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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란 무엇인가?
1) 교회의 정의
교회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라고 하는데 이는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불러냄을 받아 모인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교인들이 모이는 건물로 생각하는가 하면("저쪽 모퉁이에 있는 교회"), 또 어떤 이들은 교회를 교파 또는 교단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당신은 어느 교회에 나가느냐?"). 교회에 대한 성경적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하고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또 예식을(세례/침례, 주의 만찬) 지키기 위해 모인 신자들의 무리"입니다. 사실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건물로 들어가 교회(영적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 조직, 행정, 복음 사역 등 눈으로 식별될 수 있는 요소를 갖춘 교회를 가시적 교회라고 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에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들로 구성된 교회(예수께서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는 말씀이 암시하는)를 불 가시적 교회라고 한다.
2) 교회의 특징
(1) 사도 성
신약 적 의미에서의 교회는 사도들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우리의 구세주시라는 사실을 증가한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서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생겨나고 이후 사도바울의 선교로 교회가 소아시아와 로마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마 16:16>)라는 신앙 고백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2) 유일성
포도나무 가지가 각기 여러 방향으로 벋어있지만, 그 모두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는 하나입니다. 이 하나 된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 몸의 지체로, 한 형제이고 자매이다.
(3) 거룩 성
교회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이며 이것을 하나님은 거룩하다고 하셨습니다(<고전 3:17>).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과는 구별된 모습을 가진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은 하나님을 모신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그분의 거룩한 특성을 나타내도록 계획하셨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로 거룩한 삶을 살며 그분의 특성과 길을 나타내도록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4) 비 차별성
교회 안에는 계급, 인종, 빈부, 지역감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단지 죄인이 된 모든 사람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다. 누구나 다 교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3) 교회의 역할
(1)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하며, 몸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롬 12:1>). 이것은 교회의 일차적인 역할입니다. 예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2) 말씀의 선포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대언자를 통해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3) 교육
교회는 우리의 삶의 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과목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아 가르치셨고 초대교회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모였습니다. 교회는 말씀을 올바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4) 친교(코이노니아)
예배를 통해서 주님과의 내적 친교(코이노니아)를 나누고 또한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가 됨을 느끼게 됩니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과의 사귐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고 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주 안에서 서로 사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서로 받은 여러 가지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일이 교회의 할 일이다.
(5) 전도
교회는 단순히 믿는 사람들만이 모인 곳이 아니고 흩어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 70인을 세우시고 그들을 이스라엘 각지로 파송하셨습니다. 교회는 믿지 않는 불쌍한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내 하나님의 죄의 용서와 의롭게 됨을 얻게 하는 것이 교회의 할 일입니다.
(6) 봉사
봉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사람들과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가 행하는 구제, 자선사업 등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기본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4)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한 이름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안에서 서로를 지칭하는 것도 있고 비기독교 세계에서 우리를 향하여 붙여준 이름도 있습니다. 각각의 이름들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1) "신자들"이란 용어는(<행 5:14>) '믿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기독교에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가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고, 그 이름으로 모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 신자라고 합니다.
(2) "제자들"이란 이름은(<행 9:1>) '배우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제자는 한 선생의 제자로 종교사상이나 철학의 이념을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모세의 제자라고 생각했습니다(<요 9:18>). 예수님은 공인된 선생이 아니었으나(<요 7:14-15>), 그는 랍비라고 알려졌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제자라고 불렸습니다. 가르침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 요구되고 있는 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리인으로서 말씀을 전파하고 이 땅에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세상에 파송되었습니다.
(3) "성도들"이란 명칭은(<엡 1:1>) "거룩한 자"라는 의미로서, 세상과는 구별된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성도'(거룩한 무리)라고 불렀는데, 이 호칭은 적어도 2세기까지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다, 그 이후 교회와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에게 붙여주는 호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그리스도인의 최상 삶의 목표인 거룩함을 실현하고자 애쓰는 모든 사람에게 붙여졌습니다.
(4) "그리스도인들"이란 이름은 신약에서 세 번 언급되었는데(<행 11:26;>행26:28;<벧전 4:16>), 이 이름이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안디옥 교회입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명칭이 된 이름은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지 않고 독립적인 종교사상을 가진 집단으로 보는 비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5) 교회 생활에서 유의할 점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자신의 죄 됨과 부족함을 인식한 사람들, 곧 죄인들이 모여 예배와 성경 공부와 교제를 통해서 성도로 변화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서로의 부족한 모습을 발견하고 실망하기 쉽습니다. 교회에 처음으로 등록하여 출석하면, 부족하고 연약한 점들이 먼저 눈에 띄기 때문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런 점들을 서로 용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2>).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 3:13>).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죄인인 당신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것처럼, 부족해 보이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주님은 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시면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한 사람에 대해 다른 사람이 비판하거나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2. 교회에 각종 자치 기관
교회에는 여러 가지의 명칭으로 불리는 기관과 직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교회의 계급이나 위계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고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필요로 하는 섬김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칭들은 교단이나 교회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합니다.
(1) 여전도회(여 선교회)
교회 내의 여성 신도들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교회를 돕는 국내외 선교 사업과 일반 사회봉사 사업으로 천국 운동에 참여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여전도회라는 명칭 그대로 교회 내에 있는 모든 여성 평신도로 구성됩니다. 즉, 집사, 권사 (안수 집사), 장로, 그리고 직분을 아직 받지 않은 성도도 회원이 됩니다. 그러나 회원이 최소한 3명은 되어야 합니다.
(2) 남전도회(남선교회)
교회 내의 남성 신도들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교회를 돕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정신을 본받아 국내외 선교, 교육, 봉사, 친교 등 평신도 활동을 통한 천국 운동에 참여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남전도회라는 명칭 그대로 교회 내에 있는 장년 남성 평신도들로 구성됩니다. 즉, 집사, 권사 (안수 집사), 장로, 그리고 직분을 아직 받지 않은 성도도 회원이 됩니다. 회원은 최소 3명 이상이 되어야 하며, 연령층에 따라 둘 이상의 남전도회를 조직할 수 있습니다.
(3) 청년회, 학생회
이, 회는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따라 성결하고 고상한 생활을 함으로써 기독교적인 인격을 개발시킨다.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계에 진정한 축복이 되도록 자신이 속한 교회에 충성을 바치며,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가 다스리는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봉사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청년회라는 명칭 그대로 교회 내에 있는 모든 남성 여성 청년 성도들로 구성됩니다. 연령으로는 대개 18세 이상 30세 (학생회는 대개 중등부와 고등부로 나뉨) 이하로 합니다. 회원은 최소 3명 이상이 되어야 하며, 교회의 형편과 연령층에 따라 둘 이상의 청년회를 조직할 수 있습니다.
(4) 교회학교
아동부뿐만 아니라 중, 고, 청 그리고 성인성도 전체의 기독교 신앙교육의 시행을 위하여 교회학교를 조직한다. 교회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부서를 나누기도 합니다.
가. 영아부 1세~3세 나. 유치부 4세~5세
다. 유년부 6세~ 8세 라. 초등부 9세~11세
라. 중등부 12세~14세 마. 고등부 15세~17세
바. 청년부 18세~30세 사. 청장년부 31세~45세
아. 장년부 46세 이상
단, 실정에 따라서 부를 병합할 수 있습니다.
3. 교회에 각종 회의
1) 당회
개체교회는 교회의 운영과 행사 및 중요한 사안을 처리하기 위하여 당회를 둡니다. 그런데 장로교회에서는 목사와 장로(연회나 노회에서 해당 개체교회에 파송한 연회 회원)만이 당회원이나 감리교회 등에서는 교회에 교적을 보유하고 있는 모든 입교인이 당회원이 되기도 합니다.
나. (교역자나 장로).
당회 의장은 개체교회의 담임자가 되며, 교회마다 다를 수 있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일을 합니다.
가. 교인명부 정리 의결-당회는 당회 회원의 명부를 조사 정리하되, 교인의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 당회 회원의 제명을 의결합니다.
나. 임원 선출-당회는 개체교회 임원 중 권사, 집사, 감사, 교회학교 교장 등을 선출합니다. 다만, 남선교회회장, 여선교회회장, 청장년선교회회장, 청년회회장은 해당 자치 기관에서 선출한 후 당회의 인준을 받습니다.
다. 구역회(속회) 조직-당회는 5세대 또는 9세대 범위 안에서 속회를 조직하고 임원 중에서 속장 1명을 선출합니다.
라. 신천 장로 후보자의 선출-당회는 기획위원회에서 천거한 장로 후보자를 투표로 선출하되 재석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합니다.
마. 당회는 신령상 정황을 조사한다.
바. 당회는 담임자 이하 모든 임원의 보고를 받는다.
2) 구역회
당회에서 제시하는 안건 및 교회의 예산과 결산을 통과시킵니다. 구역회는 정기 구역회와 임시구역회로 구분하는데, 감리교회의 경우 정기 구역회는 매년 12월, 1월 중에 감리사가 소집하고, 임시구역회는 감리사 또는 구역회 회원 3분의 2 이상의 요청으로 감리사가 소집한다.
구역회에는 목사, 전도사, 교육사, 심방 전도사, 장로, 권사, 속장, 선교부장, 교육부장, 사회봉사부장, 재무부장, 관리부장, 음악부장, 남선교회 회장 대표, 여 선교회 회장 대표, 청장년선교회 회장 대표, 청년회 회장 대표, 교회학교 교장 대표, 당회 서기, 감사나 그밖에 구역에 소속한 연회 회원(정회원, 준회원, 협동회원)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구역회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는데, 구역회 역시 각 교파나 개체교회마다 하는 일이 다소 다릅니다.
가. 구역회는 그 구역 안의 신령 상 정황을 조사합니다.
나. 구역회는 당회에서 선출된 신천 장로 후보자를 지방회에 제청합니다.
다. 구역회는 연회 준회원의 자격을 갖춘 전도사를 지방회에 천거합니다.
라. 구역회는 지방회에 출석할 각 대표를 선출한다.
마. 구역회는 담임자 이하 모든 임원의 보고를 받고, 전년도 수입, 지출 결산을 보고 받고 각종 부담금을 심의합니다.
바. 구역회는 개체교회의 예배당과 주택과 기타 부동산의 매매 및 유지재단 편입에 대한 사무를 조사 처리합니다.
아. 구역회는 개체교회에 기증하는 동산과 부동산을 받아 처리합니다.
자. 구역회는 개체교회의 신년도 수입, 지출 예산안을 심의 의결합니다.
차. 구역회는 교역자의 생활비, 주택, 이, 취임식, 은급, 은퇴, 성역 기념식과 안식년 제도에 대한 안건을 협의하여 결정합니다. 이 경우, 안식년 제도는 매 7년 시행할 수 있습니다.
(3) 제직회(임원회)
당회의 실행부가 되게 하는 임원회는 목사, 전도사, 교육사, 심방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교회학교 교장, 남선교회 회장, 여 선교회 회장, 청장년선교회 회장, 청년회 회장, 당회 서기 및 연회나 노회 회원으로 조직합니다. 임원회는 교회의 살림을 맡아보는 기관으로써 치리 기관은 아닙니다.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모여 교회 살림에 대한 보고를 받고 제반 사무들을 토의합니다.
임원회의 직무는 다음 각 항을 심의 의결 합니다.
가. 당회에서 위임된 사항
나. 당회 후 발생한 주요 사항
다. 기타 개체교회 치리에 관한 주요 사항
4. 교회의 직분
1) 교회의 일원이 되려면?
어떤 동기에서든 교회에 나갈 마음이 생기게 된 것은 벌써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어 선택해 주셨다는 증거이다. 세상의 많은 기적 중 예수를 믿게 되는 기적처럼 큰 기적은 없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 마음을 감동시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준비하셨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뒤에서 안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옆자리에 앉은 분에게 당신의 뜻을 말하여, 등록 용지를 얻어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등을 써서 안내원에게 주면 된다. 그러면 목사는 예배 중에 새로 등록한 교우를 소개합니다. 그 후 당신이 써낸 카드에 의하여 등록 명부에 등재되며, 목사는 그 주간이나 당신이 원하는 일시에 당신의 가정을 방문하여 귀 가정을 위하여 예배를 드림으로써 당신은 비로소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등록을 마친 후 약 6개월간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각종 모임에 참석하여, 여러 가지를 학습하고, 연후에 학습 문답을 통과하여 학습을 받으면 학습 교인이 되고, 또 6개월 이상 신앙생활을 잘하고 세례 문답을 통과하여 세례를 받으면 완전한 교인(입교인)이 됩니다. 이때부터 교회의 직분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2) 임원
임원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주신 성령의 은사이다. 임원이라는 말은 직분, 직원이라는 말과 혼동하여 사용할 때가 있다. 직분이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속장, 교회학교 교사 등 기능을 말하며, 직원은 상근직으로 기사, 교회 사무원 등을 말한다. 한편 임원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남선교회장, 여 선교회장, 청장년 회장 등 사무 직능을 말합니다.
(1) 임원의 사명
예루살렘교회가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교회 제반 일을 담당할 일군을 선택한 것에서 성서적 근거를 찾아볼 수 있으며, 헬라어의 디아코노스의 번역인 집사는 "종, 수종자, 사역자"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임원의 사명은 교회의 선교 비전이 온전히 실현되도록 재무, 시설, 인사 등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 운용하는 것입니다.
(2) 임원의 자격
구원의 확신과 중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살전 1:5, >요3:1-5). 은혜받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행 2:46-47>). 가정생활, 사회생활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딤전 5:8>). 교회 생활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3) 교역자
교회는 단체이기 때문에 조직과 직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봉사를 위한 구분일 뿐입니다.
(1) 담임목사
교회의 대표자로서 교회에서 생기는 제반 사항 즉 영적 제, 선교, 교육, 행정 등으로 지도하고 처리하는 목사입니다. 각종 회의 및 예배 그리고 성례식을 주관하고 집행합니다. 교회 대부분에서는 평균적으로 70세에 은퇴하여 원로 목사가 됩니다.
(2) 부담임 목사
부담임 목사는 담임목사의 지도아래 교회의 전반적인 일을 보살피는 목사입니다. 담임목사가 부재 시에는 담임목사를 대행할 수 있으며 주로 교육이나 선교 부문을 맡아 일합니다.
(3) 전도사
심방 전도사는 각 교인의 가정이나 직장 등을 방문하여, 성도들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주로 합니다. 교육을 맡아 일하는 교육전도사, 교회 행정을 전담하는 행정전도사도 있습니다.
(4) 노회장이나 감리사, 감독
지방회 및 행정을 관장하는 노회장(감리교회의 경우, 감리사와 연회 행정을 관장하는 감독)이 있습니다.
4) 평신도
(1) 장로
장로는 감리교회에서는 입교인 30명에 1명 표준으로 입교인 들에 의해서 피택되는데 교회를 위한 희생정신이 있어야 함은 물론 그 교회를 입교인으로 10년 이상 무흠하게 섬겼어야 합니다. 연령은 35세 이상 된 이로 신앙이 충실하고 전도할 능력과 열심이 있는 권사(장로교회의 경우 안수집사)로 정기 당회에서 재적 2/3의(무기명투표) 가표를 받고 총회에서 제정한 장로 고시 과정에 합격하여 지방회에서 안수받고, 그 후의 3년 과정을 필한 사람을 말합니다.
장로의 직무는 담임자를 도와서 교회의 모든 임원의 활동을 지도 협력하며 재무의 일을 도와서 교회 재정 정책에 힘쓰며 신도들을 방문하고 신앙을 지도하는 일을 하며, 당회의 공천위원이 됩니다. 장로의 나이 70세가 되면 교회의 모든 실무에서 은퇴하여 원로장로의 추대를 받습니다.
(2) 권사나 안수집사
권사나 안수집사는 대체로 입교인 된 지 5년 이상 연령은 30세 이상 된 집사로서 무흠하게 믿음을 지킨 분으로 당회에서 입교인 15명 중에서 한 명 비례로 택하는 직분입니다. 권사나 안수집사는 기도회 및 속회를 인도하며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낙심 자를 권면하고 병자를 위문하여 새 교인의 신앙을 굳세도록 지도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안수집사는 장로로 피택받아 교회를 처리하는 책임을 맡게 될 수도 있습니다. 권사의 경우 나이 70이 되면 실무직에서 물러나며 그러한 권사를 원로권사라고 부릅니다.
(3) 집사
집사는 입교인 된 지 2년 이상 된 분 중에 신앙이 충실하고 봉사 열이 있으며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을 당회에서 택하여 세운 분입니다.
(4) 구역회(속회) 인도자
인도자는 구역회(속회) 공과를 충실히 준비하여 구역원(속도원)들을 교육해야 하며 구역원(속도)들을 믿음으로 양육시킬 사명이 있습니다.
(5) 구역장(속장)
가. 구역장(속장)은 집사 중에서 선임하며, 매주 담당 구역원(속도)들의 변동 상황을 담임자에게 보고합니다.
나. 구역장은 구역원들의 신령 상 형편을 살펴 교회에 기도를 요청하기도 합니다.
다. 구역장은 작은 지교회의 담임자의 역할을 담당한 직분으로 구역회의 사활을 지고 있는 직분입니다.
5) 교인반열
교회의 일반 신자는 원입인, 세례아동, 세례인, 입교인지를 나눕니다.
(1) 원입인은 죄악에서 구원을 얻고자 하여 회개하고 주를 믿기로 결심하여 교회에 다니는 새 신자를 말합니다.
(2) 학습인은 원입인으로서 적어도 6개월 이상 교회에 다니고 교리를 공부하며 교회 규칙을 지키고 믿음이 진실함을 드러내며 경건한 생활에 나아가서 연령 12세 이상이 되고 담임목사가 예문대로 받은 사람입니다.
(3) 세례아동은 세례받은 때로부터 12세가 되어 세례 인의 반열에 편입될 때까지로 합니다. 단, 입교 세 레인의 반열에 편입될 때는 문답을 필해야 하고 아동 세례는 3세까지로 합니다.
(4) 세례인은 학습인으로 6개월 이상 교회에 충실히 다니고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며 교회 규칙을 지키고 진실한 믿음과 경건한 생활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증거하고 담임목사가 예문대로 받은 사람입니다.
(5) 입교인은 18세 인상된 세례인으로 담임목사가 예문대로 입교시킨 사람입니다. 단 18세 이상 된 학습인은 세례와 입교식을 동시에 행할 수 있습니다. 다른 교파에서 받은 세례는 인정합니다.
6) 교인 권리
(1) 세례를 받은 이는 성찬식에 참례합니다.
(2) 18세 이상 된 세례인은 입교식을 거쳐 입교인이 됩니다.
(3) 입교인은 임원을 선거할 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습니다.
* 교회의 각종 자치 기관이나, 각종 회의나, 직분에 관한 내용은 교회마다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5. 교회에 여러 가지 교파들
1) 한 교회 시대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 예루살렘에서 제일 먼저 형성되었는데, 이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을 체험한 무리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이 세운 것입니다. 이 교회는 유대교 율법과 선정 경배로 인해서 유대교의 한 분파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와는 달리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갈릴리 예수를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면, 사도들이 가르치는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등의 독특한 특성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처음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으나 곧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수장으로 하는 유대 장로제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10번에 걸친 로마 황제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점차 늘어났으며 마침내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인정한 313년에는 국가와 교회의 구별이 없어지고 서구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기독교 국가가 되어 로마가톨릭 교황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교회인 로마가톨릭 교회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2)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특별히 베드로에게 주신 권한을 교황이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교황이 모든 교회의 신앙과 윤리, 그리고 정치에 있어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던 로마가톨릭이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완전히 나뉘게 된 것은 교리적인 문제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정치적 중심지인 로마 교황과 종교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와 불화하여, 867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Photius가 로마 교황을 파문하고, 1054년 역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미카엘 카를라류스와 로마 교황 Leo 9세가 상대방을 파문함으로써 동방과 서방교회는 갈라지게 되었다.
3)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
마리아 숭배와 성인 숭배, 화체설(떡과 포도주가 신부의 손에 의해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고 주장), 교황과 신부의 신격화(면죄부), 믿음 외에 선행이 추가되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과 연옥 설 주장 등의 이유로 로마가톨릭에 대한 비판이 날로 거세 갈 무렵, 마틴 루터라는 로마가톨릭 신부는 마침내 1517년 95개 조항을 지적하며 교회의 자성을 촉구하였다.
성서 신학자인 루터는 사람의 공적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구원을 받으며, 교황의 말이나 교회의 전통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진정한 권위를 가진 것이며, 서품을 받은 신부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만인 제사장 설을 주장했으나, 그는 로마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여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고 후에 그들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불리게 됨으로써 오랫동안 하나의 교회(로마가톨릭)였던 기독교회 안에는 교파가 생겨났습니다.
4) 개신교의 여러 교파
교파(denomination)라는 말은 교리, 신조, 예배, 의식, 신앙생활의 특이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단체와 그 파(派)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교파라는 말의 의미가 유럽과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는 다소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유럽과 영국에서는 그들의 국교회에서 이탈한 종파로 보고 다소 경시하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국교가 없고 교파에 따라 형성된 교회들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교파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파는 교리에 대한 신앙 차이, 성경과 계시에 대한 재해석, 예배의식의 차이, 정치, 문화적 차이 등에서부터 교파가 갈라집니다. 교파를 형성하거나 분열하는 것을 무조건 죄악시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늘 변화답고 거듭나야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경우 어쩔 수 없이 갈라져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교파주의로 흘러 자기 교파만이 참된 교회이고 타교 파는 적대시하고 정죄하는 행위는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인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는 아닙니다. 많은 교파가 있지만 주요 교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감리회(Methodist Church)
감리교회는 요한 웨슬리의 신학과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된 교회입니다. 계속된 영국 국교회의 타락에 회의를 느낀 웨슬리는 1719년 옥스퍼드 대학 안에서 'p'p 신앙 동지와 "신성 클럽(HOLY CLUP)"을 만들고 성결한 생활, 성경, 신학 연구, 빈민, 병자, 죄수 방문, 전도하는 데에 힘썼는데 이들이 규칙적으로 모임을 하자 사람들은 그들을 규칙주의자(Methodist)라고 부른 데서 감리교회라는 명칭이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감리교회의 탄생은 1738년 요한 웨슬리가 올더스케잇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운 신앙 체험을 한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를 따르는 숫자가 증가하자 영국 교회가 이들이 설교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웨슬리는 영국 교회를 떠날 마음이 없었으나 런던 감독이 1784년 미국으로 파견할 설교자 코크에게 안수하기를 거부하자, '메도디스트라 불리는 사람들의 연회'를 조직하고 할 수 없이 스스로 안수하여 보냄으로써 영국 교회와 분리하게 되었습니다.
감리교회는 종교 사업, 교육, 의료, 사회사업, 각 방면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사업을 활발히 진행함으로써 당시의 영국 사회를 산업혁명의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편 코크가 임명한 애즈베리에 의해서 미국 감리교회는 영국에서보다 더 급속한 성장을 이루게 되었으며, 독립전쟁 당시 영국 감리교회로부터 분리되어 오늘날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감리교 선교는 미 감리회의 일본 주재 선교사가 1884년에 내한하여 고종의 선교 윤허를 받은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후에 미 감리회 해외 선교부는 병원을 세운 것으로 유명한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튼 부인 등을 선교사로 파견하였습니다.
감리교 신학적, 교리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무제한적, 보편적 속죄, 즉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주적이며, 무차별한 것임을 믿는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며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2)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믿지만 자유의지까지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다. (3)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사회악 제거를 위해 헌신하라고 요구하신다. (4)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체험과 이생과 내세에서 성화 됨을 믿는다(성화 강조).
(2) 구세군(The Salvation Army)
1858년 감리교 목사인 윌리암 부드(William Booth)가 교회일 외에 각종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소외된 계층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교파에 관계없이 런던의 빈민굴에서 전도를 시작하여 놀라운 중생의 체험한 사람들이 많이 생김으로써 조직을 확대하게 되었습니다. 1878년 5월 이 단체를 구세군이라 부르고 윌리암 부드가 초대 대장이 되었고, 1912년 8월 20일 윌리암 부드가 별세할 당시 약 59개국에서 이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구세군은 개인의 자유와 기회의 균등을 확보하는 군대적 조직을 채용하여 세계의 구세군을 한 명의 대장이 통솔하게 되어 있으며, 복장이나 직분도 군대식으로 하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노방전도를 통하여 공격적인 전도를 합니다. 구세군 신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구세군의 모든 회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구원받은 것을 고백하며, 그들은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받은 군병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헌신할 것을 서약한다. (2) 구세군 신문이나 발행물을 가가호호 다니며 전하고, 불신자를 개인적으로 권면하며, 가족을 심방 하여 기도하기를 힘쓴다. (3) 구세군은 특히 아이와 여자의 권위를 존중하며 여자에게는 남자와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인정한다.
(3) 성결회
일본인 나가다 시게하루는 미국 무디 성경학원에 유학하고 있는 동안 어느 집회에 출석하여 특별한 영감을 받아 일본으로 귀국한 후 각처로 순화하며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이때 나가다 씨의 친구인 미국인 C. E. 카우만이 이 희생적 전도에 감동하여 그의 아내와 함께 1901년에 일본으로 건너와서 네 사람이 협력하여 활동하던 중 1904년부터는 "동양선교회 학원"을 설립하고 또 몇 몇 주요한 도시에 전도관을 세우고 전도 사업을 확장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1907년에 동양선교회 복음 전도관을 서울에 세우고 전도를 계속하다가 1922년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조직하고 해방 후부터 대한성결교회로 이름을 고치어 현재에 이릅니다.
대한성결교회의 7개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을 근거로 하되 특히 중생, 성결, 재림, 신유를 성결 해설의 요체로 한다. 2) 교파주의에 편입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를 설립한다. 3) 사도신경을 신앙의 기초로 하고, 성경을 진리의 대해로 받아들여 영적으로 무한한 발전을 도모한다. 4) 교회의 정책은 일반 신도의 양심을 기초로 한 회의 제도를 채택한다. 5)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 행위이므로 엄숙하고 경건하게 진행해야 한다. 6) 건전한지와 성결한 정과 견실한 의지에 기초하며 개발적으로 신앙을 지도한다. 7) 문서와 설교로 전도에 주력하는 동시에 실생활로 시범을 보인다.
(4) 영국 국교회(성공회)
영국 국교인 성공회는 로마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파로, 1534년 영국 왕 헨리 8세 때에 국회에서 영국 교회가 교황의 종속되지 않음을 선포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국교회는 1536년 로마 감독의 교권을 폐지하는 법령 반포하였고, 1570년 교황 피오. 5세는 당시 영국 왕 엘리자베스를 파문함으로써 완전히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885년 영국성공회 중국선교 사인 울프 신부가 2명의 선교사와 부산지역 선교를 시도하였고, 1889년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의 지시로 영국 해군 군종신부가 1890년 한국의 첫 선교사로 입국하여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1915년 김희순 신부는 최초의 한국인 사제로 서품을 받았습니다.
(5) 오순절 교회(Pentecostal Church)
일찍이 미국 교회 안에는 오순절의 성신의 역사를 동경하는 신자들이 오순절 회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1898년에 이 회원들은 남부 캐롤라이나주 앤더슨에게 모여 따로 "불세례 성결교회"(Fire-Baptized-Holiness Church)를 조직하였다. 그 후 1년 만에 역시 같은 주의를 가진 사람들이 "오순절 성결교회"(Pentecostal Holiness Church)라는 또 한 개의 교회를 조직하여 독자적인 형식으로 예배하고 있었는데, 1911년에는 이 두 단체가 합동하여 "오순절 성결교회"라는 이름으로 종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15년에 이르러서는 또다시 "성막 오순절 교회"라는 교회가 이에 합병하였다.
오순절 교회 교리와 신조 : 이 교인들은 대부분이 감리교회나 침례교회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므로 모든 점에 있어서 이 교회들의 형식이나 교리를 채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리의 요점은 삼위일체, 원죄, 그리스도 구속의 피로 말미암은 인류의 구원, 예수의 처녀 탄생과 신성, 영감, 성경의 문자적 무오설, 성령의 역사가 풍부함과 자비함을 믿는 것으로서 일반교회와 별로 다른 점이 없습니다. 특별한 점은 예배드릴 때 매우 열정적이어서 소리치며 기도하고, 손뼉을 치며, 때로는 마구 뛰면서 방언하는 것입니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 있으며, 세례는 전신 침례로 하며, 성찬시에는 서로의 발을 씻겨줍니다. 이들은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은 병 고침을 굳게 믿으나 의학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General Council)
1914년 미국 아칸소주 복음주의 할 스프링에서는 오순절 교회의 목사들과 복음주의파 목사들이 더욱더 열렬한 복음정도 사업을 위해 합동하였는데, 그 본 교회에서 승인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한 종파를 이루게 되었다. 그들은 열렬한 근본주의자(진화론 반대자)로서 알미니안 주의를 그들의 신학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성회는 다음과 같은 신조들을 하고 있습니다. (1)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성을 굳게 믿는다. (2) 사람은 타락되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량함을 받는다. (3) 성령으로 세례받음과 방언을 믿는다. (4) 세상과 짝하지 말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 (5)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이 교파의 사람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후에는 방언의 은사를 받는다는 교훈을 강조하여 이 교회의 목사는 누구나 방언을 할 수 있다고 신도들은 믿고 있습니다.
각 개 교회는 그 치리나 정치에 있어서 완전히 독자적이지만 구역적으로 모든 교회를 목회하며 전도할 책임이 있는 목사가 있습니다. 각 구역에는 노회가 있어 목사를 시취, 안수, 임명합니다. 그리고 모든 교직자는 정기적으로 총회에 모이어 모든 일반 사무원을 선정하며, 교리의 표준을 규정하고 교회의 확장 책과 발전책을 협의합니다. 이 교파에서 가장 교인 수가 많은 곳이 여의도 순복음 교회입니다.
(6) 장로회(Presbyterian Church)
장로교회는 장로(presbyter, elder)에 의해서 치리되는 교회 조직입니다. 교회 행정은 '가르치는 장로'(목사)와 '처리하는 장로'(장로)에 의해서 이끌어지는데 장로들은 교인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되어 노회에서 안수받아 장립됩니다. 장로교회가 독자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종교개혁 기간 중이었는데, 교황제도가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종교개혁자들은 장로제도가 사도들의 전통을 계승한 제도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제도를 명확하게 규명한 것이 바로 장로교 창시자로 불리는 칼빈입니다.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실시한 신정정치는 장로제도를 구체화했는데, 우선 1559년 프랑스의 2천 교회가 장로회를 받아들였으며, 네덜란드에서도 1563년 앤트워프에서 장로교회가 창설되었는데, 네덜란드에서는 장로교회라고 부르지 않고 개혁교회라고 부릅니다. 장로교회가 가장 활발하게 추진된 나라는 스코틀랜드였습니다. 종교개혁자 존 낙스에 의해 1560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창립총회가 열렸으며, 이 교회는 스코틀랜드 국교회가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영국과 미국 장로교회의 확산지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소속의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였습니다. 장로교 5대 교리는 TULIP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1) 인간의 전적 타락, 2)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 3) 제한된 속죄, 4) 불가항력적 은혜, 5) 성도의 견인입니다.
또한 장로교 신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각 사람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 이루어진다. (2) 각 신도의 구원은 영원한 하나님의 뜻 일부이다. (3)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믿음에 대한 상급이 아니다. (4)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5) 중생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역사이다. (6) 한번 구원받은 자는 언제나 구원받은 자로 있다.
(7) 침례회(Baptist church)
세례를 행할 때 물을 뿌리거나 부어서 하지 않고 물속에 들어갔다가(침례) 나오는 의식을 주장하는 교파입니다. 1608년 영국의 핍박을 피해 폴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해 온 비 영국 교도들은 영국교 목사였다가 청교도가 되어 그 곳으로 망명했던 요한 스미스(John Smith)의 지휘 밑에 처음으로 뱁티스트파(침례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스미스가 그 곳에 이미 설립된 메노나잇파와 합동하려 하자, 토마스 헬위와 'p'p 동지가 이에 반대하여 1612년 영국으로 돌아가서 런던에 침례교회를 세웠습니다. 이후 18세기의 영국 침례회는 감리교운동에 영향을 받아 각성운동과 해외선교운동을 활발하게 했는데, 1792년에는 영국침례선교회가 조직되어 윌리엄 케리를 영국선교사로 파송하는가 하면, 19세기에 들어서 미국침례회도 1813년 아도람 져드슨을 미얀마로 파견하였으며, 유명한 역사신학자 레토레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부흥운동가 빌리 그레이엄을 배출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침례회를 전해준 사람은 캐나다 선교사 펜윅입니다. 그는 1889년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다가 다시 귀국하여 1894년 한국내지 선교회를 조직함으로써 침례교 한국선교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양심의 지시대로 성경을 해석하며 과학과 교육에 새로운 해석이 생길 때는 그에 따라 신앙을 수정할 수도 있으며, 각 개인은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를 경배할 수 있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침례교는 다음과 같은 신앙적, 신학적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1) 각 교회는 독립해야 한다. (2)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 (3) 모든 신앙 문제에 있어서 종교적 자유가 있어야 한다. (4)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중생한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다. (5) 유아 세례는 비성경적이므로 실시하지 말아야 한다. (6) 세례는 신자에게만 베풀어야 한다. 형식만으로 받는 세례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세례의 예식은 전신을 물에 담그는 전신 침례뿐이다.
1. 예배란 무엇인가?
1) 예배의 의미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통해 영적 체험에 이르고, 그리고 그 영적 체험은 다시 예배에 대한 더 큰 갈망으로 이어집니다. 예배의 대상은 우리를 예배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그와 씨름하며,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고, 그에게 간구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갈 수는 없고 다만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꺼이 다가와 주실 뿐입니다. 예배란, 개인에게든 공동체에서든,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과의 강력한 만남입니다.
(1)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기독교인이 예배하는 것은 성서가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핵심 요소는 말씀 선포, 자선, 주의 만찬, 기도 등이다.
(2)기도(<요 14:14;><요 15:16>), 설교, 가르침(<행 5:41>), 그리고 자선(<마 18:5; ><행 3:6>)은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는 말을 해석하면서,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예배 역시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3) 칼빈은 예배를 성령의 역사로 보았기 때문에, 예배는 단순한 인간의 행위 그 이상의 무엇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의식을 넘어선 호소(transconcious appeal)"라고 불렀습니다.
(4) 기독교인의 예배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놀라운 구속 행위에 신앙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응답하는 행동입니다. 대부분 기독교인은 예배 때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5) 예배는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edifying)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현존과의 만남을 통하여 '성장'하여야 합니다. "유익을 주는" 예배는 기독교인을 모이게 하되,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도록" 그들을 파송하기 위함입니다.
2) 예배의 형태
(1) 개인적인 예배
우리는 어떻게 예배드려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공중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예배는 단순히 주일날 교회에 와서 드리고 마는 주 1회 혹은 2, 3회의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거룩한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는 예배와 개인의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2) 공적인 예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기 위해 모여야 합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예배 의식은 매우 단순한데, 초대교회의 규례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 교제, 기도, 떡을 뗌(애찬), 혹은 성만찬의 네 가지가 포함되었습니다(<행 2:42>). 이제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 되었고(<벧전 2:9 ;><계 1:6>),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희생이 유일한 제단이었습니다(<히 13:10>). 어떤 거룩한 도구들(구약시대에 있었던, 번제단, 떡상, 분향단 등등)도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요 4:20-23>).
하나님의 백성은 마치 연주회의 청중처럼 목회자가 집례하는 예배를 단순히 관망하는 데서 벗어나야 합니다. 합니다. 성도들은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인 즉시 거룩하다고 인정받는 동일한 사람들이 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세 있는 자나 비천한 자나 모두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공동예배자일 뿐입니다. 그들은 함께 모일 때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미리 예배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일단 한자리에 모이면 곧바로 예배에 들어가기 위한 마음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거나 성경을 강해하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느냐입니다. 예배를 끝내고 나오면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사람은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3) 가정예배
이것은 아마 가장 오래된 예배 형태일 것입니다. 한 집안의 가장(家長)은 가족들을 인도하여 하나님께 찬양과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가 아니라 먼저 가정에서 가르치고 실천하게 해야 말씀이 어린아이의 심령에 새겨지고 손과 발을 통해 행동으로 나오게 됩니다. 가정의 영적인 부흥은 가정예배의 회복에서 일어납니다. 어린아이들이 성전에서 소리내어 예수님을 찬양하자, 이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마 21:16>)라고 하셨습니다.
3) 예배의 요건
(1)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열남.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영적인 관계가 이루어져 있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피로써 씻음을 받지 않은 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히 10:19>). 피의 제사를 제쳐두고 우리 자신의 공로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는 것은 "가인의 길"로 불리며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유다서 11절; <창 4:3-5>). 비록 접근하는 형식이 올바르다 하더라도 삶이 불경건하면 그것은 외식 된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마땅히 하나님께서 거절하실 것입니다(<사 1:11-17>).
(2) 하나님과의 교제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으려면 예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고전 11:27-32>).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의 성품을 묵상하고 그분의 선하심에 감사드리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심령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부정함과 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킵니다.
(3)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분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이 자신의 말씀 속에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바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지식 안에서 성장하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입니다(<골 1:10>). 우리의 내적 존재 안에서 그분을 아는 것은 번제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중요합니다(<호 6:6>).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 때 우리는 실로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고후 4:6; ><엡 4:13>). 그분은 놀랍고 영광스러운 주님이시며, 우리는 우리 찬양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그분에 관해 더욱더 많은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4) 하나님께 대한 감사
주 예수님은 두 명의 빚진 자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누가 그분을 가장 사랑하는 자인가에 대해 교훈해 주셨습니다(<눅 7:41-47>). 이 이야기의 요지는 가장 많이 용서받은 사람(큰 죄인)이 주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받은 축복을 헤아리고 우리를 축복하시는 분 안에서 즐거워한다면 그 때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일 수 있습니다(<시 24:3>).
4) 예배를 위한 제안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영적인 행위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예배 때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 반면 악한 영들도 우리의 예배를 방해하기 위해 덤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세기에 보면, 아담의 두 아들이 가인과 아벨이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이었기에 그가 지은 것 중 귀한 곡물을 예물로 삼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벨은 목동이었기에 양의 첫 새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인 것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고, 가인의 제물만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벨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물을 드렸기에 하나님은 받으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예배드리는 그 순간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시간 들이 예배 시간에 드려집니다. 나의 평상시 삶이 뒷받침되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기도, 찬양, 예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받으십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반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서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5-7>)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창 4:4>)
이 사실은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더라도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실패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예배당에 나와 드리는 예배는 물론이고 평상시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공적인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임하게 됩니다.
5) 예배의 종류
주일 낮 예배 :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 주일 낮에 드리는 대예배라 합니다.
주일 오후(저녁)예배 : 요즈음은 주일 저녁 예배 대신에 주일날 오후에 드리는 경향, 또 집에서 각 가정에서 가족 중심의 예배를 드리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수요예배 : 수요일 오전이나 밤에. 성경 공부나 기도회로 모입니다.
금요 심야 기도회 : 금요일 늦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기도하기 위한 모임입니다.
새벽기도회 : 매일 새벽에 기도회로 모이는데 이는 우리나라 교회만의 특징.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새벽 미명에 기도하곤 하였습니다(<행 5:21>). 해가 뜨기 전에 주님을 만나는 교제의 시간입니다.
구역(가정) 예배 : 인근에 사는 몇 가정이 그룹을 조직하여 매주 정해진 시간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 깊은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2. 주보를 보는 법
주보란 그 주일의 모든 예배순서와 각종 알리는 사항이 기록되어있는 인쇄물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시작되기 전 모든 순서를 잘 보고 그대로 따라 하면 됩니다.
* 주일 낮 예배 순서(교회마다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1) 예배에 부름 : 예배 인도자가 성도를 예배에 초청하는 말로 예배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성도들은 눈을 감고 묵상합니다.
2) 예배를 위한 기원 :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 위하여 인도자가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3) 신앙 고백 :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고백 문으로 외울 수 있는 사람은 눈을 감고 암송하며,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은 찬송가 맨 앞부분에 적혀 있는 사도신경을 소리내어 한 목소리로 읽으면 됩니다.
4) 찬송 :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노래로, 경건한 마음으로 함께 불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송가에 적혀 있는 장수를 찾아 부르는데, "장"은 찬송가 양쪽 위에 큰 숫자로 된 것입니다.
5) 교독문 : 찬송가 뒤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교독문을 인도자와 회중이 번갈아 가며 소리 내 읽습니다.
6) 대표기도 : 모인 신도들을 대표하여 정해진 순서대로 돌아가며 기도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죄를 회개 자복하고, 간절한 소원을 아뢰는 간구의 순서로 드려야 하며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아멘으로 마칩니다.
7) 주기도 : 대표기도 후에 곧이어 전 회중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암송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찬송가 앞이나 뒤에 실린 주기도문을 보고 읽습니다.
8) 성경 봉독 : 이날 예배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찾아 읽는 순서로 구약이나 신약 중 설교할 부분을 예배 인도자나 성경 봉독하기로 정해진 사람이 대표해서 읽습니다.
9) 찬양 : 예배를 이끄는 성가대가 찬양하는 순서로 성가대가 없는 경우 다른 방법으로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10) 말씀 선포 : 하나님께서 목회자의 입을 통해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으로 그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려는 경건한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11) 헌금 :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정성을 모아 주정 헌금(월정헌금), 감사헌금, 십일조 등을 드립니다.
12) 봉헌기도 : 성도들이 바친 헌금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기를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13) 교회 소식 : 교회의 행사나, 목회자들, 교우들의 동정을 소개합니다. 주보의 알림난에 실린 내용과 그 밖의 내용을 광고합니다.
14) 폐회를 위한 송영 : 예배를 마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송입니다.
15) 축도 : 예배를 끝마치면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기를 기원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목사가 축복을 비는 기도입니다.
3. 교회의 절기
교회에서 지키는 대표적 명절은 4가지입니다.
① 부활절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
② 성탄절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절기
③ 추수감사절 - 추수를 끝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축제
④ 맥추감사절 - 첫 곡식 보리를 추수하여 감사드리는 절기
1) 부활절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축하하는 절기로서, 부활주일은 우리나라 달력으로 매년 춘분 후 처음 맞는 만월, 즉 음력 15일 다음에 오는 주일입니다. 교회마다 다채로운 행사를 하고, 지역마다 교회가 연합하여 부활절 새벽에 축하 예배를 드립니다.
(1) 부활절과 달걀
대영 백과사전은 다산과 새로운 삶의 상징인 달걀이 보면 축제 기간 달걀들을 색칠하고 먹는 관습을 가지고 있던 고대 이집트인과 페르시아인에게서 유래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병아리가 달걀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무덤으로부터 나오신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로마가톨릭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년)는 이것과 관련된 하나의 기도문까지 정하였습니다. "즉, 오! 주여 우리가 당신께 간구하오니, 당신의 이 피조물 달걀들을 축복하사 주의 종들에게 건강이 좋은 양식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이것을 먹나이다."
(2) 부활절과 새벽예배
부활절 시즌에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일출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해가 막 떠오르는 부활절 일요일 아침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그러한 영광을 돌린다고 추정됩니다. Easter(부활절)란 말은 동쪽(east)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식물이 싹트고 나올 때 고대인들은 자기들의 구세주가 이승에서 나와 겨울을 끝마치게 하고 봄을 시작하였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지 자연계 안에나 봄의 새로운 식물에서가 아닌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믿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일년 중 봄에 있었기 때문에 4세기의 교회가 이교도의 봄 축제를 그리스도교회 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2) 성탄절
그리스도가 태어나심을 기리고 축하하는 기독교의 절기입니다. '그리스도'와 '미사'가 합쳐 구성된 용어인 크리스마스의 성경적 근거는 마태복음 제1장과 누가복음 제2장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대한 천사의 계시, 이상한 별의 출현, 베들레헴의 말구유까지 박사들을 인도한 별 등은 그리스도가 인간이 된 비밀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1) 크리스마스의 기원
크리스마스의 날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12월 25일설은 고대 로마에서 지키던 동짓날을 채택한 데서 비롯됐다. 당시 로마의 이교도들은 동지절(12월 24일 - 다음해 1월 6일)을 하나의 대축제적인 명절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교회의 로마 주교는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에서 이교의 축제일인 동지를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채택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교회가 교리적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부터입니다.
(2) 크리스마스트리
성탄에 널리 유행하는 크리스마스트리의 관습은 고대 애굽에서의 동지제(冬至祭) 때의 나뭇가지 장식, 로마 축제 행렬에서의 촛불을 단 월계수 가지 장식 등 옛날의 성목(聖木) 숭배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전나무를 사용하게 된 데는 전설이 있습니다. 8세기경 독일에 파견된 선교사 오딘이 신성하다는 떡갈나무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적 풍습을 중지시키기 위해 옆의 전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뭇가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라"고 설교한 데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입니다.
(3) 크리스마스와 캐럴 (Carol)
캐럴은 본래 불란서 말 carole에서 온 말로 주로 중세 불란서에서 둥근 원을 만들어 춤을 추었던 원무(圓舞)를 일컫던 말로, 이 원무는 동지 때 가졌던 축제에서 사용한 이교도들의 무곡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캐럴은 춤출 때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 말이어서 캐럴이 모두 크리스마스와 반드시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 음악 이 캐럴인지 아닌지는 곡의 가사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음악적 형식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곡에 버든(Burden)이라고 불리는 후렴이 각 절의 가사 끝에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했는데 이것을 형식으로 보면 B, V1, B, V2, ... B의 형식입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출판한 캐럴백과사전(The Oxford Book of Carols)에는 모든 절기에 맞는 캐럴 200여 곡이 실려 있습니다. 대부분의 캐럴이 라틴어와 영어 두 언어를 섞어 쓰고 있는 것이 또 다른 특색입니다. "저 들 밖에 ... 노엘, 노엘," "천사 찬송하기를... 글로리아(영광)," 등은 좋은 예입니다. 15세기에 있어서 캐럴은 대중적인 종교 가곡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캐럴은 즐거운 노래로 된 것이 특징이고 대중에게 많이 불려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캐럴은 본래 교회의 절기 때마다 부르는 모든 노래를 일컬었지만, 특별히 크리스마스 노래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을 독일에서는 바이나흐트 리트(Weihnacht lied) 라고 하는데, 이는 영어로 Christmas eve song이란 뜻이고, 불란서에서는 노엘(No l)이라고 합니다.
(4) 캐럴링(Carolling) : 새벽송
19세기 상반기 영국에서는 집집을 방문하면서 캐럴을 불러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동네의 모든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에 쓸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11월말부터 시작하여 각 집을 돌아다니면서 캐럴을 부르곤 했던 것입니다.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1783-1859년)이 1820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 크리스마스날 밤 창문 밑에서 들려오는 합창단의 아름다운 캐럴 소리에 잠이 깨었다고 합니다. 그 합창단은 십여 명의 옆 동네 사람들로 구성되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창문 밑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화음이 서투르긴 해도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캐럴링은 그리스도 탄생의 기쁜 소식을 천사들이 찬양으로 전했던 것처럼 크리스마스 새벽이면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집집마다 전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크리스마스 새벽이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이 캐럴링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는 교회가 있지만 점차 새벽송을 삼가는 경향이 늘고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1) 추수감사절의 유래
1620년 9월, 영국 청교도 가운데 '필그림'(pilgrim)이라 불리던 기독교인들이 영국 국교의 탄압을 피해 그들의 종교적 삶을 시작할 새로운 땅을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여 102명이 타고 영국 플리머스 항을 출발한 배는 폭풍우와 여러 어려움을 겪고 1620년 11월, 뉴잉글랜드 지방에 도착하여 그곳을 플리머스라 명명했습니다.
항해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땅에서의 겨울은 혹독하기만 했습니다. 많은 병자와 사망자가 발생하여 인구는 출발할 때의 절반으로 줄었고, 건강한 사람이 드물었지만,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 도와가며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개간하고, 건물을 지었다.
이듬해 봄에 그들은 인디언들로부터 옥수수 재배방법을 배우고 농사를 지었는데 그해 가을에는 풍년이 들어 비로소 새로운 터전에 정착할 기반이 잡혔습니다. 청교도들은 경작법을 가르쳐준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3일 동안 추수를 감사하는 축제를 벌여 하나님 앞에 기쁨과 감사를 표했다. 미국인들의 선조가 되는 이들 청교도들(pilgrim fathers)이 추수한 곡식, 과일과 함께 야생 칠면조와 사슴을 잡아서 벌인 이 축제가 미국에서 시작된 최초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입니다.
이후 점차 자리잡게 된 이 추수감사절을 대통령이 해마다 임의로 선포하였으나 1941년 미 의회가 대통령과 합의하여 11월 네 번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확정하여 오늘날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2) 세계의 추수감사절
풍성한 곡식을 수확하고 신께 감사하려는 제사는 원시 시대부터 전세계 여러 부족과 민족들에게 보편적으로 내려왔으나, 기념하는 날짜와 방법, 그리고 감사하는 대상은 각각 달랐다.
영국에서는 8월 1일, 고대 켈트족이 태양신에게 풍년을 감사하는 데서 유래한 래머스 데이(Lammas Day)가 추수감사절 성격을 띠었는데 이 날에는 햇곡식으로 반죽한 빵을 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래머스 데이는 현재 8월의 뱅크 할리데이 먼데이(Bank Holiday Monday)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스위스에 개혁파 교회에서는 9월, 독일의 복음주의 교회는 성 미가엘의 날(9월 29일) 다음 한 주간에 추수감사 행사를 가집니다. 캐나다의 추수감사절은 칠면조 요리를 먹는 등 미국과 비슷한데, 한 달 정도 빠른 10월 둘째 월요일에 추수감사절을 지킵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한국의 유명한 개신교 교단들은 현재 부활절,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을 3대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추수감사절을 한국에서 지키게 된 것은 한국 개신교 전파과정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190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어느 장로의 제의를 받아들여 추수감사절을 지키기 시작했고, 1914년 이래로 11월 셋째 주 일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4) 맥추감사절
맥추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맥, 소맥을 거두고 나서 하나님께 그 열매를 드리는 절기로 이스라엘의 해방기념일인 유월절로부터 50일 되는 날이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곡식제사(소제)와 희생제사(번제)를 드리며(<레 23:17 >이하),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회상하며 감사드립니다(신명기 16:12). 후에 오순절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었고, 기독교에서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주님의 제자들에게 불과 바람으로 임한 성령으로 인해 권능을 받게 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었습니다(<행 2:1 >이하).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은 구약시대에 봄 곡식을 거두던 절기가, 신약에 와서는 영혼을 거두는 절기가 되었으며,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성령을 받은 절기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4.교회력
절기는 본래 교회력에서부터 나왔는데, 교회력(the Church Year)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주제들과 삶의 내용에 바탕을 둔 연중예배계획 수립을 위한 달력입니다. 교회력은 여섯 가지 절기, 즉 강림절기, 성탄절기, 주현절기, 사순절기, 부활절기, 성령강림절기로 나뉩니다.
1) 대림절기(The Advent Season)
교회력은 강림절기로부터 시작됩니다. 11월 30일 또는 그날과 가장 가까운 주일부터 성탄 전날 밤까지 네 주일을 포함하는 절기로, 메시아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기간입니다. 목사님과 성가대들의 가운 위에 두르는 후두나 그 밖의 장식(예전)에서는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을 상징하는 보라색이나, 인류에게 영생을 가져다주시는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한 희망을 나타내는 청색을 사용합니다. 성도들은 회개하는 태도로 겸손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참고 기다리며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다시 탄생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2) 성탄절기(The Christmastide)
12월 24일 저녁 해가 넘어간 후부터 1월 6일 주현절이 시작 전까지 12일간이 성탄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몸으로 인간세계에 탄생하심을 경축하는 절기로, 죄없이 동정녀의 몸에 나신 그리스도의 순결하심과 우리의 빛이 되심을 상징하는 의미로 흰색을 사용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오심의 기쁨을 서로 나누고 그 사랑을 특별히 불우한 이웃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3) 주현절기(The Epiphany Season)
주현일(1월 6일 동방박사가 방문한 날)부터 사순절 전까지 6주 내지 9주가 주현절기입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성육신 하심을 회상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하는 절기로, 생명과 성장을 상징하는 녹색을, 그리고 1월 6일인 주현일과 주님의 세례일과 주님의 변형일에는 빛이나, 영광, 승리를 상징하는 의미로 흰색을 사용합니다. 이 기간 동안 성도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 말씀 등을 기억하고 전도와 복음선포를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4) 사순 절기(The Lenten Season)
부활절 이전의 40일간으로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주일은 빼고 계산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회상하면서 참회하는 영적 준비기간으로 고난과 참회를 상징하는 보라색을 사용합니다. 성도들은 이 기간에 자신의 죄와 잘못을 참회하며, 그리스도가 당하신 십자가에서 고통과 죽으심을 생각하여 지나친 오락은 삼가야 합니다.
사순절(Lent)의 유래
영어로 사순절을 가리키는 'Lent'라는 말은 앵글로·색슨어로 '낮이 늘어나는 시기', 혹은 '봄'을 뜻하는 말 'Lencten'에서 왔습니다. 사순절은 주일을 제외한 40일에 해당되며, '성회 수요일'(Ash Wednesday)에 시작하며 성 토요일, 즉 부활 전 토요일로 끝납니다.
사순절의 기원이 기독교 문헌에 처음 언급된 것은 주후 100년경입니다. 처음에는 '빠스카 축일'(Pascha ; 유월절에 해당되는 희랍어)을 준비하기 위해 짧은 기간 동안 모든 사람이 금식과 기도를 엄격히 준수했던 유대교의 관습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금식 기간은 교회마다 달라서, 어떤 곳에서는 하루, 다른 곳에서는 이틀, 또 다른 곳에서는 40시간 동안 지켜지곤 했는데, 여기서 40시간은 대충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부터 부활까지의 시간에 해당되는데, 그것을 '빠스카 금식'(Pascha Fast)이라고 불렀다. 3세기 중반에는 금식기간이 6일간으로 늘어났으며, 부활절에는 세례받는 사람들은 더 엄격하게 2주~3주간 동안 금식하며,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했다.
313년경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공인한 영향으로, 사순절 기간이 늘어나서, 서방교회에서는 주일을 제외한 6주가 되었고, 동방교회에서는 토요일과 주일을 제외한 7주간이 되었는데, 현재도 그렇게 지켜지고 있습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ea)에서 사순절을 가리키는 교회용어 '콰드라게시마'(Quadragesima, 40일간을 의미)가 처음으로 나타났고, 현재 사순절 첫째주일로 불리는 때부터 시작되는 6주간으로 이해되었습니다.
5) 부활절기( The Easter Season)
부활절은 기독교인들이 최초로 경축한 축제이며 가장 귀중한 절기입니다. 부활일부터 성령강림절까지 50일간으로 부활주일은 대개 춘분(3월 21일) 다음에 오는 첫 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심을 기뻐하고 경축하는 축제에 교회는 순결, 승리, 기쁨, 축제를 표상하는 흰색이나 혹은 특별한 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금색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제단을 꽃으로 장식하고 기쁨과 축제로 지내며 부활의 소식을 세상에 전합니다. 부활절에는 전통적으로 세례 예식을 행합니다.
6) 성령강림 절기(The pentecost Season)
성령강림절은 교회력에 있어서 가장 긴 기간입니다. 성령강림절(부활절 후 50번째 되는 날)로부터 예수께서 태어나심을 고대하는 대림절 전까지 약 27주로, 오순절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심을 기념하는 절기이며 교회의 탄생을 축하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성령강림 일엔 불로 임하는 성령과, 교회에 대한 열심과 충성, 헌신을 상징하는 빨간색을 사용하고 그 날 이후에는 빨간 색이나 성장을 상징하는 녹색을 사용합니다. 이 기간 동안 성도들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수련과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5. 주기도문에 대하여
1) 주기도문의 정의
주기도문은 크게 2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하나님 나라)는 교리로서 사도신경과 관련되고, 후반부(인간생활)는 윤리로서 십계명과 관련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내용(what)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방법(how)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기도의 내용을 획일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모본(pattern)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주기도문은 <마6:9-13 >과 <눅 11:2-4 >의 기도문 중 마태복음에 나오는 기도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주기도문이란 마태복음의 것을 말합니다.
2) 주기도문의 구성
(1) 형식적 구분
주기도문은 형식적으로는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도의 대상을 부름("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둘째, 기도의 내용("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셋째, 송영("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 내용상 구분
주기도문의 내용을 분류하면 크게 2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에 관한 기원으로 2인칭 단수 대명사를 쓰고 있습니다. 둘째, 사람(우리)에 관한 간구로서 1인칭 복수 대명사를 쓰고 있습니다. 성격상 이 두 부분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하늘의 것과 땅의 것, 영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3) 후반부의 간구의 내용
그리고 사람에 관한 간구의 내용은 시간적으로 3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일용할 양식에 관한 부분은 현재적인 것
둘째, 죄 용서에 관한 것은 과거적
셋째, 유혹(시험)과 악에 관한 것은 미래적
3) 내용설명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1) '우리 아버지'라는 친근한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지존자 하나님을 친밀하게 부르도록 허락하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호칭은 단 14회이지만, 신약에서는 170회 나타난다.
(2)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의 뜻은 멀리 은하계 어느 구석에 떨어져 있는 우주 공간의 어떤 특정지역을 말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초월성, 영성, 거룩성, 하나님의 영적 자유를 상징하고 포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칼빈은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 우주에 대한 그의 통치권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늘'은 '땅'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피조영역이며, 지음 받은 실재로서 무한한 생명창세기조의 가능성, 잠재성, 충만성, 그런 의미에서 영적 실재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피조물과 함께 생명과 은혜의 빛으로서 현존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항상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이시다. 만유 안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지만 항상 하나님은 만유를 초월하여 만유 위에 계십니다(<엡 4:6>).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하나님 대하는 심정으로 경외와 감사와 깨끗한 맘과 정성을 다하여 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태도로 드리는 불경건한 예배나 기도는 차라리 드리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덜 손상시켜 드리는 일입니다. 흔히 예배가 무슨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방편으로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것을 엄히 경계해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자세는 순수해야 하고 겸허해야 하고, 정성을 다한 것이어야 합니다. 햇빛과 우로를 선한 이와 악한 이에게도 고루 내리시는 영원자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자세로 살아야하고 하나님을 불러야합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1) 국어학적으로 우선 전통적인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나라'라고 하는 주격에 붙는 토씨 '가, 이' 중에서 옛날로 올라 갈수록 '이'가 많이 쓰여졌던 흔적입니다. 현대 국어문법상 받침 없는 주격 체언에는 '가'를 써야 합니다.
(2)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 영광, 통치가 온전하게 실현된 영역입니다. 하늘나라가 하나님의 현존을 제약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과 영광의 임재가 하늘나라를 규정합니다. 하늘이라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늘입니다.
(3) '당신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안에서, 성령의 강림과 교회의 출현 안에서 이미 땅 위에 시작되었고 임했으나 아직 온전한 영광의 모습으로 완성되지 아니하고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 비유들은 하늘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으나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 곧 '이미와 아직'(already … not yet) 사이의 긴장을 보여줍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 사람들을 통하여, 땅의 피조물들 안에서, 또 그들과 함께 이뤄지기를 염원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과 삶의 모든 선물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과 하나님의 뜻의 구현에 동원하여 쓸 것을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재능, 시간, 물질, 은사, 능력, 기회, 생명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의 도구와 그릇(容器)이 될 것을 다짐하는 기원입니다.
(2)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드리는 크리스천은 결코 이 세상의 일들을 소홀히 하고 저 하늘나라만 앙망하는 타계주의 신앙, 몰역사주의 신앙, 영지주의적 신앙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주기도문은 성육신적 영성을 강조합니다. 하늘의 뜻과 땅위의 뜻이 하나로 통일되고, 하늘과 땅이 함께 영광의 나라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1) 우리가 교회 공동기도문에서 사용하는 주기도문은 개역성경을 따르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이라는 단어는 '오늘'이라는 단어의 뜻과 매우 다릅니다. '오늘'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헬라어 쎄메론(Semeron)이라는 단어는 24시간 곧 하루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성경은 '오늘'이라는 헬라어 쎄메론을 this day, today로서 번역하고, 독일어 성경은 heute로, 중국 한문성경은 今日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한글 "개역성경"이 '오늘날'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늘의 시대,' '최근의 시기,' 즉 하루가 아니라 상당한 시간의 길이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의 뜻을 가리울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표준성경"은'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번역하여 원문에 좀더 가깝고 충실한 번역을 하였습니다.
(2) '일용할'이라고 "개역성경"에서 번역한 헬라어는 에피우시온(Epiousion)인데 그 의미는 '필요한,' '존재에 필수적인,' '오늘을 위한' 등의 의미입니다. "개역성경"은 "일용할 양식"으로, "새번역성경" 과 "공동번역성경," "표준새번역 성경"은 모두 '필요한 양식'으로 번역하였습니다.
(3) '양식'으로 번역한 원문은 유대인의 주식인 '빵'(Bread, artos)입니다.
(4) '주옵시고'는 '주시옵고'로 번역하는 것이 국어학적으로 더 옳다고 합니다.
(5) '오늘, 필요한 양식'이라는 말씀은 하루하루의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생명을 내가 담보하거나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먹을 양 이상의 '만나'를 거두어 들였을 때, 곧 벌레가 생기고 썩어버리며,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듯이 근본적으로 인간은 하루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아 산다는 '겸허한 마음, 빈 마음,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 스스로의 자기 유혹, 곧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 하나님 없이 스스로 생명의 주인이 되려는 근원적 불신앙이 작동하여 스스로 유혹에 떨어지는 인간의 불신앙과 자기 파멸에서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시라는 기도입니다. 둘째, 인간보다 더 영적으로 간교하고 신령한 어떤 악의 실재들의 위협과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시라는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악한 자'의 시험과 유혹은 반드시 인간의 자의적, 의지적 동의와 감정을 유발시켜서 시행하므로 첫째와 둘째는 현실 속에서 날카롭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데 악의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성경은 '악,' 또는 '악한 자'가 아무리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 의지의 자유, 그 책임성을 악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있으며, 악은 절대적인 완전한 존재가 아니므로 인간을 유혹할 수는 있을지라도 인간을 희롱할 수는 없으며, 인간을 악에 빠뜨릴 수는 있어도 인간생명을 파멸하거나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구약 욥기 참조).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당신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1) 송영 부분이 마태복음에서 괄호 안에 넣어 인쇄된 이유는 마태복음의 대부분 중요한 고대사본들 가운데서 (대개 주후 5~6세기 이전에 필사된 사본들) 송영부분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송영부분은 주님기도가 교회의 예배에 빈번히 사용되고 고백됨으로 인하여 후대에 덧붙여졌다고 봅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간구하는 것으로서만 끝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송영의 처음에 나오는 단어 '대개'라는 단어는 헬라어 '호티'(hoti)라는 단어를 중국 한문성경에서 참조하여 우리말 개역성경 번역시(1930년대) 참고하여 번역한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그 단어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그 의미는 영어의 because, for 등에 해당하므로, 우리나라의 말뜻으로는 '이는 …'정도입니다. 중국어 번역본에서 초기엔 <大槪, 大蓋>로 쓰이던 것을 그대로 참조하여 개역성경을 번역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중국의 성경도 <以, 또는 因爲>로 번역하여 이 의미를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 한글 번역본에서 1936, 1933년 신약성경 번역본에 <대개>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대체로'의 뜻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찬송가 앞장에 인쇄된 주기도문에 그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3) 기도는 허락된 은총의 선물이며, 기독교 신앙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기도는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매개수단이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구하고,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신뢰와 하나됨 안에서 자녀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확신을 갖고 기도하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이뤄주소서'라고 맡기는 절대신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송영이며, 찬양과 영광돌림은 인간존재의 제일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영광 받고 교제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6.사도신경(The apostles’creed)
1) 사도신경의 유래
신조(creed confession), 신앙고백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사도신경은 신앙의 표준을 말합니다. 사도신경이란 명칭이 처음 발견된 것은 서기 390년경이며 오늘날 사도신경보다는 더 짧았고 또는 긴 것도 있었으나 공식적인 사도신경은 650년에서 850년경까지 손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중세 초기부터 모든 서방교회(로마교회)는 세례의식 때마다 사도신경을 외웠으며, 미사 때마다, 주일마다,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방교회(러시아정교회) 는 아직도 이 의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역사가 흐름에 따라 인위적으로 만든 고백이 원만하고 만족스러울 수 없기 때문에 교파마다 각자의 신앙고백을 거듭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불트만(R. Bultmann)은 "초기의 신앙고백들은 짧게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다'라는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경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의 간결하고도 단순한 고백을 신앙고백의 기본적 표현으로 쓰고 있습니다.
2) 신앙 고백의 목적과 용도
(1) 요리 문답으로서
신조로서의 신앙고백은 입교 지망자(교인이 되려는 사람)를 교육할 목적으로 고안되었습니다. 세례의식을 거행할 때 세례 지원자는 신앙고백을 외워야 했습니다. 루피누스에 의하면 로마교회에서는 세례의 은혜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공중 앞에서 신조를 낭송해야 하는 고대의 풍속이 널리 행하여졌다고 했는데 즉 세례 지원자들은 그 자신의 신앙심에 관하여 회중이 들을 수 있도록 신조를 낭송했다고 했다.
(2) 입교의 증거로서
신앙고백은 교회 구성원으로서 자격을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원을 확증하는 표시로서의 상징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신조의 낭송이 교인임을 입증하는 표시로서 인정받았습니다.
(3) 교리의 기준으로서
신조는 신앙을 표현하는 선언일 뿐 아니라 이단에 대항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단적인 교리들이 만연될 때에 사도신경은 교회의 진리를 표명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빈들리(Bindley)는 "교회의 진리는 처음에는 말로 표현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인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었다. 그러다가 이 진리를 부인하는 이단이 등장하자, 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깊이 생각하게 했고, 그 신앙을 조리 있는 말로서 표현하도록 했다"라고 했습니다.
(4) 예전으로서
신앙고백은 교회의 예배의식으로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세례의식에 속해 있던 신조가 성찬의식에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11세기쯤 로마에서 니케아 신조가 삽입되었는데 고대 고올(Gaul)교회에서는 세례가 행해지던 예식에서 마지막 순서에 이 사도신경을 노래로 불렀고, 로마가톨릭 교회도 그렇게 통일했습니다.
(5)신앙 체험으로서
신조는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동시에 기독교인의 체험을 반영하며, 그 경험에 도움을 줍니다. 쿨만(Cullmann)은 역대 신조들의 선언이 현재시제로 되어 있어 은혜의 현재성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현재성이 전통적 신조에 실존적 성질을 부여하며, 신앙체험을 요구하거나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3) 신앙 고백의 성경적 근거
구약 안에서도 신조적 신앙고백의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시 7:1, ><시 63:1 >등에 간략하고 자발적인 신앙의 탄성으로서의 신앙고백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십계명(<출 20:1-17;><신 5:6-21>)에서도 신조적 표현을 발견할 수 있고, 쉐마(Shema)라고 불리는 <신 6:4-9; ><신 11:13-21, ><민 15:37-41>에서도 구약성경의 교리적 표현으로의 신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포오티어스(H. W. Porteous)는 이것을 '신조적 언명'이라고 했고, 로빈슨(H. W. Robinson)은 '유일신 신앙에서 나온 유대인들의 원초적 신앙고백'이라고 했습니다. 최근의 학자들은 실제로 <신 26:5-9>의 후반부를 '작은 신조'라고 부릅니다.
신약은 그 전체가 베드로의 고백,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되풀이하고 있는 기독론적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니나, 하나님의 아들이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쿨만(Cunmann)은'그리스도의 선포가 기독교의 모든 신앙 고백의 출발점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사실입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고 했고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예수가 주이심을 입으로 고백해야 하는 그 시기가 바로 주를 공식적으로 저주하지 않으면 박해를 당하는 시련의 시기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전 15:3-7>절에서 바울은 사도행전에 나오고 있는 베드로의 찬양형식의 설교와 같은 방법으로 표현된 신앙고백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15:1)라고 했는데, 다시 말하면 신앙고백의 내용은 바울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해 받았고 또한 전해준 것이라는 것입니다.
7. 찬양에 대하여
1) 찬양의 역사
찬양 혹은 찬송이란 성경말씀이나 기독교 교리 혹은 개인의 경건생활을 노래한 것으로 초대교회 시대부터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초기에는 유대교의 시가인 시편들이 불렀는데,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불렀던 찬송(<마 26:30; ><막 14:26>)도 시편 찬송의 일종인 '힐렐'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곡이 붙은 완전한 형태의 찬송은 초대교부인 2세기의 클레멘스가 지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 니케아공의회(325년) 이전 것으로는 메토디우스가 지은 '여인들아, 일어날지어다' 라는 노래가 있다고 합니다. 4세기 이후 찬송은 더욱 더 보편화되었는데, 동방교회에서는 헬라어로 된 '대영광송'을 아침 기도 때마다 불렀고 이것이 서방교회에서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5세기 이후 성경의 내용 이외의 것은 찬송가사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움직임이 일어 7세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과감하게 세속적 음악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찬송의 대중화를 가져온 사람은 유명한 감독인 암부로시우스였습니다.
현재적인 찬송은 18세기에 형성되었는데, 18세기 중엽에 회중교회의 교인인 와츠가 개인의 영적 체험을 담은 찬송을 만들기 시작했고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에 의해 집대성된 '찬송과 거룩한 시들'(Hymns and Sacred Poems)은 영어로 된 찬송 중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잇습니다.
감리교의 찬송은 영국의 성공회와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1797-1805년 사이에 있었던 대각성운동을 통해 복음주의적이고 영감이 풍성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2) 찬양의 이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지음 받았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으로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의 섭리와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이 곧 우리의 삶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부르는 노래입니다. 구약시대의 교회는 시편을 그대로 곡조에 맞추어 불렀으며 그밖에 다른 찬송이 성경 여러 군데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교회 초기에도 그렇게 해왔으나 근세에 이르러 하나님의 성덕을 노래로써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송을 지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성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찬예식 후 찬송을 부르셨다는 말씀이 마 14:26과 <마 26:30>에 동일하게 기록되었습니다.
3) 찬양의 효과
경건한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찬송을 부를 때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유익을 얻습니다.
① 찬양함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감사와 기쁨을 충만히 느낄 수 있습니다.
② 비록 어두운 마음이었다 하더라도 찬송을 부르면 마음이 밝아지고 뜨거워집니다.
③ 하나님은 찬송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써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고 변화를 받아 성장하게 됩니다.
3. 찬양의 자세
① 경건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시 108:1-3>. <골 3:16>).
② 소리를 높이 불러야합니다(<시 145:3>).
③ 악기 소리에 맞추어 불러야합니다.(시편150편. 대하23:13)
④ 때로는 손뼉을 치면서 불러야합니다(<시 47:1>).
9. 기도에 대하여
1) 기도의 정의
기도란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곧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아무런 대상 없이 일방적으로 하는 독백이나 아무 의미 없이 반복하는 주문도 아닙니다. 시간이 길든지, 짧든지, 속으로 하든지 소리내서 하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또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 육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 심령의 가장 깊고 가장 높은 단계 속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윌리엄 캐리는 "기도-은밀하고 열렬한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밑뿌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2) 기도의 목적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데 사용하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수록 우리의 부족함을 더 잘 보게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더욱 더 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서서히 그리고 자비롭게 우리들이 숨어 있는 장소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숨어 있는 장소에서 나와 자유롭게 하십니다.
3) 기도의 응답
요한 웨슬리는 "하나님은 오직 기도에 응답하여 일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루에 두 시간을 기도하는 데 바침으로써 그의 확신을 뒷받침하였다. 마틴 루터는 "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하였고, 모세는 기도를 통해서 그가 처한 상황을 바꿀 수 있고 심지어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돌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담대히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의 변함없는 사랑에 따라 자신의 뜻과 마음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심을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서 소돔과 고모라 성의 구원을 요청하는 장면에서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올바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약 4:3>)입니다. 올바르게 구하는 일은 정욕이 변화되는 일을 포함합니다. 진정한 기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변하게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게 되고, 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사물을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에서 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4) 기도의 내용
(1) 찬양
기도에는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은총에 감사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이 얼마나 많은가를 헤아려 보고 그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2) 고백
또한 기도할 때 죄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깨닫고 고백하는 기도일수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3) 간구
또 기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필요를 간구합니다. 물론 그 응답은 하나님이 그분이 계획하고 계시는 시간과 섭리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4) 중보
또한 기도할 때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데, 이런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5) 끝맺음
모든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끝맺는데, 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14;>요16:23-24).
(6) 아멘
그리고 기도가 완전히 끝난 경우에는 기도하는 사람이나 그 기도를 듣고 있던 사람이나 모두 '아멘'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의 '믿는다,' '동의한다'에서 나온 말로 "진실로 그러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끝날 때 아멘 하는 것은 지금 기도한 내용에 동의하며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5) 기도의 훈련
진정한 기도는 배워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습니다. "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기도를 되풀이하고 끈질기게 하고 있는데도 응답이 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거나 그 응답이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기도할 때는 먼저 정신을 집중하고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호흡에 맞추려고 하는 것은 신령한 일입니다. 이 신령한 일이 없으면 기도는 헛된 반복에 되고 맙니다(<마 6:7>). 성공적인 기도를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키엘케고르는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기도는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조용하게 되어서 결국 기도는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구하는 기도를 계속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듣고, 알고,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동정심과 관심을 갖는 것은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라는 가장 명확한 하나님의 지시이며 그 지시에 따라 기도할 때 우리의 믿음은 자라고 강해집니다.
6) 기도의 방법
(1) 기도의 <대상 :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마 6:6>에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기도를 들으십니다.
(2) 기도의 수단 :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요 14:13-1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셔서(<딤전 2:5>),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며(<히 7:25>) 우리 기도를 이루시기 위하여 일하십니다.
(3) 기도의 내용 :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사욕을 위하든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기도는, 마치 어린아이가 불이나 칼을 달라는 것과 같으므로 이루어 주시지 않습니다.
(4) 기도의 자세 :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 1:6-8>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하는 기도만 받으시고 이루어 주십니다(<마 21:22>).
7) 기도의 종류
어떠한 형식으로 하든 우리의 기도는 모두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서툴게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하나님을 향해서 드리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크게 소리내어 부르짖는 통성 기도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같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한소리로 합심해서 하는 합심 통성 기도도 있습니다. 그 반면 자신의 은밀한 사정을 하나님께 조용히 아뢰는 묵상 기도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드리는 중보 기도도 있습니다.
공적인 예배에서 모든 회중을 대표해서 드리는 기도를 대표 기도라고 합니다. 대표 기도는 온 회중을 대표해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 예배에 꼭 필요한 것들만을 기도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중언부언하지 않기 위해서 미리 준비해서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다짐을 하는 서원 기도가 있습니다. 그 외에 방언으로 하는 방언 기도, 그리고 예언을 위한 예언 기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 기도나 예언 기도는 조심스럽게 하여 기도가 낭비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9. 성례란 무엇인가
성례(sacrament) 혹은 성례전이란 기독교에서 행하는 거룩한 예식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거나 묘사, 상징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실제로 은총을 가져다주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가톨릭은 영세, 성찬, 견신례, 고해례, 안수례, 결혼례, 종유례 등 7성례를 집행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오직 세례와 성찬 등 두 성례만을 성례로 간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고(<마 28:19; ><막 16:15,16>), 세례 요한을 통하여 세례를 받음을 친히 모범을 보이신 세례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근원 합니다. 세례는 일차적으로 진정으로 신앙고백을 한 성인에게 시행되어야 하나, 성도의 자녀들은 언약의 혜택에 참여하였므로 유아 때에도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행 16:31>).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유월절에 마지막으로 가지신 유월절 성찬(<마 26:26-29; ><막 14:22-25 >누가복음 22:26)에서 빵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살을, 포도주는 그가 흘리신 피를 상징하며, 그것을 잊지 말고 기념하라고 명령하신 것(누가복음 22:19 ; <고전 11:24>.25)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속죄함을 입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잊을 수 없는 은혜롭고 감격스러운 일이므로, 이를 상징하는 물질을 직접 먹고 마시면서 기념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예식입니다(<고후 4:15>).
1) 성례 참예를 위한 준비 단계
① 학습 - 교회 출애굽기석한지 6개월 이상, 확실한 신앙과 교리에 대하여 신입교우부에서 배우고 자원에 의하여 학습 문답한 후 서약으로 학습을 서게 됩니다.
② 입교 - 부모의 신앙에 의하여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15세 이상 되어 자신의 신앙 고백과 결단으로 그 부모의 신앙 고백과 서약을 나의 것으로 확인하고 서약합니다.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은 사람 역시 문답과 서약만으로 입교인이 됩니다.
③ 세례 - 학습한 지 6개월에서 1년 된 후 자원하여 세례 받기를 원하는 때 세례교육부에서 세례 교육을 받고 문답한 후 서약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④ 유아 세례 - 부모가 모두 또는 한 분이 무흠 세례 교인으로서 4세 미만 자녀의 세례를 받기 원할 때 부모가 문답한 후 서약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⑤ 성찬 참예자 - 무흠 입교인 및 세례 교인은 모두 참예합니다.
2) 세례
세례예식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다른 단계들로 들어가는 길을 여는 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와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세례는 물로써 말씀 안에 다시 태어나는 성사다."
(1) 이 예식은 어떻게 불리는가?
세례를 준다(baptizein)는 말은 '물에 담그다', '물에 잠기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물에 '잠김'은 예비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묻힘을 상징하는데, 그는 그 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사람'(<고후 5:17>)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 성사는 또한'성령의 쇄신과 재생의 목욕'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성사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을 의미하고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요 3:5>).
또 이 목욕은 조명이라고 불리는데, 이 의식을 받는 사람들은 마음에 빛을 받기 때문입니다. 세례로써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요 1:9>)이신 말씀을 받은 사람은 빛을 받고 나서"'빛의 자녀'(<살전 5:5>)가 되고, 그 자신이 "빛"(<엡 5:8>)이 됩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선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물, 은총, 기름 바름, 조명, 불멸의 옷, 재생의 목욕, 등 가장 귀중한 모든 명칭으로 부른다. 그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선물이며, 죄인들에게도 주어지기 때문에 은총이며, 죄가 물 속에 묻히기 때문에 세례(물에 잠김)이며, 신성하고 왕다운 것이기에 도유이며(기름부음받은 사람들은 신성하고 왕다운 사람들입니다), 눈부신 빛이기에 조명이며,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기에 옷이라고 하며, 씻어 주기 때문에 목욕이라고 합니다.
(2) 구약의 세례 예표
교회는 부활 성야의 전례 중에 세례수를 축복하면서, 세례의 신비를 예시한 구원 역사의 위대한 사건들을 장엄하게 기념합니다. 교회는 노아의 방주를 세례를 통한 구원의 예표라고 보았습니다. 과연 방주 덕분에 '몇몇 사람만이 물을 통과해서 구원을 받았는데 그 수효는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홍수를 통하여 죄를 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 주셨다.
샘물이 생명을 상징하는 반면 바닷물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징 체계에 따라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참으로 해방된 것은 세례로 이루어지는 해방을 예고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홍해를 건너 바로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세례 받은 새 백성의 예표로 삼으셨습니다. 요르단 강을 건너는 일에서 세례가 예표되었습니다. 요르단 강을 건넘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은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 되며,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된 땅을 선물로 받는다. 이 복된 상속의 약속은 새 계약 안에서 성취됩니다.
(3) 그리스도의 세례
구약의 모든 예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됩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은 후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복음 28,19-20).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고자 죄인들을 위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자청하여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당신을 '비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때 갓 창조된 물 위에 휘돌던 성령께서 새로운 창세기조의 전조로 그리스도 위에 내려오시고, 성부께서는 예수님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마태복음 3,16-17)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파스카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세례의 샘을 열어 주셨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당신께서 겪으실 수난을 받아야 할 "세례'(마태복음 10,38)라고 이미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요한 19,34)은 새로운 생명의 성사들인 세례와 성체성사의 전형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날'(요한 3,5)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 교회 안의 세례
성령 강림날 바로 그날부터 교회는 거룩한 세례를 거행하고 베풀어 왔다. 이를테면 성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에 감동받은 군중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행전 2,38). 사도들과 그들의 협력자들은 유대인이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권합니다. 세례는 항상 신앙을 전제한 것으로 드러난다. 바울은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네 집안이 다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고 필립보의 간수에게 말했다.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믿는 이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다가 함께 부활합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로마서 6,3-4).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디아서 3,27). 성령을 통하여, 세례는 깨끗하게 해주고, 거룩하게 해주고, 의롭게 해주는 목욕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물로 씻는 목욕으로서, 이를 통해 '불멸의 씨앗'인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효과를 낳는다.
(5) 세례예식은 어떻게 거행되는가?
가. 그리스도교 입문
사도 시대 이래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여러 단계의 입교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은 빠르거나 느릴 수는 있지만 몇 가지 필수적인 요소들, 예컨대 말씀의 선포, 회개를 수반하는 복음의 수용, 신앙의 고백, 세례, 성령을 받음, 영성체 등을 포함해야 합니다.
이러한 입교 과정은 시대의 흐름과 상황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초기 교회의 입문은 오랜 교리교육 기간과 더불어 긴 과정을 거쳤습니다. 예비 기간은 준비 단계를 전례적으로 구분하는 일련의 예비 예식들을 거쳐, 마침내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거행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나. 유아 세례
어린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입니다. 이것은 2세기부터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도하기 시작한 때부터 온 '집안'이 세례를 받을 때4어린아이들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어린아이들도 원죄로 타락하고 더러워진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므로, 어둠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의 영역으로 옮겨가기 위해, 세례로 새로 거듭나야 합니다. 구원의 은총이 완전히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특히 어린이 세례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출생 후 가까운 시일에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면, 교회와 부모는 그 아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무한한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어린이 세례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생명을 양육하는 역할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의 신앙은 세례 후에도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세례를 위한 준비는 새 생활의 문턱까지 인도할 뿐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근원이며, 이 근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솟아 나온다.
(6) 세례의 필요성
주님께서 친히 세례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고, 복음을 전하고 모든 민족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세례는 복음을 전해 듣고 이 의식을 청할 수 있는 사람들의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게' 하라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소홀함이 없도록 주의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모든 죄, 곧 원죄와 본죄, 모든 죄벌까지도 용서받는다. 세례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을 아무런 죄도 남아있지 않다. 곧 아담의 죄도, 본죄도, 죄의 가장 중대한 결과인 하나님과의 단절도 남아 있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례 받은 사람에게는 고통, 질병, 죽음 등 죄의 현세적 결과 그리고 죄로 기우는 경향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으로 남아있는 사욕은,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용감히 맞서는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칠 수 없다. '운동 선수가 월계관을 얻으려면 규칙대로 경기를 해야 합니다'(<딤후 2:5>).'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일원이 되게 합니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엡 4,25). 세례는 교회와 한 몸이 되게 합니다. 세례 대에서 국가와 문화, 인종과 성별 등, 모든 자연적, 인간적 한계를 초월하는, 신약의 유일한 하느님 백성이 탄생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 12:13>).
세례 받은 사람들은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살아 있는 돌이 되고, 거룩한 사제'(<벧전 2:5>)가 되었다. 교회의 일원이 된 세례 받은 사람은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순종하고, 교회의 친교 안에서 그들에게 봉사하며,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히 13:17>)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세례는 성령께서'속량의 날'을 위하여 우리에게 찍어 놓으신 표지입니다.'과연 세례는 영원한 생명의 보증입니다.' 자신이 받은 세례가 요구하는 것에 충실한 신자는, '신앙의 표를 지니고',83) 세례 때에 고백한 그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의 완성을 바라면서 부활에 대한 희망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3) 성찬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유월절에 제정하신 성찬(<마 26:26-29; ><막 14:22-25, ><눅 22:26>), 그리스도에게 참여함(<요 6:53>), 영적 양육과 성장, 성도의 연합(<고전 10:17>)을 상징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과 구속에 필요한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의 은혜를 현실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예식입니다(<고후 4:15>).
① 세례는 일생 단 한 번으로 족하지만 성찬은 교회에서 행할 때마다 꼭 지켜야 하는 성례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사죄와 함께 새 힘을 주십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구원을 위한 수난과 희생을 눈앞에 되새기며 우리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는 동시에 그 사죄의 은총을 몸으로 체휼하면서 장차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하는 것이 성찬의 근본 뜻입니다.
③ 성찬에 참예하는 마음과 정성 그리고 믿음이 중요합니다. 부끄러운 생활과 은밀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성찬을 받는 것은 더욱 가증한 죄를 범하는 일이 됩니다(<고전 11:27>).
(1) 성만찬에 관한 학설
① 화체설(Transubstantiation, 化體說)
화체설을 일컬어 트랜섭스탠쉬에이션(Transubstantiation)이라 하는데, 이것은 트랜스(Trans:변화) + 섭스탠쉬에이션(substantiation:본질, 본체)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혹은, 성만찬으로도 불림)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Rome Catholic Church)의 주장으로서 "주의 만찬을 행할 때, 성도들이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가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입니다(라트란 공의회에서 결정함) .
② 공재설(Consubstantiation, 共在說)
공재설을 일컬어 컨섭스탠쉬에이션(Consubstantiati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컨(Con: 공동, 함께, 같이) + 섭스탠쉬에이션(substantiation)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은 루터교회에서 주장하는 학설입니다만, 정작 마틴 루터는 이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고, 그의 후예들이 명명한 것입니다. 그 의미는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순간에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는 학설입니다.
③ 상징설(像徵說)
상징설은 쯔빙글리가 주장한 주의 만찬에 관한 학설입니다. 그 의미는 "주의 만찬을 행할 때에 떡과 포도주는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가 만찬에 임재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일 뿐" 이라는 것입니다.
④ 실재설(實在說)
이것은 존 칼빈의 주장인데, "주의 만찬을 행할 때에 그리스도가 영적(靈的)으로 실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위의 학설들은 학자들마다 각기 주장하는 학설들이기 때문에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개신교에서는 대체적으로 "상징설"을 따르는 추세입니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우리를 위해 그의 살과 피를 내주신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행하는 예식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1:24>).
(2) 중세의 성만찬 의식
초기의 경우 『그레고리오 성사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평화의 입맞춤이 진행되었고, 초대 교회의 성만찬 예전과 거의 흡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8-11세기에 걸쳐 기독교 복음이 유럽 대륙의 프랑크족과 게르만 민족에게 전파됨으로서 예전은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실시된 성만찬은 미사 속에 전락되어 버린 느낌이 들 정도로 형식화되기 시작했다. 제단이 생겨났고, 신자석과 사제석으로 구별되었고,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성격이 상실되고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에 대한 공경심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중세에 들면서부터는 신자들이 주일 미사에 참석하면서도 성만찬을 하지 않고 일 년에 한두 차례만 하게 되었다. 이런 습관은 19세기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중세의 성만찬은 초대 교회나 성경 전승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예전의 형식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고, 그 속에서 참된 정신이란 고작 거룩한 예전에 참여했다는 것뿐이고, 그들 공동체에 대한 사랑의 나눔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결국 1545년 트렌트 공의회를 개최하여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뿌리 깊은 전통의 결과 오히려 의식은 중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고정되고 말았습니다.
(3) 종교 개혁 이후 성만찬 의식
종교개혁 당시에 서방교회의 타락상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예배가 설교 없는 피 없는 희생제사(미사)로 전락되었고, "그 역점도 떡과 포도주를 나눔에 있지 않고 그 물질의 성체화에 미신적인 요소까지 곁들일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구경꾼으로 전락한 신자들은 미사도 행사화 되어서 신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집례되는 등, 참된 성만찬 의식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특히 떡 대신 점차 돈으로 봉헌을 하거나 면죄부를 사도록 강요되어 개혁은 필연적인 사건이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 이후 종교 개혁가들은 공통적으로 가톨릭 교회가 희생제사의 반복으로 드리는 미사와 성체화의 교리를 거부하면서 성경적인 예배로의 환원과 모국어 예배에 힘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와 영국 교회는 로마 가톨릭 예배의 많은 부분을 답습하였고, 쯔빙글리와 재세례파는 로마 가톨릭과의 완전한 단절을 꾀하였기 때문에 쯔빙글리는 오르간, 음악, 의복, 그림까지도 거부하였고, 재세례파는 공중 예배의 형식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종교 개혁 이후 모든 교파는 성만찬 예식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격감시켰고, 깊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반 가톨릭 적에만 신경을 집중시켜 그다지 성만찬 의식이 발전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성만찬은 오늘 우리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
(4) 성만찬에 대한 오늘날의 의미
①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서의 성만찬 : 언제나 말씀과 성례를 포함하고 있는 성만찬은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고 기념하는 것이고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대신하여 드리는 찬양의 대제사입니다. ②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성만찬 :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그가 이루신 모든 일들과 함께 이 기념 속에 임재하며 우리와 친히 교제를 나누심과 동시에 이 기념의 의식을 통하여 활동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매일매일의 생활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아 있고도 거룩한 제사로 드리게 됩니다. 이 성만찬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화해의 종들이 되기 위하여 사랑으로 성화 되고 화해됩니다.
③ 성령 초대로서의 성만찬 : 성령은 성만찬을 가능케 하시며 성찬식이 계속해서 유효하도록 만드시는 무한한 사랑의 힘이고, 성만찬의 모든 행위는 '성령 초대의 기원'의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성령은 새 계약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성화 되고 새로워지고, 모든 진리와 정의의 하나됨을 이루기 위하여, 세계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힘을 얻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만찬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합니다.
④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 : 교회의 삶을 양육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성만찬적 사귐은 동시에 교회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만찬은 삶의 모든 측면을 포함합니다. 즉 온 세상을 대신하여 감사와 봉헌을 드리는 대표적 행위로서 신자들을 세계사의 중심적 사건과 연결시켜 준다. 이러한 연대성은 기독교인 자신들이 그의 종 되심에 동참하는 행위로서 구속사건의 세계 내적 임재를 증거해 줍니다.
⑤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 : 성만찬은 창조의 궁극적인 갱신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비전을 열어 주며 또 그 통치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자들은 성만찬을 통해 화해되었고 또, 사람들 가운데서 화해의 종이 되도록, 또 부활의 기쁨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성만찬을 거행하는 자체가 교회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증거인데 이 참여는 복음선포, 이웃에 대한 봉사, 이 세계 안에서 성실하게 살아감과 같은 일상적인 형태를 취합니다. 성만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만들며,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유능한 증인이 되도록 하는 새로운 현실을 현 세대에 가져옵니다.
10. 헌금에 대하여
1) 헌금의 정의
헌금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대신 , 돈이나 물건으로 대신 바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애굽에서부터 감사하며 그 대신에 하나님께 속전을 드렸다.
2) 헌금을 하는 이유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세기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말 3:7-10>)
헌금은 감사와 헌신의 표시로서 예배에 있어서 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교회 집사가 헌금을 관리하여 교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 속에는 나의 시간, 노동, 땀, 기술, 노력, 생명, 생활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단순히 '돈'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 생명, 생활, 기술전체가 그 돈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돈과 더불어 나의 삶 전체가 바쳐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은혜에 대하여 감사의 응답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헌금을 해야 할까?
첫째, 헌금은 계획적으로 수입에 응해서 해야하고 희생과 기쁨으로,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관리자로, 각자가 풍성하게 가장 좋은 것, 즉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둘째, 헌금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쳐진 것이기 때문에 정중한 신앙으로 해야 합니다. 헌금은 절대로 하나님께 '뇌물'을 바치는 격으로 드려서는 안되고 또한 미신적으로 드림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어디까지나 일생생활 속에서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의 응답으로 드려야합니다.
셋째, 헌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헌금을 드리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제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처음 주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신앙적인 응답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순종의 정신으로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의 헌금을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바를 그의 뜻에 순종하여 제물로써 또는 헌금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헌금은 우리의 시간, 재능 등 전체적인 삶의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공적 예배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헌금을 드리는 자세
하나님이 돈을 모으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자녀를 기르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헌금으로 하나님은 인간성을 가늠해 보실 수 있으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헌금을 해야 하는가? 성경은 우리의 헌금을 올바로 바치기 위한 열 가지 원리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돈을 가지고 훌륭한 청지기 노릇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원리들은 알고 또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1) 헌금은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2) 헌금은 희생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연보궤에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 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를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 12:41-44>)
(3) 헌금의 액수는 개인적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고후 9:7>).
(4) 헌금은 법이 아니라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고후 8:8>).
(5) 헌금은 계획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고전 16:2>)
(6) 헌금은 후하게 바쳐야 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고후 8:2>)
4) 헌금의 종류
① 주일헌금 - 주일 아침 교회에 나와서 예배에 참예할 때에 바치는 헌금입니다. 이 헌금은 일주일 동안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호해 주심과 사랑해 주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헌금입니다.
② 십일조 헌금 -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하나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신앙고백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재물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 뜻에 따라 재물을 사용하겠다는 헌신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가로채는 결과가 되지만 드리는 자에겐 풍성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말 3:8-10>).
③ 월정헌금(주정헌금) - 한 달이나 한 주간에 얼마를 정해놓고 바치는 헌금입니다.
④ 절기헌금 - 부활절, 맥추감사절, 성탄절, 추수감사절 등 절기의 의미를 따라 드리는 헌금입니다. 특히 추수감사헌금은 1년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헌금이므로 힘을 기울여 드려야 합니다.
⑤ 기타 헌금들
신년, 생일, 입학, 졸업, 취직, 심방, 개업, 결혼, 장례, 범사에 감사 등 생활 속에서 감사의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입니다.
⑥ 특별 헌금들
특별헌금은 성경주일, 교회연합주일, 성소주일, 인권주일, 천재나 인재로 고통받는 이웃을 위하여 등 특별한 의향이 있는 주일에 따라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룩되기를 기원하며 또한 그것에 동참하는 뜻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특별헌금은 교회가 특수한 선교의 목적에 따라 정하며 신자들은 이에 따라 봉헌합니다. 여기에는 장학헌금, 국내외 선교를 위한 헌금, 농어촌 및 개척교회를 위한 헌금, 성전건축 등을 위한 헌금 등이 있습니다.
11. 가정의례
1) 약혼예식 : 학습교인 이상의 당사자들이 당회의 허락을 받아 담임 목사의 주례로 시행 [약혼 주례청원서, 혼인신고서류, 교인증명서(타교인)]
2) 결혼예식 : 본 교회 목사의 주례로 교회에서 결혼식을 거행하기 원하는 분은 2주일 전에 당회에 청원하여 허락을 받는다. [결혼주례청원서, 혼인신고서류, 교인증명서(타교인)]
3) 추도예배
가족, 친척들이 모여 고인이 떠난 것을 추모하고 고인을 기념하며 예배로 고인의 별세한 날이나 생일에 교역자나, 장로 등을 청하여 예배 인도를 부탁할 수도 있고 가족끼리 드려도 무방합니다. 추도예배시 음식은 상에 차리지 않고 예배 끝난 후 식사를 함께 하며, 고인을 기리는 이야기 등을 나누는데, 예배 중에 다음과 같은 순서를 넣는 것이 좋습니다.
① 고인의 약력보고
② 추모사
③ 유언이나 유서나 유물 소개
4) 임종 및 입관, 영결, 하관예배
임종이 임박할 때는 교회에 연락 교역자를 청해 임종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임종이 가까운 분을 위해 성경(<요 11:7-27; ><요14:1-6; ><딤후 4:6-8>) 등의 말씀을 들려주고 조용히 찬송(471, 501, 502, 508장)과 가도로 영생에 대한 소망을 일깨워주고 유언을 녹음기 등에 남기면 좋습니다. 불신자가 죽음에 임박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면, 가족들이 먼저 그로 하여금 신앙고백을 하게 하고 목회자로부터 병상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환자가 죽으면 지체없이 입관에 지장이 없도록 죽은 이의 운을 아래로 가볍게 쓰다듬어 감게 해주고, 즉시 탈지면으로 코와 귀를 막고 입을 다물게 합니다. 턱을 바친 다음 베개를 약간 높게 하고 손과 발을 정 위치에 고정합니다. 시신을 깨끗이 씻기고 똑바로 누입니다. 입관 전에는 병풍으로 시신으로 가리고 고인의 사진을 새우는 이외에 분향이나 촛대를 세우지 말고 음식이나 제상도 차리지 않습니다. 상복은 따로 마련할 수 있으면 한복일 경우 백색으로, 양복일 경우 검은색으로 입고, 왼쪽 흉부에 상표를 답니다. 문상객들은 상주에게는 인사하지만 영구 앞에 배례는 하지 않습니다. 상가에서 밤새울 때 조용히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합니다.
매장 허가 절차 : 먼저 병원에 거서 사망진단서 3통을 받아 동사무소에 사망진단서 1통, 묘지 사용승낙서 1통, 고인의 주민수기등록증을 가지고 가면 매장 신고증을 교부해줍니다.
입관예배
고인을 세상에서 마지막 보는 순간이므로 가족이 보는 적당한 시기에 정중하게 위생수의로 갈아 입힌 후 입관을 합니다. 입관이 끝나면 입관예배를 드린 후 상주와 유족들은 상복을 입고 상장을 답니다. 상주는 고인의 상 옆에 앉아 될 수 있으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킵니다.
발인예배 :
발인은 가급적 고인이 사망한 날로부터 3일이 되는 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일에는 발인식을 할 수 없으며 주일 전 또는 후에 합니다. 발인하기 전 발인예배를 드리는데 고인의 약사와 조사가 필요할 시는 미리 준비케 합니다. 예배 후 유해가 영구차에 운구되기까지는 발인 절차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장지를 못 가는 분들과의 인사는 영구차에 운구가 된 후에 합니다.
하관 예배 : 목사가 거행하는데 하관 예배가 끝나면 집례목사가 먼저 취토하고, 유가족, 조객순으로 취토합니다.
첫 성묘
불교식으로는 삼우제라고 하는데, 장례 후 보통 3일 만에 묘소를 찾아가는 것으로 봉분과 묘비 및 묘약을 살펴봅니다.
1. 성경은 어떤 책인가?
1) 성경의 정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하나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고백이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으로 원래 책들을 뜻하는 헬라어 비블리아(biblia)에서 온 말로, 구약(Old Testament)은 모세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내용이며, 신약(New Testament)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구약은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쓰였고 일부만이 이스라엘이 바벨로니아 제국에게 멸망해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이후의 고대 근동에 널리 사용된 아람어로 쓰여졌습니다. 신약은 1세기경 로마제국의 통속어였던 코이네(koine)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계시)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과 행위의 표준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 3:16>)이며, '성령이 가르치신 것'(<고전 2:13>)이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신 것'(<고후 13:3>)이며, '하나님의 말씀'(<살전 2:13>)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기록되었으므로(<출 17:14>) 이는 절대 신빙성이 있고 인간이 임의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벧후 1:20,21>). 성경은 우리의 심령 골수를 쪼개는,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읽고 믿는 자는 심령이 변화되고 구원을 받습니다.
2) 성경의 저자 및 목적
성경은 1600여 년 동안에 걸쳐(구약 1500년, 신약 100년) 무수한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는데, 그들은 예언자, 목자, 음악가, 세리, 의사, 왕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동안 여러 사람들을 통하여 기록되었지만 일관성 있게 완전히 하나의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는데, 그 중심 대상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예언한 부분을 구약성경(舊約聖經)이라 하고, 그 예언이 이루어진 부분을 신약성경(新約聖經)이라 합니다. 그래서 역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오시기 전을 기원전(Before Christ, 약칭 B.C.)이라 하고, 그가 오신 후(주님의 날)를 기원후(Anno Domini, 약칭 A.D.)라고 오늘 전 세계가 이것으로 역사의 연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딤후 3:16-17>)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주며(<롬 3:23-26>),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며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요 5:39; ><롬 5:8-10>). 또한 사람에게 올바른 삶의 지침을 알려줍니다(<시 119:105>).
2. 성경의 정경화와 번역
1) 정경화 작업
성경은 구약이 39권, 신약이 27권으로 모두 66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70명이 함께 모여 번역했다고 해서 70인역이라고 불리는 헬라어 성경에 따른 것으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소선지서, 사무엘서(기독교 성경에서는 상하, 두 권), 열왕기(상하 두 권), 역대기(상하 두 권), 그리고 에스라, 느헤미야가 함께 하나로 묶여져 모두 24권입니다.
성경이 66권을 정경(正經, Canon)으로 결정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구약의 율법서(창세기부터 여호수아까지)는 BC 5세기에 먼저 정경으로 인정되었고, 예언서(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는 BC 200년경에, 성문서(욥기에서 아가서까지)는 AD 1세기에 정경화되었는데,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AD 100년에 얌니아(Jamnia)교회회의에서 구약39권이 정경으로 승인되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 수록된 9권의 외경은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 벌게이트(Vulgate)에서 제롬이 삽입한 것입니다.
신약은 경우 AD 300년경 교회 내에 복잡한 분파가 일어나고, 전해 오던 여러 가지 책들 중에서 어떤 것들을 거룩한 책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AD 397년 카르타고 교회회의에서 27권이 정경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때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책들을 정경이라 하고 그 밖의 것들을 외경(外經)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정경'이란 성령의 감화를 받아 하나님의 계시 말씀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 진리와 이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윤리생활의 척도요 최고 규범이 되는 구약성경와 신약성경을 말합니다.
2) 사본과 번역본 성경
지금으로부터 500년 이전까지 성경은 일일이 전수하여 베껴서 전수하였다. 필사재료로는 파피루스와 양피지, 우피지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의 대량복제가 가능해진 16세기의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본격적으로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차적으로 기록한 '원본'과 그 원본을 옮겨 쓴 '사본' 그리고 히브리어 아랍어로 기록된 구약과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을 각 나라 말로 번역한 '역본' 이 있습니다. 현재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본은 박물관에 수 만 권이 있고, 역본은 수 천 방언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은 아래의 원칙에 따라 해석되어야 합니다.
① 원어에 충실하며 문법적으로 오류가 없어야 합니다
② 당시 역사적인 정황이나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개인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③ 편집된 상하 문맥 속에서 성경 구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 한 구절이나 한 단어에 치우쳐 단편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④ 성경 전체는 통일성을 지니므로, 성경 구절에 번호를 붙여 작은 글씨로 기록해 놓은 비슷한 구절을 찾아 비교해서 읽어야 전체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해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의 원 저자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심오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인도하며 그 뜻을 조명하여 주시기를 요청하는 일입니다(<요 16:12-15>).
3) 한글성경
성경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832년 네덜란드 선교사 귀츨라프 목사를 통해서라고 합니다. 그는 얼마동안 머물면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1865년 토마스 목사는 황해도 해안지방에서 대동강을 따라 평양 근처에서 순교하기까지 한문성경을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을 최초로 번역한 것은 중국에서 영국인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입니다. 당시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에 들어오지 못한 로스 목사는 만주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만난 서상륜에게 한글을 배우며 함께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 그 때 서상륜 이외에도 이응찬, 백홍준 두 사람이 협조, 1882년 말에 최초로 번역된 우리말 성경이 누가복음이었다. 로스 목사는 같은 선교회에서 파송한 매킨타이어와 합작, 1887년에 '예수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신약을 완역하였습니다.
한편 1883년 4월 일본에서는 미국성서공회가 한문으로 된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와 사도행전에 이두로 토를 달아 3천부를 인쇄했는데, 토를 다는 작업을 맡았던 관비 유학생 이수정이 1884년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 1885년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가 그 성경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이후 국내 번역위원회가 구성되어 1900년 신약전서를, 1911년에 구약전서를 완역하였습니다. 이를 다시 1936년에 구약을, 1938년에 신약을 개정하였는데, 1938년에 개정한 성경은 1956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거하여 개역성경(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성경)을 발간하였으며, 1998년 개역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이외에도 1977년 가톨릭과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이, 1985년 현대인의 성경, 1993년 표준새번역 등이 있습니다.
3. 성경의 구성과 내용
1)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1) 구약성경
구약성경은 히브리말(고대 이스라엘말)로 기록된 것으로 모두 39권의 책입니다. 이 구약에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것과, 인간이 타락한 것, 그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언약으로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실 것까지 기록하였습니다.
(2) 신약성경
신약성경은 헬라말(그리스어)로 기록된 것으로 모두 27권의 책입니다.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인간으로 나시고 33년간 이 세상에 살아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소식(복음)을 전파하다 십자가에 대속물로 죽으시고 부활하여 다시 승천하신 것과 대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제자들을 통해 지상의 교회가 설립되어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어 가는 것과 최후로 심판의 주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의 중심 구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2) 구약성경의 구성
(1) 율법서
성경의 맨 처음부분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율법서 혹은 모세 오경이라고 부르는데, 이 책들은 창조부터, 노아시대의 홍수, 아브라함과 요셉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애굽의 탈출, 광야에서의 유랑, 모세가 죽고 새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인도로 유대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과의 만남과 구원 사건의 경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 천지창조를 비롯한 태고역사와 인간의 기원과 죄 그리고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
출애굽기 :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해 애굽에서 나온 이야기
레위기 :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율법들 중에서 특별히 여러 가지 제사법과 음식 및 성결법
민수기 :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 약 40여 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할 때의 이야기
신명기 :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에 대한 상세한 풀이
(2) 역사서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 이 책들은 BC. 1,400년경 가나안을 정복할 때부터 BC 400년경 이스라엘이 패망하고 포로생활할 때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건을 다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써 고통에 빠지고, 어려움에 처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써 다시 구원을 받는 이야기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 : 모세가 죽고 난 후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정복한 이야기
사사기 : 가나안에 들어와 살면서 아직 왕이 없었던 때에 이방민족의 침략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지도자로 세우신 사사들에 관한 이야기
룻기 :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보여주는 책으로 룻이 다윗의 조상 할머니가 된 배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무엘상하: 사무엘이라는 선지자가 처음으로 왕으로 세운 사울과 두 번째 왕인 다윗이 통일왕국을 세우기까지의 역사 이야기
열왕기상하: 다윗이 죽은 다음 솔로몬의 역사와 솔로몬 이후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된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들과 이때 활약한 선지자들 이야기
역대기상하: 다윗 이야기와 솔로몬, 솔로몬 이후 분열왕국 그리고 유다의 멸망까지의 역사
에스라 :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갔던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와서 에스라라는 학자의 주도로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이야기
느헤미야 : 에스라와 비슷한 시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으로 당시 정복국가인 바벨로니아 왕이 유다 총독으로 파견한 유다인 느혜미야의 지도로 파되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이야기
에스더 : 유다여자인 에스더가 바사(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어, 유대인을 몰살시키려는 바사의 재상 하만의 계략으로부터 이스라엘 동족을 구해낸 이야기
(3) 시가서 :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시와 노래, 격언이 기록된 이 시가서는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의 지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열망 등이 담겨져 있습니다.
욥기 : 아무 잘못 없이 고통 당하는 의인 욥의 사건을 통해, 병이나 재앙은 반드시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권선징악적 사회 통념을 깨는 이야기
시편 : 찬송시, 감사시, 탄식시 등 이스라엘의 찬양과 기도
잠언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임을 보여 주는 책
전도서 :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허무주의를 지적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따라 이루어짐을 받아들일 것을 이야기 한 책
아가 :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 노래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
(4) 예언서
이사야에서부터 말라기까지 17권이 이에 속합니다. 주로 예언자들의 예언과 사역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대예언서
이사야 : 예루살렘의 예언자 이사야(1-39장)의 심판 예언과 제2 이사야(40-5장)의 위로와 귀환의 예언과 제3 이사야(56-66장)의 예언이 있음. 대표적 예언서로서 이사야의 예루살렘 심판과 예언과 포로기 때 위로의 예언
예레미야 : 유다의 멸망을 눈앞에 둔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심판예언과 새 계약사상
예레미야애가 :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탄식한 노래
에스겔 : 바벨론으로 잡혀간 제사장 겸 예언자인 에스겔의 예언과 환상을 기록
다니엘 : 이스라엘의 포로이자 예언자인 다니엘의 신앙과 앞날에 대한 심판 예언을 환상과 비유로 보여주고 있는 묵시문학서
② 소예언서
호세아 :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
요엘 : 여호와의 날인 심판의 날이 가까웠음을 알려주고 백성들에게 회개 요구
아모스 : 약자의 아픔을 외면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사회악의 제거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 권세자들을 책망하는 예언서
오바댜 : 에돔과 다른 나라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
요나 :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하고 다른 곳으로 가다가 배가 침몰할 위기에 바다에 던져져 큰 고기 뱃속에 있습니다가 살아나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한 선지자 요나 이야기
미가 : 이스라엘, 유다의 부정한 지도자를 고발한 심판예언자
나훔 :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가 멸망할 것을 예언
하박국 : 부정과 횡포를 고발하고,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믿음을 보여줌
스바냐 : 당시 백성들 사이에 만연한 우상숭배의 죄를 지적하고 '여호와의 날'이란 심판 날을 예언
학개 :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을 독려한 예언자
스가랴 :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성전 재건에 힘쓰면서 여덟 가지의 환상을 보고 신정정치의 이상을 보여줌
말라기 : 이혼과 잡혼을 금지하였으며 십일조를 지키지 않은 자를 규탄
3) 신약성경의 구성
신약 27권은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예언서로 분류할 수 있는데, 신약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베푸신 말씀과 구원 사역, 그리고 이후의 사도와 교회의 활동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1) 복음서 :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이에 속합니다. 이 책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마태복음: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로, 왕으로 오신 예수는 구약예언의 성취자임을 강조
마가복음: 최초의 복음서로서 나사렛 예수의 행적을 담고 있음
누가복음: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로 예수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강조
요한복음: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비슷한 관점에서 예수의 공생애를 전해준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불리는 데 반해 요한복음은 보다 신학적인 복음서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
(2) 역사서
사도행전: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초대교회 역사와 활동, 그리고 바울과 사도들의 전도활동
(3) 서신
서신서는 로마서에서 유다서에 이르기까지 21권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씌어졌다. 서신서는 주로 교회나 어떤 개인에게 보내진 것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구체화, 신학화한 문서들입니다.
로마서 : 신약성경의 대표적인 교리서로서 구원은 인간의 공적이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놓은 서신
고린도전서: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교리적, 도덕적 문제들에 대한 바울의 답변
고린도후서: 사도권에 대한 바울의 자기 변호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문제
갈라디아서: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참된 복음과 기독교인의자유
에베소서 :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성도들의 삶에 대한 권면
빌립보서 :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는 자가 됨으로써 누리는 기쁨
골로새서 : 만유의 주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충족성
데살로니가전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대망과 성결한 삶
데살로니가후서: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인내
디모데전서: 교회지도자의 자격과 책임
디모데후서: 디모데의 목회생활 격려
디도서 : 그레데 교회에 대한 디도의 역할과 책임
빌레몬서 :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권면
히브리서 :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월성
야고보서 :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완전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
베드로전서 : 이 땅의 나그네로서 당하는 고난을 참고 인내하라는 권면
베드로후서 : 거짓교사에 대한 경계
요한일서 : 사랑의 실천을 통한 하나님과의 참다운 교제
요한이서 : 복음의 진리를 순수하게 지키고 사도들이 전해준 교훈을 실천할 것을 권면
요한삼서 : 진리 안에서 거하라는 권면
유다서 :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과 싸울 것을 권면
(4) 계시문학
요한계시록은 상징과 비유들로써 종말에 있을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예언서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궁극적 승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 성경을 찾아보는 법
성경은 본래 장과 절의 구분이 없었으며, 장과 절의 구분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장의 구분은 1227년 캔터베리의 추기경이었던 스테판 랭턴(Stephen Langton)이, 절은 1555년경 프랑스 파리의 로버트 스테파너스(Robert Stephanus)가 했습니다.
성경의 장절을 표시할 때는 콜론(:)을 사용하는데, <창 1:1>은 창세기 1장 1절을, <막 2:1-5>은 마가복음 2장 1절부터 5절까지를 가리킵니다. 성경을 약어표는 성경책 앞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단락표시로 ○이 있는데 이는 구절 또는 문장과 문장을 나누는 것으로 성경 내용의 단락을 짓거나 사건의 한 토막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5 성경통독
(1)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
①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쓰여진 것으로 우리의 삶과 신앙의 유일한 표준입니다.
②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
③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서만 경건한 생활이 가능하다.
④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봉사할 수 있습니다.
⑤ 육신의 생명 보존에 음식물이 필요한 것 같이 성경은 영을 위한 양식입니다.
(2) 성경을 읽는 태도
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②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를 구원기로 작정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③ 성경은 매일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통독할 때 효과적입니다.
④ 성경은 기도하며 읽고, 읽으면서 기도할 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⑤ 이해가 안 되거나 믿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조용히 여쭈는 정신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마귀의 꾐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⑥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되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서 교역자의 도움을 받도록 합니다.
6. 중요성 경구 절
* 창세기 1장 1절(<창 1:1>)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장 26절(<창 1:26>) :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창세기 12장 1-2절(<창 12:1-2>)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시편 1편 1-2절(<시 1:1-2>)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 시편 23편 102절(<시 23:102>)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 잠언 1장 7절(<잠 1:7>)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 아모스 5장 24절(<암 5:24>) :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
* 미가 6장 8절(<미 6:8>)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마태복음 6장 33절(<마 6:33>)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마태복음 7장 7-8절(<마 7:7-8>) :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 마태복음 11장 28절(<마 11:28>)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태복음 16장 16절(<마 16:33>)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누가복음 2장 14절(<눅 2:14>)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 요한복음 3장 16절(<요 3: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한복음 5장 24절(<요 5: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요 8장 32절(<마 8:32>)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로마서 1장 17절(<롬 1:33>)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고린도전서 13장 4절(<고전 13:4>)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갈라디아서 5장 22-23절(<갈 5:22-23>)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살전 5:16-18>)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야고보서 1장 15절(<약 1:15>)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요한일서 3장 18절(<요일 6:33>) :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히브리서 11장 1절(<히 11:1>)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요한계시록 22장 13절(<계 22:13>)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1.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신 영적인 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무로부터 불러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이 없으면 세상은 다시 자신이 나온 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체는 자신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그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또한 우리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의미와 그 목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유지하게 시키시고 다스리시며 심판하실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옳고, 바른 것을 추구하게 되며, 인간의 역사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신 하나님의 모습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역사에 관계하시는 주님(Lord)의 모습과 역사를 초월해 계신 영원한 분으로서의 하나님, 야훼(Yehweh)입니다. 역사에 관계하시는 주님은 이스라엘의 충성에 대해서는 복을 내리고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전락할 때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로 인하여 괴로워하시며, 그들에게 자비와 용서를 계속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사막에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시고, 그들에게 새 땅을 주시며 그들을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과 맺은 계약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시기 위해서 예언자들을 보내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 활용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주님(Lord)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세상의 사소한 문제들로부터는 동떨어져 계신 영원 자로서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야훼, 즉 "스스로 있는 분"(I am who I am)입니다. 그분의 방법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뜻을 인간이 바꿀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변치 않으시는 불변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신 초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조차도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한 신앙은 순전한 신앙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추궁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든 우상을 가지고 있었던 이방인들이 보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이 없는 무신론자들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세상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는 크게 두 종류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알 수 없는 것(The unknowable)과 영원히 알 수 없는 것(Unknowable)이 있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인간의 과학이 더 발전하면 알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겠지요. 하지만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마치 지평선처럼 우리가 한발 나아가면 그만큼 우리로부터 한발 더 멀어 지는 것, 그래서 영원히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이성을 초월해 계신 분이기에 우리가 생각하거나 연구해서 찾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을 열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을 계시라 하며, 그 계시들을 모아놓은 책이 성경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이며 불분명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이것을 하나님의 속성이라 합니다. 사람이 사람됨은 그 속성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은 그 속성 때문입니다. 속성이란 어떤 존재나 사물의 성질이나 특징으로서, 인간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속성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인격 중에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감정과 의지, 지성을 하나님도 가지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 인간을 당신의 파트너로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공통점이 없다면 서로 사랑하거나 대화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서로의 공통점인 인격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시 94:11>).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2) 하나님의 유일성
만일 여러 신들에 의해 세상이 창조되고 운영된다면 세상에는 혼돈이 거듭될 것입니다. 마치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가 여러 개 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유일하게 한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이시니"(<신 6:4>).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이사야 44:6).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1>).
(3) 영원성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만일 신이 태어나거나 죽는다면 진정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우상은 만들어 졌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하신 분입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
(4) 불변성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속성상, 영향받지 않는 불변적인 부분이 있고 영향받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불변적인 면은 우주의 질서와 같이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성도의 사랑과 기도에 의해 하나님은 영향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또한 성도의 찬양과 선행에 의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기쁨을 느끼십니다. 이런 부분은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으시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의 지존 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하 15:29>).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7>).
(5) 전능성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능가될 수 없는 전능한 분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렘 32:27>).
(6) 무소부재성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십니다. 세상의 어느 곳, 우주의 어떠한 곳에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계십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 곳을 지정하여 거기에 계신다고는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가득 차 계시지만 동시에 어느 한 곳에 계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시 139:7-9>).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3>).
(7) 전지하심.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 모두를 알고 계십니다.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역<상 28:9>).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단 2:20>).
(8) 거룩하심.
인간은 죄 속에 있고,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래서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거룩하다는 말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이니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까"(<출 15: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하셨느니라"(<벧전 1:16>).
(9) 의로우심
죄 속에 있는 인간은 의롭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의로우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시 145:17>).
"주는 의로우시니다"(<렘 12:1>).
(10) 사랑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 가운데 있습니다. 거룩과 죄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만약에 불과 물이 서로 만날 수 있다면 그 힘이 바로 사랑입니다. 죄와 거룩이 서로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2. 예수님은 누구신가?
어떤 것이든지 그 만들어진 목적이 있고 그 목적대로 사용될 때 그것의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자동차는 타고 다니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잠자리로는 불편합니다. 차는 침실이 아니라 교통수단으로 사용될 때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 지으신 이의 뜻을 따를 때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게 되고, 죄 속에 계속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마음 아픈 자를 위로하셨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사랑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해 주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
성서는 성서 자신에 의해 해석됩니다. 구약은 약속 또는 예언, 그리고 신약은 그 성취나 실현으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대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7>).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3-6>).
(2) 예수의 인성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의 출산 과정을 겪어 세상에 태어나셨으며, 갓난아기, 유아, 소년 등 사람의 성장 과정을 모두 거쳐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하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경험하시면서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6-7>).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해라"(<마 1:21>).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다윗)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행 13:23>).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 2:40>).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요 11:32-36>).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0-22>).
"무리를 보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3) 예수의 신성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태어남, 가르침, 행위, 그리고 성경과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나타난 제자들의 행동과 헌신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간이나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듣고 많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의 생전 시에는 대단히 소극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셨던 밤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거나 부인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요, 자신의 죽음이 두려웠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후에는 완전히 변화되어 목숨을 걸고 전도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를 오늘날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화되었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요 10:31>).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4)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인간의 구원이란 인간의 유한성이 극복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 길은, 인간이 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은,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신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지만 신은 인간이 되어 인간을 자신 안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하나님이심을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인 하나님의 진리라 합니다. 이를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 5:17-18>).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9>).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5-6>).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5) 예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근원적인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든 원수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지만, 그 이웃이란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사랑이란 자기 동족뿐만 아니라 우리가 도와야 한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왜 우리가 그런 사랑을 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니까 우리도 그래야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탕자의 비유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구원,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등,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우리의 삶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이 아니함일러라"(<마 7:28-29>).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3-34>).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3.예수님은 왜 오셨는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관심사는 죽음과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역시, 사람들이 예수님께 던질 물음의 대부분이 구원에 관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대부분이 구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이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요, 둘째로 우리의 죄의 용서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습니다.
(1) 우리는 왜 구원을 받아야합니까?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 죄로 더럽혀지고 훼손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죄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죄가 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둘째로, 우리는 죄의 값으로 인해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
셋째로, 우리가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2)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심판하실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을 다시 선하게 회복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란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완전히 "돌아선다"란 뜻입니다. 예수를 모르던 때 내가 행하던 악한 길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전에 내가 내 뜻대로 살아오던 나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삶의 목표가 나의 목적이나 욕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 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그러므로 너희가 돌이켜 회개하고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0-3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리라"(<요일 4:1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3)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때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첫째로, 당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와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둘째로, 당신의 모든 죄는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셋째로, 당신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넷째로,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다섯째로, 하나님께서 예배한 풍성한 새 삶이 시작됩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4. 성령님은 누구신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셋이며 동시에 한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할에 따라서 우리가 붙인 명칭에 불과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스라엘과 직접 교제를 하셨습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는 성자 하나님이라 합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후 우리에게 오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이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현재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명칭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그 역할에 따라 이렇게 부르는데, 이것은 마치 태양은 하나이지만, 태양 자체가 있고 빛이 있고 열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땐 다르게 느끼지만 실은 하나의 태양인 것과 같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0-12>).
(1) 성령의 역사
성령은 세상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순절 이후 성령께서는 신자들을 변화시키시는 역사를 계속해 오십니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도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후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6:26-27>).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2) 성령을 거스르는 죄
성령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의나 사랑을 거스르는 일,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즉 성령을 근심케 하는 죄가 됩니다. 성경은 이를 크게 일곱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1) 성령을 훼방하는 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2) 인간의 교만에 의하여 성령이 모욕을 받는 것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
(3) 인간의 불순종으로 성령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사 63:10>).
(4) 인간의 불신앙이 성령을 저항하는 것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르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
(5) 하나님의 성령을 시험하는 것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행 5:1-9>).
(6) 인간의 편견이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는 것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
(7) 인간의 경솔함이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
(3) 성령 충만한 삶
주님의 교회란 주의 성령이 계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예배당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곳이든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곳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4) 성령의 은사와 열매
성령의 은사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할 때 나타나는 내적, 외적 표징을 말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을 때 사람들은 독특한 성령체험을 하게 되며, 성령의 은사를 받은 후에는 그에 따르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 성령 체험
성경에 보면, 성령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뜻밖에 임하여 특별한 일을 하도록 감동시킵니다. 구약에서 보면, 사울의 무리는 성령이 임하여 예언도 하고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삼상 19:19-24>).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삼손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삿 14:6,19>).
신약의 교회도 이스라엘처럼 영은 어떤 특이한 능력이 임하는 것으로 체험하였다. 초대교회는 우선 예수 안에서 활동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에게도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여, 수많은 이적을 행하고,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의 성령체험을 자세하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나. 성령의 은사
우리 주변에서는 성령의 은사는 주로 방언하고, 병 고치고 예언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령의 일을 너무 축소시켜 생각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자유로우신 성령은 믿는 자들의 자질에 맞게 각양각색의 은사를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여러 가지인 것은 고린도전서 12장 4-11절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능력, 예언, 영 분별, 방언, 통역 등 다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는 성령이 뜻대로 나눠주는 것이므로 어느 한 가지 은사가 다른 은사보다 월등하거나 열등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 직분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8-31절에서 받은 은사에 따라,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자, 병 고치는 자, 서로 돕는 자, 다스리는 자, 방언하는 자로 세움을 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은사는 이처럼 성령이 나눠주는 것이므로 어떤 은사는 어떤 사람이 받아야 한다는 철칙은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집니다(<고전 12:7>) 또한 성령의 은사는 예수는 주시라(<고전 12:3>)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데 쓰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권능이 넘치는 은사라 할지라도 이 두 가지 목적에 어긋나서, 개인의 이익이나 권력추구를 위해서 쓰여지는 은사는 참된 은사가 아닙니다.
다. 성령의 열매
성령의 은사가 가져오는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이며(<갈 5:22-23>)이어야 합니다. 예언이나 방언 등의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고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오히려 공동체 안에서 서로 불화하게 하고 미워하게 만드는 사람의 성령의 은사는 열매맺지 못한 나무는 뽑히어 불에 던지우듯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거두어 가십니다. 성령의 은사는 은사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인내와 연단을 거쳐야 맺을 수 있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5. 죄란 무엇인가?
1) 죄의 개념
죄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자주 쓰이는 죄라는 개념은 '표적에서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지정된 길에서 이탈'하거나 '정당한 권위에 도전하는 것' 혹은 신실되지 않은 것을 죄라고 표현했습니다. 신약에서도 죄는 길에서 빗나가는 것, 목표를 맞추지 못하는 것의 의미로 많이 쓰였으며 또는 실수나 실책, 경건치 않음, 무법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용어들을 추적할 때 우리는 죄가 하나님께 대한 것(<롬 8:7>)이며,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요일 3:4; >요일5:7).
2) 죄의 특성
(1) 죄는 특별 악이다
악(Evil)은 천재지변이나 질병과 같이 비인위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나, 죄(Sin)는 인간이 직접 책임을 지고 정죄를 받아야 할 도덕적인 성향을 내포합니다.
(2) 죄는 절대적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선과 악의 중간 상태는 없다. 인간은 선의 편에 서지 않으면 악의 편에 서게 됩니다(<마 10: 32-33; ><눅 11:23; ><약 2:10>).
(3) 죄는 하나님의 의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죄가 외형적으로 사회적인 측면을 갖는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반항을 의미합니다.
(4) 죄는 죄책과 오염을 내포합니다
죄책은 죄를 지은 자의 책임, 즉 형벌을 의미하고(<롬 3:23; >롬5:12), 오염은 죄로 인한 마음의 부패를 가리킵니다.
(5) 죄의 자리는 마음입니다.
마음이란 지,정,의, 전 인격을 가리킨다. 따라서 전인(全人)에게 영향을 미칩니다(<마 15:19>).
(6) 죄는 외형적 행위만은 아닙니다
외부적 행동과 더불어 악한 생각이나 성향 역시 죄이다(<마 5:22,28; ><갈 5:24>).
3) 죄의 기원
선하신 하나님은 죄를 창조하지 않으셨지만, 그러나 현상 세계에 죄는 존재합니다. 성경은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에 인간이 어떻게 해서 죄인이 되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따르면 마귀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등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게 하는 교묘한 계획을 제안하고 유혹에 빠진 인간이 사단이 시킨 일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죄인이 되었습니다.
(1) 범죄의 상황적 요소
인간의 범죄와 타락은 아담의 불순종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외부 유혹에 굴복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2) 범죄의 책임
아담은 외부적 유혹을 자유 의지적 결단에 의하여 받아들여 하나님의 명령을 깨뜨렸으므로 그 책임은 전적으로 아담에게 있습니다.
4) 죄의 결과
죄로 인해서 뱀은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흙을 먹게 되며(<창 3:14>),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더하게 되었고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며(창3:16), 아담은 땅에 가시덤불이 나는 땅을 경작하는 수고를 하여야 식물을 먹고, 육체의 죽음을 맛보며,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다(<창 3:17-19,25>).
이러한 외적인 저주 외에도 중요한 결과가 나타났는데,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며 교제를 나누던 인간은 수치와 두려움으로 떨게 되고, 하나님과 그는 분리 단절되게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인 온 인류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후손 각 개인은 그 심령 전체가 부패하였고(부패의 전체성) 그 범위는 전 인류에 이른다(부패의 보편성), 따라서 전 인류는(<롬 3:10-12; ><시 14:2-3>) 전적으로 부패하여 영적 진리를 분별하였거나 영적 선을 행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창 6:5; ><렘 7:9,10; >렘3:3-15).
5) 죄의 구분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생긴 원죄(原罪)와 인간 각자가 범하는 자범죄(自犯罪)가 있습니다.
(1) 원죄와 자범죄의 구별
자손 대대로 유전되는 원죄와 각 개인의 내적, 외적 범죄인 자범죄는 다음과 같은 성격상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로운 상태를 앗아가게 한 원죄는 모든 자범죄의 원인입니다. 즉 원죄의 죄책과 오염이 본죄를 저지르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 원죄의 유무에 대하여는 논쟁이 많으나 자범죄는 모든 사람이 인정합니다.
㉢ 본죄는 각 개인의 의식적이며 자발적인 행동이므로 원죄보다 죄책이 더 무거워집니다.
㉣ 원죄는 하나이나 자범죄의 종류는 수없이 많습니다.
(2) 자범죄의 종류
죄는 그 종류에 따라 죄책의 크기가 달라집니다(<눅 12:47,48>). 성경에 묘사된 자범죄는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구분됩니다.
㉠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지은 죄 -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알고 범죄한 자는, 모르고 범죄한 자보다 더 큰 벌을 받습니다(<눅 12:47,48; ><롬 2:12>).
㉡ 과실죄와 고범죄 - 인간이 고의로 짓는 죄는 실수로 짓는 죄보다 죄책이 큽니다(<민 5:26-31>).
㉢ 용서받지 못할 죄 - 일반적인 모든 죄는 회개를 통하여 사함을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훼방한 죄는 용서의 방법까지 무시한 것이므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합니다(<마 12:31,32; ><요일 5:16>).
6) 죄의 치유책
전적 부패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즉 인간은 성부께서 주신 율법과 양심을 통하여 스스로의 죄를 깨닫고, 십자가를 통한 성자의 속죄 사역을 성령의 역사로 믿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도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죄책과 심판에서 놓임을 받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인정을 받습니다.
6. 구원이란 무엇인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관심사는 죽음과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역시, 사람들이 예수님께 던질 물음의 대부분이 구원에 관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대부분이 구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이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요, 둘째로 우리의 죄의 용서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습니다.
(1) 우리는 왜 구원받아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 죄로 더럽혀지고 훼손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죄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죄가 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둘째로, 우리는 죄의 값으로 인해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셋째로, 우리가 죽은 후에는 심판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2)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심판하실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을 다시 선하게 회복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란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완전히 "돌아선다"란 뜻입니다. 예수를 모르던 때 내가 행하던 악한 길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전에 내가 내 뜻대로 살아오던 나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삶의 목표가 나의 목적이나 욕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 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그러므로 너희가 돌이켜 회개하고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0-3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리라"(<요일 4:1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3)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때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첫째로, 당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와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둘째로, 당신의 모든 죄는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셋째로, 당신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넷째로,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다섯째로, 하나님께서 예배한 풍성한 새 삶이 시작됩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7. 믿음이란 무엇인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신앙이란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가 성경을 통해서 전해주신 계시를 진리로 받아들이며 영생의 삶을 위해 그분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입니다.
1) 믿음의 대상
첫째: 사람이 못 믿을 것은 믿어서는 안됩니다.
허무한 것을 믿거나 거짓된 것을 믿거나 허약한 것을 믿는다면 그는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요, 결국은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하셨습니다. 성삼위 하나님 외에는 모두 참되지도 못하고, 영원하지도 못하며, 완전하지도 못합니다. 인간이 자기보다 못한 만물을 의지하거나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 이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외에 그 무엇도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출처
믿음은 사람이 자기 마음으로 만들어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으로 마련되거나 연구하여 가지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첫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엡 2:8>)
가장 귀한 선물로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미리 택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성경말씀과 성령의 감동으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과 성령의 감동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믿음을 주십니다(<롬 10:17; ><고전 12:9>). 성경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 주시며 밝게 하여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는데, 이때 믿음까지 주시는 것입니다.
2) 믿음의 실제
믿음은 대상을 생각만 하는 것이나, 대상에 대한 관념만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나와 믿음의 대상(하나님)과 같은 관계가 맺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믿음은 먼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둘째: 그 다음은 자신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를 위탁하는 일로 연합하여 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계 30:20; ><요 17:21>).
나무의 접목원리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께 접붙여 짐으로서 그의 생명을 얻게되고 의를 얻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유익
다른 것으로 얻지 못하는 최고의 귀한 것을 얻게 됩니다.
① 죄 사함을 얻습니다(<행 10:43>).
②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습니다(<롬 3:22,28,30>).
③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얻습니다(<갈 3:26>).
④ 구원을 얻습니다(<막 16:16>).
⑤ 성령의 은사를 받습니다(<갈 4:14; ><엡 1:13>).
⑥ 영생을 얻습니다(<요 3:36; >요5:24).
⑦ 천국의 안식을 얻습니다(<히 4:3; ><요 14:1-3>).
4) 믿음의 표준
자기 뜻대로 믿거나,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대로 믿어야합니다(요한복음 20:31). 디모데후서 3:15에서는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환상이나, 계시를 보고들은 것, 또는 사람의 말이 믿음을 좌우해서는 안되며, 모든 믿음에 있어서 표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어야 합니다.
8.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는 죄의 길을 걸어가던 사람이 돌이켜서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의와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회개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그 결과 그들에게 임한 고통 속에서 그들의 죄악을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죄를 깨닫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외적인 애통과 생활방식의 변화보다 먼저 바꾸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실제적인 심령의 변화와 하나님을 진실하게 찾는 것(<신 4:29-30>)이라고 했습니다. 회개에 대한 요청은 사도들의 복음전파의 특징으로(<행 2:38; >행8:22), 죄로부터의 돌이킴과 하나님께로의 돌아섬이라고 하는 이중적인 변화가 요청되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거룩함이 그들의 모든 재능과 생활 원리와, 행동면에까지 배어 있게 마련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요, 새로운 피조물이니, 모든 것이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고후 5:17>). 회개는 심령을 고치는 사역, 곧 새로운 세계에 적합한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일며, 그것은 전 인격 곧 전 마음과 모든 지체, 전 생활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역입니다.
1) 회개의 특징
(1) 칭의는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신분의 변화이지만, 회개는 심령 내부를 변화시키는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2) 회개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인간은 회개조차 할 수 없습니다.
(3) 회개는 세상의 죄악을 떠나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지향하는, 근본적인 방향의 전환을 가져옵니다.
(4) 원칙적으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옮겨지는 회개는 일회적인 사건이지만(단회적인 회개), 완전히 성화되지 않은 삶으로 말미암아 짓게 되는 크고 작은 죄를 그때 그때마다 돌이킬 때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반복적 회개).
2)회개의 결과
(1) 회개는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전에는 죄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이제는 자기가 죄인의 괴수임을 깨닫게 되고, 죄를 무서워하고 싫어하고, 공포를 느끼며, 죄로부터 도망하고, 심지어는 죄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마저 혐오하게 됩니다(<롬 7:15; ><겔 36:31>).
자기 속에 죄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여 고백할 것이 없다고 하던 사람이 이제 자기 마음이 썩을 대로 썩어 있다는 사실과 자기의 전(全) 성품이 치명적으로 뿌리까지 타락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우슬초로 나를 씻기소서 나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소서"라고 울부짖게 됩니다(<시 14:3>).
(2) 회개는 자기 주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은 사람은 이제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성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속박과 형벌로부터 해방 시키는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마음속에 염원하게 되며, 그가 지향하는 목표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높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결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편으로 삼게 됩니다.
단순히 격렬한 감정이나 형식적으로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오며, 스스로 그리스도를 가장 귀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가 이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보다는 그리스도를 선택하게 됩니다(<빌 1:23>).
9. 중생이란 무엇인가?
성경에 따르면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가 너무나도 커서 중생 혹은 거듭나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5-8>).
그러나 중생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그러나 원한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거듭날 수는 없습니다. 중생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중생을 체험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며, 지금까지의 죄된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성 그 자체는 바뀌지 않지만 성령의 인도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성령을 받아 온유, 사랑, 겸손, 희락 등의 열매를 맺고 살게 됩니다.
1) 중생의 의미
(1) 중생은 다시 한번 태어나는 것입니다(<요 3:3>).
중생이란 우리의 생활과 습관이 새로워지고(<엡 4:22; ><골 3:5-8>), 하나님을 따라 진리 안에서 변화되어야 하며(<엡 4:24; ><딛 3:4-5>),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새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요 3:5; ><고후 5:17>)을 의미합니다.
(2) 중생은 위로부터 나는 것입니다(<요 8:23>).
위에서 난자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밖에 없습니다(<요 3:13>).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요 1:12; ><갈 3:26>). 하나님이 아들이면 하나님의 유업을 받습니다(<요 3:5; ><고전 15:50; ><갈 3:29>).
어떤 수단에 의해서 중생을 하게 되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벧전 1:23>과 <약 1:18>은 하나님의 말씀이 중생에 이르게 하다고 하는가 하면, <딛 3:5>은 세례를 받는 사람은 중생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세례 이전에도 중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행 10:44-45; >행16:14-15). 그의 주장처럼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도 전에 그에게 환상으로 보여진 예수를 통해 단번에 중생을 체험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집사였던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일에 가담한 후 다메섹에 숨어 있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 길을 그는 그 자리에서 거듭나 박해하던 자가 오히려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까지도 사울(큰 자라는 뜻)에서 바울(작은 자, 지극히 보잘것없는 자라는 뜻)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중생을 체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완전한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거듭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지으려고 하는 욕구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으로 통해 이제 막 기독교인으로 새롭게 탄생한 모든 성도는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여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일과 성경말씀을 읽는 일,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일에 부지런하고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님과 교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점함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영적인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10. 칭의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므로(<욥 9:2; ><전 7:20; >로마서 3:10)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영생할 수 없고 영원히 죄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게 하심으로써 그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물론 사람이 완전히 죄가 하나도 없는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아직도 죄인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만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으며 죄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1) 칭의의 성질
죄의 두 가지 결과인 죄책과 오염 가운데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하여 죄책(형벌)으로부터 벗어나 의롭다 선언함을 받은 성도의 칭의에는 아래와 같은 성질이 있습니다.
(1) 칭의는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결과입니다(<롬 3:20-24; ><갈 2:16; >빌3:9).
(2) 중생이 죽은 심령에서 소생되는 상태의 변화라 한다면, 칭의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되는 법적 지위의 바뀜입니다.
(3) 칭의는 실질적으로 죄를 짓고 있으나 의인으로 간주한다는 하나님의 선언적인 행위입니다.
(4) 하나님은 칭의의 근거로서 그리스도를 대 속물로 설정하시고 그의 의를 성도에게 전가(轉嫁)시키셨습니다(<롬 5:18-19>).
(5) 칭의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즉각적으로 완성됩니다.
(6) 성도를 성화시키는 분은 성령이나,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2) 칭의의 요소
의로운 심판장이신 하나님의 재판석 앞에서 이루어지는 칭의(<롬 3:20; ><갈 3:11>)와 인간의 마음에 느껴지는 칭의는 두 요소를 갖습니다.
(1) 소극적 요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인으로 인정받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롬 5:21; ><롬8:1,32-34; ><히 10:14>).
(2) 적극적 요소
칭의로 인하여 하나님은 성도를 자녀로 삼으시며(<요 1:12; ><롬 8:15-16; ><갈 4:5-6>), 영생하는 특권을 주십니다(<벧전 1:4>).
구약시대에 인간은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일점일획도 변할 수 없는 그 많은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은 결코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율법은 다만 우리가 이런 죄 혹은 저런 죄를 지었음을 깨닫게 해 줄 뿐입니다(<롬 3:20; >롬4:5).
이에 하나님은 인간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육신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속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하나님을 만족케 하시고 인간은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의인(義認)혹은 칭의(稱義)라고 합니다.
11. 성화란 무엇인가?
구약에서 말하는 성화가 '분리,'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 혹은 인간과는 전적으로 분리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뜻한다면 신약에서의 성화는 성령님을 통해 주어지는 내적 변화입니다. 바울은 성화를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신분상의 변화(고린도전서 1:2)이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사람의 도덕적, 영적 변화의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1) 성화의 내용
성도가 거룩해지는 것은 원칙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가능합니다(<빌 1:6; ><살전 5:23>). 그러나 이는 중생처럼 성령이 단독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인간과 협력하여 이루어집니다(<롬 12:9,16-17; ><갈 6:7-8,15>). 또한 이는 죄의 오염에서 해방되는 것이며(<롬 6:17-18>) 점진적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즉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엡 4:24; ><골 3:9-10>).
2) 성화의 특징
(1) 성화는 소극적으로 인간의 죄악된 성향을 제거하는 것이고(<갈 2:20; >갈5:24), 적극적으로는 거룩하여져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롬 6:11>).
(2) 성화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 그리고 지,정,의가 포함된 인간의 전인격에게 영향을 미칩니다(<고전 6:20; ><살전 5:23>).
(3) 성화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은 죄와의 치열한 싸움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적극적인 노력 없이 죄와 악과의 전투에서 승리로 이끌지는 않습니다.
(4) 성화는 현세에 완성되지 않지만(요한일서 1:8),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까지 완전에 이를 수 있습니다.
3) 성화의 수단
(1)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완전함에 이르는지를 알려줄(거룩한 생활의 객관적 표준)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심령을 변화시키는 영적 수단입니다(<딤전 3:16>).
(2) 성례
하나님 말씀의 가시적인 상징인 성례전에 참여하는 것은 성화에 도움을 줍니다.
(3) 기도와 묵상
하나님과 끊임없는 대화와 교제를 통하여 거룩함을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요 14:22>).
1) 안식에 대하여
'안식'은 히브리어로는 '샤바트'라고 하는데 '정지, 멈춤, 휴식'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마치신 후 쉬신 것(<창 1:1-2:3>)에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까지 창조사역을 모두 마치시고 일곱째 날은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으며, 안식하셨습니다. 이후에 창세기에는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칠 일이라는 표현은 홍수이야기(<창 7:4,10>)와 관련하여 몇 번 언급되고 있으며, 야곱이 하란에서 살 때 한번 언급(<창 29:27-28>)되었습니다.
이후 <출 16:21-30>절에서 언급되기 전까지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하기 전에 신광야에서 유랑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는데, 매일 각 사람 당 한 오멜씩 취하되 다음날까지 먹지 않고 나누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낫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6일에는 각 사람이 이틀 분량의 만나를 거두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외에 이틀 분의 만나를 거두게 되면 만나에 벌레가 생기기도 하였으나 안식일에는 그 전 날 거둔 만나에 벌레가 생기지 않았던 신비스러운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안식일을 철저히 지켜서 안식일만큼은 불도 피우지 않았습니다. 또한 실제로 안식일을 범하여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잡힌 사람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도 이루어지는 신성한 봉사와 일이 있었는데 레위지파 중 고핫자손은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을 위하여 진설병을 준비하였으며, 제사장들은 안식일의 번제물 즉 일년 되고 흠없는 수양들과 그 외의 소제물과 전제물을 준비하여 안식일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2) 올바른 안식일 준수
안식일은 자신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노예들을 규칙적으로 쉬게 하는,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자비로운 제도(<신 5:14 >이하)였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민 15:32 >이하). 그러나 이 같은 명령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은 온전히 지켜지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의미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변질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지키도록 명한 안식일이 사람에게는 짐이 되어 버렸고 오히려 안식일에는 더 많은 죄가 범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자신들의 일에 방해되는 날로 생각하여 무겁고 부담스러운 짐과 같이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 의해 안식일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가증스럽고 부담스러운 날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안식일은 단지 지켜지기에 급급한 날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신 하나님께서는 변질된 안식일뿐 아니라 모든 명절까지도 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이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후 느헤미야는 안식일에 장사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습니다.(<느 10:31; ><느 13:15 >이하)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올바로 준수하기 위한 법을 더욱 발전시켰음을 우리는 신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알기 위한 방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안식일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형식적으로 지켜지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사람과 만물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는 날인 안식을 본래의 정신을 깨우쳐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거나 일을 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영적 사정을 깨닫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를 안식일을 범하는 이단자로 규정하였고 실제로 예수님을 살해하고자 하는 동기도 안식일을 범한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에도 쉬임 없이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며 일하셨는데 38년된 병자, 나면서 소경된 자, 18 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진 여자, 고창병 든 자, 손 마른 자를 고치셨습니다.
수십년 동안 시달리던 병마에서 놓임을 당하는 병자들을 보고도 오직 안식일을 범하는 것만을 문제삼은 유대인들의 경직된 모습을 일깨워 주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예수 자신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 즉 그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할 때에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안식일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에게는 안식일의 의미가 단순히 지키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날만이 안식일이 아니라 모든 날이 안식일이며 주일이 됩니다.
4) 주일에 대하여
안식일은 일주일의 마지막 날, 7일로서 우주완성의 날을 의미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저녁 6시까지입니다. 이에 비하여 주일은 안식일의 다음날인 8일째의 날로서 구원 완성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 날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는 지상 최후의 안식일을 돌로 막은 무덤 속에서 종결지으시고, 제8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새 날, 주일을 제창하신 것입니다.
주일이 제 7일에서 제 8일, 즉 일주일의 첫째 날로 지켜지게 된 역사적 배경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그들의 지도 아래 있는 1세기의 교회가 그리스도가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이면서부터 기원됐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부활하신 바로 그날 저녁에 예배드리기 위하여 다락방에 모였으며, 오순절 성령강림 때도 안식일 이튿날 모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주일 첫날에 모여 성찬을 나누었고, 밧모섬으로 유배됐던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은 날도 이날입니다. 그래서 이날을 '주의 날'이라 합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지키는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 대신 새로 제정된 중의 날입니다.
안식일이 '지키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양육과정이었다면, 주일도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참 의미와 참 목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의 본질을 간과한 채 지켜오다가 결국 안식일의 의미가 변질된 것같이 오늘날의 그리스도 인들도 주일을 지키는 것에만 급급하면 주일의 본래적 의미도 퇴색하게 됩니다.
안식일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적 그림자라면, 주일은 다시 오시는 주님에 대한 신약적 그림자입니다.
1) 십계명이란?
십계명은 히브리말에 의하면, 본래 열 가지 낱말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입니다. 율법의 가장 표준이 되는, 곧 신앙과 도덕 생활에 가장 근본적이고 표준적인 교훈입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 설명하고, 그에 대한 인간이 취해야 할 근본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도덕적 계명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 십계명의 구성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처음 네 계명과, 인간 관계를 취급한 나중의 여섯 계명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유대인들은 이 십계명을 다음과 같이 둘로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 (1)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2)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6-39>)."
(1) Table(첫째 비석)
가. 다른 신들 (other gods)
나. 다른 형상들(Images)
다. 하나님의 이름(The name of God)
라. 안식일(The Sabbath)
마. 부모(parents)
(2) Table(둘째 비석)
가. 살인(Murder)
나. 간음(Adultery)
다. 도적질(Steel)
라. 거짓증거
마. 탐심(Covitiny)
십계명은 두 돌판 양쪽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한 번은 백성들의 죄로 인해 화가 난 모세가 그들을 향해 던짐으로써 깨어져서 하나님께서 재기록 하셔서 다시 전달해주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돌판은 모세의 형인 아론이 가지고 있던 싹이 난 지팡이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랑할 때 먹었던 하나님이 내려 주신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함께 법궤, 혹은 언약궤라고 불리며, 이스라엘백성이 어디를 가든지 항상 맨 앞에서 모시고 다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 지은 성전에 넣어두었다가 읽어버린 하나님의 궤 안에 있었다고 합니다.
3) 십계명의 명칭
성경에 "십계명"이란 명칭은 별로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십계명"을 "증거판"(<출 32:15-16; ><신 4:15;><신29:10; ><고후 3:3>).또 "증거 법판"(<출 31:18>)이라고도 했으며, "두 돌비"라고도 한 곳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십계명이란 명칭은 제17세기(A.D)에 웃서(Ussher) 대감독이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계명이란 뜻은 가장 보편적인 말로 "명령, 지휘, 그리고 뜻대로 한다"(Commend)는 뜻과 "계명"(Commandment)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잇습니다. 계명은 하나님이나 또는 사람의 법적 명령(Order)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마음대로 지키거나 지키지 않는 절대명령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에서 나오는 계명이라는 말은 금령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명령에 "....하라"는 명령만 아니라"....하지 말라"는 금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긍정적인 것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 같이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과 금령을 함의한 단어가 구약에 약 164회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4) 십계명의 내용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진리의 4계명까지인데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인간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함은 후반의 6계명들입니다. 인간과의 관계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의 근거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실천자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그 계명의 완성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함에 근거를 둔 자입니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곧 계명의 완성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자이심으로 성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율법을 지키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제1계명,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것이 첫 번째 계명으로, 그 순서로서만이 아니라 중요성에 있어서도 첫 번째입니다. 만일 이 계명에 불복하면 다른 것에는 복종할 수도 없게 됩니다. 이 계명의 열쇠는 "나 외에는"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첫 번째 분이셨고 오직 하나님께만 그들이 예배드려야 했습니다. 이 훈계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사단에게 유혹을 받을 때에 하신 말씀으로 거듭되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집착하고 의지하려 드는 것이 바로 신"이라고 말하며,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우상이라고 합니다. 금송아지에 절하지는 않으나, 황금을 경배하고, 바알의 우상에는 절하지 않으나 일만 원권 지폐에는 몸을 굽히는 것은 바로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우리 앞에 두는 것"이 아닌지요. 삶에는 많은 좋은 것이 있으나 그것이 하나님은 될 수 없습니다. 오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에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6>).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어떤 모양에도 절하거나, 또 마음으로 위해서는 안됩니다. 칼빈(John Calvin)은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진실한 하나님이심을 첫째 계명에 선언한 후에 그는 다만 홀로 경배 받으실 분이심과 또 그는 그에게 드릴 합법한 예배를 정의하여 명령했다"고 했습니다.
종교적 예배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어떤 것 앞에서도 절을 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나, 성모 마리아상, 성인의 동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경배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형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흐리게 하며, 형상 숭배는 곧 하나님을 물질 안에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시 115:4-8>에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고 했습니다.
제3계명,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히 하라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과 하나님 자체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아무 때나 불러서는 안됩니다. 이 명령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다만 '아도나이'(주님)이라고 부름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가, '여호와'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에 가깝다는 성서학자들의 오랜 연구결과에 따라 여호와를 이름이라고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필요 없이 무의미하게(가치 없게) 그리고 쓸데없이 거칠고, 무법하게 사용함을 금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함부로 맹세해서도 안됩니다.
허위와 거짓 말에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든지, 저주, 마법과 요술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은 기원, 기도, 찬양과 감사와 예배에만, 또 거룩한 믿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것은 신성모독이 됩니다.
우리의 이름이 우리들 자신에게 중요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은 그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망령되이"라는 뜻은 경망되며 불경건한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서 경망된 욕설과 저주가 그 예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창조의 역사가 일곱째 날에 그친 후에 하나님은 복을 주었고 창조한 세계를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안식"이라는 말은 휴식을 뜻하므로 그 날은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날을 완전히 하나님께 예배만을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골 2:14-17>에는 아무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는 까닭은 이는 폐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까닭이라고 설명되었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제 칠일이 아닌 주일의 첫날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으니, 이는 이 날 제자들이 주의 만찬을 떼려 모였으며 하나님과 예배하려고 모였던 까닭입니다(<행 20:7; ><고전 16:1-2>). 이 날은 "주의 날"이라고 계 1:10에서 묘사되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을 따른다면 예배만을 위한 쉬는 날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식"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천국에 있는 것이며, 노동으로부터 해방됨을 뜻합니다(<계 14:13>).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계명은 가정을 지키고자 계획된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에서의 인간관계를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가정이야말로 사회의 주춧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에는 지키는 자에게 주어질 보상이 덧붙여져 잇습니다. 즉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땅에서 오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신약에서 반복되었으며 그 의미는 확대되었는데, 바울은 <엡 6:1-3>에서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게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
인류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윤리의 근본이요. 하나님의 절대법입니다. 그 이유는 생명의 창조와 관리자는 인간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만이 좌우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허락의 한계 내에서 사람이 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출 19:12-21:12>). 그뿐 아니라 사탄도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해할 수가 없습니다(<욥 2:6>).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요, 그에 의하여 좌우됩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그 생명을 좌우하고 손상시킬 때에 그것은 죄가 되고,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가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육신적으로 생명을 해하는 행위를 넘어서, 정신적으로 살인하는 것에 대해서 지적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성의 바른 사용을 위해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결혼은 인류에게 주어진 최초의 선물들 중의 하나이요. 그것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이 "간음이란 히브리어는 나압인데 레위기 20장 10절에 보면 남자와 여자에게 적용이 되어 있습니다. 한 남편이 다른 남자의 아내와 성적인 교통을 한다든지, 또는 한 사람의 아내가 다른 여자의 남편과 성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의하면 이것은 남자나 또는 여자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양자에게 다 적용이 됩니다. 이 죄를 범했을 때 사형입니다(<레 20:10>). 또 미혼 남자가 유부녀와 성교했다든지, 또 미혼 여자가 아내가 있는 남자와의 성교에도 적용되는 죄입니다. 그도 사형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그의 백성은 그 하나님에 의하여 거룩한 법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고, 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이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청결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윤리적인 면만 아니라 또 종교적인 면에서 청결을 도모하고, 사랑의 결합과 통일을 도모하여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법질서를 잘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영광을 땅 위에 나타내어야 한다. 계명에 의하면 간음은 자기의 몸과 가정에 대하여 범죄함이며, 사람의 인격만 아니라 사회에 대하여 범죄함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외쳐 말하기를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그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고 했다(<창 39:8-9>). 또 다윗이 밧세바에게 범죄 했을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했다(<시 51:4>).
이 계명은 혼인 관계를 위한 것입니다. "간음"이란 모든 부정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여기서는 기혼자나 미혼자가 모두 해당됩니다.
이 계명은 신약에서 다음과 같이 그 의의가 확대되었습니다.
(1) 육체적인 간음: 십계명에서 의미하는 것과 같은 종류.
(2) 정신적인 간음: 예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음욕을 품는 것마저도 금하셨으니 :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3) 합법화된 간음 : 한 번이나 혹은 그 이상 이혼한 사람(성서적으로 인정되지 않는)과 결혼하는 것으로써,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9>)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합법화한 간음을 해서는 안되는 것인데, 이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
이 계명은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도둑이 훔친 물건의 몇 배를 돌려주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이 계명은 신약성서에서 반복되었습니다(<롬 13:9>).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고 하셨으며, <엡 4:28>에서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함으로써 소극적 의미에서 훔치지 않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주기 위해서 일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9계명, 거짓 증거하지 말라.
사람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없고 자신의 허물과 죄를 알지 못하고 정직성을 상실한 때문입니다. <요 8:44>절에 보면,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모든 '거짓의 아비'라고 되어있습니다. <요 14:6>절에는, 그리스도는 진리라고 했다. 그래서 역사를 통하여 계속되는 투쟁은 그리스도 대 사단, 즉 진리 대 거짓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내면적 성품을 드러내 보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완전히 의로우셨기 때문에,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은 의로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을 때 그를 판단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말에 의하여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우리의 언어가 진실하고, 순수하고, 깨끗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이 얼마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계명은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기 위한 것입니다. 좋은 평판은 한 사람의 가장 가치 있는 재산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잠 22:1>)
<롬 13:9>에는 여기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 증거"하게 되는 일이 여러 가지 있으니 법정에서의 위증, 소문을 말하는 것, 중상 모략, 거짓 진술,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 등입니다. 베드로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벧전 3:10>)라고 하여 그리스도인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진리를 외쳐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10계명, 탐심을 물리쳐라
각자의 탐욕을 경계한 것이니, 탐심은 이미 언급한 여러 죄의 근원이 되는 까닭입니다. 구약에서는 타인 소유의 물건에 대한 불법적인 욕심을 뜻했으며, 특이한 점은 이 계명만이 행위 자체뿐 아니라, 그러한 마음까지도 규제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계명도 역시 롬 13:9에 수록되었고 지금까지도 이 탐욕의 문제는 심각한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탐욕"의 뜻이 사물- 특히 물질적인 것에 대한 불법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구약성서의 십계명이 타인의 소유를 탐내는 데 대해 언급하는데 반해서 신약성서에서는 자신의 것에 대해서도 지나친 욕심을 갖지 말도록 훈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 와서 유업을 정당하게 나눠 갖게 해 달라고 청했을 때 "삼가 내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리라"(<눅 12:15>)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탐하는 자도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엡 5:5; ><고전 6:9>).
헌신이란 우리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말하며, 봉사는 종(노예)의 신분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받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신과 봉사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기 위해 우리의 귀중한 것들, 즉 마음과 시간과 몸과, 물질 등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1) 헌신과 봉사의 이유
(1)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정성으로 우리에게 있는 귀한 것을 바치며 그 뜻대로 일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자신의 골로나 아니면 돈으로 샀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거나 사람들을 섬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성도들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고전 6:19-20>). 왜냐하면 멸망 받을 우리를 예수께서 생명을 버리시고 피값으로 사서 구원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라 주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2) 예수님께서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기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고 한 대로 인간이 되신 것도 부족하여, 사람의 섬김을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람들의 발을 씻기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는 희생의 삶을 사셨습니다.
(3) 교회는 성도들의 헌신과 봉사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저절로 커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의 헌신과 봉사를 통해 성장합니다. 헌신과 봉사가 없이 서로 섬기기만 요구하고 영광 받기만을 바란다면 교회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순교자의 피를 통해 교회가 오늘날처럼 성장한 것처럼, 교회와 이웃과 사회를 섬기는 성도들의 희생 없이 교회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없고 하나님 나라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2) 헌신과 봉사의 자세
(1) 주어진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 일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 영광스러운 일도 있고,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거나 아무리 해도 빛이 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주어지든 기쁜 마음으로 하지 않고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은 헌신과 봉사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어떤 일이든 마르다나 마리아가 주님을 섬기듯 기쁜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2)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온유함이 세상에 능할 자가 없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겸손하고 온유한 모세나,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처럼 겸손하게 일해야 합니다. 때로 일은 많이 하면서도 교만하거나 불만이 많아서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일을 하고도 대문짝 만하게 광고하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헌신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는가 하면, 사람의 칭송을 받은 사람은 내세에서 받은 상급을 금생에서 이미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은밀하게 하는 선행은 하나님이 갚아 주리라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4) 자신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해야 합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각자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교회를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고 하였습니다.
(5)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시험에 들어 그만두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욕에 치우치기 쉽고 분쟁과 멸시하는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을 면류관을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그리스도를 향해 달리는 마음으로 끝까지 충성하는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6) 함께 해야 합니다.
교회의 일이 어느 한 사람이나 소수의 몇 사람만이 독차지하듯, 해서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며 또한 본인도 부담감 때문에 교회생활 자체가 피곤해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일은 거룩하고 복된 날이지 지나치게 많은 일로 인해서 피곤하고 지쳐 다음날까지도 지장을 주는 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될 수 있는 한 여러 사람이 분담해서 함께 주의 일에 참여하고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3) 헌신과 봉사의 보상
(1) 구하지 않은 것까지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처럼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고 대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33>). 그리하면 하나님은 구하지 않은 모든 것까지 더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되고, 하나님의 정의가 땅끝까지 펼쳐질 수 있도록 헌신하는 것뿐입니다.
(2)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다.
겸손과 인내로 자기에게 주어진 헌신과 봉사를 다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신령의 복을 주시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신과 봉사는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하늘의 상급이 주어져 있는 특권을 얻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끌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는 "당신이 예언자의 일을 하려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홀이 아니라 괭이와 삽"이라고 하였습니다. 유월절 잔치 자리에 모인 제자들은 그들을 발이 누군가의 손에 씻겨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일은 그 중에 제일 낮은 자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제일 낮은 자가가 되기는 싫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그 낮은 자가 되기로 자청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를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씻겨 주었습니다. 섬김이 무엇인지를 먼저 행동으로 보이신 후에 예수께서는 섬김의 도를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섬긴다는 것은 지배서열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나 요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 섬김의 동기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선한 행위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악한 동기에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선을 행하고 구제하는 동기는 많은 경우에 그들의 공적을 쌓아 하늘에서 보상을 받고 영생을 얻으려는 동기에서 나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의 섬김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섬김의 동기를 비판하셨습니다.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해서 섬기는 것은 인간, 혹은 하나님의 칭찬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결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섬김을 받은 사람으로부터의 보답-눈에 보이는 것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든-이 돌아오기를 열망합니다. 그러한 섬김은 기분과 마음의 지배를 받아, 섬길 기분이 내켜야 섬기고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즉시 그만둡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섬김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내세우기 위한 섬김은 비록 선한 일을 하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 공동체를 파괴하고 깨어지게 합니다.
반면에 진정한 섬김은 내부 깊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찬사를 요구하거나 관심을 기대하지 않는다. 참된 섬김은 섬김 자체에서 기쁨을 얻기 때문에 기분에 좌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서로를 끌어주고 싸매어 주며 치료해주기 때문에 공동체를 더욱 튼튼하게 만듭니다.
2) 섬김과 겸손
겸손의 미덕은 섬김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겸손은 우리가 추구할 수록 더욱 얻기 힘든 미덕 중 하나이입니다. 겸손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겸손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헌신할 때 우리의 심령은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겸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자랑과 교만을 십자가에 못박게 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육신의 욕망을 쳐서 훈련하는 섬김의 과정으로 말미암아 겸손은 부지중에 우리를 찾아오며 우리는 겸손해졌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겸손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3) 섬김의 속성
제레미 테일러는 "묻히기를 사랑하라. 그리고 존경받는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말라. 칭찬이 없어도 만족하고, 업신여김을 받을지라도 괴로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그 섬김을 드러내지 않는 데에 그 가치가 있습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과 섬기는 사람만이 알고 행해지는 섬김이 진정한 것이다. 예수께서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구제할 때도 은밀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알도록 공개적으로 드러낸 구제와 자선은 섬김이 아닙니다.
섬김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없습니다. 사소한 것이든 중대한 것이든 누군가를 섬기고 그를 위해서 도움을 주었다면 그 섬김은 다만 진정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기는 것은 그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서로 돕고 도움을 받아야 할 사소한 문제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소한 일이라 돕지 않는 사람은 큰 일도 돕지 않는다. 큰 섬김이든 작은 섬김이든 날마다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섬김은 다른 사람이 나를 섬기는 것에 대한 용납의 속성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섬기게 허락하는 것은 복종과 섬김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지 말고 그러한 봉사를 은혜로 알고 받아야 합니다. 교만 때문에 섬김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는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을 때 가장 온전하게 성취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들의 슬픔의 짐을 알게 되고 함께 그 짐을 지게 될 것입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란 죄 가운데서 고통스럽게 살며, 죽어가고 있는 영혼을 구하는 일로 그 어느 것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그리스도를 미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보편적인 의무이자, 사명입니다.
1) 전도가 중요한 이유
(1) 예수님께서 내리신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 28:19은 예수님이 지상에 남기신 최후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땅끝까지..." 그러므로 전도는 예수님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이며, 믿는 자라면 누구나 참여해야 할 기업입니다.
(2)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세상에 나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는 외침전도를 시작으로, 제자들과 함께 사신 공생애 3년은 온 이스라엘을 두루 돌아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백성 중에서 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신 것이 전체였습니다. 그의 제자들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중의 사도인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리스도가 남기신 이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벗어나 소아시아와 지중해 지역에서의 전도를 위해 위험한 뱃길을 마다하고 세 차례나 전도여행을 다니다가 끝내 로마감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당했다고 교회의 전승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3) 믿는 자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열매는 전도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베어 버린다고 하셨습니다(막 11:12-14). 그러므로 포도나무가 해마다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2) 전도의 방법
(1) 신자로서의 삶을 통한 전도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에 비해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듣기 좋은 말이라고 해도 행동이 그에 비치지 못한다면 감동을 줄 수 없고 그러므로 그들은 마음 문을 열지 않게 됩니다. 믿는 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확신을 줄 때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보다 쉽게 그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2) 헌신의 삶을 통한 전도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흠잡을 수 없이 깨끗하고 바른 삶을 산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교회밖에 있는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외면한다면 이는 믿지 않는 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길지 않은 33년의 삶을 믿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살다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병자를 찾아 위로하고, 외로운 자를 가까이 하고, 천대, 멸시받는 자의 친구가 되어 주고,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고, 어렵고 큰일을 만난 자에게 도움을 줄 때 그들은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3) 말씀전파
사도 바울은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는 오로지 씨를 뿌리는 것일 뿐 직접 물을 주시고 기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아무 염려 말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2) 전도의 방법
① 먼저 전도할 대상자를 선정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든 먼데 있는 사람이든 일단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을 전도대상자로 삼습니다.
② 전도대상자가 복음이나 기독교, 기독교인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그리고 복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로 준비합니다.
③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회가 온 것 같은 순간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교리를 설명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간증)이 좋습니다.
④ 교회로 초대합니다.
⑤ 한번에 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며 지속적으로 기도합니다.
⑥ 전도대상자가 교회에 나온 경우, 그가 원한다면 먼저 담임목사님이나 그 밖의 교역자들에게 소개하고, 예배 시간에 인사하도록 이야기해줍니다. 원하지 않는다면 조용히 예배에만 참석하고 돌아가도록 합니다.
⑦ 전도대상자가 교회를 한번 방문하는 것으로 전도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목자가 양을 치는 심정으로 그가 교회 안에서 쉽게 뿌리를 내리고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돌봐야 합니다.
3. 전도의 내용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할 정도로 세상(우리)을 사랑하는 분이심을 믿게 하고, 그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뿐이라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역시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분이심을 전하고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에서 사함 받고 자유를 누리며 구원을 얻게 된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들이 전한 소식이고, 성경과 그 사실을 믿고 있는 선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힘써 증거되고 있는 진리입니다.
금식이란 종교적, 영적 목적으로 일정기간 음식을 금하는 것으로 회개할 때(삼상 7:6), 탄원할 때(삼하 12:16), 슬픔을 표시할 때(삼상 31:13) 행합니다. 금식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향해지는 단식 투쟁이나 건강을 위한 식이요법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육체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 금식의 종류
성경에 나타난 일반적인 금식은 모든 음식을 금하지만 그러나 물은 금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때로 부분적인 금식도 했습니다(단 10:3). 또 성경에는 음식과 물을 모두 다 금하는 사례도 보여 주는데 이는 어떤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학살이 눈앞에 있을 때 정복국가의 왕비가 된 에스더는 그의 시녀와 함께 3일 동안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았습니다(에 4:16). 또 이스라엘은 민족 전체가 금식하기도 했습니다.
7월 10일인 속죄일에 당연히 금식하며 죄를 자백하고 몸을 괴롭게 하였다. 이후 이스라엘은 금식일을 일 년에 네 번으로 늘였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이 함락한 4월 9일, 성전이 파괴된 5월 9일, 유대의 총독이었던 그다랴가 살해된 7월 2일, 그리고 예루살렘이 포위된 10월 10일이었다. 정통 유대인들은 이중에서 5월 6일의 금식일을 오늘날까지도 지키고 있습니다. 유다가 침략을 받았을 때 여호사밧 왕은 백성에게 금식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대하 20:10). 요나가 심판을 선포하자 짐승을 포함하여 니느웨 성 전체가 금식하였습니다(욘 3:6-9).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주 2회 금식일로 지켰습니다. 1756년 영국의 국왕은 프랑스의 침략 위협을 받고 금식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초기 감리교 신자들에게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2) 금식의 목적
예수께서 금식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금식이 좋다거나 아니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의 동기에 관한 것입니다. 금식은 오로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금식과 주를 섬기는 일은 동시적인 일이 되어야 합니다(행 13:2).
금식은 그리스도가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그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자 예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고 하셨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을 때, 그때는 금식할 때가 아니라 잔치할 때였다. 그러나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지금은 금식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악은 선보다 훨씬 더 매혹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악의 유혹에 넘어가며, 악을 행하기는 쉬워도 선을 따라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중에는 더 큰 유혹과 더 많은 시험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악이 선을 질투하며,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뜨리려고 늘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시험에 대해 잘 알고 이에 믿음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이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1) 시험의 종류
(1) 신앙을 잃게 하려는 시험
시험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성도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마귀의 시험이 있고, 성도를 연단 시켜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시험이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이란, 사람의 약점을 폭로하거나 잘못을 범하도록 올가미를 놓는 악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마귀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 가는 성도들을 공격하는 일입니다. 이는 마귀가,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에는 자기의 조종 아래 있던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자기를 떠나가게 되니까 이를 훼방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로 하여금 범죄케 하고 타락시켜,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믿음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를 멸망시키는 것, 선을 멸하는 것이 마귀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목적으로 행해지는 마귀의 시험 중 대표적인 바로 구약의 욥기에 나오는 시험입니다. 마귀는 동방의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널리 알려진 욥을 시험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는 말을 하게 하려고 온갖 재앙을 가져다줍니다. 욥은 아무 잘못도 없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그 많던 아들딸들이 횡사하고 마침내 자신의 몸에 병까지 앓게 됩니다. 그러나 욥은 그 시험에서 패배하지 않아 마침내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갑절로 받았습니다.
(2) 신앙을 연단 시키는 시험
반면에 성도들을 연단 시켜 복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행하시는데,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믿는 이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믿음으로 받는 축복의 첫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100세에 얻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그의 독생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1-2>).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고 모리아산으로 칼을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이삭이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자식이지만 그러나 그가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삭을 그에게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며, 그에게서 외아들을 빼앗아 가는 것도 하나님의 더 크고 더 놀라운 섭리에서 계획되어진 일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시험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믿음을 버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2) 마귀가 주는 시험에 걸려드는 이유
첫째로,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이상으로 돈이나 권세, 명예, 향락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욕심이 마귀를 향해 문을 열게 만드는 것이고,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초대교회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행 4:32>) 집단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인들 중에 속한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는 자신들의 땅을 팔고,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일부만 가져다 전부라고 사도들 앞에 내어놓은 것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 16:8>).
둘째로, 자기 교만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래서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는데서 인간은 교만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모르고 자신을 과대 평가하게 될 때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마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에 빠지게 됩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이 풍족한 에덴동산에서 하와는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사단의 꾀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온 인류가 죄인이 되는 비극을 가져왔습니다(<창 3:6>)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딤전 3:6>).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2>).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서 시작되고, 성경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라고, 그 말씀 위에 굳게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 말씀을 떠나서 우리의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 위에 굳게 서지 않으면 마귀가 시험할 때 이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에 그를 찾아온 사단에 의해 세 번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마 4:1-11>). 예수를 찾아온 사단은 그가 40일 동안 굶은 것을 이용합니다. 마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놀라운 능력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 높은 곳에서 내려도 천사들이 받쳐줄 것이므로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는 시험, 자기에게 절 한번만 하면 온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겠노라는 시험을 합니다. 마귀는 인간이 허약해진 틈을 타서 물질욕, 명예욕, 권력욕을 자극하고 시험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을 알지 못하면, 가슴에 새겨 놓지 않으면 순간순간 찾아오는 마귀에게 대항할 무기가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3) 성도들이 받는 시험
첫째로, 새신자가 당하기 쉬운 시험이 있습니다. 새신자는 믿지 않을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우상 숭배에 빠지기 쉽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손금이나 관상을 본다든지 점쟁이를 찾아가 택일을 하는 등 과거의 습성을 버리지 못할 때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로부터 오는 시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적하여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가족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지혜롭게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6>).
둘째로, 새신자든, 믿음생활을 오래한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시험은 옵니다. 어떤 이 돈이, 또 어떤 이는 명예나 권력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즉 삶의 목적인 신이 되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물질이 궁핍할 땐 돈으로 시험합니다. 또한 물질이 풍요해도 그것이 오히려 시험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영광에 싸여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여 시험합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잠 1:10>).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나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까 두려워 함이니이다"(<잠 30:9>).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민 22:7>).
4)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첫째로, 시험은 감당할 만큼만 주어짐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에게서 재산과 건강을 빼앗음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생명만은 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서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켜나가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정하여 성경을 매일 읽고 무시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둘째로, 이기는 자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됨을 믿어야 합니다.
불로 연단해야 강한 쇠가 되고, 수 없는 정제 과정을 거쳐 순금이 나오는 것과 같이 연단을 받은 후에 믿음이 성숙하고 아름다워집니다. 그리고 승리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연단 시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믿고 따르도록 인도하십니다.(<롬 5:3 >이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의 시험을 거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이 된 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한 땅을 선물받았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사단이라는 말은 대적자라는 의미로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이며, 귀신은 거의 신약에서만 등장하는 악한 영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것일지라도 타락하면 악한 것이 됩니다. 커다란 선의 가능성을 가진 것일수록 타락하면 더 큰 악이 됩니다. 예를 들어, 칼은 선하게 쓰여지도록 만들어진 도구입니다. 칼을 일상 생활에 잘 사용하면 선한 물건이 되지만 칼을 살인의 도구로 사용하면 악한 물건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원래 사단은 하나님을 보좌하던 천사장 루시퍼로서 그의 임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자기의 능력을 너무 믿은 나머지 큰 교만에 빠져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기 무리들과 천상에서 쫓겨나 악한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인 천사가 교만함으로 타락하여 악한 사단이 되었습니다. 선한 천사도 타락하면 악한 사단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타락하면 사탄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한 자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 때 선한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마귀까지도 사용을 하십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에는 마귀도 제 맡은 몫이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예를 우리는 욥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6-12).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계 12:9).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1) 사탄과 귀신이 하는 일
첫째로, 사람의 죄를 하나님께 참소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사단은 우리의 잘못을 찾아내고 이를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역할을 합니다. 사단은 성도와 하나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성도의 약점을 찾아 시험하는 일을 합니다.
둘째로, 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사단은 이세상의 통치자요(요 14:30),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2)입니다. 그들은 그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조종하며 자기 욕심을 따라 행하게 만들며 번뇌하고 올무에 빠져들게 만들어 결국 멸망으로 인도하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모든 사역을 막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요일 3:8).
셋째로,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일을 합니다.
사단이나 마귀는 본래적으로 거짓말쟁이요, 속이는 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속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며 구원의 확신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만들며, 올바른 신앙 안에 굳게 서 있는 성도들조차 삼키기 위하여 우는 사자처럼 두루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
넷째로, 성도를 시험합니다. 사단은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시험하였다가 실패한 일도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1). 사단은 의로운 자라고 소문난 욥을 시험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려고 했으나 욥은 그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2) 사탄과 귀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첫째로, 하나님은 사단이 이 세상에서 일정 기간 활동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시면서 성도의 믿음이 성장하고 강건하여지게 하십니다. 성도들은 이 시험을 통해서 믿음이 정금같이 강해지고 완전해집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둘째로,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을 완전히 놓아두시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가두어 버리십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사단과 그 추종자들을 끝이 없는 지하(무저갱)에 가두어 버리실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세상에는 천국시대가 옵니다.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계 30:3).
셋째로,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무저갱에 있던 사단의 세력은 잠간 놓여 다시 활동하다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 때에 이들을 지옥 불에 던져서 영원토록 벌받게 하십니다.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3) 악한 영들에게 승리하기 위한 방법
첫째로,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적을 알아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단과 귀신의 정체와 그들이 하는 일, 그들의 목적 등을 알고 나면 시험이나 유혹이 와도 넘어가지 않고 굳건히 신앙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사단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고, 사람을 속이기 위해 그 말씀을 이용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과 싸워야 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올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하듯 사단은 하나님 말씀을 자기 멋대로 왜곡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엉뚱한 길로 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7)고 하셨으나 사단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고 물었습니다. 말씀을 왜곡하는 사단의 역사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단체입니다. 이 이단들은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들의 교주의 주장을 따르게 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0-11).
1) 죽음
죽음에는 영적인 죽음과 육체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이란 썩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영적 죽음이란 사람이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육신이 살아서 모든 활동을 하고 있어도 그 영혼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육체적 죽음이란 육체가 영혼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육신이 죽었다고 해서 사람의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몸과 결합되어 있던 영혼이 그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번 이 땅에 태어난 것은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직접 하나님에게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그러나 이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영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죽음이란 죄의 결과로 오며, 죄란 창조주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 명령을 져버리는 것입니다. 불신이 죄를 낳고 죄는 죽음을 가져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14>).
2) 부활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셔서, 부활하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는데, 이 때의 예수님의 몸은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 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처럼 다시 또 육체적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영적인 몸으로 이루어진 것이다(<고전 15:20,44>)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은 믿는 자의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음이 극복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확인하고 나서는 완전히 변화되어 담대히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죽어 가면서 까지도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500명의 형제들도 증인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500여 명의 성도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실로 다시 사셨음을 믿었고 죽음의 위협에 얽매이지 않고 담대한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고 장사한 지 삼일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도 역시 부활을 예배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두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한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은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을 잘 지킨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부활로의 축복이요,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지옥으로의 저주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죄인의 죽음은 영원한 저주를 뜻합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은 자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영원한 삶을 뜻합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귀중한 것이요 복된 것이요 떳떳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것이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서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천국과 지옥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현대를 사는 우리가 "정확히 안다"고 하는 말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에 한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에만 한정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랑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즉,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지 혹은 사랑하지 않는지를, 그리고 사랑한다면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측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삶 속에 많이 있으며, 특히 신앙의 진리는 과학적으로 입증이 불가능한 것 중 하나입니다. 우리 신앙의 기초는 과학적인 탐구나 발견에 그 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과 우리의 신앙적 체험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과학이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있으며, 과학적으로는 영원히 입증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먼 훗날 과학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즉 하나님의 존재나 천국과 지옥 등이 입증된다면, 그 때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의 한 부분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성경에서 천국은 하늘 나라 혹은 하나님의 나라 등으로 표현되며, 지옥은 음부, 무저갱, 혹은 어두운 곳 등으로 묘사됩니다. 그 표현이 어떠하든 천국과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며,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선하고 바른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 어느 곳으로 갈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1) 지옥이란 어떤 곳일까요?
지옥이란 악인이 처하게 될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인 게헨나를 번역한 말입니다. 게헨나란 예루살렘 교외의 힌놈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로 구약시대에는 이곳에서 어린아이를 잡아 몰록이라는 우상신에게 바치는 희생제사가 거행되었습니다. 후에는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가 되었으며 후기 유대문학에서 죄인들을 심판하는 곳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신약에서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죽지 않는 벌레들이 우글거리며(<막 9:43>), 울며 이를 가는 캄캄한 장소(<마 8:12>)입니다. 천국이 하나님의 축복과 기쁨이 있는 곳이라면 지옥은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와 형벌이 있는 곳입니다. 이 지옥은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 없이, 악하게 산 자들과 마귀와 그 사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나…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계 21:8>).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2)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하며 지복을 누리는 곳입니다. 입신 중에 천국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렇게 몇 마디의 말로,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을 전도로 아름다운 곳이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는 천국의 모양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성은 각종 보석으로 꾸며져 있으며 길은 황금 길이며 수정같이 맑은 생명 강가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과일이 주렁주렁 열려 있으며 밤이 없고 하나님의 권능의 빛만이 아름답게 비취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계 21:11>).
그 천국은 고통이나 눈물, 괴로움 따위의 아픔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완전한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곳이며, 더 이상 눈물이나 고통이나 죽음이 없는 영원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하나님과 천사들이 있는 천국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가는 곳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며, 천사들과 먼저 믿은 성도들이 완전하고 흠 없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누리는 곳이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부활하여 영생하는 곳입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계 7:10-11>).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열 처녀의 비유처럼 준비하며 깨어 기다리며, 주를 기쁘시게 자에게 천국은 주어집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8-9>).
1) 종말
"종말론(Eschatology)"이란 개념은 '마지막'을 뜻하는 그리스어 eschaton과, 이론, 서술을 뜻하는 그리스어 logia를 결합한 것입니다.따라서 종말론은 곧 마지막의 것, 혹은 마지막 일에 대한 이론을 뜻합니다.그런데 마지막 일은 인간의 끝을 뜻할 수도 있고, 세계의 마지막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따라서 종말론은 개인의 마지막 곧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개인적 종말론과, 세계 혹은 우주의 마지막 문제를 다루는 우주적 종말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종말론은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그것은 교의학의 체계에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하나의 '부록'과 같은 것으로 취급됐으며, 그래서 교의학 체계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어져왔습니다.그러나 오늘날 종말론은 기독교 신학에서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매우 관심 있는 문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오늘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생태계의 오염과 파괴, 핵무기로 인한 지구 전체의 총체적 파멸의 위험, 인류 역사에 있어 그 유례를 다시 찾아 볼 수 없는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이로 말미암은 인류의 미래의 불확실성,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계의 종말에 대해서 관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시한부 종말론은 기독교 역사상 언제나 등장했다.주후 2세기에 일어난 몬타니즘을 추종하는 단체는 천년왕국이 소아시아 프리지아의 페푸차에 세워질 것이라 믿으면서, 엄격한 금욕 생활과 철저한 순교 정신을 강조했습니다.그러나 그들의 종말 예언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16세기 노스트라다무스는 1999년 일곱째 달에 세계 종말이 올 것이라 예언했으며, 19세기 윌리암 밀러는 1843년 3월 21일과 1844년 3월 21일 사이에 예수가 재림해 세상을 불로 씻어버릴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그러나 이들의 예언들은 모두 거짓임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때와 그 시는 자신도 모르고 오로지 성부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종말이 가까울수록 신실한 성도를 미혹하는 무리가 나타납니다. 그들은 종말의 때를 예언하며 수많은 성도를 미혹하여 사회와 교회에 커다란 혼란을 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종말의 때를 알 수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1-3).
2) 그리스도의 재림
(1) 재림의 징조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간의 역사는 그 종국에 달하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종말에 대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며(마 24:30; 요 14:3), 승천할 때 천사도 예고하였고(행 1:11), 사도들도 이에 대해 여러 번 강조하였습니다(행 3:20-21; 살후 1:7,10). 그러나 그 시기는 아무도 알지 못하며(마 24:43; 벧후 3:10). 다만 몇 가지 중대한 징조로써 짐작할 뿐입니다.
가. 복음의 세계적 전파
복음이 전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져서 그리스도에게 돌아올 기회가 부여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면 주의 재림이 가까운 증거입니다(벧후 3:9)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나. 이스라엘의 회심
이스라엘 민족 중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슥 12:10; 롬 11:25,26).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면 이스라엘이 독립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6).
다. 적그리스도의 출현
사람들을 미혹하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멸절될 것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막 13:8).
라. 대배교(大背敎)와 대환난
거짓 선지자(마 24:11,24)와 거짓 그리스도(마 24:5,23)가 등장하여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변절하게 만들며, 성도들이 전쟁과 기근과 지진으로 인하여 큰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마 24:7-9,21).
3)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는 공중에서 재림하십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의 사자는 "너희 가운데서 하늘을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대로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하있습니다. 예수 자신도 자신의 재림에 대하여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 21:27)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날에 전 인류가 예수님의 재림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동이나 서, 남이나 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중에서 임하시는 예수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는 죽었던 성도들이 부활할 뿐 아니라 살아있는 성도의 육체도 변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부활한 성도는 공중으로 올라가게 되고, 지상에는 무서운 대환란이 임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51).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4) 성도의 자세
세계 파국의 종말과 예수의 재림은 언제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믿음의 인내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예배와 기도의 영적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1) 교회자주 쓰는 용어
(1) 아멘 : "의지 또는 의뢰한다"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의 부사를 음역한 것으로 "그렇게 되옵소서," "참으로," "진실로" 등의 의미입니다. 기도나 송영의 마지막에 쓰는 예배용어입니다.
(2) 할렐루야 : "여호와를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에 사용되며 성도들이 서로 인사하거나 부흥회 같은 곳에서 강사를 소개할 때 할 때, 기도할 때에도 사용됩니다.
<시 135:3>을 제외하고는 시편의 처음 혹은 끝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3) 계시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들려주거나 보여주는 것, 혹은 마음속에서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성경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가장 크고 분명한 계시는 하나님을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4) 메시아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인데, 즉 구세주를 가리키는 말로서 그리스도와 동의어입니다. 구약시대에서는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의 취임식에서 제사장들이 그들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레 4:3; >레6:15). 예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한 참된 왕이요,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를 이어 주는 대제사장이요, 선지자인 기름부음 받은 자이시다. 지금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된 것입니다.
(5) 보혜사
이 말의 원뜻은 "위로자" "돕는 이"로, 법정에서 옆에 서서 도와주는 변호인을 가리키는 법적 용어였습니다. 이 용어는 <마 10:19-20>에서 세속적인 유대 관원들 앞에 기소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묘사하는 데 쓰였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에 그를 대신해서 제자들을 인도하고 복음을 이해시키고 시련과 박해에 참고 견디게 한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말합니다(<요 14:16>).
(6) 알파와 오메가
희랍어 알파벳의 첫 자와 마지막 글자로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낸 말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나는 처음과 나중입니다."
(7) 음부
우주를 3층(하늘, 땅, 땅밑)으로 이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은 자의 영혼들이나 마귀들이 살고 있는 믿고 있던 땅 밑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비유,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나오는 그 부자가 죽어서 간 곳이 바로 이곳 음부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품 곧 하나님 나라에서 평화와 안락을 누리고 있는 나사로를 보기도 하고 아브라함하고도 대화를 하지만 그곳은 서로 오갈 수 없는 곳입니다.
(8)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 용어는 예수께서 자기를 지칭할 때 쓰신 말입니다. 단순히 인간 내지는 인간의 아들이라는 뜻만이 아니고, 구주를 뜻하는 <단 7:13>의 용법이 그 배후에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이 세상에 고난을 받는다고 하는 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9)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는 말인데, 구약시대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에게 예언하였습니다(<사 7:1-25>). 마태는 이사야의 이 말을 인용하고 예수님을 임마누엘의 실현이라고 보았습니다.
(10) 중보자
서로 대립해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적의의 원인을 제거해 주고, 우정의 회복과 언약체결을 위해 알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중보자는 제사장이었으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딤전 2:5-6>). 그러므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11) 호산나
"이제 구원하옵소서"란 뜻의 히브리말로서 <시 118:25>로부터 인용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들이 환영하여 부르짖는 환호의 소리로서(<마 21:9; ><막 11:9>), 이는 메시아를 대망하는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환영함을 나타냅니다.
(12) 송영
송영은 영어로 doxology라고 합니다. 의미는 신을 찬미하는 시, 예배 끝의 찬송가(송영),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송영은 영광 송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영광송은 원래 대 영광송이 있고 소 영광송이 있었습니다. 대 영광송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대체로 웅장하고, 소 영광송은 가사가 아버지께 찬양으로 시작하며 후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글로리아 파트리(Gloria Patri)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 후 거의 모든 시편이 송영이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삼위 일체를 찬양하는 곡을 보통 송영과 구분해서 글로리아 파트리(Gloria Patri)라고 합니다.
(13) 심방
심방이란 교역자와 교인들이 신도들의 가정으로 찾아가서 예배드리고, 축복을 빌며, 개인적 만남을 갖는 것입니다. 심방받는 자세는 사람의 방문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으로 여겨 기쁘게 영접해야 합니다.
심방의 종류
① 새신자심방 : 새로 등록한 신자의 가정을 찾아감
② 환자심방 : 가정이나 병원에서 앓고 있는 교우들을 방문함
③ 대심방 : 전 교우들의 가정을 심방하는 대심방
④ 특별심방 : 교우들의 생일이나, 개업 등 특별한 일로 요청할 때 목사가 하는 심방
(14) 관주성경
성경본문에 기록된 주요한 내용이나 용어 중 같거나 비슷한 것, 혹은 인용되거나 비교할 만한 사항을 다른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도록 간단한 부호로 표시해 놓은 성경. 관주 기호로는 자음(ㄱ....ㅎ)과 모음(ㅏ, ㅑ..으 이 애)을 사용하고, '인'은 인용, '비'는 비교, '보'는 보라는 약칭을 사용. 관련 장절 표시는 한문으로 쓰며, 장절 구분은 ○표로 하고 있습니다(예 15: 12 → 十五○十二).
2) 교회의 상징
(1) 십자가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려 죽으신 형틀로 기독교를 대표하는 상징적 표시,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상징. 십자가는 로마시대 사형을 판결받은 죄수들을 매달아 서서히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만드는 처형도구 중 하나였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고 민심을 미혹케 했다는 명목으로 동족 유대인들에게 체포당하고, 심문받은 후 당시 유대를 정복한 로망의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사형을 언도받고 갈보리 언덕에서 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그 죽음이 예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영어의 cross라는 말은 라틴어 crux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본래 십자형 형틀은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림
가. crux immissasms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자형으로 예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입니다.
나. crux commissa, 또는 세인트 안토니의 십자가라고 불리는 이 형태는 영어의 T짜 형입니다.
다. 적십자 마크처럼 가로와 세로가 똑같은 크기입니다.
라. crux decussata, 또는 안드레의 십자가라고 불립니다.
십자가형은 페니키아, 카타기니안, 이집트, 그리고 로마인들이 사용한 가장 잔혹하고 야만적인 처형방법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이전 시대에 있어서 십자가는 삶의 고통과 고뇌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들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에 대해서 단순히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마 27:35; ><마 15:24>)고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의 구세주의 희생적인 죽음 때문에 종교적인 상징물이 되었는데 <고전 1:17>에 따르면 십자가의 복음(케리그마)은 인간의 말의 지혜에 대조되는 신적인 것입니다. <엡 2:16>에 의하면 십자가는 화해의 중개물이며, <골 1:20>절에 따르면 십자가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볼 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저주를 받은 자들이 달리는 형틀이고, 로마인들에게 있어서는 비웃음의 대상이지만(<갈 3:13>) 그러나 그 예수가 달려 죽은 그 십자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이며, 그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것입니다.
(2) 물고기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갓 세례받은 자, 거듭난 자나 성만찬의 상징으로 2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은신해 있던 카타콤 벽화에 빵과 포도주 그림과 함께 나오는데 학설에 따르면 물고기라는 단어의 희랍어 익투스(ICQGS)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단어의 희랍어 jjjjjIhoou'" Crioj", Qeou' Ui[oJ", Ewthjr의 첫 글자를 합쳐서 만든 글자라 합니다.
많은 가톨릭 교인들이 추측컨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기념키 위하여 매 금요일마다 고기를-물고기로 대체하였지만-먹지 않습니다.
(3) 예전 색깔의 의미
흰색 - 순결, 기쁨, 승리, 진리, 완전, 성결, 영광
보라 - 슬픔, 참회, 고난, 겸손
빨강 - 성령, 피, 불, 열심
진홍 - 고난
녹색 - 생명, 성장
검정 - 애도, 슬픔(성금요일에 사용)
청색 - 희망
금색 - 하나님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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