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강의 각축장＜이승만이 세운 대한민국, 김일성이 세운 북한 - 강의 김용삼 교수

[김시중]

시국강연회 강의노트(2018.11.26)

열강의 각축장 한반도
이승만이 세운 대한민국, 김일성이 세운 북한

김용삼 이승만학당 교사
박정희기념재단 기획실장
전 월간조선 편집장

조선은 여전히 순한 양처럼 유교적 미덕을 추구하면서 ‘마키아벨리의 국제정치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플라톤의 섬’이었다.  
                                      --강성학 교려대 명예교수

망하는 나라는 망하는 이유가 있고, 흥하는 나라는 흥하는 이유가 있다.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과 합방의 형식으로 나라가 망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렇다면 왜, 대한제국은 멸망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국제관계사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고자 한다.
국제관계란 늘 국익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영국의 외무장관과 총리를 역임했던 파머스턴 경(Henry John Temple, 3rd Viscount Palmerston)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이를 웅변한다. 

“우리에게는 항구적인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이익만이 항구적이고 영원하다. 그리고 이 이익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We have no permanent allies, we have no permanent enemies, we only have permanent interests).”

프러시아의 프리데릭 대제((Frederick the Great)는 “무기 없는 외교는 악기 없는 음악과 같다”고 말했다. 살벌한 국익이 작동하는 현장에서 통용되는 정의와 진실은 이런 것이다.
영어로 ‘diplomacy’로 표기되는 ‘외교(外交)’는 유럽 문명권과 다른 문명권에서의 해석이 크게 다르다. 동양에서 ‘외교’라는 용어는 『예기(禮記)』의 교특생(郊特牲)에 “다른 사람의 신하된 사람은 외교를 할 수 없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爲人臣者 無外交 不敢貳君)라는 내용으로 등장한다. 한 제후의 신하는 그 제후의 승인을 받지 않고 비밀리에 다른 제후와 교제할 수 없다는 사대 질서의 규범으로 ‘외교’가 정의되고 있는 것을 보면 동양에서 외교는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의미로 인식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사대주의 하에서 외교는 좋지 않은 것,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면서 중화사상이 골수에 뿌리박힌 조선의 양반 사대부 관리들은 외국과 협상을 해야 할 일이 발생할 경우 중국에 문서를 보내거나 사신을 보내 “번신(藩臣)은 원래 외교를 할 수 없으니 중국에서 선처하여 주기 바란다”고 일일이 자문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동맹이란 함께 전쟁을 해야 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은 현재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와중에 국가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를 외친다. 1876년 개항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의 엉터리 외교가 망국을 불러왔다. 즉 외교 무능=망국이라는 공식이 작동한 것이다. 지금의 한국 지도부는 그렇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패권국 영국, 패권 도전국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

시계를 지금부터 1세기 반 전으로 돌리면 당시의 세계 패권국은 영국, 패권에 도전하는 나라는 러시아였다. 방대한 해외 식민지를 바탕으로 성립된 대영제국은 본국과 식민지를 연결하는 해상 교통로가 제국의 생명선이었다. 때문에 러시아가 남하하여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저지하는 것이 통상과 교역의 자유를 유지하는 중대한 전략이었다.
러시아는 발칸반도에서 터키의 억압을 받고 있는 러시아정교 교인들을 보호하고 연해주의 발전을 위해 접경국 조선과의 통상증진을 모색한다는 목적 하에 발칸반도와 한반도로 남하하면서 유라시아 대륙 전반에 걸쳐 영국-러시아 대립구도가 성립되었다.
19세기 내내 영국과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 페르시아 제국, 청국이 쇠퇴하는 데 따른 공백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러시아 외교의 기본 방향은 동유럽, 중동, 중앙아시아로의 확장이었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과의 긴장과 마찰, 충돌이 반복됐다. 학자들은 이처럼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다툼을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라고 명명했다.
제2차 아편전쟁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는 그야말로 어부지리를 했다. 영국 뒤에서 눈치를 보다가 1858년 청나라와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강 좌안의 땅을 획득했고, 1860년 11월 14일에는 청니라와 북경조약 체결하여 광활한 영토를 획득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일으켜 피를 흘리는 동안, 달콤한 과실은 러시아가 따먹은 꼴이 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3년간의 전쟁을 통해 겨우 개항장을 몇 곳 더 늘리고, 사절의 상주를 허용 받았다. 반면에 러시아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광대한 영토를 불로소득 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영국에 더 완강하게 도전할 수 있는 든든한 기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860년에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도 국경을 접하게 되어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영러 대결시대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9000㎞에 이르는 유럽 쪽 러시아와 동아시아 쪽 러시아 사이에는 시베리아가 가로놓여 있었다. 러시아의 고민은 혹한의 날씨와 지형, 철도와 도로 부재로 인해 바닷길을 통한 해운이 유럽 쪽 러시아와 동아시아 쪽 러시아를 잇는 유일한 교통로였다. 문제는 블라디보스토크가 겨울이면 4~5개월 얼어붙어 항구로서의 기능이 상실된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러시아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연중 이용이 가능한 부동항 확보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이 와중에 메이지유신으로 국가의 면모를 일신한 일본이 역사 무대에 등장한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자원과 식량 부족 현상에 직면했다. 그 돌파구를 일본은 대륙진출, 즉 만주와 한반도 진출로 뚫고자 했다.
1871년 러시아가 청나라 영토인 투르키스탄(신강성) 점령하는 이리분쟁을 도발했다. 러시아는 이리분쟁 치른 후에도 철군하지 않아 청나라와 분쟁이 발생했다. 영·러 양국은 중앙아시아에서의 힘겨루기로 국력이 소진되자 1860년대에 동아시아 진출을 자제하기로 신사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잠시나마 동북아에 ‘힘의 공백’ 상황이 발생했다. 조선 정부와 프랑스의 병인양요(1866), 미국과의 신미양요(1871)가 발생한 것은 영·러의 신사협정으로 인한 공백기에 한반도 일대에서 프랑스, 미국 등이 동북아 진출을 시도하려다 발생한 국제적 마찰이었다.

영국의 배후공작으로 『조선책략(朝鮮策略)』 외교 시동

이러한 세계 패권국과 패권 도전국 간의 잠시 휴전으로 인한 공백 상태는 조선 입장에서는 국력을 기르고 제도를 정비하며, 자생적 근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대한 조선왕조의 무능과 500여 년 팍스 차이나 체제 하에서 안보를 중국에 의지하며 살아왔던 사대주의적 타성으로 인한 외세 의존 습성, 1870년경부터 격화된 고종·민 왕후와 대원군의 대립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로 허송세월하고 말았다.
청의 관심이 중앙아시아 쪽으로 향해 있는 틈을 이용하여 일본은 1874년 5월 대만을 침략했다. 이렇게 되자 중국에 이권을 확보하고 있던 영국은 일본의 관심을 한반도로 유도하여 러시아의 대항마 역할을 맡기는 전략을 구상한다.
일본은 1875년 9월 20일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고, 이를 기화로 하여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개국시켰다. 이어 청과 책봉-조공 관계였던 유구왕국을 병합했다. 일본이 유구왕국을 병합하는 모습을 본 청국은 일본이 노리는 다음 수순이 조선이라고 판단했다.
청은 자신의 힘 만으로 조선을 보호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서양 열강을 끌어들어 조선을 보호한다는 구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방(聯美邦)으로 러시아의 위협을 봉쇄한다는 『조선책략(朝鮮策略)』의 핵심 내용이었다. 즉 조선을 구미 열강과 수교시켜 열강의 힘으로 러시아 위협 막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이었다.
조선이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조미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6월 6일 영국과 수교, 6월 28일 독일과 수교한 것은 모두 이홍장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심지어 조선과 미국의 수교협상은 조선이 아닌 청나라의 천진에서 이홍장과 슈펠트 제독 간에 이루어졌으며, 수교협상문 내용도 이홍장과 슈펠트가 작성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협정문을 가지고 슈펠트와 중국 외교 담당자들이 함께 조선에 와서 자구 몇 자를 수정한 다음 서명한 것이 조미우호통상조약이다.
이홍장이 벌인 것으로 알려진 『조선책략(朝鮮策略)』 외교의 모든 구상 및 설계는 사실은 영국이었다. 영국에 배후에서 이홍장 움직여 조선과 서양의 수교를 추진한 것이다. 이유는 분명했다. 영국이 나서서 조선과 수교를 추진하면 러시아를 자극하여 동아시아에서 또 어떤 회오리가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국에 앞에 나서지 않고, 이홍장을 앞세운 다음 미국의 등을 떠밀어 미국과 조선이 먼저 수교를 하도록 했고, 영국은 바로 미국의 뒤를 이어 조선과 수교를 한 것이다.
이 와중에 조선에서 구식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궁을 점령하고 실각했던 대원군이 재집권하는 일이 벌어졌다. 1882년 임오군란이 벌어지자 청군이 파병되어 쿠데타를 진압하고 대원군을 체포한 다음 천진으로 압송해 갔다. 그 동안 중국의 외교정책은 책봉-조공체계는 형식적인 의례였고, 속방국의 내정과 외치는 속방이 자치적으로 행하는 ‘정교자주(政敎自主)’ 시스템이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조선을 직접적인 식민통치를 하기로 작정을 한다. 중국도 제국주의적 속성으로 변한 것이다.
임오군란을 간단하게 진압한 청나라는 그 직후 가혹하기 짝이 없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했다. 임오군란 중에 청과 일본, 조선이 취한 행동은 정상적인 국제외교관계 시각으로 볼 때 불가사의하고 충격적인 파행의 연속이었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 수호통상조규를 체결하여 ‘조선국은 자주지방(自主之邦)으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독립국가로 인정했다.

조․영 신조약의 파장

그런데 조약상 독립국가에 외국 정부(청국)가 무려 3,000명의 병력과 대함대를 보내 내란을 진압하고, 국왕의 친아버지를 납치해 간 데다가 노골적으로 내정에 간섭했다. 이에 대해 조선의 국왕은 청의 황제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다른 외국 정부(일본)도 대함대와 1,500명의 병력을 보내 무력으로 위협을 가한 끝에 군대 주둔 협정(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프리데릭 넬슨(Frederiek Nelson)은 “조선은 완전한 독립국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청의 속국이라 인정할 수도 없으며, 조선과 청의 관계는 동양 국제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관계”라고 평했다.
임오군란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자 영국은 자신들이 기존에 체결한 조영조약의 비준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관세율이 너무 높다며 신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의 압력을 물리쳐준다는 약속을 하면 신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답했다. 그 결과  1883년 11월 26일, 기존에 영국과 체결한 수호통상조약(일명 윌리스 조약)을 폐기하고, 새로운 조영수호통상조약(일명 파크스 조약)을 체결했다.
신조약은 조선 측에 훨씬 불리한 조항들이 백화점 식으로 나열된 ‘불평등조약’의 전형이었다. 오히려 제1차 조약보다 현저히 퇴보한 내용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표적인 개악(改惡) 내용은 1차 조영조약에 비해 관세율을 절반 정도로 끌어내림으로써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 조선의 관세 수입에 계산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의 막대한 손실을 안겨 주었다는 점이다.
그 대가로 조선 지도부가 그토록 원했던 ‘조선의 자주독립’을 쟁취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은 파크스 공사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조선 백성들은 어리석어서 독립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혹시 독립을 도모하는 움직임이 있더라도 지나(중국)가 반드시 그것을 제압할 것이다.”

영국이 약속했던 “조선이 자주독립할 수 있도록 청국을 견제한다”는 항목은 그야말로 풍성한 말잔치로 끝났다. 12월 4일 파크스는 본국 정부에 “대단한 고역과 인내를 겪은 후 26일(1883년 11월 26일을 뜻함-저자 주)에야 마침내 조영 신조약이 조인되었지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고 긴급 보고했다.
조선에서 청나라의 내외정 압력이 노골화하자 1884년 김옥균 개화당이 일본 세력 끌어들여 갑신정변 쿠데타를 일으켰다. 개화당은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국왕을 인질로 잡고 조각을 실시하고, 개혁방안을 발표했으나 청군이 무력진압을 하여 일본군과 개화당이 패퇴하여 사흘 천하로 막을 내렸다.
조선의 개화세력은 온건론이든 급진론이든 명백한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은 ‘소국(小國)’으로서 자국의 국력과 군사력만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하니, 개국을 하여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우호국을 찾아 그 나라에 의지해야 한다는 외세 의존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사대주의는 조선의 지배층에 뿌리 깊은 중국 제일주의, 즉 모화(慕華)사상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중국을 상국(上國)으로 떠받들고 조선은 하국(下國)으로 격하시켜 중국과 조선은 군신(君臣) 관계, 혹은 부자(父子) 관계라는 사실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수용했다. 조선의 붓잡이 선비들은 일본의 ‘독서하는 사무라이’들과는 달리 자기 나라가 자주독립국가라는 치열한 의식 대신 ‘중화(中華)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다.

묄렌도르프의 공작에 놀아난 고종

조선의 최고 지도부가 외세 의존적 사고에 젖어 있을 무렵, 일본의 지도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개국을 한 다음 서양을 배워서 ‘일본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을 모색하고자 했다. 일본의 지도부는 물론, 지식층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개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때문에 개국을 하여 서양 열강의 선진 기술을 습득하기만 하면 그들을 쉽게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 지도부 인사들에게 있어 개국이란 서양 열강의 위협을 일시적으로 회피하면서, 문명부강에 필요한 서양 기술과 문명, 가치관과 방법론을 익히기 위한 방편이었다. 조선처럼 서양 열강의 힘을 국내정치에까지 끌어들여 개화, 개국의 한 방편으로 활용한다는 사고방식은 일본 지도부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청나라의 내외정 압력에 한탄하던 고종과 민 왕후 앞에 수호천사처럼 나타난 나라가 러시아다. 이홍장이 선발하여 보낸 조선의 외교 고문관 묄렌도르프는 러시아와의 수교를 주선하여 1884년 7월, 러시아와 수교를 하게 된다. 
이것은 묄렌도르프 스스로의 판단이 아니라 독일 외무성으로부터 “러시아라는 곰을 동아시아 목장으로 유인하라”는 지령을 받고 움직인 결과다. 조선의 러시아와의 수교는 『조선책략』 외교노선의 전면 파탄을 뜻하는 것이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의 압력을 피한다는 인아거청(引俄拒淸) 정책은 고종의 입장에서 보면 일면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이 러시아와 수교함으로써 영러 대립이라는 그레이트 게임의 격랑의 한복판으로 스스로 뛰어든 셈이 되었다.
러시아는 조선과 수교로 인해 자국(自國) 군함이 조선 항구 어느 곳이나 입항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 이로써 조선의 항구를 통해 영국의 압력을 피하면서 동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를 획득한 것은 물론, 만주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잡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종은 러시아와 손 잡음으로써 영국의 글로벌 대러시아 봉쇄망에 커다란 구멍을 내버린 셈이다.
러시아 정부는 조러 수교에 혁혁한 공을 세운 묄렌도르프에게 성 안나 훈장을 수여하는 등 매우 반겼다.
고종은 1884년 12월 묄렌도르프를 통해 러시아에 “청나라와 일본 간에 전쟁 벌어지면 조선을 보호해 달라, 그리고 5~6만 명 규모의 조러 연합군을 조직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것이 제1차 조·러 밀약설이다. 수교 불과 몇 달 후 그 동안 위협국가로 인식되어 왔던 러시아에게 어떻게 그런 제안을 하게 되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조러 밀약설 제기되자 영국은 1885년 4월 15일, 함대를 동원하여 거문도를 전격 점령하고, 여차하면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거나, 대한해협을 봉쇄하여 러시아 함대를 가둬놓는 작전에 나섰다. 영국 해군은 2년 후인 1887년 2월 27일, 러시아로부터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자 철수를 하게 된다. 
한편, 조선이 러시아와 밀약을 맺자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내외정 간섭을 더욱 강화했다. 일본도  1885년 1월 9일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여 갑신정변 당시 불탄 일본 공사관과 거류민 희생에 대해 배상금 10만 원과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을 결정했다.

제2차 조러 밀약, 원세개 고종 폐위 시도

이어 이토 히로부미는 이홍장과 만나 4월 18일 천진조약을 체결, 한반도에 대한 양국의 이견을 조정했다. 그 내용은 청일 양군이 조선에서 동시 철병하고, 향후 조선에 파병 필요 있을 때 상대방에게 문서로 통고키로 한 것이다. 이로써 청나라와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양국의 권리를 대등하게 조정했다. 훗날 이 조항이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그리고 청일 양국은 ‘조선개혁안 8개조’에 합의했다. 주요 내용은 묄렌도르프를 해임하고, 대원군을 석방시켜 귀국시키기로 합의했다. 이 와중에 청나라가 조선의 내외정 계속 간섭하자 고종은 또 다시 러시아와 접촉하여 “조선왕조가 청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러시아의 직접적인 보호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심지어 고종은 “러시아가 조선 해역에 함대를 파견하여 청의 압력 제거해 달라”는 요구까지 했다. 이것이 제2차 조러 밀약설이다.
그런데 조선의 친청파 대신 민영익과 김윤식이 고종의 제2차 조러 밀약에 반대하고 나섰다. 민영익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의 압력을 제거하려는 정책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도박인지를 이해하고 고종과 민 왕후의 두 번째 조러 밀약 사실을 청에 밀고하는 바람에 전모가 드러났다. 민영익은 고종과 민 왕후의 보복이 두려워 홍콩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원세개는 청나라 몰래 제2차 조러 밀약의 전모가 드러나자 고종을 폐위시키고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의 아들 이준용을 왕위에 앉힐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청국 조정에 다음과 같이 고종의 폐위를 건의했다.

“청은 조공국 다스리는 데 너무 인정을 베풀었습니다. 조선은 우리가 다른 나라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으로 알고 점차 방자해져 우리를 신경 쓰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러시아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고종이 러시아 군대를 끌어들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군과 육군을 조선에 보내 고종을 폐하고, 왕족 가운데 현명한 자를 새 임금으로 세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원세개의 건의를 받은 이홍장은 고종의 강제 폐위는 서양 열강의 간섭을 불러올 우려 있어 더 이상 사건을 확대하지 않기로 했다. 이후 청나라는 틈만 보였다 하면 말썽 일으키는 조선을 청에 병합시키려는 계획을 은밀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제2차 조러 밀약설이 폭로되자 이 계획을 건의한 신하들(조존두·김가진·김학우·김양묵)을 체포하여 의금부에 하옥했다가 유배를 보냈다. 이렇게 되자 친러파 신하들과 일을 추진했던 베베르 주러시아 공사는 사건은 국왕이 저질러놓고 청이 강하게 압박하자 자기 책임을 면하기 위해 죄 없는 관원들을 귀양 보낸 사건에 대해 고종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러시아의 압력을 못이긴 고종, 조두순 등에 대한 유배형을 사면함으로써 국왕의 체면을 완전히 구겼다.
사실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점령한 이유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격돌하여 전쟁 위기가 닥쳤기 때문이다. 영국 해군은 여차하면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하고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진출을 길목에서 차단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코앞에 영국 해군 2년 간 주둔하자 블라디보스토크의 항구로서의 전략적 가치가 크게 평가 절하되는 상황이 되었다.
영국 함대의 거문도 점령은 러시아에게 전략상의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강력한 영국 함대가 거문도에 주둔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해군기지의 전략적 가치가 위협을 받자 러시아는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다. 러시아의 동아시아 영토 일대의 방어를 위해서는 영국 해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유럽령 러시아에서 병력과 물자를 빠른 시간에 수송할 수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이 시급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경악한 일본
 
전략가들로부터 제안을 받은 알렉산드르 3세는 1886년 봄, “가능한 한 시베리아를 최단거리로 횡단하는 철도를 부설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 결과 9,300여 킬로미터, 건설비 35억 루블의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계획이 완성되었다.
시베리아 철도 건설 계획이 구체화되자 일본 군부에 비상이 걸렸다. 유럽에서 극동 지역까지 해상으로 60일 걸리던 것이 철도가 개통되면 3주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일본 군부는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풀을 뜯던 러시아 기병대가 열차에 실려 3주 후면 흑룡강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면서 경악했다.
1889년 1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수상은 “시베리아 철도 완성되면 러시아는 필연적으로 부동항을 조선 땅에서 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철도 준공일이 러시아가 조선 침략을 시작하는 날”이라며 위기에 대응해 군비 증강 서둘러야 한다는 ‘군사의견서’를 발표했다. 다음해인 1890년 3월에는 『외교정략론』을 저술하여 발표했는데, 이 논문에서 야마가타는 유명한 주권선, 이익선 선언을 하게 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독립 유지하려면 주권선(일본 국토) 방어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익선(적성국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 안전을 위협하게 될 지역, 즉 조선)을 방호할 수 없다면 그 나라는 완전한 독립 국가가 아니다.’

야먀가타의 주권선, 이익선 개념은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정치경제학 교수 로렌츠 폰 슈타인 교수가 야마가타에게 가르친 이론이다. 로렌츠 폰 슈타인 교수는 이토 히로부미에게는 대일본제국 헌법의 기초, 권력분립의 기본구조를 가르쳤고, 군인 출신인 아먀가타 아리토모에게는 주권선, 이익선 개념을 가르친 인물이다.
슈타인 교수가 말하는 주권선이란 주권이 미치는 국토의 범위를 뜻하는 것이고, 이익선이란 ‘그 국토의 존망에 관계되는 외국의 상태’를 뜻한다. 이때부터 일본의 정치와 전략은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조선을 떼어놓고, 러시아가 조선 차지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자 마크 R. 피티는 『식민지』라는 저서에서 세계 각국의 식민지 획득 사례를 연구한 후 일본의 독특한 패턴을 발견했다. 즉 서구 열강들은 국가적 이익, 시장에서의 이익, 그리고 국내의 과잉인구를 유출하기 위해 식민지를 획득한 반면, 일본은 자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식민지를 획득했다는 것이다.
피티는 “일본의 식민지는 모두 그 획득이 일본의 전략적 이익에 합치된다는 최고 수준의 신중한 결정을 근거로 했고, 그에 기초해서 식민지를 영유했다”고 지적한다. 일본이 획득한 식민지는 거의 대부분 일본의 안전보장과 관련된 곳이다. 이처럼 안전보장과 관련하여 식민지를 확대했던 나라는 거의 없다는 것이 일본 도쿄대학 교수 가토 요코(加藤陽子)의 지적이다.
한편, 1891년 5월, 러시아 제위 후계자 니콜라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게 될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공식에 앞서 일본 오쓰(大津) 시 방문하던 중 경호를 담당한 순사의 공격 받아 부상을 당했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머리에 붕대 맨 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1891년 5월 31일,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공식에 참석했다.

청․러시아와 전쟁 결심한 일본
  
시베리아 철도가 본격 착공되자 일본은 이익선 방어를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 먼저 청국과 전쟁을 서둘렀다. 1887년 7월 일본 참모본부는 청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야마모토 기요카타 중령, 후지이 시게타와 시바야마 히사노리 대위 등을 북중국에 파견하여 상륙지 선정, 군대 수송, 상륙 후의 전략목표 등을 선정했다.
또 인천에서 천진으로 이동하여 다구(大沽) 포대를 견학하고, 북경을 거쳐 허베이성(河北省)의 산하이관(山海關)까지 갔다. 이러한 첩보활동을 통해 일본군은 청과 전쟁을 하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다양한 첩보 및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오가와 유지(小川又次) 소장이 「청국정토대책안」(淸國征討對策案)을 완성한 것이 1887년이다. 1888년에는 총 8권 분량의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을 간행했다. 1893년 4월에는 ‘출사(出師) 준비품취급위원회’를 조직하여 무기와 군수품 비축을 시작했고, 5월에는 ‘전시 대본영 조례’를 제정했다.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 중장은 조선과 청국을 여행하면서 진공작전의 전략을 구상하고, 군사 탐정망을 조직하는 등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해군은 청의 북양함대 주력을 격파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기 위해 4,200톤 급 대형 군함 건조에 착수했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으로 조선에서 청국에게 패한 일본은 청일전쟁을 위한 해군력 강화를 위해 1883년부터 대규모 전함계획을 추진했다. 이 계획은 대함 6척, 중함 12척, 소함 12척 수뢰포함(水雷砲艦) 12척 등 42척을 8개년 계획으로 정비한다는 야심찬 프로그램이었다.
이 계획에 의거하여 1883년부터 1885년까지 3년 동안 총 12척의 함정을 구입 혹은 건조에 착수했다. 메이지 천황이 함대 건설 성금을 매월 일정액을 지출하고, 문무 관리들도 봉급의 10퍼센트를 헌금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일본 군부는 정원․진원함 같은 거함을 단 시간 내에 건설하기는 어렵다고 판단, 빠른 기동력과 속사포로 무장한 쾌속 순양함을 건조했다. 요시노는 북양함대 주력함과 맞서기 위해 영국 암스트롱 조선소에 주문한 쾌속 순양함으로 배수량 4,160톤, 탑재된 함포는 15센티미터 속사포 4문, 12센티미터 속사포 8문이었다.
함포 구경은 북양함대 주력함보다 열세였지만 속력은 22.5노트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군함이었다. 일본 해군은 경쾌한 속도와 속사포로 거포로 무장한 청국 전함을 대항한다는 전략이었다. 이 배는 1893년 영국에서 완성되어 일본에 인도되었다.
이 와중에 조선에서 동학 농민봉기가 발생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농민봉기조차 진압하지 못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파병 요청을 했고, 이 소식을 입수한 천진조약에 의거 양국 군대가 동시 파병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동학 농민봉기가 청일 양국군을 조선으로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다.
일본이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청에 패배한 후 청나라와 전쟁 위해 군비확장에 돌입했을 때 조선은 완벽한 민 씨 척족세력들의 세도정치판으로 변해 있었다. 특히 국왕과 왕비가 직접 나서서 국가의 관직을 팔아먹는 매관매직, 수탈이 일상화 되면서 조선은 ‘홉스적 자연 상태’(the Hobbesian State of Nature),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상화되다시피 했다. 일본의 군비확장이 끝나갈 즈음 조선에서 농민봉기가 발생하여 청일전쟁의 불씨를 제공한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동학을 혁명이라고 자리매김을 하는데, 무엇을 위한 혁명이었나?

‘외교의 노래’, 그리고 ‘새야새야 파랑새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쿠데타 당시의 패전으로 인해 오매불망 청국에 대한 복수를 꿈꾸던 일본은 동학 농민운동의 여파로 조선에 파병 기회가 오자 이를 적극 이용, 조선에 대병력을 파병했고, 풍도 앞바다에서 선전포고도 없는 상황에서 청국 군함을 공격하면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근대식 무기체계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일본군은 전근대적 무기로 대항한 청국의 육·해군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사상 최대의 증기선 철갑함대 간의 격돌이었던 황해해전에서의 압승, 위해위(威海衛)에서의 승리는 일본 육군과 해군의 전력과 수준이 만만치 않은 수준임을 전 세계에 선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외교전에서는 패배했다.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에서 피의 대가로 얻은 요동반도를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의 압력으로 반환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청일전쟁에 참전했던 100여 명의 장교와 사병들이 자살로 항의했고, 언론의 빗발치는 비난, 대중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일본은 국제사회에서는 오직 힘, 즉 국력만이 정의로울 수 있으며, 국가 생존과 구원은 군사력을 통해서만 확보된다는 처절한 교훈을 체득한 것이다.
이 무렵 일본 사회에서 유행한 유행가가 ‘외교의 노래’라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쪽에는 영국이 있고 북쪽에는 러시아가 있다네/ 동포여 조심하라! 겉으로 그들은 조약을 맺는다네/ 그러나 그들의 가슴 속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네/ 국제법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네/ 그러나 때가 오면 기억하라/ 강자가 약자를 먹어 치운다는 것을”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는 농민봉기 이후 ‘새야 새야 파랑새야’란 노래가 유행했다. 그 가사 내용과 일본에서 유행했던 ‘외교의 노래’가사 내용, 그리고 그 가사에 담긴 의미와 수준을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아랫녘 새는 아래로 가고 윗녘 새는 위로 가고/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손톱 발톱 다 닳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 목표는 타이완을 빼앗아 식민지로 만들고자 함이 아니라 이익선, 즉 조선의 확보였다. 그런데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 간섭으로 인해 일본은 전리품으로 얻은 요동반도를 무기력하게 반환했다. 말하자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외교전에서는 참혹하게 패배한 것이다.
일본이 러시아의 압력으로 요동반도 토해내는 모습을 본 고종과 민 왕후는 또 다시 러시아를 끌어들여 친러 입장을 강화하는 인아거일(引俄拒日) 전략으로 돌아섰다. 왜 당시 국가지도부는 오매불망 패권국 영국이 아니라, 패권에 도전하는 러시아 편에 서려 했을까? 이것은 일종의 미스터리라고밖에 할 수 없다.
수많은 군인의 희생을 통해 청일전쟁을 일으킨 목적은 한반도를 자기들 이익선으로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제1차, 2차 조러밀약으로 그렇게 당하고도 고종은 러시아를 또 다시 한반도로 끌어들였다. 일본 지도부는 일본의 안전은 일본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칼이나 다름없는 한반도를 다른 나라의 영향으로부터 빼내는 데 있다고 보았다.

민 왕후 시해의 원인은?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큰 희생을 무릅쓰고 청국과 싸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러시아와 밀착하여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자 침착성을 잃은 일본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한다. 인아거일 정책의 몸통인 민 왕후를 시해하여 러시아와의 연결고리를 물리적으로 차단코자 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1895년 7월 13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공사를 소환하고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후임 주한 일본 공사로 임명했다. 서울에 부임한 미우라 고로는 1895년 8월 20일, 수십 명의 일본 자객을 비롯, 일본군 수비대와 거류지 담당 경찰관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으로 쳐들어갔다. 자객들은 민 왕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비를 잔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민 왕후 시해에 동원된 일본의 군국주의 단체인 천우협(天佑俠)과 현양사(玄洋社) 소속원들은 깡패나 부랑자가 아니라 고도의 지적 능력을 보유한 엘리트들이었다. 미우라 고로 공사와 함께 조선에 건너와 민 와후 시해의 주역을 맡은 시바 시로(柴四郞)는 하버드대학과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892년에는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또 현양사를 만든 도야마 미츠루(頭山滿)는 김옥균이 갑신정변 쿠데타에 실패하여 일본에 망명했을 때 김옥균을 후원하고 지지한 인물이었다. 행동대원으로 참가했던 낭인 출신의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萬一)는 도쿄제대 법학부 출신으로 후에 브라질, 루마니아 전권공사를 역임했다.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는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라는 저서에서 민 왕후 시해사건은 러시아와 일본이 즉각 전면전으로 돌입할 수 없는 형편에서 일본이 민 왕후를 제거한 조치였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이 사건은 개인 차원이나 낭인들의 우발적인 살인사건이 아니라 러시아와 일본의 국익이 걸린 대결이었다는 것이다.
고종과 민 왕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국과 일본을 배척하려 할 때마다 청국과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민 왕후를 견제한 것이 두 세력 대결의 구도다. 따라서 민 왕후와 대원군의 대결은 청·일과 민 왕후의 대결이었고, 대원군은 민 왕후 견제를 위한 청국과 일본의 도구였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 외교관들은 치밀한 작전을 벌여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이것은 일본이 일미사변으로 도전을 하자 러시아가 아관파천으로 응전을 한 것이다. 아관파천은 주한 러시아 공사가 치밀하게 계획한 일종의 군사작전이었다.
조선의 국왕을 볼모로 잡은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조선에서 수많은 이권을 탈취해갔고, 조선은 러시아의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아관파천 기간 중인 1896년 5월 말,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민영환을 파견하여 러시아 끌어들여 일본 물리치는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을 요청했다.
민영환은 베베르 주한 러시아 공사의 주선으로 러시아 요원들의 보호 하에 모스크바로 가서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고, 러시아 황제에게 조선을 러시아 보호령으로 삼을 것을 요구하여 황제로부터 약속을 받았다. 이어 외무대신 로바노프, 재무대신 비테와 만나 러시아 군대가 조선 국왕을 보호해 줄 것, 그리고 러시아 군사고문단의 조선 파견을 요청했다. 

대한제국 선포, 황제 즉위가 자주외교인가?

두 달 후인 7월 29일 러시아 정부는 푸차타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교관단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 궁성호위대를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이 경비대는 1897년 5월, 환궁한 고종이 지켜보는 앞에서 러시아식 사열을 하여 고종을 기쁘게 했다. 그리고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국내의 좌파 사관을 가진 학자들은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 및 황제 즉위는 자주의식의 발로, 자주외교라고 주장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도 그것이 사실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역사적 사실은 이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 및 황제 즉위는 자주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자신의 목숨을 의탁할 정도로 우호적인 친러 정책을 수행한 대가로 고종이 러시아 황제로부터 “대한제국 공포와 고종의 황제 칭제를 인정한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도 연구 논문을 통해 “대한제국의 출범은 고종의 적극적인 친러 정책의 결산”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무렵 일본과 러시아는 상호 충돌 자제를 위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1896년 5월 4일 일러 양국은 베베르－고무라 각서를 체결하여 800명 수준의 양국 군대 조선 주둔에 합의했다. 러시아는 한반도에 한 명의 경비병조차 발붙일 수 없었는데, 아관파천을 계기로 일본과 동일한 규모의 병력을 체류시킬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또 야마가타 아리토모 특명전권대사가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을 계기로 1896년 6월 9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된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 한반도에서 양국의 권익을 대등하게 하기로 합의했다. 야마가타는 러일이 38도선, 혹은 39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지배하자는 안을 제안했으나 로바노프는 이를 거부했다.
두 달 후인 7월 29일 러시아는 푸차타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교관단을 조선에 파견했다. 러시아 교관단은 조선의 궁성호위대를 훈련시켰고, 이 경비대는 1897년 5월, 환궁한 고종이 지켜보는 앞에서 러시아식 사열을 했다.
베베르를 대신하여 주조선 공사로 부임한 스페에르는 부산 앞바다의 절영도에 러시아 해군 석탄기지 건설 추진, 러시아 목재·광산·철도회사 추진, 모든 미국인 고문관들을 해임하고 러시아인 고문관을 채용하도록 조선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다.
스페에르는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대해서도 “반러 활동을 전개하는 일본과 영국 공사관의 괴뢰”라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고종이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 기도를 무산시킨 이면에는 러시아 측의 암묵적인 작용도 있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1897년 8월에는 13명의 러시아 장교가 추가로 조선에 파견되었으며, 10월에는 알렉세에프가 조선의 재정고문 및 총세무사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조선이 일사천리로 친러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을 지켜본 주조선 미국공사 알렌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하여 조선 문제는 다 끝났다”고 말할 정도였다. 러시아 군사교관단은 러시아군의 지휘를 받는 6000명의 조러 연합군 결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흥미로운 변화가 전개되었다. 러시아의 재무상 비테 주도 하에 강력하게 추진되었던 러시아의 한국 진출 정책이 퇴조하고, 만주 진출을 우선하는 외무대신 무라비요프와 육군대신 반노프스키가 득세하면서 만주 진출로 러시아의 정책이 선회한 것이다.
1897년 12월 18일 러시아는 청일전쟁 직후 일본이 반환했던 요동반도의 입구인 여순과 대련항을 자기들이 조차하여 부동항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서 만주에 동청철도 건설권을 획득했다. 일본이 반납한 요동반도를 러시아가 차지해버린 것이다.

일본, 먹고 마시지도 않고 함대 건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보고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은 1897년 총 세출에서 55%가 군사비일 정도로 군비 확장에 전력투구했다.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는 “일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함대를 건설했다”고 말할 정도로 러일전쟁 개전 직전에는 비로소 세계 5대 해군국의 말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후 10년 동안 수많은 밀정들을 파견하여 러시아와 전쟁 위해 만주 지역 일대를 샅샅이 연구하고 지도를 작성했다. 만주 각 지역에 육군 참모본부 소속의 최정예 장교들을 간첩을 파견했다. 이들은 극동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회사에서 막노동 등 천한 일에 종사하며 각종 정보를 수집하여 일본 참모본부에 제공했다.
한편에선 극동지역의 러시아 육해군을 연구하는 수 백 명의 비밀결사 첩보대원 및 그들 돕는 비밀공작원 조직들이 맹활약을 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원했던 군국주의 단체 흑룡회(黑龍會)는 야쓰다 상사의 재정 지원을 받아 만주에서 후방 교란 및 스파이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러시아 극동 시베리아 지역의 상세 지도를 제작하고 연해주, 흑룡강, 동부 바이칼 지역에 수백 명의 첩보원을 파견하여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그런데 만주에서 결정적인 항구인 여순, 대련항을 확보하고 만주의 이권을 향유하는 데 성공하자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전략적 관심이 크게 축소되었다. 그 후부터 러시아는 한국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고, 조러 연합군 결성 계획도 폐기되었다.
러시아가 만주에 집중하면서 한반도에서 러시아 세력이 퇴조하자 러시아에 의지하여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려던 고종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고종은 1902년 뜬금없이 재정 파탄 상황에서도 평양에 서경(西京, 북쪽 지방의 수도) 건설 사업에 착수했다. 대체  국력이 심각하게 고갈된 상황에서 왜 평양에 새 궁궐을 지으려 했던 것일까?
이미 일본은 러시아 세력이 한반도에 깊이 침투하기 시작한 1896년에 북위 39도선(혹은 38도선)을 중심으로 러시아와 남북 분할을 제기하여 남쪽은 일본, 북쪽은 러시아가 차지하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이와 비슷하게 러시아는 1900년 7월, 일본에게 “조선에서 러일 양국의 세력범위를 확정하자”는 제안을 하게 된다. 일본이 제안했던 내용과 거의 비슷한 제안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일본 정부가 이 제안을 수용하려 하자 일본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를 비롯한 일부 세력들이 “일본이 한반도 전체를 독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일본의 극우세력들 반대로 인해 이 제안은 불발이 되었는데, 만약 일본이 1900년에  러시아의 제안을 수용했다면 한반도는 1900년에 남북이 분단되어 러시아와 일본의 보호령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자 고종은 일·러의 조선 분할에 대비하여 북부지방에도 궁궐을 건설하여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서경 건설에 앞장섰던 것이다(이윤상의 ‘대한제국기 국가와 국왕의 위상 제고사업’).
청일전쟁은 1880년대 아프리카 분할을 끝낸 구미 열강의 눈을 아시아로 돌리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신생국 일본에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패한 청국의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단지 일본이 동북아의 강국으로 부상했다는 의미 이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팍스 차이나의 우산 아래 평화를 구가하던 조선은 당장 사대의 종주국이 힘없이 무너지면서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청국이 일본에게 연전연패를 당하며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라는 것이 여지없이 드러나자 서양 열강들은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이권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중국 뜯어먹기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아프리카 분할 경쟁에서 열강들에게 뒤처졌던 독일이었다. 독일은 1897년 11월 산둥반도에서 두 명의 선교사가 살해된 사건을 빙자하여 군대를 보내 칭다오(靑島)와 교주만을 점령했다.
독일이 이 지역을 점령한 이유는 석탄층과 철광석 등 부존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1898년 3월 영국과 독일이 공동 차관 1600만 파운드를 제공하는 대가로 독일은 교주만을 99년 간 조차하는 조약에 서명하고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등 이권을 확보했다.
독일의 행동이 선례가 되어 다른 열강들도 중국에서 이권 쟁탈을 시작하면서 중국은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삼국간섭의 주역인 러시아도 여순항과 대련항을 25년 간 조차하고 동청철도의 남만선(南滿線) 부설권을 가져갔다.
프랑스는 1898년 4월 광주만 조차, 운남철도 부설권을 요구하다가 말이 통하지 않자 2주 후 광주만을 점령했다. 영국도 6월에 홍콩 섬의 맞은편 구룡반도를 99년 간 조차하고, 7월에는 일본이 점령했던 웨이하이웨이(威海衛)와 류공다오(劉公島)를 포함한 전 항만을 25년 간 조차했다.
미국도 1898년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장악했다. 이어 미국은 1899년 청국의 ‘문호 개방’을 각국에 통지하여 미국도 동아시아 분할 경쟁에 참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유럽 열강이 무력을 이용하여 중국 영토를 빼앗았다면, 미국은 경제적 팽창이라는 방식을 앞세운 점이 특징이다.
서양 열강들이 앞 다퉈 청국의 이권을 뜯어가자 청국의 개혁파 캉유웨이(康有爲) 등은 하루빨리 개혁을 해야 한다는 상소를 황제(光緖帝)에게 올렸다. 1898년 6월 광서제는 ‘변법자강’을 선포하고 개혁에 돌입했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혁은 반동을 몰고 오는 법. 불과 3개월이 못 되어 서태후(西太后)를 비롯한 수구파의 반격을 받아 100일 만에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자 민중들이 “외국인에게 죽음을(滅洋)”이란 기치를 내걸고 폭동을 일으켜 외국인 선교사를 죽이고 공장과 교회 등을 파괴했다. 폭동은 중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특히 일본이 청일전쟁 배상금 보장을 위해 3년 간 군사 점령을 했고, 이어 독일과 영국이 이권을 차지한 산둥성(山東省) 일대에서 1899년 3월 의화단이 봉기했다. 의화단의 봉기는 다음해에는 수도로 번져 6월부터 8월까지 베이징(北京)의 공사관 거리가 의화단에 의해 봉쇄됐다.
실력 행사에 나선 서양 열강들은 7월에 8개국이 2만 병력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천진(天津)을 공격했고, 8월 14일 북경에 돌입하여 의화단을 진압했다. 서태후는 광서제와 함께 탈출하여 서안으로 달아났고, 연합군은 사흘 간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락하여 북경은 무법천지로 변했다.
의화단의 봉기가 만주까지 번지면서 동청철도가 파괴되고, 철도 수비 병력인 러시아 병사들과 충돌하자 러시아도 의화단과 마적들로부터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7월에 10만 대군을 파병하여 10월 무렵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러시아는 눈길을 한반도로 돌려 1901년 압록강변에서 나무 재배를 시작했고, 삼림재배소 경호를 이유로 군대를 보냈다. 1903년 4월에는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조차를 요구했다.
1901년 청국은 서양 열강 11개국과 베이징의정서(辛丑조약)를 체결하여 열국에 사죄사 파견, 배상금 4억 5000만 냥 지불, 공사관 방위를 위한 각국 군대 배치 등 12개 조항을 허용했다.

러시아의 만주 침공, 영국은 ‘영일동맹 체결’로 맞서

러시아의 만주 침공으로 일본은 비상이 걸렸다. 1901년 6월 이토 내각이 사퇴하고 등장한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은 재정 강화, 해군 확장, 유럽 1국과의 협약 체결,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네 가지 주요 정책을 수립했다. 그 결과 다음해인 1902년 1월 30일 영일동맹이 조인되었다. 영일동맹은 사실상의 군사 동맹이었고, 한국에 특수 권익을 갖는다는 점을 영국에게 승인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왜 당대의 패권국 영국은 극동의 일본과 동맹을 맺었을까. 전 지구적 차원에서 러시아의 남진을 봉쇄하느라 노심초사하던 영국은 의화단 사건을 통해 일본군이 ‘팍스 브리태니카’를 위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러시아가 동청철도 보호를 구실로 만주를 무력 점령하자 영국은 동북아에서 러시아 견제 역할을 일본이 대신 수행해 주기를 바란 것이다.
영일동맹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심하게 만드는 중요 계기였다.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확보하고, 광범위한 첩보망을 이용하여 러시아가 극동지역에서 전쟁준비 상태가 허술하다는 점을 파악한 일본은 조속한 개전에 착수했다.
영국과 미국이 러일전쟁을 부추긴 이유는 전쟁으로 인해 양 교전국 모두가 탈진할 것이며, 두 장애물을 제거할 수 없다 해도 아시아를 수탈함에 있어 위험한 두 경쟁자를 심각할 정도로 약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미 양국은 러시아가 동아시아 시장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노골적인 방해 공작을 펴기 위해 일본을 이용한 것이다.
영일동맹이 체결되자 고종은 영국이 일본의 한반도 정책을 온건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영국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은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은 외교관례에 따라 국외 중립을 선언하는 대한제국 측 문서를 수교했다. 고종은 이것을 보고는 영국이 대한제국의 중립을 보장한 것이라고 감사해 하면서 ‘중립 선언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영국의 충고와 지원을 요청했다.
이어 고종은 러일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생기면 영국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조던 공사에게 타진했다. 말하자면 고종은 1896년의 아관파천과 동일하게 영관파천(英館播遷)을 통해 영국에 의지하고, 영국을 끌어들이려는 의도였다. 고종의 기대와는 달리 영국 정부는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러시아가 청국과 북경의정서를 조인한 후에도 러시아는 철도 보호를 명목으로 만주에 계속 군대를 주둔하자 열강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러시아는 1902년 4월 8일 청국과 단계적 만주 철병에 관한 협약을 맺고 러시아군을 6개월마다 세 개 지역에서 철병키로 약속했다.
10월 8일 제1차 철병은 이뤄졌으나 1903년 4월 8일이 기한인 제2차 철병부터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목단강 남부와 길림성 전역을 재점령했다. 5월에는 압록강 삼림 채벌을 한다면서 조선의 용암포를 무력 점령했다.
심상치 않은 러시아의 움직임에 대해 일본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고무라 주타로 외상 등 주요 인사가 회의를 열어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충분한 권리를 요구하고, 이에 대한 교환 조건으로 만주에 대해서는 러시아가 현재 경영에 착수한 범위에 한해서 우세하다는 점을 인정키로 결정했다. 이것이 만한(滿韓) 교환론이다.

러시아와 일본 협상 불발, 전쟁으로 향하다

당시 러시아의 입장은 일본의 대한제국 통할권은 인정하되 만주에 대한 군사 점령을 계속하여 만주 병합을 시도하고, 만주 문제는 한반도 문제와 별개로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제3차 철병기간인 10월 8일이 지나도 러시아가 철병하지 않자 일본에서는 ‘개전 불가피론’ 여론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러일 양국은 10월부터 12월까지 협상을 계속했으나 ‘만주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않기로 한 러시아와 ‘만한 교환론’의 일본 입장은 계속 헛돌았다.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일본 지도부는 극비 회의를 열고 일본에 유리한 만한 교환론이 채택되었다. 이것은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최후의 수단’, 즉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한 결정이었다.
이 회의 직후인 1903년 12월 일본은 ‘군자 보충을 위한 임시 지출 실행의 건’ ‘경부철도 속성의 건’ 등 4건의 긴급 칙령이 공포되었다. 본격적인 전쟁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자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도 극동 지역에 동원령을 내렸고, 1904년 1월 8일 만주 등에 계엄령이 시행되었다.
1904년 2월 4일 어전회의에서 개전이 결정됐다. 2월 6일, 구리노 주러 공사는 러시아 정부에 국교 단절 공문을 제출했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일본은 1904년 2월 8일 여순에서 러시아 극동함대 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2월 10일 선전포고를 했다.
개전 2주일을 앞둔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은 열강에 대해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하여 엄정 중립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친러시아적 성향이 짙은 벨기에 출신 고문 델코뉴의 도움으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 직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제물포를 기지로 활용했고, 대한제국의 3000명 군대를 일본군에 예속시켰으며, 고종 황제는 황궁 내 연금 상태나 다름없었다. 
일본은 1904년 5월 31일 각의에서 ‘제국에 대한 방침’과 ‘대한(對韓) 시설강령’을 결정하면서 “한국은 도저히 오랫동안 독립을 유지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고 밝히고 보호국화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 일본군이 서울의 치안을 장악한 가운데 제1차 한일협약을 맺어 한국 정부가 고용한 외국인 고문을 대거 정리하고 그 자리에 일본인을 임명했다. 그 결과 1905년 11월에는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 고문이 188명에 이르게 되었다.
일본은 1904년 2월 8일 여순항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군함을 선제 기습 공격하여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초전에서는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여순 공방전에서 6만 여 명의 병력이 희생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해 애를 태우던 일본은 러시아 극동함대의 기항지이자 전략적 요충인 여순항을 1905년 1월에 가까스로 점령하면서 승기를 잡았고, 봉천 대회전에서도 악전고투 끝에 승리했다. 또 1905년 5월,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는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온 러시아 발틱 함대에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가했다.
일본은 연승 행진을 거듭하자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桂太郞) 밀약을 맺어 일본 제국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미국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한반도를 보호령으로 삼아 통치하는 것을 용인키로 합의했다. 말하자면 조선 병합에 대한 미국의 양해를 얻어낸 것이다.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英日)동맹을 체결하여 ‘극동의 헌병’ 역을 공고하게 보장받았다.

일본 승리, 한반도 전리품으로 얻어

9월 5일에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자리에서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는’ 전리품을 얻어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사상자 22만 명(청일전쟁의 20배), 전쟁비용 20억 엔(청일전쟁의 10배)라는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얻어낸 포츠머스 강화조약 제2조는 한국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우월한 이익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며, 일본 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지도, 보호, 감리 조치를 취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러시아 국민들은 타열강의 국민들처럼 최혜국 국민으로서 그들과 대등하게 대우받는다는 데 합의한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20억 엔의 자재와 20만 명의 영령으로 획득한 만주의 권익을 지켜라”라는 슬로건이 등장했다.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조인되어 일본은 러시아의 영향을 한반도와 남만주에서 완전히 배제시키고 남사할린까지 장악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 해 11월 18일 새벽 1시, 제2차 한일협약(이른바 을사늑약)을 맺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외교권을 일본 정부가 접수했다.
1905년 11월 18일 외부대신(오늘의 외교부 장관) 박제순과 일본의 특명 전권공사 하야시 곤노스케(林權助) 간에 체결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서두는 ‘일한(日韓)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공동의 이익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국이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다고 되어 있다.

을사보호조약의 현장

조약 체결 전날인 11월 17일 어전회의 정황을 『고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고종: (조약문서 협정에 대한 의견을 꺼내자 몹시 괴로워하며) “(일본인들이) 감정을 가지게 할 수는 없으니 늦추는 것이 좋겠다.”
이완용: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밀어치우니 우리 여덟 사람이 아래에서 막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너그러운 도량으로 허락하면 어떻겠습니까.”
고종: “….”
이완용: “우리가 을사조약을 허용하게 된다면 조약 조문 가운데 더하거나 덜거나 고칠 수 있는 매우 중대한 사항이 있으니 제때에 잘 타산해야 하며, 결코 현장에서 구차스럽게 할 수는 없습니다.”
고종: “이등박문 대사도 말하기를 이번 조약의 문구를 더하거나 고치려 하면 협상의 길이 있지만 만일 거절하면 이웃 나라 간의 좋은 관계를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조약 문구를 변통하는 것은 바랄 수 있을 듯하니 학부대신(이완용)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여덟 대신이 어전에서 물러나 휴게실에 모이자 일본 공사 하야시 곤노스케(林權助)가 회의 결과를 물었다.

한규설: “황제 폐하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우리 여덟 사람은 반대 의견을 거듭 말씀드렸습니다.”
하야시: “당신네 나라는 전제국이니 황제 폐하 권한으로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면 조약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대신들은 정부의 책임에 캄캄하여 폐하의 명을 어기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참정대신과 외부대신은 갈아버려야겠습니다.”

잠시 후 이토 히로부미가 군사령관 하세가와와 함께 급히 도착했으며 헌병 사령관과 군사령부 부관이 뒤따라 왔다. 궁궐 주위에 이미 일본 헌병과 경찰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으니 분위기가 몹시도 위압적이 되었다.

이토: “어전에서 있었던 회의 결과를 듣고자 합니다.”
한규설(참정대신): “나는 반대한다고만 말씀드렸습니다.”

이토: “무엇 때문에 반대한다고 했는지 설명하시오.”
한규설: “설명할 것 없이 다만 반대일 뿐입니다.”
박제순(외부대신):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교섭이니 찬성과 반대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외부대신의 책임을 맡고서 외교권이 넘어가는데 어찌 찬성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이토: “이미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지시가 있었으니 어찌 명령이 아니겠습니까. 외부대신은 찬성하는 편입니다.”
민영기(탁지부대신): “나는 반대입니다.”
이하영: “지금의 세계정세와 동양의 형편, 그리고 대사가 이번에 온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외교를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귀국이 이처럼 요구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우리나라가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와 협정서가 있는데 또 외교권을 넘기라고 합니까. 우리의 근본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니 승낙할 수 없습니다.”
이토: “그렇지만 이미 정세와 형편을 안다고 하니 이것 역시 찬성하는 편입니다.”
이완용(학부대신): “나는 조금 전에 접견 석상에서 여차여차하게 말씀드린 바가 있을 뿐이고 끝내 찬성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이완용은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지시가 있었으니 문제의 기본은 이미 조약 찬성이라 여기고 애매모호하게 답변한 것이다.)
권중현(농상공부대신): “나는 접견석상에서 폐하를 면대했을 때 학부대신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한 가지 다른 의견이 있다면 황실의 존엄과 안녕에 대한 문구였습니다. 그러나 찬성과 반대의 두 글자 사이에서 충신과 역적이 구별되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잘라 말했던 것입니다.”
이토: “황실의 존엄과 안녕 등에 대한 글자는 더 보태야 할 문구이니, 이도 역시 찬성하는 편입니다.”
심근택:“나도 접견석상에서 학부대신과 같은 뜻이었으나 의견을 묻는 마당에서는 농상공부대신과 같은 뜻으로 말했습니다.”
이지용: “나 역시 학부대신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또 내가 지난해 봄에 하야시 곤노스케 공사와 의정서를 체결했는데 이 조약문 중 독립을 공고히 하고 황실을 편안히 하며 영토를 보존한다는 명백한 문구가 있으니 애당초 이 문제에 가부를 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토: “각 대신들 의견을 물었더니 논의가 같지는 않지만 실지를 따져보면 반대한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참정대신(한규설)과 탁지부대신(민영기)뿐입니다. 주무대신에게 지시를 내려 빨리 조인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국가 운명을 결정하는 회의장에서 보여준 대한제국 지도부 인사들의 행동이었다.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한규설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모양을 지으니 이토 히로부미가 “어찌 울려고 하시오”하며 울지도 못하게 제지했다.
얼마 후 이재극이 돌아와 “조약문 중 보태거나 깎을 것은 법부대신이 일본 대사, 공사와 교섭해서 바르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고종의 지시를 전했다. 고종은 조약 체결에 대해 묵시적으로 승인한 셈이다.
그리하여 조약문 수정작업이 진행됐는데, 대신들이 “우리나라가 부강해진 다음에는 이 조약이 무효로 되어야 하니 이런 뜻의 문구를 넣어 달라”고 요구했다. 이토가 직접 붓을 들어 이 문구를 적어 넣은 다음 고종에게 보였고, 고종은 이 내용에 찬성하여 조인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고종은 이 조약에 반발하여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 열린 제2차 만국평의회에 밀사 세 명을 파견하자 일본 정부는 7월 19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황태자 이척을 황제(순종)에 즉위시켰다. 그로부터 5일 후인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약을 맺어 외교권 박탈, 군대 해산, 내정권 박탈, 그리고 일본인을 중앙과 지방의 요직에 임명했다.
이 시점에서 일본이 한국을 완전 병합하지 못한 이유는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3차 한일협약이 조인된 지 6일 후인 7월 30일, 러일 양국은 협약 체결에 성공했다. 이때 부속된 비밀 협약을 통해 일본은 한국 병합을 추진하게 되었고, 러시아는 제2차 러일전쟁 방지와 북부 만주와 외몽고를 세력 범위로 삼는 것에 대한 일본의 동의를 받아냈다.

미신에 빠진 고종

이 무렵 한국에 와 있던 서양 외교관들은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리더십에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다는 충격적인 기록들을 다수 남겼다. 대부분의 외교관들은 고종이 병적으로 미신에 빠져 국가의 주요 정책 결정이나 판단을 미신에 근거하여 내리는 등 합리성을 상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한 미국공사 알렌은 “고종은 전투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던 1904년 11월에도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무당들의 말들 듣고 안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종과 군왕세력들은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전의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승리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줄 것이라고 헛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조던 주한 영국 총영사는 “고종은 국제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망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한 나라의 황제가 이 모양인 데다가, 그 아래 국가 주요 대신들은 끝없는 정변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국가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이 일신의 영달과 가족의 안전만을 추구했다. 이들 주요 관리들은 친분 있는 외국인들에게 정변이 발생하면 은신처를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고종은 실질적인 독립을 위해 국가능력을 향상시키는 구체적인 노력보다는 재정상의 곤란에도 불구하고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열강의 군주들과 대등한 지위를 상징하는 명예나 훈장을 얻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1902년에는 자신의 등극 40주년 기념행사에 각국의 특별사절단을 초청하기 위해 덕수궁 내에 서양식 건물을 짓는 등 성대한 준비를 했지만,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행사를 취소했다. 
당시 일본과 러시아는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 분할을 논의하는 등 한국은 열강들의 흥정의 대상이었다. 1894년 11월,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는 “한국 정부는 부패가 너무 만연했기 때문에 모든 공공기관을 일본이나 그 외 다른 외국의 엄격한 감독아래 두지 않는 한 개선의 희망이 없으며, 이것이 한국 문제의 유일한 해결방안”이라고 보고한다.
을사보호조약 이전까지 서울 주재 미국 공사로 활동하던 알렌도 “조용한 아침(Morning Calm)이란 이제 옛말이다. 조선은 이제 아침이 지나 춥고 음울한 고요의 땅이 되었다. 국민들은 자치 능력이 없으며 과거와 같이 지배자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당시의 조선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일본 수상 이토 히로부미는 1895년 영국 공사 어네스트 샤토와의 대담에서 “한국의 독립이란 현실성이 없으며, 한국은 주변의 가장 강력한 국가에 병합하든가 보호 아래 두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모든 불신의 원인은 다름 아닌 고종의 통치능력이었다.
구대열 이화여대 교수는 「다모클레스의 칼?-러일전쟁에 대한 한국의 인식과 대응」이란 글에서 서양 외교관들은 고종을 근대적 의미에서 통치자로서의 자격이 완전히 결여된 인물로 판단했다고 한다.

한국 병합계획 시작

러일전쟁 당시 AP통신 전쟁특파원을 지냈고, 후에 서울 및 심양 주재 미국 부영사 및 총영사였던 윌라드 스트레이트는 당시 대한제국의 지도부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아시아에서도 한국은 구제가 불가능한 국가다. 고종은 열강 사이의 분열을 이용해 독립을 유지하려는 나약한 거간꾼이고, 양반 계층은 음모를 통해 사적(私的)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익(私益) 집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치권을 포기하고 대신 일본의 지배를 수용해야 한다.”

구대열 교수는 구한말의 대신들은 대부분 일본, 러시아 등 외세와 연결되어 있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외세의 이권 쟁탈과 대립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조던 영국 총영사는 조선 조정은 내각 위기가 끊이지 않아 외국 공관들은 정부 각료가 1주일에 한 번 씩 갈렸다는 통고를 접수할 틈도 없을 정도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조지 캐넌은 ‘아웃룩(Outlook)’이라는 잡지(1905년 10월 7일자)에 한국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현존하는 한국 정부의 활동 실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그들이 간신히 생계를 위하여 벌어들이는 모든 것을 간접 또는 직접으로 수탈하며, 실제로 되돌려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생명 재산에 대한 아무런 적절한 보호책도 제공하지 않는다.
눈에 뜨일 만한 아무런 교육시설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도로 건설도, 항만 개량도 하지 않는다. 해안에 등대도 없다. 도로의 청소와 위생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전염병의 예방이나 단속 방안도 취하고 있지 않다. 무역과 산업을 장려하는 노력도 없다. 가장 저속한 미신을 장려하고 있다.
현대에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인권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거짓과 부정과 배신과 잔인성과 세상을 비웃는 만행을 일삼는 본보기를 국민에게 보임으로써 그들을 타락시키고 풍속을 문란 시키고 있다.’

이것이 러일전쟁을 전후한 당시 한국의 민낯이었다. 러일 양국이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비밀 협약을 체결하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명령하는 순종의 조칙이 내려오자 곳곳에서 의병들이 봉기했다. 일본 보고서(조선주차군사령부의 ‘조선폭도 토벌지’)에 의하면 1910년 한국 병합 때까지 일본군과 의병 사이의 전투 횟수는 2,819차례, 전투에 나선 병의 전사자 수는 17만 7,688명이었다.
일본 정부는 1909년 4월 한국 병합계획을 시작하여 7월에 가쓰라 수상과 고무라 외상이 만든 ‘한국병합에 관한 건’이 천황의 재가를 얻었다. 1910년 4월 이즈볼스키 러시아 외상은 모토노 이치로(本野一郞) 주러 공사와의 회담에서 “사실상 한국 병합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단행한 후 첫 번째 대외 전쟁인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타이완을 식민지로 차지했다. 그런데 식민지 정책에 대한 구상과 준비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타이완을 통치하는 와중에 심각한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조슈 번의 전리품이 된 조선

서영희의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이란 논문에 의하면 일본은 처음에는 구미 열강의 식민 정책을 모방하여 프랑스의 알제리에 대한 동화주의 정책을 타이완에 시행했으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영국의 식민지 정책을 도입하여 시행했으나 타이완은 역사와 풍속이 달라 현행 일본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 타이완 총독이 관할구역 내에서 법률의 효력을 지닌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1896년 3월 30일 법률 제63호(소위 63법)와 ‘타이완총독부 조례’를 통해 식민지 경영의 원형을 만들었다.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을 보호국화 하는 과정에서 타이완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다. 아리가 나가오(有賀長雄) 와세다대 교수는 세계 각국의 각종 보호국이 탄생한 경위와 배경을 유형별로 분석한 『보호국론』이란 국제법 저서를 출간하여 일본 정부의 식민지 경영 정책 수행을 도왔다.
을사늑약으로 조선으로부터 외교권과 국방권을 강탈한 일본은 조선 통치를 위해 통감부를 설치했다. 통감부 설치 과정에서 통감부를 외무성 소속이 아니라 천황 직속으로 뒀고, 문관인 통감이 주차군에 대해 명령권을 갖도록 했다. 통감을 내각 산하가 아니라 천황 직속으로 소속시켜 군부가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후 조선은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조슈 번(長州藩·야마구치 현) 파벌의 영향 하에 들어갔다.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하여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명성황후 살해의 주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한일합방 당시의 일본 총리 가츠라 다로(桂太郞), 주한 공사를 역임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청일전쟁을 시작하기 직전 경복궁을 공격한 일본군 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 등이 모두 조슈 번 출신이다.
뿐만이 아니다.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도 조슈 번 출신으로, 1916년 10월 자신이 일본 총리로 취임하면서 후임으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추천했다.  하세가와도 조슈 번의 무사 출신으로 전형적인 야전 군인인데, 인물의 됨됨이로 볼 때 조선 총독으로 적합한 인물은 아니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데라우치는 일본 육군이 차지한 수확물인 조선을 다른 파벌에게 내주고 싶지 않아 그를 추천했다.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거쳐 데라우치, 하세가와로 이어지는 면면을 보면 조선은 조슈 번 출신들의 전리품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도 합방에 이르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을 끈 이유는 구미 열강, 특히 미국의 압력 때문이다. 미국은 러시아가 만주에 10만 대군을 파견하여 중국의 이권을 침해하려 하자 일본 중시 정책을 펼쳤다. 그런 미국의 의도가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표출되었는데, 미국은 일본이 러시아의 동진정책을 막아내는 데 대한 대가로 일본의 한국 점령을 묵인한 것이다.
그런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만주를 독점하려 하자 미국의 문호개방(시장개방 정책)과 충돌하면서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1909년 3월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 대통령에 오른 윌리엄 태프트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체결한 당사자로서, 동아시아에서 전임자 루스벨트의 일본 중시 정책을 계승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태프트가 일본의 만주 이권 독점에 정면으로 맞서자 영국도 반일(反日) 기조로 돌아섰다. 

일본, 조선에서 군정 실시하기로 결정

미국은 1909년 12월 만주철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하고 구미 열강이 공동으로 일본의 만주 이권 독점을 억제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은 만주 문제를 둘러싸고 열강들과 적이 될 경우 아직 보호국 상태에 불과한 대한제국을 다시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1910년 8월에 서둘러 한일합방을 추진했다.
1910년 5월 30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육군대신이 제3대 한국통감으로 임명됐다. 6월 3일 열린 각의는 한국 병합 방침을 심의하고 “조선에는 당분간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에 의해 이를 통치한다”는 등 13개조를 결정했다. 말하자면 조선에서는 군정을 실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헌법을 시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천황의 대권을 통한 통치가 이뤄지면 조선은 일본의 군부통치기 실시되어 제국 의회는 관여할 수 없게 된다. 데라우치는 한국 주차군을 서울에 집중시킨 다음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조약 조인식을 가졌다. 이 조약은 8월 29일 양국의 『관보』(官報)를 통해 동시 공포되었다.
청국의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일간신문 ‘신보(申報)’는 9월 1일, “아아, 한국이 멸망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러일전쟁을 미화한 『전운여록』(戰雲餘錄)을 쓴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는 9월 9일 ‘지도 위 조선국에 검게 먹을 칠하며 추풍(秋風)을 듣는다’는 시를 발표했다. 조선(대한제국)은 그렇게 허망하게 패망했다.
1910년 8월 22일. 막바지 더위에 시달려 몸과 마음도 늘어졌던 그날, 서울 한복판에서는 한일합병조약 체결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 측 수석대표인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오늘의 국무총리)과 일본 측 수석대표인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게가 체결한 조약문의 서두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한국을 일본국에 합병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여 두 나라 사이에 합병조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모두 8조로 구성된 조약 내용 중 제1조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는 것이고, 제2조는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에 기재된 “넘겨준다(讓與)”고 지적한 것을 수락하는 동시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고 되어 있다.
이날 이완용이 체결한 한일합병조약으로 대한제국, 즉 조선은 통치권을 ‘완전히, 영구히’ 일본에 넘겨줌으로써 태조 이성계의 창업으로 시작된 조선왕조 519년 역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1주일 후인 8월 29일, 이른바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날 순종(純宗)은 일본 황제에게 통치권을 양도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짐이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황제가 된 이후 오늘까지 정사 혁신에 대해 애쓰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허약한 것이 고질이 되고 영락이 극도에 이르러 짧은 시일 안에 회복시킬 대책을 세울 가망이 없게 되었다. 짐이 결연히 반성하고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이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해 오던 대일본(大日本) 황제 폐하에게 넘겨 밖으로는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는 8도의 백성을 보전하게 하는 바이다.
너희들 높고 낮은 관리들과 백성들은 나라의 형세와 현재 조건을 깊이 살펴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자기 직업에 안착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도록 하라. 오늘의 조치는 너희들 민중을 잊어서가 아니라 민중을 구원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관리와 백성들은 나의 뜻을 몸으로 느낄 것이다.”
                                                                  
잘 나가던 일본이 패망한 이유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글로벌 패권국인 영국, 미국과 해양동맹을 맺고 국가운영을 하여 빛나는 성장을 구가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강국 반열에 오르자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익선 영역이었던 조선이 식민지화되어 주권선에 포함되자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선을 만주, 중국까지 확대하려 시도한다.
이 와중에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분리시킨 다음 ‘만주국’이라는 일본의 괴뢰국가를 탄생시켰다. 국제연맹이 이에 제동을 걸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여 미국․영국 중심의 해양세력과 적대하며 독일․이탈리아와 추축국 동맹(대륙동맹) 결성하고 패권국에 맞서다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일본이 미국과 적대하는 외교정책으로 돌아섰을 때 이승만은 줄기차게 미국 중시 외교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저술한 『한국교회 핍박』을 통해 미국의 리더들에게 “일본은 기독교 탄압하는 귀신의 나라”로 공격하고, 기독교 국가를 지향하는 한국을 일본의 압제로부터 구출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기독교인친한회, 한미협회 설립하여 한국 지지하는 우호적인 인사를 네트워킹하여 미국 정책당국에 한국 독립을 위한 청원운동을 벌인다. 이러한 이승만의 미국과 손잡는 외교독립운동의 결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에는 6.25 남침을 막아내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비로소 세계사의 주류 세력과 동맹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김일성이 세운 북한과 이승만이 세운 북한은 문명사적으로 결정적인 단층이 형성되었다. 김일성의 북한은 대륙과의 동맹, 이승만의 대한민국은 해양과의 동맹을 추구한 결과 천지개벽의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김일성은 세계사의 비주류 세력인 소련, 중공과 대륙동맹을 맺은 것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조선 외교의 복제판이 되었다. 반면에 이승만은 세계사 주류 세력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 통해 해양동맹을 체결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토대로 한 번영과 개인의 자유, 사유재산 보호를 받는 문명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소련, 중국과의 대륙동맹은 세계사의 비주류 세력과 한 배 타기로서 멸망으로 향하는 폭주기관차다. 그 폭주기관차의 종착역은 세습왕조체제, 폐쇄와 쇄국, 공동체 우선,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실패 국가다.
반면에 해양동맹은 세계사의 주류세력과의 합종연횡으로서 번영 부강의 길이다. 그 종착역은 개방․교류․자유․민주․사유재산 보호․천부인권을 누리는 산업화, 민주화 된 사회다. 조선왕조의 완벽한 복원인 북한은 문명사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고 있는가?

[윤덕명]

엄청난 분량의 강의안을 올리기 위하여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 열정, 열의, 열심, 열중으로 국태민안이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