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태극太極·無爲인) 도(道; 自然)는 양陽을 낳고, 양陽은 음陰을 낳으며, 음陰은 (양陽과 더불어 어우러지는데, 따라서 자신과 양陽이 어우러진)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주자朱子는 (『주희집朱熹集』 권37 「답정태지答程泰之」에서) 일컬었다. “(노자의) 도道는 (자연自然으로서) 『주역周易』이 (「계사상繫辭上」 11장에서) 일컬은 태극(太極; 무위無爲가 크고, 무위無爲가 끝점에 이른 바)이다. 하나一는 양陽으로서, (도道를) 기대는 바이다. 둘二은 음陰으로서, (도道를) 짝하는 바이다. 셋三은 (하나一를) 기대고, (둘二을) 짝하는 바로서, (하나一와 둘二이) 어우러진 바이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둘二은 (하나一와 더불어 어우러지는데, 따라서 자신과 하나一가 어우러진) 셋을 낳는다.’ 이른바, 둘二은 하나一와 (어우러지는 바를) 더불어 함으로써, (자신과 하나一가 어우러진) 셋三을 일삼는다. (이른바) 노자는 일컬었다. ‘셋은 만물을 낳는다.’ 이른바, (도道를) 기대는 바(奇; 一·陽)와 (도道를) 짝하는 바(耦; 陰·二)가 (더불어) 어우러짐으로써, 만물이 생겨난다.” 〔율곡栗谷은 ‘이二, 여일與一’한 바를 사상四象이나 팔괘八卦, 충기冲氣나 화기和氣 등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짐작컨대, 도道의 자연自然한 모습, 태극太極과 음陰·양陽의 무위無爲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朱子, 曰道, 卽易之太極. 一, 乃陽之奇. 二, 乃陰之耦. 三, 乃奇耦之積. 其, 曰二生三. 猶所謂二, 與一爲三也. 其, 曰三生萬物. 卽奇耦, 合而萬物, 生也.
(따라서) 하늘과 땅 사이는 그 풀무나 피리와 같게 된다!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중국 송宋나라 때) 동사정董思靖은 (『도덕진경집해道德眞經集解』 제5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탁橐은 풀무이다. 약籥은 피리이다. (풀무와 피리는 양陽·음陰의) 기氣를 받아들여 (소리와) 바람을 북돋우기를 잘하는 물건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양陽·음陰의) 두 기氣가 가고 오며 굽혀지고 펴진다. 비유컨대, (풀무와 피리) 이 두 물건은 (소리와 바람을 북돋움에 있어서, 유위有爲한) 마음을 가지는 바가 없다. (풀무와 피리는 유위有爲를) 텅 비운 채, (무위無爲한 양陽·음陰을) 받아들이기를 잘한다. (풀무와 피리는 무위無爲한 양陽·음陰과 더불어) 어우러진 채, (유위有爲를) 품어 안지 않는다.”
董氏, 曰橐, 鞴也. 籥, 管也. 能受氣鼓風之物. 天地之閒, 二氣, 往來, 屈伸. 猶此物之, 無心, 虛而能受, 應而不藏也.
(유위를) 텅 비우는데, 따라서 (바람과 소리가) 잦아들지 않게 되고, (무위로써) 움직이는데, 따라서 (바람과 소리를) 더욱 내놓게 된다.
虛而不屈, 動而愈出.
(동사정董思靖의 『도덕진경집해道德眞經集解』 제5장 주註에 따르면, 하상공河上公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당唐나라 육덕명陸德明 『노자음의老子音義』와 육희성陸希聲 『도덕진경전道德眞經傳』 등의) “고본古本은 모두 ‘굴屈’을 갈(竭; 그 끝점을 다한다)로 해석하여 주석했다. (이른바, 하늘과 땅은 또렷하고 뚜렷하게) 살필 수 있는 (일삼음의) 모습을 가지는 바가 없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은 일삼음에 있어서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하늘과 땅은 일삼음에 있어서 무위無爲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사물로서, (움직임에 있어서 유위有爲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하늘과 땅은) 움직일수록 (바람과 소리가 더욱 많이) 생겨나고 생겨나게 된다. (바람과 소리를) 더욱 (내놓고) 내놓게 된다. 이른바, (하늘과 땅은 움직일수록 내놓는 바가) ‘더욱’이게 되는데, 이른바 (하늘과 땅은 일삼음에 있어서 무위無爲가) 끝점을 다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자朱子는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25 「노자서老子書」에서) 일컬었다.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있는 어떠한 사물도 (양陽·음陰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따라서 (비유컨대 풀무와 피리는 유위有爲를) 텅 비우고, (유위有爲의 끝점을) 다한다. (따라서 풀무와 피리는 움직일수록 바람과 소리를 더욱 내놓게 된다.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있는 어떠한 사물도 (양陽·음陰과 더불어) 어우러지지 못한다. (따라서 비유컨대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있는 풀무와 피리) 이것은 움직이더라도 (바람과 소리를) 내놓기를 잘할 수 없게 된다.’”
古本, 皆釋屈作竭. 無形可見. 而無. 一物, 不受形焉. 動而生生. 愈出. 而愈, 無窮焉. 朱子, 曰有一物之, 不受. 則虛而屈矣. 有一物之, 不應, 是, 動, 而不能出矣.
(따라서) 만물은 음陰을 등에 지고, 양陽을 품에 안게 되며, (따라서 만물은 유위가) 텅 빈 (음陰·양陽의 두) 기氣로써 어우러지는 바를 삼게 된다.
萬物, 負陰而抱陽, 冲氣以爲和.
동사정董思靖은 (『도덕진경집해道德眞經集解』 제42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비유컨대, 동물은 (일삼음이 시끄러운 바가) 그친 바(止; 陰)를 등에 진다. 따라서 (등은 입, 코, 귀, 눈의) 뒤(쪽)에 자리한다. 음陰은 (일삼음이) 조용한 바(로서, 일삼음이 시끄러운 바가 그친 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 코, 귀, 눈은 (등의) 앞(쪽)에 자리한다. 양陽은 (일삼음이) 시끄러운 바(로서, 일삼음이 시끄러운 바가 그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식물도 (일삼음이) 차가운 바(寒; 陰)를 등에 지고, (일삼음이) 따뜻한 바(爛; 陽)를 품에 안는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만물은) 음陰을 등에 지고, 양陽을 품에 안는다.’ 따라서 (유위有爲가) 텅 빈 (음陰·양陽의 두) 기(氣; 性·命)는 그 (만물의) 사이에서 (돌고) 돌게 된다.” (따라서)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일컬었다. “만물은 음陰·양陽으로써 (자신의) 몸을 삼지 않거나, (유위有爲가) 텅 빈 바와 (무위無爲가) 어우러진 바로써 일삼음을 삼지 않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董氏, 曰凡動物之類, 則背止. 於後. 陰, 靜之屬也. 口鼻耳目, 居前. 陽, 動之屬也. 植物, 則背寒, 向煖. 故曰負陰而抱陽. 而冲氣, 則運乎其間也. 溫公, 曰萬物, 莫不以陰陽爲軆以冲和爲用.
여기까지가 제1장이다. 이른바, “하늘(과 땅)의 도(道; 自然·太極·無爲·陽·陰)는 사람이나 사물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를 일삼고, 사람이나 사물을 생겨나게 하는 바를 꽃피운다”는 뜻이다. 〔따라서 율곡栗谷에게 있어서, 도道, 태극太極, 자연自然, 양陽, 성性, 덕스러움德, 무위無爲, 음陰, 명性은 본질적으로 분별되는 개념이 아니게 된다〕
右第一章. 言天道, 造化發生人物之義.
해 설
율곡栗谷이 노자의 도道를 태극太極으로 해석했다는 점과 태극太極을 ‘무위無爲가 큰 바이자, 무위無爲가 끝점에 이른 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미루어 보면, 율곡栗谷은 무위無爲를 노자와 유학(儒學; 性理學)의 교차점으로 파악했고, 따라서 율곡栗谷은 무위無爲를 기준으로 노자의 81개 장을 40개 장으로 가려 뽑아 섞었으며, 따라서 책 이름을 『순언醇言』으로 정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율곡栗谷이 『순언醇言』을 지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유학적 관점에서 노자를 비판하는 것이었을까? 노자의 관점을 유학에서 수용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유학적 관점에서 노자를 비판하는 것이었다면, 이미 이단으로 평가받던 노자의 81개 장을 굳이 가려 뽑아 섞고, 주석을 다는 수고를 감내할 필요가 있었을까?
여기서, 김학목의 입장을 주목해볼 만하다. “(율곡栗谷) 그는 노자의 도道를 태극太極으로 보았는데, 이는 노자의 사상을 유학의 이념인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해석하기 위한 것이다 … 이런 작업은 이후 조선 유학자들의 『도덕경道德經』 연구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김학목, 홍석주의 노자, 예문서원(2001), p.133).”
율곡栗谷이 살았던 당시를 다층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율곡栗谷이 순수하게 하고, 순박하게 하고자 했던 바, 다시 말해 율곡栗谷이 보기에 순수하거나 순박하지 못했던 당시의 문제, 노자의 81개 장의 힘을 빌어서라도 해결해야 했던 당시의 문제를 추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우리나라 조선시대 율곡 이이의 도덕겅 주석서인 "순언"에 대한 풀이와 연재를 시작합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