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1)
2023. 1. 1(신년감사예배) 고린도후서 5:14-17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신년이면 각 국의 새해 인사말이 기록된다고 한다. 아마 2023년에도 타임스퀘어 광장에 있는 전광판은 전 세계 새해 인사말을 올렸을 것이다. 우리도 한 해를 시작하면서 몇 개국의 언어로 서로 인사하기를 바란다.
영어 Happy new year!
중국어 新年快乐。(신니엔콰이러) / 공씨 파차이(부자 되세요)
베트남어 Chúc mừng năm mới. (쭉 믕 남 머이)
프랑스어 Bonne année!(본느 아네)
이탈리아어 Nuovo anno felice(누오보 안노 펠리체)
일본어 明けまして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아케마시테 오메데토 고자이마스)
독일어 Gutes neues Jahr!(구테스 노이에스 야)
러시아어 С Новым Годом!(스 노브임 고덤)
그리스어 Χρονια πολλά!(흐로니아 뽈라!)
터키어 Mutlu yılları! 혹은 İyi yılbaşılar(무틀루 이을라르, 이이 이을바슐라르)
페르시아어 !نوروزتان پیروز(노루제턴 피루즈!, Nowruz-e tân piruz!)
에스페란토어 Feliĉan novan jaron(펠리찬 노반 야론)
태국어/ สวัสดีปีใหม่(ครับ/ค่ะ) (남자/ 싸왔디 삐 마이크랍 여자/ 싸왔디 삐 마이 카)
조정민목사님이 직장생활 할 때에 그 직장에 특이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퇴근할 때 면도를 하고, 또 몸에 향수를 뿌렸다고 한다. 그래서 목사님은 퇴근 후에 술집이라도 가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몸에 향수를 뿌리고 집에 간다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그 사람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퇴근할 때는 좀 더 피곤한 모습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집에서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면도하고, 몸에 향수까지 뿌리고 가면 자신이 하루종일 수고했다는 것을 인정받지 못하고, 집 안일까지 더 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면도하고 향수까지 뿌리고 퇴근한다.
왜 그 사람은 퇴근할 때 이렇게 했겠는가? 그 사람은 자기 집의 활기를 위하여 면도를 한 것이다. 그래서 퇴근해서 집에 들어갈 때 힘차게 아빠 왔다. 오늘 하루도 즐거웠어!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온 식구가 다 활기찬 저녁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저는 조정민목사님의 그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참 많은 노력을 하고 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여러분들도 행복한 삶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 않는가? 회사에 가면 가장 많은 듣는 영어 단어 중에 하나가 innovation(개혁,혁신)이다. 여기서 혁(革)은 가죽혁자를 쓴다.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개혁(改고칠개, 革가죽혁)은 자신을 두드려서 가죽을 고친다는 뜻이고, 혁신(革가죽혁, 新새로울신)은 가죽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가죽을 새롭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제 조카가 어릴 때 교회 집사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 유치원 다닐 때였는데, 교회 집사님이 귀엽다고 아이를 태우고 가다가 넘어진 것이다. 그래서 한쪽 뺨이 바닥에 살짝 긁혔는데, 피부가 뒤집어져 버렸다.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은 조카의 피부껍질을 벗겼다. 아이는 죽는다고 우는데, 의사선생님은 이대로 두면 흉이 진다고 모질게 남은 껍질을 벗겼다고 한다. 그런데 단어의 뜻만 생각하면 이것이 혁신이고, 개혁이다. 물론 고대사회에서 어떤 가죽을 입었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분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혁한다는 말은 가죽옷을 바뀌어 입어서 다른 신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개혁하기 위하여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 하는 것을 개혁과 혁신이라는 단어는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껍질이 벗겨지는 고통을 감내하여 개혁과 혁신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분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아~ 아담아 하시며 아담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창세기 4장에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서 죽였다. 그때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오셔서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에는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 사는 아브람을 찾아오셨다. 흩어짐을 면하자, 우리의 이름을 내자는 슬로건을 걸고 성과 대를 쌓아가는 사람들을 흩어버리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왜 하나님은 범죄한 사람들을 찾아오셨겠는가? 모든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꾼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있던 아담과 하와는 네가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말에 죄를 범한 것이다. 가인도 마찬가지이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었다. 아니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일은 그의 삶에 두려움을 가득하게 하였다.
왜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였는데, 더 나쁜 삶을 살게 되었는가? 40년을 목회하고 은퇴하는 목사님이 변화와 변질에 대하여 말했다.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변질은 쌀이 썩어서 먹을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면 변화는 쌀이 삭아서 식혜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분이시다. 그 예수님은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분이신데, 40년 목회한 목사님은 자신도 또 성도들도 변화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왜 우리는 변화가 아니라, 변질의 신앙인이 되고 있는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변질되어져 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옷을 지어 입히시며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어! 꼭 기억해 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가인에게는 이마에 표를 주시고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으리라(창 4:15)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범죄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도록 하신 것이다.
무슨 말인가?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함께하면 변화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더 나은 삶을 찾은 사람들의 삶은 변질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변화의 삶을 살고 있는가? 변질의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 본문은 변화의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이다. 그리스 중남부에 위치한 고린도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급속도로 발달한 도시였다. 그래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고린도는 에피쿠르스 학파의 영향으로 쾌락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인간의 쾌락을 보장하는 것만이 진리라는 논리를 가질 정도로, 그들은 일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먹는 즐거움을 위하여 일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고린도는 거짓과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하여서 고린도스럽다는 말을 남자에게 적용하며 포주로 이해되고, 여자에게 사용하면 창녀로 받아드려 졌다. 이러한 고린도에 아프로디테(비너스)신전이 있어서 그 안에는 1천명이나 되는 여사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음란을 행하였다. 그래서 항구도시였던 고린도에 많은 선원들이 들어오면 거의 모두 아프로디테 신전에 들어가서 음행을 저질렀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 보다는 언어의 유희와 사변을 즐겼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도 여러 가지 변명과 논리를 펼쳐서 자신의 거짓을 진리로 바꾸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이때의 철학자들을 소피스트(말쟁이, 괴변가)라고 부를 정도였다.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또 그것을 변론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린도라는 도시였다.
그런데 이러한 고린도에 세워진 고린도교회 안에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성도들 간의 분쟁으로 인하여 고린도교회는 법정에서 다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근친상간의 문제와 함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아프로디테 신전에 가서 음행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이 교회가 맞나? 라고 하는 그런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다. 그 부분을 함께 읽기 바란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소피스트의 영향으로 거짓을 일삼아 법정에서 싸우고 또 예배를 드린 후에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쾌락을 즐기는 그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이전 것이 지났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큰 변화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14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도다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강권하다(쉐네코)는 단어는 누가복음에 5번 사용되고 있는데, 누가복음 4장을 보면 베드로 장모가 열병에 걸려 앓고 있다고 할 때 쉐네코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 8장에서 12년을 혈루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져서 병이 나았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 몸에 손댄 자가 누구냐? 하고 물었다. 그때 베드로가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라고 할 때 밀려들어가 같은 단어이다. 사람들이 밀고 밀릴 때는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그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힘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 강권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셨다. 그래서 내 의지와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의 의지와 노력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에 의하여 죄악된 나의 의지와 생각은 마비가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또 자기 노력으로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은 용납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이런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인턴이라는 말이 있다. 참을 인, 돌아서다는 뜻의 영어 turn의 합성어인 인턴은 정직원이 되기 위하여 참고 또 참았지만, 결국 무직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인턴이라고 한다. 수고하고 노력했지만, 자신의 삶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있을 때 그것을 인턴의 삶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아닌가? 설교를 마무리 하며 윌리엄 쿠싱 목사님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뉴욕 브로크린의 교회에서 사역하던 목사님은 사모님이 알 수 없는 병으로 고통하였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성적인 사모님은 결혼하여 10년동안 어렵고 힘든 삶 속에서 한번도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고통이 면역체계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목사님은 그러한 사모님을 살리기 위하여 교회도 시골로 옮겼다. 그리고 사모님 병간호를 했는데, 결국 사모님은 몇 년이 못되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윌리엄 쿠싱목사님도 다발성경화증이라는 병에 걸렸다. 목사님도 면역체계가 무너지면서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사임한 목사님은 아내도 죽었는데, 이제 목소리까지 잃었으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하며 절망 가운데 불평과 원망의 기도를 하였다. 그렇게 불평과 원망의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윌리엄 쿠싱 목사님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단 한마디 말씀을 하였다.
너는 내 것이라, 말 못하는 입술도, 병든 네 몸도 모두 내 것이라.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하신 그 말씀은 윌리엄 쿠싱 목사님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서 목사님은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 까지 약 300편의 찬송을 작사하였는데, 그 중에 대표하는 곡이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찬 545장), 주 날개 밑 내가 평안히 쉬네(찬 419장) 이다. 윌리엄 쿠싱 목사님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병든 몸으로 끝까지 충성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윌리엄 쿠싱 목사님에게 들린 하나님의 음성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들려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는 사도 바울의 선언이 삶이 되어지는 복된 2023년 새해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