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글쓰기 78 ㅡ 골굴사에선 하얀 드레스를 (사소)
"유경아! 나 경주 가고 싶어."
카리스마 넘치는 38년 지기 친구는 선.
큰 딸이라 늘 주는 것이 당연한데, 받는 것에는 영 어색해하던 선. 이제 받는 것에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내 말을 귀담아 들었을까? 처음인듯 의탁을 해왔다.
몇 년 만에 연락해도 어제 만났던 것처럼, 늘 그대로 놀라지도 않는 목소리,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나의 친구 선. 그녀는 큰 키에 쌍꺼풀이 큰 눈을 가졌다. 눈이 동그란 데다 눈썹이 한 올 한 올 짙게 보일 정도로 까맣고 짙다. 언뜻 보면 매우 강해 보이고 말도 얄짤없어 어떨 땐 등짝을 시원하게 내치는 기분이다. 엄마같고 때론 오빠같은 그녀 앞에선 늘 나는 " 네. 네 " 머리를 조아린다. 대부분 나의 취향은 이런 선머슴 같으면서도 담백하고 솔직한 것이 단칼을 몇 개나 소유하신 분들이다.
선이의 반전 매력을 안 것은 고등학교 때다. 헌혈차가 왔는데 나는 체중 미달이었고 친구들이 헌혈 줄을 서는 것을 부럽게 보고 있었다. 그때 우왕좌왕하고 다급하게 뛰어오는 친구들 소리를 들었다. 바로 선이 헌혈 줄에 서 있다가, 바로 앞 친구 팔에 바늘을 꽂는 모습을 보고 그만 기절해버렸던 것이었다. 눈이 뜅글 뜅글하고 항상 지엄한 표정인 선이. 두고두고 놀려먹지만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눈부터 촉촉해지고 나보다 더 속상해하던 선.
올 봄에 엄마를 여읜 선경이도 경주여행에 초대했다. 선과 선경 나. 이렇게 셋이서 여행 계획을 세우며 나는 선과 유경의 합체는 선경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사실 선과 선경은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였다. 하지만 이런 나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괜찮다며 웃어줄 줄 아는 여유를 나이와 함께 얻었으리라.
첫날밤, 성격 심리 검사를 해보니 선이는 리더십이 높았다. 선경이는 안정을 추구하는 세심한 유형이었다. 나는 그 둘의 중간에 놓여있었다. 한옥 야외 풀에서 즐길 수영복을 가져오라는 나의 지령에 알겠슴다를 복창하던 두 친구.
문제는, 다음날 선이가 가고 싶다는 골굴사 방문 복장으로 내가 수영복 위에 청 반바지와 화이트 롱드레스를 두르고 나선 것에서 시작하는 듯 했다. 골굴사 다음 코스로 감천 바다를 갈 생각이기도 했고 ,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온몸으로 이벤트를 마련해 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엄마 같던 선이는 어디 경망스러운 의상이냐며 도끼눈을 떠댔다. 그런 분위기는 어릴 때 나의 집안 냄세와 닮았다. 반항은 나의 몫! 나는 질세라 스님들이 무술공연을 하시는데, 날도 덥고 힘드실 터이니, 나도 찾아가는 공연 서비스를 해드리는 게 좋겠다고 드레스를 여미며 커튼콜 인사를 흉내 냈다. 선이는 눈을 흘기다 피식 웃었고, 선경이는 둘의 광경을 지켜보며 포복절도를 하는 것이다. " 선이는 맨날 챙겨대는 엄마같고, 너는 여전히 지앙스럽고 부잡하다야 " 몇십 년 만에 들어보는 고향어를 난발했다. 그 후 선경이는 내내 웃겨줘서 고맙다고, 아직은 조심스럽고 서먹한데 근엄하지 않아서 좋다고 몇 번이고 히죽거렸다.
그러나 나의 야망을 무색케 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쎈언니 두 친구의 고소공포증이었다. 골굴사의 험준한 계단을 오르며 벌벌 떠는 모습은 앙증맞은 중생의 모습이었다... 엄마야! 를 외치며 난간을 잡고 식은 땀을 흘리던 두 친구. 그 귀여움을 어찌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나의 흰드레스 자락을 걸음걸음 여며주던 선과 선경.
우리 함께했던 23년 8월.
첫댓글 친구 분들 여행에 잠시 동승해 보았습니다. 세 분의 우정을 응원합니다. ^^
어느 tv 예능에서 골굴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험준한 계단을 흰드레스 휘날리며 오르셨을 모습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