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공장구권일河上公章句卷一
體道第一
첫 번째 장, “도道”의 본체體를 논한다.
道可道,
도道는 이름 지어 부를 수 있지만,
謂經術政敎之道也.
(“이름 지어 부른 도道”는) 이른바 다스림과 가르침에 있어서 (일부러 일삼은) 원칙經과 책략術으로서의 도道이다.
非常道.
(이름 지어 부른 도道는 저절로 그러하게 일삼음이) 늘 그러한 도道가 아니다.
非自然長生之道也. 常道當以無爲養神, 無事安民, 含光藏暉, 滅迹匿端, 不可稱道.
(“이름 지어 부른 도道”는) 오래 가게 함과 생겨나게 함에 있어서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로서의 “도道”가 “아니다.” (저절로 그러하게 일삼음이) “늘 그러한 도道”는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바無爲로써 (만물의) 신령스러움(神; 마음)을 기르고, 일부러 일삼게 함이 없는 바無事로써 세상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며, 빛남을 (안으로) 품음으로써 (일부러 일삼아 밖으로) 번쩍임을 감추고, (일삼음의) 흔적迹을 없앰으로써 (일부러 일삼음의) 실마리를 숨긴다. (따라서) “도道”는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다.
名可名,
본체名는 이름 지어 부를 수 있지만,
謂富貴尊榮, 高世之名也.
(“이름 지어 부른 본체名”는) 이른바 부유함, 귀함, 높음, 빛남인데, 세상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아) 받드는 것으로서의 “본체名”이다.
非常名.
(이름 지어 부른 본체名는 저절로 그러하게 자리함이) 늘 그러한 본체名가 아니다.
非自然常在之名也. 常名當如嬰兒之未言, 雞子之未分, 明珠在蚌中, 美玉處石間, 內雖昭昭, 外如愚頑.
(“이름 지어 부른 본체名”는) “늘 그러하게” 자리함이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로서의 “본체名”가 “아니다.” (저절로 그러하게) 자리함이 “늘 그러한 본체名”는 이른바 말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태어나지 않은 병아리, 조개 가운데 있는 맑은 진주, 돌 사이에 있는 아름다운 옥玉과 같으며, 안으로 (앎이) 밝고 밝지만, 밖으로 어리석고 둔한 (사람인) 듯하다. (따라서 “본체名”는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다)
無名, 天地之始.
지어 부를 이름이 없는 도道는 하늘과 땅이 시작이다.
無名者謂道, 道無形, 故不可名也. 始者道本也, 吐氣布化, 出於虛無, 爲天地本始也.
“지어 부를 이름이 없는 바無名”는 이른바 “도道”이다. (그런데) “도道”는 모양이 없다. 따라서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시작되는 바”는 이른바 “도道”이다. (“도道”는 음陰과 양陽의) 기氣를 토해냄으로써 (“하늘과 땅”이 오래 가고 생겨나는) 변화를 드러낸다. (그런데 “도道”의 토해냄과 드러냄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有爲을) 텅 비고 없는 바에서 생겨남으로써, “하늘과 땅”(의 오래 감과 생겨남)을 일삼아낸다. (따라서 “지어 부를 이름이 없는 바無名”는) 이른바 (“하늘과 땅”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有名, 萬物之母.
지어 부를 이름이 있는 하늘과 땅은 만물의 어미이다.
有名謂天地. 天地有形位, 有陰陽, 有柔剛, 是其有名也. 萬物母者, 天地含氣生萬物, 長大成熟, 如母之養子也.
“지어 부를 이름이 있는 바有名”는 이른바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은 모양과 자리를 가지고, (기氣인) 음陰과 양陽을 가지며, 부드러움과 단단함을 가진다. 따라서 그것은 (지어 부를) “이름”이 있게 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만물”의 “어미”가 되는 것은 “하늘과 땅”은 (음陰과 양陽의) 기氣를 머금어 (뱉어서) “만물”을 생겨나게 하고, 오래 가게 하며, 크게 하고, 이루어지게 하며, 익게 하는데, 마치 “어미”가 자식을 기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故常無欲, 以觀其妙 ;
따라서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없음으로써, 그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바를 알아차리게 되며,
妙, 要也. 人常能無欲, 則可以觀道之要, 要謂一也. 一出布名道, 讚敘明是非.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有爲이) “어렴풋한 바妙”가 (“도道”의) 본체要이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를 없앨 수 있으면, “도道”의 본체要를 “알아차릴” 수 있다. (“도道”의) 본체要는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바有爲가 “어렴풋함妙”, 그) 하나一이다. (그런데 지어 부른 이름으로서) 하나一가 생겨나고, “도道”에 대한 지어 부른 이름이 드러나자, (그) 옮음과 그름에 대한 밝음이 기려지고, (그) 차례가 정해지게 되었다.
常有欲, 以觀其徼.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는 세상 사람들은 따라서 그 되돌아가야 할 바를 알아차려야 한다.
徼, 歸也. 常有欲之人, 可以觀世俗之所歸趣也.
“요徼”는 되돌아가야 할 바를 뜻한다. (따라서)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는有欲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되돌아가 다다라야 할 바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은 나오는 바를 같이 하지만, 이름 지어 불리는 바를 달리한다.
兩者, 謂有欲無欲也. 同出者, 同出人心也. 而異名者, 所名各異也. 名無欲者長存, 名有欲者亡身也.
“두 가지”는 이른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有欲”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無欲”이다. “나오는 바를 같이 한다”는 말은 사람의 마음에서 “다 같이 나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어 불리는 이름을 달리한다”는 말은 (“그런데”) 이름 지어 부르는 바가 각각 “다르다”는 뜻이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無欲” 사람이라 이름 지어 불리는 사람은 오래 자리하게 되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는有欲” 사람이라 이름 지어 불리는 사람은 몸을 망가뜨리게 되는 것이다.
同謂之玄,
(나오는 바가) 같은 바, 이른바 그것은 하늘이다.
玄, 天也. 言有欲之人與無欲之人, 同受氣於天也.
“현玄”은 (“만물의 어미”로서) “하늘”을 가르킨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는有欲” 사람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無欲” 사람은 “다 같이” “하늘”로부터 (음陰과 양陽의) 기氣를 받는다는 것이다.
玄之又玄,
(따라서) 하늘 가운데 자리하게 되고, 또한 하늘 가운데 자리함을 되돌이키게 된다.
天中復有天也. 稟氣有厚薄, 得中和滋液, 則生賢聖, 得錯亂污辱, 則生貪淫也.
(따라서) “하늘” 가운데 자리하고, “하늘” (가운데 자리함)을 되돌이키게 된다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받은 (음陰과 양陽의) 기氣가 두터움과 엷음을 가지더라도, 묽음 가운데 자리하거나 진함과 어우러지는 바를 얻으면, 뛰어남과 성스러움을 낳게 되며, 뒤섞여지고 어지러워지며 더러워지고 욕보여지는 바를 얻으면, 탐함과 음란함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衆妙之門.
(이것이) 만물이 (도道의 본체인) 어렴풋한 바를 알아차리고, (그것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
能之天中復有天, 稟氣有厚薄, 除情去欲守中和, 是謂知道要之門戶也.
“하늘” 가운데 자리하거나 “하늘” 가운데 자리함을 되돌이킴은 (“하늘”로부터) 받은 (음陰과 양陽의) 기氣가 두터움과 엷음을 가지더라도,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는有欲) 마음을 덜어내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를 멀리하며,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無欲 마음) 가운데 자리하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無欲과) 어우러짐을 지킴으로써 가능한데, 이것이 이른바 “도道”의 본체要를 알아차리고, (그것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문門”과 창戶이다.
첫댓글 여조겸 교정 하상공노자도덕경을 원저로 삼았습니다.
하상공河上公은 전한前漢 때 사람으로 성명은 알 수 없다. 문제(文帝, B.C.180~157) 때 하빈河濱에 초가집을 짓고 살아, 사람들이 하상공이라 불렀다고 한다. 황제가 "노자老子" 읽기를 좋아했는데, 읽다가 모르는 곳이 나와도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가 "노자老子"의 뜻을 안다는 말을 듣고 물어보니, 황제에게 "소서素書" 2권을 주었다. 이를 세심하게 살핀 결과, 의심스러운 부분이 다 풀렸다고 한다. (김정봉, 치자와 현대인을 위한 노자의 도덕경, 내일을 여는 책(2018), p.28.)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