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교리문답은 1643-1649년까지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작성됨, 칼빈주의의 집
대성
☺ 칼빈주의라고 불리우는 개혁주의는 바울, 어거스틴, 칼빈을 통해 전수받은 역사적 신앙이며, 성경이 가라는 데까지 가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고, 돌아서라는 곳에서 돌아서는 신학이다. 이것은 철저히 성경 말씀에 토대하며, 생명을 주는 운동이며, 적극적인 신앙, 긍정적인 사색, 그리고 사람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학이며,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깨닫고 성경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높이는 생동력 있는 신학이며, 타협 없이 진리를 증거하려는 역사적 보편성, 세계성을 띤 신학이며, 닫힌 신학이 아니라 열린 신학이며, 신앙과 신학의 분리를 배격하는 신학이다.
신앙고백이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계시하신 것을 교회가 요약한 형태로 공적으로 천명한 것. 이단을 대적하기 위한 교회의 신앙의 공적인 천명과 증거. 1. 신앙을 요약한 것. 2. 교회회원들을 가르치는데 도움을 줌. 3. 정부와 세상에 대해서 공적으로 증거. 4. 이단과 싸우는데 유용함. 5. 교회들이 말씀의 한 기초 위에서 연합하도록 함.
신앙고백서를 바르게 배움으로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게 하고, 사도행전 17장11절에 나온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제 1문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우리에게서 찾을 수 없고 오직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은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라고 지으셨습니다. 원래 목적이 이러했지만 아담은 그 본래 지음 받은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범죄 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우리 인간은 타락한 본성대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내 인생, 내 삶, 나의 존재 목적은 내가 정한다 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죠.
그러나 성경은 그리 말씀하지 않습니다.
소교리문답은 어린 자녀들을 위한 교육이라서 ’돌이‘라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만화형식의 그림을 곳곳에 삽입했습니다.
1과에서는 그림 두 개가 있습니다.
그림 A에 있는 돌이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결혼을 합니다. 심지어 노는 일에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오락을 합니다.
그림 B의 돌이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일하고 공부하고 결혼하고 노는 모습을 그려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그 지으신 목적대로 자신이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를 즐거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B 그림의 돌이처럼 자기중심으로 살아가죠.
그럼 이런 사람의 경우에는 어떠한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 시민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방을 위해서 혹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이죠.
이 사람들은 누구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비록 자기 자신은 아니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사람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삶의 주된 목적이 사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 B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미 영원부터 영화로우십니다. 그의 피조물들이 무엇인가를 해서 이미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한다. 반영한다 라는 뜻입니다.
시편19편 1절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은 말은 못하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능력, 그의 손길, 그의 영광을 온 몸으로 소리처서 선포합니다. 이처럼 자연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늘과 궁창 같은 피조물들은 피조 된 존재 자체로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지만, 사람에게는 놀라운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원해서 이 일을 하도록 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4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라고 말씀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거죠.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내 삶, 내 기쁨, 내 행복과,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죠.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지 않더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구원 받은 자 뿐만 아니라 구원 받지 못한 자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찬송과 예배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버려진 자들에게서는 마땅히 그들이 받아야할 진노와 심판이 주어짐으로 인해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인데요. ”삶의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삶을 각각 분리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예배와 전도 봉사만이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일도 하고 놀기도 하죠, 교회에서 기독교인은 교회 밖에서도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성실하게 일터에서 일하고 건전하게 놀고 주일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더 특별하게 영화롭게 할까요?
모든 기독교인은 동일하다.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설교자가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시간과 활동 범위를 불문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참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라는 문제는 무엇을 물어보는 것입니까? 이 질문의 의미를 말해보세요.
2.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의미하지 않는 바는 무엇입니까?
4. 창조시의 인간과 타락 후의 인간의 중심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5. 우리 삶의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