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 사 60:1-9, 눅 2:21-24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는 새해 인사임과 동시에 오늘 말씀의 제목이기도 하다.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예언임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영광과 축복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요, 천년왕국시대에 누릴 영화요, 기쁨이요, 축복이다.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하는 이 날에 본문을 기초하여 축복에 대한 바른 이해를 생각함도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될 줄로 믿는다. 세가지로 나누에 말씀드리겠다.
1. 동양적 축복사상과 한국 기독교의 기복운동을 반성해야 한다.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문화는 달라도 복을 좋아하는 것은 같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복을 좋아하기에 정초나 중요한 행사에 복을 빌고 덕담을 나눈다. 그런데 그렇게도 좋아하는 복, 도대체 복이란 무엇인가?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유교적 도독 문화권에 속한 동양적 복 개념은 삼강오륜과 오복의 범주에 속한다. 오복이 무엇인가? 장수하고 건강하고 자녀들 잘되고, 하는 일이 잘 되어 돈 걱정 없고, 그리고 권세 영광을 누리는 것을 오복이라고 한다. 이 5가지만 있으면 복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의 기도들도 이 오복의 범주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기독교는 샤머니즘, 미신, 그리고 유교적인 영향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지난 한국 기독교 100여년 동안 기도하며 소원해 온 것이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라면 마음 아픈 일이다. 또한 이같은 대중의 오복 심리 요구를 이용하여 기복적이고 미신적이고 무당종교처럼 행세해 온 것이 사실이라면 깊이 반성할 일이다. 오복이 복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복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세상과 함께 끝나는 것이고, 제한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한계를 넘으면 오히려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옷은 기독교 옷으로 입었으나 심성과 인격은 여전히 유교적이요 토속적인 것을 그대로 입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이같은 현상을 문화적 변화는 있어도 구조적 변화는 없다라고 말한다. 높은 자리, 지배하는 자리, 영화와 권력을 누리는 자리를 요구하고 있지만, 또 그것이 행복을 누리는 자리, 복받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나 사회에서 문제가 된다. 이겉은 일들은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요, 자시희생이 요구되는 자리임을 기억해야 하겠다.
2. 성서적인 축복 사상은 무엇인가?
기독교는 복의 종교이다. 기독교처럼 복을 많이 강조하는 종교도 드물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행한 일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라고 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다. 시 1편에도 ‘복 있잇는 자’의 선언이 있고, 산상수훈에도 8복이 있다. 이토록 기독교 신앙은 축복의 신앙이요, 축복의 종교다. 한국교회가 축복을 강조하고 축복을 촉구했다고 해서 조금도 잘못이 없다. 다만 복의 개념이 성서적인가가 문제이다. 서양 사람들이 예배를 드린 후에나 편지 끝에 축복을 빈다. 그들은 ‘May God be with you.’ 또는 ‘May God bless you.’ 곧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또는 ‘하나님이 너에게 복주시기를 바란다’라고 말한다. 성서적인 축복사상, 기독교적 축복사상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것임을 믿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같이 있는 것, 그것이 복이다. 이것이 행복이요 구원이요 영생이며 또한 천국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복처럼 세상에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요, 제한적인 것도 아니요, 이것은 오복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성서적인 축복, 기독교적인 축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유교적 개념의 오복은 그저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요, 필요하면 거두기도 하시고 더 주시기도 하신다.
성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는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고, 여호수아에게는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했으며, 불안해 하는 야곱에게 ‘내가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신약에서도 오른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리라.’ 양과 염소를 분리하고 양을 향하여 ‘나와 함께 할 자들’이라고 하셨다. 축도의 말씀에도 ‘성부 성자 상령이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셨지 오복을 빌지는 않았다. 구체적인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라면, 곧 믿음만이 참 축복인줄 믿기 바란다. 하나님에 대한 함께 하심은 정직하게 하고, 성실하게 하고 책임있게 살고 진실되게 살고 인내할 수 있는 용기의 샘터가 된다. 시편에 보면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였다. 애매한 돼지머리가 복이 아니요, 나무를 깍아 만든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복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그를 믿는 믿음이 축복인줄 아는 의식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하다.
3. 복받은 자의 책임을 생각해야 한다.
본문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하셨다. 빛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생명과 진리를 의미한다. 선과 의를 의미한다. 평화와 용서를 뜻한다. 빛은 이웃에게 비추일 때 의미가 있다. 빛이 비추일 때 영광이 있고 평화가 깃든다. 이같은 책임을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겠다. 빛과 어둠의 기원은 창조 이전이 일이다. 인간의 역사는 빛과 어둠을 숙명적으로 지고 있다. 도덕적으로 볼 때도 빛의 생활은 참이요 행복이요 즐거움이다. 어둠의 생활은 죄요 죽음이요 불행이요 저주이다. 조로아스터교 깉은 종교는 빛과 어둠의 원리를 발전시킨 종교이다. 성서에[서 빛을 비추라고 말씀할 때는 어둠을 전제한다. 어둠의 생활 특징은 작은 것이라도 드러날까봐 두려워하는 생활, 자연의 눈, 진리의 눈, 양심의 눈을 피하여 숨는 생활이다. 희망이 없다. 계획도 기쁨도 없는 허무주의의 생활일 수밖에 없다. 지극히 불안하고 흔들리고 그래서 위선적인 행위가 나타나게 된다. 부정부패의 원흉이 오히려 소탕작전에 앞장서게 된다.
그러나 빛을 비추는 생활은 죽으므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빛은 자아를 정직하게 발견하게 하여 어둠을 쫓아낸다. 주변세계를 알고 식별력을 발전시킨다. 무지와 편견과 독선과 평소의 감정에서 깨어나게 하는 힘을 공급한다. 빛의 생활은 새로운 관계를 발전적으로 수립한다. 믿음이 없어 불신이 만연한 세계에 믿음을 심고 의를 세운다. 결론으로 생각할 것은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빛을 비추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빛을 발해야 한다. 빛 자체가 아니다. 빛은 주님 자신이다. 그가 비추는 빛을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비추어야 한다. 반사해야 한다. 깨끗하고 똑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빛을 반사해야 한다.
95년도의 새해가 밝아왔다. 95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된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50년은 성서에서 희년이라고 말한다. 희년은 모든 부자유한 것이 자유롭게 되는 해이며, 묶인 것이 풀려나는 해이다. 남북으로 나눔을 당한 이 한반도가 하나되는 해가 되어야겠다. 올해는 말씀을 열심히 읽고 열심히 기도하므로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란다. 신앙인으로서 꼭 해야 할 일들을 열심히 행하여 천국시민의 자격을 갖추어 나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이것은 세상이 오복이요,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비는 마음이 기원이요, 믿음의 권면이요, 믿음의 강복임을 믿기 바란다. 잘못되고 미신 무당적인 축복 개념, 강복 신앙에서 벗어나서 성서적인 참된 복의 생활이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과 그리고 이 민족의 통일의 사역에 함께 하였으면 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원하시고 역사하시면 불가능이 어디 있으며 통일이 문제겠는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분명한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빛된 사람을 삻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