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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1548년(명종 3) 무신 별시 문과(文科)에 '박거인(朴居仁)'이라는 인물이 병과(丙科) 13위로 급제하였다. 그런데 이 朴居仁의 본관(本貫)은 어디인가? 규장각(서울대학교)에 있는 『국조문과방목』(종합방목)을 비롯하여 몇몇 방목(모두 종합방목)에 朴居仁의 본관을 반남(潘南)으로 표기하고 부(父)ㆍ조부ㆍ증조부의 이름을 첨기해 놓은 것이 보인다. 이 종합방목을 본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1548년(명종 3) 무신 별시 급제자 朴居仁은 반남박씨 인물이라고 믿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반남[나주]박씨 족보에는 朴居仁이라는 인물이 없다. 방목에 나오는 朴居仁의 부ㆍ조부ㆍ종조부와 같은 이름을 가진 반남박씨 인물은 朴居仁이 아니라 朴安仁이다. 반남박씨 朴安仁의 방주에는 문과급제자 표시도 없고 관직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당연히 의심해 볼 만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방목의 기록만 철석같이 믿고 朴居仁과 朴安仁을 동일 인물로 단정하려 한다.
한 가지 먼저 알아 둘 사실이 있다. 과거 급제자 명부인 방목은 당해(當該) 과거의 급제자 명부를 보여주는 단회방목과 후세에 와서 앞서 치러진 여러 차례 과거의 급제자들을 한데 묶은 종합방목이 있다. 명종 3년 무신별시 급제자 명부인 당시의 방목(榜目)(단회방목)은 현존하는 것이 없다. 朴居仁의 본관을 潘南으로 표기한 모든 방목은 후대에 만들어진 종합방목이다. 1548년(명종 3) 당시 반남박씨는 본관이 반남(潘南)이 아니라 나주(羅州)였다. 즉, 당시에는 '반남박씨'가 아니라 '나주박씨'였다(1412년 12월 13일 태종실록). 그래서 조선 중기 이전의 문헌에는 본관이 모두 羅州로 되어 있다. 본관을 '반남'으로 (다시) 쓰게 된 것은 1683년 제2차 족보(계해보)를 간행한 이후부터이다(그 이후에도 계속 羅州로 쓴 문헌들이 많다). 따라서 1683년 이전의 역사적 기록에 본관이 '潘南'으로 되어 있다면 그것은 1683년 이후에 작성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종합방목은 후세인들이 급제자의 인적 관련 정보를 나중에 보충한 경우가 매우 많다. 당연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종합방목은 이 사람 저 사람에 의해 그대로 필사(筆寫)되어 여러 개로 재생산되었다. 잘못된 정보 기록도 그대로 복사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현존하는 방목 중에는 朴居仁의 본관과 선대 계보에 관한 정보가 공란(空欄)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즉, 朴居仁의 본관과 개인 정보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자료가 있다. 바로 Wagner 교수와 송준호 교수가 공동으로 종합 정리해 놓은 『보주조선문과방목(補註朝鮮文科榜目)』에 보면, 朴居仁의 부친 이름이 박승수(朴承璲)이고 본관이 고령(高靈)이라는 자료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렇다면, 문과 급제자 朴居仁은 몇몇 문과방목(후세의 종합방목)에 표시된 것처럼 반남박씨 朴安仁과 동일 인물일까? 혹은 반남(潘南)이 아닌 다른 본관(本貫)의 박씨(예컨대, 고령박씨) 인물일까?
II. 몇 가지 의문점
만약 명종 3년 무신 별시 문과 급제자 박거인(朴居仁)이 반남박씨 박안인(朴安仁)과 동일 인물이라고 한다면 즉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1) 의문1
문과 급제는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출발점이었다. 만약 집안에 문과 급제자가 나오면 온 문중이 축하하고 널리 세상에 알렸으며 당연히 그것을 족보(세보)의 기록으로 남겼다. 족보의 속성을 생각해 보자. 족보를 편찬 간행하는 근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가문의 세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문과 급제와 관직은 족보 기록의 가장 중요한 항목의 하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자손들이 조상의 영예로운 일을 족보에 누락시키는 경우는 사실상 없었다(자손들이 몰락한 경우를 제외하고).
1548년(명종 3) 무신별시에 박거인(朴居仁)이라는 인물이 급제하였다. 어떤 이는 그 박거인이 바로 반남박씨 박안인(朴安仁)이라고 한다. 1642년(인조 20) 최초의 나주[반남]박씨족보(임오보)가 경상도 영천(=영주)에서 간행되었다. 그 족보(임오보)에 박안인(朴安仁)이 올라 있다. 임오보 당시 박안인의 장남(5남매의 맏이) 박렴(朴濂: 1581~1658)은 생존해 계셨다. 박렴의 당시 관직은 <부장(部將)>으로 임오보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부친 박안인의 방주에는 문과급제나 관직 기록이 없다. 그 뒤의 계해보(1683년), 병술보(1766년) 등도 마찬가지이다(다만, 아들 박렴의 관직이 <部將>에서 <주부(主簿)>로 바뀌었음). 왜 아들의 관직은 기록하면서 정작 '가문의 영광'인 부친의 문과 급제와 관직은 족보에 올리지 않았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올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온당한 대답이 아닐까?
(2) 의문2
선조(宣祖) 초에 반남박씨 5세 반남선생[박상충朴尙衷]의 산소를 재발견하여 후손들이 묘소를 새롭게 정비하고 묘비를 세웠다. 비문은 소고공(嘯皐公)(박승임朴承任)이 짓고 남일공(南逸公)(박응남朴應男)이 썼다. 그 비문 속에 박영, 박승간, 박승임, 박응남, 박응복 등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박영(朴詠)은 1538년(중종 33) 알성시, 박승간(朴承侃)과 박승임 형제는 1540년(중종 35) 식년시, 박응남은 1553년(명종 8) 별시, 박응복(朴應福)은 1564년(명종 19) 식년시에 각각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분들은 바로 朴居仁이라는 인물이 문과에 급제한 1548년(명종 3)을 전후하여 문과에 급제한 나주[반남]박씨 인물들(반남선생 후손들)이다.
그런데 반남선생 묘비문 어디에도 朴居仁은 물론 朴安仁이라는 이름은 없다. 비문을 지은 박승임은 나주[반남]박씨 박안인과 9촌 사이이고, 비문을 쓴 박응남은 박안인과 8촌 사이이다. 만약 문과 급제자 관인(官人) 朴居仁이 반남박씨 朴安仁이라면 박승임ㆍ박응남 등이 그를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 문과에 급제하고 도사(都事)ㆍ군수(郡守) 등의 관직을 역임한 박거인(또는 박안인??)의 이름은 묘비문에 없다. 나주[반남]박씨 종중의 크나 큰 자랑(문과급제와 관직 역임)이 될 인물을 왜 빠트렸을까? 이 의문에 대해서도 역시 <그런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온당한 대답이 아닐까?
(3) 의문3
2012년에 간행한 반남박씨 임진보에 박안인(朴安仁)의 초명(初名)이 '거인(居仁)'이었다고 한다. 제1차 임오보(1642년)부터 제7차 경신보(1980년)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安仁'으로만 되어 있었는데 임진보에 와서 갑자기 초명이 '居仁'이었다고 추가로 기록하였다. 아마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방목(종합방목)의 박거인 인적 정보 기록에 맞춘 것으로 판단된다. 뒤에서 자세히 거론하겠지만, 1548년(명종 3) 이후에 편찬 간행된 모든 자료--예컨대, 『명종실록(明宗實錄)』ㆍ『묵재일기(默齋日記)』ㆍ『교남지(嶠南誌)』ㆍ『고령읍지(高靈邑誌)』ㆍ『하동읍지(河東邑誌)』 등등--에 朴安仁이 아닌 朴居仁만 등장한다. 한편, 임오보에서 경신보에 이르는 모든 반남박씨 족보(세보)에 '거인(居仁)'이라는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오로지 '安仁'으로만 나온다.
이러한 상황은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과거급제 당시에도 居仁이라는 이름을 쓰고, 그 후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오로지 居仁이라는 이름만 쓰다가 반남박씨 족보(임오보) 편찬할 때만 '安仁'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인가? 설마 태어나서부터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 생활하면서 계속 居仁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별세(別世)하기 직전에 安仁으로 바꾼 것일까? 만약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즉 임오보 간행 직전까지 이름이 居仁이었다면, 반남박씨 족보에 진즉 그렇게 표시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임오보에서 경신보에 이르기까지 그런 기록은 없다. 아드님인 부장공/주부공(박렴朴濂: 1581~1658)을 비롯하여 자손들이 그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III. 박거인(朴居仁) 관련 기록
(1) 『명종실록』과 『묵재일기』
1548년(명종 3)년 무신 별시 병과 13위(17/22)로 급제한 박거인(朴居仁)은 그 이후 여러 자료에 등장한다. 우선 명종 17년(1562년) 7월 3일(음) 실록 기사에 "도사(都事) 박거인(朴居仁)"으로 언급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朴居仁이 都事 벼슬을 지냈다는 사실은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 1494 성종 25년 ~ 1567 명종 22년)의 일기(『묵재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묵재 이문건은 본관이 성주(星州)이며, 1513년(중종 8) 계유식년 사마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28년(중종 23) 무자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 승문원 박사, 정언, 이조좌랑, 사헌부 장령, 통례원 우통례, 승문원 판교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 명종이 즉위하고 윤원형(尹元衡) 등에 의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성주(星州)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1567년 명종 22년). 묵재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문건은 고령인(高靈人) 朴居仁과 자주 소통하고 지냈던 것으로 확인된다.
(2) 읍지류(邑誌類)
朴居仁은 그 외에도 여러 자료에서 발견된다. 『교남지(嶠南誌)』의 고령(高靈) 인물조(條)에는 朴居仁에 대해 "明廟文郡守", 즉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군수를 지냄'이라는 기록이 있고, 『하동군읍지(河東郡邑誌)』 환적(宦蹟)조(條)에는 朴居仁이 하동 수령(守令)을 역임한 기록이 있으며, "居高靈"이라 하여 '거주지가 고령'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고령지(高靈誌)』 고령 인물조에 나오는 朴居仁의 인적 기록에 "登第官郡守"라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는 사실이 올라 있고, 『고령군읍지(高靈郡邑誌)』에도 朴居仁에 대해 "文科郡守", 즉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3) 『고령박씨족보』
위에서 언급한 읍지류, 특히 『고령지』와 『고령군읍지』에는 朴居仁 외에도 朴居仁의 선대(先代)로 보이는 이름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박승수(朴承壽), 박장(朴璋), 박수산(朴壽山), 박진(朴珍) 등의 이름이 이 읍지들 인물조에 올라 있는데 이들은 바로 朴居仁의 선대 조상들임이 『고령박씨족보(高靈朴氏族譜)』에서 확인된다. 다음은 고령박씨족보에서 확인되는 朴居仁의 직계 선후대 계보이다(편의상 高祖까지만 표시함).
< . . . 박진(朴珍)(고조) → 박수산(朴壽山)(증조) → 박장(朴璋)(조) → 박승수(朴承璲)(부) → 박거인(朴居仁)(본인) → 박대임(朴大任)[계자(系子)] . . . >
朴居仁의 부친 고령인 박승수(朴承璲)는 1510년(중종 5) 생원ㆍ진사 양시에 동시 입격(入格)하였고, 조부 박장(朴璋)은 중직대부(中直大夫) 행(行)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지낸 인물이다. 박승수(박거인의 부친)가 올라 있는 사마방목에 박승수의 본관이 고령(高靈)임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박승수의 본관이 高靈이면 그의 부친 박장(朴璋)과 아들 朴居仁의 본관도 高靈이 된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가 아니겠는가.
또한 朴居仁의 증조부 박수산(朴壽山)은 세종 23년(1441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다시 세종 26년(1444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고 한다(『고령박씨족보』). 박수산의 생원시 입격이나 무과 급제 사실을 정사 자료에서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그가 녹사(錄事)ㆍ감포만호(甘浦萬戶) 등을 역임한 사실은 세종실록(1447년)과 세조실록(1465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朴居仁의 고조부 박진(朴珍)은 운봉현감(雲峯縣監)을 지낸 사실이 세종실록(1426년) 기사에서 발견된다.
IV. 반남박씨 박안인(朴安仁) 관련 기록
반남박씨 朴安仁과 관련된 문헌 기록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현재 찾아 볼 수 있는 문헌 자료로는 반남[나주]박씨족보[세보]가 거의 유일하다. 다음은 역대 반남박씨족보에 나오는 朴安仁의 방주(傍註)이다.
①임오보(1642년): "安仁"(이름 외의 개인 정보는 전혀 없음).
자녀 2남3녀를 선남후녀(先男後女) 순으로 역시 이름만 등재.
②계해보(1683년): "安仁 室綾城具氏 . . ."(부인과 묘소 관련 정보만 있고 그 외 개인 정보는 없음).
③병술보(1766년): 계해보와 같음.
④을유보(1825/1831년): 병술보와 같으나, 다음의 내용이 첨기(添記)됨. "新單云官僉正錄寧國原從功臣"
(새 단자에 이르기를, 관직은 첨정이고 영국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고 한다).
⑤갑자보(1924년): 을유보와 같음. (자녀수 표기 방식만 달라짐).
⑥무술보(1958년): 갑자보와 같음.
⑦경신보(1980년): 무술보와 같음.
⑧임진보(2012년): 다음의 내용이 추가됨. "초명 거인(居仁) 자(字) 덕기(德器) 호(號)송정(松亭)
명종무신(1548)생 . . . . . ○신단(新單)에는 벼슬은 첨정(僉正)이고 록영공신(錄寧功臣)이며
금주군 사당에 부(附)했고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 관은 군수(郡守).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1642년 임오보에서 1980년 경신보까지 반남박씨세보에는 朴安仁이 문과에 급제했다든가 군수라는 벼슬을 지냈다든가 하는 기록은 전혀 없었다. 다만, 을유보에 와서 제출한 새 단자에 '관직은 僉正으로 寧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는 기록이 첨가되었는데 이는 착오로 보인다. 영국원종공신에 녹훈된 僉正 朴安仁은 본관이 밀양(密陽)이고 무과(武科) 급제자이며, 시기적으로도 반남박씨 박안인과는 맞지 않는다. 영국(원종)공신은 1644년(인조 22) 심기원(沈器遠) 등의 역모 사건 평정과 관련하여 녹훈한 공신이다.
문제는 임진보에 추가된 기록이다. 초명이 居仁이고 字가 德器,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군수를 역임했다는 내용은 앞에서 거론한 문과방목의 기록을 근거로 첨가한 것 같다. 다만, 號(松亭)의 출처는 불분명하다. 그 다음 "명종무신(1548)생"은 마치 박안인의 생년이 1548년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지만, 이는 朴居仁의 문과 급제 연도를 朴安仁의 생년(生年)처럼 잘못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에서 "록영공신(錄寧功臣)"은 앞 세보의 "錄寧國原從功臣"을 잘못 옮겨 적은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금주군 사당에 부(附)했고"라는 부분은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금주군"이 錦洲君(박정朴炡)을 가리키는 것 같기는 한데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과방목의 기록에 맞추어 문과 급제와 관직 등 새로운 내용을 추가한 최근의 임진보(2012년 간행)를 제외하면, 반남박씨세보의 기록으로는 문과 급제자 朴居仁과 반남박씨 朴安仁을 동일 인물로 볼만한 단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V. 문과 급제자 朴居仁과 반남박씨 朴安仁을 동일인으로 오판(誤判)한 근거?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문과 급제자 朴居仁을 반남박씨 朴安仁으로 단정하게 되었을까? 정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 古6024-6)에는 朴居仁의 인적 사항은 거의 모두 비어 있었다. 즉, 자(字)가 덕기(德基)이고 군수(郡守)를 지냈다는 기록만 있을 뿐, 본관이나 생년, 가족 관련 정보는 전혀 없다. 한편, 고종 26년(1889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國朝榜目』(국중도 한古朝26-47)에는 字가 德器로 바뀌고 본관을 潘南으로 표기하였으며 "父 升明 六世祖訔辛禑戊辰旁"라 하여 부친과 6세조(평도공平度公)를 올렸다. 이어서 『國朝文科榜目』 奎106)에는 朴居仁의 인적 기록이 다음과 같이 좀 더 상세화되었다.
<[字]德器 父升明 祖寅弼 曾林禎 [官職]郡守 [本]潘南人>(※반남박씨세보에는 禎이 아니라 楨으로 되어 있음).
이러한 방목(후세의 종합방목)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대, 본래 朴居仁의 출신 본관은 미상이었지만 나중에 누가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본관을 潘南으로 단정하고 그에 따라 직계 선조 계보를 함께 등재한 것으로 판단된다. 朴居仁의 문과 급제 당시에는 '羅州'라는 본관을 썼을 것이 분명한데 종합방목에는 '潘南'으로 표기하였으므로 후세에 보충한 정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朴居仁의 字를 德基에서 德器로(또는 그 반대?) 바꾸어 놓은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도대체 누가 무엇을 근거로 朴居仁의 인적 정보를 방목에 보충하여 기록했을까?
朴居仁의 인적 정보를 방목에 첨기(添記)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본고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행위자를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다), 다만 문과 급제자 朴居仁을 반남박씨 朴安仁으로 단정한 이유는 추측해 볼 수 있다. 방목에 인적 정보를 추가하자면 필연적으로 여러 성씨들의 족보를 참고 자료로 사용해야 하는데 이 때 반남박씨족보를 직접 참고하지 않고 다른 성씨의 족보에 잘못 올라 있는 정보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 중기 이후, 조선 사회에서 많은 성씨들이 자신들의 족보를 만들거나 인적 계보(系譜)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할 때 가장 많이 참고한 자료 중의 하나가 바로 1565년(명종 20)에 간행되었다고 하는 문화류씨(文化柳氏) 가정보(嘉靖譜)로 알려져 있다. 이 가정보가 반남박씨 박승명(朴升明)의 아들 4형제의 이름을 '居'자 돌림자로 올려 놓았다. 다음은 문화류씨 가정보의 해당 부분을 옮겨 온 것이다.
朴寅弼 | 子 朴升章 忠義 无后 | |
子 朴升明 | 女 崔浩 | |
子 朴居仁 | ||
子 朴居義 | ||
子 朴居礼[禮] | ||
子 朴居智 | ||
女 金漬 | ||
女 李胤宗 |
한편, 나주[반남]박씨 임오보(1642년)의 해당 부분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子 寅弼 | 子 升章 | |
子 升明 | 子 安仁 | |
女 崔浩 | ||
女 金漬 牧使 | ||
子 安義 | ||
子 安禮 | ||
子 安信 | ||
女 申義老 |
이 두 기록의 두드러진 차이는 朴升明의 자녀 순서와 자녀들 이름이다(딸의 경우는 사위 이름). 사위(딸)의 경우, 임오보 다음의 계해보(1683년)에서 李胤宗과 申義老를 함께 등재한 것으로 보아 각각 한 사람을 빠트렸거나 목판 각수(刻手)의 실수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朴升明의 아들 4형제의 이름자(字)이다. 문화류씨 가정보에서는 첫 자가 '居'로 되어 있는 반면, 나주[반남]박씨 임오보에서는 모두 '安'으로 되어 있다. 끝 자는 오상(五常: 仁ㆍ義ㆍ禮ㆍ智ㆍ信)의 순서를 따른 것인데 다만 넷째의 경우 가정보에서는 순서 대로 '智'로 되어 있으나 임오보에서는 '信'으로 되어 있다. 뒤에 태어난 여동생이 이미 결혼한 것으로 보아 居智와 安信은 서로 다른 인물이 아니라 동일인으로 판단된다. 넷째의 이름에 오상의 순서대로 智를 쓰지 않고 굳이 다음 순서인 信을 쓴 데에는 어떤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계해보의 자녀 순서가 임오보와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나주[반남]박씨 임오보의 기록이 사실과 부합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무엇보다 임오보 편찬 당시 朴安仁의 장남 朴濂(1581~1656)이 생존해 있었으므로 부친과 숙부의 이름을 잘못 기록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화류씨 가정보가 1565년(명종 20)에 간행되었으니 (문과 급제자) 박거인이 무신(1548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만17년 뒤의 일이며, 그 때 이미 그는 하동쉬(河東倅: 하동 수령. 1554년)ㆍ경상도사(慶尙都事, 1561년)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있었다(『묵재일기』). 문화류씨 가정보는 비록 전기(前期) 족보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등재 인물의 관직만은 꼭 기록하고 있다. 고위 관직은 물론 生員ㆍ進士ㆍ司果ㆍ忠義까지도 두루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문화류씨 가정보에도 나주박씨 <朴居仁> 註에는 관직 기록이 없다. 왜 그랬을까? 관직 역임 사실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문화류씨 가정보는 나주박씨 朴安仁 4형제의 이름을 安자가 아닌 居자를 써서 표기하였을까?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하나는 朴安仁 4형제의 초명(初名)에 居자를 썼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류씨 가정보의 실수라고 보는 것이다. 전자일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문과 급제자 朴居仁은 급제 당시는 물론 그 이후의 모든 기록에서 한결같이 居仁으로 나온다. 만약 居仁이 朴安仁의 초명이었다면 반남박씨세보에 진즉 그 사실을 밝혔을 것이다. 그런데 반남박씨세보에는 朴安仁이 居仁에서 安仁으로 개명(改名)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문화류씨 가정보의 오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 생각한다. 현실적으로도, 일종의 만성보(萬姓譜)라 할 수 있는 문화류씨 가정보에 올라 있는 나주[반남]박씨 인물 관련 정보보다는 단성보(單姓譜)인 우리 나주[반남]박씨 족보에 올라 있는 나주[반남]박씨 인물 관련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일반적으로 우리 조상과 관련한 기록에 있어서 남의 족보보다는 우리 족보의 기록을 믿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는가!(※백보 양보하여, 설령 安仁 4형제의 초명이 居O이었다 하더라도 본고의 논지에 미치는 영향은 사실상 없다).
VI. 문과 급제자 朴居仁이 반남박씨 朴安仁이 아니라 고령박씨 朴居仁이라는 논거
이제 다시 문과 급제자 朴居仁으로 돌아와 보기로 하자. 앞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1548년(명종 3) 무신 별시 급제자 朴居仁의 이름은 그 후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일기(日記)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거기에 "河東倅 朴居仁(하동 수령 박거인)"(1554년 7월 13일), "朴居仁爲道都事(박거인이 경상도 도사가 되다)"(1561년 12월 30일), "首領官朴居仁(수령관=도사 박거인)"(1562년 2월 21일) 등 박거인의 관직을 함께 나타낸 기록이 있으며 박거인이 고령(高靈)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묵재 이문건의 일기 외에도 朴居仁이 고령 출신 인물이라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면, 앞에서 이미 언급한 『교남지』를 비롯한 여러 읍지류(邑誌類)에 그가 고령 출신 인물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교남지』에서는 朴居仁이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한 인물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고령읍지에도 그가 "登第(등제)"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이것은 명종 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朴居仁이라는 인물이 바로 『교남지』와 읍지류에 등장하는 고령 사람 朴居仁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더욱더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서 문과에 급제한 사람 중에 朴居仁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명종 3년 무신 별시 문과에 급제한 바로 그 朴居仁 한 사람뿐이다.
나아가서, Wagner & 송준호 교수가 공편(共編)한 『補註朝鮮文科榜目』 에는 朴居仁의 부친 성명이 박승수(朴承璲)이고 고령(高靈) 사람이라는 기록도 보인다. 한편, 『정덕5년경오2월25일사마방목(正德五年庚午二月二十五日司馬榜目)』 입격자 명단에 박승수(朴承璲)가 올라 있는데, 자(字)는 윤수(潤叟)이며 본관과 거주지가 모두 高靈이라 명시하고 있고, 부친 박장(朴璋)은 중직대부로 행하양현감(行河陽縣監)을 지낸 인물로 되어 있다. 朴居仁의 부친 박승수(朴承璲)의 본관이 高靈이면 그의 부친 박장(朴璋)과 그의 아들 朴居仁의 본관도 高靈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 아닌가!
또한 고령박씨족보도 이러한 사실을 재삼 확인해 준다. 고령박씨족보에 의하면, 朴居仁의 계보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 . . . 박진(朴珍)(고조) → 박수산(朴壽山)(증조) → 박장(朴璋)(조) → 박승수(朴承璲)(부) → 박거인(朴居仁)(본인) → 박대임(朴大任)[계자(系子)] . . . >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어떤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는가! 다만, 『고령박씨족보』를 보면 고령인 朴居仁은 자녀가 없어 후에 계자(系子)가 들어 왔는데 그 자손들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사실상 몰락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판단된다. 그러다 보니 입후(立后)한 선조의 문과 급제 사실을 제대로 족보에 기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VII. 나오는 말
본고는 지금까지 1548년(명종 3) 무신 별시 문과 급제자 朴居仁의 출신 관향(貫鄕)에 대해 여러 자료의 기록을 종합적으로 분석ㆍ검토하여, 규장각ㆍ국립중앙도서관ㆍ한국학중앙연구원 등에서 소장하고 있는 몇 가지 국조(문과)방목에 문과 급제자 朴居仁의 본관을 반남(潘南)으로 표기한 것은 오류임을 밝혔다. 이들 국조(문과)방목들은 각 문과의 시행 당시에 작성한 단회방목이 아니라 후세에 만든 종합방목으로 급제자 개인의 인적 정보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보충한 것들이 많다. 그리하여 朴居仁의 경우, 그의 인적 정보를 보충 기록하는 과정에 잘못된 일부 자료를 참고하면서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과방목(후세의 종합방목)의 착오와 상관없이 오로지 객관적ㆍ독립적 분석을 통해서도 문과 급제자 朴居仁은 반남박씨 朴安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본고의 논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임오보(1642년)를 비롯하여 반남박씨세보의 朴安仁 방주에 문과급제와 관직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러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명종실록』ㆍ『묵재일기』ㆍ 『교남지』ㆍ『고령읍지』ㆍ『하동읍지』ㆍ『보주조선문과방목』ㆍ『고령박씨족보』 등의 문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ㆍ검토하여 내린 객관적ㆍ논리적 결론에 의하면, 명종 3년(1548년) 무신 별시 문과 급제자 朴居仁의 본관을 '高靈'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온당한 판단이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본고를 작성하기 위해 참고한 문헌이 너무 많아 게시판의 공간적(空間的) 사정을 고려하여 생략함. 단, 본문 이해에 필요한 참고 자료는 본문 속에 모두 표시되어 있으니 확인을 원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람.
終
後記:
이 소논문의 출발점은 2007년 말 어디쯤이다. 우연한 기회에 조상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에 있는 반남박씨 대종중 사무소[종무소]를 방문했다가 『반남박씨편람』 한 권을 얻어 와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반남박씨 과거 급제자 명단이 나와 조선 시대 과거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편람의 기록이 부정확한 듯하여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의 도서관에 들러 관련 문헌을 찾아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문헌 자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호기심을 유발하는 기록들이 눈에 띄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1548년(명종 3) 무신 별시 급제자 박거인(朴居仁)에 관한 것이었다. 몇몇 문과방목(후세에 만든 종합방목)을 보니 朴居仁의 본관은 반남이고 아버지는 박승명(朴升明), 할아버지는 박인필(朴寅弼), 증조부는 박임정(朴林禎[楨])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반남박씨세보를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 반남박씨 해당 문중에는 '居仁'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은 없고 대신 '安仁'이라는 인물이 발견되는데 그 계보가 문과방목의 기록과 일치하였다.
즉시 의문이 일어났다. 조선 시대에 있어서 문과 급제와 관직 역임은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요, 입신양명의 상징인데 어떻게 족보(세보)에 그런 중요한 일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임오보(1642년 간행) 당시에 아드님이신 부장공(박렴朴濂: 1581~1656)께서 생존해 계셨는데 어찌하여 자신의 관직은 올리면서 정작 부친의 문과 급제 사실과 관직 역임을 족보에 빠트릴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1572년 세워진 반남선생(박상충) 묘비문에도 朴居仁의 이름이나 朴安仁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비문을 지은 소고공(박승임)은 반남박씨 朴安仁과 9촌 사이이고 비문을 쓴 남일공(박응남)은 朴安仁과 8촌 사이인데, 반남선생의 자손들 중 문과 급제자로 관직을 가진 인물들은 빠짐없이 비문에 올리면서 왜 박안인(또는 박거인)만 빠트렸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여러 문헌 자료들을 섭렵하고 그러한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약 1년 정도가 지난 후 마침내 명종 3년 무신 별시 급제자 朴居仁과 반남박씨 朴安仁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 연구는 오로지 역사적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행해진 것일 뿐이며, 모든 것은 객관적ㆍ논리적 분석으로 이루어졌음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밝혀 둔다. "불편한 진실"이라는 말이 있다. 혹시라도 본 연구의 결론으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실 지도 모르겠다. 필자로서 그 분들의 "불편함"에 대해 마음 한 편에 '미안(未安)함'을 느낀다. 그러나 후손들에게 물려 줄 역사의 기록은 진실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는 없다.
최근 반남박씨 대종중 웹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이 이 문제와 관련된 내용의 글이 올라온 것을 보고, 필자는 많은 종원들이 그로 인해 사실을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14~5년 전에 작성해 두었던 초고를 다시 꺼내어 내용을 보충하고 문면(文面)을 다듬어 이곳에 올리니 독자 제현의 비판과 질정을 기다린다. 감사합니다. 필자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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