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강(合江)은 금강과 미호천(東津江)이 만나는 곳이라는 이름으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 고려시대에는 청주목, 조선시대에는 연기현에 속했다. 1914년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에 편입되었다가 2012년 7월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합강리, 2020년 7월 합강동이 되었다. 12세 현감공의 장남 린(麟)의 장남 윤희(允禧)는 예안김씨가 살고 있는 합강으로 입향하여 합강파조가 되었는데 후손들은 합호서원을 세워 문성공을 섬겼다. 윤희의 장남 곤(鵾)이 1파 차남 붕(鵬)이 2파를 이루었는데 매년 음력 10월 6일 선산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다.
순흥안씨세장비문
세장(世庄)이라는 것은 대대로 살아 온 터전이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그 누가 거처가 없으며 거처하며 그 누가 터전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에 전하는 것이 한 두 개가 아니라 많은데, 오직 이덕유(李德裕)의 평천장(平泉莊)의 꽃과 바위(당나라 관리 이덕유가 세운 별장이 평천장인데 기이한 꽃과 바위로 유명하였다.), 왕마힐(王摩詰)의 망천장(輞川莊)의 바람과 달(왕마힐은 당나라의 시인 왕유(王維)이고 망천은 중국 절강성에 있는 시냇물로 여기에 왕유가 별장을 지었다.)은 부귀의 본보기와 문장의 아름다움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모두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 터전에는 비록 꽃이나 바위, 바람과 달의 흥취는 없으나 부귀와 문장이 없지는 않다. 연기군 동쪽에 기이한 봉우리가 불쑥 솟아 있으니 산 이름은 출동산(出東山)이고, 마을 밖에 두 강물이 합쳐지니 마을 이름이 합강(合江)이다. 그 가운데에 크나 큰 기와집이 휘황찬란하게 마을을 비추고 있으니 바로 우리 선조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선생의 합호서원(合湖書院)이다.
문성공의 현손(玄孫) 양공공(良恭公) 휘 조동(祖同)은 고려 말의 명신으로 이숭인(李崇仁)의 화에 순절하였고 양공공의 후손 한성부윤 휘 희(禧)가 처음으로 집터를 잡아 자손이 번성하였으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포강(浦江)에 정씨가 있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정씨가 포강에 터를 잡고 함께 살았는데 식구 수가 천여명이었다고 한다.)
강가 전답의 옥토가 먹고 살만 하며 무성한 숲의 울창한 나무가 땔감으로 충분하니 각자 직책을 맡아 위로는 조상을 받들고 아래로는 후손을 기르며 아침에는 밭을 갈고 저녁에는 독서하여 뛰어난 인물과 관리들이 간간이 나타났으니 군자감을 지낸 붕(鵬)과 응계(應桂)와 판사를 지낸 응두(應斗)와 판결사를 지낸 률(嵂)과 급(岌)과 한성좌윤을 지낸 잠(岑)과 경상(京祥)과 장사랑을 지낸 경정(景精)과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경인(京仁)이 모두 무리에서 뛰어나 고을에 소문난 자들이다.
땅을 골라 서원을 세워 조상의 혼령을 제사지내는 자도 있고 강위에 정자를 짓고 거문고와 책으로 스스로 즐긴 자도 있었다. 이 터전에 들어오면 팔봉(八峯,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팔봉산)이 동쪽에 있어 조상이 훌륭하고 계룡(鷄龍, 계룡산)이 서쪽에 있어 자손이 번창하였으며 북쪽에 노적가리(노적산)가 빼어나니 분명 곡식을 쌓아놓은 창고와 같고 남쪽에는 절하는 듯한 지형이 이어지니 완연히 절하는 예절을 가르치는 학교와 같다. 그 나머지 두 옷깃에 가득 찬 푸른 물결은 풍진 세상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한 점 물거품은 그림처럼 물 위에 피어난 연꽃이다. 저 꽃을 수놓은 벼루 같은 연못의 봄 물풀과 용당(龍塘, 연동면 명학리 용댕이)의 가을 돛배는 멀리는 눈을 즐겁게 하고 가까이로는 귀를 경계하고 있으니 하나하나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곳에 사는 백성들이 여기에 집을 짓고 여기에 장사를 지내 명당과 길지가 매우 많고 후손들이 여기에서 성장하고 여기에서 배워 마침내 정계와 관계와 법계에 진출하였다. 봄가을에 제사지낼 적에 어진 이를 사모하는 많은 선비들이 이곳에 이르고, 물소리와 산봉우리 빛깔의 경치를 찾아다니는 나그네가 여기에 왔으며, 시를 짓는 자들과 서예가들이 자주 발자국을 이어 술을 부르며 물고기를 잡고 음풍농월하였으니 금강 중에서도 이름난 곳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예전에 이 고을에 살면서 세월이 장차 지나감을 전혀 잊고 다행히도 여러 친족의 보살핌을 받아 아침에 부르고 저녁에 따라다녀 정이 마치 형제간 같았는데 도중에 세파가 몰아치므로 인해 이곳을 떠나 이리저리 굴러다닌 곳이 거의 수 십 년이었다. 끝없이 옛 생각을 하며 고향을 그리는 정을 금할 수 없었다.
하루는 여러 친족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들이 여기에 거처한 지가 판윤공 이하로 14,5세대가 되었다. 비록 감히 화려한 가문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분명 우리가 대대로 거처하던 고향이니 고을 입구에 비석을 세워 후손으로 하여금 조상의 유적을 알게 하고, 이곳을 지나가는 자로 하여금 무슨 성씨의 고향인 줄을 알게 함이 어떻겠느냐? 그대는 모름지기 기문을 지어라.”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예나 지금이나 터전에 간혹 경치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나아가는 바에 있어서는 더러 같고 다른 것이 있음은 땅과 세대로 인해 그러한 것이니 부귀와 문장이 나타남은 또한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줄을 알겠느냐. 하물며 여기에 서원을 세워 제사하고 어진 이를 높이며 예를 익히는 절차는 도리어 비단에 꽃을 더하여 한층 높아진 기상이니 어찌 꽃과 바위, 바람과 달이 조금 부족하다고 해서 평천장과 망천장의 아래에 끝내 두고만 있겠는가. 만약 이덕유와 왕마힐이 일찍이 이 터전을 알았다면 아마도 그림으로 그리는 수고에 그쳤을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기 4324년(1991년) 신미 월 일
족종 승춘은 짓고 쓴다.
合江順興安氏世庄碑文
世庄者는 世居之庄也라 人於世間에 誰無其居며 居誰無庄이리오 故로 古之以庄으로 傳於世者가 不一伊多로대 唯其李德裕之平泉花石과 王摩詰之輞川風月은 以富貴之像과 文章之趣로 藉藉하야 俱爲今古之膾炙어니와 惟此庄則縱無花石風月之致나 亦不無富貴文章之待라 燕邑之東에 奇峀가 突出하니 山號出東이요 村郭之外에 兩江이 注合하니 洞名合江이라 中有宏傑瓦閣이 煒煌閭里者하니 我先子晦軒文成先生之合湖書院也라 文成之玄孫 良恭公諱祖同이 以麗末名臣으로 殉節于崇仁之禍하고 良恭之晜孫 漢城府尹諱允禧가 始胥其宇하여 子姓이 蕃衍하니 人云浦江之有鄭이라 而浦田沃土가 可以活口요 茂林鬱楸가 足以柴材하니 則各修其職하야 而上奉先祖하고 下育後孫하며 朝耕耘하고 夜讀書하야 俊乂縉紳이 間世而出하니 如軍資監正鵬과 若應桂와 判事應斗와 判決事嵂과 與岌과 漢城左尹岑과 及景祥과 將仕郎景精과 嘉善同樞景仁이 皆其拔于萃而聞于鄕者也라 擇地建院하야 妥享祖靈者도 有之하고 築亭江上하야 琴書自娛者도 有之하니 入斯庄也하면 八峯이 在東하야 宕宕其祖요 鷄龍이 在西하야 兟兟群孫이며 北秀露積하니 依然蓄穀之庫요 南索告拜하니 完如拜揖之庠이라 其餘雙襟蒼波는 洗滌塵世之累하고 一點泡巒은 畵出水中之蓮이라 與夫花硯春藻와 龍塘秋帆은 遠可悅目하고 近可警耳者를 未能一一盡記오 而居民之家于斯葬于斯가 類多明堂吉地요 後昆之長於是學於是가 竟趍政官法界하며 春芬秋苾에 慕賢之多士가 莅焉하고 水聲岳色의 探勝之遊子가 來焉하며 騷人墨客이 頻相接武하야 呼酒獵魚하고 吟風弄月하나니 可謂湖上之名區也라 余曩寓此鄕에 頓忘日月之將逝하고 幸蒙諸族之眷庇하야 朝徵暮逐에 情若同氣러니 而中爲世波의 所驅하야 去此蓬轉이 遽爲數十星霜之久라 緬憶疇昔의 不禁 幷州之情이러니 日에 諸族이 訪余謂曰 吾等之居于此가 自判尹公 以下로 世旣十有四五라 雖不敢擬於華族巨閥 이나 而自爲世居之鄕하니 則竪石洞隅하야 使後孫으로 知祖先之遺蹟하고 過者로 諭某姓之鄕庄이 何如오 族須記之하라 余曰 庄之於今古에 或不無景態之差나 其在趍向에 或同或殊者는 因地與世然也니 富貴文章之顯은 亦安知來日之勝於今日乎아 況此設院俎豆하고 亨賢習禮之節은 反是添花一層底氣像이니 奚遽花石風月之少遜으로 終置於平泉輞川之下也耶아 如使德裕摩詰로 早識此庄이면 則恐不啻畫圖之勞役矣리라
檀紀 四千三百二十四年 辛未 月 日
族從 承春 撰幷書
합강은 세종시로 수용되어 2011년 11월 합호서원에 망향가 비석을 세우고 고향을 떠났다. 비문은 조상을 모시고 살던 합강 고향 마을이 세종시로 수용되어 떠날 수 밖에 없어서 합호서원에 아쉬운 마음과 향수를 달래는 망향비를 세운다는 내용이다.
수용 전의 합강 마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우록리 산61 합강 선대 묘역
13세 린(麟 통덕랑)
통덕랑 순흥안공 휘린 묘갈명 병서
옛 문의면의 서쪽 노동(갈골)에 있는 주봉의 동북쪽 언덕에 높이 네 자 되는 무덤이 있는데 곧 통덕랑 순흥 안공 휘 린의 묘소이다. 그 시조를 논한즉 고려 상호군 휘 자미가 순흥에서 기틀을 창건하시고 세 번 전하여 휘 향 시호 문성이 도학을 열어 밝히셔서 문묘에 제사를 모시게 되었고 문순과 문숙과 문혜공이 대대로 이어져 나왔으니 이를 삼군사문의 가문이라고 일컫는다.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우록리 산61 통덕랑 린공 산소
문혜공의 아들인 양공공 휘 조동은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이었는데 숭인의 재화에 크게 부르짖고 순절하였으니 이 분이 곧 파조이신데 공에게 오세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인강인데 수의교위 중군사조이시고, 증조의 휘는 우효인데 사과이시며, 조부의 휘는 철동으로 수의부위사맹이시고, 부친의 휘는 세현이신데 통정대부로서 진천현감을 지내셨고, 모친은 숙인으로 단천허씨 륜의 따님이시다.
공은 여기에서 태어나시고 여기에서 장사지내셨으니 생각건대 이것은 진실로 공이 남긴 가르침이다. 벼슬은 5품을 받았으나 영예와 빛남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굳게 동쪽 언덕을 지켜서 스스로 숲과 샘을 사랑하였으니 오직 이것으로써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을 넉넉하게 하며 수신제가와 효성스럽고 우애 있음을 평생의 행하고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공의 덕의 의로움으로써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은 마땅히 후세에 전해져야할 것이지만 기나라와 송나라처럼 문헌이 전해지지 않아 증명할 수 없으니 아마도 이것은 전란이 여러 번 겹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노라. 아아 애석하도다.
부인인 공인 경주김씨는 쟁의 따님이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윤희는 예안김씨에 장가들어 아들 곤과 붕을 낳았고, 윤조는 숙부인 구에게 출계하였다. 봉조는 예안김씨를 맞아 아들 홍과 안을 낳았다. 곤의 아들은 응구와 응계가 있으며 딸은 이인길에게 시집갔다. 붕의 아들은 응두이다.
하루는 후손 준호, 승준, 원모, 원근, 순근 등이 나를 대전의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선조의 묘역이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다 닳고 갈라져서 이제 장차 고치고 수리하려고 하는데 동족께서 옛 족보에 의거하여 서술하여 후손들이 오늘을 미루어 생각할 수 있게 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것은 백 세 동안 이어온 한 집안의 우의이니 어찌 감히 글을 못한다고 해서 사양할 수 있겠는가. 전하는 말씀에서 대략 기록하고 또 문서를 살펴서 기록하여 이에 명을 짓노라. 명에 말한다.
높도다 저 주봉이여.
오직 공의 묘소로다.
능히 선조의 가르침을 따라서
출세하여 드날림을 일삼지 않았으며
선조를 봉양하고 후손에 드리워서
효성스러움과 우애가 이어져 전하며
진실로 숲과 샘을 지켰으니
그 덕을 아는 자가 드물다.
십여 세대를 이어오며
후손들이 매우 많게 되었으니
이것을 곧은 옥돌에 새겨서
길이 만년토록 보존하리라.
신미년 정월 하순에 후손 승춘이 삼가 찬하고 아울러 쓴다.
通德郞 順興 安公麟 墓碣銘 幷序
舊文義西蘆洞 冑峰坐艮之原 有崇四尺而封若堂 斧者 乃通德郞 順興安公 諱 麟之幽藏也 論其始祖 則高麗上護軍 諱 子美 創基順興 三傳 諱 珦 諡文成 倡明道學 腏祀聖廡 文順 文淑 文惠 繼世聯綿 稱三君四文之家 文惠子有 良恭 諱 祖同 奉議大夫 藝文館副提學 崇仁之禍 大呼殉節 寔爲派祖 於公五世也 高祖 諱 仁剛 修義校尉中軍司正 曾祖 諱 友孝 司果 祖 諱 哲童 修義副尉司猛 考 諱 世賢 通政大夫 行鎭川縣監 妣淑人 丹川許氏 倫女 公之生於斯 葬於斯 想是良公遺旨也 則官受五品而不喜榮耀 固守東崗而自愛林泉 惟以承先裕後 修齊孝友 爲生平行治之本 以若公之德之義 承習庭訓者
宜有家傳於後 而杞宋莫徵 恐是兵燹之屢經故歟 噫其可惜也 齊恭人慶州金氏錚之女 擧三子 允禧娶禮安金氏 生子鵾鵬 允祖出后父龜后 奉祖娶禮安金氏生子鴻鴈 鵾子應龜應桂 女適李仁吉 鵬子應斗 鴻子應天 鴈子應福 餘煩不錄 日其后孫 俊鎬 承俊 元模 元根 淳根 訪余大田僑舍曰 先祖墓儀 世久磨泐 今將改修 族其依譜而述之 以爲後孫之追想 今日 則幸矣 其在百世一室之誼 豈敢以不文辭 諸畧記所傳之說 又接牒而錄之 仍爲之銘
銘曰
屹彼冑峰
維公幽藏
克追先旨
不事立揚
奉先垂後
孝友繼傳
固守林泉
知德者鮮
歷十數世
雲仍兟兟
鐫此貞珉
永保萬年
歲辛未元月下浣
族裔 承春謹撰竝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