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호서원
합호서원은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원합강1길 262-6[합강리 104]에 있으며 1716년(숙종 42) 현감공의 합강 자손 경신(景信)·경정(景精)들이 문성공 영정을 봉안하고 친필을 보관하기 위하여 세웠다. 그 후 순조 때 유림 임동승(林東昇) 등의 협력으로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1869년(고종 9)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으나 1931년 후손 배호를 비롯한 유림인들이 증축하고 1949년 유치각(兪致珏)·임헌상(林憲商)·장인환(張寅煥) 등이 전국 218개 향교의 동의를 얻어서 성균관에 상신 복설하여 문성공을 모시고 있다.
건물은 사우(祠宇 合湖祠), 중앙 신문(神門)과 양 옆 협문(挾門)으로 된 내삼문(內三門, 合湖書院), 외삼문(外三門, 興學門)이 주축이고 서쪽에 강당인 성의재(誠意齋)와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사우(合湖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고, 성의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1990년도에 군비 및 도비를 받아 전사청과 외삼문을 재건하였다.
본전(합호사)에는 문성공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다. 영정은 도난당한 적이 있는데 진상은 공주박물관에 보관하고 모사 영정을 모시고 있다. 문성공 친필도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되었다가 세종특별자치시로 편입되어 2012년 12월 31일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로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로 다시 지정되었다. 세종특별자치시는 서원을 현 위치에 보존시키고 476억원을 들여서 서원을 중심으로 세종시 역사 공원을 만든다.
문성공 영정을 모시고 있는 합호 서원
합호서원 묘정비명
공자(孔子)께서 일찍이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 뗏목을 타고 바다 위에 뜨리라.(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공자(孔子)가 난세를 개탄하면서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道不行 乘桴浮于海〕”라고 말한 내용이 있다.)”라고 스스로 탄식하였거니와 우리나라가 유교(儒敎)를 수용한 이래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꾸준히 일상에서 항상 쓰는 도(道)로, 혹은 정치이념으로 받들어 행했는데 고려에 이르러 불교가 지극히 융성하면서 우리 유학은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고려 말엽에 이르면서 더욱 적막하게 되었다.
이때 몹시 분개하여 세도(世道 세상의 도리)를 바로 잡은 큰 스승이 나오셨으니 바로 회헌(晦軒) 안선생(安先生)이다. 선생의 처음 이름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고 자는 사온(士蘊)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회헌은 스스로 호를 지으신 것이고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이다. 고려 고종(高宗) 30년(1243) 계묘년에 출생한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학문에 정진해서 장래가 크게 촉망되었다.
원종(元宗) 초 과거에 급제하여 판도좌랑 전중시어사 국자사업 등 청직(淸職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이 맡는 관직)을 두루 거치고 충렬왕(忠烈王) 때 정동행성 원외랑을 거쳐 고려 유학제조가 되고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해 귀국해서 주자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충선왕(忠宣王) 즉위 후에는 참지기무 행동경유수 집현전태학사 계림부윤에 이어 첨의참리에 올랐다.
충렬왕이 복위한 이듬해 첨의시랑 찬성사판판도사가 되어 학교가 날로 쇠퇴해 가는 현실을 크게 근심하고 탄식한 나머지 분연히 뜻을 정하여 국책을 맡은 두 부서(문하부(門下府)와 밀직사(密直司))에게 건의하기를 “재상의 직분은 인재를 교육하는 것이 우선이거늘 지금 양현고(養賢庫 교육 후생재단)가 고갈되어 선비를 기를 수가 없으니 청컨대 위아래의 관원들은 은이나 베[布]를 내어서 그 이자로 섬학전(贍學錢)(고려 후기에 국립학교인 국학(國學)이 쇠퇴하자, 국학생의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설치한 기금이다. 충렬왕 30년(1304)에 문성공(珦)의 건의에 따라 관리들에게 품등(品等)에 따라 기금을 내게 하고 이를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킨 다음, 그 이자로 국학의 운영경비를 충당하도록 하였다.)을 설립하자.”라고 제의해 성사가 되었고 왕도 내고(內庫 왕실 창고)의 돈과 곡식을 하사하였다. 재정의 여유가 생기자 대성전(공자를 모신 건물)을 비롯한 국학의 건물들을 새롭게 단장하고 사람을 중국에 보내 공자와 72제자(원문에는 ‘七十子’라고 하였는데 원래는 72제자이다. 공자의 제자는 3,000여 명이었는데 그중에 육예(六藝)에 달통한 제자가 72명이었다고 한다.)의 화상 및 제기, 악기, 육경, 제자, 사서 등을 구해 와 국학에 모시도록 했다. 이로부터 문교가 크게 떨치기 시작했고 우리 유학이 울연(蔚然)히 생기가 나서 조선으로 이어져 찬란하게 꽃피우게 된다.
도첨의중찬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나시고 세상을 버리시니 향년 64세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 남기신 풍모와 열정을 추존하고 장려하여 전국의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순흥의 소수서원 등 여러 서원에 모시게 되었고 한편으로 초상화도 받들게 되었다. 정성과 실력이 돈독한 후손들과 여러 선비들과 어진 이를 사모하는 사림이 합심하여 일찍이 본 연기현 합호 위에 초상화를 모시고 서원을 건립했는데 고종(高宗) 무진년(1868)에 사원철폐령이 내려 없어지게 되었다. 단기 4272년(1939) 기묘에 후손과 인근의 선비들이 목소리를 함께 하고 힘을 합치 고 성균관에서도 결연히 온 나라에 통문을 돌려 도와주었더니 얼마 되지 않아 드디어 서원의 편액을 걸게 되었다.
연기 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이곳에서 문성공으로부터 비롯된 도학의 근원을 익혀 다시 후생에게 일깨워주고 좋은 날 좋은 계절에는 경건히 제사를 올려서 예의가 어긋나지 않는다면 백 년 뒤에라도 문(文)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에 명(銘)을 짓는다.
세상에 드문 기상으로 태어나셔
원래 자질이 크고 넓으셨네
오직 도를 스승으로 삼으시고
학문이 깊고도 넓으셨네
공자와 맹자를 우러러
우리 유학이 크게 떨쳤네
곧바로 주자에게 나아가
국학이 온통 새로워졌네
조정에서 숭상하고 포상하여
문성이라 시호를 내리셨네
남은 풍모와 열정이
해0와 별처럼 빛나시네
사림에서 존경하고 사모하여
사당과 서원을 설립하니
합호의 위에
향기가 더욱 멀리 전하리라
단기 4343년(2010년) 경인년 늦봄에 후학 성균관장 경주 최근덕이 삼가 짓고 24대손 순근이 손을 씻고 공경히 쓰고 연기의 유림 및 후손 일동이 받들어 세운다.
合湖書院廟庭碑銘
孔聖께서 일찍이 道不行이라 乘桴하여 浮于海하리라 自歎하셨거니와 우리나라가 儒敎를 受容한 以來 三國時代를 거치면서 꾸준히 日用常行之道로 或은 政治理念으로 奉行하더니 高麗에 이르러 佛敎가 興盛을 極하면서 斯文은 衰微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末葉에 이르면서 더욱 寂寞하게 되었다.
이때 慨然히 世道를 바로잡을 큰 스승이 나오셨으니 바로 晦軒 安先生이시다. 先生의 初諱는 裕였으나 後에 珦으로 고쳤고 字는 士蘊이며 本貫 順興으로 晦軒은 自號이고 諡號는 文成이시다. 高麗 高宗 三十년 癸卯에 出生한 先生은 어려서부터 聰慧했고 學問에 精進해서 將來가 크게 囑望되었다.
元宗 初에 登第하여 版圖佐郞殿中侍御史國子司業 등 淸職을 두루 거치고 忠烈王 때 征東行省員外郞을 거쳐 高麗儒學提擧가 되고 元나라로 들어가 朱子全書를 筆寫해 歸國해서 朱子學 硏究에 精進했다. 忠宣王 卽位 後에는 參知機務行東京留守集賢殿太學士鷄林府尹에 이어 僉議參理에 올랐으며 이 해에 太上王이 된 忠烈王을 扈從해 元都에 가서 다시 朱子學과 그 敎育 實態에 접했다. 忠烈王이 復位한 이듬해 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가 되어 學校가 날로 衰退해가는 現實을 크게 憂歎한 나머지 憤然히 뜻을 決해 國策을 맡은 兩府에 建議하기를 宰相의 職分은 人材를 敎育하는 것이 于先이거늘 지금 養賢庫가 枯渴되어 養士를 할 수 없으니 請컨대 上下官員은 銀 또는 布를 出捐하여 그 利子로 贍學錢을 設立하자고 提議해 成事가 되었고 王도 內庫의 錢穀을 下賜했다. 財政의 餘裕가 생기자 大成殿을 비롯한 國學殿宇를 새로이 丹粧하고 사람을 中原에 보내 先聖과 七十子의 畫像 및 祭器 樂器 六經 諸子 史書 等을 求해와 國學에 모시도록 했다. 이로부터 文敎가 크게 떨치기 시작했고 우리 儒學이 蔚然히 生氣를 發해 朝鮮으로 이어져 燦爛하게 꽃피우게 된다.
都僉議中贊으로 致仕해서 棄世하시니 享年 六十四歲였다. 先生 歿後 그 遺風餘烈을 追尊推獎해서 全國 文廟에 配享되었으며 順興의 紹修書院 등 여러 書院에 모시게 되었고 한편으로 遺像을 받들게도 되었다. 誠力이 敦篤한 裔孫諸彦과 慕賢士林이 合心에서 일찍이 本縣 合湖之上에 遺眞을 모시고 祠宇를 이룩했더니 高宗 戊辰에 院祠毁撤令이 내려 烏有로 돌아갔더니, 檀紀 四二七二년 己卯에 本孫과 隣近 章甫가 齊聲合力하게 되고 成均館에서도 決然이 全域에 通文贊劃하니 不日成之라 드디어 書院으로 揭額하기에 이르렀다.
燕岐之多士 이곳에서 文成公으로부터 비롯된 道學之源을 익혀 다시 後生에게 일깨워주고 吉日良辰에는 虔薦苾芬해서 禮儀靡忒하면 百歲之下에도 文在于玆하리로다. 이에 銘하기를
誕膺間氣
天姿宏廓
惟道是師
學問淵博
仰止孔孟
斯文大振
卽之紫陽
國學一新
聖朝崇褒
諡曰文成
遺風餘烈
炳如日星
士林尊慕
立祠設院
合湖之上
香傳益遠
檀紀 四三四三年 庚寅 季春
後學 成均館長 慶州 崔根德 謹撰
二十四代孫 淳根 盥手敬書
燕岐儒林 및 後孫一同 奉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