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복음전도자만 들어가는 곳인가? 복음 전도는 주님을 섬기는 마땅한 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마지막 명령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16:15,16)"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마련한 구원의 길을 온천하 만민에게 전파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 전파를 명령하실 뿐 아니라 부탁하셨다고 하셨습니다(살전 2:4). 마지막 유언처럼 하신 복음 전파 명령은 얼마나 간절하신지 부탁하셨다고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복음 전파를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시는지 명령하시고 부탁까지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큰 책무는 복음전파이고 이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을 섬기는 마땅한 도리이기도 합니다.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보라
아래 말씀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인생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고 주님의 구원을 받은 신자가 그분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을 간략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5-12)" 예수를 믿는 신자는 예수 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데 그분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생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을 희생물(犧生物)로 바치려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려고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위의 구절을 상고(祥考)하여 보면 성자(聖子) 하나님은 원래 하나님의 본체로 한몸이던 분인데 인간을 구하기 위하여 한몸이던 하나님과 분리(分離)하여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분리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분리하여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실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본체(本體)로 계시다가 인간의 생명을 영원한 멸망의 자리인 유황 불못에서 구출하시려고 육신(肉身)을 입고 오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 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땀흘린 기도나,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의 절규(絶叫)는 하나님의 능력을 포기하고 연약한 육신의 능력 그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은 성자(聖子)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지닌 예수 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고통없이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연약한 육신의 한계속에서 철저하게 감당하셨습니다. 인생들을 위한 고난이기에 인생들이 겪어야할 고통을 남김없이 자신의 몸에다 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지닌 분으로서 하늘의 천사 군단(軍團)을 불러서 자신을 적대하는 로마와 제사장 무리를 단번에 진멸하실 수 있었지만 인생구원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권세를 포기하셨습니다(마 26:53,54). 예수 님께서는 자신의 권세와 능력을 포기하고 연약한 육신의 한계속에서 철저하게 고난을 당하시는 것으로 인간의 저주와 죄악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므로 말미암아 사망을 이기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의 대신 당한 징벌의 고난으로 인하여 주님은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는 구주(救主)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구주가 되어서 천지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 명령을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구주를 믿고 그의 명령을 항상 복종하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종하여 구원을 이루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철저한 고난을 댓가로 지불하시며 나를 구원한 주님을 섬길 때 그 값비싼 은혜를 받은 자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항상 그분의 뜻과 명령에 복종하며 구원을 이루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받기가 어렵고 두려운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하여 크신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그의 고난 받으심을 생각할 때에 나를 대신해서 모진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바라볼 때에 황송하고 두려운 마음, 떨리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께 복종하는 것이 바른 자세 나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바라 볼 때에 황송하고 죄스러운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항상 그 분의 뜻과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셔서 나를 구속했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주님을 생각할 때에 그분의 뜻과 명령을 소홀하게 여길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뜻과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분의 뜻과 명령은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십계명을 비롯하여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요 13:34,35)을 지켜야 하며 성경에 나타난 여러가지 계명을 힘써 지키는 생활을 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온 율법의 강령(綱領)이라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마 22:37-40)은 한 마디로 율법의 완성(롬 13:10)이 되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되면 주님의 명령을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최대의 과제인데 구체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은 여러가지로 나타날수 있을 것입니다. 자선(慈善)과 구제(救濟), 자비(慈悲)와 긍휼(矜恤) 등 사랑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슴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마 25:31-46).
그런데 가장 큰 사랑은 이웃을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요 15:13). 그리고 주님은 이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자신이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의 죽음을 맛보신 것은 인간을 사랑하사 인간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비유하시면서 자신이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떡처럼 나뉘어서 사람에게 들어가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십자가의 사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48-55, 마 26:26-28). 그러므로 사랑의 목적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열매가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나타나지 아니하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도 대상자가 생명을 구함 받지 못한다면 주님의 사랑을 본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밥 한그릇이 필요합니다. 호화로운 비단 옷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것은 밥이므로 밥을 주어야 제대로 사랑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밥을 주지 못하고 옷이나 입히면서 사랑을 실천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얼어 죽는 사람에게는 따뜻한 옷이 필요하지만 먼저 굶었으면 먹여야 합니다. 가장 큰 사랑의 실천은 복음 전도 이런 이치로 보아서 가장 시급한 사랑의 실천은 복음을 먹여서 지옥으로 떨어질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복음 전파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님께서 멸망할 인생을 십자가의 구속으로, 자신의 피 흘림으로 구원함은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모든 이에게 전달하여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케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요,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온 율법의 강령(綱領)인 사랑의 실천은 결국 멸망당할 인생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전도 사역에 참여함으로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두 가지 명령인 사랑의 계명과 전도의 계명은 결국은 하나로 통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최종적으로 복음 전도를 통하여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지상 명령(至上命令)을 순종하므로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요일 5:3), 또한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된 이웃이 가장 귀한 생명을 멸망에서 구원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이웃의 인생을 살리는 최고의 이웃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최고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는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 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없습니다. 복음 전도야말로 이웃의 생명을 살리는 최고의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행위가 되고 이웃에 대한 가장 크고 귀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는 전도, 한가지 행위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고귀(高貴)한 사역(使役)이 되는 것입니다. 전도 안하면 주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죄로 심판이 있다. 그리고 전도는 주님의 지상 명령(至上命令)입니다. 명령이란 무엇입니까? 목숨 걸고 시행하여할 것이 명령입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하는 명령을 시행하지 않으면 회사에서 쫒겨나게 되고 군대에서 상관에 명령에 불복종하면 불복종 죄로 처벌 받게되고 전시에는 즉결처분으로 죽게됩니다. 회사에서나 군대에서나 국가에서나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거부하면 이에 상응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명령을 거부할 때에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 님을 믿는 신자가 주님의 명령을 거부할 때에 어떤 처벌을 받게 될런지는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명령인 복음전도에 복종하지 않는 신자는 세상에서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람이 처벌을 받는 것 처럼 마지막 때 주님 앞에서 명령 불복종한 죄에 대해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은 후에 여러날이 지나고 여러해가 지나면서 주님은 자신의 중요한 명령인 복음전파를 신자들이 복종하기를 기다리며 참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고후 5:10). 상급 심판이든지 구원 심판이든지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불법을 행하면서 주여 주여 하며 믿는 자들도 주님 앞에서 심판 받는 것을 성경은 보여 줍니다(마 7:22). 기름 준비 못한 처녀, 탈란트를 감당 못한 종, 사랑의 명령을 불순종 한 자(마 25:1-46) 등은 주님으로 부터 버림을 당하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불법을 행한 것은 못된 열매 맺는 거짓 선지자 노릇을 의미 하는 것으로 (마 25:15-21) 해석할 수 있고 기름 준비 못한 처녀는 성령을 받지 못한 것으로, 탈란트를 땅에 묻은 종은 주님이 주신 사명을 게을리한 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자들을 돌보지 못한 자들은 사랑의 계명을 불순종 한 자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기름에 대해서 여러가지 다른 해석도 할 수 있지만 기름을 성령이라고 본다면 기름 준비를 못한 처녀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거나 믿음을 떠나서 성령을 소멸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믿음을 시작하지 못했거나 믿음을 배반한 자로서 믿는 자로서 진정성을 상실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범주에 넣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위의 거짓 선지자들도 마찬 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탈란트를 땅에 묻은 사람이나 어려운 자들을 돌보지 못한 자들은 주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사람들로서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게으르거나 냉혹한 사람을 일컷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계속 불복종하면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주님의 명령에 불복종 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님으로 부터 내침을 받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거짓 선지자이거나 내용이 없는 껍데기 믿음이거나 주님의 명령을 불복종 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다른 것이 있겠지만 너무 번잡해지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해도 주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면 버림을 받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주님의 명령에 불복종하지 않았는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위에서 논증한대로 주님의 가장 크고 중대한 명령은 복음 전파이므로 복음 전파에 관심이 없이 소홀한 사람은 주님의 가장 큰 명령을 불복종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잇습니다. 따라서 다른 것을 잘한다고 생각하여도 이는 불복종하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 잘하고 헌금 잘하고 교회 봉사에 힘을 쓰고 어려운 자를 돌아보아도 가장 큰 명령인 전도의 명령은 거부하고 있는 모습이 됩니다. 이를 테면 의사가 손님들에게 친절하고 인상도 좋고 여러가지가 좋은데 정작 환자 진료는 제대로 안하고 딴 일에 분주하다면 그 병원 원장은 이런 의사를 쓸모 없다고 쫓아 낼 것입니다. 의사로서 가장 중요한 책무는 환자의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이에 비해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없는 것 보다 있으면 좋지만 의사로서의 필수조건은 환자를 고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환자 진료를 기피하면 의사로서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우선으로 중요한 것은 복음 전파이고 복음을 전하는데 관심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환자 진료를 기피하는 의사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 이런 사람들은, 탈란트를 땅에 묻은 종처럼 아무 슬모없는 종이나 마찬 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명하신 중대한 명령을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해야 주님도 나를 시인한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시인(是認)하는 것을 구원과 연결시켜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0: 32,33)"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임을 시인하면 예수 님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인정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부인하면 하나님 앞에서 부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을 핍박받는 상황에서 예수 님을 부인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로 보면 사람들 앞에서 예수 님을 구주로 전파하라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기본적으로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여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을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지 못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부인을 당할 수도 있슴을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천국 문 앞에서 비참하게 쫒겨 날수도 있슴을 생각하고 경성(警省)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는 선택사항이 아니고 필수사항
그러므로 복음 전도는 사람 앞에서 예수 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것이므로 선택 사항이 아니고 필수 사항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복음전파 하지 못한 사람은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까지 했습니다. 주님의 지상 명령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주님이 주인인 천국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뜻인 것입니다. 성경에 십자가 한 쪽 강도는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구원 받았는데 무슨 복음전파를 할 시간이 있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해서도 십자가에서 그 강도는 분명히 복음전파를 했다는 것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39-43)" 십자가의 한 쪽 강도가 예수 님을 비방할 때에 한 쪽 강도는 그를 꾸짖었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님의 행하심이 옳다고 했을 뿐 아니라 예수 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예수 님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임을 고백하고 구원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강도는 예수 님을 자신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는 구주로 고백하고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복음 전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구주로 시인함으로 회개와 더불어 복음전도를 동시에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주님 앞에서 하면 신앙고백이 되고 교인 앞에서 하면 간증(干證)이 되는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 들 앞에서 하면 복음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간증에서 나타나는 문제점과 분별의 어려움
근래에 들어와서 여러가지 천국 간증이 많은데 그중에는 미혹의 영이 만들어 논 가상의 세계를 보고 잘 못 전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간증중에서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은 배척하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으로도 분별하기 어려운 모호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중에는 믿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비율이 극히 적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구절에는 말세 때에는 믿음이 적어져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구절도 있습니다(눅 18:8).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배격하기도 어렵습니다. 대개 교인들은 세례받고 신앙고백하면 구원 받고 천국 백성이 된 줄로 여기고 교회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신앙을 유지하면 구원 받아 천국으로 다 들어 갈 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알고 있는 교인들 중에 극히 적은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간증은 기존 교인들의 믿음의 근거를 흔들어 대는 시험거리가 아닐수 없습니다. 이들의 말이 성경말씀은 아닙니다. 인간의 입으로 나온 말이고 그들이 본 것도 헛 된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간증을 전폭적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구절로 그들의 주장을 명확하게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으로 그들의 말을 확실하게 논박할 구절을 찾기가 어려운 것은 주님이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말씀을 오늘의 말세적인 상황에서 대입해보면 이들의 주장을 비성경적이라고 배척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 교회 출석하고 교회 일에 봉사하기 위해서 몸과 물질과 시간을 바쳐서 헌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식당 봉사로, 차량 봉사로, 성가대 봉사로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몸바쳐 일하고 빈곤한 경제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게 바치는 마음으로 헌금에 힘쓰는 교인들은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눈물겨울 때도 있습니다. 저렇게 열심히 믿는데 어찌하여 천국에 들어갈수 없을까? 믿음에서 보면 나는 교인 중에서 심하게 말하면 꼴등이나 마찬가지인데 나 같은 자도 천국에 들어 갈수가 있을까? 교인들은 주님께 바치면서 믿는다는 말이 있는데 믿음이 없이 이렇게 몸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헌신 할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이들의 간증이 사실이라면 기존의 교인들은 큰 충격이 아닐수 없습니다. 교인들의 많은 수가 이렇게 교회 일을 주님의 일로 여기고 충성하는데 이런 믿음으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믿어야 천국으로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인지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신실해 보이는 교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고 계속 기도 제목이 되었습니다. 저렇게 충성하는데, 저렇게 눈물겹게 교회 일에 헌신하는데 저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누가 들어 간단 말인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였기에 천국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런데 구원의 확신이 없이 저렇게 교회 일에 충성 할 수 있는가? 회개가 부족한 것이 현대 교회라하는데 회개하지 못한 신앙습관 때문에 천국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인간이 어리석고 둔하여 죄를 느끼지 못할 때도 많으므로 회개도 성령이 시키시는 것이고 죽기 전에 처음 예수 믿는 자도 회개하고 구원 받는다 하는데 기존 교인들에 대해서 성령께서 회개 시키는 역사를 시행하시지 않는단 말인가? 일제 시대 신사 참배한 교인들이 90% 라는데 지금보다 신실했던 그때도 90%가 가짜 믿음이었다니 지금은 더욱 형편이 없게 되었단 말인가? 성경을 상고 해보고 기도를 계속해도 시원하게 원인을 알수 없었고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라 더욱 갈등이 깊었습니다. 내가 읽고 깨닫고 배운 것을 구원 복음이라고 전파하고 살아 왔는데 이는 기존 교회에서 가르치는 복음교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으로 가르침 받고 배운 교인들중에서 구원 받는 자가 희소하다는 것은 내가 알고 확신한 복음 지식에도 문제가 없는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 없는지 의문스러웠고 계속 주님께 기도하며 계시를 구했습니다. 별로 신령하지도 못하면서 성경을 이무리 상고해도 원인을 알수 없으므로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실하게 보여도 복음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면 버림을 당하는가?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깨닫게 된 것이 위에 기록된 대로 많은 사람들이 신실하게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천국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일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물질과 시간을 바쳐서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지상 명령인 복음전파에 힘쓰지 않는다면 주님의 명령을 불복종하는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 전파 명령에 힘쓰지 않는 신자는 환자 진료를 안하는 의사처럼 쓸모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일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계시하신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신령한 사람이라고 여기지도 않기 때문에 주님의 계시라고 확언 할 수 없습니다. 내자신의 평소 느낀 관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해서 복음 전파에 힘쓰게 된다면 개인 신앙이나 교회공동체나 국가 전체를 생각해도 유익이 될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고 이를 수행하는 개인이나 교회공동체는 주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믿음이 있어도 복음전파에 게으르게 되면 주님으로 부터 버림을 당하여 천국구원을 받지 못하는지는 확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복음전파가 천국구원에 중요한 영향이 있다면 오히려 문제는 간단 할 것입니다. 너도 나도 복음 전도에 힘쓰면 천국구원을 받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원인, 복잡하고 알수 없는 원인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여렵겠지만 단순히 복음전파 명령 불복종 때문에 천국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보다 쉬운 해결책은 없을 것입니다. 복음을 입을 벌려 전하는 신앙생활로 바꾸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전도는 시작하면 쉬운 것 전도를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냥 입을 벌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복음 전도를 관계전도 처럼 꼭 교회로 인도하여야할 부담을 갖기에 어렵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전도에는 씨를 뿌리는 사역도 있고 추수하는 사역도 있습니다(요 4:35-38).관계전도로 열매를 거두는 추수꾼의 사역만이 전도가 아니고 씨를 뿌리는 사람의 노력도 전도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열매를 거두는 전도자는 이부분에 은사를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이 노력한 결과를 거두는 사역이라고 할수 있고 그 이면에는 씨를 뿌리는 노력이 있었기에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꼭 내손으로 전도의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말고 복음을 전하고 다음에 씨앗이 자라기를 바라며 물을 주는 심정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라게 하셔서 때가 되면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3:6). 이말씀은 신앙의 성숙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전도의 원리에도 통용되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전도의 원리 가운데 중요한 것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듣던지 아니 듣던지 전하라는(겔 3:11) 원리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였는데 복음을 듣고 열매를 맺게 되든지 아니면 듣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했든지 전하게 되면 때가 되어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원리를 전제로 하여 복음전도를 하면 됩니다. 복음을 전해서 열매를 거두게 되면 좋지만 열매가 없어도 때가 되면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거두는 사람이 있게 될 것이므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으로 여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입으로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선 가까운 사람들 한테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고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고 전하면 됩니다. 이영생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이 되심을 전하면 됩니다. 우선 듣기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소리라는 반응이 나올수도 있지만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므로 전하면 됩니다(고전 1:23,24). 그러면 때가 되어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입을 열기가 어렵지 일단 복음전도의 입을 열기 시작하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고 습관화 되면 자연적으로 복음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한국 대학생 선교회에서 사용하는 사영리(四靈理)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혜, 그리고 회개와 영접까지 간략하고 명료하게 설명한 것으로 이를 숙독하고 암기하여 활용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복음전도에는 교회에서 전하는 전도지를 노방에서 전하거나 집을 방문하는 방문 전도가 있습니다. 교회의 전도지는 대개는 복음의 내용이 없고 단순히 예수 믿으라는 표제 아래 교회 약도를 수록하고 있어서 교회 선전지 같은 감이 있습니다. 직접 만나서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보다 복음의 내용이 빈약해서 온전한 복음전도라고 할수는 없지만 간접적인 전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축호전도라고 하는 방문전도는 아파트 단지에서 많이 활용하는 것으로 이부분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없으므로 생략합니다. 소책자 문서 노방전도 소잭자 문서 노방 전도는 교회에서 전하는 전도지가 복음의 내용이 빈약한 것을 보완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을 통한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한 것으로 본 선교회가 채택한 선교 방법입니다. 이 내용은 전도문서에 올려논 것인데 이 책자에는 교회 생활 여러해를 지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칠수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론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적은 책자이지만 자세히 읽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신앙진리를 이해할수 있도록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자를 전달하면 그리스도의 기본진리를 문자로 전달하게 되므로 입으로 전하는 것보다 용이하게 전할 수 있고 또한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위에 올려논 파일을 받아서 복사하거나 인쇄하여 소책자로 만들면 전도에 활용할수 있습니다. 전하는 장소는 흔히 사람 왕래가 많은 곳을 선정해야 단시간에 전도 책자 물량을 전달 할수 있으므로 주로 지하철 역 부근에서 전달합니다. 흔히들 전도지는 받은 사람이 버리는 예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휴지를 소량 포장해서 돌리고 있습니다. 휴지는 누구나 필요하므로 버리지 않지만 포장에 교회 이름만 나와 있으므로 엄밀하게 말해서 복음 전도가 아니고 교회선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 곳이므로 간접적인 전도는 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소책자 전도지는 복음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한 것으로 이런 경우의 전도지는 드믄 경우입니다. 그러나 제작 비용이 많이들어서 경제적으로 부담이 있습니다. 책자 전도의 실제 지하철 역에서 전도지를 전할 때에는 길에 버린 전도지로 인하여 인근 지역 청소를 담당하는 청소원들이 잔소리를 합니다. 어떤 때는 역에서 직원이 나와서 금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책자를 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잘 살펴서 버릴 것 같은 사람은 피해야 합니다.그런데 이를 제대로 알수가 없으므로 버릴 사람은 받지도 말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대개는 받은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버리기가 쉬우므로 수시로 살펴서 버려진 전도 책자를 거두어야 합니다. 책자는 소형으로 주머니에 들어가게 만들었고 책자이므로 버리는 경우가 적지만 세심하게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쇼핑 센터 부근 에서 전도지를 돌리면 쇼핑센터 관리직원이 나와서 방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중 도로에서 누구나 통행 할수 있는 곳인데 자기 건물 부근이니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무런 법적인 근거나 권리도 없는데도 이렇게 몰상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복음 전한다고 와서 분쟁에 말려들면 교인으로서 덕도 아닐 것 같아서 몇마디 항의하고 물러 설 경우도 있습니다. 전도책자를 전 할 때에는 뻣뻣하게 서서 전하는 것이 아니고 겸허한 태도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고 외양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누추하게 보이면 혐오감을 일으키게 되어 복음 전도지를 받지 않게 됩니다. 주의해야 할 점입니다. 그리고 말없이 전도책자를 건네는 것보다 다음과 같은 말을 곁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본 선교회는 주로 청소년 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예수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청년들이 예수 믿어야 나라에 희망이 있습니다." "청년들이 예수 믿고 나라를 살려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예수 믿으면 인생이 성공한다." "예수 잘 믿고 훌륭한 사람되어라." "어린 자녀를 믿음으로 기르세요, 훌륭한 사람 됩니다." 등등으로 말을 건네며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은 각자 형편에 맞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노방전도를 하다보면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하기 전에 주님께 보호와 동행을 부탁하는 기도가 전제 되어야 합니다. 전도하는 중간에도 필요 따라서 주님의 역사하심을 구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공공 장소에서 복음전도를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이 미국을 점령하고 있는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한국도 앞으로 어찌 될지 모릅니다. 한국 교회가 경성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 제고는 전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근래에는 교회에 대한 사회 일반의 인식이 날로 나빠져서 점점 전도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전도라는 것은 교인들만이 전도를 전담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공동체 전체가 공동으로 감당할 사명입니다. 교회에 대한 사회 전체의 인식을 좋은 방향으로 전환하여야 전도가 보다 활성화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하여 일반인들이 부정적인 관념을 가지게 되면 개인들이 아무리 전도를 해도 성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일반인들이 긍정적인 관념을 갖도록 교회 차원에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흔히들 일반서민들은 갈수록 생활이 어려워지는데 교회는 날로 부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일반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주게됩니다. 그리고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라(마 11:5)"는 주님의 뜻과는 배치 되는 현상으로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극복해야할 문제입니다. 일부 교회는 날로 대형화되고 웅장한 건물을 자랑하는 듯 하지만 한국 전체의 신자는 날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의 대형화와 복음화가 역비례하는 현상으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의 전달 통로가 막혀간다는 것으로 한국교회가 병들어 간다는 징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는 복음으로 새롭게 결신하는 사람보다 교회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가 됩니다. 결국 한국교회의 대형 교회화는 교인들의 수평 이동으로 인한 집중화 현상으로 자신의 교회가 커졌다고 혼자 자랑만 할수 없게된 것입니다. 수많은 군소 교회가 죽어버린 터위에 몇몇 대형 교회만 덩그렇게 서있는 모습은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산업계를 논할 때에 중소 기업이 건실하고 튼튼한 나라가 대기업만 있는 나라보다 안정되고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서로 균형있게 존재하여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런 관점을 차용해서 볼 때에 한국교회는 중소형 교회와 대형교회가 균형을 잃어버리고 대형교회로 집중화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한국 교회가 대형교회가 늘어나는데 비해 오히려 전체 기독교인들은 줄어들고 있는 이상 징후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중소형 교회가 복음전도의 모판 같은데 이 모판이 대형교회의 교인 집중화로 인하여 고사(枯死)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계속 간다면 모판 역활을 하는 중소 교회의 몰락으로 인하여 대형교회가 교인을 공급받지못해서 결국은 같이 몰락을 겪을 것입니다. 이는 미국이나 유럽교회의 몰락을 보면 짐작할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미국이나 유럽교회의 몰락을 방지하려면 지금까지 개교회 성장주의 일변도를 버리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한국교회의 전체를 바라보고 장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개별교회의 대형화를 계속 추구한 결과가 오늘 한국교회의 침체를 불러온 원인중에 하나가 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개교회의 대형화를 지양하고 중소교회의 활성화에 힘을 집중해야 한국교회는 살수 잇을 것입니다. 몇 몇 카리스마 있는 목회자가 있는 교회는 갈수록 비대해지고 일반 중소교회는 갈수록 위축되어버린 다면 교회의 뿌리가 말라죽은 것이되고 결국은 전체가 죽을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형화의 길목에 있는 교회는 자신의 개별적인 성장보다 한국교회 전체적인 성장에 대한 안목을 가지고 중형과 소형으로 분립(分立)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모범을 보인 목회자가 전에 남서울 교회를 목회하던 홍정길 목사 입니다. 그는 계속적으로 비대해지는 교회를 적정한 중형교회의 규모를 맟추려고 계속 교회를 분립시켰습니다.
목회자로서 자기 목회를 성공시키는 대표적인 모델인 대형교회화의 유혹을 이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나 큰 교회 되어서 큰 목사 대접받고 성공한 목사가 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의 정신을 본 받으려면 이런 성공에 대한 욕심을 접어야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 될수 있기에 이분은 이런 길을 택했을 것입니다. 입으로는 이무리 예수 님을 운운해도 세상에서 목회에 성공하여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사람은 공생애 3년 동안 수만명을 가르치면서도 유대인의 회당 하나 건축하지 아니하고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가난하게 사신(고후 8:9)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는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일반 신자로서 주님의 은혜로 잘 살기를 바랄수 있지만 언필칭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간다는 목회자가 세상적인 성공에 매달린다면 이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시골 낙도에서 교인 몇명을 바라보고 일평생 섬기는 목회자가 주님의 길을 간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한국교회를 붙잡고 있다면 이런 시골교회에서 한평생을 바치는 분들 때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주의를 지양하고 주님의 원하시는 목회를 하려는 분들은 일찍 부터 개별교회의 대형화를 포기하면서 주님의 가신 길로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분은 시골과 낙도에서 한평생 목회하는 분들중에 있을 것이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알려진 모델 교회로서 전주 안디옥 교회의 이동휘 목사 님이나 광염교회의 조현삼 목사 님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목회 스타일은 교계에서 널리 알려졌기에 여기서 재론 안하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침체를 벗어나서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하고 민족과 나라의 희망이 되는 영광의 자리에 오르려면 위에서 거론한대로 자기 성공의 욕심의 올무인 대형교회 추구를 벗어나야 합니다. 중소형 교회와 균형있는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위에서 모델로 제시한 홍정길 목사, 이동휘 목사, 조현삼 목사 등 세분 목사 님의 목회관으로 전향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목회관으로 전환하지 못하는 한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결론은 교회나 개인이나 전도에 총력을 집중하여야 하고 주님이 부탁하신 복음 전도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잘라버려야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복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복음전도에 방해물 노릇을 하다가 주님 만날 때에 버림을 당하는 비참한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개인이나 교회나 전도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고 오로지 복음 전도에 총력을 집중해야 하고 이런 사람들 만이 들어가도록 허락된 곳이 천국일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도 내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성경 말씀을 기준하여 살펴보는 노력을 일평생해야 합니다. 나는 제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이 내주하는 구원받은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늘 회개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의 장벽을 허물기를 힘쓰는 자인가? 주님이 주신 사명에 게으르지 않는가? 자칫 타락하여 거짓 선지자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닌가? 마땅히 해야할 긍휼과 자비를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는가? 교회 봉사에는 열심이면서 정작 주님의 크신 명령인 복음전도 명령을 불복종하는 죄에 빠져 있지 않는가?
이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위에 열거한 내용은 물론이고 더욱 주님의 뜻에 합한 생활을 찾아서 힘쓰며 특히 전도의 생활화로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삶을 실천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 교회원들 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세계 모든 교회의 교회원들 모두가 천국으로 들어가서 모두 함께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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