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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서산 인왕산에 오르다. (2007 2 1)
인왕산을 도성 안에서 보면 서산이다. 그 서산은 바위산으로 장엄하고 웅장하며 아름답다. 경복궁에서 서산인 인왕산을 보면 꽤 높은 바위 산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아릅답다. 더욱 도성의 성벽이 지나가는 산성이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산이다. 그리고 조선의 궁궐에 얽힌 설화가 많은 산이다.
나는 오늘 지심 선생과 같이 인왕산에 오르기로 하고 출발하였다. 경복궁역에 내러 우선 사직단 공원으로 갔다. 그곳에는 사직단과 단군성전이 있다. 그곳 성벽을 따라 오르면 바로 인왕산이다.
경복궁의 뒷산은 백악산(북악산)이다. 백악산은 우뚝 솟은 보현봉이 형제봉을 만들어 뻗은 봉우리 이다. 그 백악산이 동으로 낙산으로 뻗었고 서로 인왕산으로 뻗어 남산(목멱산)까지 간다. 그 사이에 도성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낙산은 좌청룡에 해당하고 인왕산은 우백호에 해당한다. 그래서 조선 왕실에서는 청룡은 약한데 비하여 백호가 너무 강하여 여러 조치를 취하였다.
인왕산 정상
설화하면 인황산과 같이 많은 산도 드물 것이다. 산은 338m로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나 기암절벽에 설화가 많은 산이다. 유명한 바위도 많고 능선에서는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보이고 사방을 볼 수 있어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하나, 인왕산하면 저 유명한 인왕산 호랑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살아 궁궐까지 와서 사람을 해쳤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전, 인왕산은 호랑이의 촐몰로 어려움이 많았다. 심지어 경복궁 내정이나 창덕궁 후원에까지 들어와 소란을 피우고 고양 등지의 민가에까지 침입하여 그 피해가 수백명에 달하자 조정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호랑이 잡이에 나설 정도였다. 그래서 지금도 `인왕산의 호랑이를 모르는 이가 없다.
그 때 나라에서는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호한이 출몰하여 호랑이를 없앨 사람을 찾았다. 그러자 한 군수가 자진하여 나섰다. 그 군수는 자기 나졸에게 무슨 글자를 써서 주면서, 인왕산 중간쯤 오르면 반석 위에서 늙은 중이 자고 있을 터이니 ‘중놈아!’ 하고 큰 소리로 불러서 깨워 데리고 오라 했다.
나졸이 인왕산에 오르니, 과연 중이 바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래서 나졸은 군수가 시킨대로 큰소리 로 불렀다.
'이 중놈아! 일어나라, 너를 불러오라고 했으니 빨리 따라 나서라!'
종이에 적힌 글을 보여주니 중은 벌벌 떨면서 순순히 따라왔다. 군수가 중에게 명하여 '네 본색을 사람들에 보여라' 하니, 중이 세 번 재주를 넘자 황소만한 호랑이로 변했다. 군수가 호랑이에게 큰소리로 ‘당장에 네 새끼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지 않으면 모두 몰살하겠다’고 호통을 치자 호랑이는 그날 밤으로 무리를 이끌고 인왕산을 떠났다고 한다.(서울특별시 "서울의 전통문화" 제1권 1982. 481∼482)
둘, 조선을 건국하고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서 궁궐을 어느 방향을 안치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었다. 이는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느냐 아니면 인왕산을 주산을 하느냐와 연결된다.
여기서 유명한 삼봉 정도전과 무학 대사 간의 이야기가 있다. 궁궐을 남향으로 안치느냐 아니면 동향으로 안치느냐를 문제를 놓고 견해가 서로 달랐다고 한다.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백악산, 인왕산, 남산(목멱산), 낙산 등 네 개이다. 백악산(북악산)은 북산으로 청와대 뒷산으로 종각에서 보면 반듯하게 바로 서 있지 못하다. 그 산에 흰바위가 해골로 보여서 불길하다고 한다. 인왕산은 서산으로 바위산으로 험하고 강하다. 남산인 목멱산은 온순한 산이다. 그러데 낙산은 그 산세가 다른 산에 비하여 아주 약하다.
궁궐을 남향으로 할 경우 지금과 같이 좌청룡: 낙산, 우백호: 인왕산, 남주작: 남산, 북현무: 백악산이 된다. 이럴 경우 좌청룡은 너무 약하고 우백호는 너무 강하며 남주작은 비켜 있고 북현무는 비툴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동향으로 지을 경우 인왕산은 북현무, 백악산은 좌청룔, 우백호는 남산, 낙산은 남주작이 된다. 풍수지리설의 좌표가 달라진다.
그리고 한강이 서로 흐르는데 비하여 청계천이 동으로 흘러 물길이 역방향이 된다. 특히 남향인 경우 물길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나가는 형국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정도전은 고려의 패망원인을 불교에서 찾아 주자학적 입장에서 척불숭유(斥佛崇儒) 정책을 관철시켰다. 종묘사직(宗廟社稷)과 궁궐을 지은 다음에 손수 정전 이름을 지어 헌액 하였으며 4대문으로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대문 이름(興仁門, 敦義門, 崇禮門, 弘智門)에 삽입하였고 그 중심에 보신각(普信閣)을 세웠으나 선바위는 성(城)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의 견해에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의 궁궐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학은 조선은 장자 계승이 어렵게 된다고 예견하였다. 조선의 27왕 중에 장자 계승은 7왕에 불과하다.
셋, 도성의 석곽을 쌓을 때 삼봉과 무학과의 견해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인왕산 남쪽에 선(禪)바위가 있는데 그것을 성 안에 넣느냐 안넣느냐에 대하여 견해가 달랐다. 선바위는 인왕산 남쪽 슭에 있는 거대한 바위로 정말 신령스럽고 영물스럽게 생겼다. 마치 좌선을 하고 있는 스님과 같다고 하여 선바위라고 한다. 그 앞에 가면 탄성을 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뒤로 가면 인왕산을 보고 큰 입을 벌려고함치는 두 형상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무학대사와 닮았다고도 한다.
선바위
무학은 성 안으로 축조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억불숭유에 그것이 통할 리가 없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성바깥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무학이 200년 후에 큰 환난을 피할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임진왜난이라고 한다.
특히 선바위는 암석숭배(岩石崇拜)의 대상으로 불교와 무속신앙(巫俗信仰)이 밀착되면서 무속신앙의 중요 성지가 되었다.
넷, 치마바위에 얽힌 애타는 설화도 있다. 조선 중종의 단경왕후의 이야기이다. 단경왕후는 연산군의 비, 신씨의 질녀이다. 그녀는 열 두살의 나이로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렸다. 1506년 진성대군이 연산군을 폐위시킨 반정 세력에 의해서 왕으로 옹립되자 왕비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처남이 되는 신수근이라 반정군의 제거 대상 1순위였다.
반정 세력들은 신씨가 왕후가 될 경우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을 염려하여 중종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신씨를 폐위시킬 것을 강력히 주청한다. 결국 중종도 공신들의 힘에 밀려 그녀를 폐위하고 만다.
치마바위
그녀는 처음에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쫓겨났다가 본가로 돌아갔는데, 그녀에 대한 중종의 애정은 남다르게 애틋했던 모양이다. 중종은 신씨가 보고 싶으면 경복궁 경회루에 올라 그녀의 본가가 있는 인왕산 어름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신씨가 그 소식을 전해듣고는 임금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아 궁중에 있을 때 즐겨 입었던 분홍색 치마를 내어, 경복궁이 마주 보이는 인왕산 자락 널찍한 바위에 펼쳐 놓았다 한다.
그러나, 서로 떨어져 지나면서 절절한 마음을 산자락에 치마로 펼쳐 놓은 채, 폐위된 이후에는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신씨는 외롭게 한 평생을 보내다가 1557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그 후 영조 때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으니, 그녀의 능호는 온릉으로 현재 양주군 장흥면 일영에 있다.(http://yoon2y.com.ne.kr/mount/inwangsan.htm)
다섯, 인왕산은 경치가 아름다워 산수화의 대상이다. 특히 정선(鄭)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인왕제색도>는 겸재가 76세 때 그림이다. 겸재의 대표작들은 대부분이시기에 그려졌는데 <금강전도>와 <계상정거도>도 76세 때 그린 그림이니 겸재의 실력이 절정에 올랐을 때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비 개인 후 구름 위에 떠 있는 인왕산 전경을 그린 것이다. 인왕(仁王)은 서울에 있는 인왕산을 말하는 것이고 제색(霽色)이란 큰 비가 온 뒤 맑게 갠 모습을 뜻한다. 한 마디로 비 개인 인왕산 그림인데 인왕산은 산 전체가 백색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바위산이 특징이다. 그런데 백색 화강암을 그리려면 흰색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온통 진한 묵으로 그렸다.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겨울나무, http://blog.empas.com/sun7845/read.html?a=15891142)
1751년, 종이에 수묵, 79.2 cm × 138.2 cm, 국보216호, 호암미술관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이라 하였으나, 1995년 ‘仁王’으로 옛지명이 환원되었다. 군사적인 이유로 통제되었다가 1993년부터 개방되었다
우리는 사직단과 단군성전을 들러보고 활터를 지나 인왕산의 허리 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전경이 보초를 서 있어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는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여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성벽 길보다는 인왕천, 매바위 쪽으로 오르는 길을 택하였다.
매바위
우리는 오르면서 산 기슭에 있는 여러 기암을 보았으며 특히 우뚝 솟은 매바위를 보았다. 매 바위 머리에 갈라진 틈이 있는데 그곳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래서 마치 소나무를 물고 있는 매와 같아 보였다.
그리고 능선에 올라섰다. 조금 가니 전경이 보초를 서 있다. 그들에게 수고한다고 인사를 건네고 정상을 향하여 올라갔다. 길은 완전히 바위 길이다. 원래 하나의 바위인데 그곳에 계단을 파서 올라가기 쉽게 만들었다.
정상을 오르는 바위 길
인왕산 정상(338m)에 올라서니 사방이 훤하게 나타난다. 경복궁 서울시내 남산 등이 보인다. 북으로 보현봉이 우뚝 서 있고 남으로 한강이 보이며 멀리 관악산도 보인다. 우리는 서울 시내를 굽어보면서 가져간 음료수를 마셨다. 등산객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곳은 한 때 등산이 금지된 구역이었다. 지금도 일몰 후에는 등산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자하문으로 내려가지 않고 기차바위 길을 지나 능선을 따라 홍제동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인왕시장에 가서 하산주 겸 점심을 먹었다. 주인 아저씨가 보통 재미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계 앞에서 노점상을 하는 아주머니 두 분을 야채부인과 조개부인이라고 부르며 서스럼 없는 농담을 주고 받는다. 야채를 파는 분은 야채부인, 조개를 파는 분은 조개부인이다. 두 분은 추워서 몸을 녹히기 위하여 식당안으로 들어 오는 모양이다. 그들을 싫다 하지 않고 감싼다. 이 분들과 주인과의 이야기가 경계 없이 넘나든다. 아저씨의 말 솜씨가 보통 재미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패가 되어 술 한잔을 하였다.
기차바위 길
오늘 산행은 두 시간이 걸렸다. 걷는데 1시간 반 쭘 걸린 셈이다. 인왕산에 올라 도성을 구경하고 설화의 현장을 찾아 보았다. 하산주가 재미 있다.
사진을 제대로 담지 못한 부분이 많아 다시 와야 할 것 같다.
2007 2 1 정태범
2007 2 1일 인왕산 등산 이후 두 번을 더 갔다. 가는 코스는 조금씩 달랐다. 두 번 째(2 3일)는 첫날 사진에 담지 못한 현장이 많아 다시 담기 위해 혼자 갔으며. 세 번 째(2 4일)는 일요일 손자의 최초 산행을 인왕산으로 하기 위해 아들 손자와 같이 삼대가 갔다. 그러면서 인왕산을 디카에 담았다.
기회가 나면 또 갈 예정이다. 그 기회는 날씨가 아주 맑은 날이면 더욱 좋고 그리고 안개가 끼인 날이면 더 더욱 좋다. 하늘이 맑으면 저 멀리 아련히 보이는 보현봉을 담기 위함이고, 안개 끼인 날 산 기슭은 안개로 덮여있고 인왕산이 들어나면 경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를 카피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몇 번을 가야 할런지 모른다.
2007 2 5 정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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