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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3책명-작품 읽기를 통한 수필 창작의 원리.hwp
책명-작품 읽기를 통한 수필 창작의 원리-신재기
저- 신재기
출- 수필과 비평사(2012. 12.26. 340)
독정-2019. 10. 1
· 작품을 통합하여 평가하는 능력은 연마하고 작품의 장점이나 긍정 요소를 찾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수필 일기는 궁극적으로 잘못을 고치라고 지적하는 말보다는 좋은 점을 살리라는 격려 쪽을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그 겨울의 서울역>작가의 시선은 개인의 사소한 일상 삶에 머물지 않고 나를 벗어나 밖으로 향해 사회 문제로 돌림으로써 주제의 보편성을 획득, 나 안으로 파고들기보다는 나 밖의 세계, 즉 사회에 시선의 초점을 맞추는 작품이 소위 사회 비판, 문명 비판의 작품이다.
손바닥에 홍건하게 고여 오는 땀을 주체할 겨를도 없이 발만 동동 구르다가 1시 반쯤 되어서는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머릿속이 하얘지며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워진 그 순간 환청처럼 “엄마!‘하는 소리가 들렸디. 깜짝 놀라 쳐다보니 작은아들이 개선장군의 깃발처럼 치마를 휘날리며 뛰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미용실에 있던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성을 터뜨렸다. 목숨을 걸고 고속도로를 질주했을 작은아이가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가 없었다.(큰아들 결혼식날 혼주가 겉치마를 벽에 걸어두고 예식장에 와서 마음 조리는 장면 묘사)-황당과 당황 사이-김영옥
수필 쓰기는 화제에 대한 해석이다. 해석은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수필 쓰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해석이 보편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인생살이가 상실의 연속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너무 늦었다. 신이 용광로이 불을 꺼버렸기 때문에 더는 어떤 희망도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신에게 자, 이제 <다 가져가셨습니다.-고윤자>한다. 해와 달 오누이 이야기를 중간 중간에 넣어 전해하는 수법으로 참신한 형식을 택했다. 바다는 메울망정 인간의 욕시은 메우지 못한다더니 무언가 원하는 것을 얻어도 만족감이란 잠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나비 같다. 우리는 얼마만큼 비워야 진정한 바보가 될 수 있을까.
-순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손톱 끝에 반달처럼 물들어 있는 봉숭아물이었다. 안사돈의 봉숭아물 들인 손톱을 보고나서는 안정제를 복용한 것처럼 편안해졌다. 칠순을 바라보는 연세에 소녀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생각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봉숭아물은 곱고 순하고 욕심 없는 마음을 함축한다.
· 우리 수필은 탈 정치적 투명성을 경쟁적으로 표방한다. 수필은 군자의 선비 문학이라면서 마치 현실 문제에 매달려 시비를 논하는 글은 ‘소인의 문학’어로 간주하던 은연중 경향이다. 정치 무관심과 탈이데올로기가 마치 예술의 보령인양 간주한다. 수필의 본령도 순수 서정수필이라는 전제하에서 사회 현실인자 정치에 대한 관심을 배척하려는 창작방법이 결국 우리 수필을 신변잡기의 무감동을 불어온 원인이 되었다.
·젊어서 이상에 미치지 않으면 지성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좋은 수필은 유리창과 같다. 내가 글을 쓴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ㄹ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을 때였다.<비겁한 죄> 김용옥
<전등사의 시시포스> Sisypos-이귀복
-시시포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가장 나쁜 일을 많이해 바위를 계속 굴리는 벌을 받은 자-
전등사:강화도 소재 전등사 대웅전의 지붕 처마 네 귀를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에 얽힌 전설 이야기. 삼인칭 화자의 전지적 시점. 전형적 소실로 쓴 수필이다. 부처님을 모시는 성스러운 대웅보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의 표상을 새겼다는 아이러니는 작가의 해석적 진술은 소설보다 수필의 특징에 해당한다.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 핏발이 섰다. 불사가 끝나지 않은 대웅전 앞뜰에 연장을 던져놓고 퍼더앉아 있는 그의 얼굴이 떨리고 있다. 분고 괘씸하다. 그러기에 자신이 아랫마을 주막을 뻔질나게 드나들 때붙너 계집은 믿는 게 아니라던 동료들의 귀뜸을 새겨들었어야 했다. 피붙이 하나 없는 몸이 공사판으로 흘러들어 도목수가 되기까지 아는 것이라곤 오로지 집 짓는 일뿐인데, 어찌 계집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으랴.
외로운 남정네를 품어주던 그 웃음만으로 그저 사랑이라 여겼는데 날벼락도 유분수지, 맡겨놓은 품삯까지 모조리 챙겨들고 야반도주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하늘 아래 이런 괘씸한 계집을 보았나.
전등사의 중건불사를 맡은 최고의 기술자 도편수, 자신을 배반하고 달아난 계집에 대한 분노로 온몸이 타들어가고 있다. 이런 마음을 숨긴 채 신성한 불사를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쳐가는 사내를 곁에서 바라보는 스님의 억장도 함께 무너진다. 그렇다고 마무리만 남은 이 술사를 지금에 와서 누구 손에 맡기겠나. 1ㄴ연이고 2년이고 그의 마음이 진정되길 기다리는 수빡에. 손끝 야물고 성실했던 그가 그리도 쉽게 계집의 꾐에 넘어갔는지 어리석음에 기가 막히는 건 스님이라고 다르지 않다.
계집에게 돈을 뺏겼으면 마음이라도 잡고 있든지, 마음을 주었으면 돈일랑은 부처님 복장에라도 숨겨놓았어야지, 우직한 도편수로 살아온 사십년을 몽땅 도둑맞았구나. 부처님 집을 짓고 살아온 사내라 보통 중생과는 다를 줄 알았더니 어리석긴 더하였구나. 혀를 차며 돌아서는 스님의 장삼 자락에 천근의 번뇌가 내려앉는다.
추위가 오려는지 대웅전 뜰에 풋눈이 분분하다. 사내의 뺨에 들러붙는 시린 눈발의 감촉, 사내가 소스라친다. 살갗의 기억은 어제인 양 또렷하다. 돈을 맡기던 날 밤, 계집이 퍼붓던 뜨거운 입술의 촉감이 이 눈발 어디에 숨어 있었던가. 뺨이 화끈하다.
그래 얼음이 불이었고 사랑이 증오였구나. 이제 그 못된 계집의 형상을 빚으리라 지분 냄새 향기로 사내를 호려 재물을 빼돌린 야차 같은 년, 인간의 신뢰를 져버린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빚어 세세만년 벌하리라.
목재더미로 향하는 사내의 얼굴이 굳어있다. 못된 통나무 하나를 골라내어 눈발을 털어낸다 그는 이제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환 방법으로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정면대결하려는 것이다. 통나무 허리에 톱날을 올려놓은 사내의 눈빛에 광기가 번득인다 삽시간에 내 개의 나무토막이 법당 앞에 널브러진다. 시신을 잃어버린 수갑이 따로 없다. 낭자한 선혈, 대웅전 앞마당에 시퍼런 살기가 돈다. 사내를 가엾게 여기던 부처님조차 민망한지 고개를 돌린다.
잘린 나무토막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 서서히 물기가 어린다. 그렇다. 지난 시간을 제대로 도려내기 위애선 그 기억을 일부러 피해서는 안 된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기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고통으로 힘든 사내가 눈을 감는다.
여인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운다, 배꽃 사이로 달이 지던 어느 봄맘, 여인과 나누던 술잔에서 꽃향기가 났었지;. 그뿐인가. 소나기 같은 열정으로 여인을 안던 원두막에서의 여름 밤과 불사가 끝나면 함께 살림을 차리자던 여인의 맹세는 어디로 흘러갔는가. 사내가 세차게 머리를 흔든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모든 건 헛것이었고 남은 건 분노뿐,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계집을 향한 분노는 떨쳐내어야 한다. 뱀처럼 감겨드는 고통의 시간은 도려내야 한다.
식음도 폐한 몇날 며칠을 사내는 나무만 주무르고 있다. 네 개의 토막으로 십이지신상을 빚을 리도 없고, 끌로 파내고 다듬은 양으로 보아 무슨 동물을 조각하는 것만은 분명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사내의 심기를 건드리까 조심스러워 스님도 그저 ㅁ너발치에서 지켜볼 뿐이다.
앞산 잡목들이 잔설을 털어내는 봄, 사람도 아니고 짐승 아닌 기이한 형상 앞에 사내가 앉아 있다. 분노로 타들어가던 그의 얼굴이 많이 야위어있다. 날이 풀리길 기다린 닺ㄴ청장이 대들보에 단청을 입히는 걸 보니 이제 때가 온 것 같다.
사내가 단청장을 부른다. 비로소 사내의 목소리에서 도편수의 권위가 느껴진다.
“이것에 단청을 입히시오. 온몸은 붉게, 그리고 두 눈은 푸르게 칠해 주시오.”
사내가 빚어놓은 네 개의 형상, 어떤 것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고, 또 다른 것은 왼손을 들었다. 짐승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괴물을 본 단청장의 얼굴에서 곤혹스런 표정이 역력하다. 연신 고개만 갸웃거리는 단청장 옆에서 스님이 비로소 입을 연다
“대체 무슨 동물으 형상이기에 이다지도 흉물스럽단 말이오? 혹시 그대가 절집을 수호한다는 원숭이를 잘못 빚은 게 아니오?” 사내의 얼굴이 지옥처럼 어둡다.
“스님, 신뢰를 저버리고 달아난 주막집 계집의 형상입니다. 부디 이 계집으로 하여 이 절집의 대들보를 ㅈ받치도록 해 주십시오.” 스님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황망하기 그지없다.
겨우내 돌아앉아 빚어낸 것이 다름 아닌 네 가슴속의 원한덩어리였구나. 나는 그대가 여인을 잊어벌길 날마다 부처님께 발원하였건만 용서란 결국 시간이 필요한 것을. 그대의 마음이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져야 가능한 일임을 나도 이제야 알겠네.
그러나 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스님, 이번엔 사내를 넌지시 달래어 본다.
“그대는 분노를 엉뚱한 곳에 풀지 않고 이 나무토막으로 삭히는 법을 알았으니 이미 분노로부터 해방된 것이오. 그래도 이 여인을 처마 밑에 꼭 매달아야 하겠소?”
“예, 악연이 반독되더라도 저는 이 계집을 꼭 대들보에 매달고 싶습니다.“
“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부처님조차 그대에게 용서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니.”
외곬의 사내가 딱학기만 하다. 분노인가 집착인가. 스님도 가늠이 어렵다.
사내가 사다리에 올라 기어이 계집을 끌어올리고 있다. 죄지은 계집은ㅇ 꼼짝없이 처마 끝에 쭈그리고 앉아 징른 죗값을 치르기 시작한다.
전등사의 대들보, 그건 온전히 발가벗은 그녀ㅓ가 담당해야 할 몫이다.
대달보가 무겁다고 내려놓을 수도 없거니와 죄인인 주제에 그 대들보에 목매달아 죽을 자유는 더더욱 없다. 죽음보다 무서운 권태. 여ㅓ인이 그대로 시시포스인 것을.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랴. 여인의 탐욕도 사내의 분노도 모두 우리들 모습이다. 삶은 죽ㄹ음으로 완성되고 사랑은 이별로 완성되는 법. 우매한 사내가 감히 그걸 짐작이라도 했을까. 그러나 그 사내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감정에 솔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내으 분노 그대로 인정한 스님, 그는 ?끝내 이 말을 참았는지도 모르겠다.
“전등사에 나부상이 존재하는 한 도편수는 그 여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 간반의 그 무서운 바람에도 ‘끄떡없는 풀들을 보며 작은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과 평화를 생각한다. 작은 것들의 작은 행복이 새삼스레 소중해 보였던 오늘, 나는 비로소 내가 작은 존재임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페르소나(가면을 쓴 인격)>-송복련
연극에서 페르소나는 가면이라 하는데 여러 개의 퍼즐을 맞추듯이 이루어진 이 가면은 인간의 성적 욕망을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큐레이터가 말한다. 남녀가 어우러진 세상은 아름다운 펴즐의 페르소나를 떠올리게 한다. 마치 세상은 수수하거나 화려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거나 험상궂은 탈을 쓴 사람들이 한바탕 마당굿을 벌이는가 싶다. 누구를 위해 나를 가꾸거나 포장한 일은 없었던가. 가는 곳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나마의 페르소나를 고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뱀 허물처럼 몸을 뒤집으며 후딱 빠져나간 시간의 빈 곳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본다 . 집은 헐렁한 차림과 민낯으로 있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공간이다. 지하철에서 화장을 끝낸 그녀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너그러운 페르소나로 바뀐다. 모두가 무미건조한 표정과 자세로 돌아가자 지하철은 다시 익숙한 공간이 된다. 강물이 거울 같은 수면을 간직한 채 흘러가듯이 저마다의 생ㄹ각 속으로 젖어들거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무료함을 달랜다.
<바람 부는 날엔> 심선경
바라 부는 날엔 춤추고 싶다. 옥상 위에 널린 하얀 이불 홑청이 되어 출정하는 배의 돛폭처럼 허공으로 힘ㄴ차게 펄럭이고 싶다. 살아갈수록 때가 끼는 마ㄹ음 자락을 씻어내어 볕 좋은 날 빨랫줄에 나란히 널어 말리고 싶다. 묵은 세월에 얼룩지고 땀내에 전 나를 ?빨랫방망이로 탕탕 두들겨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행궈내고 싶다.
어릴 적·할머니는 빨랫비누에 치댄 속고쟁이를 우그러진 놋양푼에 담아 바글바글 삶곤 하셨다.(중략) 살아가면서 얼마나 속을 삭이고 얼마나 더 너그러워져야 외할머니의 구멍 숭숭 난 속고쟁이처럼 나달나달해지는 것일까? 거푸집 같았던 외할머니의 속옷을 개킬 때마다 부슬부슬 떨어지던 삭은 옷밥처럼, 가끔은 메마르고 궁상스런 삶이 삐죽대며 고개를 내밀 때가 있다.(증략)
빨랫줄 하나에 온 식구가 다 덜려 있다. 바람이 덜어주고 햇살이 말려주지만, 식구들의 몸무게만큼이나 잔뜩 무거워진 빨랫줄을 바지랑대 혼자 이 고 섰다. 촘촘하게 자리 잡은 빨랫줄 위의 가족들, 어머니의 레잇 달린 블라우스 옆에 아버지의 긴 바지가 슬쩍 다리를 걸치고, 형의 운동복 윗도리에 플라스틱 빨래집게로 집힌 동생의 양말 한 컬레가 냉큼 올라앉아 있다.
울타리 가득 널려 빛나는 것는 빨래가 아니라 우리네 정다운 삶의 모습이다. 단절되었던 세상 인심의 긴 줄로 다시 잇고, 얼룩진 양심은 양푼에 삶아내어 널어 두면 목화솜 같은 인정이 피어난 빨랫줄이 한바탕 신명나게 춤출 것이다 맑은 바람, 밝은 햇살 아래서 빨래들은 생기 푸른 나뭇잎처럼 피가 돌아 반짝이고 우리들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울지 모른다, 서로 옹송거리며 몸 부비는 빨래들처럼 그렇게 붙어 살다보면 이심전심 아닌 것이 하나도 없을 듯하다.
삶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세상ㄹ의 이쪽과 저쪽을 구분지은 듯, 긴 바지랑대가 갈라놓은 빨랫줄에 빈틈없이 널렸다 걷히며 다시 더러워질 것을 마다하지 않는 눈부신 흰 옷의 반짝임 같은 것. 지난날 돌이켜보며 후회하기 보다는, 남은 날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희망을 걸고 행복을 걸어보는 것, 설령 아침나절에 내걸어놓고 걷어야 할 시간을 깜빡 잊어버려 밤이슬 맞으며 비바람에 젖는 신세가 될지라도 빨랫줄 같은 아찔한 삶의 무대에서 함께 나란히 흔들리는 것.
낮에는 홀로 비어있던 집에, 저녁이 되면 뿔뿔이 헤어져 있던 식구들이 돌아와 다시 빨래로 널릴 것이다. 순하지 않은 바람에 때로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삭은 빨래집게의 느슨한 힘이지만 우리를 함께 묶어 두는 삶이었기에 정녕 외롭지만은 않은 것이다. 외줄에 힘겹게 매달려서도 빨래들끼리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은 살 맞대고 살 수 있다는 끈끈함에 젖은 가슴 말리며 덩실덩실 춤추는 것이다.
가끔 옥상 위에 올라 바람네 날리는 빨래들을 본다. 나도 저 빨래들처럼 부는 바람에 자유롭게 몸을 내맡길 수 있다면 저리 가볍게 흔들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든다. 저 빨래들이 의지하고 있는 외가닥 ‘빨랫줄과 새로 산 플라스틱 집게의 완강한 악력의 의미를 깨달으려면 나는 또 얼마나 더 세상과 부딪치고 깨어져야만 할까.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닌 것이다.
이 세상에 저 홀로 자랑스러운 것이 무엇이랴. 저 홀로 반짝이며 살아 있으면 무엇하랴.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도 발길에 채는 돌멩이 하나도 저 혼자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없다. 서로 어깨를 맞대고 얼굴 부비며 힘든 등 토닥이며 사는 것이다. 낡은 신을 신고 걸어가야 하는 먼길지만, 반드시 닿을 내일이 있다는 것을 철저히 믿기에 그 길을 어깨동무하며 함께 가는 것이다.
털어도 또 털어내도 먼지 많은 내 마음속, 흐르는 물로 깨끗이 씻어낸 날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던가. 너무 오래 빨지 않아 곰팡이가 피지는 않았을까. 살아있는 동안은 묵은 죄를 씻어내듯 어둠을 흔들어 말갛게 나를 헹귀내고 싶다.
<끝을 누르는 꽃>호박꽃-김광영
후미진 곳이어도 좋다, 버려진 땅이어도 좋다. 잡초들 틈에라도 심어만 주면 꿈을 이루리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피어나는 꽃이 아니와다, 오늘보다 내일을, 당대보다는 후대의 번영을 위해 피어나는 곷이외다. 눈으로 사랑받기보다는 소신공양이 되길 원하고, 푸른 날의 인기보다는 끝이 무겁길 원하나이다. 꽃으로 인정해주지 않아도 슬퍼하지 않사오니 제발 다른 꽃과 비교하지 마시와요.
야트막한 산비탈이나 밭둑에서 수더분하게 피러아는 호박꽃을 보면 그런 암시를 받는다. 사래 긴 밭이랑 한 평 차지 못해도 탐스러운 열매랄 맺는 걸 보면 거룩한 어머니의 모성을 느끼게 한다. 궁핍 속에서도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많은 자식을 길러내시던 우리들의 자상한 핏줄을, 매혹적인 향기 대신 정결한 어머니의 살 냄새를 풍기는 호박꽃은 자신을 가꾸지 않는다. 폭염 속에서도 오로지 열매를 찌우려는 열정만 가득ㄷ해서 넙죽한 잎들엑 자양분을 자아 오리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잎들의 광합성작용은 열매보다는 꽃을 위하는 듯, 짙푸른 엽록ㄷ소를 만들어 외모에 자신 없는 꽃송이를 받들어 올리기에 여념이 없다. 잎은 꽃을 위하고 꽃은 열매를 위하는 삼각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조용히 피어나는 유순한 꽃이다. 아침이슬에 촉촉이 젖은 호박꽃을 보면 황록이 대비되어 머릿기름을 바르고 친정걸음하시는 어머니가 늘 떠오른다. 때로는 수건을 쓰고 밭이랑에 엎드린 할머니꽃이라 해도 서운함은 잠시뿐인 것 같아서 무던하고 대범한 여장부의 꽃이라 불러야 어울리는가 싶다.
꽃과 여자에게 공히 통용되는 아름다운 만고불변의 법칙이리라, 색스럽지 못해 눈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호박꽃을 보면 그래서 더욱 측은해진다. 모름지기 꽃이라면 예뻐야 한다는 가치 기준이 바뀌지 않고는 못난 꽃이란 별명은 면할 수 없지만 그렇게 생긴 것을 후회하기는커녕 운명은 만들어가며 사는 것이라고 자위하며 피워내는 기색이다. 그러나 어떤 못난 꽃도 한 가지 매력은 있는 법이다. 편안하면서도 은근한 호박꽃에 벌들이 날아들면 제 몸의 꿀을 몽땅 털어주어도 아깝지가 않다. 그들로 인해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까.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훔쳐온 불씨의 색깔, 황색을 선호하는 그는 꽃이라기보다는 주변을 밝히는 한 촉의 촛불인가 싶다. 철부지 적 기억 속에 잠긴 호박꽃을 건져 올려도 아련한 초롱불로 살아난다. 벌이 앉은 그 꽃을 감싸 쥐고 초롱불 밝히라고 노래했던 순수했던 동심에도 꽃불로 보였으니 화火신이 화花신으로 착각하며 피는 꽃인가 싶다. 그래서 꽃 중에 선각화(남보다 먼저 깨달은 꽃)로 보인다. 신이 꽃과 열매를 두고 한 가지만 택하라고 했을 때 열매를 택한 지혜로운 꽃이다. 인간의 눈에 들기보다는 차라리 입으로 먹히어 우주를 조종하려는 야망을 품은 꽃이다.
머나먼 남미의 하늘 아래에서 이주해온 호박꽃은 이민가의 후손이다. 이 땅의 토종은 아니지만 슬기롭게도 성공하는 조건 운, 둔, 근, 세 박자를 모두 갖춘 꽃으로 보인다. 기름진 이 땅에 이주한 것이 ‘운’이고 매혹적이지 못해 관심 밖이지만 그로 인해 꺾이는 화를 면할 수 있는 것도 운이다. 그깟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하게 피어나는 꽃이다. ‘둔’하게도 넝쿨이 휘어지게 무거운 열매를 맺어 고생을 하지만 아둔했으므로 구성원을 늘릴 수 있었다. 무리수가 곧 힘이란 것을 예지한 현명한 꽃이다. 제아무리 고운 꽃도 이울면 썩어야 하는 순리를 알기에 찬서리 내릴 때까지 끝열매를 맺는 부지런함이 ‘근’에 속한다. 갈바람에 배틀하게 넝쿨이 말라가면서도 끝끝내 꽃을 피워 꿩알만 한 호박이라도 맺어보려는 애착 때문에 성공하는 것이다.
제 한 몸 가꾸기에 안달인 꽃들은 갈바람이 불면 허무하다. 바싹 마른 꼬투리에 고추잠자리 앉혀놓고 서글픈 대리만족으로 위안을 삼는다. 건너편 밭둑에서 달덩이같이 덩실덩실 떠오른 건 젊은 날 못생겼다고 설움 받던 호박꽃의 열매들이다. 꽃 축에도 못 들던 꽃이 우러러 칭송을 받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는다. 못난 꽃이란 소리도, 두루뭉슬한 여자의 대명사도 달게 받아넘기는 치마폭 넓은 꽃이다. 그만하면 눈부시게 거드름 한번 피워보련만 호박꽃은 언제나 점잖을 뿐, 맥이 없어 보인다.
머나먼 마추픽추의 하늘빛이 그리운 걸까? 안데스 산자락의 흙냄새가 고프고 소달구지 덜컹거리던 석양 길이 그리운 걸까? 그러나 이제 호박꽃은 제 2의 고향인 폭신한 이 땅에 뿌리내리며 습을 길들여야 한다. 이민자의 후손으로 이곳에서 피고지기를 되풀이하며 묵직한 열매로 끝을 누르는 데는 인고마저 터득해야 한다. 헛방(허드레방)에서 촌로들과 함께 대처로 빠져나간 자식들의 빈자리를 메우면서 또다시 내년을 꿈꾸어야 한다.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안데스 계곡의 물소리를 그리워하면서<수필과 비평>2008.1,2월호
<남편 사용설명서가 없어서>-정성화
아무리 다리를 뻗어도 발이 브레이크에 닿지 않았다. 온몸이 뻣뻣해지면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앞차와 충돌하기 직전 다시 힘껏 다리를 뻗었다. 그 순간 “아야”하는 남편의 목소리. 꿈이었다.
꿈은 현실만큼 절실하다 특히 악몽인 경우에는 극적인 상황에다 빠를 전개, 박진감 넘치는 구성으로 해서 꿈꾸난 이를 거의 초죽음의 상태로 몰고 간다, 등이 축축했다. 꿈에서급금정거를 한 탓인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남편의 차를 몰고 가다 접촉 사고로 흰 페인트가 그어진 선을 본 후 운전은 사용설명서를 잃어버린 전자제품처럼 조심스럽고 부담스럽다는 이야기)
한 남자와 살아가는 일, 그것도 나에게는 또 하나의 힘든 운전이다.
마침내 그가 바다로 풀려나 짐을 싸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제 우리가 한솥밥ㅇ들 먹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거웠다. 밥 끓는 냄새를 함께 맡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이 순해질 것 같았다. 나란히이 꽃혀 있는 그와 ㄴ으 칫솔, 빨랫줄에 걸린 어깨걸이 러닝셔츠와 사각 트렁크. 읽다 접어둔 스포츠신문 등.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사소한 것들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첫 한 달은 하루하루가 신바람 메들리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마법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이의 코털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더니, 차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정사에 대한 자잘한 간섭으로 느껴졌다. 사소한 일에도 우리는 서로 각을 세웠다. 냄비 속으로 퐁당퐁당 수제비 반죽을 같이 떼어 넣다가고 삐걱거렸다. 수제비란 원래 나풀거릴 정도로 야 ㄹㅂ아야 맛이 나는 법인데, 내가 떼어 넣은 수제비가 모두 뚱뚱하다는 것이었다. 삶언 감자를 앞에 두고도 그는 소금에 찍어 먹어야 한다고, 나는 설탕을 넣고 으깨 먹어야 한다며 말다툼을 했다. 그때 만일 ‘말을 하는 감자’가 있었더라며 둘이 씩씩거리며 그 감자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부부 싸움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이에게 그 비결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편을 그저 ‘어쩌다가 한집에 살게 된 사람’쯤으로 생각하면 열 받을 일도 싸울 일도 없더라고 그것은 남편을 거의 의식하지 않겠다는 작정이며 남편에 대한 기대를 거두었다는 의미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잘 살아가는 부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 차례 빛과 어둠이 감아들던 때인지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편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 유난을 떨던 내가 이 무슨 변덕인지.
고수 검객은 원래 눈을 감고도 바람ㄴ의 결을 읽어내는 법, 나에게 일임했던 ‘가정사 작전 통수권’을 그가 서서히 거두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파워게임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전에 내가 누리던 자유와 내가 지배하던 영토를 내놓기가 아까웠다. 나는 밥그릇을 빼앗긴 강아지처럼 걸핏하면 으르렁거렸다. 선박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모든 결정권을 손에 쥐고 생활해온 그로서도 나의 반발과 불복종을 감당하기 쉽지 않을 듯 했다. 뒤집힌 서랍 속처럼 마음이 어지러웠다.
전자제품의 사용설명서는 빠짐없이 나와 있으면서 왜 ‘남편 사용설명서’는 없는지. 그게 없다면 ‘부부 싸움 예상 문제집’이라도 한 권쯤 시중에 나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느 한 사람이 다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한다면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똑같은 꿈을 자구 꾸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듯했다. 차의 브레이크를 찾지 못해 쩔쩔매던 꿈은, 어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을 게다.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이, 일부러 부딪쳐 가며 스릴을 만끽하는 범퍼카 놀이가 아닌 줄 알면서도 여전히 범퍼카 안에 앉아 있는 나. 그런 나의 모습은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꿈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내 삶의 내레이터는 결국 나일 수밖에 없으니까.
바다에 묶인 한 마리 짐승처럼 살다가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져 돌아온 그를 향해 시도 때ㅔ도 없이 돌격하는 나, 전자 제품의 버튼을 함부로 눌러대는 아이처럼 그의 감정을 있는 대로 건드리고 있는 나, 나는 정말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사람인가. 오랜 침묵과 외로움의 끝에서는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눈을 그윽이 들여다보게 된다 던데 왜 나는 그리 못하는지. 그를 내 마음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 눞혀 놓고 그를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재단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우리가 얼마 동안 갈등을 겪었던 이유를 짐작해 본다. 아무래도 우리는 서로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 같다. 말로 표현하지 못한 것들이 담겨있는 눈빛이나 표정, 그리고 말의 뒷모습을 미처 살피지 못한 것 같다. 육지 언너에 서투란 그를, 바다 언어에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서로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였더라면…….
아는 만큼 봉린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 나는 열심히 그를 ‘독학’하고 있다. 그가 반찬을 한 젓가락 먹고 난 뒤, “이거 아직 많이 남았나?‘라고 했을 때는 그 반찬이 아주 맛없다는 뜻이며, ”그냥 먹을 만하다.“라고 했을 때는 그 반찬을 목 뒤로 넘기기가 다소 힘이 듣나는 뜻임을 근래에 알게 되었다. 이제 ’식생활 편‘은 어느 정도 개념이 잡혀가는 듯하다.
다들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아가는 걸 보면, 분명 그들은 서로에 대햔 사용설명서를 손에 쥐고 있는 듯하다. 아무도 보여주지 않고 빌려주지 않는 ‘남편 사용 설명서’를 나는 남편의 얼굴에서 조금씩 읽어가고 있는 중이다. <에세이 문학>2007, 겨울호
<해질 무렵>문혜란
ㅈ바람이 차다. 모자를 눌러쓰고 두터운 머플러로 어깨를 감쌌다. 아침저녁 달리던 공원길을 느릿느릿 걷는데도 숨이 차다 앓고 난 후유증은 한순간에 중녀에서 노년 쪽으로 기운 느낌이다.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해바라기하는 노인들 곁으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며 씽씽 미끄러져 가는 젊은 이들이 눈부시다.
낙엽 쌓인 샛길을 따라 등성이를 오른다. 샛길에서 만날 수 있는 세상의 옆모습에 애정이 간다. 바람에 사운대는 시누대(화살 만드는데 쓰는 가는 대나무) 잎이며 나뭇가지를 떠난 잎새에서 떠나아 햘 때 떠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본다, 텅 빈 들판엔 알곡 다 빼앗겨 버린 볏단끼리 서로의 시린 몸을 부둥켜안고 섰다. 한발 남은 햇살도, 통통하게 살 오른 무들이 뽑혀 나간 무밭의 푸른 잔해들도 애잔하다, 저무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다.
솔밭 벤치에 황혼의 부부가 앉아 있다. 석양ㅇㄹ 바라보는 두 ᅟᅭᆺ사람ㄴ의 눈빛이 고요하고 깊다, 하루의 고된 일과를 끝낸 농부가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만종>을 떠올릭 한다. 남편이 입고 있는 잉크 빛 체크무늬 남방셔츠와 포도주색 브이넥(삼각, 브이자로 파진 목둘레) 스웨터가 제법 낡았다. 젊은 날에 입던 옷인 듯 화려하지만 그의 회색 머리카락과 잘 어울린다.
크림색 모자로 회색 머리카락을 살짝 가린 부인의 차림새도 고급스럽지 않으면서 단아하다. 얼굴 가득한 세월의 나이테는 그 사람 생의 지문인 듯 가지런하고 곱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절제된 언어와 눈빛을 교환하는 두 사람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인상적이어서 자꾸 눈길이 간다.
나는 요점 나이듦에 대한 화두에 바짝 골몰해 있는 터다. 늙음도 참 괜찮구나 싶다. 단지 외양에 대한 느낌만은 아니다. 우울과 쓸쓸한 빛깔로 여겼던 회색 머리카락에서 방황을 종료한 사람의 원숙함을 본다. 삭고 삭은 다음에야 베어나는 여유와 초월함 같은 것이다.
팔팔하던 젊은 날에는 노인을 보는 시각이 삐뚜람했다. 나 자신이 노인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늙음은 낡음이며 노인은 인색하고 강팍하다는 선입견으로 가득했다. ‘염치없음’이 늙음의 속성인 줄 알았다. 남루한 ㄴ륵음을 견디느니 무궁화 꽃잎 지듯 시들지 않고 한순간에 뚝 떨어져야지. 늙지 않고 죽음에 이르는 환상적인 꿈을 꾼 것이다. 삶과 죽음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오만으로 가득했던 젊은 날이었다.
생장작 같은 사고들이 언제부턴가 슬며시 사라졌다. 노인에게서 세상을 포용하는 인자함을 배운다. 늙어도 낡지 않은 사람을 본다. 늙을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사람도 보게 된다. 늙음을 보는 시각이 따뜻하게 선회한 것은 나도 그만큼 늙어 간다는 증거이리라. 늙음이란 것이 젊음이 끝나는 어느 날 별개의 삶처럼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삐걱거리는 육신이 가르쳐 주었다. 귀천의 순간까지 유예된 오늘을 아끼며 살라는 의사의 당부다.
‘나는 지금 내가 꿈꾸었던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볼 때가 있다.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의 모자람에 대해 예전만큼 조바심내거나 닦달하지 않는다. 나이는 자신에게도 너그러워지라는 선물이 아닌가 싶다.
나는 젊은 날보다 적당히 늙어가는 지금이 좋다, 그렇다, 인생은 어느 니아나 살아 볼 만하다. 나이 들어서 무슨 재미로 살까? 이렇게 묻는다면 늙어 보지 않은 사람의 우려일 뿐이다.청춘은 셀렘이 있으나 버거웠고, 중년은 아등바등 사느라 숨이 찼고, 황혼은 좀 외로울지언정 안도가 있을 것 같다. 이제 바깥의 유혹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 좀 더 늙어도 좋겠다.
그러면 초조가 사라지고 내 안의 유혹에서도 자유로워지겠지.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이 앉았던 벤치에 앉아 본다. 통나무를 잘라 이어붙인 벤치의 나이테는 고르지 않은 간격으로 세월을 담고 있다. 때로는 촘촘하게 때로는 성글게, 나무가 겪은 삶의 충만과 결핍, 고통과 기쁨이 느껴진다. 나이테는 나무 삶의 이력서다. 사람의 한생애오 별반 다른 것 같지 않아 손바닥으로 쓸어본다.
나이를 먹는다고 온화함이 그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닥불의 온기 같던 두 사람의 담담한 눈빛도 한때는 맹렬하게 달군 적이 있었으리라. 사랑의 가시, 경쟁의 가시, 미움의 가시, 꾸준한 자기 연마를 통해 교만과 고집의 가시가 하나씩 덜어져 나가면서 자기 인생의 씨실과 날실을 짜 넣었으리라 생의 나이테가 한 줄 한 줄 그려지는 동안 고통과 기쁨으로 울고 웃었을 테지. 그로 삶의 고비들을 무사히 넘어와 평온해진 황혼의 남녀가 슬프고도 아름답다.
출발선에 선 젊은이에게 환호와 격려를 보내듯, 혼신을 다해 경주를 끝내고 결승선에 다가선 노인에게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영남수필>39호. 2007년 12월
· 독자는 수필 속에 있을 때는 삶 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을 때는 수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바흐찬
문학(수필)이 삶의 질을 고양하는 보배로운 것으로 우리 곁에 영원히 남기를 희망한다.
군걱정
석학(학식이 많고 깊은 사람)
구순:서로 사이가 좋아 화목하다.
독서상우 (讀書尙友) 책을 읽음으로써 옛날의 현인들과 벗이 될 수 있음을 이르는 말.
도원:무릉동원이 이상향
도리암직:
‘도리암직하다(동글납작한 얼굴에 키가 자그마하고 몸매가 얌전하다)’의 어근.
흙짐을 져 나른다. 한 짐 두 짐, 무게를 지탱하는 두 정강이가 걸음마다 무겁다. 생각의 무게는 있으니 둔탁하고 깊이는 있으나 반짝거림이 적으니 그들과 발맞추기가 제곱으로 힘이 켠다. 나를 찾는 작업이기도 하 다. 사실 내 안의 나를 찾는 것은 자신을 더 힘들게 하고, 고문을 가하는 것이며, 진저리를 일으키는 일이다.
·인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가장 활동적이며 철저하게 혼자 있을 때야말로 가장 고독하지 않다. 대화에 목마르지 않는 사람들은 글을 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석가도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책을 남기지 않았던 것인지.
<국화꽃 피는 궁전>-박혜숙
일부러 큰 길 가에 차를 세웠다. 노란 가을햇살 아래 뭂씬 풀ㅇ기는 벼ㅗ향기에 마음이 풍요롭다. 인천 살던 친구가 고향으로 살림을 옮겼다기에 찾아가는 길이다. 논틀 건너에는 하얀 집이 산자락에 안겨 있다. 세집은 방금 내려놓은 커다란 선물같다. 마당에는 노란 국확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는다.
혼자 생활하는 노모가 맘에 걸린 것이 어디 막내아들뿐이었을까. 대처로 나간 자식들의 ㅈ부름에도 어머니는 고향집의 대들보처럼 꿈적 안 하셨다. 결국, 자성에 끌리듯 자식ㄹ이 어미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귀향 신고를 한다 하여 지인들이 모였다. 마당에 차려놓은 음식 위로 가랑잎도 기웃거리고, 반쪽자리 드럼통 위에서 삼겹살이 익어간다. 호사가(일 벌리기 좋아하는 사람)의 가든파트가 별거나 싶게 화기애애하다.
남의 선물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집 안을 둘러보녀 치신 스타일의 실래잔시과 짜임새 있는 구조에 칭찬과 부러움이 섞인다, 그보다는 불편한 생활 여건을 감수하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온 효심이 내심 부러웠다. 볕이 함빡 들어앉은 어머니의 방엔 집안 어른들의 술자리가 흔쾌(기쁘고 유 쾌)하다. 그런데 안팎으로 북적이는 살마 중에 정작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마당 한편엔 세월의 더께 눌린 오래된 집이 그대로 있다. 새집과 비교되어 더 초라한 모양새가 곳간 열쇠 내주고 뒷전으로 물러앉은 안방마님처럼 측은해 보인다.
“맘이 편칠 않아.”
헌집을 왜 그대로 두었을까 궁금해 하는 등 뒤에서 친구가 던진 말이다. 편하게 모시라고 집까지 새로 지었건만 정작 당신은 살던 집에서 옮길 생각을 안 하신단다.
어머니는 달팽이처럼 몸이 익은 당신의 낡은 집이 더 편안하시단다. 오래된 집은 새집민큼 편리한 구조는 아니,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망백(91세를 바라봄)에 이르도록 서로에게 길든 보금자리다. 줄줄이 자식을 낳아 길렀고, 하나씩 떠나는 자식들의 등 뒤에서 외로움을 삭이던 곳이다. 달ㄹ아난 세월이 부엌이며 헛간에 숨어 있고,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이 방 저 방 문지방을 넌마드는 것 같은데 이곳을 어찌 버리겠는가.
이따금 고궁을 찾을 때가 있다. 웅장하고 화려한 편전을 지나쳐 왕조의 위업을 더듬어볼 일이다 그런데 나는 생뚱맞게도 편전을 지나쳐 내전은 먼저 기웃거린다. 궁걸은 나랏일을 보던 곳이기도 하지만 온갖 궈넷와 영화를 누렸을 최상의 주거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호사(호화롭고 사치한)를 누리며 살았던 여인 ㅈ붕엔 암투와 정쟁의 회오리 속에서 파란한 생을 보낸 이들도 많았다. 궁궐의 높은 담은 여인이 누릴 수 있는 일상ㄹ의 행복을 앗아가는 장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부귀영화가 허울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그 웅장한 건축물이 쓸쓸하게 보였다.
집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그 안에 사는 사람의 혼이 담긴 또 다른 형상이다. 좁으면 좁은 대로, 귀퉁이가 내려앉은 채로 삶의 애환이 담겨있는 낡은 집은 어머니의 모습이다. 바깥세상을 모르던 어머니에겐 가정을 지켜주던 아늑한 궁전이다. 더구나 노모를 향해 열려있는 자식들의 마음은 최고의 영화가 아닌가. 당신이 살아 있는 한 이 궁전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새것, 크고 좋은 것만을 선호한다. 아직 쓸 만한 가재도구가 아파트 마당에 내몰리고, 의류 수거함에는 한 주일이 못 가서 버리는 옷이 넘친다. 잘 달리는 자동차도 이, 삼 년 지나면 새차로 바꾸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주장을 펴는 이들도 많다. 자신의 손때가 묻은 물건에 애착을 못 느끼는 것이다. 물자가 흔해서 오는 병폐일 것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이러한 습성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작용하여, 인정과 신의는 멀어지고 잇속에 따라 사람을 사귄다. 그러나 어머니는 구석에 쌓인 먼지만큼 함께 보낸 세월이 애틋하고, 문고리에 찌든 손때처럼 엉긴 정이 소중하여 낡은 집을 차마 버릴 수가 없다.
한사코 마다하는 새집이지만, 하루에 한 번은 그 문을 열고 들어오신단다. 침침한 눈으로 새벽밥을 지어 놓고 출근하는 아들을 부르러 오는 것이다. 반백의 아들에게 아침상을 안겨주는 어머니 앞에서 자식은 오히려 송구하기만 하다. 하지만, 노모의 무릎엔 힘이 붙는다. 당신의 낡은 궁전에서 아들과 밥상 앞에 마주 앉으면 마음은 국화꽃 활짝 핀 가을날이다.
<수필과 비평> 2009년 7,8월호
-이 글은 화제의 해석적 글쓰기에 해당한다.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이 직접적이고 교술(객관적으로 묘사, 설명하는 것)적이어서 서사성이 최소화되고 작가의 직접적 주제 진술이 전면에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이야기가 무성할수록 화제의 의미 부여는 암시적 간접적이다. 형상화에 무게를 실은 결과다. 대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주력하고 주제를 드러내지 않는 문학의 가장 기본적 방법이다.
<거기에 딸이 있었다>-임매자
“딸 닮았다.”
우리는 마주보고 동시에 큰 소리로 외쳤다. 왜 우린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 10ㄴ젼 전 그날, 우리 부부는 박항률 전시호의 한 작품 앞에서 발이 묵였다. 그것은 박항률의 <새벽>이라 작품으로 작품 속에서 소녀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새는 마치 하늘로 날아가려고 준비하는 듯 했다. (중략-대학 졸업 후 독일 유학때 하늘로 날아간 딸 이야기)
작가는 내 딸이 새가 되어 먼 곳으로 날아갈 줄 어찌 알았을까. 아이를 잃고 난 후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생의 밑바닥, 그곳에서 횡행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그리고 끝 간 데 없이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들, 그것은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나의 삶 중 가장 힘들고 참담했던 시절이었다. 영화나 글이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주인인 것처럼 그의 작품은 이제 내 것이 되었다.
새벽에 먼 길을 떠난 아이가 <새벽>에서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그리고 연본홍 저고리 섶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때 지오바니의 피아노 연주가 날아와 40여 편의 작품들에게 옷을 입히자. 풍경 위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많은 이미지의 딸이 내 주위를 돌고 있었다. 나는슬픈 몰입에 빠져 힘없이 탁자에 엎드렸다.
그의 그림, 신비한 환상 속을 휘젓다 나오니 어느새 사람들은 저녁을 둘둘 말아 가지고 나가고 없었다. 창밖엔 어둠이 페인트처럼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박항률의 이미지에 얼마나 물어 뜯겼는지 가슴께가 온통 아파왔다.
<수필과 비평>2011년 7월호.;
· 페지를 모아 돈을 벌기 위한 목적보다는 사살이 그리워 길을 나선다고 항다. 할배의 모습을 아래처럼 묘사하면서 “평생 말보다 몸으로 무딪혀 익히고 나눔을 실천하는 ‘곱새 할배’라고 한다. 엿가락 잔단을 맞추듯 빈 수레 손잡이를 두들기며 지우뚱지우뚱 질척거리는 개양 굴다리로 세월처럼 구부러진 길을 건너온다.
<옹이>-권예란
겨울이 도니 배롱나무 한 그루가 미끈한 속살을 드러낸다. 나무는 제가 가진 것을 다 떨어뜨리고 나서야 고스란히 본모습을 내보인다. 배롱나무의 짙은 분홍색 꽃은 초여름부터 피기 시작한다. 그 분홍색 꽃들이 올망졸망 피면 아담한 키의 여자아이들이 머리에 꽃을 달고 서있는 생각이 든다. 지난여름 찬문으로 보이는 화사한 꽃들은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이젠 가진 것들 다 버리고 나무만 멀뚱히 서 있다. 메마른 가지에는 빈 열매껍질만 달렸다. 말라버린 껍질조차 무겁게 느껴질 만큼 가느다란 가지들이다. 그 연약한 가지들에 많은 꽃송이와 열매를 품고 살았으니 대견하다. 그동안 꽃만 바라볼 줄 알았지 다른 것에는 무심했다.
배롱나무의 줄기에 작은 옹이들이 박여있는 것도 오늘에야 알았다. 긴 시간 동안 꽃이 피어있는 위쪽만 볼 줄 알았지 나무 아래쪽에 굳은살처럼 박여있는 옹이가 있는 줄은 몰랐다. 울퉁불퉁한 옹이에 가만히 손을 대본다.
등딱지처럼 단단한 것이 손끝에 와 닿는다. 옹이는 나무의 상흔이라는데, 몸에 난 딱지를 뗄 때처럼 조심스러워진다. 비록 나무가 사람처럼 일일이 상처가 생긴 까닭을 말할 수는 없지만 아련한 아픔이 내 마음까지 전해진다. 차라니 나무가 그 까닭은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누구에게나 깊은 상처를 들춰내는 게 마음 아픈 일이다. 밑동부터 뻗은 배롱나무의 나무줄기는 여섯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그 줄기마다 옹이의 모양이 저마다 다양하다. 어떤 것은 우물처럼 움푹 파였다. 그 깊은 곳에서는 튼실한 가지로 자라지 못한 한스런 이야기가 주절주절 흘러나올 것 같다. 어떤 것은 혹처럼 불쑥 튀어나온 모양이다 그루터기가 반듯하지 않은 것을 보니 누군가의 힘으로 억지로 부러진 자국이다. 종종 이물이 옹이에 박혀 그대로 굳어진 것도 볼 수 있다. 이물은 나무줄기의 상처와 함께 아물어 버렸다. 저마다의 옹이는 한 그루의 줄기가 지켜내지 못한 나뭇가지의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산다.
사람들도 저마다 크고 작은 옹이들을 갖고 살 것이다. 어떤 사람은 깊이 파인 옹이처럼 자기의 아픔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제 몸에 없던 것도 받아들이며 함께 보듬으면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마음속에도 크고 작은 옹이들이 많이 생겼다. 하늘을 향해 뻗다보면 자연스레 아래 줄기의 잎들은 햇빛을 받지 못항ㄴ다. 결국은 제 몸을 위해 아래 줄기는 죽고 만다. 나무의 아래 줄기처럼 스스로에게 상처 받아 생긴 웅이도 있고, 남에게 일방적으로 받은 상처 때문에 생긴 옹이도 있다, 그러나 이물질까지 받아들여 제 몸으로 감싸 안은 옹이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러저런 생각에 젖어있는 나에게 돌멩이 하나를 꼭 감싸고 서 있는 배롱나무의 옹이가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세상 모든 것들은 다 상처 하나쯤은 갖고 산다며, 나무의 옹이에게 가장 진한 나무의 향이 베어 나오듯, 사람의 옹이에서도 가장 진한 삶의 이야기가 베어 나온다고
<수필과 비평> 2011년. 11월호
<굄돌>윤경화
팔월 하순에서 구월 초순이 되면 야생이 숨 쉬는 풀숲이나 척박한 길바닥까지도 겉모습과는 달리 생명으 기운이 분주하다. 마라톤의 후미그룹같이 뒤처진 생명들의 마무리 노래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식물은 눈만 떠도 씨앗을 달고 벌레는 결미의 가락을 엮는다. 제때 곷 피우고 열매 달지 못하다가 오가는 사람이 뜸해지고 날씨가 선선해지며 바빠지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속귀에 들어온다. 누구 하나 그들 가락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아도 계절의 행간을 알뜰하게 매운다. 마치 자신들리 생태계룰 받치고 있는 굄돌인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수필과 비평>2011.11월호
<꽃피던 날은 가고>이종숙
큰길 사거리에 목련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황홀하다. 겨우네 꽃송이를 준비한 풋풋한 소녀는ㅇ 아기자기한 봉외를 키워 오다가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하듯이 마치 그 모습이 터질듯핟,. 봄날의 쌀쌀한 대기에 몸을 감싸고 있다가 만개할 그날을 얼마나 기댜렸을까?
그러나 하룻밤 사이 부는 비바람에 무너져 내리는 것은 순간이다 떨어지는 꽃잎이 아픈 상처투성이로 한평생 살다간 황혼녘 여자를 연상하게 한다.
깨끗하고 고귀하기까지 한 목녈의자태는 한바탕 휘둘린 빗속에 우아한 모습에서 청흥맞은 모습으로 깊어가는 봄날은 따라서 그렇게 간다.
그곳을 지나면서 여왕 같다고 바라보던 목련이었는데, 자연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후줄근하게 흩어져 나뒹굴고 있는 꽃잎을 보고 있노라면 그 허망함에 우리네 굴곡 있는 인생을 생각한다.
며칠 후 찬란했던 그 가지에 꽃은 간데없고 연초록의 여린 이파리가 옹기종기 몸을 기대고 어우러진 모습으로 있다. 한 세대가 지나고 또 다른 새 인생을 설계하는 듯한 못브이 우울한 마음에 그나마 위로를 준다.
옥이고모가 시집가던 그때ㅔ도 초봄이었다. 신랑신부의 첫날밤을 동네 아낙들은 침으로 문풍지를 뚫고 깔깔대고 훔쳐보았다. 그때도 달빛에 유난히 하얗게 피러 있는 고운 목련이 꼭 옥이고모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울 너머로 떨고 있는 초승달이 왜 그렇게 슬퍼 보였던지 지금도 이유를 알 수 없다. (옥이 고모는 혼례 반년 뒤 신랑의 병사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청상의 몸으로 절절한 세월을 보내고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노파가 되었어도 처녀 적 그 고운 모습은 어딘가에 남아 있어 귀하고 귀한 모습이었다.
옥이 고모는 조용한 성격대로 패랭이꽃처럼 언덕 아래 양지바른 곳에서 스쳐 지나는 바람결에 아들의 안부를 듣고 싶어 해바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올봄에더 폐가가 되어버린 그 집 뒤란의 목련꽃은 여전하겠지 <수필과 비평>2012년 5월호
<새우눈>한경선
바다는 무쇠 솥에 불을 때다가 부지깽이 던져두고 뛰어나와 손을 부여잡고 눈물부터 보이던 언니를 닮았다. 갯벌 가까이 있는 바다는 그랬다. 흙과 바람 속에서 뚜벅뚜벅 걷는 사람처럼 꾸밈이 없고 투박했다. 비릿하고 짭조름한 냄새가 밴 물이라을 일궜다. 바나는 온갖 목숨들을 거두느라 잠시도 쉬지 않는다. 그것들을 부추기고 쓰다듬고 다독이느라 분주하다.
인적 드문 산골에 터를 잡고 하루하루를 엮어내는 언니는 때 묻은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그저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다. 누구를 그립다고 한 적도 없고 삶이 외롭다고 툭 내뱉은 적도 없다. 올망졸망한 아이들 품고 눈 끔벅거리는 일 소 한 마리 먹이는 것이 사는 일의 전부인 줄 아는 듯 했다.
(중략)
질그릇 같은 삶 속에서도 순박함과 따뜻함을 지켜 사람을 품던 그 눈빛이 밟힌다.
바다를 보러 갔다가 새우젓 구경을 했다. 사람들은 드럼통 속 새우를 뒤적이며 탱탱한 허벅지와 붉고 선명한 입술과 투명한 피부를 흥정했다. 붉은 꽃 피던 새우의 첫사랑도 여지없이 소금에 절여 오젓이라며 싼값에 넘기고, 알을 품어 키우던 깊은 육젓을 만들어 시원하고 칼칼한 본능에 버무렸다. 연보랏빛 여린 꿈은 부드러운 풍미와 맞바꿔 자하젓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하젓. 불국사 자하문, 보랏빛 새우와 보랏빛 안개, 청운교와 백운교를 지나 닿는 자하문. 진흙투성이 이 승과 신비한 저세상을 가리고 서 있는 아득한 문, 뿌옇게 비 내리던 날, 불국사에서 올려다본 그 문을 열면 정말 부처의 나라가 있을 것만 같았다. 여린 새우는 제 목숨 보시하고 자하문 너머 세상을 봤을까. 그날 경주 하늘에선 해탈한 까마귀 떼가 까악까악 울었다.
뭐니 뭐니 해도 새우젓은 육젓이 그중 낫다더라. 유월에 잡은 살 오른 새우라야 풍미가 있다더라. 그 말을 믿고 육적 한 그릇을 샀다. 굳이 찍어 맛을 보라는 걸 마다했더니 새우 두어 마리를 입에다 밀어 넣었다. 새우는 간곳없고 간간한 바닷물 한 방울만 혀끝에 스며들었다. 새우젓과 고춧가루를 버무려 깍두기를 담갔다. 매운맛도 짠맛도 서로 내세우지 못했다. 태생도 모양도 맛도 제각기 다른 것들이 버무려져 익자, 시간은 풍미를 저울질했다.
어느 날 무심코 깍두기 한 보시기를 꺼내 놓았다. 그때였다. 곰삭을 깍두기 위에 까만 점, ?따옴표 같은 작은 점이 보였다. 새우눈이었다. 이제껏 살면서 새우젓 넣은 깍두기를 처음 먹은 것도 아닌데 왜 하필 그때 내 눈에 뛴 것일까. 몸은 다 어디론가 스며들고 눈만 남아 있었다.
아직도 바다를 잊ㅂ지 못하는가. 끝내 놓지 못한 이름을 따옴표로 새겼는지, 무엇을 그리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것일까.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 돌아섰노라. 젊은 날 네게 했던 말을 그 앞에선 차마 할 수 없었다.
언니는 병든 남편을 오랫동안 수발하고 있다. 한 번 가려하고 훌쩍 지났다. 새우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살면서 쏟아낸 빈말들만 깍둑깍둑 젓가락질하는데 언니의 맑던 눈빛이 밥상 위를 맴돈다. <에세이 포레> 2012년 여름호.
· 수필은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작가의 고백이 어쩌면 작고 시시한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 삶과 존재에 대한 진실성을 담아 감동과 아름다움을 주는 문학이 된다.
페인트처럼 끝없이 흘러내린다,어미가 햅쌀로 지은 밥 한 끼 먹이려고 등에는 무거운 애를 업고, 머리에는 무거운 쌀을 이고서 몇 백 리 완행버스이 털털거림을 참아내며서 오ᅟᅧᆻ던 , 그 삶의 하증이 등에 업고 온 자식의 무게와 머리에 이고 온 쌀의 중량이, 지금의 굽은 어머니의 등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허리가 굽어 슬프다> 임만빈
동생을 업고와/ㅅ는데 동생이 남의 집 이불에 오줌을 사서 챙피한 생각으로 어머니께 괜히 오서 창피하게 하며 돌아선 죄책감이 흘러 늙어 어머니를 찾았더니 자식이 명태를 좋아한다고 사서 불에 매단라 둔 이야기
“어머니, 웬 명태인가요?”
“사/ㅅ어, 너 긇여 줄려고. 어려서 동태ㅔ국을 좋아했잖아. 어제 시장 바닥을 샅샅이 뒤져도 동태는 없더라 그래 저것들을 샀다.” 아! 허리가 굽어 키가 작아진 어머니가 어제 명태가 땅에 끌리지 ㅇ낳도록 끈을 들어 올리며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와서, 그것들을 힘들게 듪고 오리 길을 걸어 오셨겠구나
“어떻게 저 높은 곳에 명태를 매달 수 있었어요? 누가 도와 줬어요?”
“돕기는 누가 도와 줘. 내가 의자 놓고 벽 집으며 명태 꽁지를 잡고 들어 올려 끈을 못에 걸었다.이 명태는 시원한 바람이 토하는 곳에 매달아 놓아야 맛이 좋거든. 저것들을 내려라. 네가 왔으니 요리해서 먹어야겠다.”
내가 손을 뻗어 올리니 명태를 매단 줄이 손에 닿는다 줄을 약간 들ㄷ어 올려 끈을 못에서 벗겨낸다, 나야 이렇게 수월하게 명태를 내릴 수 있으나 허리 굽은 어머니가 명태 끈을 손에 걸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놀랍게도 항상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아 볼이는 일들을 잘도 해내신다, 텃밭 둑의 풀도 거뜬히 깎아내고 묵정밭도 혼자 일구어 채소들을 심으신다. <수필과 비평>2012.121월호
·<그 겨울의 서울역>-김민숙2
왈칵 쏟아져 들어오는 서녘 햇살에 눈이 부시다. 어둡고 긴 터널 저쪽으로 밝은 점 하나가 서서히 동공을 키우며 다가오더니 마침내 기차가 밝음쪽으로 몸을 내어 놓았다. 햇살 아래 창 밖으 풍광 일제히 반짝이며 움직이고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역사로 올라왔을 때 전광판의 시계는 세 시 반을 알리고 있었다. 주머니 속의 기차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쇼핑몰의 도서 코너를 기웃거렸다. 시간 에세이집 한 권을 사쇼ㅓ 구내식당으로 들어갔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청구장뚝배기를 받아서 창가의 빈 테이블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순가락을 들면서 창 밖을 내다본다. 포도에는 연방 차들이 줄을 섰다가 떠나고 다음 차들이 그 자리를 매운다. 버스에서 내려 역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나 역에서 나와 버스에 올라탄 사람, 모두가 잠시 머물렀다 떠나가는 곳, 서울역은 사람을 오래 보듬지 않는 곳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으로 행진하는 경찰들이 보인다. 줄잡아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그들은 지하철 역 쪽에서 이곳 역사로 들어오는 모양인데 긴장된 표정의 얼굴이 그들의 제복만큼이나 푸르게 보인다. 앞줄에 선 사람들의 손에 든 방패가 새삼 낯설다.
식당에서 나와 보니 주람도 아닌데 대기실의 의자엔 사람들로 거의 차 있었다. 책을 읽을 요량으로 가운데 빈자리로 파고들었다. 표지르 ㄹ이리저리 살피다가 책갈피를 두어 장 넘겼을 즈음이었다. 바로 곁에서 들리는 쇳소리가 귀를 바짝 긴장시켰다. 한 남자가 목소리를 높여 열을 오리고 있었다.(중략) 책속에 있던 활자들이 기어 어디론가 도망을 하는지 눈앞이 어지럽다 . 비어 있어서 무심코 앉았던 자른 골교롭게도 노숙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자리의 가운데였다.
화장실을 들어 3층 대합실을 둘러보았다. 난간의 양쪽 자리를 그들이 포진하고 대부분의 승객들은 상가 근처의 자리에 앉거나 서 있었다. 앳되어 보이는 경찰이 두 명씩 조를 맞추어 규칙적으로 지나갔으나 누구를 지도하거나 제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방패를 들고 사열을 받든 들어온 경찰들의 목적지가 바로 이곳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40대로 보이는 한 여자가 벽면 뒤편에 기대어 잠들어 있다. 남루하고 초췌한 그녀의 눈밑이 거무죽죽하다. 그녀도 한때는 행복한 꿈을 키우던 날이 있었으리라. 무엇이 그녀를 이 겨울의 서울역으로 몰아내었을까. 서늘한 기운이 내게까지 전이되는지 가슴이 새삼 시리다. 한쪽 구석에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신문을 들여ㅕ다보며 수군거린다,. 구인란에서 일자리라도 찾는 것일까. 그 중의 한 사람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구부정한 어깨의 뒷모습이 눈에 많이 익은 듯하다. 우리 아재는 이 겨울을 어디서 보내고 있는 것일까. 그 남자가 고개를 돌리면 아재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자리를 뜰 수가 없다.
나보다 다섯 해나 늦게 태어난 뱃속 아재. 대학을 졸업하고 청춘을 바쳐 열성으로 일하던 회사가 문을 닫았을 때, 그의 꿈도 함께 문을 닫은 사람이다. 주위에서는 아직 젊으니 무엇이라도 다시 시작하지 못하랴 했지만 마흔 후반의 그가 새 직장을 구하기가 쉬울 리 없었다. 자라면서부터 지금껏 칭송받았던 착함과 성실함은 무능과 무기력이 되어 처분된 회사의 기계와 함께 고철 덩어리로 폐기되고 말았다. 두 해 동안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어느 날부터 방안 깊숙이 침잠했다. 남자가 만날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청소도 안 된다고 투덜대는 아지매의 푸념에 슬그머니 대문을 나선 아재는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족도 바람이라도 쐬고 오려니 했었다. 가방 하나 변변히 챙겨 가지 않은 사람이 며칠이나 가겠느냐던 집안 어른들도 열흘이 지나자 안색이 달라졌다. 서울 어느 공원 근처의 무료 급식소에서 밥을 먹는 그를 보았다는 고향 사람의 말에 사흘간 주변을 수소문하였으나 허사였다.
출발 시간 30분도 더 남은 개찰구 앞을 승객들이 늘어서 있닫.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역사를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정면에 걸려 있는 밝고 환한 초대형 광고판은 “레일로 잉처지는 행복한 세상”이라는 문구를 띄워서 승객들을 향해 떠나기만 하년 행복해진다고 부추기는 듯하다.
개찰구로 들어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새롭게 단장한 최신 대합실에서 어두운 터널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역은 사람을 오래 보듬지 않으니 잠시 머물다가 이 플랫폼을 빠져 나갈 것이라고. 기차가 터널을 빠져 나가듯이 머지않아 밝은 햇살 앞에 몸을 드러낼 것이라고.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두고 일부러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서 몇 번이나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에세이 21> 2006년 여름호
· 봄이 오면서 아랫목 같은 따사로운 햇살이 대지를 어루만지니 또다시 새 잎은 돋아난다. 그것처럼 생명이란 순간이 아니라 영속이란 생각이다.-<생활속의 명상>안재진
· 전신주가 뽑히고 자동차가 뒤집혀 부서졌다는 뉴스가 신문에 대문짝처럼 난, 아주 심란한 아침에 줄기가 가느다란 깻단이 아무 이 ㄹ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서 있는 모습을 모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작은 것들은 큰바람이 비껴가는 법이라는 언니 말이 맞았다.<큰 바람은 비껴가고>이정림
· 봄이 오면서 아랫목 같은 따사로운 햇살이 대지를 어루만지니 또다시 새 잎은 돋아난다. 그것처럼 생명이란 순간이 아니라 영속이란 생각이다.-<생활속의 명상>안재진
· 전신주가 뽑히고 자동차가 뒤집혀 부서졌다는 뉴스가 신문에 대문짝처럼 난, 아주 심란한 아침에 줄기가 가느다란 깻단이 아무 이 ㄹ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서 있는 모습을 모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작은 것들은 큰바람이 비껴가는 법이라는 언니 말이 맞았다.<큰 바람은 비껴가고>이정림
① 시렁: 물건을 얹어 놓기 위하여 방이나 마루 벽에 두 개의 긴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
② 살강: 그릇 따위를 얹어 놓기 위하여 부엌의 벽 중턱에 드린 선반. 발처럼 엮어서 만들어 그릇의 물기가 잘 빠진다 (방언은 실겅)
<호드기: 보리피기>-강미나
하늘이 살짝 내려앉은 아침, 다투어 봄꽃이 피었다. 아침밥과 반찬 두어가지, 간식이 든 바구니를 들고 할배를 찾아갔다. 대문은 열려있고, 방안에서는 기척이 없다. 정지문고리에 질러둔 모지랭이 숟가락을 빼고 문을 열었다. 살강 밑 단지에 진달래, 개나리가 꽂혀 있다. 정지간이 환하다. 밥상을 차리려다 꺼내던 그릇을 도로 챙겨 넣고 삽짝으로 나가 섰다. 저 동쪽 모롱이에서 땅을 끌면서 노인이 오고 있었다. 몇 발짝 달려 나가다 소리메 멈칫 섰다.
이태 전, 꽃샘추위에 제빅 얼어 죽었다. 곡기를 끊고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자는 연락을 받았다. 봉사대장 할매랑 찾아갔다. 굴다리 밑에 낡고 기울어진 슬레이트집, 작는 뭄틈으로 찬바달미 비집고 들어선 그 냉골방, 두서너 평 될까. 휑한 방에 모로 누워있는 할배를 처음 만났다. 미동도 않고 숨소리도 없이 눈만 깜빡이는 할배가 무서워 마당만 봤다. 창졸간(倉卒間 :미처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작스러운 사이)에 한솥밥 먹던 할멈이 먼저 떠났다. 봉사대장 할멈이 할배를 달래고 얼러서 일으켜 앉혀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영정사진을 들고는 먼저 간 할매를 봐서라도 이러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이레 되던 날, 처음으로 멀건 죽을 입술에 축였다.
죽만 끓여 갔다. 화단의 개나리가 노란 입을 벌리고 가지마다 움을 튀운다. 들어서다 흠칫 놀랐다 조그만 청 끝에 할배가 앉아 있었다. 필 뉠리리- “욕보니요.” 낮은 목소리였다. 얼굴에 핏기가 돌아선지 선한 인상에 따뜻함이 전해왔다. 죽 끓여 들고 간 내 손에 호드기 하나를 쥐어 주었다.
할배 옆에는 너덧 개의 호드기(봄철에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고루 비틀어 뽑은 껍질이나 짤막한 밀짚 토막 따위로 만든 피리-보리피리).가 있었다. 할배는 불어보라는 시늉을 냈다. 입에 대고 따라 불어도 나는 제 소리를 못 냈다. 삑 삑~. “이거 ㄴ소리가 안 들었는갑다.” 내가 말하자 “인자 밥 먹을라요.” 할배가 답했다. 대문간의 오얏나무꽃에서도 달큰ㅁ한 향기를 마당에 활짝 뿌렸다.
대여섯 먹은 아이가 강둑으로 내달린다. 한참을 가도 비비종 종다리 소리임자는 없고 거기 버들개지가 있었다. 아이는 물오른 가지를 잘라 제 손가락 마디만큼 잘랐다. 주머니 칼로 금을 내고 살짝 비튼다. 소리 없이 옷을 벗은 포리한 속가지
에서 아가 살 내음같이 살풋 형한 수박향이 난다, 갈색 대롱 한쪽 끄트머리를 칼로 삐져 더듬고, 앞니로 자근자근 눌러 소리 길을 낸다. 입에 문다. 볼 풍선에 힘을 주고 세게 분다. 삑, 아구도 아프고 봂도 아린다. 거꾸로 물고 숨을 들이키며 다시 후 분다.
용을 쓰고 기를 쓰다 버들개지 용용 혓바닥 간질일 때사 삐리리, 아지랑이 먼 길 삐빅거리며 소리 길 다듬어 달린다. 초가집 앞에까지 왔다. 구박하던 계모 그림자에 놀라 뒤로 돌아 숨었다. 울을 돌아 쪼그려 공처럼 앉았다. 배가 고파 잠이 깨어 살금살금 들어섰다. ㄴ털보아비랑 눈칫밥 주던 계모, 풀대죽 끓여주던 어린 누이가 흔적없이 사라졌다. 입 안에 사르르 녹던 어린 삘기(식물 띠의 어린 꽃이삭)한 줌, 손뗏자국 멍들어 입에 넣으니 새품(억새의 꽃, 도깨비바늘)이었다.
할배는 노래럴 참 잘한다. 하루 두세 번. 온 동네를 돌며 폐지를 수집한다. 정오가 되면 흥얼거리는 소리가 골목을 먼저 찾는다. 수레에 매단 라디오 노랫소리가 신난다. 자신보다 더 큰 수레에 새상이 걸러낸 잡것들이 담겨 달랑거린다 .나는 모아둔 폐지와 재활용품을 들고 대문간으로 간다.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예.”하니 아침 대숲 길 골목에서 쓸만한 물건을 건졌다며 소리 한번 경쾌하다. “각시가 부탁한 빨래 삶는 솥은 그냥 가지시오.” 전에 내가 부탁했던 달달한 커리 한 잔에 선심을 쓰며 또 노래다. “어디서 노래가 자꾸 나옵니까?” 하니 “아, 내 등에만 달린 소리통이 있거든.”
“젊었을 때 마음을 못 잡고 죽을라고 했지요. 그때 라디오에 나오는 가수를 딱 한 번 마나보면 죽어도 원이 없겠더라고요.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지요. 방송국에 물어물어 유명 가수 집 앞을 찾아가 무작정 만나기를 작정했어요. 처음엔 거렁뱅이 취급하더만요. 그래도 악착시리 기다렸지요. 스무 날쯤 죽치고 있으니 하늘도 노랗고 오늘도 못 만나면 콱 죽어 버리야겠다 싶데요. 문 앞을 지킨 끈기에 딱 십 분만 시간 준다 캐요. 노래 한 곡만 불러 보라 하더마요. 막상 그 앞에서 노래를 부를라고 하니 제데로 못 불렀지요. 떨려서. 내 손을 잡아 주더니 음색이 가날파 트롯이 어룰리는데. 소질이 있어 보이지만, 그냥 노래를 즐기면서 살면 좋겠어요. 그 말에 이 날까지 목숨 살았지요.”
큰길 건너 컨테이너 앞에[ 노인 서넛이 웅크려 소주를 마신다. 웅크린 할배도 있다. 씹어도 씹히자 않는 마른 북어 한 조각에 술이 죽는다,. 엿가락 장단을 맞추듯 빈 수레 손잡이를 두들기며 지우뚱지우뚱 질척거리는 개양 굴다리고 세월처럼 구부러진 길을 건너온다.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아픈 가락 한 소절을 빈 수레에 얹고 모퉁이를 돈다. 동네 할머니들이 위로도 얹어 준다.
“그래도 내가 이 세상 살아 이만큼 구경한 겣 ㅗ ㅣ고 즐거운 일이요. 내 가장 즐기는 이 놀이도 할마이 가고 없으니 싱겁소.” “구름도 쉬어가는, 쉬어가는 저 산 아래~” 할배는 구성진 노래에 시름을 털고 다니다. 폐지가 필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 길을 나선다. 앉아서 세상을 터득하지 못하고, 평생 말보다 몸으로 부딪혀 익히고 나눔을 실천하는 곱새 할배. 나는 해 드릴 게 없다. 따뜻한 차 한 잔 들고 나간다. “참 고맙소.”
올 춘삼월, 유독 비가 잦다. 봄 하늘이 울고 울다 또 내린다. 장자골 왕버들 새순이 돋는다, 연둣빛 조막손 터뜨리는 소리, 젖은 어깨 뼛속이 시리고, 부은 발이 신발 속에서 질퍽거린다. 느릿느릿 길을 걷는 등 굽은 할배. 이 비 그치면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겠다.
먼데 갯가 하늘로 솟아 외로움 타는 버드나무, 물 떨리는 소리가 난다.
<수필과 비평>2011.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