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
정 명 수
미국 뉴저지주 패터슨이라는 도시에 ‘패터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버스기사가 주인공이다.
패터슨은 틈나는 대로 노트에 시를 쓴다. 그의 아내도 감각이 뛰어난 꿈꾸는 예비 예술가다. 영화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패터슨의 일상을 따라간다. 패터슨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시리얼을 먹고,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고 퇴근하며 저녁에는 반려 견을 데리고 바에 들러 맥주 한 잔 걸치고 돌아온다. 어쩌면 단조로운 일상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무료한 일상이 아니다. 아내의 쌍둥이 꿈을 듣고 나서는 출근길에서 쌍둥이 형제가 대화를 하고 있고, 버스 안에 쌍둥이 자매를 발견한다. 소음 밖에 없을 것 같던 버스 안에는 초등생들의 호기심과 청년들의 연애 얘기, 무정부주의자 대학생들의 대화 등 수 많은 이야기와 삶들이 존재한다. 또 도시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가? 버스 회사 동료의 푸념들, 사랑의 열병으로 괴로워하는 남자, 바 카운터 뒤에 붙어 있는 신문기사 속 패터슨 사람들, 그들은 그냥 스치는 타인일 수 있지만 각자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내가 만든 단조로운 패턴도 매일 새롭게 바뀌고, 출근 길 공장 붉은 벽돌을 비추는 아침 햇살, 퇴근길에 만난 소녀에게 들은 아름다운 시. 스치고 지나가면 단조로운 삶이고 풍경이지만, 자세히 바라보고, 다른 언어로 보면 모두가 시다.
이 영화는 감독인 ‘짐 자무쉬’가 미국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에 감명 받아 그가 평생 살았던 동네인 패터슨을 여행하면서 얻은 모티브로 만든 영화라고 한다.
영화에 나온 윌리엄의 시집 ‘패터슨’은 패터슨 시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시집이다. 시인 윌리엄은 아무도 관심 없는 평범한 사람들과 그 일상들, 스쳐가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도 놓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 시를 썼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패터슨은 성냥갑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사랑시를 쓴다. 그러고 보니 시가 아닌 것이 없는 듯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내 일상을 세심하게 보려고 했다. 평상시 같으면 소음으로 들렸을법한 취객의 주정이 들렸다. 가정폭력 사건으로 체포된 할아버지는 자신을 ‘삼팔따라지’라고 했다. 함경도 문천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1. 4.후퇴 때 내려왔다고 했다. 너무 어렸을 적이라 어머니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울기 시작했다. 또 새벽에 출동한 변사 사건에서 죽은 사람은 몇 년 전 내가 수사한 절도 피해자였다. 그때 사건을 수사하면서 받은 그의 인상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고집불통 노인이었다. 70세면 아직 죽을 나이가 아니었는데 그 고집 때문에 죽었다. 병원에서 염증수치가 높으니 입원하라고 했는데 의사 말을 못 믿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 날 세상을 떠났다. 내 주변에도 많은 이야기와 삶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방식으로 비밀 노트를 채워가고, 또 어떤 이는 마지막 장을 써내려간다.
이 영화는 이창동 감독 영화 ‘시’를 떠오르게 한다. 영화는 모두 ‘시’를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조금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패터슨은 일상 속에서 우리가 잊고 지냈던 의미를 건저내고 드러낸다. 영화 ‘시’에서 미자 할머니는 시를 만나면서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에 금을 내고, 그 안에 꿈틀 거리는 인간의 욕망과 허위성을 드러낸다. 영화들은 시의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 시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영화 마지막에 비밀 노트를 반려 견이 물어뜯어 상심해 하는 패터슨에게 일본 여행객이 빈 노트를 건네주며 하는 대사가 인상 깊었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창밖 나무들 사이로 노을이 진다. 숲을 채웠던 잎들이 떨어지자 그 사이로 새로운 풍경이 드러났다. 무심결에 지나치는 것들에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 아니다. 드러내고 있지만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잔 여울을 타고 내려가는 강물 같이 아름다운 영화였다.
첫댓글 단조로움 속에 깊은 의미가 있는 영화네요. 감상문 잘 읽었습니다. 첫 수업시간 기대됩니다.
소설가 이승우 책에서 "일상이나 현실이 소설이 되기 위해서도 작가의 숨결이 필요하다. 당신만의 시각, 당신의 욕망이나 해석, 그런 것들에 의해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어서 구질구질하기까지 한 우리들의 일상은 돌연 낯설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라고 하듯이 영화도 주인공 패터슨만의 고유한 시선으로 지루하기만 한 일상이 어떻게 새롭게 다가오는지 잘 보여주는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예전에 거의 반수면 상태로 봤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영화로 다가왔습니다. ㅋ
발제문이 좋아서 놀랬습니다. 편안하게 툭. 영화를 소개하며 시작한 글이 점점 더 깊어지는데… 빨려들어가듯 몰입해서 읽은 글이었습니다.
평이하게 느껴지는 마지막 한 문장만 조금 더 고쳐서 페이스북에 올리면 난리나겠다,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명수님과 같이 공부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형사당직실이 완전히 다른 장소로 느껴졌습니다. ㅋㅋ 예전에는 직장이었는데 이제는 보물창고라고나 할까 ㅋㅋㅋㅋ
@정명수 이런 답글을 보니 미소가 절로 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