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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해운에 재직중인 李성鎭군(그는 FAO 기관과 동기생으로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이다. 서울 태생으로 경동고교를 나왔던 그가 어떻게 해서 부산 FAO에 입소했는지는 모르나 머리가 명석하고 삭삭하고 영어도 제법 잘한 사람이었다)의 주선으로 처음으로 상선(商船)에 2/O로 승선키로 하고 해외송출선원으로 시작했다.
당시 한국선원의 해외송출이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았으며 선원송출만 하는 회사(Manning회사)도 생겨난 때이다. 소위 달러가 필요했던 당시로서 송출선원은 높은 수준의 급료로 국가에 달러획득에 일조를 한 것이다.
면허장은 이 군이 Panama Licence(파나마 면장)로 바꾸어 주었다. 이 길이 곧 냉동운반선과 Cargo vessel(화물선)로 이어졌으며 88년에 와서 종지부를 찍었다. 기록이 보이는 협성해운의 M/V Eastern Prosperity시절부터 다시 쓴다.
Nov. 22(수) 1972
16:00 일본 德山시 Kasado(笠戶) 조선소에 도착하다.
M/V Eastern Prosperity의 제원
GT(총톤수) 2981.19TON. NT(순톤수) 1848.19. D.W.T 4851.58.
滿載吃水(만재흘수) 6m35cm. 輕荷吃水(경하흘수) 1m91cm. L.A 99.06m. B.M 15m.
D.M 7.55m. Ballast #1-#5 598tons.
F.W(청수탱크) Fore & After peak tank 384tons.
Bioler Water 38tons. Fuel Oil 259tons.
No.1 Hold 23m x 7.3m x 7.5m 1418.5㎡ + 1264 = 2682.9㎡
No.2 Hold 23m x 8m x 7.5m 3044.8㎡
Capt: 박현수. C/O 김진영
지금까지 내가 승선했던 선박 중에는 가장 큰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담 Bridge(船橋)가 엉성하다. 어선에 비해 장비나 계기가 너무 없다. 조타기, Eng. Telegrahp. 항해 계기로는 Radar 2대와 Loran 1대가 고작이다. 명색이 선장을 한 경력이 있어도 상선에서는 별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물론 그 일의 성질상 엄연한 차이는 있어도 어떤 점으로 보아서는 어선쪽이 훨씬 두뇌적이고 복잡성을 요구하고 있다. 2등항해사가 할 일은 항해담당이 주된 업무이고 야간당직(Mid-Watch)가 있을 뿐이다.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으렸다.
23/Nov. (목)
인수 인계작업 시작하다. 내 Counter Part(상대)인 본선의 일본인 2/O가 없어 곤란을 받았다.
24/Nov. (금)
시운전을 실시하다. 14:00인수 완료. 17:30 Panama영사의 참석 하에 일본기를 내리고 Panama국기를 게양하는 기념식이 있었고 축하 Cocktail Party가 있었다.
25/Nov. (토)
09:00 Dock Master가 승선. 09:30 드디어 카사도 조선소를 떠나 나고야(名古屋)으로 향하다. 간밤부터 약간 바람이 인다. 內海(나이카이)로 가기로 하다. 나고야까지 440Mile이다.
26/Nov.(일)
나고야 입항중 Main Generater(발전기)가 꺼져 곤란을 받다. 좋은 경험이다.
21:00 Quarantine Station(검역지)에 정박하다.
27/Nov. (월)
내 분야의 일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Chart(해도), 선용품 목록 작성을 완료하다.
28/Nov. (화)
07:00 Pilot 승선. Shifting(전묘) 실시. 08:20 2BQ Berth에 접안 완료하다.
30/Nov. (목)
14:00부터 2번 Hold부터 적하 시작하다. 3/O의 부주의로 Hatch Board 낙하.
화물손상(Cargo Damage) 차 2대 발생.
16:00 IHI 조선소로 옮기다. 18:00 추가 선용품 인수.
써둔 편지 발송. Panama 수첩관계 해결보다.
1st. /Dec.(금)
벌써 12월이다. 심한 바람과 함께 진눈께비가 내린다. 간밤에 심한 惡寒 속에 지세다. 종일 춥다. 저녁에 상육 위스키 한 병과 다이제스트 1권을 사고 영화구경을 하다. 내일 08시 출항예정이나 강풍과 파랑주의보가 내렸다. 통신장과 간단히 한잔하면서 잡담 나누다. 돈을 탈탈 털다. 남은 것은 60엥짜리 우표3장. 다음 귀항하면 즉시 소식을 전해야지.
2nd. Dec.(토)
나고야 이시가와지마(石川島)하리마(IHI)조선소 부두를 출항하다. 출항직전 통과한 986mb 저기압의 영향으로 바람이 제법 세다. 구름이 낀 음산한 날씨다. 그런대로 안항은 계속된다. 야간 Loran Fix(전자기기)에 Error가 많다. Sky wave(공중파)가 너무 강하다. 이 부근에서는 다소 숙련이 필요하다.
3rd. Dec.(일)
계속 순항이다. 자정쯤 冲繩(오키나와)를 통과하다. 밤이라서 불빛만 보인다. 기온이 상승하기 시작한다. 내의를 벗어 세탁하고 보관하다. 갑판사관들의 계기사용의 숙련들이 너무 미숙하다. 그래서들 어떻게 해 나왔는지? 선내시간을 1시간 늦춘다. 오랫만에 서는 Mid-Watch가 무척 고되다. 그런대로 정신적인 부담이 없어 다행이다. 곧 익숙해 지겠지. 길어야 12-3일의 항해니까!
5th. Dec.(화) 1972.
낮부터 Rolling이 심하다. 橫波 때문이다. 조타실(船橋) 및 침실이 높으니까 더욱 심하게 느껴진다. 밤새 기분이 좋지 않겠다. 각 Mate(항해사)들의 위치측정이 질서가 없다. 태양이나 별의 관측이 일기관계상 불가능 한 탓도 있지만 이 부근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Loran사용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쓸 줄들을 모른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Wife가 해산(解産)을 했는지 궁금하다. 전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
6/Dec. (수) 1972
제법 Rolling이 심하다. Phillipine Manila 앞에 태풍이 발생하여 정체하고 있다. 더 이상 항해를 계속하기가 곤란하다. 바로 진로상에 있기 때문이다. Batan섬에서부터 잠시 속도를 낮추었다가 다시 전속으로 항진. 밤에 Luson섬 북단에서 피항하여 태풍의 동태를 살피기로 하다. 이곳 필립핀에는해적(海賊)들의 습격이 심해 투묘하기가 힘드는 곳이란다. 또 다른 한 척이 먼저 와서 정박중이지만 충분한 감시와 당직을 당부하다.
7th Dec.(목)
04:00 투묘하다. 무척도 맑은 날씨다. 그러나 8마일 떨어진 육지가 보이질 않는다. 지대가 낮은 탓인데다 雲霧가 끼었다. 이런 곳에 피항 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進路上에서 머물고 있는 태풍이 있으니까. 약간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자만 아직 분명하지가 않다.
Type Writer를 치기 시작하다. 처음이다. 쉬이 마스터할 것 같기도 하다. ‘至誠이면 感天’이겠지.(이것이 26년이 지난 1998년도 지금 Computer의 Word processor로 이 글을 쓰는 계기가 된 것이다.)
12/Dec. (화)
9일 13:00시 다시 출항하다. 예상보다 순항을 계속하고 있는데 감사드린다. 북동계절풍이 제법 강하다. 일본으로 귀항시에는 제법 흔들리겠다. 선내 all painting이 시작되다. 기관부 Mr. 최가 기관실내에서 작업중 다쳤다.
치료의뢰서가 필요하단다. Form(양식)이 있는지 모르겠다.
12월 급료중에서 Bangkok용으로 10$가불을 받다. 월 30$이상은 피할 작정이다. Loran(항해계기의 일종)사용이 비교적 쉽지만 내일부터 2-3일간은 Sun Sighting(천측)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대로 쉬이 익숙해 진다. 다행이다.
13th Dec.(수) 72
Quarter master(조타수) 3명이 의견충돌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스운일인지, 당연한 일인지? 3명을 모아 주의 겸 피차의 협조를 의논하다. 근무시간도 약간 변경해본다.
15일(금):
태국의 방콕(Bangkok) 입항. 처음으로 밟은 외국땅이다. All Night하여 작업실시하다. 3타와 조리사의 싸움으로 3타가 부상. 선내의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16일(토):
상륙하다. 祥興利珠 보석상의 한국인 여주인, 참 기이한 인연으로 방콕의 보석상 여주인이 된 것이다. 그를 소개한 술집의 얼굴 못생긴 태공주(?)출신의 아가씨 역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다. 함께 간 President Hotel Bar의 한국인 여가수. 모두가 세상의 한 단면들임에 틀림없다. 부둣가 선술집에서 4명이 맥주 한잔씩으로 향수를 달랜다.
14:30시 첫 항차를 마친다. 곧 Shifting(전묘)함으로 제2항차가 이어진다.
18일(월):
다시 상륙. 우체국에서 우표 및 카드사서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보내다.
27th.(수) Dec
방콕에서 시멘트를 적제하고 Indonesia의 Djakarta(쟈칼타) 외항에 04:10시 투묘하다.
29th(금) Dec.
05시 입항, 접안하다. 입항 조선(操船) 중 3/O와 Capt.와 불화가 표면화 되다. 역시 문제다. 결과가 궁금타. 한마디로 개판이다. 3/O가 Capt.와 맞먹으려 대들다니.
31st.(일) Dec.72
한해의 마지막날이다. 직원들만의 조출한 송년회를 시내 중국집에서 갖다. 음식점의 과부들! 구라마통가의 여인들 그리고 세발 자전거! 소녀를 앞세운 3인조 기타 악단(?)의 성가심, Bar girl들과의 Dancing! 처음으로 밟아본 일본 이외의 외국에서의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이다.
1st. Jan.(월) 1973
새해! 선내에서 전 선원 새해 기분을 갖다. 모든 작업도 중지한다. 이 한해는 여기서 보내야 한다. 지금까지의 Fishing Boat(어선)와는 작업의 내용과 항해사의 임무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의 내용으로 봐서 어려운 것은 없으나 적하부분에 이론적인 부족함을 느낀다. 항해와 운용부분은 그들을 언제나 Lead 한다.
3rd.Jan.(수) 73
쟈카르타의 흐린 날씨다. 뜨겁지 않아서 좋지만 무덥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한국은 한 겨울인 때인데... . 하역이 무척느리다. Sopiyano 군의 얘기로는 임금이 적어서 그렇단다. 오후 5시경 인부 1명이 부상하다. 왜그러냐고 했더니 배가 고파서 그렇다고 한다. 1일 임금 2-300원에 종이에 싼 푸석푸석한 소금밥 두 끼가 그들의 전 임금이니까 측은한 생각이 든다.
10시에 편지 보내다 정화와 경산 배x수군 앞으로 -. 여기도 담배 한 갑과 돈 15RP가 들었다. 우표값 보다 비싼 것이다. 그걸 주어야 우표를 붙이고 Stamp를 꽝 찍어준다.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저녁때의 시원한 Squall이 쏟아진 후 한결 시원한 바람이 분다. 이 맛으로 사나보다. 저녁에 Mr.Rachman이 왔다. 잡답으로 두어시간 보내다. 그의 어머니가 38세인데 9남매란다. 정말일까? 그도 만약 부자가 된다면 Wife를 셋 정도 두겠단다. 꿈이 좋다. 말라 부지껭이 같은 놈이 -. 열심히 일한다지만 그래도 그의 아버지가 월2만원정도의 수입이 있는 Engineer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중류정도는 되나부다. 보통 남자는 22-25세사이에 여자는 17-22세사이에 결혼한단다. 그놈은 25살에 하겠다는군. 내 Wife와 딸과 집안 자랑을 거짓말 좀 보태서 했더니 무척 놀라는 기색이다. 그놈이나 나나 똑 같잖은가?
3일간 상륙을 안했다.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나가봐야 좋은 일이 없다. 돈이 2$남았다. 뭘 할까? 이발이라도 해야겠는데-. 건강에 늘 신경이 쓰인다. Condition이 좋은 편이 아니다. 소화가 그렇고 대변이 일정치 못한 것이 그렇다. 생활이 다소 부정확해서 그런지 아니면 늘 기온이 변해서 그런지?
밤 10까지 1번 Hatch 작업 계속할 예정이었으나 스콜 때문에 7시에 모두 중지해버렸다. 왠지 잠이 자꾸 온다. 이제 겨우 9신데 -.
3th.(수) Jan. 73
참 재수없는 날이다. 조타실의 Stop Watch. Binocular(망원경) 2개. 해도 확대경을 도난 당했다. 기막힌 일이다. 더욱 이상한 점은 혹시 선내의 일원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다.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공연히 나왔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더러운 일도 있을까. 항해계기(航海機器)는 나의 일차적인 책임이고 담당이니까 더욱더 Capt.보기가 민망스럽고 면목이 없다. 대실수다. 내일이 곧 출항일인데 -. 부득이 3항사와 3명의 조타수들이 공동 변상하기로 하고 일화 9,000엥을 빌려 시내에 나갔다. Mr. Rachman의 소개로 그의 친구집이란 곳에서 쌍안경 6,000RP, 시계 4,200RP 확대경 66RP를 주고 샀다. 그게 전부 그렇게 해서 나온 물건들임을 직감한다. 또 하나 바로 그놈이 장본인일 거라는 생각이다. 종일 우울했다.
14:00시 #2 Hatch Cleaning(화물창 청소)을 본선 선원들의 손으로 마치다. #1 Hatch의 양하도 마친다. 지루하고 더러운 인도네이시아다. 내일 아침 08시 출항예정이다. 하루라도 빨리 뜨고 싶다. 정화가, 당신이 그리고 새로 태어난 아가야가 그립기 그지없는 밤이다. Cement 214포대 즉 트럭 1대분이 모자란단다. 뻔하다. Tally 그놈들이 또 슬쩍 한 차 해먹은 모양이다. Bangkok에서 파인에풀 싹을 하나 컵에 물 담아 두었더니 뿌리가 내리고 싹이 난다. 기특하다. 고이 기르고 싶다.
5th. Jan.(금)
날씨가 궂다. 소나기가 잦고 음산하다. 08시경 출항. 한 시간도 더 머물고 싶지 않는 곳이다. 다시 오고 싶지도 않은 곳이다. 그러나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들락거려야 할 것인가. 세차게 쏟아지는 소낙비 속에 출항하다. 다음 기항지는 보르네오 섬의 서쪽 Pontianak 부근이다. 종일 음산하다. 밤 10시경 기어이 Position을 확인하지 못해 假泊(가박)을 한다. 옳은 판단이라고 본다. Gaspar Strait를 통과하는 것이 오늘 같은 조건으로는 무리다. 그러나 20Mile짜리 Light House(등대)가 죽어있지 않았다면 문제는 다르다. 왠놈의 등대가 전부 꺼져 있으니 엉망이다. 소나기 구름이 Radar(레이다)의 전 Scope에 덮혀 다른 영상이 전혀 판독이 불가능하니 더욱 그렇다. 한 밤 잠이 오지 않아 괴롭다. 신경쇠약 증세 같기도 하다. 약을 먹을까 하다가 참았다. 마음이 불안하고 무엇이던 손에 잡히지 않으며 읽어도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괴로운 밤이다. 가려워 긁은 곳이 잘 낫지도 않고 덧난다. 이것도 짜증스럽다.
6일 Jan. 73년(토)
05:30시 날이 밝자 곧 S/B하다. Radar 화면에 31.4마일 떨어진 곳에 무엇인가 잡히는 것을 확인하고 서서히 나간다. 06:25시 육안으로 등대를 확인하다. 등대의 높이가 섬의 가장 높은 곳보다 약간 더 높다.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면서 항해를 한다. 이 주위는 대부분 산호초로 이룩된 섬으로 암초라서 부정확하면 위험한 곳이 많다. 100% 세심한 주의가 없으면 결국 당하고 만다. 12:00시에 완전히 Gaspar Strait를 항과하여 보르네오로 향한다. 명일 새벽 3시경이면 강 입구에 도착하겠다. 밤이 무섭다. 잠을 설쳐 그런지 종일 머리도 마음도 무겁다. 소화도 잘 안 되고 -. 시간을 한 시간 당긴다. 한국과의 시차가 1시간이다. 어서 갔으면 좋겠다. 아직 1년 가까이 있어야 하니까 할 수 없지만 일본만이라도 가서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좀 후련하게 가슴이 뚫어질 것 같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좀 더 규칙적이었으면 좋겠는데-. 이발한지가 오래라 머리가 길다. Indonesia에서 할걸 -.
7th Jan. 73(일)
02시 강 어구에 정박하다. 지금까지 세 번 외국항을 입항했는데 매번 내 당직 때 입항이다. 좋은 참고가 되리라. 정박당시 심한 호우가 쏟아진다. 雨期도 아닌데 무덥고 짙은 구름이 깔렸다. Radar의 성능을 충분히 이용하기 어려운 때도 많다. 11시 Pilot가 승선.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강 주위에는 방콕과는 또 다른 무성한 수목이 물에 잠긴 채 우거져 있다. 天然的인 資源이고 要塞인 것 같다. 역시 산이라고는 뵈지 않는다. 강물이 검붉다 상류에서 나무 잎이나 뿌리가 썩어서 내려온 것이리라. 이 물로 농사를 짓는다면 비료 없이도 될 것만 같다. 주위에 극소수의 움집 같은 것을 제외하곤 사람이 사는 흔적이 없어 보인다. 목적지까지 3시간 가량 걸렸다. 화란, 일본, Monrovia 선적의 큼직한 배들이 대여섯척 정박중이다. 모두가 목재를 실러 온 모양이다. 여름 한길의 소똥뭉치 같은 산엔 온통 나무뿐이다. 적으나마 제재소가 있고 거기서 나오는 톱밥이 무더기로 쌓였다. 어떤 곳에서는 그것을 태우는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오른다. 이 강의 상류에는 무수한 짐승과 食人種이라도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안주보면 술 생각나듯이 돈만 아는 사람의 눈에는 ‘이런 곳에 악어가 있을 것이다.’라는 추측을 자아내게 할만하다.
언젠가 정화와 함께 본 Borneo에서 촬영했다는 ‘마루가’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바로 이런 곳이다. 강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고 싶은 충동이 난다. 맨몸에 갓을 씌운 격이긴 하지만 현대문명의 덕택으로 주민들이 거만한 것만 같다. 목재를 실으러 들어간 뱃사람들이 저자세를 취해야 할 정도이니까. 실상 그렇게 만든 것이 일본사람들이란 것이 틀림없나보다. 내일 오후부터 작업이 시작된단다.
오늘이 음력 섣달 초사흘 내 어머님의 제삿날이다. 가신지도 어언 12년이 흘렀다. 그날밤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하건만 -. 11시반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나마 당신의 명복을 빌었다. 지금쯤 죄다 모여서 제사를 마칠 시간이다. 불효막심할 뿐이다. 작년 이맘때는 북태평양에서 혼자만의 제례를 드렸었는데 -. 어머님의 영혼이나마 이곳까지 오시기엔 너무 먼 것 같지만 내 정신만은 결코 잊을 수 없으니까 -. ‘어머님 어디 계시건 항상 어머님의 보살핌과 加護속에 健在합니다. 우리 가정에 늘 화사한 웃음과 밝은 내일을 이룩하도록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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