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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행정구역별 지명 유래
영월군 수주면 도원리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안도내(內桃川), 서운리(西雲里) 우변면의 바깥도내(外桃川) 일부를 합한 후 '도원리'라 하였다. 마을의 중심은 섬안이(島內)안쪽에 있는 안도내(內島內)로 땅이 기름지고 논이 많은 들녘으로 주천지구대 수주분소가 있다.
이곳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2개 행정리에 65가구 195명의 주민들이 안도내, 가매월, 엄둔, 양지말, 상터, 섬안이 등의 자연 부락을 중심으로 벼, 콩, 옥수수, 감자, 고추, 담배 농사와 토종벌, 흑염소, 표고버섯재배 등으로 농가수입을 올리고 있다.
영월군 수주면 두산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두만동(斗滿洞)과 배향산(拜向山)에서 한자씩을 따서 '두산리'라 하였다. 해발 850.6m의 매봉산과 배향산 자락에 자리한 두산리는 산(山)과 관련된 산촌(山村)마을의 지명이 가장 많이 현존하는 곳으로 둔덕 위에 형성된 '두릉골',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의 '둠안→두만이'와 같은 우리의 고유한 토박이 땅이름을 고이 간직한 곳이다.
그 외에도 산과 관계된 초치, 중치, 말치, 골말과 같은 땅이름이 많은 곳으로 2개 행정리에 67가구 213명의 주민들이 주로 콩, 옥수수, 담배, 고추같은 밭농사와 토종꿀, 흑염소, 표고버섯을 재배하여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주천강을 끼고 형성된 법흥리는 들녘이 넓고 물이 풍부하여 논밭이 많으나 산악지대인 운학, 두산리는 주로 밭농사에 의존하고 있다. 무릉리는 수주면의 면 소재지로 3개 행정리 207가구 707명의 주민이 중방동, 명마동, 하동, 두릉동, 송곡, 토실 등의 자연 촌락을 중심으로 벼농사와 더불어 담배, 고추, 인삼 재배 등을 하고 있다.
이곳은 태기산과 백덕산에서 내리는 맑은 계곡이 요선암과 어우러져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으므로 마을 이름도 '무릉리'라 하였다. 무릉도원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이상향으로 사람들이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설구산 동쪽동네를 '무릉리', 그 서쪽을 '도원리'라 부르고 있다.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영월군 우변면 지역으로 1914년 3월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자산 밑에 있는 사자리(獅子里)에다 도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법흥리'라 하였다. 법흥리란 법흥사 절집에서 따온 이름이며, 2개 행정리 103가구에 336명의 주민들이 콩, 옥수수, 감자 등의 밭농사와 사슴, 벌, 흑염소 등을 기르면서 생활하고 있다.
법흥리는 신라 말기 5교 9산의 선문중에 하나인 흥령선원지(興寧禪院址, 지방기념물 6호), 인왕산과 사천왕상이 조각된 팔각형의 부도, 징효대사 보인탑비(澄曉大師 寶印搭碑, 보물 612호), 사리보탑, 석함 그리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던 적멸보궁(寂滅寶宮)등 신라의 찬란했던 불교 문화가 숨쉬고 있는 곳이다. 울창한 적송과 산죽이 어우러진 천하의 명당터로 천연기념물인 까막딱따구리가 서식하고 있다. 법흥사, 관음사, 반야원 등의 절집과 백덕산(1,350m), 사자산(1,166m)이 있어서 절집을 찾는 신자들과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영월군 수주면 운학리
일제때인 1914년 3월 지방 행정구역 개편때 오두치재 밑에 있는 끝 마을인 서운(瑞雲, 원래는 행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瑞院이라는 원집이 있었던 곳)과 어귀 마을인 학산(鶴山)에서 한자씩을 따서 '운학리'라 하였다.
운학리도 두산리와 같은 산촌마을로 오두치를 넘으면 횡성군 안흥면 다리골로 갈 수 있으며, 3개 행정리에 109가구 387명의 주민들이 하일, 덕은, 본전땅, 두무골, 고일, 서운 등의 촌락에서 주로 콩, 옥수수, 담배, 고추 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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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금마리는 원주군 우변면 지역으로 윗기마동이라고 부르고 용석리(龍石里)는 아랫기마동이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삼국 시대부터 이곳에는 '금마곡소(金馬谷所)'라는 천민 집단구역이 있다. 수공업과 광업에 종사했는데 그 위치는 『金馬谷所 在酒泉縣南十五里, 금마곡소는 주천현 남쪽 15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05년(고종 42) 원주에서 영월군 양변면에 편입되었고 마을 앞으로는 제천으로 연결되는 지방 도로가 확장되었으며 현재 4개리 162가구 608명의 주민이 주막거리, 사기막, 장승백이, 가오개, 결운, 산외실, 바둑골 등지의 자연 부락에서 생활하고 있다.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쌀, 콩, 팥과 같은 식량 작물과 참깨, 들개, 담배, 고추, 약초 등의 특용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영월군 주천면 도천리
본래 영월군 우변면(右邊面)에 딸린 지역으로 태기산과 치악산에서 내려오는 섬안이 강이 마을을 돌아서 흐르므로 '도는내→되내→도천'으로 부르다가 후에 건너 마을인 도원리(桃源里)와같은 의미로 '도천리(桃川里)'라 하였다. 도원리는 섬안이강 안쪽에 있으므로 '안도내'라 칭하고, 도천리는 바깥쪽에 있으므로 '바깥도내'라 불렀다.
도천리는 마을의 진산인 비산(694.3m)을 경계로 원주 신림면 송계리와 접하고 강을 사이에 두고 수주면과 이어지는, 행정 2개리 111가구에 377명의 주민들이 벼농사와 콩, 옥수수, 담배, 느타리버섯을 재배하면서 만촌, 벌말, 버들치 등지의 자연 부락에서 생활하고 있다.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한때는 원주군 우변면(右邊面) 지역이었으나 영월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흥리(新興里), 일오곡리(日午谷里), 공순원(公順院)을 병합할 때 신흥과 일오곡의 이름을 따서 '신일리(新日里)'라 하여 양변면(주천)에 편입시켰다.
신일리에는 보안도(保安道) 소속의 신흥역(新興驛)이 있었던 역골이 있었으며, 그 이웃에는 공순원(公順院)이라는 원집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천현 서쪽 15리에 도내부곡(刀乃部曲)인 천민 집단구역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행정 4개리에 259가구 997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자연부락인 금산, 비석거리, 역골(신흥동), 마평, 황골, 나래실, 공순원, 중간뜸, 나랭이 마을에서 담배, 고추, 들깨, 채소, 약초 등을 재배하여 생활하고 있다.
영월군 주천면 용석리
원주군 우변면(右邊面)에 속했던 곳으로1905년(고종 24)에 영월군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수곡(龍水谷), 석교리(石橋里), 대촌(大村), 한전리(閑田里), 상신평(上新坪), 외신평(外新坪), 내신평(內新坪), 사슬치 등을 병합할 때 '용수(龍水)'와 석교(石橋)'의 이름을 따서 '용석리'라 부르게 되었다.
본 마을인 대촌을 중심으로 5개 행정리에 269가구 1,041(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고추, 담배, 참깨, 들깨, 약초 등 특용 장물과 논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용석리는 일명 하기마동이라 불렀고, 금마리는 상기마동이라 칭했는데, 송학산(松鶴山, 819m)을 사이에 두고 제천 송학면 자곡리(紫谷里)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달오산에서 채광한 원석을 나르기 위한 아세아시멘트의 컨베이어(conveyer)가 설치되어 있다.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
고려때 주천현(酒泉縣)이 있었던 곳으로 원주목에 소속되었다가 1905년(고종 42)에 영월군으로 편입되었다. '주천'이라는 지명은 술이 샘솟는다는 주천석(酒泉石)에서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망산 밑에는 주천이라는 샘터가 잘 보존되어 있다. 주천강을 사이에 두고 청허루(淸虛樓)와 빙허루(憑虛樓)가 마주보고 서 있는데, 조선 순조때의 대학자로 평창 봉평출신인 봉서(蓬西) 신범(辛汎)은 「越行」이라는 영월기행문에서 『청허루』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주천이 생긴 역사는 옛날 어느때인가
가리키는 옛터는 좌측 물가인데
빛바랜 누각은 햇빛 받은 채 고요히 서 있고
궂은 비바람은 어제현판을 두드리네
그 후 좌변면과 우변면을 통합하여 양변면이라 칭하면서 송하리와 오목리를 병합하였다. 이곳에는 주천면사무소, 주천농고, 지서, 우체국 등 관공서가 많이 있으며, 7개 행정리에 728가구 2,527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영월군 주천면 판운리
원주군 좌변면(左邊面)에 딸린 지역이었으나 1905년(고종 42)에 영월군에 귀속되었다. 좌변면이란 주천강을 중심으로 원주쪽에서 좌측을 좌변면, 우측을 우변면이라 하였다.
이곳 지명의 유래는 구름과 안개가 넓게 끼이는 곳이므로 '널운' 또는 '너룬'이라 했으나 일제 시대인 1914년에 유목정, 삼거리, 밤뒤, 새벌, 둔전동, 가마동, 장충리 등의 행정구역을 병합하면서 '판운리'라 부르게 되었다. 판운리는 4개 행정리에 188가구 672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콩, 옥수수 등의 밭농사와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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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한반도면 광전리(廣錢里)
평창강변을 따라 형성된 부락으로 대부분 전작위주의 영농 으로 고추, 옥수수 등이 주생산물이며, 마을 앞에 큰 여울이 있어 廣灘里라 불리워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廣灘里, 錢洞, 瓮山 일부를 병합하여 광탄과 전동의 이름을 따서 廣錢리라 하였음
신천리(新川里)
평창강과 주천강이 이곳에서 합류하며 단종이 유배시 이곳을 지남에 이곳 주민들이 이를 슬퍼하며 통곡하였다고 하여 嗚羅谷이라 불리워 오다가 1936년 대홍수로 신천 1리쪽으로 흐르던 강이 신천 2리쪽으로 변하여 내(川)를 이루자 이때부터 시내(新川)라 불리워졌다.1가구에 377명의 주민들이 벼농사와 콩, 옥수수, 담배, 느타리버섯을 재배하면서 만촌, 벌말, 버들치 등지의 자연 부락에서 생활하고 있다.
옹정리(瓮亭里)
평창강변을 따라 3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전작위주의 농촌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옹산리, 사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옹정리라 하였다.
쌍용리(雙龍里)
쌍용리는 김삿갓면 출장소의 소재지로 쌍용양회공장 채석장 위치에 2개의 굴이 있어 쌍용굴이라 하였고 이로 인해 쌍용이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이 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본래 이 마을은 용상?용하의 두마을이 있었는데 용상마을에 칠보라는 부자집 종살이가 있었다. 그런데 칠보와 주인댁 외동딸이 서로 사랑하게 되자 이를 알게 된 주인댁에서는 주위의 이목이 두려워 처녀의 오빠로 하여금 관계를 끊기를 권하게 하였으나 그럴수록 두 사람의 사랑이 더욱 깊어져 주인댁 오빠는 할 수 없이 한사람씩 굴속에 가두어 놓고 사랑의 관계를 끝내도록 하였으나 두 남녀는 굴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다가 죽었으며, 그들은 그 후 각기 용이 되어 여의주를 얻어 청룡과 황룡으로 쌍을 이루어 승천하였다고 하여 쌍용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후탄리(後灘里)
쌍용천 하류와 평창강변을 따라 수개의 산재된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후평리, 평동용하리 각 일부와 광탄리를 병합하고 후평과 광탄에서 한글자씩 따서 후탄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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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남면
연당1리~5리, 창원1리~5리, 토교1리~4리, 광천리, 조전1리~2리, 북쌍1리~3리
영월의 실질적인 관문으로서 충북 제천시,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전형적인 농촌지역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경제 및 생활여건 변화의 기반조성을 위해 연당2리,창원1리 일원에 세계최대 규모의 태양광 발전소 건립이 추진되고 있으며, 서강변의 넓은 들과 맑은 물을 배경으로 한 전원지역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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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북면 공기리
문곡삼거리에서 연덕리의 연평을 지나 10km 정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공기는 주로 고추, 담배, 옥수수 등의 밭농사를 짓고 있는데 마을길이 포장되어 교통은 좋은 편이다. 이곳은 도릉계, 굴앞말, 안공기, 지소덕, 기와집말, 가매실, 장재골 등의 자연 부락이 있으며, 행정 2개 리에 91가구 351명(1992년 기준)이 살고 있다. 공기에는 부모님 묘에서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한 김정태 효자각과 홍우보(洪寓輔)의 처 선성 김씨(宣城金氏)의 열녀각, 서씨 효자각 등 효자, 효부, 열녀각이 많고 웃어른을 받들어 모시는 살기 좋은 고장이므로 '받들 恭'자와 '터 基'자를 써서 '공기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공기는 열두 개의 자연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으므로 '12공기'라는 말이 있다.
영월군 북면 덕상리
북면 덕상리는 배거리산밑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제덕원(濟德院)이라는 원집이 있어서 고덕치를 넘어 평창 약수역(藥水驛)으로 가는 행인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웃마을인 연덕리 연평에는 '연평역(延平驛)'이 있어서 관원들에게 말을 빌려주었다. 덕상리는 연평의 원동재를 넘어가는 길과 서면 광전리 여촌앞으로 지나는 길이 있다. 지금은 2개 행정리에 75가구 281명의 인구가 주로 콩, 옥수수, 감자농사를 지으면서 원동, 용수골, 윗덕전이, 아랫덕전이, 쇠실, 새마을 등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영월군 북면 마차리
마차리는 북면의 면소재지로 동으로 거운리, 문산리와 접하고 서쪽에는 연덕리와 문곡리가 있으며 남으로는 삼옥리, 영흥리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공기리와 평창군 미탄면과 맛닿아 있다. 영월광업소 마차탄광이 전성기였을 때는 종업원이 4,000여명에 달했으며 연간 8천만톤 이상의 무연탄을 생산하였다. 지금은 행정 9개리에 536가구 1,922명의 주민들이 골마차, 절골, 분덕이, 솔치, 학전이 등의 자연부락에서 콩, 옥수수, 감자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하고 있다.
영월군 북면 문곡리
영월군 북면 지역으로 이곳 역시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조정으로 문포(文浦, 개간이)와 가느골(細谷里)에서 한자씩을 따서 '문곡리'라 했는데 문포는 일제시대(1919∼1945)북면의 면소재지였다. 행정 4개리에 27가구 1,007명이 논농사와 콩, 옥수수, 고추, 담배 등의 밭농사에 종사하고 있으며, 가느골, 노루골, 장승백이, 강구, 점골, 가래실, 띠앗, 문성개, 두목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문곡리는 1935년 11월 1일 세곡리, 모상리, 모하리를 병합하였다. 특히, 가느골에 있는 송어장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데 이곳 음곡천(陰谷泉)에서 나오는 물은 가느골과 강구의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영월군 북면 연덕리
1914년 일제(日帝)의 조선총독부령의 의해 북면이라 칭하게 되었고, 연평(延平)의 '연'자와 덕하(德下)의 '덕'자를 따서 '연덕리(延德里)'라 하였다. 연평리는 예전부터 북면의 중심지로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되었으며, 자연부락으로는 가람마을, 나산이, 성황동, 달앗, 사만이, 오만이 등이 있고, 2개 행정리에 192가구 698명의 인구가 벼, 옥수수, 콩, 팥, 녹두, 고추, 담배 등 밭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성황동 입구에는 삼강레미콘 공장이 있고 연평에는 보건지소, 노인정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보안도(保安道) 소속의 '연평역(延平驛)'이 있어서 고덕치의원동을 지나 평창 약수리의 '약수역(藥水驛), 방림역(方林驛), 대화역(大和驛)'으로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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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김삿갓면 각동리
뱃나드리
하동면 대야리(大野里) 맛밭과 각동(角洞)으로 이어지는 나루터이다. 1950년 전만 해도 정선과 임계 등지에서 베어낸 통나무로 만들어진 뗏목과 영월 지방 특산물인 담배, 콩, 옥수수 등 잡곡을 실은 돛단배가 남한강 500리 뱃길을 따라 서울 광나루에 도착하는 데는 열흘 이상이 걸렸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의 계곡 사이로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에 돛단배를 띄어놓고 구성진 정선 아라리를 부르는 뱃사공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고 한다.
뱃사공들은 소금, 광목, 석유 등의 생필품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여울목에서는 줄로 끌어올리고 물이 많은 곳은 노를 저어 올라오며, 곳곳에 있는 작은 포구에서 물건을 팔았다. 각동에서도 보부상이나 도부꾼 뱃사공들이 배를 정박시키고 물건을 팔았는데 이곳은 강물이 굽어 도는 곳으로 배가 드나들었으므로 '뱃나드리'라 하였다.
진촌(津村)
일명 중말(중간 마을)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강 건너에 위치한 오룡동(五龍洞)과 두름 마을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으므로 '진촌'이라고 불렀다.
봉우재
두름마을 뒤에 있는 산봉우리로 이 고개를 지나면 영춘면(永春面) 용진리(龍津里)로 간다. 봉우재 밑에는 석성(石城)인 대야산성(大野山城)이 있으므로 삼국시대의 왕검성, 완택산성, 태화산성, 그리고 단양의 온달성을 연결시키는 봉수터(烽燧基)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에는 영월에 봉수대(烽燧臺)와 파발마(擺撥馬)제도가 없었다. 봉수제란 밤에는 불로서 보내는 봉(烽)과 낮에는 이리의 똥을 태운 연기로 연락하는 수(燧)를 합친 합성어로 평상시에는 1거(炬), 적이 나타나면 2거(炬), 국경에 가까이 오면 3거(炬), 국경을 넘으면 4거(炬), 전쟁이 벌어지면 5거(炬)로 연락을 하였다.
물골
봉우재 밑에 있는 골짜기로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서 '물골'이라 부른다.
두름
중말(中村)앞 나루터 건너에 있다. 맛밭에서 가재골을 지나야 갈 수 있는 교통의 오지로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은 예전부터 10가구가 살았는데 가구 수가 조금만 늘어나도 마을에 화재가 나거나 가축이 죽는 등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두름'이란 '생선을 10마리씩 두 줄로 엮은 것'을 말하는데, 이 마을은 1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으므로 그 지명을 '두름'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언덕위 마을'이라는 뜻인 '두릉'이 '두름'으로 변한 것 같다.
잿말
골마을(골말) 옆으로 예전에 이곳에 큰 기와집이 있었다. 기와집은 재와집으로 소리가 나며 '기와집 마을→재와집 마을→잿마을→잿말'이 되었다. 일설에는 재(둔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얘기도 있다.
오룡동(五龍洞)
중말의 강 건너에 있다. 두름으로 가기 전에 있는데 마을 뒤 구슬봉에서 뻗어 내리는 다섯 줄기 산등성이의 맥이 모이는 곳으로 그 형상이 용의 모습과 같다. 다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如意珠)를 놓고 다투는 오룡쟁주(五龍爭珠)의 명당이 있어 '오룡동(五龍洞)'이라 한다. 1984년까지도 정태섭, 고온영씨의 두 가구가 살았었다. 오룡골 앞에는 '오룡소'가 있다.
골마을
각동리가 소(沼) 형국이라면 골마을은 소가 물을 마시는 입에 해당하는 움푹 들어간 골짜기이므로 '골마을'이라고 한다.
새터(新基)
골말과 샘골 사이에 위치하며 광산 개발로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사택을 짓고 살았던 곳이므로 '새터(新基)'라 한다.
괴목(槐木)
샘골과 새터 사이에 있다. 마을에 큰 괴목(槐木, 느티나무)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에는 커다란 거북바위(龜岩)가 있어 '구암'이라고도 했다.
각동리 돌널무덤(石棺墓)
괴목 서남쪽의 용구미소 위쪽에 있었다. 이곳은 태화산 줄기가 가로막혀 겨울에도 북풍이 없는 따뜻한 곳으로 토질이 비옥하고 남한강의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므로 선사시대(先史時代)인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분지인 영월지방에서 유일하게 감나무가 많이 자라는 고장이다.
돌널무덤은 일제 시대에 원용성(元容成)씨의 구릉진 밭에서 발굴되었는데, 무덤은 두께 7∼10cm되는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너비 130cm, 길이 175cm의 덮개돌로 덮혀 있었다. 이 덮개석은 마을 공동 우물의 다리로 이용되었으나 새마을운동때 덮개석 자체를 시멘트로 발라버렸다. 출토된 유물은 간돌칼 1점과 간돌화살촉 8점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용구미소
괴목과 샘골 사이에 있다. 용구미소는 깊고 구미가 져서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풀어도 끝이 닿지 않는데, 옛날에 형제 장수가 용(이무기)을 잡으려고 들어갔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사시사철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잉어, 붕어, 뱀장어 등이 많이 잡혔는데 영춘(永春) 군관교 위에 소수력 발전소가 만들어지면서 어로(漁路)를 설치하지 않아 고기가 올라오지 못하므로 낚시꾼들이 많이 줄었다.
기전동(基田洞) 큰터
외룡리의 삽짝모랭이에서 내리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마을이다. 일명 '대기동(大基洞)' 또는 '큰터마을'이라고 한다.
중평(中坪)
큰터와 지동(池洞)사이에 넓게 펼쳐진 들이 있는 마을로 그 위치는 내리의 중간이 되므로 '중평'이라 한다. 중평과 지동 사이의 논, 밭을 '중들(中野)'이라 하는데 그위치는 내리분교와 마을회관이 있는 곳이다.
돌솟대
지동의 버스 종점 위쪽인 바른골 어귀로 옛날 절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 마을 안산(案山)인 용바우골의 지세(地勢)와 마을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계곡의 경사가 너무 심하여 풍수학적으로 지동 마을에 해(害)를 끼치고 위협하는 형상이므로 그 기(氣)를 누르기 위해 돌로 조산(造山)을 만들어 마을을 보호하였다고 한다.
이곳 돌탑 꼭대기에는 오리처럼 생긴 돌을 세워 놓았는데 새의 머리가 용바우골을 향하고 있으므로 일명 '돌솟대'라고 부르고 있는데 우리의 전통적인 토속 신앙의 일종이다. 그 건너편에는 내리서낭당과 당숲이 있다.
살개골
중들 밑에 있으며, 그 지형이 디딜방아의 살개처럼 생겼으므로 '살개골'이라 부르는데 삼도봉으로 가는 작은 살개골과 미사리로 넘어가는 큰 살개골이 있다. 일설에는 살구나무가 많아서 '살구골→살개골' 또는 '향곡(香谷)'이라 부른다는 얘기도 있다.
우당골
용바우골 동쪽으로 대추나무가 많고, 폭포가 있는 골짜기이다. 여기에서 강원, 경북, 충청도의 3도가 접하는 삼도봉으로 갈 수 있다. 근처에는 풀이 무성하여 나무로 담장을 만들고 소를 방목하는 사람들이 있다. 옛날 소머리를 제물로 바치고 산신제를 지냈던 산신당이 계곡 우측에 있었으므로 '우당골'이라 하였다.
뒷골
바른골을 지나 동북쪽으로 길게 뚫린 골짜기이다. 녹전리와의 경계인 목우산을 지나 응고개로 질러가는 지름길이 있었다. 지동마을 뒤쪽으로 난 골짜기이므로 '뒷골'이라 한다.
구절터
소야치에서 상동읍(上東邑) 내덕리(內德里)의 밤산골로 넘어가는 산자락에 있었던 절터이다.
옛날 이곳에 큰 절을 지으려고 대목수가 대패질을 하는데 여러 마리의 까치가 울어대면서 대패밥을 입에 물고 회암(回岩)으로 날아갔다. 회암이 좋은 절터인가 생각되어 그곳에다 다시 공사를 하는데 이번에도 또 대패밥을 물고 어디론가 가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스님이(의상대사) 이 까치를 따라가보니 지금의 부석사(浮石寺) 절터에다 대패밥을 수북하게 쌓아 놓았던 것이다. 스님은 이곳이 명당임을 믿고 부석사를 지었으며, 지금도 내리 사람들은 부석사가 세 번째 만에 지어진 사찰이므로 『3부석』이라는 얘기를 한다. 그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부석사를 짓는 중 큰 너럭 바위가 있어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 너럭 바위들이 저절로 공중으로 떠 하나는 내리의 회암(回岩)으로 날아오고 나머지 하나는 그 뒷산으로 옮겨졌다는 전설이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내리에서는 경북 영풍군(榮豊郡) 부석장(浮石場)까지 걸어 다녔으며, 내리분교 학생들은 회암의 곱돌재를 넘어 부석사(浮石寺)까지 도보로 수학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원골
대야치와 조제 사이에 있었다. 태백, 영주, 풍기, 봉화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가벼운 느릎나무로 만든 지게에다 소금이나 절인 생선을 지고 다니면서 곡식과 바꾸어 가던 선질꾼이나 행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목로주점과 같은 작은 행려원(行旅院)이 있었던 곳이다.
장자터
원골과 가리지기 사이에 있다. 옛날 큰 부자가 이곳에 살았는데 주변의 농토가 모두 이 사람의 소유였다고 한다. 가을 추수철이 되면 곡식가리를 쌓아 놓고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잔치를 벌일 줄도 아는 인심이 후한 부자가 있었던 곳이므로 '장자터'라 부른다. 이곳에 큰 묘가 있는데 지금도 그 근처 밭에서는 사기 조각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가리지기
원골 밑에 있는 마을로 여섯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장자터와 원골쪽으로 갈라지는 큰길 밑에 있는 마을이므로 '가라지기→가리지기'로 변하였다.
조제(鳥堤)
원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리 마을회관에서 이곳까지는 10km가 되는데 임씨(林氏)들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자연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지명(地名)의 유래는 임씨(林氏)들이 많이 사는 동네이므로 수풀(林)이 우거졌다는 뜻이 되고, 수풀이 있으면 새(鳥)가 있어야 하므로 마을 이름을 '조제'라 하였다.
절골
조제(鳥堤)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작은 암자가 있었다. 지금도 절터에서는 기와장이 발굴되고 있다.
박달골
조제(鳥堤) 조조에서 경북 봉화로 넘어가는 박달제 밑에 있는 마을이다. 목질(木質)이 단단하여 수레바퀴, 빗, 다듬이, 방망이를 만드는데 이용되는 박달나무가 많은 골짜기이다.
회암(回岩)
지동(池洞)의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는 큰 명당이 있었다 한다. 의상(義相)대사가 676년에 문무왕(文武王)의 명을 받고 절터를 찾으러 다니다가 이곳에다 절을 지으려고 했는데, 까치가 대패밥을 물고 영주군 부석면 북지리(北枝里)로 날아갔으므로 그곳에다 부석사를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浮石寺)를 건립할 명당에 큰 너럭바위가 있어 고민하던 중, 이 바위가 저절로 공중에서 떠서 옮겨간 뒤 그 곳에다 절을 건립하고 이름을 부석사라 하였다. 이때 큰 바위 하나가 이곳으로 날아왔기 때문에 마을의 지명을 '회암(回岩)'이라고 부르고 바위를 '구들바우'라 하고 바위가 넘어온 고개를 '회암령(回岩嶺)'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딸깍소
소야치(작은모랭이) 남쪽에 있는 소(沼)이다. 장마 때 큰 돌이 굴러내려 부딪치는 소리가 딸각딸각거린다고 해서 '딸각소'라 한다. 일설에는 이곳에 '초병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 나이 많은 스님이 표주박을 매달아 놓고 소(沼)의 물을 퍼먹었는데 그 때 표주박이 벼랑에 부딪히는 소리가 딸깍딸깍하여 '딸깍소'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칠룡동(七龍洞)
벌때(峰垈) 남쪽에 있으며, 마을 앞에 있는 용소(龍沼)에서 일곱 마리의 용이 승천(昇天)하였으므로 '칠룡동'이라고 한다. 한때 3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칠룡골에는 송이와 함께 산속 깊은 곳 벼랑 위에서 자라는 엽상체식물인 석이(石耳)가 많이 나는 곳으로 석이는 한방재나 음식의 모양을 내는 고명으로 사용된다. 칠용동 남쪽은 경북 부석면과 경계가 되는 선달산(先達山, ,236.0m)이 있다.
칠룡폭포, 소(沼)
칠룡동에 있는 폭포와 소이다. 옛날에는 물이 깊어서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풀어도 모자랐다는 얘기와,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은곡(隱谷)
조제 남쪽에 있는 마을로 입구는 좁고 안쪽이 넓은 골짜기이다. 조선 말기 나라가 어지러울 때 어떤 현인(賢人)이 가족을 이끌고 십승지지(十勝之地)인 이곳에 와서 은둔(隱遁)생활을 하였던 곳이므로 '은곡'이라고 불렀다. 일설에는 산나물을 뜯으러 갔던 새댁이 이곳에서 애기를 낳았으므로 '응아골'이라고 한다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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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김삿갓면 대야리
맛밭(麻田)
각동으로 건너는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강원과 충북의 접경 지역으로 60∼70년전만 해도 상선이 어물, 소금 등의 생활 필수품과 곡식을 물물 교환하던 곳이다. 이곳 지명의 유래는 충북 영춘면(永春面)과 경계를 이루는 마대산(馬代山, 1,052.2m)이 뒤에 있고, 역(驛)에 지급하던 '마전(馬田)'이 있었으므로 '마전(馬田)→맛밭(麻田)'으로 변하였다. 고려시대 이웃 마을인 정양리에는 평구도(平丘道) 소속의 '정양역(正陽驛)'이 있었다.
가재골(可在洞)
맛밭 남쪽으로, 조선 후기 사회가 혼란해지자 정감록에 심취한 평안도에 살던 박씨(朴氏)들이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이 사람들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지금도 그 지명을 '텃골'이라고 부르며, 한때는 40여 가구가 넘었으나 지금은 6가구가 살고 있다.
이곳의 지명 유래는 길흉이나 화복을 예언한 비기서(秘記書)에 심취한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면서 풍수학적으로 '가히 살아남을 만한 곳이다.'는 의미에서 '가재동(可在洞)'이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본동과 떨어진 '가장자리 마을'이므로 '가재골'이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텃골
가재동의 개척자로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온 평안도 박씨(朴氏)들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이다.
민골
가재골의 남쪽 맛대로 넘어가는 목너미재 밑에 있다. 주위의 산세에 비하여 평평한 지대이므로 '민골'이라고 하는데, 이곳을 지나면 영춘면 푸새골로 간다.
대야산성(大野山城)
대야리의 본동과 가재골로 넘어가는 큰 재 정상에 있다. 삼국 시대 남한강 뱃길을 지키기 위한 성으로 온달성과 왕검성 사이에 축조되었다.
영전이재(嶺轉峙)
가재골과 충북 영춘의 푸새골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큰 고개(嶺)를 넘어(轉)간다고 하여 '영전이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구멍바위
맛밭에서 대야리로 가는 998번 지방도 좌측 벼랑으로 여자의 음부(陰部)와 같은 큰 구멍이 뚫려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구멍바위' 또는 '바람바위'라고 하는데 동네 총각들이 막대기를 가지고 그 구멍을 찌르고 장난을 치면 대야리 본동 마을처녀들이 바람이 났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어른들이 1970년대에 시멘트로 구멍바위를 막아버렸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대야본동(大野本洞
맛밭 대야교 우측인 사태밭 서낭당이 있는 마을이다. 대야리의 중심 마을로 '대야, 본말, 댓들'이라 하는데 이는 마을 앞에 큰 들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태밭 조산당
대야본동 입구에 있는 서낭당이다. 병자년(1936) 홍수 때 마대계곡의 산사태로 큰 흙더미가 떠내려와서 쌓였다. 마을 사라들은 건너편의 구멍바위의 음기(陰氣) 때문에 본동의 양기(陽氣)가 위축되는 것을 걱정하여 이 흙덩이로 조산(造山)을 만들고 서낭당을 세워 음기를 눌렀다.
그후부터 이곳을 '사태밭 조산당'이라 불렀다. 지금도 마을에서는 주과포를 준비하여 매년 당고사를 올리고 있는데 제주는 생기복덕을 맞추어 동네 사람들 중에서 선출한다.
모퉁이
각동초등학교 대야분교를 지나 덕내(큰내)로 가는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바람이 세게 부는 곳으로 정월 대보름에 연날리기 시합을 했으며, 주위의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물이 좋아여름 한철 모퉁이 마을인 각동 2교 밑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다. 이곳은 연을 날리며 홍취를 돋우던 곳 이라 하여 '연흥(鳶興)'이라고도 한다.
덕내(德川)
모퉁이 맞은편으로는 논물을 대기 위하여 보(洑)를 막은 덕내보와 큰 느티나무가 있는 동네이다. 이 마을은 강릉 김씨(江陵金氏)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옥동리와 경계가 되는데 마을 앞으로 큰 옥동천이 흐르므로 '덕내'라고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덕내(德川)'로 변했다. '덕'은 '크다'는 뜻이다.
칠성백이
덕내 북쪽 수리봉 밑에 있다. 절벽이 무너져 움푹 파인 곳으로 칠원성군(七元星君)에게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므로 '칠성백이'라고 부른다.
대야굴
대야리 덕내 북쪽의 수리봉 병창 밑에 있는 길이 400m의 석회 동굴로 강원도 기념물 32호로 지정되었다. 폭 5m, 높이가 10m인 이 굴은 종유석, 석순, 석주 등이 있으며 27종의 생물이 살고 있으나 관리부족으로 많은 종유석들이 훼손되었다.
수리봉
덕내 북쪽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수리'란 '높은 곳'을 뜻하는데 사람의 머리 윗부분도 정수리라고 한다. 즉 우리말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수리메' 또는 '수리봉'이라고 불렀다. 수리봉은 다시 매봉산, 응봉산, 매화봉 이라는 이름으로 변했다.
상암(象岩)
맛대(馬岱)의 유명한 의원이었던 엄상일(嚴相一)의 집 앞에 있는 큰 바위이다. 엄의원은 젊어서부터 산공부를 하여 의술을 터득한 후 가난한 환자들을 많이 고친 분으로 그의 처방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나무 열매나 풀 뿌리 등으로 조제한 약이지만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맛대는 산이 험하여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가축을 물어갔다. 엄 의원이 집 앞에 있는 바위에 가로 15cm, 세로 20cm 크기의 『상암(象岩), 乙酉年 五月(1909년)』이라는 글을 새기자 그 후부터는 가축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상암(코끼리 바위)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하동면 대야리 맛대 마을에 남아 있다.
자작목이
마대 북쪽 골짜기에 있는 고개이다. 자작목이는 곡우(穀雨)때 나무에 흠을 내어 수액을 받아먹는 고로쇠나무와 자작나무가 많았으므로 '자작목이'라고 불렀다. 이 고개를 넘으면 하동면 옥동리 칠금이로 간다. 24절기의 하나인 청명(淸明)과 입하(立夏) 사이인 곡우때 받아먹는 고로쇠나무의 수액은 위장병에 좋다고 한다.
방울재
마대에서 충북 영춘면(永春面) 동대리(東大里)의 베틀 마을과 점터로 가는 고개이다. 예전에 충청도와 강원도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말이나 노새 등에 짐을 싣고 이 고개를 많이 넘어 다녔는데 그 때 목에 매달았던 방울이 울렸으므로 '방울재'라 하였다. 일설에는 방울처럼 동그란 산봉우리로 난 고개길이라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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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동(密洞)
옥동(玉洞)에서 예밀교를 건너 첫 번째 있는 마을로 고려 시대에 밀주(密州)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난리를 피하면서 적을 칠 수 있는 요새이므로 임시로 고을을 옮기고 '밀주(密州)'라 하였으며 지금도 '밀주' 또는 '밀동'이라고 한다. 천민집단 거주지로 수공업에 종사하던 성미탄소(省彌呑所)가 있었는데, 조선 전기에 이르러 해체되었다.
원터
예밀리 밀동의 마을 회관 근처이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지금도 이곳을 '고을원터'라고 부르고 있는데, 옛날 밀주의 청사터였고 그 뒤에는 조선시대 세곡(稅穀)을 보관하던 두창(杜倉)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 역시 출장을 가는 관리나 상인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던 원(院)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샘골(泉谷)
밀골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맑은 샘물이 있어서 '샘골' 또는 '새암골'이라고 하는데 샘골 물은 밀동 마을 저지대의 간이상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삼봉산
샘골 뒤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 셋이 나란히 서 있어서 '삼봉산'이라고 하는데 이곳의 늙은 소나무는 삼봉노송(三峰老松)이라 하여 예밀 8경에 속한다.
창터(倉基)
밀동(密洞)에 있다. 조선 시대의 전세(田稅)나 세곡(稅穀)을 보관하는 창고인 두창(杜倉)이 있었는데, 지금도 이곳에서는 기왓장이 발견되고 있다. 예밀리(禮密里) 밀동(密洞)의 창터(倉基)에 있었던 두창(杜倉)에서는 하동면 지역의 세곡(稅穀)을 징수하여 보관하였다. 이 때 보관한 세곡은 영월부(寧越付)의 읍창(邑倉), 중동면(中東面) 이목리(梨木里)에 있었던 동창(東倉), 남면(南面)의 서창(西倉)에 보관했던 전세(田稅)나 세곡(稅穀)과 함께 배를 이용한 조운(漕運)으로 원주 부론면의 섬강 북쪽 언덕에 있었던 흥원창(興原倉)으로 옮겼다. 이곳에 보관되었던 세곡은 영월, 원주, 평창, 정선, 횡성 다섯 고을의 세곡과 함께 남한강의 뱃길을 따라 여주, 양평, 노량진을 거쳐 용산의 경창(군자감 별영창)에 세곡을 부렸다.
고지기재
밀골에서 998번 지방도를 따라 와석리로 넘어가는 해발 300m의 험한 고개였으나 1980년에 도로가 개통되었으며, 차량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 이 재를 넘으면 태백, 동해로 이른다. 와석리(臥石里)로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와석재'라는 이정표를 세웠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고개 본래의 지명은 '고지기재'로 밀동(密洞)의 창터(倉基)에 있었던 두창(杜倉)의 세곡(稅穀)을 지키는 창고지기인 고지기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가족들과의 상봉을 기다리며 든돌에서 서당을 열고 평생을 혼자 살다간 새풍 선생이란 분의 묘가 있다. 그는 통일이 되면 와석리로 찾아 올 자식을 맞아들이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와석리 입구인 고지기재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br/> 원래의 고지기재는 밀골 배터거리에서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다가 998번 도로와 연결되어 찬물나드리의 도일바위로 내려갔다.
점터(店基)
긴재와 장자터 사이에 있다. 옛날에 옹기 그릇을 굽던 점(店)이 있었으므로 '점터'라 한다. 지금도 옹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는데 옹기를 만들 때 쓰는 진흙을 '즘'이라고 했는데 '즘을 파내던 곳'이라는 뜻도 된다.
장자터
점터 위쪽에 있는 집터이다. 옛날에 마음씨 착한 사람이 부모의 묘를 잘 써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영월군 하동면 예밀리(禮密里)는 예미촌과 밀동 마을의 첫 자를 각각 따 생겨난 지명으로 이 마을의 망경대산 남쪽 산기슭에는 큰 미등(큰 묘둥지)이라는 곳이 있으며 마을의 북쪽에는 '장자(長者)터'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하고 효자로 소문난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병든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그 당시는 황포 돛대를 단 배가 한양에서 물건을 가득 싣고 남한강의 물길을 따라 하동면 각동리 나루터와 금봉연(金鳳淵)인 합수거리를 지나 덕포리까지 와서 물건을 팔고 가던 때였다. 이 예밀리에 살던 조서방은 각동 나루터에서 소금을 사가지고 지게에 지고는 소금치(재렴치)고개를 넘어 연하리 석항, 정선 등으로 장사를 다녔는데 워낙 사람이 순한데다 욕심이 없어서 매 번 손해를 보는 터라 장사는 얼마 못 가서 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제대로 생긴 반듯한 논밭 하나 없는 형편인지라 당장 끼니 거리도 문제가 되고 병중에 계시는 아버지께 약 한첩 사드릴 형편도 못되었다.
이 부부는 온 마을을 다니며 품을 팔아 생계를 어렵게 유지하며 그 와중에서도 병드신 아버님께는 꼭 고기 반찬을 마련하여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세상에 조서방 부부처럼 극진한 사람들은 없을 거야! 모르긴해도 저들 부부는 오래지 않아 큰 복을 받을 거야." 하며 마을 사람들은 조서방 부부를 칭찬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은 날로 심해갔고 그들의 생활도 더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n 부부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눈이 녹기 시작하는 봄부터 산에 올라가 화전을 개간하고 거름을 주어 정성스럽게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점심으로 나물죽을 쑤어 함지박에 이고 남편이 일하는 만경대의 화전 밭으로 가보니 남편이 벗어놓은 지게 옆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남편과 함께 급히 가보니 초라한 모습의 늙은 스님이 쓰러져 있었다. 이 노승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허기져서 헤매다가 나무 그늘 아래의 지게 옆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이들 부부는 늙은 스님에게 먼저 물을 먹인 후 에도 팽개친 채 스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서 나물죽일 망정 성의껏 대접하며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덕분에 건강을 되찾은 늙은 스님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 "세상에 이렇게 착하고 어진 사람들이 있다니. 저 젊은 부부에게 무언가 꼭 보답을 해야지!" 하면서 지금의 큰 미등(큰 묘둥지) 자리에다 당대에 발복하여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장풍득수(藏風得水)형국을 갖춘 명당 중의 명당을 정해주고는 병환에 계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곳에다 묘를 쓰라고 일러주고 떠나갔다
그후 오랜 병환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는 두 부부의 극진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들 부부는 늙은 스님께서 정해준 장풍득수(藏風得水)형국의 명당에다 묘를 썼으며 정성을 다하여 삼년 상을 마친 후, 예전에 장사를 하던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았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야! 요즘 물건을 파는 최서방은 저울눈까지 속이며 이익을 취하는데, 조서방은 사람을 속일줄도 모르고 마음이 고진 이야. 그뿐인가! 조서방 부부는 효자로 소문이 난 사람이니 우리 마을 사람들은 이제부터 그 사람의 물건을 사주기로 하세!"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있듯이 인근 마을의 사람들까지 조서방 부부를 도와주었다.
그후 조서방 부부는 장사도 잘되고 자식들이 모두 훌륭하게 자라서 마침내 온 근방에 소문이 날 정도의 큰 부자가 되었다. 먼 훗날 그의 후손들이 묘역을 크게 조성함으로써 이곳의 지명은 큰미등이라 불리게 되었고 또한 지금도 이곳 예밀리 사람들은 이들 부부가 소금 장사를 위해 넘어 다니던 고개를 '소금치(재렴치)'로, 또 그들이 살았던 집터를 '장자(長者)터'라고 불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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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동리(玉洞里)
하동의 면 소재지이다. 예밀리(禮密里) 밀동(密洞)은 1167년 고려 시대에는 밀주(密州)의 청사(廳舍)가 있었던 곳이며, 그 당시 죄인들을 가두던 감옥이 옥동리의 옥동중학교 자리에 있었다.
옥(獄)이 있었던 마을이므로 '옥동(獄洞)'이라고 했으나 어감(語感)이 좋지 않다고 하여 '獄洞→玉洞'으로 고쳤다. 현재는 130가구에 433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옥동중학교와, 하동지서, 하동농협, 하동우체국 등의 행정 관서가 있다. 옥동리에는 구한말 의병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삼척 김씨 백우(白愚) 김상태(金尙台)장군의 사당이 있었으나 관리 소흘로 없어졌고 1993년 그 자리에 『순의비』를 세워 그의 높은 공적을 기리고 있다
날파리 장광
옥동 송어장 앞의 넓은 돌장광으로 예비군 훈련장이 있다. 하루살이와 날파리가 많아서 생겨난 지명으로 이곳은 장마가 지면 많은 수석인(壽石人)들이 하동 옥석(玉石)을 탐석하는 수석산지로도 유명하다. 강가에는 넓은 암반이 있는데 이것을 마당바위라고 부른다.
칠금이(七錦)
옥동 송어장이 있는 옥동교를 지나 남쪽으로 길게 뻗은 마을이다. 칠금이 뒤에 칠칠 바우가 있는데 옛날 비가 개인 후 이 바위에서 일곱 색깔의 무지개가 생겼으므로 칠금이라고 불렀다. 대성광업소라는 석회광산이 있으며, 그곳을 지나면 '맛대'로 갈 수 있다.
물무리골
칠금이 뒤에 있는 골짜기로 많은 양의 샘이 솟아나므로 '물무리골'이라고 부르는데, 옥동 사람들이 간이 상수원으로 이용한다.
백골(柏谷)
옥동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로 원래의 지명은 배골(背谷)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배골→백골'로 와전되었다. 일설에는 이곳에 잣나무(柏木)가 많아 백골(柏谷)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옥골(玉谷)
옥동중학교 운동장 부근을 말하는데, 운동장을 만들 때 옥터의 기초석이 발견되었다. 고려 시대 밀동(密洞)에 밀주(密州)의 관청이 있을 때 이곳에다 감옥을 만들어 죄인을 가두었으므로 '옥골(獄谷)'이라고 불렀다. 그 후 어감(語感)이 좋지 않으므로 '옥골(玉谷)'로 고쳤다.
뱃나들이(舟津)
옥동초등학교 부근이다. 지금은 예밀교(禮密橋)가 설치되어 있으나 예전에는 옥동에서 배를 타고 예밀리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어서 생겨난 이름이다.
윗골폭포
옥동 강 건너 덕가산(상여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여름철이 되면 덕가산에서 흐르는 물이 폭포수를 이루며 떨어져 옥동천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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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실(直谷)
와석에서 외룡리로 들어가는 입구로 외룡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동네가 길고 곧게 뻗어 있어서 '곧은골, 직실' 또는 '외직리(外直里'라 하였다. '곡(谷)'은 이두식 표기인 '실'로 읽히기 때문에 '직실'이라고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천민집단 거주지인 직곡부곡(直谷部谷)이 있었으며 '육말연(陸末淵)'이라는 큰 연못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육말연은 용연을 말하는 것이다.
숲거리
소미원(小味院)으로 가는 입구에 있다. 느릅나무와 느티나무숲이 우거졌으며, 예전에는 황새와 두루미가 많이 서식하였으나 1972년 수해와 태풍으로 나무가 부러지고 부엉이가 황새 새끼를 잡아먹어서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옛날에는 소미원이 경상도의 춘양장(春陽場)과 소천장(小川場)으로 가는 큰 길이었으며, 행인이나 보부상(褓負商)들이 이곳의 마방집과 주막집에서 묵어 갔다. 또한 오래된 느티나무가 많다.
열재
직실 남쪽 음짓말 뒤에 있는 고개로 이곳을 넘으면 와석리의 노루목과 조촌(趙村)을 지나 의풍으로 간다. 예전에는 칡가루로 녹말을 만들어 남자는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서 좁은 이 고개를 넘어 의풍장(儀豊場)에서 쌀이나 농기구, 생필품으로 바꾸었다. 돌아올 때는 줄(열)을 지어 좁은 고갯길을 넘어 다녔는데 새벽 여섯 시에 출발하여 장을 보고 돌아오면 밤 아홉시가 되었다 한다.
음지뜸
외룡리의 남쪽으로 열재와 배나무골이 있는 곳으로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음지쪽 마을이다. '뜸'이란 큰 마을 가까이에 따로 몇 집씩 모여 사는 '작은 동네'를 말한다.
소미원골(小味院谷)
직실 숲에서 소미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골짜기이므로 '소미원골'이라 한다. 경치가 좋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31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교통의 요충지로, 입구인 숲거리에는 큰 주막집이 있었다.
반정이(半程里)
숲터거리에서 소미원으로 가는 경계이다. 즉 하동면 와석리와 중동면 화원리의 중간 지점이므로 '반정이'라 한다.
창터거리
하동면 예밀리에 있었던 두창(杜倉)으로 운반하는 세곡을 임시로 보관하던 창고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으로 외룡초등학교 뒤쪽에 있었다.
용연(龍淵)
용담소(龍潭沼)가 있는 마을로 옛날 이 연못에서 용마(龍馬)가 나왔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도 큰 바위 위에는 용마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나온 용마가 든돌(거석리)에서 태어난 장수가 죽은 것을 알고 3일 동안 울부짖으며 뛰어다니다가 죽자와인리(臥人里) 들모랭이에 묘를 만들어 주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용마암(龍馬岩)
용담소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이다. 바위에서 용마가 나왔으므로 '용마암'이라고 한다.
용연서낭당(龍淵城皇堂)
용담소의 용마암 위에 있었다. 최영 장군의 화상과 신위(神位)를 모시던 서낭당으로 새마을운동 때 마을에서 불태워버렸다. 전에는 정월 대보름날 동네 사람들이 돼지를 잡고 삼색 실과와 시루떡을 준비하여 당고사(堂告祀)를 올렸다..
구보(舊洑)
음짓들에 있는 논에다 물을 대기 위하여 막은 보(洑)이다. 제비바위 앞에 새로이 산보를 막음으로 구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배나무골
음지말 서남쪽으로 구보 앞에 있다. 마을 입구에 큰 돌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으므로 '배나무골'이라 불렀다..
삽짝모랭이
외룡리에서 내리로 들어가는 삼거리의 칡가루 공장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위치상 사립문에 해당되는 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삽짝모랭이'라고 한다.
삽짝'은 '싸리나무 같은 잡목을 엮어서 만든 문짝'을 말하고, '모랭이'는 산모퉁이를 휘어 돌아가는 '모퉁이'의 영월 사투리이다.
갈미산
외룡리의 북서쪽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이다. 그 형상이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는 갈모와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갈모산→갈미산'이라 불렀다..
거북바위
제비바위 마을의 신보 위쪽에 있었다. 옛날 이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심성이 착하여 찾아오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손님들의 뒤치닥거리에 지친 안주인은 손님들이 오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여 스님을 모셔다가 "스님 우리 집에 손님이 찾아오지 않도록 해 주실 수 없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 스님이 생각할 때는 주인 내외의 관상이 좋은 것도 아니고 집터를 둘러봐도 결코 부자가 될 명당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대문 앞을 내다보니 집앞으로 흐르는 개울가에 큰 돌거북이 입을 크게 벌리고 집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저 거북이가 이 집을 큰 부자로 만들어 주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안주인에게 "주인마님, 이 돌거북의 주둥이를 깨뜨리면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안 살림은 점차 줄어들 것이니 생각을 잘해서 결정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그 다음날 부인은 남편 몰래 도끼를 가지고 거북바위의 머리를 치자 입이 떨어져 나가면서 붉은 피가 솟아났다.
그때부터 그 부자집은 망해버리고 손님들의 발걸음도 끊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 거북바위는 몇 년 전만 해도 제비마을에 있었는데 998번 지방도를 확포장할 때 없어졌다고 한다.
아우라지
삽짝모랭이 남쪽 계곡으로 내리천과 녹전천이 합쳐지는 곳이므로 '아우라지'라 한다. 이곳은 구보(舊洑)가 있어 외룡리 음지마을 일대의 논물을 대기도 한다. 아우라지는 두 군데의 물이 어우러지는 곳(합쳐지는 곳)이므로 '어우러지기→아우라지기→아우라지'로 변하였다.
절골(寺谷)
문둥이집골 동쪽으로 전에 절이 있었던 골짜기이다
석이산(石耳山) 제비바위 마을 북서쪽인 구름다리골을 지나 운교산(雲橋山)에 높게 솟은 벼랑을 말한다. 이곳에는 큰 잔치집의 국수나 음식 등에 고명으로 쓰거나 한방재로 쓰이는 엽상체식물인 석이가 많이 나는 바위가 있으므로 '석이산'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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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실(注谷)
주문리 검암산 밑의 중심 마을이므로 '주실'이라 한다. 영월 동쪽 40리 김삿갓상회가 있는 주석분교 개울 건너편에 있다. 마을이 따뜻한 남향으로 앉아 가을철이면 감이 익어 마을 전체가 붉게 보인다. 주실 마을은 경주 김씨들의 집성촌으로 1907년 7월 26일 찬물나드리의 도일바위전투에서 패한 일본인들이 주실 마을 주민들을 살육, 방화하여 기성희(金性熙)의 귀와 팔을 자르고 김도희(道熙), 김치희(致熙), 김일희(日熙), 김교성(敎聲), 김정운(正雲)등을 살육하였다.
주실나들이
와석리(와인리)에서 주실의 본마을로 건너가는 냇물이다. 지금은 다리가 있어서 자동차도 건너다닐 수 있으나, 예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동발나무로 교각을 세우고 덕우(걸치는 나무)로 고정시킨 다음 청솔가지와 진흙으로 다리를 덮은 '뚝다리'를 설치하여 한겨울에 이용하였다. 사람들만 건너 다니는 곳은 널다리(통나무를 톱으로 켜서 널빤지로 만든 후 철사로 묶어서 사용하는 다리)를 이용했으나 사람과 소가 다니는 곳은 뚝다리를 놓았다. 그러나 뚝다리가 없었을 때는 주실 사람들이 볼일을 보기 위해 얕은 냇물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다니던 곳이므로 '주실나들이'라 한다.
솟대백이 진사터
주실 본마을에 있는 큰 기와집터로 경주 김씨 집안에서 2代에 걸쳐 진사(노진사, 소진사)가 났다고 한다. 이 집터는 지금도 '진사터'라고 불리고 있으며 백여 년이 지난 고가(古家)가 남아있다. 진사터 앞에는(김정도씨 집부근) 큰 솟대를 세워서 진사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솟대 꼭대기에는 새와 함께 바람개비를 달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람개비 돌아가는 소리 때문이 이 솟대를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독바우
주실 서쪽인 고지기재 위쪽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항아리처럼 생겼으므로 '독바우'라고 부른다.
새실골
독바우 위에 있는 골짜기로 그 우측은 큰 새실골, 좌측은 작은 새실골이라 한다. 이곳은 새로이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이 살았으므로 '새실골'이라 한다. '실'은 '골짜기 마을'을 의미한다..
샘골(泉谷)
주실마을 뒷골짜기로 약 3km쯤 가면 차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으므로 '샘골'이라 한다. 이곳을 지나면 모운동으로 갈 수 있다.
벽골(壁谷)
주실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로 골의 동·서쪽이 벽처럼 깎아지른 듯하고 푸른 계곡이 흐르는 곳이므로 '벽골'이라고 한다. 모운과 예미촌, 그리고 싸리재를 넘어 화원리로 가는 자동차 도로가 있다. 나주 정시(羅州丁氏) 25세 손으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낙향한 영월 정씨들의 증조인 봉선대부 정극실(후에 丁居實로 개칭)의 묘가 이곳에 있었으나 실묘되었다. 31세손 세강(世康)이 집안에 큰 장군이 난다는 풍수가의 말을 듣고 선조의 산소 위인 장군대 좌형국(將軍大座形局)에 부친의 묘를 쓰려하자 문중에서 반대하였다.
이에 세강은 330여년 전인 1660년에 영월읍 삼옥리(사모개)로 이주했는데 그의 후손들이 먹골, 벌말, 섭사 등에 터를 잡고 있다. 지금도 이곳은 장군대좌형국의 묘터를 찾기 위해 지관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곳이다.
독짓골(독지미)
벽골 뒤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 이곳에서는 중배가 불룩하고 운두가 높은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만들었으므로 '독짓골'이라 불렀다.
벼름이(비림이)
벽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모운의 옥동광업소로 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여섯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았으나 옥동탄광의 폐석이 흘러내려 자연 경관을 많이 훼손시켰다.
이곳 골짜기에는 참나무가 무성하여 농기구를 참숯(참나무숲)에 달구어 두드린 후 날을 세우고 쇠를 벼름질하는 벼름깐(대장깐)이 있었으므로 '벼름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산골짜기에 참나무가 무성하므로 '나무성할 비(揷)'자와 '수풀 림(林)'자를 써서 '비림'이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참나무 서낭당
벼름이에 있는 서낭당으로 세 이름이나 되는 큰 참나무가 당목(堂木)으로 있었다. 예전에는 매년 대보름에 당고사를 올렸으며 『城皇之神位』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독주골(獨住谷)
벼름이 동쪽인 삼막골로 가는 골짜기이다. 외딴 화전(火田) 지역인 이곳에 한 가구가 살았으므로 '독주골'이라고 불렀다.
삼막골(麻幕谷)
주실 동쪽으로 예전에 이곳에는 대마(大麻)를 많이 심은 밭이 있었다. 삼베를 짜는 데 이용되는 대마, 저마, 아마, 황마를 통틀어서 삼이라 하는데 삼밭의 삼을 짜기 위하여 쳐 놓았던 막(幕)이 있었던 골짜기이므로 '삼막골'이라 하였다.
무릎대, 무릉대
미사리(未死里) 맞은편으로 흐르는 옥동천(玉洞川) 건너이다 전에는 세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도자기 원료를 채굴하는 三寶세라믹스광산이 있다. 옥동천이 흘러내려 얕은 내를 이루어 사람들이 옷을 무릎까지 걷고 건너다녔으므로 '무릎대'라 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무릉대'로 변하였다. 가을철에는 둑다리를 놓았으나 지금은 광산에서 잠수교를 설치하였다.
싸리재
모운 북쪽에 있으며 마을 뒤에는 해발 1,087.9m의 망경대산이 뻗어내려 중동면 화원리(禾院里)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싸리나무가 많아서 '싸리재'라고 부른다는 얘기도 있으나, 이 고갯길이 망경대 산봉우리 사이로 이어져 있으므로 '샛재→사이재(間峙)→싸리재'로 된 땅이름으로 생각된다
모운(會雲)
모운은 벽골 북쪽의 높은 분지로 망경대산 밑에 있다. 비가 오고 난 후 안개와 구름이 많이 끼는 마을이므로 '모운'이라 한다. 옥동광업소와 모운초등학교가 있는 광산도시였으나, 석탄합리화 사업으로 인한 광산의 폐광과 더불어 황폐화되었다. 극장터인 옥광회관자리는 늪지대인 연못을 메운 곳으로 흐린 날이면 늘 구름에 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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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별리(津別里)
진별리는 남한강 상류에 있는 마을로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나루두둑'이라고 부르던 '진구리(津邱里)'와 '베리골'이라 부르던 '별이곡(別梨谷)'에서 '진'자와 '별'자를 따서 '진별리'라 부르게 되었다.
진구리는 옛날 소금, 생선 등을 판매하던 나룻배가 드나들던 나루터가 있었으며 그 건너편에는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고씨동굴이 있다. 진별리는 꽃절, 고습어구, 가리골, 베리골, 진구리, 돌앞개, 지푼개, 당골, 양주터 등의 자연부락에 50여가구 175명의 주민들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생활하고 있다.
베리골(別梨谷)
정양리(正陽里)와 진별리(津別里)의 경계인 각시바위(모처녀바위)에서 고씨굴 쪽으로 약 500m쯤 가다가 좌측으로 들어가 있는 마을이다. 골짜기가 매우 깊고 벼리(베리)밑에 있으므로 '벼리골→베리골'이라고 불렀다. 베리골을 한자식으로 표기하여 '별이골(別梨谷)'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시대의 권섭(權燮, 1641∼1721년)은 「영삼별곡(寧三別曲)」이라는 기행가사에서 별이골(베리골)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별이실 외딴 마을 해는 어이 쉬 넘거니
<봉당(封堂)의 자리 보아 더새고 가자스라
밤중에는 사립밧기 긴 바람 니러나며
삿기곰 큰 호랑이 목가라 우는 소리
산골이 울혀이셔 기염도 흘난할샤
칼빼며 겻희노코 이 밤을 계유새와 ----
권섭(權燮)은 숙종 때 사람으로 호는 옥소(玉所) 또는 백취옹(百趣翁)이고 자는 조원(調元)이라 했다. 「영삼별곡」은 그가 34세 숙종 30년(1704)에 삼척 부사로 있던 외조부 이세필(李世弼)을 찾아왔다가 영월, 삼척 일대의 명승지를 답사하면서 지은 기행가사로 그의 초고문집인 「옥소고(玉所稿)」에 실려 있다. 권섭은 44세때 충북 청풍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진경산수화를 그리는 정선과 교류했으며, 54세에 제천 문암동으로 이주하여 89세로 세상을 뜰때까지 50여권의 문집을 남겼다.
고습어구(高濕谷口)
영월읍 정양리와 하동면 진별리의 경계이 모처녀바위를 지나 고씨동굴로 가는 595번 지방도의 좌측인 미래가든이 있는 곳이다. 베리골로 들어가는 골짜기 어구로 항상 물이 고여 있고 축축한 기운이 있다.
용담굴(龍潭窟)
진별리 베리골 왼쪽의 8부능선에 있으며, 강원도 기념물 23호로 지정되었다. 이 동굴은 고생대(古生代)의 석회암층으로 길이는 350m에 이르는 수직굴로 내부의 온도는 계절에 관계없이 15∼18℃가 된다. 4개의 큰 광장만 수십만년 전에 생성된 석순과 종유석들이 있고 30여 종의 생물이 살고 있으며 그 동안 학계에서 많은 학술조사가 있었다.
텃말(基村)
베리골의 중심 마을이다. 이 골짜기에 들어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터를 잡고 살았다 하여 '텃마을'이라 했으며, 지금도 마을에는 작은 연못 주위로 10여가구가 살고 있다. 이 베리골은 1970년대 화전 정리를 하기 전 만해도 70여 가구가 살았던 큰 마을이었다. 화전민들은 골짜기마다 흩어져 살았는데 마을의 모임이나 민속놀이는 이곳 텃말에서 이루어졌다.
곰배나무골
텃말 북쪽에 있다. 흙덩이를 깨뜨리는 농기구 곰배(곰방메의 사투리)를 만드는 물푸레나무가 이곳에 많았으므로 불리어진 이름이다.
곶절개(화절치)
예전에 절이 있었던 곳으로 돌앞개 북동쪽에 있다. 봄이 되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피어 동네 어린이들이 참꽃을 꺾으러 왔으므로 '꽃절개→곶절개'라고 불렀다.
지금으로부터 30∼40년전 만해도 보리고개가 있어 산에 올라가 참꽃(진달래)을 따먹거나 칡, 찔레순, 목화 열매를 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채우는 일이 허다하였다. 옛날에는 참꽃밭에 가면 참꽃문둥이가 잡아먹는다 하여 여러 명이 떼를 지어 다니기도 하였다.
늪둔지
곶절개 위에 있는데 항상 물이 고여있는 늪이 있는 언덕이므로 '늪둔치→늪둔지'라고 불렀다. 이곳은 1만여 평의 넓은 들녘으로 초지를 조성하여 목장으로도 이용되었다
새양개
지푼개 동쪽에 있는 양지바른 실개천이다. '새'는 '동(東)쪽'을 뜻하고 '양(陽)'은 '양지(陽地)바른 곳'을, '개'는 '시냇물이 흐르는 곳'을 의미한다. 즉, 양지쪽에 있는 냇가라는 뜻이다.
양주터
둔지머리와 들곤이 사이에 있다. 「정감록」에 의하면 큰 난리와 굶주림에서 살아날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의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인데 난리가 나면 종적을 감출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오면 안된다. 寧越正東上流 可臧亂踪 無髮者先則否』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기묘사화 때 큰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組)의 후손들이 공주로 낙향했다가 임진 왜란때 평창 주진을 거쳐 베리골과 명생동에 정착하였다. 한양 조씨 후손들이 십승지를 찾아서 하동면 와석리 조촌(趙村)에 터를 잡고 마을 입구를 미사리(未死里)라 하고, 그 안에 있는 마을은 명생동(命生洞)이라고 불렀다. 그후 후손들이 이 골짜기에서 계속 살았으므로 그 곳의 지명도 조촌(趙村, 조씨들의 집단거주지)이라고 불렀고 와룡초등학교 와석분교가 있다. 즉 한양조씨 17세손인 홍필(弘必, 1707∼1777년)이 처음으로 하동면에 터를 잡고 살다가 죽었는데 그의 묘는 부인 인동 장씨와 함께 진별리 베리골에 묻혔으므로 '양주터'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도 이 산소는 후손들에 의해서 잘 관리되고 있다.
매봉재
베리골에서 연하리 계사동(연하폭포)으로 넘는 고개이다. 매봉산에 있는 고개이므로 '매봉재'라 하는데 산나물이 많이 나는 곳이다. '매봉'이란 그 주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뫼봉→매봉'이라는 뜻의 '매'가 '수리매'로 변하여 '수리봉, 수리산, 매봉산'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
진구리(津邱里)
원 지명은 나루두둑이다. 고씨굴 앞에 있는 마을로 나루터 둔덕에 있는 마을이므로 '나루두둑'이라고 했다. 이곳 지형이 배 형국이므로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는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였다. 즉 우물을 파는 것은 배 밑바닥을 파서 구멍을 내는 격이므로 배가 침몰하면 마을에 큰 재앙이 생긴다고 믿고 있었다. 전에 어느 집에서 우물을 팠는데 송아지 한 마리가 빠져 죽자 그 우물을 메웠다고 한다. 이곳의 식수는 논이골의 간이상수원이 이용된다.
고씨굴(高氏窟)
나루두둑(진별리)의 강 건너에 있는 굴이다. 원래는 '노리곡석굴(魯里谷石窟)'이라 했으나 의병장 고종원(高宗遠)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했으므로 '고씨동굴'이라 하였다.
4억년의 신비를 자랑하는 이 굴은 호수, 폭포수, 광장 등과 24여종의 미생물이 서식하며 1985년부터 국민관광지로 개발되었다. 고씨굴에는 횡성 고씨(고종원 일가)들이 피난을 하면서 밥을 짓기 위해 불을 때어 그을린 흔적과 솥을 걸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
다랭이골
구마봉 밑에 있는데 진별리의 공동묘지로 이용되고 있다. 구마봉이 말(馬)의 머리부분이면 이곳은 다리에 해당되는 위치이므로 '다랭이골'이라 한다.
시막골(侍幕谷)
진별초등학교 뒤에있는 골짜기이다. 영월의 의병장 고종원(高宗遠)의 어머니인 엄씨(마대 엄의 집안에서 출가)의 산소가 있다. 엄씨는 1589년 11월 20일에 작고했는데 며느리인 창령 조씨가 이곳에다 막(幕)을 치고 3년동안 시묘(侍墓)를 살았으므로 '시막골'이란 지명이 생겼다.
이 마을에 살던 고만성(高萬星, 88년도 83세)씨가 이곳에서 오소리굴을 발견하여 땅을 파다 불을 지핀 흔적이 있는 구들장을 발견했는데 이곳이 바로 시막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산소 앞에 있는 큰 느티나무는 그때 심은 것이라 한다. 고씨굴 앞 도로 가에 있었던 열녀각(烈女閣)은 1972년 8월 홍수로 없어졌다.
부들골
시막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습한 곳에서 잘 자라며 잎과 줄기로 방석이나 부채를 만들 수 있는 부들이라는 풀이 많아서 '부들골' 또는 '부드라이골'이라 부른다.
울여울(鳴灘)
고씨동굴과 각동교(角洞)사이에 있다. 여울 건너편으로 깎아지른 듯한 층암 절벽 위에 큰 노송나무가 남한강 줄기를 굽어보고 있으며, 그 밑으로 긴 여울이 흐르는데 여울물 흐르는 소리가 크게 울리어 '울 鳴'자와 '여울 灘'자를 써서 '鳴灘' 즉 '울여울'이라 하였다.
「寧越付邑誌」에 『鳴灘 在虎灘下二十里水急 울여울은 범여울 20리 아래에 있으며, 물살이 급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핏골
울여울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의병과 왜구들이 싸울 때 핏물이 흘렀던 곳이므로 '핏골'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침략하자 진별리에 살던 고종원(高宗遠), 고종길(高宗吉), 고종경(高宗慶) 형제가 영월을 지키기 위해 각 지역에 통문(通文)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문무(文武)에 뛰어난 고종경이 의병장이 되었는데, 강원도 감사였던 유영길(柳永吉)의 명으로 병사 5백명을 거느리고 원주 흥원창(興原倉)으로 진군하다 왜적을 두려워하는 많은 병사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고종경은 도착일을 지키지 못하고 처형이 되었다. 그 후고종경의 억울함이 밝혀져 유영길은 파면되고 참판 강신(姜紳)이 감사로 임명되었다. 고종원의 가족은 왜구가 진별리까지 쳐들어오자 노리곡석굴(魯里谷石窟)로 피난했는데, 그 당시 불을 지펴 밥을 지은 흔적이 지금도 고씨굴에 남아있다. 왜구들은 고씨 가족이 피난하는 굴 앞에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렀으며 고종원, 종길 형제는 굴 밖으로 나와 왜구의 포로가 되고 고종원의 부인 조씨(曹氏)는 굴 안의 소(沼)에 투신했다.
포로가 된 고종원 형제는 1592년 8월 17일 영월읍 봉서루에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과 사산감역(四山監役) 이사악(李士岳), 평창 중방(中房) 고산영(高産英) 등과 함께 감금되었다. 이들은 주천 빙허루에서 하루를 지내고 산림을 지나 원주로 압송되어 목책 속에 수용되었으나 9월 초하루 밤이 깊어지고 소낙비와 번개 소리가 요란한 틈을 타서 목책의 기둥을 뽑아버리고 권군수 일행과 함께 탈출하였다. 그러나 수렁에 맨발로 단구역(丹丘驛)에 다다른 이들은 뒤를 추격하는 왜구에게 붙잡혀 아우 종길은 살해되고 종원은 목숨을 부지하여 힘들게 진별리로 돌아온 사연이 고종원의 일기인 「기천록(紀天錄)」에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진구리(津邱里)의 핏골을 중심으로 남한강 계곡은 왜구들의 살육과 방화로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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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중동면
녹전리
녹전리는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111호에 의하여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녹전리(碌田里)와 유전리(柳田里)에서 첫 자를 따서 '녹전리'라고 하였다.
원래는 상동면으로 면 소재지가 이곳 녹전리에 있었으나 상동광업소가 개광(1923년)되어 1973년에는 구래리의 인구가 3만이 넘자 녹전리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읍 소재지를 구래리(九來里)로 옮기게 되었다.
녹전리에는 중동면사무소와 녹전중학교, 지서, 농협, 우체국 등 관공서가 있다.
녹전리는 법정 4개 리로 294가구 1,106명(1992년 기준)의 인구가 녹반리, 행금벌, 응고개, 시누리, 유전리, 도화동 등지의 자연 부락에서 밭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석항리
원래는 정선땅인데 1914년 상동면에 편입되었다.
돌항소(乭項所)라는 천민 집단 구역이 있었으므로 '석항리(石項里)'라 하였다.
석항리는 태백선 철도가 지나는 곳으로 석항역과 무연탄 집하장이 있으며 농가 9가구, 비농가 101가구로 행정 1개 리에 409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석항 마을 뒤에는 서낭당이 있었고, 화원리, 연상리, 정선군, 신동읍 천포리와 인접하고 있는 작은 리(里)로 특이한 자연부락의 지명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다.
연상리
본래 영월군 상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1914년 연상리, 활라리와 정선군 신동면 석항리 일부를 병합하였으며 1986년 4월 1일 중동면이 되었다.
중동면 연상리는 영월읍 연하리와 석항 사이에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이곳의 지명 유래는 마을 주변을 둘러싼 산봉우리가 연꽃봉우리 현상이고 연하초등학교 뒤에 연꽃이 피는 연못이 있었으므로 '연꽃 蓮'자와 '못 池'자를 써서 땅이름이 만들어진 '연지동' 위쪽에 있으므로 '연상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연상리는 법정 2개 리에 203가구 747명이 마구, 손도리골, 궁장동, 북실, 샘말 등의 자연 부락에서 밭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이목리
이목리는 화원리와 녹전 사이에 있는 마을로 원래는 상동읍 이었으나 1986년 4월 1일 영월군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중동면에 편입되었다.
이목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옛날 어느 도사가 이곳의 형국이 이화낙지형국(梨花落地形局)이므로 배나무를 심으라고 하였다.
원터에 있었던 배나무도 이 때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목리는 다른 지역보다 배나무가 많았으므로 순수한 우리말로 '뱃재'라고 불렀으나 그 후 '이목리(梨木里)'로 변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이웃에 있는 횟골을 병합하였으며, 1개 법정리에 78가구 307명이 상이목, 하이목, 횟골,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큰 절이 있었다는 고장동 등의 자연 부락에서 고추, 마늘, 옥수수 등의 밭농사로 생활하고 있다.
이곳에는 400여년 전 경주 김씨들이 가장 먼저 정착하였다고 한다.
창터 마을에는 전세와 대동미 등 관곡을 보관하던 20칸 짜리 동창(東倉)이 있었고, 녹전리와 경계가 되는 선령약수 건너편 돌서덕에는 세아름이 넘는 큰 신배나무 밑에 원터가 있었다.
이곳 원집에는 식량과 반찬, 짚신 등을 비치해두어 수라리재를 넘어 다니는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던 곳이다.
물건을 이용한 만큼 엽전을 나무에 꽂아놓았다고 한다.
직동리
직동리는 해발 750m의 높은 지대로 음력 9월이면 민물 김이 채취되고, 조개껍질과 같은 바다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 곳이다.
백운산(白雲山) 자락의 두메 산골인 이 마을은 민초(民草)들의 한 어린 사연이 남아 있는 곳으로 의병, 동학교도들이 관군과의 접전에서 집단으로 피살되었으며, 가까이는 1949년 좌익 빨치산에 의해서 이 동네의 우익 청년단원 10여명이 학살당한 곳이다.
'직동리'의 유래는 수많은 의병과 동학교도들이 죽으면서 흘린 피가 계곡 전체를 붉게 물들였으므로 '피 稷'자와 '골 洞'자를 써서 '稷洞里', '핏골'로 부르게 되었다.
큰마을, 찰골, 장수골, 상막동, 하막동, 한밭골 등의 자연부락에서 73가구 267명이(1992년 기준) 화전과 밭농사를 짓고 있으며 김해 김씨가 많이 사는 곳이다.
특히, 깨끗한 물을 이용한 송어 양식장이 여섯 곳이나 생기면서 푸른 빛을 띠고 흐르던 직동천과 주위의 너럭바위들은 그 본래의 깨끗함이 사라지고 있다.
직동리는 산이 높아 옛날에는 호환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도 곳곳에 호식총(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무덤에 떡시루를 씌우고 삼베할 때 쓰는 쇠챙이를 꽂아놓은 곳)이 있다.
화원리
중동면 화원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화라리(禾羅里)'와 '소미원(小味院)'에서 한 자씩 따서 그 지명이 만들어졌다.
화원리는 망경대산 줄기로 고갯길이 험악한 수라리재가 있어서 예부터 원집이 있었다.
원(院)에는 여러 개의 목로방이 있었고 부엌에는 쌀과 반찬이 준비되어 있어서 잠을 자고 난 길손들은 새벽밥을 해 먹고 나무로 만든 엽전꽂이에 돈을 꽂아놓고 길을 떠났다고 한다.
현재는 2개리 91가구에 345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화라리, 바닥터, 점골, 망전이, 소미원, 성황골, 장광마을 등지에서 콩, 옥수수, 감자, 고추 등을 재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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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상동읍
구래리
태백산 줄기인 민잭산과 고직령에서 흐르는 물이 웃냇뜰(상천평)을 굽이 돌아 농거리에서 어평천과 합류한 후, 심산유곡을 이루면서 칠랑이의 아우라지에서 구래천과 어우러져 남한강 상류인 맛대로 이어진다.
구래리의 유래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636년(선덕왕 5) 당나라에 들어가 8년간의 고행을 마친 후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왔다. 자장법사는 이것을 봉안하기 위해 '태백산 갈반지(葛蟠地)'를 찾으려고 상동을 아홉 번이나 다녀갔으므로 이곳을 '구래리(九來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장은 본구래에서 시작되어 정선으로 뻗은 아름드리 칡넝쿨을 따라 갔는데 지금의 정암사(갈래사, 또는 석남원) 터 눈밭 위에서 푸른 잎에 3송이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삼갈반처(三葛盤處)'의 명당을 찾아 수마노탑을 쌓고 사리를 모셨다고 한다. 구래리는 1923년 일본인들에 의해 상동중석광산이 개광되면서 심산유곡이었던 이곳은 눈부신 발전을 하게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는 정선군 신동면 천포리 일부를 흡수하여 구래출장소를 폐지하고 상동읍으로 승격하였다.
구래는 행정 8개리 504가구에 2,000여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상업과 고랭지 채소재배, 약초, 산채재배 그리고 마늘, 깨, 옥수수 등의 밭농사를 짓고 있다.
내덕리
윗냇뜰(상천평)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어평천과 합류하여 내평리의 먼내벌로 흐른다. 이곳의 지명 유래는 냇가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내덕'이라 했는데, 후에 한자의 영향으로 '내덕리(內德里)'가 되었다.
내덕리는 해발 500m의 고지대로 마을 뒤쪽에는 1,267.6m의 매봉산이 있고 구름도 쉬었다 넘는다는 구름재가 있다. 내덕 4리에는 상동읍사무소와 상동 중·고등학교, 보건소 등이 있으며, 행정 6개 리에 300가구 1,126명의 주민들이 구름재, 가삼이, 반정이, 승량이, 주채, 원천(먼냇벌), 칠랑이 등지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덕구리
본래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지역이었으나 1963년 1월 1일 강원도 땅이었던 울진군이 경상도로 이속되고, 덕구리와 천평리가 영월군 상동면으로 편입되었다.
땅이름의 유래는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가 되는 '삼동산'의 큰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덕구리'라 하였다. 덕구리는 '고심골, 굽돌이, 양지말, 음지말, 질가부, 중말 등의 자연부락을 중심으로 75가구 262명(1992년 기준)을 주로 고랭지 채소와 밭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천평리
본래 경상도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 땅이었으나 1963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강원도울진군(蔚珍郡)이 경상북도로 이속(移屬)되고 천평리가 영월군 상동읍으로 편입되었다.
천평리의 원래 지명은 '냇들', '내뜨리'라고 불렀으며 고직령에서 흐르는 물이 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 농거리에서 어평천과 합류한다. 이러한 냇물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므로 '냇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태백산 자락에 자리한 마을로 서쪽은 민백산과 옥녀봉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고직령(高直嶺)이 가로막혀 있는 산상분지로 수만평의 넓은 땅이 있어 고랭지 채소, 감자, 약초 재배 등으로 높은 소득을 올렸으나 1980년 농거리의 농거교 우측에 8231공군부대가 전투기 사격 연습장을 만들면서 천평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던 주민들은 삶의 흔적만 남겨놓은 채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천평리 역시 하동면 와석리와 마찬가지로 이곳이 십승지지(十勝之地)인 『寧越正東上流踪亂』이라고 생각한 「정감록(鄭鑑錄)」에 심취된 비기파 신봉자들이 구한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많이 찾아든 곳이다.
그 외에도 동학교도와 의병들이 몸을 숨기던 곳으로 일제 시대인 1940년에는 가는골에 살던 이낙림(李洛林), 당골(堂谷)의 윤상명(尹尙明), 최익한(崔翼漢), 유형호(柳亨浩) 등 우국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주민들과 함께 태백산 천제단에서 『독립기원제(獨立祈願祭)』를 올렸는데 그 중 주동자 20여명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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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영월군 군내면 지역으로 유교적인 인간 의 염원을 내포하는 의미에서 영흥리라 하였다
하송리
일제 시대인1914년 3월1일 조선총독부령제111호에 의한 지방행정구역 개편으로 상소리 전체를 포함하고 영흥리 일부를 병합하여 하송리라 하였다
덕포리
웃말, 중말, 아랫마을로구성되어 있다.1914년 일제 시대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나루터(현재동강교)위쪽인 상덕촌과 그 아래쪽 밀적포에서 덕자와 포자를따서 덕포리라 하였으며 덕은 크다는 뜻이다
방절리
단종이 이곳에 와서 귀양살이를 할 때 그를 따르며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방절리하 한다
연하리
행정구역조정으로 초리,숯가마,새마을,남정골,반송,꽃밭머리,연못골,상타련,하타련,복덕원,바람부리,계사동,오미를 병합하였으며 연못골 아래를 연하리,연못골위를 연상리라 한다
삼옥리
영월군 천상면 지역으로 면 소재지는 평마을에 있었다.1914년3월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땍빼리,번재,사지막 송이골,벌말,상촌,먹골,성안,섭사,웃구룬을합하여 삼옥리 라고 하였다
거운리
천상면 지역으로 아랫말(거운분교),중말(마을회관),윗말(송어장부근)로 구분되며 거탄소라는 천민 집단 구역이 있어서 고리짝이나 치등을 생산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문산리
1931년3월군내면에 포함되었다 문산리라는 지명은 다른곳과 마찬가지로1914년일제가 조선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한 지방행정 구역 조정때 문천리와 거산리를 병합하여 만들어진 이름
정양리
원래하동면 소속으로 고려 시대때 평구도 소속의 정양역이 있었으므로 정양리라 하였다
팔괴리
원래 남면 땅이었으나1973년7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월읍에 편입되었다. 1914년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령에 의해서 팔계리와 괴안리마을에서 첫자를 따서 팔괴리 라 부르게 되었다
흥월리
원래남면 소속되었으나 1973년7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월읍에 편입 흥교 와 월휴리에서 각각 한 자씩을 따서 만들어 졌으며, 궁예가 승려 생활을 했던 흥교사라는 유명한 사찰터라 폐허가 된채 방치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