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전 안중식 心田 安中植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심전 안중식 心田 安中植
https://blog.naver.com/hjjang23/223377111598
녹전 ・ 2024. 3. 8. 13:58
안중식(安中植, 1861년 8월 28일 - 1919년 11월 2일)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의 화가로, 본관은 순흥, 호는 심전(心田)이다.
도화서 출신인 그는 양천군수와 통진군수를 지냈으며, 1881년에 조석진과 함께 관비생으로 중국 유학을 다녀왔다. 고종 순종의 어진을 그렸으며 이후 1911년에 소림 조석진과 함께 조선서화미술회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1918년에 서화협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지냈다.
오원 장승업에게 그림을 배운 그는 산수와 인물, 화조를 잘 그렸으며, 시와 서예에도 능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 《산수도》와 《군작도》, 《백악춘효도》, 《도원문진도》, 《성재수간도》, 《영광풍경》 등이 있다.
그의 제자로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춘곡 고희동, 한국 최초로 1컷짜리 시사만화를 그렸던 관제 이도영, 한국화단에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조중현 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한 이당 김은호,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동아일보에 게재했던 청전 이상범, 겸재 정선 이후 최고의 진경산수화가라는 소정 변관식, 스승인 심전心田의 아호에서 心자를 하사 받은 심산 노수현 등 서화미술회에서 소림 조석진과 함께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한국화단의 맥을 탄탄하게 이어준 핵심적인 화가이다.
33인 중의 위창 오세창과 우당 권동진이 3월2일까지도 집에 놀러올 정도로 민족대표들과 가까이 지냈던 심전은 3.1 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함께 참여한 동료 제자들을 밝히라고 고문을 받아 1919년 11월 2일(음력 9월 10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병사하였다고 한다.
<⟨도원문진도(桃園問津圖)⟩>
1.
안중식(安中植)(1861~1919)이 1913년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주제로 그린 대표적인 청록산수화. 이 작품은 두목(杜牧)의 「산행(山行)」이라는 문학작품을 그린 「풍림정거도(楓林停車圖)」와 세트로 제작된 관념산수화이다. ‘도원문진(桃源問津)’이라는 제목은 호남성(湖南省) 무릉에서 어부가 도원으로 갈 수 있었던 계곡 입구를 묻는다는 의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심전 안중식은 양화 물결이 들어올 때 영향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물론 소림 조석진(1853~1920)도 양화 물결을 받았을 텐데 의외로 소림에게서는 그런 요소가 덜 발견됩니다. 안심전이가 그런 점에서는 소림보다 좀 더 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안심전 그림은 대폭의 좋은 그림이 꽤 다닙니다. 특히 청록산수가 아주 좋습니다. 호암미술관에 있는 견본 채색의 청록산수를 예로 들겠습니다. ⟨도원문진도⟩는 아주 전형적인 청록산수입니다. 1913년에 그린 그림이니까 말년 그림인데 아주 좋습니다.
-이동주,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시공사, 1996 초판 1쇄, 1999 5쇄), 325쪽
3.
안중식의 회화세계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주로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보수적 성향을 띠었다. 그가 근대 문화를 많이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특이한 모습이다. 동시기 다른 이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안중식은 조선 후기에 발전한 남종문인화 전통을 따르면서도 채색위주의 청록산수도 많이 그렸다는 점 정도이다. 대표작 중에 무릉도원을 소재로 한 청록산수 여러 점이 전한다. 이들 작품은 구성이나 시선도 뛰어나고 청록의 채색이나 필력의 자유로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러한 작품은 그가 중국 상해에서 그곳 화가들과 어울리며 습득한 것인데, 상해화파의 여느 화가 못지않은 실력을 보인다. 당시 장승업을 제외한 다른 화가들은 거의 구사하지 못한 북종화풍의 산수화를 살려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황정수,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_북촌편⟫, (푸른역사, 2022), 31쪽
4.
안중식이 재현한 무릉도원은 그 색채가 화려하여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라 하겠습니다. 푸른빛으로 솟구쳐 초현실주의마저 엿보게 하는 빛나는 산의 양감과 비상이, 우선 비현실성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푸른 산은 무리지어 서로 엉키고 타고 오르며 점차 노란빛의 정상을 형상합니다. 이처럼 겹겹 치솟은 산의 동세와 역동적 선묘의 깊이가 무궁무진한 변화를 생성합니다. 특히나 산의 타오름은 고원법으로, 일엽편주 가는 대로 몸을 맡긴 사공이 기웃하는 도원의 입구는 부감법으로 처리하여 화면에 깊이와 폭을 더합니다. 치솟는 산의 역동성과 잔잔하게 흐르는 물의 안정감이 대비됨으로써 상단부의 비상과 하단부의 안정감이 전체적인 조화를 나타낸다는 것이지요.
도원의 입구에 찬란하게 환상적으로 채색된 도화의 눈부심은 어떤 극치로 다가오는데, 과연 안중식의 치밀한 묘사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라 하겠지요. 눈부신 붓 놀림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 착각마저 일게 합니다. 배에 몸을 맡긴 채 도원의 입구에 호기심으로 기웃하는 사공은 괴이하게 여겨 숲이 다하는 곳까지 나아가고자 합니다. 안중식은 바로 그 순간의 야릇함을 즉물적으로 처리한 것이지요. 이 기이하면서도 찬란한 광경에 사공은 유구무언입니다. 안견이 가로 독법이라면, 안중식은 세로 독법으로 도원의 감추어진 비경을 처리하였습니다.
[출처]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_⟨도원문진도(桃園問津圖)⟩>|작성자 이동현 이북도민작가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의 작품세계 Ⅰ
조선시대 최후화가, 근대한국화 가교 心田 安中植
조선 말과 근대 초기에 조석진과 함께 전통시대의 화법을 근대에 전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중국화를 주로 모방했던 장승업의 화풍을 배웠고 서화미술회강습소를 개설하여 이상범·노수현·김은호와 같은 근대화가 등 후학을 길러 냈으며 서화협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본관 순흥(順興). 호 심전(心田). 벼슬은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을 거쳐 양천(陽川)·통진(通津) 군수를 지냈다. 일찍이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과 함께 관비생으로 중국에 유학했으며 1918년 서화협회를 조직, 회장이 되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산수·인물·화조(花鳥)를 잘 그렸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시(詩)에도 능한 문인화가이기고 하다.
주요작품으로는 천보구여도(天保九如圖), 낙지론도(樂志論圖), 산수도(山水圖), 성재수간도(聲在樹間圖), 군작도(群雀圖) 등이 있다.
안중식의 아명은 종식(鍾植)이고 별명이 욱상(昱相)이었으며, 심전(心田) 이외에도 심전경부(心田耕夫), 경묵도인(耕墨道人), 말년에 불불옹(不不翁) 이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조석진과 함께 개화파인 김윤식(金允植)이 이끄는 영선사(領選使)의 제도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텐진(天津)에 다녀 왔다. 이때 서구의 과학적인 소묘법을 익혔고 서양문명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 가담하여 일본으로 피난한 적도 있고, 그 후 상해로 건너가 그곳의 서화가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국내외를 다니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안목을 넓혔으며, 정치적인 면에서도 근대적 입장을 지녔다.
그는 장승업에 이어 산수, 인물, 화조, 영모(翎毛) 등 모든 유형의 그림을 그렸다. 고종과 황태자의 초상화 제작에 발탁되여 궁중화가로서 궁중의 그림을 도맡아 그렸으며, 그의 작품중 중국의 고사나 화보를 탈피하지 못한 그림도 많지만, 조석진과 함께 근대 화단을 연 화가로 주목받고 있다.
[참고문헌]
近代韓國美術家論攷(李慶成, 一志社, 1974)
韓國近代美術硏究(李慶成, 同和出版公社, 1975)
韓國現代美術史―東洋畵―(李龜烈, 國立現代美術館, 1976)
書畵百年(金殷鎬, 中央日報社, 1977)
韓國現代美術史(吳光洙, 悅話堂, 1979)
小琳과 心田의 生涯와 그들의 藝術(李龜烈, 澗松文華 14, 韓國民族美術硏究所, 1978)
도원문진(桃園問津) 1913. 비단에 채색 각 164.4cm X 70,4cm 호암미술관
도원행주도(桃園行舟圖) 춘경산수도
중국 진대(晋代)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를 바탕으로 한 "무릉도원'을 그린 것으로 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가다가 길을 잃어 복숭아곷이 만발한 별천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이다. 고사의 내용에 걸맞게 높은 산세와 기이고 복잡한 산수의 모습을 녹색과 분홍색을 사용하여 환상적인 이상향을 만들어 냈다.
그의 작품은 스승인 장승업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여 중국화를 모방한 관념적 청록산수(靑綠山水)나 고사인물도가 주류를 이루었고 "도원문진도(桃源問津圖)"와 같은 관념산수에서는 과장된 산의 형태를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강렬한 청록의 색채를 사용하는 등의 특징을 드러냈다.
후기에는 드물게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 1915)"나 "영광풍경"과 같은 실경산수를 남겼으며 특히 "백악춘효도"에서는 부분적으로 투시원근법이나 명암법을 적용하여 조형관의 변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풍림정거 1913. 비단에 채색 각 164.4cm X 70,4cm 호암미술관
늦가을이다 온 산이 서리가 덮여 하얀데 절정을 향해 타오르는 단풍잎은 붉다 못해 핏빛이다. 이 절정이 끄나고나면 온 천지는죽음과 같은 겨울의 정적 속으로 잠길 것이다. 마
지막을 장식하는 단풍나무의 색깔은 화려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하다. 서리가 덮여 은색 색조가 감도는 암산은 심하게 각이 지고 꺽여 장업산 산세를 드러낸다.
'단풍나무 및에서 수레를 멈춘다'는 뜻의 <풍림정거>는 당나라 때 시인 두보(803 ~852)의 <산행시>를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도원문진>과 짝을 이뤄 제작한 작품으로 크기가 똑 같다.
안중식이 그린 ‘백악산의 봄날 새벽’
똑같은 "백악춘효도"를 두 점 그렸는데, 이 작품은 광화문이 일제에 의해 헐리기 이전 경복궁을 그린 것으로,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의 모습과 비교되어 새로운 감회를 불러 일으킨다. 이 그림이 그려지고 난 2년 후 광화문은 옮겨지고 일제의 총독부 건물이 들어섰다. 따라서 원래 경복궁의 모양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잘 닦인 길이 있고, 그 뒤에 광화문과 경복궁의 모습이 보이며, 뒤로는 북악산과 북한산이 있다. 인왕산은 미점으로 산골을 표시하고, 멀리 북한산을 담묵으로 처리하였다. 연운(煙雲)에 싸인 경복궁은 처마의 모습이 날렵하고 구중궁궐답게 수목에 가리워 내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백안춘효도(여름)(白岳春曉圖) 백안춘효도(가을)(白岳春曉圖)
안중식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 1915 견본담채125.9cm x 51.5cm,국립중앙박물관,
백안춘효도(여름)(白岳春曉圖) 1915 견본담채125.9cm x 51.5cm,국립중앙박물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안중식이 그린 두 점의 <백악춘효도 白岳春曉圖>가 있다. 글자의 모양을 달리하여 두 작품에 모두 “백악춘효”의 제목이 예서체로 써 있으며, 한 폭(이하 여름본)에는 “을묘하일심전사(乙卯夏日心田寫)”, 다른 폭(이하 가을본)에는 “을묘추일심전안중식(乙卯秋日心田安中植)”이 묵서되어 있다
화가 안중식은 누구인가?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은 성균관 생원을 지낸 안홍구(1810~1873)의 5남5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숙부, 사촌 형제들은 무과에 합격하여 부호군, 현감, 수문장과 같은 벼슬을 지낸 무관 집안이었다.
그의 족보상 본명은 종식(鍾植)이고 자는 공립(公立)이었으며 욱상(昱相, 旭相)의 이름을 1896년까지 사용하다가, 이후 중식(中植)을 주로 썼다. 호는 심전(心顚, 心筌, 心田)을 애용하였으나, 경묵용자(耕墨傭者), 묵용(墨傭), 경묵도인(耕墨道人), 부부옹(不不翁), 불이자(不二子), 심전거사(心田居士), 심전경부(心田耕夫, 心田畊夫)의 별호도 있다.
안중식이 화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공식적인 기록은 1881년 그의 나이 20세부터이다. 이 해 9월 26일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 이끄는 영선사(領選使)의 일행으로 조석진과 함께 중국 천지에 제도사로 파견되어 각종 기계의 구조와 제도, 서양문자를 배우는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서화미술회 바탕으로 근현대 예술가 양성
귀국 후 기계국, 우정국에서 일하기도 하였으며 1891년 30세에는 중국 상해 등지를 여행하며 시야를 넓혔다. 지평현감, 안산군수를 거쳐 2년간 중국과 일본에 머무르며 화가로 활동하였다.
1901년에는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을 열어 이도영(李道榮 1884~1933)을 첫 제자로 받아 교육하였으며 1902년 41세에는 조석진(趙錫晋 1853~1920)과 함께 주관화사로 선발되어 고종 어진과 후의 순종 예진을 봉사하였다. 이 공으로 통진 군수를 지냈으며 이후 1907년 양천 군수의 관직을 마지막으로 1919년 타계할 때까지 서화활동에 전념하였다.
안중식은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서화미술회를 터전으로 근현대의 주요 예술가를 양성하였다. 1918년에는 조석진, 오세창, 김규진, 정대유, 현채, 강진희, 김응원, 강필주, 이도영, 고희동 등과 함께 서화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다.
안중식의 백악춘효도 여름본과 가을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안중식이 그린 두 점의 <백악춘효도 白岳春曉圖>가 있다. 글자의 모양을 달리하여 두 작품에 모두 “백악춘효”의 제목이 예서체로 써 있으며, 한 폭(이하 여름본)에는 “을묘하일심전사(乙卯夏日心田寫)”, 다른 폭(이하 가을본)에는 “을묘추일심전안중식(乙卯秋日心田安中植)”이 묵서되어 있다.
두 작품 모두 “백악춘효” 즉 백악산의 봄날 새벽이라는 화제로 1915년에 제작되었으나 각각 여름과 가을의 경치를 담고 있는 차이가 있다. 두 작품 모두 굳게 닫힌 광화문 뒤로 경복궁의 건물들이 보이고 백악산의 산기슭이 안개에 쌓인 채 웅장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광화문 앞 광장에는 해태상만 있을 뿐 인적 없이 고요하다.
두 작품의 해태상을 비교하면 여름본에는 근경 양쪽에 해태상이 위치해 있으나 가을본에는 오른쪽의 해태상이 나무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 경관을 바라보는 시점도 서로 달라 여름본은 북악산을 중앙에 두고 광화문의 중심축이 북악산의 정상을 지나가도록 배치하였다.
그러나 가을본은 시점이 오른쪽으로 이동되어 광화문의 중심축과 북악산의 정상이 서로 비껴가도록 그려졌다. 결과적으로 북악산 옆으로 북한산 봉우리들이 비중 있게 등장하게 되었으나 여름본에서 볼 수 있는 집중력은 약화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안중식의 수호 상징인 해태상
광화문 광장의 서운(瑞雲)을 비교해 보면 여름본에서는 서운이 부드럽게 타원형을 이루며 북악산 기슭의 안개와 조응하고 있으나 가을본에서는 서운의 시종이 명확하지 않고 오히려 오른쪽의 해태상을 가리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이구열 선생은 국망(國亡)의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안중식이 수호의 상징인 해태상을 고의로 안개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게 그렸다고 해석하였다.
또한 이구열 선생은 여름본은 왕실 소장품이고 가을본은 1915년 일제 시정 5주년 기념 공진회에 출품되었던 것으로 ‘백악의 봄날 새벽이 다시 오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백악춘효”의 화제를 썼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렇다면 이 작품들은 1915년 당시의 경복궁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일까? 조선총독부는 1915년에 일제 시정 5주년을 기념하는 공진회를 개최한다는 이유로 경복궁 안의 많은 전각들을 해체하고 건물 여러 채를 새로 지었다.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2월 4일자에 공진회장 설계 내용이 보도되고 8월 20일자에는 공진회장 내에 미술관 개관 내용이, 이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전시 내용이 보도되었다. 특히 9월 3일자에는 공진회장 안내도가 실려 있어서 경복궁의 모습이 안중식의 <백악춘효도>와는 매우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안중식이 그림들을 그렸을 1915년 여름과 가을에는 이미 공진회장의 여러 건물들이 공사 중이거나 완공된 상태였기 때문에 두 점의 <백악춘효>는 실제와는 다른 경관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김선화 기자/ 뉴스 한국]
시서화를 겸전한 조선의 마지막 문인화가 안중식
안중식은 1861년 8월 28일 서울에서 성균관 생원을 지낸 진사 안홍술의 5남 5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열세 살 때 부모를 여의었다. 그의 본명은 종식이고 중년 때 중식으로 사용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과 그림에 흥미와 재능을 나타냈는데 1906~07년 그에게서 묵화를 배운 고희동은 스승에 관해 “유시부터 그림에 조예가 깊어서 자연히 일가를 성하였다”고 했다.
그는 당시 명성을 떨치던 장승업에게서 많은 감화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안중식의 신선도, 노안도, 기명절지 등에서 장승업의 화풍이 보인다.
그는 장승업을 직접 찾아간 적도 있다. 이 시기에 조선 화단은 중국 화풍 추종과 창의성 없는 산수도, 신선도, 화조도 등에 머물고 있었고 당대의 거장 장승업의 신선도와 고사 인물도에서도 중국 화풍의 방작이 발견된다. 1910년대 이전의 안중식 작품 역시 관념적 전통 기법과 형식적 화제로 한정되어 있었다.
장승업이 타계하고 서울 화단에서는 조석진과 안중식이 가장 부각된 존재가 되었다. 안중식은 1891년 중국을 여행하면서 상해 등지에서 중국 서화가와 교류했으며 1899년 세 번째 중국을 여행한 후 일본으로 가 경도와 기부 등지에서 2년 동안 체류했다.
1906년에는 민족자존을 위한 대한자강회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으며 이듬해에 어린이용 교과서 『유년필독』을 편찬했다. 그는 자신의 안일을 위해 나중에 친일파 거두가 된 이완용에게 아부하며 <붕새 鵬鳥>를 그려 그에게 바치는 비열함을 보였다.
운필이 호방하고 대범하게 발휘된 걸작이다. 바다 한가운데 솟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며 넘실거리는 파도와 물거품은 속도감이 느껴진다. 바위 위에 위풍당당하게 올라서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붕새를 힘찬 필치와 먹색의 강한 농담으로 묘사하면서 파필破筆과 파묵破墨의 파격적으로 병용했다. 날개짓 하려는 몸짓과 예리한 눈초리와 부리의 묘사 그리고 발톱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상단에 충분한 공간을 둔 것은 붕새가 곧 날게 될 전설의 9만리장천을 배경삼은 것이다. 장자의 <소요유편 逍遙遊篇>에 등장하는 붕새는 북해에 살던 곤鯤이라는 물고기의 변신으로 한 번 날개를 치면 대번에 9만리를 날아간다는 상상의 큰 새이다.
화가의 낙관은 없지만 필치의 특출한 역량으로 안중식의 작품이 분명하다. 화가가 낙관을 하지 못한 것은 이 그림이 임금의 하사품용으로 의뢰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학부대신이었던 이재곤이 칙명을 받들어 화면 위의 공간에 써서 밝힌 대로 이 작품은 고종황제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하사하도록 그려진 것으로 최대로 축복을 담은 제시를 이재곤이 써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2년 뒤 한일합방이라는 매국의 주요 역할을 하게 되는 이완용을 어이없게도 붕새로 비긴 제시는 이런 내용이다.
만리 천공을 빨리 날아 운구雲衢(벼슬길)에서 빙빙 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 대다수는 1910년대에 그려진 것이며 화면에 적힌 행서체의 제시로서 그가 한시에 정통했고 서예가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산수화에서 청록색 기법과 선명하게 현실감을 강조한 채색부여의 독자풍은 여러 형태로 자유롭게 전개되는데, 부분적으로 수묵담채의 표현과 조화시키거나 절충시킨 수법이면서 작품에 따라 역점을 달리 하기 때문이다.
<봉래선경 蓬萊僊境>은 ‘신선들이 사는 봉래산의 선경’을 화제로 삼은 그림으로 절승한 경개를 세필로 구사하면서 수묵담채의 기법으로 산령과 암석의 윗부분에만 농담미濃淡美를 조절한 청록색조를 적절히 첨부하여 한결 생생하게 현실감이 돋보이도록 했다.
주봉을 비롯한 모든 산형과 암석 등의 표현은 그의 전형적인 작품에 의한 것이며, 수묵담채 수법으로 시종된 노송은 다른 청록산수화에서 늘 그렇게 도입되는 정형이다. 중경과 근경의 노송 뒤로 흐르게 한 서운의 장식적 곡선은 고전적인 수법이다.
흔히 곁들어지는 선인仙人의 점경點景 혹은 특정 고사의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하단 물가에 거불이가 세 마리 기어 다니고 중경의 서운 부분에 두 마리 학이 나르고 있다.
옛 사람들이 상상한 선경의 봉래산 주제에 어울리게 장생을 상징하는 거북과 학을 조화시켰다.
거북과 학을 곁들인 그의 또 다른 선경산수화로 <귀학장년 龜鶴長年>이 있다.
전서체篆書體로 공들여 쓴 ‘봉래선경’ 화제와 역시 반듯하게 해서체楷書體로 쓴 화가 이름 사이의 비단 바탕이 칼로 오려져 나갔는데, 거기에는 이 그림을 위촉하여 받아간 사람의 이름과 제작경위가 써져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부분이 잘려 나가 화면에 상처가 되었다.
안중식은 시서화詩書畵를 겸전한 조선의 마지막 문인화가였다. 그러나 그와 조석진은 근대에 속한 화가가 못되었고 구태의연한 중국풍 낡은 그림을 그리는 데 그쳤다.
고희동은 훗날 “중국인 화가의 입내 나는 찌끼”라는 말로 두 사람의 전근대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안중식은 1919년 11월 2일 경기도 시흥에서 타계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도원문진(桃源問津) 1913 족자 비단에 채색
164.4 x 70.4 cm 호암미술관
안중식의 처음 이름은 욱상(昱相)이었으며. 호는 심전(心田). 만년에는 불불옹(不不翁)이라고도 했다. 도화서화원(圖畵署 畵員) 출신으로 양천(陽川). 통진(通津) 군수를 지냈으며.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예서(隸書)등의 글씨에 뛰어났고 .산수. 인물. 화조 그림에 능했던 구한말의 대표적 명가(名家)이다.
일찍이 조석진(趙錫晋)과 함께 관비생(官費生)으로 중국에 유학(遊學)했으며. 1918년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조직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니.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등이 그의 문도(門徒)였다.
1913년 그린 이 작품은 원래 사계산수 중의 한 폭이었으나. 춘추 두폭만이 알려져 있다. 설채(設彩)도 청록산수법(靑綠山水法)을 써서 밝고 화려하지만 매우 갓맑은 감흥도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산수법에서 언뜻 느끼는 것은 조선시대 궁중 장벽화(障壁畵)의 인상이라고 할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러한 그림에도 익숙하던 안중식의 솜씨속에 살아 있는 그의 남종화(南宗畵)적인 교양이 조화 반영된 까닭인지도 모른다.
안견 이래로 즐겨 그려졌던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園記)를 주제로 하였다. 안중식 특유의 각이 지고 심하게 주름이 잡힌 산이 겹겹이 포개져 올라가고, 청록색의 장식적이고 화려한 채색이 궁중의 벽을 장식하는 장식화로서의 면모를 가늠케 한다. 전경에는 진한 채색을 쓰고 원경에는 연한 채색을 써서 원근감을 나타내었으며, 청록색 바탕 위에 무수히 많은 태점을 찍어 화려함을 더했다.
안중식 한일통상조약기념연회도(1883년)
53.9cm x 35.5cm /숭전대박물관 소장
1883년 안중식이 그린 ‘조일통상장정 기념 연회도’.조선과 일본의 통상 교섭 후의 연회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서양음식과 식기,조선 화병 등이 놓여 있는 모양이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중식의 작품인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기념 연회도’엔 서양음식이 등장한다. 조선 관리 몇 사람과 일본 사람, 서구적 풍모의 인물들이 사각 식탁에 둘러앉아 있다. 각자 앞엔 접시와 나이프·스푼 등 서양식기가 세팅돼 있고, 상 중앙엔 꽃을 담은 조선꽃병이 서양식 촛대와 함께 놓여 있다. 마치 양복 입고 갓 쓴 어색함이 가득해 절로 웃음이 터진다.
이 그림은 1883년(고종 20) 6월22일 조선측 전권대신인 민영복과 일본측 전권대신인 다케조에 신이치 사이에 조인된 조일통상장정 조인식을 끝낸 뒤 있었던 연회를 그린 것이다. 재미 있는 것은 자리 배치인데, 양 협상 당사자가 마주 앉지 않고 상석에 앉은 민영목 오른쪽으로 다케조에가 아랫사람 입장에서 앉아 있는 모습이다.
|