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맑은 날, 창밖 세상을 보면 이유 없이 가슴이 설렌다. 마치 어릴적 먹던 솜사탕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달달한 느낌이랄까. 좋았던 추억들을 생각하면 모두가 너무나 아름다운 것뿐이다. 계획한 여행일이 다가올수록 훨훨 날고 싶은 욕망이 폭죽처럼 터진다.
드디어 이탈(離脫)이다. 하늘아래 섬 하나가 오롯이 떠 있다. 노랑과 분홍으로 채색된 그림이 거기에 있다. 꿈으로만 그리던 풍경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오길 참 잘 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봄이 농익어가는 거리에서 혼을 빼앗긴 채,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린다. 모세혈관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소용돌이친다. 기계적인 일상에 시달려온 시름이 한꺼번에 와르르 풀어지는 느낌이다.
유채꽃과 벚꽃이 어우러진 풍경은 지금 생각해도 숨이 막힌다. 차창을 열자 봄 냄새가 확 밀고 들어온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으로 선정된 제주 녹산로 거리, 조선시대 최고의 목마장으로 녹산장과 갑마장을 관통하는 길이다. 끝이 안 보일만큼 길게 늘어선 노랑색과 분홍빛이 빚어낸 환상적인 광경을 눈으로만 보고 지나치는 건 도리가 아닌 성 싶어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놓고 내린다.
숨 가쁘게 움직이는 꽃들의 리듬, 그 순간만큼은 무조건 나도 활짝 웃는다. 고대 죽어도 좋을 것 같은 경탄과 기쁨을 한껏 맛보며 피로에 지친 풀기어린 눈을 소독한다.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내가 갇힌 느낌이다. 부는 바람에 꽃이 다 떨어질세라 사진기속으로 풍경을 주워 담는다. 꽃 속에 묻힌 낯선 사람들과 자연스레 어우러져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 달래기도 한다. 카메라에 담는다 한들, 봄이 그려놓은 생명같은 파종의 모습을 어찌 다 가져 갈 수 있으랴.
분주한 서울에서의 일상이 멈춰버린 지금, 새로운 날을 맞는 듯 온 몸에 활기찬 희망이 솟는다. 푸른바다를 찬미하며 올레 길을 걷기도 하고 바람이 분분히 날리는 꽃비를 맞으며 감성에 젖기도 하고 제주도가 자랑하는 명소들을 찾아다니며 신바람을 일으킨다. 위미동백나무군락지, 허브농장, 섭지코지, 김영갑갤러리, 산굼부리, 등등. 가는 곳마다 귀한 선물을 한아름씩 받아 가듯 숨겨진 비경을 찾는 일 또한 재미있다.
사진작가 김영갑의 예술세계로 들어선 순간, 경이로운 신세계로 들어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온다. ‘손바닥만 한 창으로 내다본 세상은 기적처럼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는 그의 말처럼 전시장 안 사진마다에는 제주도에서만이 볼 수 있는 자연의 소리가 우우우~ 귓속을 파고든다. 사진이라기보다는 싱싱한 생명력이 조화를 이룬 자유로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 작가 김영갑은 47세의 젊은 나이에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사진 속 오름과 제주의 풍경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묵직한 흔적으로 남겨 주고 있다. ‘철들면 죽는 게 인생, 여한 없다. 원 없이 사진 찍었고 남김없이 치열하게 살았다’는 그의 말처럼 평생을 하고푼 일만 하고 살았으니 다소 아쉽기는 할질라도 하루하루가 즐거움으로 가득 했을 것 같다.
사는 일이 건조하고 답답할 때, 혹은 살아 있음의 감정을 느끼고 싶을 때 나 역시도 가끔 이탈을 시도한다. 흔들거리는 생활의 번잡함을 다 내려놓고 자유로운 바람처럼 돌아다니다 보면 내가 신선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언제든 떠나리라,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고, 마음으로 행 할 수 있고, 내 의지대로 오감(五疳)을 만끽 할 수 있다는 걸 축복이라 여기면서.
제주는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만드는 마력의 섬이다. 온종일 정신적 허기를 실컷 채우고 나니 세상 모든 것이 맑고 향기롭게 보인다. 속상한 일, 마음 아픈 일, 서러운 일들이 한꺼번에 깨끗하게 정화된 느낌이다. 하루의 일정을 소화하고 숙소로 돌아와 따뜻한 사우나물로 피곤한 몸을 녹이고 나니 천국이 따로 없다.
생기로 가득한 또 하루를 맞는다. 친절한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사려니 숲을 찾아 나선다. 안전벨트를 단단히 메고 빗속을 헤치며 질주한다. 뿌연 안개 같은 서리를 제거하기 위해 에어컨을 켠다. 아늑한 공간에서 음악을 듣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다. 심신을 두들기는 강렬한 노랫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운다. 비가 와서 그런지 어제보다 길은 한산하다. 찻길에서 놀던 까치 한 마리가 차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짧은 두 발을 통통거리며 재빠르게 숲속을 향해 뛰어간다.
소문으로 듣던 사려니 숲은 밀림 속처럼 겹겹이 나무들로 가득 메웠다. 그 숲 사이로 난 길도 완만하여 걷기도 좋다. 사려니는 ‘신성한 곳’이라는 뜻으로 신의 땅을 의미한다. 나보다 몇 십 년, 아니 몇 백년을 더 살았을 나무들은 하나같이 우람하고 육감적이다. 나무가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마치 영화 아바타의 숲 풍경을 연상케 한다. 자박자박 걷는 맛도 좋지만 구석구석 숨겨진 숲의 비경에 감탄하며 숲이 주는 맑은 공기를 실컷 탐닉한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오래전부터 꿈꿔오던 그리움이 문득 솟구친다. 지금껏 살던 세상을 등지고 이곳 섬에 살고 싶다는 욕구가 무성하게 번식한다. 이 섬이라면 이대로 갇혀 산다 해도 매일이 행복할 것 같다. 그러나 생활에 붙잡힌 발목의 끈을 어찌 쉽게 끊어버릴 수 있으랴. 지금 맛보는 이 행복도 어쩌면 가족이 있어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바다, 하늘, 바람을 통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살만한지를 체험한다. 여행은 내일의 삶에 활력소가 되는 신비한 명약이다. 산방산 가는 길에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이 발목을 또 잡는다. 구불구불 도로양옆으로 노란빛이 범벅을 이룬 것을 보고는 정신을 빼앗긴다. 오설록티뮤지움에 들리려다 갑자기 빗줄기가 거세지는 바람에 일정을 미루고 숙소로 향한다. 가는 길에 우연히 ‘유리의 성’ 이 보여 무작정 들어가 본다. 못 봤으면 후회할 뻔 했을 정도로 눈부시고 신기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자연이 빚어낸 풍경은 설명하므로 이해되는 형이하학적 대상이 아니라 감상함으로 깨달아가는 형이상학적 대상이 된다. 오랜 인생여정의 길을 걷다가 마음 편히 쉬었다 온 것 같아 마음이 부자가 된 느낌이다. 탐스럽고 풍성한 노란 귤들이 길가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것까지, 아직도 그 달콤한 여운을 잊을 수가 없다.
첫댓글 박원명화 사무국장님 ! 제주도를 다녀오셨군요. 저도 수년 전 3박4일 제주도 여행을 처음으로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제 평생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보았구요. 이제 내년에 손주 손녀가 더 크기 전에 가족여행으로 제주도를 다녀오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박원명화 사무국장님 !
제주여행 다녀오신 기행문 잘읽었습니다.
제주에는 유채꽃이 피어있을때가 좋은듯 싶습니다. 춥거나 덥지않고 활발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서 일까요. 유채꽃과 벚꽃가로수길이 참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