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백두산 (백두산 종횡 등정과 고구려 유적지 탐방 여행기) 2005. 8.24~8.29
백두산 종주여행! 사삼여동회가 태동 후 두번째 여행지로 우리민족의 영산 백두산 종주로 결정하였다. 단일팀으로 떠나자면 25명 이상이라는 여행사의 조건도 어렵고, 동부인하는 우리 사삼여동회로서는 전원의 종주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종주팀과 트레킹팀 2개의 팀으로 나누어 단체팀을 구성키로 하였다. 종주팀이 12명으로 파악되자 산악회 멤버도 아닌 환갑을 넘긴 나이인지라 여행사측으로서도 걱정이 많은 모양이었다. 어쨋든 25명을 목표로 공지를 했는데 의외로 30명이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 3시가 되자 인천 연안부두에 있는 국제여객터미널에 속속 모여들었다. 환한 웃음으로 즐거운 여행을 떠나는 표정들이 역력하였다. 사전에 준비물들을 자세히 알린지라 여행가방과 베낭의 짐들이 보통이 아니다. 배멀미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 미리 배멀미약을 먹고 귀미테를 붙이는 등 혹시나 하는 걱정에 대비하는 모습들이다. 단동으로 가는 동방명주호는 10,600톤이나 되는 대형 여객선이라 크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라 믿지만-- 예정시간 보다 무려 한시간이나 늦게 출발한 배는 인천 항구의 모습을 뒤로 하고 인근 조그만 섬들도 제치고 서쪽 공해상으로 나갔다. 한참을 가다보니 방향계가 북쪽을 가리킨다.
중국의 단동항이 목적지이다. 비가 내려 일몰은 전혀 구경하기가 어렵다. 배 안에는 대만원이라 아수라장이었다. 일주일에 세차례 떠나는데 정원이 499명에 70~80명의 오버 부킹이라 메트레스를 더 깔고 식당과 복도에도 잠자리를 만드는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우리는 여자 14명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고 남자는 8명씩 두 군데로 나뉘어 자리가 배정되었다.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 선상부페의 저녁식사를 마치자 모두 바깥 바람을 쐬러 난간으로 나와서 옹기종기 모여 얘기꽃을 피우며 시간을 보냈다.
준비물을 자세히 일렀지만 한가지 필수품이 빠졌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데는 동양화(화투)나 포커가 최고인데- 지난해 동해상으로 갈 때는 바둑판을 가져갔기에 이번 경우는 깜빡 잊었던 것이다. 이번 경우는 바둑판이 짐이 되기에 준비치 않았는데,어떤 회원은 소형 바둑판을 가져와 인기를 모았다. 여자들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침구가 깨끗하고 흔들림이 적어 조용히 잠잘수가 있었다. 아침이 밝자 언제 일어났는지 혹시나 일출을 볼 수 있을까 하여 갑판으로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날씨가 흐려 일출구경은 할 수 없었다. 배는 9시30분에 예정대로 도착하였다. 한시간 늦게 출발 했지만 속도를 낸 모양이다. 하선하여 중국 단동으로 입국절차를 마치고 기다리던 버스에 오르니 11시가 가깝다. 배를 탄 시간을 계산하니 무려 15시간이 넘는다.
옛고구려 땅을 밟으며 버스에 올라 현지 산악가이드가 먼저 탑승하여 지나가는 지명에 대해 설명했다. 단동의 동강시는 면적이 2,444 평방km로 인구 60만명의 바다를 낀 도시로 해물이 풍부한 곳이다. 1시간 거리의 단동시는 72만명의 큰 도시로 요녕성에서 6번째 대도시이다. 동강,단동의 면적은 15,222평방km라고 한다. 단동에는 한국 거리가 있고 북한산 참깨.검은깨,검은콩 등 무공해 농산물이 유통되고 있다. 단동 맞은 편이 바로 북한의 신의주이다. 가이드가 오늘 의 일정을 소개한다. 중식후 5시간을 가야 집안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능과 비를 보고 다시 2시간을 가면 통화에 도착하게 된다. 통화에서 1박을 한다. 다음날 백두산 등정을 위해 새벽 2시에 일어나야 한다. 압록강을 따라 북동쪽으로 버스는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다. 포장된 도로라지만 길이 나쁜지 버스가 나쁜지 속도를 낼수가 없다.압록강은 무려 803km라는데 모두 103개의 섬이 있다고 한다. 한강에는 16개의 섬이 있다는데-- 103개 중 100개는 북한쪽에서 나머지 3개가 중국에서 관리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유명한 위화도를 지나고 있다. 압록강철교가 그 위용을 뽑낸다.
귀경길에 기회도 있지만 얼른 사진을 찍는다. 압록강 건너편은 인구 30만을 가진 북한의 신의주이다. 압록강변을 따라 달 리다 보니 한국관이라는 아파트군이 즐비하게 건설되고 있었다. 5성급 호텔도 건축한단다. 개발구 광장이다. 압록강은 중국과 북한이 국경선을 이루고 있다. 단동시내에 들어갔다. 단동은 옛 안동이다. 중식은 갈매기식당에서 한식으로 하였다. 식사를 하고 또다시 버스로 장거리 여행을 시작하였다. 애하강이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만리장성의 동단이라는 호산장성의 모습도 보인다. 강폭이 좁아든다. 불과 5m 건너서 북한 땅이란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달리는 길은 좌우에 옥수수 밭과 복숭아 밭이 계속되었다. 길 옆에는 코스모스,무궁화,구절초,백일홍이 우리를 반긴다. 이정표 없는 거리를 한없이 달린다. 가끔씩 복숭아 밭과 노점상이 사람 냄새를 풍긴다.관전(寬甸)현 하구(河口津)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하구진에는 잉어,붕어의 양식장으로 유명하단다. 압록강 건너는 북한 강산마을이다. 벌써 오후 2시반이 지나고 있다. 앞뒤로 차는 없다. 우리만 열심히 달리고 있다. 소위 대통령 드라이브이다. 오리와 거위,그리고 염소떼가 길위에서 속도를 늦춘다. 뭉게구름이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길 옆 시냇물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붉은 지붕의 중국 가옥들이 가끔씩 나타난다. 집안까지는 183km가 남았다니- 아직도 몇시간을 더 가야 하나? 졸본에서 발원하는 비류스강(혼강)이 압록강과 합류하고 있다. 우리 조선족의 자치주인 동북3성은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이다. 지금 압록강을 따라 가고 있는 요녕성은 끝나고 길림성으로 진입하고 있다. 경계지점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버섯화장실이라고 하는 기묘한 모습의 화장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단동에서 집안까지의 거리는 약 300km이다. 집안시의 맞은편 북한 땅은 자강도 만포시이다. 불꺼진 만포시가 대조적이다. 북한의 헐벗은 산에는 옥수수와 콩을 심어 주식으로 생산한다고 한다. 6시20분경 집안시에 도착했다. 집안은 고구려 2대 유리왕이 환인(졸본성)에서 수도를 옮겨온 국내성이 있는 곳이다. 현재는 포도주와 약 생산지로 유명하다. 분지인데 춥지않고 덥지 않다고 한다. 양 옆으로 산과 강으로 둘러쌓여 성벽만 쌓으면 방어 요새로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다. 국내성 길이는 2,681m로 7~8m의 성벽이 있었으나 지금은 3m 정도만 남아 있다. 12,000개의 돌무덤이 역사현장으로 남아 있다는데 시체를 돌로 3층높이에 쌓아 돌무덤을 만들었고,5층으로 된 적석묘가 많이 발견된다. 집안은 동걸이라는 하천이 흐르는데 오른쪽은 강, 왼쪽은 산으로 형성되어 강 줄기를 따라 성터가 쌓여 있다. 집안시내를 통과하여 날이 어둑어둑해 질 무렵 광개토대왕비에 도착했다. 비석은 훼손을 막기 위해 방탄 유리집 속에 엄중히 보관되고 있었다.
압록강 철교 버섯 모양의 화장실
고구려인이 기록한 고대사 바위책 높이 6.39m,총 1,775개의 글자로 음각되어 있는데 1권의 책과 같은 양이다. 이 중 146글자는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청나라 때 농민이 발견하여 소똥과 기름으로 문질러 글자를 알아보려고 하다가 파손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일본 장교의 비문 변조로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고 나아가 일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 하는 정한론으로 까지 발전하기도 했다.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개토태왕비문에 씌어진 광개토태왕의 시호다. 뜻을 풀어보면, '국강상'은 광개토태왕릉이 있던 지역의 이름이고,'광개토경'은 국토를 넓혔다는 뜻이며,'평안호태왕'은 백성들을 평안하게 해준 위대한 왕이라는 의미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번째 부분은 추모(주몽)의 고구려 건국신화가 적혀 있다. 두번째 부분은 광개토태왕의 생애 및 정복 활동 즉 북으로는 비려, 동부여 등 북방민족을 정벌하고 남으로는 백제,가야,왜 등을 정벌한 기사가 적혀 있다. 세번째 부분은 누가 묘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의 고구려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대해서 많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광개토태왕비는 '삼국사기'보다 700년이나 앞서 고구려인이 직접 기록한 것이며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다. 우리의 손으로 직접 기록한 고대사서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 공백을 메워주는 소중한 바위책인 것이다.
훼손된 엄청난 크기의 광개토태왕릉
태왕릉은 능 자체의 규모도 엄청나지만 호석의 크기는 당시 이 능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지금은 거대한 돌무더기만 남아 능의 원래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능 주위를 돌아보면 장군총과 같은 기단의 석재들이 일부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태왕릉 역시 장군총과 같은 형태의 거대한 방단형 적석총 즉, 대형 피라미드였음을 알 수 있다. 장군총보다 3배나 큰 규모이다. 한변의 길이가 66m,높이는 현재 14m로 기록된다.설계자료가 없고 도굴 때문에 보수가 불가하다는 말에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열쇄를 열고 들어간 무덤내에는 돌관이 두개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왼쪽은 왕, 오른쪽은 왕비라고 한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한 위대한 왕중의 왕 광개토태왕의 무덤이 이토록 훼손시켜서 되겠는가 허무한 느낌을 가지며 가까이에 있는 장군총으로 향했다.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 장군총은 수려한 조형미와 가장 보존이 잘 된 고분이라는 점 때문에 주목의 대상이다. 어느 중국인 학자는 이 고분을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했다. 집안 일대의 수많은 피라미드 가운데서 오직 장군총 만이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가슴 아프지만, 반면에 이토록 멋진 '동방의 피라미드'에 자유롭게 다가가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흡족한 생각이 든다.
능의 측면에 기대어 세운 11개의 호석은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미가 독특하다. 당초는 12개였다는데 지금은 11개만 남아 있다. 장군총 네 귀퉁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배총(陪塚:딸린무덤)은 현실의 앞부분이 허물어져 있어서 그 축조법과 구조를 잘 확인할 수 있다. 장군총의 높이는 12.4m, 한변의 길이는 30m가 넘는다. 이런 거대한 피라미드를 축조하는 것은 충분한 경제력과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조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이 왕릉이 어느 왕의 무덤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장수왕의 무덤설이 가장 유력하다.
광개토대왕비각
광개토대왕 비석 호태왕비 장군총
장군총 표지석
반갑습네다 후라시까지 동원하고 피라미드 역사현장을 구경하고 집안 시내에 있는 북한 식당으로 갔다. 한복을 차려입은 북한 아가씨들이 '반갑습네다'를 연발하며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식사는 중국식에 한식을 섞은 것으로 중국식 생선찜에 고사리,도라지 등 우리 고유의 음식이 나왔다. 식사를 마치자 북한 아가씨가 큰 화면과 무대 앞에서' 반갑습네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두만강 푸른물' 동요등 노래를 불러주어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우리일행의 대표가수 이대희 동문도 같이 부르고, 마지막으로 부른 '고향의 봄'은 전원이 합창으로 불렀다. 통화까지 가야 내일 일정을 맞출수 있다. 2시간을 달려 통화에 도착했다. 내일은 역사적인 백두산 등정일이다. 새벽2시에 기상이란다. 잠잘 시간이 거의 없다. 각오한 일이지만--
천원짜리 비닐바지 인기 8월26일 3일차 날이다. 새벽 2시에 모닝콜, 2시30분경 식당으로 내려와 죽과 계란으로 간단히 조식을 마치고 3시10분경 호텔을 출발하였다. 백두산을 향해 송강하로 약 3시간을 달렸다. 6시30분 송강하에 도착후 버스내에서 가져간 김밥을 아침식사로 먹었다. 점심도시락과 삶은 계란,물을 배낭에 넣고 다시 1시간 30분이 걸려 산문입구에 도착했다. 산문입구에서 버스가 오를 수 있는 주차장까지 올랐다. 가져간 프랑카드로 A,B팀이 모여 단체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중국인들이 프랑카드를 압수하려 들었다. 중국말 외의 프랑카드는 무조건 압수란다. 사진을 찍지 못하고 겨우 압수만은 면했다. 바람이 세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가져간 우의로는 부족하여 비닐바지를 사서 입었다. 과연 종주가 가능할까? 비와 안개 때문에 천지를 볼수 있을까? 9시30분경 등산이 시작되었다. 완만한 계단으로 된 등산로는 자주 등산을 하지 않는 사람은 무척 힘든 코스이다. 비록 완만하지만 계단을 30분이상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가 와서 공기가 안 통하는 우의를 입고 산소가 부족한 고산지대를 쉬지 않고 오른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아무리 천천히 오르라고 강조하지만 일행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본능 때문에 반도 못가서 얼굴이 노랗게 변하며 힘들어 하는 회원들도 있었다. 종주팀 12명 중 얼마 오르지 않아 벌써 포기자가 나왔다. A팀은 10시반까지 하산하라고 했다. 끝까지 못가고 내려가는 회원도 있었다.
북한땅 밟다 /5호경계비 회군 5호경계비에 도착하니 비,바람,안개가 대단했다. 손이 시렵고, 과연 종주가 가능할까? 종주팀에 참석했던 아내도 겁이 나는지 자꾸 내려가잔다. 여자들은 모두 내려가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A팀들은 벌써 내려갔고 우리가 하산할 때는 버스가 출 발하고 없을 것이다. 통신도 전혀 안된다. 죽으나 사나 종주를 해야 한다. 약한 소리 말라고 기를 모아 본다. 얼마후 전문산악인들이 의견을 종합한 결과 이런 날 강행을 할 경우 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결론으로 모두 하산할 갈 것을 권했다. 버스가 기다린다는 것이다. 나는 팀의 리더로 결심을 해야 했다. 나 자신부터 종주를 꿈꾸며 이번 여정에 참가했던 만큼 누구 못지않게 강행하고 싶지만 만약의 사태를 위해 빨리 욕심을 접어야 했다. 우리 일행 모두 하산키로 결정했다. 같이 간 산악회 팀들도 결국 다 하산했다고 한다. '위화도 회군'이 아니라 '5호경계비회군"이라며 씁쓸히 하산을 재촉했다. 5호경계비는 중국과 북한땅을 경계짓는 표석으로 북한쪽 땅을 밟아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비바람 때문에 사진 찍기 도 어려웠다. 10시40분 경 일행 모두가 하산을 완료했다. 어쩔 수 없이 전 일행이 A팀이 되었다. 버스로 송강하로 가서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이도백하로 간다. 북파로 백두산등정을 위해서다. 버스로 계속가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백두산 크기가 전라북도 크기인데다 기차길 외에는 도로가 없단다. 북파쪽 등산을 위한 배낭짐만 챙기고 나머지 여행가방은 버스에 실어 놓은채 송강하역에서 기차에 올라탔다. 점심은 기차에서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인들과 자리를 같이 해 필담을 주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중국인들도 상당히 관심을 갖고 대해 주었다. 漢字가 의사전달의 큰 역할을 해 준다. 이도백하까지 기차로 두시간, 그리고 북파산문을 거쳐 등산로 지점까지 셔틀버스로 한시간을 가야 한다.
천문봉이냐? 달문이냐? 북파산문에 도착했다. 이제 찦차를 타고 천문봉으로 가서 천지를 내려다 보느냐, 아니면 달문쪽으로 산행을 하여 달문의 천지물로 세수라도 하는 기쁨을 가질 것인가 이 또한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다. 나는 나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님을 알고 의견을 물었다. 천문봉에서 천지만 볼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은 없지만 날씨로 봐서 확률이 너무 적다. 어쩔수 없이 거수로 투표를 했다. 12대 12로 동점을 이룬다. 다시 재투표를 하니 15대 12로 달문쪽이 우세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천문봉으로 간 다른 일행은 1분도 서 있지 못하고 바로 하산해야만 했다고 한다. 우리는 부지런히 걸어 달문쪽으로 향했다. 달문까지 못가는 회원들이라도 장엄한 장백폭포의 위용만으로도 만족하는 경관이다. 우렁찬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웅장한 산세에 압도되어 천지를 못 본 서운함은 어디로 사라지고 가슴 뿌듯한 감회에 젖고 있었다. 작년 5월초에 아이젱을 차고 오른 이 등산로는 가파른 1236개의 계단길과 터넬 속 급계단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모두들 온 힘을 다해 천지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신비한 힘이 나는 것 같다. 장백폭포 앞에서 개인별로 기념사진을 찍고 어둑해지기 시작할 무렵 달문에 도착했다. 높은 산이라 어둠이 빨리 오는 것 같았다. 나는 감회에 젖어 천지의 물 한모금을 마시고, 손 얼굴을 씻었다. 빠짐없이 도착하는 대로 사진을 찍어댔다.
열부의 순애보 허진호 동문은 물이 새지 않는 고아텍스 모자를 뒤집어 천지물을 가득 담아 들고 하산을 한다. 왜냐 했더니 뒤쳐저 오르는 아내에게 천지물을 바치기 위해서란다. 열부상이라도 - 정말 감동스런 장면이었다. 천지의 파란 물을 볼 수는 없었지만 달문으로 가서 천지수를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었던 것만도 선택을 잘 한 것으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천지를 보는 것은 3대에 걸쳐 공덕을 쌓아야 가능하다는 말을 한다. 과연 어려운 것 같다. 성목회회장을 비롯 많은 천주교 신도도 있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도, 절에 열심히 나가는 불자들도 있었지만, 공덕 부족 탓인지, 우리의 복덕이 부족한 탓인지--
온천수에 몸 담그고 하산하는 길은 어두워 후라시를 들어야만 했다. 내려오는 길에 온천수에 삶은 계란을 사 먹었다. 소천장에 도착하여 숙소인 장백산호텔에 여장을 풀고 가까이에 있는 식당에서 맛있는 식사타임을 가졌다. 여행사측에서 하산주라고 맥주를 준비했으나 빼갈로 바꾸어 마셨다. 숙소호텔에서 단체 온천욕을 했다. 장백폭포 가까이 있는 관광호텔보다 시설이 낙후했으나 물은 좋은 것 같았다. 피곤한 몸을 온천수로 닦아내니 한결 가벼운 느낌이다. 내일도 아침 5시에 기상이라니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수 밖에 없었다. 8월 27일 아침 7시40분 기차를 타려면 6시30분에는 출발해야 한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틈을 내어 소천지 구역내 호수공원(銀環湖)을 찾았다. 호텔에서 5분거리에 있어서 산보거리로 좋았다. 몇몇 부부들이 소문을 듣고 산보를 나왔다. 떠나기 전 가져간 프랑카드로 호텔 앞에서 단체사진을 남겼다. 비록 천지는 아니더라도 백두산 소천지에서 찍는 감회 만으로도 충분한 느낌이 있었다. 프랑카드에 '백두산 종.횡'이라는 묘한 문구로 화제가 되었다. 클럽장이 종주팀만이 아니기 때문에 국어사전까지 들쳐가며 택한 용어란다.
집안 북한식당에서 송강하
달문 가는 길 북파산문 앞에서 백두산 종횡 43여동회 일행
서파산문 앞에서 소천지 은환호
장백폭포
중국인의 호의 셔틀버스로 이도백하까지 가서 그곳에서 기차를 탔다. 송강하까지 가야한다. 이도백하에서 백하,영수하,천양을 거쳐 송강하까지 가는 여정에 우리 좌석에는 중국인이 한사람 타고 있었는데 꽤 오랜 시간을 동행하면서 한자 필담을 나누었다.그는 산림국에 근무하는 사무요원으로 핸드폰도 두개나 갖고 다니는 제법 인테리였다. 나이와 이름을 밝히더니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적어 준다. 자기가 사는 임하지방에는 장뇌삼과 녹용이 유명하단다. 꼭 한번 놀러 오라고 하면서 마지막 작별시간까지 일어서서 배웅을 해 주었다.
교통지옥 통화 10시반경 송강하에서 우리 버스를 만났다. 버스로 통화까지 가게 된다. 한시간 쯤 달리니 폭우가 쏟아진다. 폭우 속에서도 가로에는 코스모스와 백일홍이 안녕 인사를 한다. 비는 금방 그치고 언제 그랬냐는듯이 파란 하늘을 내다 보인다. 통화로 가는 길에 백산시가 나왔다. 백산에는 상황버섯보다 더 효험이 있다는 차가버섯이 재배된다고 한다. 이 백산에서 멀지않은 곳에 개마고원이 있다고 한다. 1시경 백산 톨게이트를 지나 길 양 옆으로 우뚝 선 화력발전소 시설이 보였다. 왼쪽의 냉각탑, 그리고 오른 쪽의 화력발전소가 시선을 끌었다. 30분을 더 가니 통화입구가 보였다. 통화는 인구가 225만명이나 되는 요녕성의 5번째의 큰 도시이다. 통화시내는 교통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사람,차,마차가 뒤엉켜 엉망이었다. 그래도 누구하나 화내는 사람이 없다. 오늘은 하루종일 기차와 버스를 탄다. 통화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환인으로 향했다. 환인은 고구려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길림성에서 요녕성에 진입한 것이 오후 3시반. 비포장 도로가 이어진다. 환인의 왼쪽은 비루스강(혼강)이 흐르고 있다.
4인용 화장실 오가는 도중 가장 곤란한 것이 화장실이다. 남자들이야 차만 설수 있으면 아무 곳이나 자연화장실이 된다. 그래서 가이드가 종종 버스를 세우면서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의 화장실이라고 구분해 주었다. 주유소가 있는 곳은 공중화장실이 있게 마련인데 뻥 뚤린 화장실은 칸막이도 없고 변보는 구멍만 있어 여자들은 아연실색을 한다. 4인용, 2인용 화장실이라고 누군가 명명했다는데, 엉덩이를 내 놓은 모습이 우스운지 깔깔거리며 웃어댄다. 아직 이런 현실이 중국의 현주소이다. 언젠가는 중국도 이런 모습이 없어지겠지만- 오가는 동안 지루한 시간을 K회원이 가이드D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많은 웃음을 선사했다. 남을 즐겁게 하는 기술 아니 배려가 아름답기까지 하다.
고구려 첫 도읍지 오녀산성 멀리 졸본성(홀본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개 때문에 희미한 윤곽이지만 아름답다. 해발 831M의 높이에 위치한 고구려 첫 도읍지다.요녕성 환인현 환인진의 동북쪽 8.5KM거리의 오녀산 정상부에 위치한 오녀산성은 고구려 첫 도읍지라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오녀산의 수려한 자태와 이를 감싸고 도는 혼강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머리에 남는 유적지이다. 졸본성은 축구장 31개 경기장 크기의 면적이라고 한다. 비루스강 쪽에는 성벽이 쌓여 있고 깎아지른 듯 급한 절벽이 완벽한 요새지이다. 졸본성은 홀본성으로 부르고 오녀산성이라고들 한다. 유리왕때 장군들이 전장에 나간 틈에 도읍지를 환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5장군의 부인들은 이 졸본성을 끝까지 떠나지 않고 지켰다는 의미로 오녀산성이라고 한단다.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면서 멀리 뿌옇게 보이는 오녀산성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책에서 읽은 오녀산성의 사진을 싣는다.
청산리골의 아름다움에 반해 환인을 떠나 오늘 저녁 회식을 할 여진족 마을로 향했다. 여진족 마을은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청산골이다. 7시10분경에 이 고을에 도착했으나,배가 불러 늦게 8시경 특별식인 양고기 바베큐를 먹기로 했다. 심심산중이라 공기가 그렇게 맑다고 한다. 제법 많은 인파들이 관광을 와 있었다. 호텔 체크인을 하는 동안 민속쇼를 하는 공연장의 음악소리가 들렸다. 7시반부터 10시까지 여진족 민속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우리 가락과 비슷한 음악에 탈춤도 우리 것과 비슷했다. 여진족이란 금나라를 세운 우리 신라인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문화도 유사점이 많은 것은 아닌지? 공연장에서 몇 컽의 사진을 찍고는 식당으로 갔다. 마당에는 양이 껍질을 벗겨진채 통으로 숯불에 굽히고 있었다. 양고기에 중국식 식사를 곁들여 술을 양껏 마셨다. 식당 내에는 노래방 기기가 있어, 여러 쟁쟁한 가수들이 실력을 뽑냈다. 이곳 청산리는 공기가 맑고 개천물이 맑아 모두들 빼어난 경관에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호텔내 시설이 엉망이어서 불만이 많았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기차 안에서 중국인과 대화 청산리에서 공연
8월28일 이날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새벽 4시반에 전화콜 대신 노크콜을 했다. 아침에 산책길에 나섰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붉은 등이 달린 다리를 건너 아름답게 흐르는 개천을 보면서 -- 어젯밤 붉은 등아래에서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정작 아침에 보니 개천이 너무나 아름답다.청산골의 아름다운 경치는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5시45분 경 버스에 올랐다. "호산장성과 일보과"관광 스케쥴이다. 버스로 가는 길목에 인파가 많아서 차창 밖으로 내다 봤더니 마침 오늘이 장날인 모양이었다. 시간만 된다면 장터 구경을 하고 싶었다. 버스속에서 총각인 가이드가 이곳 결혼 풍습에 신이나서 설명을 한다. 잔칫날도 택일을 하는데 음력으로 3,6,8,9,0 날을 보통 택한다고 한다. 약혼식날 신랑은 신부옷을 16벌이나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결혼식 당일에 옷을 8번이나 갈아 입는다고 한다. 반지,시계-- 봉이 빠진다고 느스레를-
만리장성의 동쪽 끝 호산장성(虎山長城) 단동에 도착하여 호산장성으로 향했다. 단동시내에서 압록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30km 정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고구려의 박작산성이 있던 곳으로 그곳에 1990년대에 중국에서 중국성 형태의 성을 새로 만들어서 만리장성의 동단이라 주장하고 있는 성이다. 호산장성은 만리장성을 방불케 한다. 성의 길이는 1.2km 높이 7~8m 너비는 4m이다. 호산장성 앞에서 우리 일행은 백두산 종.횡 프랑카드를 앞 세우고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호산장성에서 잠시 걸어가면 조그만 개천을 사이에 두고 바로 건너편에 북한땅과 북한주민을 볼 수 있었다. 일보과- 한발짝 지난다는 뜻의 이 곳에서 유람보트를 타고 관광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좀 위험해 보였다. 시야에 보이는 저쪽에 북한주민(가족인듯) 사람들이 나와서 이쪽을 보고 있다. 선물 등을 전해주면 된다고 한다. 이산가족을 보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표지판 앞에서 기념사진들을 남기고 북한주민들을 보았다는 묘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복숭아,자두를 사서 깨끗한 물로 씻어 모처럼 단 과일 맛을 즐겼다.
호산장성 중국 북한 경계 일보과
압록강 유람선을 타고 다음순서는 압록강 유람선 관광이다. 일보과에서 본 유람선과는 달리 규모도 크고 안전한 것 같았다. 배위에서 북한 돈, 북한 우표를 팔고 있었다. 중국 단동시의 압록강변의 공원모습과 북한 압록강변 모습이 대조를 이루며 어쩐지 서글픈 북한 위상을 보는 듯 했다. 유람선은 압록강 철로 옆으로 해서 북한쪽 으로 다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이다. 압록강 다리는 단교된 다리와 그 옆으로 철교가 있었다. 단교된 다리는 전쟁 때 미국 전투기에 의해 파괴된 것이라 하는데 관광객이 끊어진 다리위 까지 보였다. 북한 땅에는 여전히 '21세기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 라는 프랑카드가 곳곳에 붙어 있어 선동정치를 느끼게 했다. 유람선 여행을 마치고 단동 시내의 북한식당 청류관에서 중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북한 아가씨들이 안내를 했다. 북한술 들쭉술도 시켜서 모처럼 북한에 온 듯한 기분을 냈다. 한병에 우리돈으로 18,000원이니 제법 비싼 술이다. 식사를 마치고 쇼핑을 위해 북한사람이 경영한다는 가게로 갔다. 참깨, 검정깨, 검정콩 등 북한산 농산물과 중국제 한약 그리고 차류 - 부모나 손주에게 줄 선물을 고르느라 모두들 분주한 모습들이다.
단동 평양청류관 단동 시내
귀국선 동방명주호 모든 여정을 마치고 귀국선 동방명주호를 타러 단동부두로 버스를 달렸다. 팀을 인솔한 나는 버스내에서 마지막 감사의 인사말을 했다. 부산한 탑승절차를 마치니 역시 귀국하는 배에도 대만원이다. 선상에서 양주 시버스리갈로 마지막 파티를 했다. 부인들이 안주감으로 남은 과자류와 먹거리를 내놓았다. 부인네들은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피곤함도 잊고 계속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돌아오는 서해바다는 너무나 잔잔한 호수 같은 파도물결에 배멀미는 전혀 없는듯 했다. 선상부페로 일찌감치 저녁을 마쳤다. 배 주위를 걸으면서 운동하는 회원들도 있고, 바깥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면서 여행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더듬는 회원들도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지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하는 모습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모두들 날도 새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고 있었다. 혹 일출이라도 볼 요량으로- 그러나 여전히 안개와 구름이 많아 해뜨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예정보다 무려 두시간이나 늦게 하선을 마치니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몇명이서 콜밴을 이용하여 집으로 오니 12시30분- 대장정을 큰 사고없이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으로 피로가 엄습했다. 무조건 휴식이 필요한 것 같다. 이번여행에서 이윤달회원이 회계를 맡아 주었다. 돈관리의 어려움은 해본 사람만이 안다. 박정희 클럽장은 현직의 바쁜 생활중에도 프랑카드도 만들고 따뜻한 후원과 격려로 큰 힘을 주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다시한번 이번 여행에 참가하신 여러 회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참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 성원을 아끼지 않으신 여러 회원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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