인도를 사고 무인도 사서 농사 지어서 무역도 하고 되게 스케일이 남다른데요. (매점 매석-무인도 매매-농사-무역). 그런데 장기도라고 장기도는 처음 들어요, 어디에요?
김문식: 나가사키가 長崎島예요 (현재 일본의 나가사키). 네델란드와 교역하는 거점이죠. 그런데 지금 지도에 보면, 조선과 중국 강남지역과 무역을 하고, 중국 강남지역이 일본 나가사키와 무역을 하고, 조선과 일본 나가사키와 무역을 하는, 이런걸 구상을 하는 거죠. 실제로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서양과 열려있는 창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교역의 거점 이었죠. (당시 나가사키를 거점으로 서양과 교역했던 일본). 그런데 간접적으로 조선이 이 무역권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열하일기에 보면 우리는 뱃길로 중국 강남과 재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문헌에 캄캄하다. (열하일기, 동란섭필-우리는 뱃길로 강남의 재화와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헌에 캄캄하다). 그런데 일본은 중국 강남에서 무역을 하면서 강남지역 서적이 그대로 일본에 들어오고 이것이 다시 일본판으로 재간행되는 상황이죠. (당시 일본은 중국 강남과의 교역으로 서적들을 직수입해 지식교류). 허생전에서 하는 이야기가 실제로는 동아시아에 만들어져 있던 무역권, 국제무역권에 조선이 참여해야 한다는 걸 얘기하는 겁니다.
최원정: 전세계가 대항해 시대에 중상주의를 정확히 얘기하고 있는 건데, 조선에서 중국 강남은 거리상으로 가까운데 왜 교역을 못했던 거예요?
이익주: 고려시대에는 남송의 상인들이 고려 벽란도까지 들어왔고 고려상인들도 중국에 갑니다. (고려-남송, 벽란도(개경 근처 국제무역항)까지 들어와서 교역했던 남송의 상인들). 유학간 학생들도 있었고 그래서 거의 자유롭게 왕래를 해요. 송나라가 망한 다음에 원나라도 아주 개방적인 세계제국 이었기 때문에 고려사람들이 원나라에 제 집 드나들둣이 많이 왕래를 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문화를 받아들이죠. 그런데 문제는 원이 망하고 명이 건국된 다음에 明이 海禁이라는 정책을 씁니다. 바다를 막는 거예요. 이때 조선에서 明에 유학생을 보내겠다는 요청을 하는데 이걸 명에서 거부를 해요. 조선의 상인들도 이제는 명에 못가게 됩니다. 정말 명이 존재하던 250년 동안 조선 사람 가운데 중국의 강남지방에 가본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예요.
(明이 존재했던 250년 중국 강남(상업금융무역의 중심지)을 경험한 조선인은 극소수). 수백년 동안 살다 보니까 이 조선 사람들의 어떤 뿌리 깊은 생각 속에 외국에 대한 관심이 점점 사라졌던 것 같애요. (明의 강력한 해금정책으로 외국에 대한 관심을 잃은 조선). 이때는 못하는게 아니라 안한게 되는 거죠.
임윤선: 사실 그간 답답했던 게 조선이 막혀있는 나라가 아니잖아요. 분명히 다른 나라로부터 문화를 받아 들이기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왜 이렇게 답답했을까 했는데 明에 영향이 있었고 그 다음에 그 의지를 상실했고 하는 사정이 있었군요.
김문식: 조선 후기에 청나라와의 관계를 잘 생각해 보면 바깥에 있는 여러 나라들을 볼 수가 있죠. 특히 러시아가 서서히 아시아로 오고 있거든요. 아시아로 오고 있는 상황인데 러시아에 대한 관찰이 잘 안되고 있거든요. 그 다음에 일본하고 통신사로 교류를 하지만 그리고 중심부를 지나가지만 일본과 연결되어 있는 서양제국을 잘 보지 못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연암은 상대적으로 거기선 앞선 지식으로 보여지지요. 그래서 열하일기를 통해서 허생전을 통해서 해상무역을 하자는 얘기를 하고 있고 그걸 통해서 조선의 부국강병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거죠.
최태성: 이런 주장을 하는 박지원과 같은 지식인들이 18세기에 생겨나요. 어떻게 보면 주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아웃 사이더죠. 아웃 사이더에서 수장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박지원이죠. 탑골공원, 저기 보이시죠.
최원정: 국보 2호
최태성: 저기 보시면, 그 당시 화이트예요.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2호)-탑골공원에 위치한 조선시대 대리석 석탑). 저기가 박지원의 집이 있었던 곳이에요. 그러니까 바로 박지원의 집으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였죠. 그래서 그들을 백탑파다. (박지원과 뜻을 같이한 신지식인들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들을 백탑파 라고 함).
최원정: 아니 백탑파라고 그러면 조직의 쓴맛(?)을 보여줄 거 같은~
김문식: 왜 백탑 이라고 하냐면 저게 화강암 석탑인데 저게 하얗게 보이기 때문이죠. 대리석으로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 명문가 집안이지만 박지원을 제외하고는 출신의 하자가 있는데 서자 출신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이 다 북경을 다녀온 중국통 학자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박제가와 유득공은 중국어에 굉장히 능통했던 그런 사람들이고 이들이 서자 출신이긴 하지만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규장각에 들어가서 정조시대에 책을 편찬하게 된 것은 정조의 특별한 안목이랄까요 파격적인 발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익주: 우리가 이 사람들을 백탑파 또는 북학파 라고 부릅니다. (北學派-청나라 문명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배우자고 주장). 북쪽의 학문을 공부한다는 뜻인데요. 다들 청에 다녀 오면서 청의 문화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이 사실을 전부 깨달은 거예요. 청을 더 이상 오랑캐 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그들의 문명을 배워야 한다. 이런 주장을 하기 시작하는데요. 박제가가 청에 다녀온 뒤에 쓴 아주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북학의, (北學議-박제가가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서 쓴 책) 라는 책이 있는데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다우면 아무리 오랑캐라 할지라도 떳떳하게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북학의>에 담긴 박지원의 서문).
원동연: 아유 아주 멋진 표현이네요.
최태성: 북학의 같은 경우는 생활도구개선 내용들이 많이 나와요. 그러니까 선박 같은 예를 들어보면 청과 조선 선박을 비교를 해놨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우리나라 조선의 선박 같은 경우는 갑판이 없다는 거예요. 갑판, 그러니까 짐하고 사람이 뒤엉켜 있는 거죠. 그런데 청의 선박을 봤더니 갑판이 있고 그 안에 층이 나눠져 있어가지고 내실 따로 다락 따로 창고 따로 굉장히 효율적으로 굉장히 많은 짐과 사람들을 실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아주 자세히 정말 눈으로 이렇게 보고 있는 것처럼 다해 놓은 거예요.
원동연: 박지원의 지적대로 그렇게 구분을 해놓으니까 굉장히 효율적인 거 잖아요? 진짜 갑판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컬럼버스의 달걀 처럼 갑판 하나 바꿔놓았드니 물류개선 시스템이 이뤄졌다.
최태성: 작은 발상의 전환이 조선은 무딘 거 같아요.
김문식: 그러니까 박제가와 박지원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청이 오랑캐의 나라이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뭘 배워야 하는가에 대상국가여야 한다. 그러니까 굉장히 정확하게 관찰하고 그 문물제도를 서술을 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 북학의는 물건별로 항목을 나눠서 구체적으로 서술한 책인데 굉장히 체계적으로 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청나라에서 도입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수레, 그리고 선박, 벽돌 이런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결국 물류시스템인데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거지만 이게 전쟁이 나면 그게 다 전쟁물자가 되지요. 수레는 전차가 되고 선박은 전선이 되고 벽돌은 성벽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결국 부국강병을 위해서 이런 물건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청의 제도를 도입해야 된다.
임윤선: 구구절절 맞는데요.
김문식: 그런데 청의 문물을 도입하자는 주장이 좀 과잉해요. 그래서 과격한 주장을 해서 지탄을 받기도 해요.
최태성: 청나라의 변발과 호복, 이거 우리도 해야 됩니다 라고 주장을 해요. 우리도 청 따라가자고 변발, 호복 이거 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임윤선: 그들처럼 입고 그들처럼 생각하자?
임동연: 身體髮膚는 受之父母라.(신체와 머리카락과 피부는 모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
임윤선: 그렇죠 그래서 머리도 못자르고 하는데 이 머리 자르는걸 주장했다는 거예요. 너무 과격하게 나왔다!
이익주: 그런데 박제가가 조선을 없애자는 생각을 한 건 아닙니다. 조선은 淸의 어떤 새로운 문화가 필요하다면 받아들이자 라는 얘기를 하는 중에 스스로 변발, 호복을 받아들여서 그리고 또 더 나아가서는 중국 말까지 우리가 받아 들인다면 얼마나 소통이 쉽겠냐? 고 한 거지요.
최원정/임윤선: 중국말이요? 언어?
이익주: 언어까지도 중국말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쉽게 중국과 소통하겠냐? 이건 훨씬 더 앞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죠.
최원정: 공식적인 언어를 중국어로 하자는 얘기예요, 지금?
김문식: 공용어로 하자는?
최원정: 배우자는 게 아니라?
김문식: 한 걸음 더 나간 겁니다.
최태성: 가끔 있잖아요, 우리 미국 영어를 공용어로 그냥 쓰자?
원동연: 저도 영화제 같은데 가보면 네델란드 사람이든 핀란드 놀웨이 나라 사람들도 다 영어를 쓰거든요. 사실 책으로만 서로 교류할게 아니라 언어까지 같이 하면 무역이나 교류에 되게 도움이 될 거는 같아요. 저는 한국말이 없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최원정: 열린 사고라 그런가요?
최태성: 일어 불어
원동연: 영어 배우는데 우리 비용 너무 많이 쓰잖아요?
최태성: 머리 까지는 이해하는데 박제가의 이런 주장은 오늘 처음 알았는데---북벌하고 북학하고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거든요. 이분들 반민족인? 양극단에 서있는 모습 있을 수도 있어요.
이익주: 북학파가 다 그런 건 아니에요. 북학파 안에 이런 주장도 있다는 거죠.
김문식: 변발을 하자는 것은, 원래 조선 선비들은 상투를 하고 갓을 쓰잖아요. 갓이란 것이 전쟁을 할 때 유리하지가 않다. 그러니까 바꾸자는 이야기이고, 그 다음에 청나라 복식의 장점은 소매가 가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 도포는 이렇게 길 잖아요. 이런 긴 옷을 입고 전쟁을 할 수는 없다는 거죠. 그런 제도까지 받아들여서 부국강병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박지원도 똑 같은 얘기를 해요. 이것 때문에 당시 조선사람이 생각하는 오랑캐의 나라 청나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긍정을 하고 제도를 수용하자고 하니까 중국에 빠진놈, 그 다음에 당나라 수령! 당괴! 이런 비판을 받게 돼요.
최원정: 열하일기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이 정도면 베스트 셀러가 될만하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를 하는데 불온서적이 되었다 잖아요? 禁書, 도대체 그게 왜 그런 건가요?
김문식: 불온서적이 된 건 문체의 문제입니다. 열하일기의 문체를 보면 실제 사람이 우리가 지금 이야기 하듯이 번역을 하면 대화가 복원될 정도로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여기 인간의 감정,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다 그대로 드러나요. 우리는 오늘날 그걸 재밋게 읽지만 당시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이것은 좋은 문장이 아닌 거죠. 특히 조선이란 체제는 유지해야 되는 정조로 봤을 때는 문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게 되고 그게 국가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소설체 문체의 그 핵심이 누구냐 바로 열하일기다 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정조가 여러 번 박지원에게 반성문을 써 오라고 합니다. 자기가 잘못했다는 반성문을 쓰고 좋은 문장 당신들이 생각하는 고문으로 글을 지어서 올리라. 숙제를 내지요.
원동연: 개인적으로 농담을 할만큼 막역하게 잘 대해줬다고 해도 조선의 나라에서 임금이 반성문을 쓰라는데 안썼으면 거의 사약 받는게 아닌가요?
김문식: 정조 말년까지 거의 쓰지를 않아요. 정조는 박지원한테 반성문을 네가 쓰고 속죄를 하면 이제 관직을 주겠다. 벼슬을 주겠다고 유도를 합니다. 그건 뭐냐하면 박지원의 문체는 체제유지에 불온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제재를 하지만 그런 인재를 등용을 해가지고 국가발전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임윤선: 정조는 워낙에 열린 마음의 대왕이잖아요. 서얼을 기용할 만큼, 그런데 왜 북학파들의 주장을 반영하지 못했을까요?
이익주: 북학파 학자들이 대게 서울출신이라고 하는 약점이 있죠. 그래서 관직에 어느 정도 올라가지 못하는 그러니까 자기들의 생각을 정책에 반영하는데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이 사람들의 생각을 많이 받아들였고 그래서 정말 훌륭한 작품 하나를 만듭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지금 수원 화성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벽돌로 만든 성을 그때 만듭니다. 그런데 역시 또 안타까운 것은 정조의 시간이에요. 정조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정조에게 기대했던 모든 이런 가능성들이 다 사라지게 됐습니다. 아마 만일 이라는 게 부질없지만 정조가 좀 더 오래 사셨더라면 이런 아쉬움이 있죠.
최원정: 서양에 말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있다면 조선에는 열하일기가 있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오늘 진짜 얘기들어보니까 타고난 이야기꾼의 재미난 여행일기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임윤선: 박지원이면 허생, 그 돈을 바닷물에 다 버리던 허생의 절망감을 그대로 느꼈을 것 같아요. 그 똑똑한 사람이 관직을 마다하고 초야 묻혀 지내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드디어 연경을 가고 뜻밖에 열하도 가고 관직에 뜻도 없던 사람이 말 위에서 글쓰고 메모 남겨놨다가 5개월 동안 이만한 기록을 남겨서 왔어요. 그랬더니 이것을 컨텐츠에는 관심이 없고 내용을 들으려고는 하지 않던 그 당시 모습에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요? 왜 그것을 아마 바다물에 던지고 싶었던 것은 자기의 열하일기 일수도 있어요.
최태성: 하지만 저는 이 열하일기가 많은 사람들한테 읽히면서 베스트셀러로 쫙 확산되는 그런 모습들이 바로 그 중화주의의 균열을 가하는 자극제가 되지 않았을까 이제 새로운 변화는 시작된다. (西勢東漸-서양 세력이 차차 동쪽으로 옮겨옴). 청나라가 접촉하는 러시아가 있고요. 일본쪽으로 다가오는 세력으로는 네델란드가 있고 영국, 미국, 프랑스 계속 들어오거든요. 들어오는데 만약에 박지원에게 보였던 이런 문제의식, 열린 시각이 계속 유지가 되었다면 그런 변화를 차근차근 추적하면서 나름대로 변화가 일어나고 대비를 한 시대가 열렸을텐데 우리의 19세기에는 그런게 잘 안보여요. 그런 면에서 18세기에 보여 주었던 문제의식이 다음 시기에 이어지지 못한 것이 안타깝죠.
최원정: 문화가 사상으로 이어지고, 사상이 때로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역사도 바꾸잖아요. 그런데 자유로운 영혼의 지식인 한 명으로는 변화를 이끌기에는 뭔가 역부족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보고요. 오늘 열하일기를 통해서 당시 지식인들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4화, “조선의 베스트셀러 열하일기는 왜 금서(禁書)가 되었나?”에서 정리).
① 열하가 하북성 북부의 승덕[承德]이란 곳인데, 박지원이 承德을 갔다와서 쓴 게 바로 열하일기입니다.
② 박지원은 한양을 출발해 북경을 통해 열하까지 거리가 1600km 정도. 한양-박천-의주-요양-성경(심양)-거류하-소축신-복진-고령역-산해관-풍은-옥전-계루-연경(북경)-열하. 약 4069리=약 1600km!. 한양에서 열하까지 3200km인데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800km로 약 4배. 엄청난 거리를 갔다 왔다. 그 기간이 5월 25일에서 10월 27일 사이니까 여름이라 비가 엄청 많이 왔고 엄청 더웠다. 폭우와 폭염이 기승을 부렸던 시기. 굉장히 힘든 시기에 갔다 왔다.
③ 박지원뿐 아니라 연행사들이 쓴 기록을 연행록이라고 하는데 지금 500편 정도 남아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호운불백년이란걸 아주 철썩 같이 믿었다고. 胡運不百年-오랑캐의 운세는 100년을 넘기지 못한다. 이렇게 되다 보니까 청의 현실에 대해서 조선이 제대로 파악하기가 참 어려웠다. 청나라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재위 130여년 중 건륭제 45년이 청나라 역사의 절정이었다.
④ 박지원이 1780년에 쓴 열하일기와 홍순학이 1866년에 쓴 일기는 내용이 다르다. 박지원은 젊은 시절부터 꿈꾸던 북경여행에 최대한 보겠다는 욕심을 가졌다. 박지원이 여행한 시기가 청나라에서는 조선 사신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놔주자던 시절이었다. 왜냐하면 17세기에 조선이 남한산성에서 청에게 항복했지만 남쪽의 명은 살아있었다. 이게 한 40년이 지나서 1664년에 청이 중국을 완전히 장악을 하게 돼었다.
홍순학이 연행사로 간 시기는 세계 2차대전이 벌어지고 서양군대에 북경이 함락되고 청이 기울 때였다. 그래서 평화할 수 있는 정치적, 역사적 배경은 있지만 청을 보는 사람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이 되었다. 박지원 같은 경우는 하나라도 더 봐서 우리에게 필요한 문물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기록을 하겠다는 시각이고 홍순학의 연행기에서는 그런 의식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⑤ 티베트 불교는 활불, 살아있는 불교가 전생을 한다. 계속 태어나는 거다. 우리가 유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달라이라마가 있고 또 한 분이 있다. 그분이 바로 판첸라마다. 판첸라마가 이 당시 티베트 몽골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는데 이때 건륭제가 자기의 만수절을 북경에서 하지 않고 열하에서 하면서 판첸라마를 거기에 초대하였다.
그런데 건륭제가 판첸라마를 위해서 지은 사찰이 황금 기와와 황금 용으로 황금 도금으로 지붕을 싹 덮어버렸다. 여기서 조선의 박지원이 티베트 불교의 수장 판첸라마를 만난 것이다.
⑥ 北學派는 북쪽의 학문을 공부한다는 뜻인데, 청나라 문명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배우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청에 다녀 와서 청의 문화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청은 더 이상 오랑캐가 아니다. 그들의 문명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박제가가 청에 다녀온 뒤에 쓴 책이 北學議다.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다우면 아무리 오랑캐라 할지라도 떳떳하게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