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소망 / 렘 31:10-14, 벧전 1:3-6
다사다난했던 1900년대가 가고 이제 희망의 새아침, 2천년대를 맞이했다. 2천년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희망이 없다던 사람들은 살 수 없다. 실직한 사람들이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 더 이상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적인 사고에 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희망을 가지게 되면 살게 된다. 결혼한다. 월세를 전세로 바꾼다. 더 큰 전세로 옮긴다. 집을 산다. 더 큰 집을 산다. 이런식으로 계속 작은 희망을 가지고 움직여 나간다. 진급하고 봉급이 올라가는 희망으로 산다. 어느새 나이 많이 먹고 꿈도 희미해진다. 그러면 자식에게 희망을 둔다.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며 모든 힘과 정성을 다 쏟는다. 그러다 보면 한 평생이 어느 순간에 가버린다.
강의에 늦지 않으러교 달려가는 대학생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 숨이 차서 뛰어가는가?” “늦지 않으려고요.” “안 늦으면?” 성적 잘 받고, 취직 잘하고, 결혼 잘하고....계속 가다보면 늙어 죽는다. 중간 이야기를 빼고 나면, 숨이 차서 뛰어가는 게 죽기 위해서다. 무슨 말인가? 자질구레한 희망이 사람을 속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생을 허비하게 만든다. 그 소망의 토대는 소망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위에서야 다른 소망들은 힘을 얻는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산 소망인가?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가를 치루신 삶이기에 소망이 있다.
사도들은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산 소망이 없다는 말씀이다. 언제부터 산 소망이 있게 되었다고 말씀합니까? 거듭나는 순간, 산 소망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태어날 때 우리는 어떠한 상태로 태어납니까? 소망없이 태어난다. 우리는 절망에 이르는 존재로서 태어난다.
진짜 소망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대로 잘 먹고 잘 사는 소망을 가진다. 잘 먹고 잘 살아지지도 않지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한다. 늙고 병드는 게 소망인가? 아니다. 죽는 게 소망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소망들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줄 것인가?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소망은 참된 소망이 아니다. 그 자체만 있다면 속이는 소망일 뿐이다.
우리에게 참된 소망을 주는 근거는 소망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의 무가치한 삶의 원인을 제거해 주셨다. 죄를 사해 주셨다. 사실상 인간의 삶은 무가치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옥의 영원한 멸망이다. 그런데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시집가고 장가가면 다 되는가? 좋은 대학가고 취직하면 다 되는가? 권세를 얻고, 명예를 얻으면 소망대로 다 되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치르신 죄의 대가를 보라. 그것이 확실할 때 참된 소망이 일어난다.
2. 그리스도께서 시련을 통해 이루어 주신 삶이기에 산 소망이 있다.
그리스도의 삶은 소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해 태어난다. 구박받으며 남의 종노릇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비롯한 모두에게 배신당하고 살인 누명 쓰고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운명이라면 살지도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셨다. 마 20: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는 정말로 비참하게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 된 소망을 주는길이기 때문이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가 마구간에 태어나시고 피난을 가고 가난하고,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배신당하고, 매맞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모든 일들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그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드디어 독일을 점령하고, 독일의 저 유명한 지옥의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탈환했다. 이 지옥 같은 수용소, 끔찍한 학대와 고통과 잔인한 고문, 비인간적인 억압에 시달려야 했던 이 수용소의 한 벽에 뜻밖에도 이런 찬송가 가사가 적혀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니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 지옥 같은 수용소 조차도 빼앗아 갈 수 없었던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를 보십시오. 이것이 고난을 이기는 힘입니다. 이것이 소망의 원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썩지 않는 기업을 잇게 하신다. 또한 그가 이루신 아름다운 삶은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했다. 그것이 하늘의 기업을 잇게 한다. 그가 행하신 모든 일들에 근거할 때만 우리는 영원하고 참된 소망을 가지게 된다.
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만드시는 삶이기에 산 소망이 있다.
이제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 영으로 들어와 계신다. 그가 하신 모든 일들이 우리 것이 되려면, 그가 자신이 행하신 공로와 모든 복을 가지고 우리 속에 들어오심으로 된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 그와 매일매일 같아져 간다는 소망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가 누리는 영광과 존귀 속에 들어간다. 무공을 배우는 잚은이가 무슨 소망을 가지는가? 모든 훈련 뒤에는 스승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스승의 정신과 기가 그 젊은이 속에 들어가서 제자를 만들어 준다. 어느 분야나 스승을 존경해서 그처럼 되려는 제자들은 모두가 그럴 것이다.
성도는 그 정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와서 모든 능력을 제공한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당장 스승처럼 능력을 발하고, 그렇게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져 간다.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오는 모든 시련을 자신 속의 성령을 의지하고 극복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연단된다. 시련이 없이 신앙도 인격도 자랄 수 없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이것이 참된 소망이다. 이 소망 위에 다른 세상적 소망을 세우라.
4. 그리스도께서 장차 주실 상을 얻는 삶이기에 산 소망이 있다.
이제 이 모든 소망의 근원을 말해 보자.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이 ‘소망(희망)의 신학’이란 책을 썼다. 몰트만의 소망의 신학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시다. 세상의 소망들은 낙심으로 변한다. 자잘한 소망들이 색을 잃고 사라져도, 여전히 저쪽에서 우리를 이끌어주는 소망 자체 그는 인격이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가 계심으로 유리의 작은 소망들은 힘을 얻는다. 그렇다. 하나님이 소망이시다.
우리의 소망은 물건이 아니다. 정신도 아니다. 영이요, 인격이요, 실제의 존재이다. 그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살아계시며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다. 다시 앞부분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참 소망 자체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이 무엇인가? 우리도 하나님처럼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것이다. 눈물과 땀을 흘리며 쌓아가는 우리의 삶은 결국 찬란한 부활로 열매를 맺는다.
시장에서 그릇 하나를 사가지고 왔다. 그 그릇을 깨끗이 씻었다. 그러나 씻었다는 것은 아주 소극적인 목적만 관철된 것이다. 왜 씻었는가? 거기에 김치를 담기 위해서이다. 김치를 담는 것이 그 그릇의 중요한 목적이다. 이와 같이 내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죄 사함받은 내가 새생명을 얻고 이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주께서는 다시 살아나셔야 했다. 부활이 없이는 기독교가 성립될 수 없다.
그 부활의 소망이 오늘의 어려운 삶에도 힘을 준다. 자잘한 소망들이 모여 산 소망의 내용을 이루는 과정으로 사용된다. 우리의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산 소망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다. 우리는 산 소망을 갖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찬송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는 주님을 찬양해야 마땅하다. 주님을 찬양하기 바란다. 이 산 소망 때문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시련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우리의 찬양의 대상은 산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이시다. 그래서 올해 우리 교회 실천목표를 이렇게 정했다. “새 천년 - 말씀으로 무장하여 새 출발하는 성도, 영혼을 사랑하는 성도, 말씀전파에 힘쓰는 성도, 그리스도의 군사로 훈련받는 성도, 열심히 봉사하는 성도”이다.
새 천년, 산 소망을 갖고 말씀으로 무장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 축 도 >
이제는 인류의 죄를 그 몸에 친히 짊어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우리와 온 세계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깊고 크신 사랑하심과 날마다 말씀과 진리 안에 살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와 교통하심이 신년 새해를 산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기를 결심하는 사랑하는 성도들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하실지어다. 아멘. (2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