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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파의 공적인 활동, ◉ 가족 관련 사항 ◎ 추모 사업 ■ 국내외 주요 사건)
● 1903년 4월 27일 전남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314번지에서 서화일, 이원례의 4남으로 출생
● 1911년(8세) 벌교의 사립 유신학교에 입학하다.
● 1914년 (11세) 일본 동경 금화심상소학교 졸업하다.
● 1919년 (16세)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때 3·1운동에 참가 <반도의 목탁>지 사건으로 6개월간 서울 형무소에 복역. 1년간 정학 처분을 당함.
● 1922년 04월 1일 (18세)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4년.13회) *보성교우명부 2008
● 1922년 일본 와세다 대학 입학, 08월 09일 15:00 고흥청년회관에서 여름방학 때 귀성한 서민호 환영회 개최
◉ 1923년 01월 (20세) 정태인 목사의 따님 정희련님과 혼인하다
● 1923년 7월 재일 유학 중 동경의 조선기독교청년회 야구단 일원(중견)이 되어 고국 각지로 순회함.
● 1923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졸업하다.
● 1924년 04월 12일 (21세) 유기원과 함께 3월 17일 경성역을 출발,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에 도착하여 관동 대진재의 참상을 들려주다. *신한민보 1924-04-17
● 1925년 04월(22세) 웨슬리언 대학 3학년에 편입하다.
● 1927년 (24세) 미국 「오하이오」 주 「웨슬리안」 대학 역사과 졸업하다.
● 1928년 6월 (25세) 허정, 장덕수, 김도연, 김양수 등과 함께 <삼일신보> 창간하다.
● 1929년 (26세) 「뉴욕」 컬럼비아 대학원 정치사회학과 졸업하다. 논제는 『「덴마크」의 농민고등학교 제도와 협동조합운동
● 1929년 03월 100일 동안 덴마크의 농민고등학교에 들어가 농업 실태를 연구하다.
● 1929년 07월 15일경 미국에서 돌아와 서울 사직동 황에스더 집에 머물다. *동아일보 7.20자 보도
● 1929년 08월 22일 20:00 벌교 유학생들의 주최로 공립보통학교 강당에서 서민호 환영회를 성대하게 열다.
◉ 1929년 11월 13일 부친 서화일, 지역의 유지와 일본인들과 벌교번영토지주식회사‘ 설립을 인가받다. 12월 총회에서 사장을 맡다. 부사장은 채중현 박사윤, 전무 겸 취체역 촌상사랑 등.
● 1930년 06월 10일? 연전(연희전문)과 서울럭비단 대항 럭비 경기에서 정문기 서상국 등과 함께 서울럭비단 소속으로 출전하다.*조선일보 1930-06-15
● 1930년 09월 13일 (27세) 19:00 조선일보 누상에서 조선야구심판협회 임시총회에 21인 위원의 일인으로 참가하다.
● 1930년 09월 19일 분규 상태에 있던 서울의 실천여학교를 인수받기로 조인하다. 그러나 이듬해 폐쇄 당하다. *조선총독부 관보(1931년 7월 17)
● 1930년 11월 07일자,11월 09일자 조선일보에 <농촌진흥의 의의와 농촌경제의 관계>(1) (2)를 기고하다.
● 1931년 05월 30일(28세) 조선사구락부 야구연맹전에 조선야구심판협회의 일원으로 제1회전,2회의 심판 요원에 선정되다.
● 1931년 0일 부친 서화일 별세. 부친의 유언에 따라 지역사회에 희사금을 집행하다. *동아일보 1933-10-14 오천오백원을 각단체에 의연, 근검절약으로 성가한 돈을, 서화일씨 임종유언
◉ 1932년 02월 04일(19세) 조선일보에 <미국농민운동 소관(小觀)> 글을 싣다.
◉ 1933년 11월 12일 13:20 천도교 기념관에서 열린 무도대회에 서광순이 출전하다.
● 1934년 (31세) 남선무역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다. 벌교 남국민학교의 학무위원이 되다.
● 1934년 04월 17일 벌교의 두 시장을 합병하는 문제로 열린 면민대회에서 박사윤 서민호 조만엽 나상석 등이 실행위원으로 선임되다.
◉ 1934년 11월 18일 모친 이원례 여사, 회갑을 맞이하여 채권 원금 15,300원 면제하다, 연희전문에 1500원, 보성전문에 500원 장학금 기부.이날 행사에 연전대표로 최순주, 컬럼비아 교우 대표로 김도연, 광주 친우 대표로 최원순이 왔다.
● 1935년 (32세) 벌교 송명학교 교장이 되다.
● 1935년 06월 01일 박사윤, 채중현 등 14명과 함께 면협의 회원이 되다.
● 1935년 08월 03일 채중현과 함께 동아일보 벌교지국의 고문을 맡다.
● 1935년 10월 07일 전후. 벌교상공회 주최 동아일보 벌교지국 후원으로 역사(力士) 한준호군의 역기 실연대회에서 상공회장 서민호의 ‘의미심장한 개회사’를 하다. *동아일보 1935-10-12
● 1936년 06월 1일 (33세) 동강 면민들이 부친 서화일의 송덕비를 동강에 세우다. * 동아일보 1936.6.6
● 1936년 06월 17일 16:00 유지 100여명을 자초대하여 35회 탄생 자축연을 하다.
◉ 1938년 02월 20일? 스포츠 조선의 제2진인 중등학교 선수들의 진로 상황에 휘문 검도부 서광순(미정)으로 나오다.
● 1939년 05월 02일 (36세) 신윤국, 김양수, 박창서 등과 조선흥업(주)을 설립하다.
◉ 1939년 08월 서가소작조합(조합장 서채호) 국방헌금 55원을 내다. *1939.08.11.동아일보3면 總會費節約하야 國防獻金
● 1940년(?. 37세) 낙성간이학교 설립기성회장을 맡다.
● 1940년 06월 08일~11일 (37세) 서민호, 조선운전동맹회 진정원 18명 중 순철(順鐵) 지부 대표로서 철도국을 방문하고, 총독부 정무총감 경무국장 식산국장에게 철도화물 수송에서 비지정업자의 영업권 보장을 요구하다. ,
● 1942년 04월 09일 (39세) 송명학교를 송광사에서 완전 인수하다.
● 1943년 03월 06일 (40세) 조선어학회 사건(2월 발생)으로 서울에서 검거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약 7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기소유예로 1943년 9월 18일에 석방되었다. *박용규,『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275쪽
● 1945년 08월 17일(42세) 김양수의 연락으로 순천의 광복 축하 행렬 참가, 이후 벌교에서 축하 행렬을 거행하다.
● 1945년 8월 벌교에「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이 되다.
● 1945년 12월 24일 광주시장 서민호, 광주상업학교 개교식에서 축사를 하다. *광주민보 1945-12-27
● 1946년 3월 (43세) 서민호,미군정으로부터 광주부윤(시장)에 임명되다.
● 1946년 03월 25일 13:30 광주부청 주최로 해방기념식수식을 갖다. 국기 경례,순국 열사에 대한 묵상이 있은 다음 서 광주부윤으로부터 식수의 국가적 의의에 대한 열렬한 식사가 있었다. *광주민보 1946-03-28
● 1946년 04월 12일 14:00 광주부청에서 열린 동회장(洞會長) 회의에서 개회사를 하고 새로운 동장에게는 국가를 위하여 충실을 다하라는 훈시를 하다. 이날의 회의는 일제 잔재인 정(町)을 동(洞)으로 ‘혁신적’으로 개칭하고, 종래의 정회장을 전부 사임케 했다. *광주민보 1946-04-14
● 1946년 08월 15일 09:00 평화 해방 기념 식전에서 서 부윤, ‘감격깊은 열렬한 개회사’를 하다. 14:00 전남도 주최로 해방 축하연을 중앙교에서 했다. 동광신문 1946-08-17자에 광주부윤 서민호,“과거 1년을 회고 반성하여 민족 통일로 자주독립” 글 실리다.
● 1946년 10월 15일자 최영욱의 뒤를 이어 전라남도지사로 임명받다. 재임 중 고흥중학교, 조선대학교 설립에 기여하다.
● 1947년 02월 22일 (44세) 서민호 전라남도 지사, 학생 맹휴에 대해 신중할 것을 당부하는 담화를 발표하다.
● 1947년 03월 01자 동광신문 기획 3·1운동 당시의 각계 인사 회고담에 도지사 서민호,“동족애의 정신으로 삼일기념일을 당하여”기고하다.
● 1947년 03월 11일자,12일자에 동광신문에 “농촌후생문제-주로 농지와 후생에 관하야” 상.하 연재하다.
● 1947년 03월 30일자에 서민호 전라남도 지사, ‘학교 폐쇄(*광주서중)와 나의 소감’ 싣다.
● 1947년 05월 12일 동광신문 05-13자 하단에 급성맹장염 퇴원에 즈음한 감사 광고를 싣다.
● 1947년 06월 18일,20일자 동광신문에 “학도제위에게” 글 싣다.
● 1947년 06월 26일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으로부터 강원지사로 발령받자 거부하고 사퇴하고 ‘한 사회인으로서 국민운동에 사력을 다할 것을 결심하였다“고 발표하다. 7월에는 지역 대표 40여명 상경하여 지사 유임 청원. 07월 말에는 인사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방문하다.
● 1947년 09월 28일 독촉청년연맹 전남도지부 주도 아래 결성된 대동청년단 전남도단부 주비회 위원장을 맡다.10월 26일 광주중앙국민학교에서 결성된 대동청년단의 단장을 맡다.
● 1948년 09월 08일 (45세) 동아일보에 수해의연금 1천원을 접수하다.
● 1948년 09월 15일자에 전라남도 경찰 후원회 연합회장 사퇴 성명을 동아일보에 소형 광고로 싣다.
성명서
주위 친지의 권면에 의하여 노둔비재가 전라남도 경찰 후원회 연합회장에 취임 이래 미충(微衷)을 다하고 국립경찰의 육성 향상에 일조할 각오로 나왔던 바 금번 부득이한 형편으로 그 임(任)을 사퇴하였습니다.
추기(追記) 저간 그 회에서 경찰 후원금 조성의 일책(一策)으로싸 복표(福票)를 발매하여 관민간에 약간의 물의가 없지않은 듯[不無] 하온데 복표 발행 이에 대하여는 본인이 상경 부재시에 일어난 일이므로 본인과 전연 관여한 바 아님을 첨가하여 이제 성명합니다. 4281년 9월 10일 광주부 금남로 서민호 백(白)
● 1948년 12월 19일경 조선전업주식회사 사장에 임명되다 *동아일보 1948-12-22, 1949년 01월 05일 11:00 서울 중구 을지로 조선전업회사 회의실에서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비롯한 각계 명사 참석하에 성대히 거행되다. “ 전력 문제 해결에 모든 힘을 다하겠다”고 ‘결의 넘친 식사 토로’하다.
● 1949년 02월 13일 (46세) 15:00 취운(翠雲) 구락부 주최로 서민호 조선전업사장의 “전력문제‘에 대한 강연회 개최하다.
● 1949년 05월 11일 대한노총 조선노동조합의 파업 지령으로 분규가 일어나다.
● 1949년 06월 27일 11:00 목포 금화동 기슭에서 중유발전소 준공식 거행, 서민호 조선전업사장과 이 국무총리를 비롯한 장관, 국회의원 참석하다.
● 1949년 07월 15일 경전회의실에서 전기 부문에 종사하는 전업·경전·남전·중선 전기의 정구 동호인들이 전기단 정구부를 창설할 때 서민호 사장으로 고문으로 추대하다.
● 1949년 08월 12일 서민호 조선전업 사장, 기자간담회 갖고 발전소 운영상의 애로와 겨울철 발전 상태 예견, 전업 부정 사실 문제 등에 대해 설명하다.
● 1949년 09월 13일 11:00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4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식사(式辭)를,국회의장 신익희 씨가 축사를 하다.
● 1949년 10월 03일 15:00 서울운동장 사무실에서 서울대학야구연맹 임원 개선하고 서민호를 회장으로 추대하다.
● 1949년 10월 4일(46세) 역도연맹 회장으로 취임하다.12월 3일-4일 명동시공관에서 대한역도연맹과 동아일보의 후원으로 열린 제5회 전국역도선수권대회와 제1회 전국육체미대회에서 개회사 하다.
● 1949년 11월 12일 14:00 경기중학교 강당에서 김종무 경기중교장의 부정 의혹은 일부 임원의 불순한 모략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는 진상보고를 하고, 김준원 권태희 서민호 등을 이사로 개선하디.
● 1950년 01월 05일 (47세) 동아일보에 <전력난 해결은 각자의 애국심으로> 제목의 글을 기고하다.
● 1950년 04월 7일 대한야구협회가 미국에 파견할 대표단을 구성할 때 아마연맹전문위원회 위원장을 맡다.
● 1950년 5월 30일 (47세) 고흥에서 2대 국회의원(지역구 전라남도 고흥을, 소속정당 무소속)에 당선되다. 27,902표 득표. 고흥 갑구는 박팔봉 당선.
● 1950년 06월 18일? 학도야구연맹 임원 개선 때 회장으로 추대되다.
● 1950년 06월 23일 서민호 외 19명의 국회의원, 여수·순천 10·19사건 복역자 재심을 요구하는 긴급 동의안을 제출
● 1950년 07월 28일 제2대 국회 내무치안위원회위원장(1950.07.28.~ 1951.03.08)이 되다.
● 1950년 09월 05일 국회, 유엔총회에 파견할 대표 6인 1차로 선출 △신익희 장택상 정일형 황성수 김동성 서민호 06일 신 의장, 황성수, 정일형 3 의원 유력시
● 1950년 11월 02일 국회에서 서민호 의원 외 36인이 제출한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안을 상정 토의하여 38 이남 전 지역에 실시되고 있는 비상계엄을 해제하기로 가결되다.
● 1951년 01월 26일 (48세) 조선전업 사장, 사임 의사를 표명하다.
▹서사장 사임 소회:동 서사장은 왕방한 기자에 아래와 같이 사임 소회를 말하였다. “약 2개년 여에 걸쳐 여러분의 원조로서 대과 없음을 감사하는 바입니다. 아무 한 것 없이 죄송하나, 다만 발전사업체를 일원화한 것은 적은 업적이라고나 할까요. 사장의 자리는 떠난다 할지라도 앞으로 미력이나마 발전과 배전사업체의 일원화를 위해서 후원할 생각입니다. 이 일원화란 것은 기술자의 유효 적절한 사용과 운영비 절약의 관점에서 꼭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 1951년 02월 03일 11:00 국회 제21차 회의에서 서민호 의원의 긴급동의로 상이군경 위문 겸 각 상무분과위원회의 미처리 안건 등을 처리하기 위하여 1주일 휴회하기로 가결하다.
● 1951년 부산 피난국회에서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1951.2) 등의 진상을 폭로하는 등 이승만 정권과의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다.
● 1951년 03월 09일 서민호 의원(공화 재선), 국회 본회의에서 내무위원장(1951.03.09~1951.12.19)이 되다.
50세의 노장이나마 투지력이 왕성한 서민호의원은 내무위원장에 재선되었다. 와세다(早大) 정치과와 미국 콜롬비아대학 정치사회과를 졸업한 높은 교양을 지니고 있다. 일찍이 뜻 있어 농촌운동에 힘을 써 사립소학교를 경영한 일이 있으며 조선어학회사건에 관련하여 2년 동안의 감옥살이를 한 애국용사다. 전남 고창군 을구 출신으로 해방후 광주시장과 전남지사를 역임하여 정치적 식견과 행정적 수완을 연마하였다.
조선전업회사 사장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스포츠맨 서민호군으로도 존명(存名)하다. 독특한 웅변과 뱃심으로 공화구락부를 리드하고 있는 것도 평상시 실력의 표현인가? 12 분과위원장 중의 두 사람의 재선인으로서 동지들 간의 인기는 상당하다. 패기만만한 서 의원은 이렇게 웅변한다.
“정부와 국회가 마찰이 있다는 항간의 설은 유감이다. 장 총리를 맞이한 것을 계기로 상호 협조하여 이도(吏道)의 확립과 치안확보, 경찰의 질적 향상에 미력이나 헌신하겠으며 민중의 대변인으로서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더욱이 인권옹호와 관기숙청에 유의해서 진의(眞意)한 민주사회 건설에 최선을 다하겠다. 모든 것을 승전 완수에 중점을 두고 우리의 경제면에 애로도 적지 않으나 예산을 깍는 데만 중점을 둘 것이 아니라 승전을 위해서는 오히려 예산을 증가시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우리는 삭제하는 권한밖에 없으니 유감이라 할까요!”부산일보 1951년 03월 14일
● 1951년 03월 27일 국회 52차 본회의에서 부산 대구도 비상계엄령 해제 결의하게 이끌다.
서민호 의원 = “입헌국가라면 국민의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할 것인데 왕왕 정부는 자기 의사에 맞지 않으면 비애국자라 한다. 과거 일본에서는 민중이 계엄 선포를 요구해도 좀체로 들어주지 않았는데 대한민국은 툭하면 계엄이니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동아일보 1951-03-28
● 1951년 04월 25일 국회 제64차 본회의에서 서민호 의원이 국민방위군 의혹사건 개요를 보고하다.
“세간에는 이 사건에 관하여 정치적 모략 또는 개인 감정 운운하는 풍설도 있는 듯하나 나는 국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전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이 사실을 규명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 우선 그 개요만을 보고하려 한다. 먼저 전란으로 인한 혼잡 중에서 청장년을 후방으로 후송하였다는 것은 사의를 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을 초래하였는가? 제2국민병들은 정부를 신뢰하고 국가 방침에 순응하여 무조건하고 지시에 따라 부모 처자를 버리고 길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도중에서 당한 참혹한 대우와 혹독한 처우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로써 50만 장정들은 결국에 한국을 배반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는 신념을 뿌리깊이 박아준 결과가 되었으니 이것은 우리 국시(國是)와는 배치되는 일이다.
모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귀환 장정의 80%는 노록(勞力) 불가능할 것이라 하며 20%는 생명 보지가 불가능할 것이라 한다. 만약에 회복되더라도 그들의 정신을 누가 고쳐줄 것인가. 이와 같은 과오를 범한 그 책임자는 할복자살을 하여도 오히려 남음이 있을 것이며 국민 ~에 사과하여 아직도 민족정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표명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규명하려는 자를 정치적 모략이니 불순분자니 하는 것은 국민의 이름으로써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동아일보 1951-04-26]
■ 1951년 5월 10일 이시영 부통령,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사표를 제출하다.
● 1951년 07월 06일 주한 미 대사관, 이승만 대통령과 서민호 국회 내무위원장의 갈등 보고 [출전:국편한국사데이터베이스] 「Records of the U. 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of Korea」, 『남북한관계 사료집』 16, 755쪽
● 1951년 08월 27일 검찰청, 서민호·박승하·남송학·김종희 등 국민방위군사건 관련 국회의원을 소환 조사하다.
● 1951년 11월 06일 국회 본회의, 내무부장관 인책 사직 결의 때 내무치안위원장으로서 사직 결의 배경 6개항 설명하다.
● 1952년 01월 22일 (49세) 국회 각 상임위원장 선출에서 서민호 의원, 내무위원장 차점으로 낙선하다.
● 1952년 03월 16일 대한야구협회 전국대의원회의에서 회장으로 서민호, 부회장으로 이홍직 김예준,이사장으로 이영민을 선출하다.
● 1952년 03월 29일 고흥군민 20,102명 , 서민호 의원 불신임 소환 탄원지와 서명서를 대통령에게 전달하다. [조선일보 1952-04-16]
● 1952년 04월 17일 역도연맹 회장 연임이 되다.
● 1952년 04월 19일 내각책임제 개헌 찬성 의원 123명에 속하다.(반대는 60명)
■ 1952년 04월 20일부터 20일간 국회, 지방선거감시 및 지방 실정 시찰 위해 임시 휴회하다.
● 1952년 04월 24일 국회내무위원장으로 지방 시찰 중 서창선 대위 살해 사건[순천사건,서민호 사건] 발생하다. 이후 8년 옥살이
● 1952년 04월 25일 국회의원 서민호,순천 경찰서에 자수하다.[경찰에서는 살인 혐의 체포로 발표하다. 당시 국회 개회 중]
● 1952년 04월 27일 전라남도 경찰국장, 서민호 의원 살인 사건 경위에 대해 기자회견하다.
● 1952년 05월 10일 한격만 검찰총장, 서민호 의원 사건 기소 사실 발표하다.
● 1952년 05월 14일 국회, 국회 결의 제177호로 서민호 의원에 대한 석방을 결의하다. / 국회의장, 국회 결의 제177호를 대법원장 앞으로 통고하다.
● 1952년 05월 15일 대법원장, 국회의장의 통고를 부산지방법원에 이첩하다.
● 1952년 05월 19일 부산지방법원 형사부(재판장 안윤출 부산지법 수석부장), 구류 집행 정지 결정 →05월 20일 20:00 서민호 의원 석방 →석방 후 기자회견,
“이번 사건은 불가항력적으로 발생된 일이지만 다사다난한 이때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애국 동포들에 대하여 대단히 죄송할 뿐이다. 사건에 대하여서는 법적으로 공정하게 처리될 것이나 이번 사건을 통하여 나의 전생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하여 바칠 신념을 더욱 굳게 하였다.”
● 1952년 05월 20일 권오병 검사, 대구 고법에 항고 → 21일 부산지방법원 형사합의부(안윤출 재판장,박정표 김흥한 판사), 항고 이유 전부를 인정치 못하겠다며 의견서를 붙여 검찰청을 통해 대구고법에 정식 송부
● 1952년 05월 19일 11:30 / 21일 11:00 / 23일 08:00 서민호 의원 석방 결의를 규탄하는 성토대회 개최하다.
● 1952년 05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서민호 피고 사건 공판 개시하다
■ 1952년 05월 25일 정부, 전남북, 경남 지역 비상계엄령 선포하다.
● 1952년 05월 25일 서민호 의원 체포하다.
■ 1952년 05월 26일 국회의원을 검거하기 시작하다.(소위 부산정치파동)
● 1952년 05월 30일 수사기관, 서민호 의원 군법회의 회부 이유 발표하다.
● 1952년 06월 04일 서민호 피고 사건, 영남고등군법회의로 이관되다.
● 1952년 06월 09일 프란체스카 대통령 부인, 임병직에게 서민호 사건의 ‘진상’을 미국 정부에 전달토록 요청하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이 모든 사건은 육군 장교에게 총을 쏘고, 사살한 서민호 국회의원 석방안에 대해 국회가 표를 던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국회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최고법원이 이런 살인자의 석방을 명령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까? 불행히도 최고법원 판사가 민주당원이었으며, 벤치에 있는 4명의 판사들 중 2명도 민주당원이었습니다.~”
● 1952년 06월 10일 서민호 의원 사건 제3회 공개 군사재판. 재판 절차에 항의하여 서민호 의원, 공판 거부. 관선 변호인 4인, 정구영 윤형남 사설 변호인 사임. 심판관측에서는 사실 심리 개시.
▵증인:강방초(접대부) 김광□(순천 특무대원) 김덕환(동) 윤성봉(참고인) 최정용(요리집 고용인) 김용일(순천서원) 강보원(순천서원) 정양원(의사) 장동면(동)
● 1952년 06월 11일 11:00 제4회 공판. 서 의원의 공판 거부 발언.강효제 심문
“법이 없는데 재판받아 무엇하오. 차라리 총살하지”
“이 나라는 민주주의의 길을 나갈 것 뿐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그래야 한다. 여러분은 눈물도 없습니까? 여러 분이 잘못하면 천추만대에 후회를 남길 것이다. 여러분 아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헌법 22조에 의해서 주장한다. 여러분은 민주주의를 살려 주시오”
● 1952년 06월 12일 10:00 제5회 군법재판,증인과 증거 신청 후 서원용에 대한 검찰관의 심리하다
● 1952년 06월 13일 10:00 제6회 고등군법재판,최정용(평화여관 심부름꾼) 김용일(순천경찰서 수사주임) 증인 심문. 불리한 증인 발언에 ‘서 피고 부자 흥분’
● 1952년 06월 14일 09:00 제7회 공판. 서 부자 취조한 강진원 경위 심문. 평화여관 별관 주인 대리인 전재숙은 사건 발생일에 최정용을 본 적 없다 증언하다.
● 1852년 06월 15일 09:00 제8회 공판 증인 대질심문- 최정용과 전재숙
● 1952년 06월 16일 14:30 군법재판 제9회 공판. 증인심문-한상휴, 종래 진술 허위라고 실토하다.
● 1952년 06월 17일 14:15 제10회 제10회 공판. 증인심문-전재숙,김통관, 최운선
● 1952년 06월 18일 09:00 제11회 공판. 증인심문-정진동, 강석순(지프 운전수)
● 1952년 06월 19일 영남지구계엄군법회의 최경록 재판장, 심판관 일행 20명 등 순천 평화여관에 와서 모의 실험하다. 유엔 한국위원회 호주 대표 대리외 1명, 미 대사관원 1인 참관하다.
● 1952년 06월 27일 17:50 검찰, 서민호 의원에 사형,서원용에겐 징역 2년 구형하다. 이날부터 재판장이 최경록에서 박동균 준장으로 바뀜
● 1952년 06월 30일 대구고법,부산지법의 구류 집행 정지 결정을 취소하다.
● 1952년 07월 01일 15:10 영남고등군법회의(15회 공판), 서민호 의원에게 사형 선고하다. 서원룡 피고엔 벌금 20만원.
“이미 각오한 바이다. 정의는 반드시 빛날 것이다. 민주주의는 절대로 고적(孤寂)한 것은 아니다. 나는 조금도 낙심하지는 않는다. 재심 신청을 하겠느냐고 하나 나는 처음부터 이 군법재판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거부해 왔다. 될대로 맡겨 둘 뿐이다.”
◉ 1952년 07월 02일 부인 정해련 여사, 차남 서해룡, 대통령과 국방장관, 총참모장에게 재심 탄원서 제출하다. 관사선 변호인 측에서도 재심 탄원. 국회의원 류홍, 김정기 양의원 중심으로 재심 운동 시작. 07월 05일 103명 의원 서명받아 청원서 제출
● 1952년 07월 02일 무쵸 주한 미 대사, 서민호 사형 선고로 인한 한국 내정 위기와 대통령 암살 음모에 관한 김창룡과의 면담 내용을 국무부에 보고하다.
● 1952년 07월 03일 잇터섬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 의장, 이승만에 서민호 사건 항의 서한
■ 1952년 07월 04일 대통령 직선제 발췌개헌안, 국회 통과하다.
● 1952년 07월 04일 이승만 대통령, 원용덕 계엄사령관에게 재심 지시하다.
● 1952년 07월 24일 09:00 부산지방법원 제2호법정에서 육군준장 민기식 재판장 등 9명의 심판관이 맡다.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김흥규와 최윤권 두 사람이 참여.
● 1952년 07월 25일 09:05 제2회 고등군법재판. 영남지구계엄사령관의 지시로 법적 근거 없이 군법재판에 이송된 것은 위법 등의 사유를 들어 대법원에 재정 신청서 제출 밝히다.
■ 1952년 07월 28일 00:00 비상계엄령 해제. 계속 중인 군재는 1개월 연기하는 대통령령 발표하다.
● 1952년 07월 28일 11:00 제5회 군법재판. ‘변호인측 무효 주장에 재판장은 타당 고집’ ‘계엄법 23조 둘러싸로 논란’
● 1952년 08월 01일 재심 고등군법회의(9회 공판) 8년 징역 선고하다. 국회의원 자격 상실하다.
“후배를 죽인 것은 미안하나 내가 살기 위하여 한 일이다”
● 1952년 08월 11일 언론사 사주들, 서민호 의원에 대해 무죄 석방을 요청하는 탄원서 제출하다.
● 1953년 05월 08일 (50세) 비상계엄 해제 따라 부산지방법원에 사건 이송(재판장 양회경 부장판사. 강언휘 송명관 판사)하다.
● 1953년 05월 25일 서민호 의원 사건 제1회 공판, 사실 심리와 증거 및 증인 채택. 06월 04일 순천평화여관 현장 검증, 06월 18일 제2회 공판 개정 알림
“총력전으로 북진통일을 이룩하려는 이 마당에서 고 서대위가 별세하게된 불행에 대하여 작년이고 지금이고 지극한 유감의 뜻을 표하여 마지않는 바이며 본인과 일가의 성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되었다는 점 더욱 유감스럽고 고 서대위의 명복을 비는 마음 간절하다.
한편 이 사건처리가 민주국가의 기본인 준법정신을 따라 법대로 지향하여 나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이렇게 되게끔 해준 여러분의 노력에 대하여 만강의 감사와 기쁨을 억제할 길이 없다.”
채택된 증인은 변호인측이 신청한 한상휴·박창서·김홍수·강석순·정진동·김처중·이종석·전재숙·김귀진·김도관·이계식·황우수·서원룡·정양元·장동면·류홍의 16명 전원과 검찰측이 신청한 최정룡·윤성봉의 2명 및 법원측 직권으로 채택한 최진선(기생)·백창규(평화관 주인)·최동 박사의 21명
● 1953년 07월 26일 검찰, 업무상 횡령과 배임 추가 기소하다.
● 1953년 10월 20일 부산지방법원, 살인 무죄(정당방위 인정), 업무상 횡령은 무죄, 배임 유죄(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를 선고하다.
● 1953년 10월 22일 서민호 사건, 보석 결정이 지방검찰청의 항고로 집행정지 되다.
● 1954년 04월 15일 (51세) 대구고등법원(윤철균 부장판사, 김영환 박상익 배심판사)에서 사형 구형하다.
● 1954년 04월 22일 대구고등법원, 살인죄 면소(1952.8.1.자 재심고등법원 판결이 확정되었음을 이유로 함),업무상 횡령 무죄, 배임 유죄(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선고하다. / 대법원에 상소
● 1954년 04월 22일 서민호 의원 사건에 위증죄로 기소된 5명 모두 무죄 선고를 받다. 한상휴(61), 박창서(53), 김홍수(47), 김귀진(33), 김일관(33)
● 1954년 07월 26일 정구영 변호사, 서 의원 복부 탈장 등 병증 악화로 보석 신청.
● 1954년 12월 03일 14:00 대법원, 접수 7개월만에 3심(상고심) 첫 변론 공판. 재판장 – 김병로 대법원장, 대법관 - 김갑수 김세완 배정현 허진. 변호인 변론 - 정구영 윤형남 조재천 엄상섭 김의준
● 1955년 01월 18일 (52세) 대법원, 원심 판결 파기 환송하다. ‘4년만에 또 환송’
● 1955년 05월 24일 대구고등법원, 살인죄 면소,업무상 횡령 무죄, 배임유죄(징역 10월)
● 1955년 08월 12일 대법원, 서민호 사건 고법 판결 취소하다.
● 1955년 09월 16일 대법원,검찰의 상고에 대해 상고 기각. 서민호에 징역 8년 확정하다.
● 1956년 01월 7일자 동아일보에 “서민호 기결수를 찾아서” 보도(인터뷰와 사진)로 두달 동안 면회 막다.
● 1957년 12월말 (54세) 대구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다.
◎ 1957년 12월 26?~27? 아우 서광순, 서민호 석방운동을 공약으로 내세운 자유당측 모 인사의 행태에 개탄 [조선일보 1957-12-28]
● 1958년 08월 04일 (55세) 자 경향신문에 <망각지대의 인물들>란에 소개되다.
◉ 1959년 11월 9일(56세) 모친 이원례 여사 별세하다.
◉ 1960년 3월 (57세) 장남 원룡의 딸 태어나자 치리(治李)로 이름 지어주다.
● 1960년 04월 29일 오후 6시 30분 (57세) 서민호 전 의원, 4․19 혁명으로 대전형무소에서 8년 5일만에 석방되다. 5.1에는 8년 복역 상여금 6964원을 동아일보에 위문금으로 전달하다
■ 1960년 05월 10일 거창양민학살사건 유족, 위령비 건립 추진하고, 11월 18일 세우다.
● 1960년 05월 17일 순천시민 3000명, 서민호 씨의 복권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허 수석국무위원과 국방장관, 법무장관에 제출하다.
● 1960년 05월 21일 고흥군민 4604명 서민호 씨의 복권을 청원하다. 6월 25일 특별사면되다.
● 1960년 06월 27일 사면받은 서민호 씨, 허 총리 방문. 전남 고흥을구에서 무소속으로 민의원 출마 표명하다.
● 1960년 07월 29일 제5대 민의원(지역구 전라남도 고흥乙, 소속 정당 무소속) 당선되다.
● 1960년 08월 08일 제2공화국 첫 국회 개원, 민의원 의장 곽상훈, 부의장 이영준과 서민호, 참의원 의장 백낙준, 부의장 소선규 의원 선출하다. (1960.8.8.~1961.5.16.)
● 1961년 01월 3일 (58세) 서민호 민의원 부의장, 남북한 대표 접촉을 환영한다고 언명하다.
● 1961년 01월 22일 대한야구협회 회장이 되다. [동아일보 1.23자]
● 1961년 03월 08일 서민호 민의원 부의장, 대한중석에 다시 금품을 요구한 3명 의원과 돈을 받은 6명의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 1961년 03월 22일 정부, 유엔총회에 파견할 정부 대표로 정일형 외무장관, 서민호, 서동진 등 11명 명단 발표하다.
● 1961년 03월 28일 제15차 UN 총회 한국 대표 출국하다.
● 1961년 05월 02일 서민호 부의장, 국회의 한국 통일 결의 재검토 역설하다.
● 1961년 05월 14일 서민호 부의장, 혁신계와 통일 협의체 추진하다.
■ 1961년 05월 16일 5·16군사정변 일어나다.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의 기능을 제한적으로 집행하기 위하여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발표하다.
● 1961년 05월 00일 5·16으로 남북 교류론이 문제가 되어 10개월 동안 투옥되다.
● 1962년 01월 06일 (58세) ‘혁명 정부’ 당국, 서민호 등 구정치인 연금 상태를 해제하다.
● 1962년 01월 31일 조계사에서 열린 전 신민당 재정부장 김용순 장례식에 5·16로 연금 상태에 있었던 서민호 등 구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하다.
● 1962년 02월 13일 고 유석 조병옥 박사 2주기(14일)를 맞아 돈암동 자택으로 양초를 한아름 사가지고 가서 한바탕 통곡을 하고 돌아오다. 02월 14일 10:00 삼일당에서 열린 2주기 추도식에 장면,김도연 씨 등과 참석하다.
● 1962년 03월 05일 동아일보가 5·16 이후 유력 정치인의 근황을 연속 소개할 때 월파를 소개하다.
● 1962년 03월 14일자. 경향신문이 이 박사 환국에 대해 각계의 여론을 들은 바 찬성 의견이 많은 속에서도 서민호 전 민의원 부의장은 단호하게 반대하다.
① 반대한다. ②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면 오라해도 오지 않을 것이다.
■ 1962년 03월 16일, 5·16세력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세력을 거세를 명분 삼아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어 4천여명의 공민권을 제한하다.
● 1962년 03월 16일 민정 복귀에 대비하여 공포된 정치활동 정화법에 대해 “서민호씨만은 ‘민주주의 실천에 어긋남이 없도록 입법해야 할 것’이라고 그의 의사를 뚜렷이 표명”했다고 보도되다. [경향 1962-03-17]
● 1962년 03월 22일 경향신문, 03월 23일 동아일보의 윤보선 대통령의 사임설에 대한 각계 의견 조사에서 “떳떳한 일이다”라고 의견을 밝히다.
서민호(전 민의원 부의장) = 오늘날 이러한 사태를 초래케 한 데 대해 나로서는 유감을 표명한다.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요, 민주국가다. 법취지와 체계에 있어 재고해야 할 점을 내포한 채 구정치인의 행동을 제한하는 예외적인 법률이 나왔을 때 구정치인의 한 사람이었던 그분이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뜻에서 그분의 하야 결의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당연하고 떳떳한 일이다. [경향 03-22]
● 1962년 04월 15일 정치활동 적격 심판 청구에 응하지 않다.
● 1962년 04월 23일 17:00 국민회당에서 한글학회와 국어국문학회 공동주최로 한글 학자 6명(이윤제,한징,정태진,최현배,이희승,정인승)에 대한 건국공로훈장수상 축하회에 참여하다.
● 1962년 04월 24일 10:00 입법 제헌의원을 역임, 혁신정당운동의 지도자였던 고 동안 서상일 영결식에서 신태약과 함께 조사를 하다.
● 1962년 05월 30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정치 활동 적격자 1,336명 부적격자 1,622명을 발표하다. 서민호는 무소속 정당 인사에 포함되다.
● 1962년 06월 17일 중앙정보부 서정순 차장, 구민주당과 이주당 계열 인사들이 박정희 의장과 장택상 서민호씨 제거 기도를 하였다하여 74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하다.-민주당 반혁명사건 08.07에도 공판 지속.
● 1962년 08월 29일자. 경향신문 수재의연금 접수 : 일금 500원, 작업복 1벌
● 1962년 08월 31일자 경향신문이 구정치인을 대상으로 박의장 대통령 출마 고려 의견을 묻자 만류하고 싶다고 의견을 밝히다.
● 1963년 01월 17일 (60세) 자 동아일보에 나의 옥중기 발간 기사 나오다. “생생한 투쟁의 기록”
● 1963년 01월 23일 박정희 의장의 시국 수습안에 정계 거의 수락 보도. 서민호 전 민의원 부의장은 “9개 시국 수습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 1963년 03월 06일 광주발 동아일보 보도. 민정당에 4명 입당 예정이라고.. 전 민의원 부의장 서민호, 구 신민당계 고흥출신 민의원 박형근 등 / 03월 08일 조선일보 보도에서 가입설 부인. / 03월 08일 동아일보 보도에서 관망 중 해명
●■ 1963년 03월 24일 민정당 의원총회, 한일회담이 타결되면 의원직 총사퇴키로 소속의원 41명 사퇴서에 서명
● 1963년 03월 26일 전 국회부의장 과도내각구성 주장
● 1963년 10월 19일 김도연·서민호 등, 자민당에 정식 입당
● 1963년 11월 11일 서민호, 남북한 서신 교류 등 주장.
● 1963년 11월 26일 자유민주당 최고 위원·제6대 국회의원(지역구 서울시 룡산, 소속 정당 자유민주당) 당선
● 1963년 12월 00일 민주당계 3당(민주당 13석, 자유민주당 9석, 국민의당 6석)이 공동교섭단체로 삼민회를 구성하여 1965년 06월?까지 활동하다.
● 1964년 01월 17일 (61세) 경향신문 기획 연재 <통일론> ④ 남북교류문제에 대해 남북 교류 주도를 주장하다.
● 1964년 01월 24일 보성교우회장(4대)에 선출
● 1964년 01월 30일 제5차 국회 야간 본회의에서 서민호 삼민의원은 통일 문제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공격 [경향 01-31]
서민호 삼민(三民) 용산구 의원 질의 = ① 법치국가에서 예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적인 혁신계 정치인을 석방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라. ② 황태성 사건에 있어 황이 재심 중임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집행한 이유를 밝히라. 이것이 법치국가에서 동등한 법칙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③ 창가학회(創價學會)는 공산당에 못지 않은 비밀정치단체인데 이를 단속할 대책을 밝히라. ④ 불과 6억불의 청구권을 가지고 왜 그리 평화선을 양보하려고만 하는가. ⑤ 통일문제연구에 필요한 자료 수집을 어떻게 하겠는가? ⑥ 남북 총선에 대비해서 이북 5도민에게 지방자치를 허용할 생각은 없는가. ⑦ 민족정기를 고취시켜야 할 육사(陸士)교과과정에서 국사(國史)를 뺀 이유는 무엇이냐. ⑧ 완충 지역을 각각 10 마일씩 확대한다는 설이 있는데 이를 해명하라. ⑨ 산림 도벌을 막기 위해 농촌에 연탄을 무료로 공급할 수 있는가. ⑩ 정체 불명의 달러 사용도를 밝혀라. ⑪ 해외 공관 증설의 결과를 어떻게 보는가. 해외공관장은 거의 군장성 출신인데 대치할 용의는 없는가.[경향 01-31]
● 1964년 02월 05일 갑오혁명기념사업협회 이사회에서 이사로 선임되다.
● 1964년 08월 08일 서민호, 자민당 최고위원 사퇴 발표하다
● 1964년 08월 16일 자민당,징계 문제로 서민호 소선규 양 당원끼리 대립하다.
● 1964년 12월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정일형과 함께 부일 장학회 거론하다.
● 1964년 민중당 최고위원
● 1965년 04월 19일 (62세) 검찰, 4·17시위 선동 혐의로 서민호·김재광 의원 입건
● 1965년 05월 03일 09:00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민정(民政)·민주(民主) 양당을 통합하여 민중당(民衆黨)으로 통합을 선언하다.
● 1965년 05월 27일 대성빌당에서 열린 민주사회당 창당발기인대회 격려사를 통해 자기가 집권할 경우 북괴 괴수 김일성과 만나 대결하겠다고 전제한 다음 남북통일,남북교류 등을 찬성하는 발언을 하다.
■ 1965년 06월 22일 박정희 정부, 한일협정 조인
● 1965년 자유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한일비준파동으로 의원직 사퇴
● 1965년 08월 06일 서민호·김도연·정일형 의원, 민중당 탈당 / 의원직 사퇴서 국회의장에게 제출하다.
● 1965년 08월 12일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 61명, 의장에 사퇴서 일괄 제출
● 1965년 08월 23일? 민중당 탈당 통해 국회의원직 완전 사퇴, 윤보선 김도연 서민호 윤제술 정일형 정성태 김재광 등 7명
◉ 1965년 09월 20일 이복동생인 연세대 전치외교학과 서석순 교수, 한일회담 비준 반대 성명 주도로 정부가 대학에 압력을 가하자 이극찬 교수와 함께 자진 사퇴 형식으로 사임하다.
● 1965년 11월 08일 서민호, 신당 이념은 ‘민주사회주의’ 지향한다고 언급
● 1965년 11월 09일 윤보선, 서민호 발언 반박하다.
● 1966년 04월 13일 (63세) 민주사회당 창당주비위구성(서민호 중심).
● 1966년 05월 14일 민주사회당 창당준비위 서민호 대표, 정일권 총리가 민사당의 남북한 부분 교류론이 국시에 위배된다고 발언한데 대해 “민사당의 주장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우리나라 국시에 결코 위배되지 않는다. 정부는 이 기회에 국시에 대한 명백한 정의를 내리라”고 요구하다.
● 1966년 05월 27일 민주사회당 창당준비확대대회 개최, 창당발기위원장 서민호 의원은 김일성과의 면담 용의 표명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로 연행 되다. 이날 오전 서 의원 등 7인 준비위원 집에 ‘모종의 불온 문서가 은익되어 있다’고 하여 일제히 수색하다.
● 1966년 06월 03일 21:00 서울지검, 남북 서신 기자 교류 주장 및 조총련계 자금 사용 혐의로 서민호 의원 구속, 서울 교도소 수감되다.
● 1966년 06월 07일 국회 법사위원회, 서민호 구속과 윤보선 입건 관련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적용 한계 추궁
● 1966년 07월 11일 검찰, 서민호 구속 기소
● 1966년 09월 05일 18:30 서민호 민주사회당 창당준비위원회 대표,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 중 88일 만에 보석(보석금 5만원)
● 1966년 12월 17일 서울지검 공안부, 서민호에게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 1966년 12월 20일 오전 서민호 민사당 창당준비위원장,“남북교류론에 대한 소신은 변함이 없다. 22일 창당대회에서 이를 재확인하는 선언을 할 것. 법원 판결의 유무에는 상관없이 소실을 굽히지 않겠다 ”이라 피력.[마산일보 1966-12-21]
● 1966년 12월 22일 민주사회당, 창당대회 개최 및 대표 최고위원에 서민호 임명
● 1966년 12월 27일 서울지법, 서민호에게 <반공법> 적용 징역 2년 및 자격정지 2년 선고
◉ 1967년 02월 17일 (64세) 17:10 정릉동 412-18 자택에서 첫 부인 정희련 여사 뇌일혈로 별세
● 1967년 03월 09일 대중당 창당 △대표 서민호
◉ 1967년 03월 화순(광주) 출신 하상희님과 2차 혼인
● 1967년 03월 26일 조선일보 특집 <대통령 입후보자 프로필> 에 공화당 박정희,신민당 윤보선, 대중당 서민호, 한독당 전진한, 민중당 김준연 소개
● 1967년 04월 03일 대통령 입후보자 등록 마감[출마후보 : 기호1 이세진(정의당), 기호2 전진한(한국독립당), 기호3 윤보선(신민당),기호4 서민호(대중당), 기호5 김준연(민중당), 기호6 박정희(민주공화당),기호7 오재영(통한당)]
● 1967년 04월 28일 서민호 대중당 대통령 후보 사퇴.
■ 1967년 05월 03일 제6대 대통령 선거[박정희가 51.5%의 득표율을 얻어 40.9%를 얻은 윤보선을 이기고 재선에 성공].
● 1967년 05월 08일 서민호 대중당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27일 보석).
● 1967년 06월 08일 대중당 대표최고위원·제7대 국회의원(지역구 전라남도 고흥, 소속 정당 대중당)에 옥중 출마 당선되어, 군소정당 후보 중 유일한 당선자가 됨
● 1967년 08월 18일 서민호 대중당 대표, 제2차 시국 수습안 발표
● 1967년 10월 17일 서민호, 전남한해대책위원회 주최로 반도호텔에서 열린 재경 인사 모임에서 시급한 구호 활동 전개 호소
● 1967년 11월 8일 대중당 당수 서민호 의원, 국회 사무처에 의원 등록.
● 1968년 12월 25일 (65세) 10.5구락부의 14명과 무소속 11명, 정우회 이름으로 원내 교섭 단체 등록, 서민호는 고문, 원내 총무로 이동원 선출
● 1969년 08월 05일 (66세) 서민호 대중당수, 헌법 개정 반대 표명.
● 1969년 10월 6일 서민호 대중당수, 국민투표 거부 방침 천명
● 1969년 05년 24일 국토통일원, 국토통일자문위 위원으로 이효상 국회의장, 서민호 의원 등 36명을 위촉하다.
● 1970년 05월 06일 (67세) 서민호 대중당 당수, 신당과 합당 용의 표명
● 1970년 10월 17일 서울 형사지법 항소부 유태흥 판사, 반공법 위반 혐의 무죄를 선고하다.
● 1971년 03월 04일 (68세) 대중당, 대통령 후보에 서민호 의원 지명
● 1971년 04월 21일 서민호 대중당수, 합당 전제로 신민당 입당하여 평화적 정권 교체 도모. 김대중 후보반의 연사로 23일 목포 고흥 . 26일까지 광주 대구 서울 등지에서 연설키로 밝힘
● 1971년 05월 03일 신민당 미공천 3지역 공천. 고흥은 정기영 대신 서민호로 공천
● 1971년 0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전라남도 고흥, 소속 정당 신민당)에 출마했으나 신형식에게 밀려 낙선하다. 득표율: 신형식 63.46%, 서민호 35.64%
● 1971년 05월 26일 신민당 국회의원 후보 서민호, 전남 제10지역구 관내 94개 투표구 가운데 금산면의 10개 투표구 투표함에 대한 증거 보전 신청을 광주지법 순천지원에 내다.
● 1971년 05월 27일 신민당고흥지구당 입후보자 서민호, <고흥지구의 부정선거를 밝힌다> 제목의 성명서를 동아일보 광고로 싣다.
성명서
고흥지구의 부정선거를 밝힌다
지난 대통령 선거가 원천적으로 부정선거라고 우리 당에서는 단정한 바 이에 따라 총선거를 거행한다는 것은 부정선거를 합리화해주는 결과가 되므로 나는, 당의 요인들에게 전면 거부할 것을 제의하였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의 제의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한 끝에 나를 고흥지구로 공천한 바 당의 명령에 복종치 않을 수 없어 현지로 내려가 본 결과 공화당의 입후보자는 이기 각종 공무원과 제휴하여 선거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폭력배를 동원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우리 신민당원들은 운동조차 자유로히 못할 정도였으며 일반 유권자들은 우리 당원들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데다가 4,5명의 우리 열성 당원은 많은 공화당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으며 그중에는 칼을 맞고 입원한 사람도 한 두 명 있었다.
더욱이 종반전에 이르자 매표행위가 노골적으로 성행되었던 것은 일반 주민들도 잘 아는 사실이다. 선거 당일에는 표면적으로는 평온한 듯 하였으나 투표 직전 사방에다 주석(酒席)을 설치하고 수많은 유권자들에게 접대함은 물론 투표시에는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공개적 투표를 했을 뿐 아니라 리레이식 투표가 각처에서 전개되었다.
한편 우리 신민당 참관인들은 공개토표를 한데 항의하는 등 수차에 걸친 경고를 했고, 또한 기록에 남길 것을 선거관리위원들에게 요청하였으나 끝끝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전원 퇴장을 하였으며 투표함의 봉인조차 하지 아니 하였던 것은 묵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부정 속에서 개표를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를 거부하고 우리의 선거위원 및 참관인들을 총퇴장케 하였다. 나는 고흥지역선거를 부정선거로 단정하고 이 나라의 민주수호를 위해 의법 처단할 것을 천하게 밝히는 바이다.
신민당고흥지구 입후보자 서민호
● 1971년 06월 23일 지역구 낙선 신민당 서민호씨, 지역구 선거관리위원장 박상진씨와 당선자인 신형식 씨를 상대로 선거 무효·당선 무효 소송을 대법원 특별부에 내다.
● 1971년 12월 27일 11:30 서울 중구 무교동 대한체육회관 OB라운지에서 <발기 선언문>에 동의한 77명 중 48명이 참석하여 <통일연구협회> 발기인 총회를 갖다. 이정래 의장 사회로 정관을 의결한 후 서민호 선생을 회장으로 부회장은 회장의 추천으로 이정래,정범석,이병용 3인을 위촉하다.
● 1972년 02월 14일 국토통일원 장관 이름의 사회단체 등록증(제3호)을 발급받다.
● 1972년 04월 17일 서울형사지법 남윤호 판사, 전 대중당 당수 서민호 피고에게 반공법 적용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다.
● 1972년 06년 24일 대법원, 45건의 선거 소송 가운데 27건을 처리하고 고흥 건 등 18건을 미제로 남김
● 1973년 01월 08일 (70세) 민주통일당(가칭) 창당 발기인 대회에 33명의 일원으로 참여하다.
● 1973년 01월 20일 서민호씨,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성명 발표.
“이번 선거에 참여하려 했으나, 제반 여건이 불허하고 허다한 여건에 비추어 후진에게 길을 열어 주기위해서”[조선]:
“여러가지 여건이 불비,소기의 소임을 다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10.17 이후 지도급 인사들이 도의적 책임을 지지 않는데 너무 환멸을 느껴 정계일선에서 물러난다.”[동아]
● 1973년 10월 30일 서울형사지법, 서민호 피고 반공법 위반 사건에 무죄 선고
● 1974년 01월 24일 (71세) 1시 30분 심장마비로 고려 병원에서 서거. 광주시 금남로 1가 국민운동 전남도위원회(도청 앞)실과 고흥 자택에 빈소 설치. 01월 25일 이정래․정진동 정일권 국회의장에게 사회장 요청, 01월 28일 11시 사회장(자택 서대문구 연희동 566-55번지 앞 신촌전화국뒤편 광장에서 영결식. 200여명 참석. 재미 서원용 광순 석순은 미참). 신세계 공원 묘지(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안장
서거 이후
◎ 1974년 02월 04일 이정래 통일연구협회 부회장이 회장 대리가 되다.
◎ 1974년 06월 05일 통일연구협회(이정래 회장), 『통일연구』 제5집을 펴내면서 월파 서민호 특집으로 사회장 때 식사(式辭) 3편(조사와 약력 소개),삶과 행동을 기리는 8편의 글을 싣다.
◎ 1975년 01월 24일 신세계공원묘지에 묘비를 세우다.
◎ 1975년 03월 25일 국토통일원 통일연구협회의 회장을 정일형, 주소지를 관철동 250번지로 사회단체 등록증을 재교부하다.
◎ 1991년 6월 28일 ‘석사 서석순 박사 고희기념 문집 간행위원회’가 기념문집을 펴내다. 2004년 6월 『연정60년사』에 그 업적을 싣다.
◎ 2001년 0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받다.
◉ 2004년 10월 13일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하다. 독립유공자 묘역 제3-93
◉ 2010년 서화일가의 종손인 서종식이 죽산재를 자연환경국민신탁에 기부하다.
◎ 2012년 전라남도와 고흥군에서 죽산재 본채를 정비하다.
◎ 2013년 서거 110주년 맞이 학술강연회를 갖다.
◎ 2019년 01월 24일 국회출입기자클럽, 제30회 정기세미나 및 ‘월파 서민호 기념 학술대회’(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를 개최하다.
◎ 송방원(국회출입기자클럽) 회장의 인사말, 이상수(전 노동부 장관, 변호사) 대회장의 대회선언,Dr.Hans Trinklein 목사의 축하기도, 박정이 前(예)육군대장의 월파 서민호의 일대기 소개, 유준상(국회의원, 한국정보기술)연구원장의 축사, 황주홍 국회의원의 축사, 송열길(前인천시장)국회의원의 주제발표, 신용수 박사의 발표, 진종근(전 고흥군수) 박사의 발표
◎ 2019년 02월 22일 송영길 의원, '고흥향우회·고흥언론인회' 합동 모임에서 월파 서민호 추모사업회 발족의 필요성 강조. 월파 서민호 선생 추모사업회 회장에는 송영길 의원이, 사무총장에는 이동섭 의원이 맡다.
◎ 2022년 09월 15일 전남도의회 신민호 의원(더불어민주당, 순천6), 5분 자유발언을 통해 월파 서민호 선생의 업적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사업 추진을 전라남도에 촉구하다.
◎ 2023년 서거 120주년 맞아 자료집 발간, 학술행사, 표지판 설치 등의 기념사업을 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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